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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땅 덩어리에서 70억 명의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190여 개의 국가들은 각각의 정치 체계와 사상을 바탕으로 돌아갑니다.
그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
수많은 불규칙성 속에서도 우리는 가끔..
이 모든 세계가 보이지 않는 톱니바퀴로 맞물려
일괄적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한 때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그 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긔..' 시리즈가
'세계'라는 거시적 측면에서도 가끔... 아주 가끔 일어납니다.
1968년.. 그 날은 참 이상한 한 해였습니다.
이제껏 세계 혁명은 단 둘 뿐이었다.
하나는 1848년에, 그리고 또 하나는 1968년에 일어났다.
둘 다 역사적으로 실패로 끝났지만, 들 다 세계를 바꾸어 놓았다.
1848년 유럽의 뒤흔들었던 혁명이야 그렇다쳐도,
대체.. 1968년, 40년도 채 되지 않은 그 시기에는 무슨 일이 일어 났을까요
수많은 날 들 중 하나일 뿐인 그 날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이유.. 무엇일까요
그 한 해에 일어났던 사건들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1968년의 그 때를 관통하는 단 한 문장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한 꿈을 꾸어라"
프랑스는 그야말로 혁명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혁명'의 개념이 최초로 일어난 국가는 프랑스가 아닌
영국의 청교도 혁명이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은 1789년 7월 18일 프랑스에서 일어났죠.
세계 최초로 좌파와 우파란 말을 탄생시킨 프랑스 혁명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나폴레옹의 군사정치로 막을 내렸지만
평민들이 주축이 되어 왕정 체제를 붕괴시킨 이들의 급진적인 행동은 수많은 나라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전 세계에 어마어마한 폭발력을 행사했던 시기는 18세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200 여 년이 흐른 1968년 5월이었죠
그 날, 프랑스 파리에서 그들이 보여준 놀라운 '힘'은 전 세계인들의 뇌리 속에
1968년 한 해를 세계 역사상 가장 뜨겁고 격정적인 잊을 수 없는 한 해로 기억되게 해 주었습니다.
뜨겁디 뜨거웠던 그 날의 시작은 프랑스가 아닌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 에서 일어났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역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나라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에 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들로부터 독립하고 나서 스위스 동쪽의 유일한 민주 국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힘없이 독일의 나치즘에 짓밟히고 민주 국가는 붕괴되고 말죠.
1945년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체코 국민들이 그토록 증오하던 나치즘, 파시즘에서 벗어나게 해준 스탈린의 '붉은 깃발'을 그들은 열렬히 환영합니다.
기존의 체코 내에 존재하던 공산당이 국민들의 가장 큰 지지를 얻고 있었던 것도 소련을 환영한 이유 중 하나였죠.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일당 독제체제와 관료주의에 의한 권력 집중, 언론의 통제,
국민들의 자유와 권리의 억압 등 무자비한 공산주의 정책에 체코 국민들은 염증을 느끼고 불만은 고조되어 갑니다.
체코의 국민들은 결코 '힘의 권력'에 맥없이 굴복하는 나약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통합을 꿈꾸는 지식인들이 지하에서부터 서서히 세력을 통합해나가고 있었고,
1967년 가을 프라하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는 이들을 본격적으로 땅 위로 올라오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1967년 10월, 한 대학 기숙사의 열악한 시설에 대해 항의한 소규모 학생 시위가
체코슬로바키아의 그 모든 것을 뒤바꾸어 버릴 엄청난 사건의 발단이 될 줄 그 땐 그 누구도 몰랐습니다.
학생 시위에 체코 당국은 경찰을 동원해 무자비한 제압과
시위에 대한 보도를 일체 차단하는 등의 언론 왜곡과 탄압을 자행합니다.
점차 국민들이 '사회주의'에 회의를 느끼던 찰나에 발생한
무력 시위 진압 행태는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체코 국민들은 '인간을 위한 사회주의' 라는 허울만 좋은 슬로건의 심각한 모순을 느끼게 됩니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세상이 '변혁'이란 단어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습니다.
시위는 급속도로 체코 전지역으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정부의 신뢰와 지지도는 급격히 무너져갔고,
마침내 1968년 1월, 두브체크를 서기장으로 개혁주의자들이 공산당의 통제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보수주의자들의 극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회 개혁'을 시도했죠.
체코 국민들의 열기는 엄청났습니다.
그에 발맞춰 두브체크의 정책 역시 급진적이었습니다.
강경노선의 경찰총장과 내무부장관은 학생 시위 탄압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면서 체코의 정책은 극단적인 개혁으로 변합니다.
