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홍과 나
정태익
꽃 잔치가 한창이다. 목련이 하얀 명주 같은 꽃잎을 달고 긴 목덜
미를 내밀기 시작하면서 산과 들에는 꽃 축제가 벌어진다. 저마다 모
양새 나는 꽃잎으로 옷을 입고 활짝 웃는다. 사람들이 보내는 인사에
향기로운 대답을 한다. 환호성과 숨결이 느끼질 만큼 가까이 다가와
속삭여주는 사랑으로 꽃들의 축제는 절정에 달한다.
서서히, 목련이 넓은 잎새로 평상복을 갈아입고, 진달래가 내년을 약
속하며 연두 빛깔 작은 잎으로 얼굴을 가릴 때 축제는 서서혀 막을 내
리기 시작한다. 형형 색색 빛깔의 조명이 하나 둘 꺼지고, 축제에 입
장했던 꽃들이 살짝 치마를 들고 피안의 숲 속으로 녹색 축제를 준비
하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분홍빛 드레스, 꽃무늬 망사로 된 장갑, 살짝 얼굴을 가렸던 앙증
맞은 부채, 마음껏 춤추었던 유리구두를 정리하면서 축제의 뒷이야기
로 봄이 가고 있을 때, 애련한 만남을 떠올리면서 잔잔한 감동으로 가
슴 설레 일 때, 환희에 찬 순간을 되새기면서 아쉬워할 때, 팡파르를
크게 울리며 화려한 뒤풀이 축제를 알리는 꽃이 있다.
연산홍〈Rhododendron obtusum Planch (진달래과)>!
짙은 열정이 삼바 춤을 추는 연인의 율동 같다. 눈부신 화려함에 탄성
을 지르게 한다. 때 맞추어 녹색 옷을 입은 잔디는 붉은 빛깔의 연
산 홍과 어우러져 그 아름다운을 더해준다. 사람들은 이른 봄꽃에게
분주하게 주고받았던 속삭임보다 가슴속에 번져오는 미소로 연산 홍
에게 마음을 건넨다.
연산 홍과 나와의 인연은 오래 전일이다. 내 인생을 뒤돌아보며 스스
로에게 많은 질문으로 가슴앓이를 할 때 나는 연산홍을 만났다. 이제
까지 잘 살아왔는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하는 인생의
전환점에서 연산홍과 나와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연산홍은 나뿐만 아니라 세계인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는 꽃 중에
하나다. 그 종류는 5,000가지나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붉은 계
통의 꽃이 피지마는 이웃 일본에서는 백색 꽃들도 피며, 특히 백색에
붉은 무늬, 붉은 색에 무늬가 들어있는 꽃을 (명품)이라고 하여
큰사랑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산홍은 분재에 가장 적합한 수종으로 호평을 받으면서
분재애호가들의 마음을 빼앗기도 한다. 그 가격은 천문학적인 숫자에
해당되는 2천만엔을 호가하는 명품도 있다. 이렇게 엄청나게 비싼 가
격과 더불어 수 십년 또는 자자손손 물려주는 가보에도 연산홍이 자리
잡고 있다고 하니, 연산홍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과 정은 지나치다
는 생각이 들 정도다.
20여년전, 광주에서 살 때다. 출근할 때마다 공원을 지나간다. 공원
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나의 일과처럼 되었다. 공원은 인생의 축
소판이다. 온갖 이야기들이 모여있다. 여기 저기 무리 지어 앉은 사람
들은 이야기가 시작되면 모였다가 이야기가 끝나면 흩어진다. 집비둘
기도 가끔씩 푸드득거리면서 날았다가 다시 앉곤 한다.
연산홍이 공원에서 무리를 지고 피고 있을 때, 험한 세월을 살아온
듯 깊게 패인 주름진 얼굴, 허름한 옷을 입고 시름없이 앉아있는 한
노인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무리를 떠나 조금 떨어진 나무의자에 앉
아 먼 산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 그 분! 무슨 생각을 저렇게 깊게 하
실까. 출근길에 무심코 만난 그 노인의 모습이 하루 종일 나의 뇌리에
서 지워지지 않았다. 두려움과 충격 같은 것이 계속 내 속에 머물면서
20년 후 나의 모습을 그려보게 되었다.
나는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 결코! 그렇다면 내가 저 나이가 될 때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공원에서 소일하는 사람으로, 정말
그럴 수는 없다. 그때부터 나는 노후대책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
우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부터 관심을 가져온 원예에 대해서 배우기로
마음먹었다. 분재와 난 재배, 그리고 과수나무를 집안에 심고 가꾸면
서 풍요로운 미래를 꿈꾸었다. 특히 나는 연산홍에 대한 공부에 열중
했다. 일본에서 월간으로 발행되는 연산홍 연구에 관한 잡지인 〔사쯔
기)와 원예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열심히 책을 보았
다. 6년이란 긴 세월동안 연구와 실기를 통해서 많은 것을 익혔다. 한
때는 연산홍과 난에 매료되어 식사하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후배들에