개혁파는 결코 인권을 유린하지 않았고, 언론을 왜곡하지 않았으며, 일당 독제체제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체코 국민들은 이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토론 프로그램을 자유롭게 시청할 수 있었고,
'숙청'의 대상이었던 정치적 논쟁도 체코 시내 어디에서든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금지되었던 해외 여행도 자유스러워졌으며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실시했습니다.
사전 검열제는 폐지되어 예술은 존중을 받았고,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부활했으며
의회에서는 '발전적인 토론' 이 이루어지는 믿을 수 없는 현상들이 일어나며 꿈의 나라, 유토피아가 실현된 듯 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진정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프라하의 봄 이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역사상 가장 낭만적이고 위대했던 '프라하의 봄' 이 일어난 무렵,
세계 정세는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습니다.
냉전 체제는 일시적으로 잠잠해진 이 와중에 터진 이해할 수 없는 사건 때문이었는데요.
주인공은... 누구였을까요
당연히 얼빠진 나라 미국이었죠..-_-;;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고서는 자신들조차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한심한 모습을 보입니다.
쉽게 제압될 줄 알았던 코찔찔이 땅꼬마 베트남이 사실 알고보니 다윗 이었던 것이죠.
베트남 게릴라들의 피난처였던 빽빽한 밀림의 나무를 제거하기 위해
매년 10억 달러의 어마어마한 비용을 쏟아부으며 고엽제와 제초제를 뿌리지만
베트콩들의 열기와 투쟁은 사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다윗 호치민이 이끈 베트콩들은 지형을 200% 이용하는 지능적인 전략과
기습작전으로 미군의 주둔지였던 남 베트남의 미국 대사관까지 점령하며,
사이공의 미 대사관에 NLF의 깃발을 펄럭이는 위대한 성과까지 올리게 됩니다.
베트콩들의 미 대사관 점거는 2시간만에 제압됐지만 이 사건의 상징성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죠.
누가봐도 명백했던 미군의 열세를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 않았던 그들에게
베트남군의 미국 대사관 점거는... 그들의 '암흑 속 미래' 를 예언한 전주곡 이었습니다.
군사적 열세 속에서 미군이 할 수 있는 일은
더이상 국민들이 배트콩에 가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전에 베트남의 어린 아이들을 죽이는 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말도 안되고 무식한 전쟁에 전 세계의 국민들은 깊은 분노를 느끼며 전쟁 중단을 외치는 반전시위를 전개합니다.
심지어 미국 내에서도 극우 보수주의자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정치인들과 국민들마저 반대했죠.
미 대통령 존슨이 주도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해 1968년 2월에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립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를 일으키고 경찰들의 무력 진압으로 3명이 사망하고 50여명이 부상 당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범세계적인 반전시위 운동은 우리의 이웃 나라 일본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원자력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 가 베트남으로 가는 길 중간에
일본에 잠시 기항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난 것이었죠.
약 4만 7천여명의 시위자들은 미 대사관에 집결했고, 일본 외무성을 점거합니다.
미국은 이같은 일본의 시위 행동을 "핵에 대한 이상반응이다. 이제 일본은 핵 공포증에서 탈출할 필요가 있다" 라는
별 개같지도 않은 소리로 자신들의 전쟁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려 애썼고, 반대 세력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합니다.
반전 시위는 영국 런던에서도 "베트남 군인들에게 승리를" 이란 슬로건을 앞세우며 발생합니다.
'제국주의의 로망' 에 빠져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의 한심하고 무능력한 정책이 전 세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죠.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는
프랑스에 다다르며.. 세계 역사상 유래없이
가장 뜨거웠던 '5월'을 만드는 혁명적인 기폭제 가 됩니다.
5월..
5월은 12개월 속에서도 참 이상한 달 입니다.
1789년 프랑스 왕 루이 16세가 평민 대표들을 포함한 삼부회를 소집해서 '프랑스 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달이 5월이었고,
미국 시카고 경찰이 파업 노동자들을 쏴 죽여 그들을 기리기 위해 국제 노동절이 탄생 되었던 달이 1899년 5월이었습니다.
동아시아의 조그마한 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혁명, 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투쟁의 시작 역시 1980년 5월, 광주였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1968년 5월의 프랑스는 위대했습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68년 5월 혁명의 시작은 너무나 사소했습니다.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조그마한 낭테르 대학이 그 발단지였죠.
낭테르 대학교는 2차 대전 이후 급격히 증가한 학생수들을 커버하기 위해 프랑스 관료들이 만든 대학이었습니다.
애초에 파리 빈민가의 경계 지역에 건립되어서 주변환경이나 대학 시설이 너무나 낙후된 상태였죠.
점차 학생 수는 늘고, 받아 줄 대학은 한정되어 있었고.. 이에 따라 급박하게 지어진 대학교.
무분별하게 계속 학생들을 받다 보니 대학교 정원은 무시되고, 열악한 환경에 교육 방식과 기숙사 규칙은 너무나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불만은 점점 쌓여갔고... 가슴 속에 꾹꾹 눌러야만 했던 강한 반발심이 폭발한 건 역시 베트남 전쟁이었습니다.
낭테르 대학의 급진파 학생 일부가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다가 프랑스 정부에 체포됩니다.
체포된 6명의 시위 학생들의 석방을 위해 낭테르 대학교 사회학과 8명의 학생들은 3월 22일 대학 본부 건물을 점거하게 되죠.
일명 3.22 운동, 혹은 낭테르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후에 '68 혁명'의 위대한 출발점으로 세계인들의 기억에 남게 됩니다.
대학 건물을 점거한 낭테르 학생들은 밤새 그들의 생각과 정책, 베트남 전쟁에 대해 토론하며 쌓아왔던 불만들을 서서히 한 곳으로 집중시킵니다.
비교적 소규모였던 낭테르 대학교 학생 시위가 엄청난 규모로 불어난 건 아이러니 하게도 프랑스 정부 때문이었습니다.
낭테르 학생들의 학교 점거가 계속 되자 프랑스 정부는 아예 학교를 폐쇄하기에 이릅니다.
학생들의 분노는 극도로 치달았고, 더 이상 학교와 정부와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합니다.
이들은 인근 소르본느 대학교의 동료들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낭테르 대학교를 중심으로 했던 학생 시위는 소르본느 대학교로 터를 옮겨 엄청난 열기로 이어집니다.
당시 드골 대통령이 이끌었던 지독한 극우성향의 프랑스 정부는 이러한 학생들의 시위의 원인 조차 몰랐습니다.
"기껏 부모들이 돈 들여서 학교 보냈더니 대가리에 뭐가 들었는지 시위밖에 할 줄 모른다" 며 아예 학생 시위의 원인 자체를 알려고 하지 않았죠.
'개처럼 밟으면 해결된다'는 무식한 정책 사상 아래 급기야 대규모 무장 병력이 침투해 학생 시위대를 진압하기에 이르고,
학생들은 이에 맞서 소르본느 대학교 광장에서 더더욱 강력한 투쟁을 합니다.
더이상 경찰 병력들이 침투하지 못하게 주차된 차들로 길을 막아 바리케이트를 형성하면서..
끝내 시위대는 경찰의 곤봉과 최루탄에 제압되고, 소르본느 대학 역시 폐쇠되죠.
5월 3일에 일어난 대규모 진압 작전 이후, 소르본느 대학이 있던 라탱 지구 전 지역은 경찰들이 배치됩니다.
경찰들은 청바지를 입고 있거나 머리가 길거나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내리 쳐 구타하고, 신분확인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연행하죠.
프랑스 정부의 이러한 만행은 파리 시민, 나아가 프랑스 전 국민들에게 굉장한 충격을 줍니다.
특히나 베이비 붐 세대, 68년의 대학생들이 드골의 권위주의적이고 독단적인 행태에 큰 반감을
갖고 있었던 상태에서 터진 라탱 지구의 무력 시위 진압은 그들을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 들게 했습니다.
5월 6일, 파리 및 전국 20여 개의 도시 3만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정부의 정책과 경찰의 탄압에 맞서 시위에 들어갑니다.
라탱 지구의 경찰 철수와 소르본느 대학의 개방,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그러나 정부는 들은 척도 안하고 도리어 철저한 언론 통제를 자행하며 아예 시위를 없었던 일로 무마하려는 속셈을 보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내의 독립적이고 진보적인 라디오 방송국들에 의해 파리에서 일어나는 참상이 외부로 보도 되고,
프랑스 국민들은 크게 동요하며 거리로 뛰쳐 나오게 됩니다.
매일 약 3~4만 명의 참가자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했고, 이들은 커다란 지지를 얻습니다.
파리 시민의 80%가 학생들의 시위를 지지한다는 여론조사는 이들이 얼마나 드골주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죠.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사람들 중에는 유명한 철학자 사르트르와 장 주네 등도 있었는데요.
사르트르는 당시 63세라는 나이로 인해 학생 시위자들 사이에서 처음에는 '기성세대'로 분류되어 강한 반발을 낳았지만,
예술가 특유의 '글빨'과 마음을 뒤흔드는 연설로 단숨에 수많은 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는 그 유명한 미셸 푸코도 있었습니다. 그는 경찰의 무력진압 과정에서 곤봉에 맞아 뼈가 부러지기도 했죠...
시위 열기는 엄청났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마침내 소르본느 대학을 개방한다고 발표했지만,
이러한 부분적인 타협안이 엄청난 열기로 일어난 시민 봉기를 누그러 뜨릴 수는 없었습니다.
흡사.. 그 옛날 '파리 코뭔'을 연상시키는 위대한 움직임이 68년 5월 프랑스에서 재현되고 있었습니다.
파리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거리에 바리케이트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바리케이트 위에 프랑스 국기의 파랑색과 하얀색을 도려내고 적색만을 남겨놓은 '적기'를 꽂아 올립니다.
파리 시내 곳곳에 형성된 바리케이트 위에서 펄럭이는 적기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은 가슴 속에 커다란 울림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느꼈습니다. "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고..
프랑스 드골 정부는 유일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기를 또다시 총동원 합니다.
대규모의 기동 타격대를 파리 시내에 투입시켜 시위자들을 또다시 잔혹하게 탄압하기에 이르죠.
그들이 휘두르는 곤봉에 시위대들은 코가 으스러지고 다리와 팔이 부러졌습니다.
그들이 던지는 최루탄에 코와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고, 눈에 맞아 실명을 당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뒤로 물러서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들을 뜨거운 결속력으로 묶이게 했는지는 몰랐지만,
그 어느 누구도.. 내 몸과 내 목숨을 아끼기 위해 다른 사람의 등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탄압이 강해지면 강해질 수록 한 발자국 더 앞으로 전진했고,
그들이 던지는 최루탄을 다시 잡아 손바닥 살갗이 벗겨지는 고통 속에서도 다시 그들을 향해 던졌습니다.
자유를 향한 열망과 권위주의 타파 라는 거창한 슬로건은 이미 그들의 머릿 속을 떠난지 오래였습니다.
단지... 몸이 움직이는 대로, 손이 움직이는 대로 행동했고,
내 옆에 나와 함께 손을 맞잡고 있는 동료가 곧 나의 목적이자 삶의 이유였습니다.
신념은 총과 칼보다 위대했으며..
그렇게.. 5월 10일 파리의 격동의 밤은 저물었습니다.
프랑스의 진보적인 신문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프랑스 정부의 언론 통제에도 불구하고 몰래 호외로 파리의 5월 10일 기사로 내보냅니다.
어제의 엄청난 유혈 사태는 바로 오늘, 삽시간에 프랑스 전역으로 퍼지게 됩니다.
그리고.. 5월 13일
드골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지 꼭 10주년이 되는 그 날,
파리에는 믿을 수 없는 인원이 집결합니다.
무려 100만 명..
100만명의 시민들이 파리 시가지로 뛰쳐 나와 항쟁을 합니다.
그들의 눈 앞에서 똑똑히 자행된 경찰의 믿을 수 없는 탄압은 파리 시민들을 크게 동요시켰고,
비로소 그들은 집 안에서 뛰쳐 나와 학생의 항쟁 대열에 가담했습니다.
이미 파리 시민들 쪽으로 완전히 기운듯한 이 분위기에 결정타를 날린 사건은 그 다음 날인 5월 14일에 터집니다.
5월 14일, 파리의 노동자 일부는 혹독한 노동과 너무나 적은 임금에 불만을 품고 학생 시위 대열에 가담합니다.
이같은 노동자의 시위 가담은 엄청난 속도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이윽고 무려 1000만 여 명의 노동자가 시위에 가담해 프랑스의 절반이 시위대로 가득 차게 되죠.
프랑스 경제는 아예 정지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단 1초도 쉬지 않고 쉴 새 없이 들리던 공장의 기계 소리는 그쳤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커다란 난관에 봉착합니다.
사실상 학생들의 시위는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었고, 프랑스 경제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죠.
하지만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는 프랑스 정부에 커다란 위기를 가져다 줍니다.
부랴부랴 프랑스 수상이 나서서 '임금의 파격적인 인상'을 제안하며 폭동을 멈추고 공장으로 돌아오라 말을 하죠.
결국 5월 22일, 노동자들은 정부와 협상하기 위해 학생들과의 연대를 단절했고,
5월 27일, 일명 '그르넬 협약' 이라는 임금안 협상 타결이 체결되며 노동자들의 시위는 6월 5일 최종 중단 됩니다.
순식간에 큰 지지 세력을 잃어버린 파리의 학생 시위대는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갑작스럽게, 격정적으로 타오른 그만큼 시위의 열기는 봉기 때 처럼 삽시간에 사그러들었습니다.
이 틈에 프랑스 정부는 시위대를 잔혹하게 탄압하고, 6월 총선까지 일체 시위를 금지 합니다.
한 때 프랑스 지역의 절반이 시위대에 점령되었을 만큼 엄청난 열기를 자랑하던 '혁명'의 힘은
6월 23일 총선에서 또다시 드골 장군이 승리하며.. 1968년 5월, 프랑스의 뜨거운 한 달은 막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프라하의 봄 에도 위기가 찾아 옵니다.
드부체크의 사회 개혁을 소련은 당연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사회주의 국가는 유고슬라비아 하나만 해도 벅찼기 때문이었죠.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군의 합동 훈련 이라는 명목으로 소련의 군대를 체코슬로바키아에 주둔시킵니다.
하지만 훈련이 끝났음에도 소련군이 체코 내에서 벗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드부체크는 신속히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어쩐지 소련군의 태도는 어물쩡한 반응 뿐이었습니다.
(이 때 소련은 동독,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의 정상 들을 비밀리에 집결시켜 체코슬로바키아를 어떻게 요리할지 긴급정상회담을 하고 있었죠)
체코 국민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나라에 주둔해 있는 소련 군을 보며 왠지 모를 불안한 기운을 느꼈고..
드부체크는 어쩌면 이미 예견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담판을 짓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군과 회담을 요구합니다.
국민들은 회담에 참가하는 협상단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주었습니다.
체코 역사상 이토록 현 정부가, 협상단이 국민들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마침내 1968년 7월 29일, 협상은 진행 되었습니다.
싸움판(이라기 보다는 소련의 일방적인 공격)을 방불케하는 분위기로 인해 긴 시간이 걸리게 되고,
비밀 협상의 결과는 체코에게는 너무나도 불리하고 가혹한 조약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드부체크가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부분은 '언론의 조작' 이었습니다.
소련은 체코의 언론에 대해 반드시 '사전 검열' 을 시행하라고 요구하고, 왜곡을 강요합니다.
민주화의 실현 이라는 이상적인 사회민주주의 국가를 꿈꾸던 체코는 이같은 소련의 요구를 받아 들이지 않았죠.
결국....... 사태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됩니다.
1968년 8월 21일, 소련군은 체코를 침공합니다.
그리고.. 드부체크를 지지하며 거리를 행진하던 학생들을 향해 총구를 하늘에 겨누어
선전 포고식 사격을 하게되고, 이 과정에서 오발로 인해 프라하 시민 1명이 사망합니다.
이윽고 소련군의 병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고 약 50만 명의 군인들이 체코를 장악합니다.
소련의 일명 '체코 진압 작전' 은 탱크까지 동원되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에 이릅니다.
체코의 국민들과 학생들은 분노했습니다.
그토록 바래왔던 민주화의 실현이 다시금 붉은 깃발의 탄압 아래 빼앗길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목숨을 불사하고 그들은 격렬하게 투쟁합니다.
전국적으로 봉기가 일어납니다.
학생들은 화염병을 들고 거대한 탱크 앞에 맞섭니다.
너무나 작고 초라했지만 그들의 정신은 자기 몸의 수십 배의 탱크보다도 크고 위대했습니다.
곳곳에서는 소련의 탄압에 맞서 분신 자살 항쟁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숭고한 넋도 소련의 탱크, 총과 칼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때, 드부체크를 비롯한 체코의 당 지도부 약 20여 명은 모스크바로 강제 출국되기에 이릅니다.
소련이 강제적 협정을 맺기 위해서 자행했던 짓이었죠.
이들은 체코를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국민들에게, 국민을 위해 목소리를 높입니다.
"암흑 속의 현실에서도 결코 냉정함과 책임감을 잃지 말길 바랍니다. 민주화는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라고..
모스크바로 소환된 이들에게 소련 정부는 '친소'적인 성향으로 정부를 개각하고,
체코와 서독 국경에 바르샤바 조약군의 주둔에 동의하라는 요구, 아니 협박을 받습니다.
이같은 요구 중에서 하나라도 이행하지 않는다면 체코 국민들의 묵숨은 그 날로 끝이라는 말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미친 짓꺼리의 협정 앞에서 드부체크는.....
어쩔 수 없이 체코의 공산화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드부체크는 친소 성향의 정부에 의해, 소련당에 의해 권력을 박탈 당하게 되죠.
그렇게... 프라하의 찬란했던 봄은 1년도 지나지 않아 막을 내리게 됩니다.
위대했던 정부, 위대했던 나라, 위대했던 국민들이 이루어 낸 68년 체코의 봄은 비록 너무나 짧았지만,
그들이 보여준 위대했던 그 모든 모습은 파리의 5월과 함께 영원히 1968년의 상징으로 남게 됩니다.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베트남 전쟁과 함께 국제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공산주의권은 이같은 소련의 행위로 인해 분열하게 됩니다.
같은 사회주의 였지만 방향성이 달랐던 티토의 유고와 모택동의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루마니아와 공산주의 동유럽 국가 대부분의 나라들 역시 소련의 행위를 강력하게 비난합니다.
오직 소련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 있던 카스트로의 쿠바만이 소련이 주장하던 체코 침공의 정당화에 동의하죠.
같은 이념을 가진 국가들 사이에서도 격렬한 비난을 피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소련은 거의 '악의 축'이 되어야 상식적으로 맞는 경우일텐데요.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자본주의 국가들 중 소련의 행위를 비난하는 국가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특히 미국은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죠.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사회주의의 새롭고 혁신적인 모델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성장은
자본주의의 축이었던 미국에게는 커다란 위협이었거든요.
이런 개혁적인 사회주의가 자칫 다른 국가들에게 전염된다면 미국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탄압할 때 미국은... 암묵적으로 동의합니다.
이데올로기가 목숨보다도 중요해서 베트남의 무고한 시민들까지 죽여버린
광기의 나라 미국의 이런 태도는 이쯤되면 당연하다고 생각 될 법도 합니다.
온갖 모순의 나라 미국이 언제 한 번 주둥아리와 행동이 맞았던 적이 있나요.
"때때로 한 세대 전체를 마법에 빠뜨리는 특별한 한 해가 있다"
1968년이 중요한 한 해 였던 이유는 프라하의 봄과 파리 5월 혁명 때문 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해 올림픽을 앞 둔 멕시코에서도 1968년의 물결은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당시 멕시코는 1910년 권력을 잡은 제국혁명당의 일당 국가였습니다.
이들 당은 당 명에서 알 수 있듯 처음에는 개혁적이고 좌파 성향의 당이었지만,
권력을 장악하고 점차 세력을 키워가면서, 국민들의 녹을 갉아먹으면서 덩치는 불어나고
이에 반비례로 멕시코 국민들은 극심한 빈곤에 시달립니다.
1968년은 멕시코 정당 부정 부패의 절정을 맞이한 해 였습니다.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수많은 인력들이 경기장 건축과 내부 시설 개선 건축에 혹사당했고,
날로 화려해져 가는 시내의 모습들과는 반대로 빈민가의 생활은 말도 못하게 참혹하고 열악했죠.
멕시코의 봉기는 국민들이 아니라 정부가 '제 발 저리는 격'으로 일어났습니다.
1968년 7월, 쿠바혁명 기념일에 멕시코 청년들은 평화 시위를 하며 멕시코 시티 시내를 행진했죠.
그런데 이 때 갑자기 공수부대가 시위 행렬에 뛰어 들어 곤봉으로 청년 행진대를 가혹하게 제압합니다.
파리 5월 혁명의 엄청난 열기에 지레 겁을 먹고 멕시코 정부가 미리 이들을 철저하게 깔아 뭉겐 것이죠.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멕시코 시민들은 8월 27일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개최합니다.
무려 40만 명의 인파가 몰려 든 시위를 멕시코 정부는 계엄령까지 선포하며 탄압하고,
9월 22일 부터 시작된 폭도 진압 작전은 이윽고 10월 2일, 60명의 사망자를 내며 참혹하게 막을 내립니다.
1968년은 그 유명한 마틴 루터 킹이 흑인 과격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한 한 해이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성난 흑인들은 미국 전역 40개의 도시에서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고,
그 해 멕시코 시티에서 개최된 올림픽 200미터 결승전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
두 미국 흑인 선수는 시상대에서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질 때, 말 없이 주먹을 치켜 들어 올리며 무언의 항의를 했습니다.
전세계로 전파된 멕시코 시티의 올림픽 스타디움 시상식에서 두 선수의 무언의 시위는 전세계인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주게 되죠.
결국 이들은 미국 정부에 의해 '스포츠의 순수함을 위배했다' 는 이유로 다음 날 미국 팀에서 제명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들은 그 유명한 한 마디를 남기고 1968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원히 남게 됩니다.
"우리는 재주 부리는 말이 아니다"
1968년의 겨울은 다가오고, 전 세계 역사상 유래 없는 가장 뜨거웠던 한 해는 막을 내립니다.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보여준 위대한 힘은 드골 장군의 대통령 재 당선으로 막을 내립니다.
적기를 펄럭이던 파리 시내의 수많은 바리케이트들은 철거 되고, 노동자들은 공장으로 돌아갑니다.
멕시코 국민들의 대규모 항쟁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올림픽은 성대한 막 을 올립니다.
위대한 프라하의 봄은 단 1년도 지나지 않아 소련의 붉은 깃발 앞에 무릎 꿇게 됩니다.
1968년의 모든 것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 해의 혁명의 소용돌이가 후대에 남긴 건 결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의 거리 어디에서나 젊은이들은 자유롭게 연인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었고,
피임 도구가 판매되며 프랑스에서 동거는 흔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학교에서도 학생들은 더 이상 교수들에게 '경어'를 사용하며 딱딱한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됐고,
노동자들은 조합을 체계적으로 권리를 확보할 수 있었고, 노동 환경의 혁신적인 개혁이 있었습니다.
깐느 영화제 마저 개최될 수 없었던 1968년을 지난 프랑스의 예술은 더더욱 진보했고,
드골로 대표되는 권위주의는 여전히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의회에서는 민주적, 수평적 대화가 가능했습니다.
(결국 드골은 1969년 국민투표에서 패해 권력에서 퇴진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1968년이 남긴 위대한 업적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여성 권리의 급격한 신장에 있습니다.
미국 애틀랜틱 시티에서 개최된 미스 아메리카 선발 대회에서 최초로 발생한 '여성 운동'이 일어났던 해 가 바로 이 때 였고
본격적으로 여성의 참정권이 논의에 오르고 여성의 사회적 권리가 '심각한 사안'으로 부각된 최초의 해 였습니다.
인도의 이슬람 신도들이 건립한 파키스탄의 독재정권이 학생들의 놀라운 힘에 의해 붕괴된 시기도 1968년 이었죠.
(비록 동 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떨어져 나가고 다시금 독재의 암흑기가 찾아오긴 했지만 말이죠..)
전쟁에 대한 심각한 위험성과 폐단 의식이 고취 되었고, 초 강대국 미국의 모순을 세계가 깨달았습니다.
수많은 사회단체가 창단 되었으며, 본격적으로 환경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던 그 모든 시발점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게 1968년은 어떤 한 해 였을까요.
이러한 세계적인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나라는 철저하게 고립되었습니다.
1968년 새해 정초 부터 청와대로 기습한 김신조 일당의 무장공비 사건으로 국내 정세는 떠들석했고,
박정희 정권의 제 2차 경제개발 계획이 급속도로 추진되고 있었던 시기가 이 때 였습니다.
군사적으로는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며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지원했고,
베트남에 한국의 산업이 진출해 호황을 누리고, 미국의 전쟁특수는 한국의 중요한 외화 획득원이 되었습니다.
월남 파병 후 돌아왔던 군인들에게 전쟁의 참혹함 보단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라며 추켜 세우기 바빴습니다.
극심하게 어려웠던 그 시기 속에서.. 독재의 탄압 속에서.. 귀머거리 언론 속에서 혁명의 소용돌이는 무심히도 한반도를 빗겨 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12년 후, 80년 5월 광주 민주 항쟁의 참혹한 행태를 보며 피어났던 혁명의 열기는
유럽 68 혁명의 전례를 기억하던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대학생들 사이에서 서서히 .. 서서히 커져갔고,
1987년 위대한 6월 항쟁으로, 7, 8, 9월 노동자 항쟁으로 귀결 됩니다.
비록 그들보다 20여 년 이나 늦었지만 고결하고 거룩한 가치와 영향력은 68혁명 못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위대한 패자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1968년, 격변 속에 존재했던 수많은 이름들은 '패배의 모습'이 아닌
'위대한 혁명의 상징' 으로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피를 흘리며 쟁취하려 한 자유를 현재 우리는 과연 지금 가치 있게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당연하다고 합니다.
귀찮다고 합니다.
권리를 포기하려고 합니다.
자유를 방종과 혼돈하고 권리와 의무를 무시합니다.
우리 손으로, 내 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는 5년 마다 한 번 씩 찾아오는데 관심없고 무시하죠.
총과 칼에 피를 흘리는 그 때 서야 가치가 소중한 것임을 알 수 있는 듯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68 혁명 세대들, 그들에게 당당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피 한 방울 없는 혁명으로 우리나라를 바꾸었다" 고..
첫댓글 님 게시물 항상 잘읽구있어요 열심히 스크랩한거 쭉보니까 님이올리신게 많더라구열 잘읽을게요~
정말 읽어 볼 만한 글입니다. 스크롤바 내리지 말고 찬찬하게 읽어주세요. 베드에 이런 자료가 올라오다니........너무 좋아요
와....글 읽으면서 감탄했습니다. 진짜 민주화의 작은실천을 위해서 전 첫투표를 꼭 할거예요. 그나저나....미국...정말 참 ;;;; 전에 베트남전쟁 공부하면서 미국의 매카시즘부분에서 완전 열받았었던 기억이 나네요.
좋은 자료 잘읽었습니다^^
우와~ 엄청난 게시물이네요. 많은 걸 느끼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나 이제 제목만 봐도 패리스매치님 글이라는 걸 느낄 수 있긔. 잘 봤읍니다!!!
마지막 사진 보고 너무 가슴이 뭉클.... 아.. 저 태극기랑 저분 표정...
아 정말 눈물이 펑펑 나서 중간에 못읽고 넘길뻔 했어요. 68년 80년, 어디서든 참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은 부단히 노력해 왔고, 그결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거겠죠. 한톨의 쌀알이 저울을 기울게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내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비록 몸은 아니라도 마음만은 5월의 열정을 담았으면 해요..
아 님ㅜㅜㅜㅜㅜㅜㅜ 넘 좋은 글이예요 감사해요 우리나라가 참 희망을 이야기하기 어려운 곳이지만 님 같은 분이 있어서 그럼에도 희망을 꿈꾸게 하는 것 같아요..힘 많이 받고 갑니다^___________^♡
우와..이 사실 처음알았어요 ㅠㅠ ........ 잘 봤습니다!!!!!!!!!!
님........... 정말 잘봤어요. 좋은글 감사합니다.ㅜㅜ 가슴이 먹먹해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68년 미국의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온 세계에서느 반전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선 오히려 앞장서서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동조했죠. 사실 미국의 입장에선 유색인종에 대한 전쟁. 이라는 부담을 벗고자 우리나라를 이용한 셈이었고,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 원조를 댓가로 참전했고.. 참 아이러니한 것 같아요. 어쩌면 그러하기에 우리가 피땀흘려 이룩한 87년 6월 항쟁이 더 값진 것일 수 있겠죠. 그때의 시대정신....앞으로 쭈욱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진짜 엄청나게 정성스런 게시물이라 수고하셨다고 항상 잘보고 배우고있다고 칭찬댓글 남기고 싶어 몇자 적읍니다.
좋은 글 잘 읽고 담아갑니다.
정말 좋은자료네요 !!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
좋은 글,자료들 늘 잘 읽고 있어요. 오늘도 배우고 가네요. 두고두고 읽을게요. 담아갑니다.
세계 어느곳이든 부패한 정치권력이 불러일으키는 결과란... 우리 모두 투표합시다. ㅠ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대단하세요.
parismatch님 스크랩해가요. 좋은자료 늘 고맙게 보구 있어요.개인적으로 소장하려고 가져갑니다
와~ 대단하세요. 감사합니다. 개인 메일로 스크랩 하겠습니다.
이런자료는 많은 베드인들이 보셨으면 해요~~글은 담아갈게요 님 고마워요~~
너무 잘 읽었어요........... 마지막부분에 우리나라 글 읽으며 태극기 사진보구는 울컥해서 울었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님........ 멋져요....!!!!! ㅠ.ㅠbbbb
멋진 자료 감사합니다. 이번 게시물도 개인메일로 스크랩해 갑니다.
좋은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스크랩 해갈게요.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좋겠네요. 추천이 있다면 백만표 던져봅니다!
다들 꼭 한번 읽어봤으면 하는 자료네요 새벽에 스크랩해가서 잘 읽었습니다. 고마워요~~
좋은글 감사합니다~스크랩해갈게요~^^
정말 좋았어요 님... 정말 두고두고 봐야겠어요. 그리고 님아. 저 꼭 투표 할꺼에요
지금 시기에 딱 맞는 게시물이네요..많은걸 생각하게 하네요..너무 감사해요^^
이런 게시물...베드를 떠날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죠. 잠시 숙연해지는 좋은 글 감사드려요.
와~~~대단한 게시물이네요~~ㅠㅠ 가슴이 뜨거워지네요~
와 감사함니다
항상 글 잘 읽고 있어요~ 감사해요
잘 읽었습니다..막연히 알던 일을 상세히 적어줘서 훨씬 쉽게 이해가 갑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너무 가슴에 와닿네요 ㅠㅠ
이런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짧은 글에서 많은걸 배우고 가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귀중한 자료를 쉽게 읽을수 있게 올려 주셔서 고맙고, 배우고 느낄수 있게 해주셔서 너무나 고맙습니다.
읽으면서 소름끼치고 눈물나서 몇번이나 멈추었네요.. 한글자 한글자 잘 읽고 마음에 새기고 갑니다!! 항상 좋은 글 올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많은거 배우고 가요
좋은게시물 감사하네요... ..... 님 뭐하시는 분이세요? 글을 읽고나니 궁금해 집니다.^^
님 좀 짱인듯... 잘읽었습니다
스크랩해갑니다.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뭉클하네요...근래 읽은 글 중 유익하고 가슴을 울리네요... 5.18은 왜 좀더 우리나라에 울리지 못했을까요...개인 카페로 스크랩해갈게요.
님 글은 늘 좋은 글인듯 ㅠㅠ 스크랩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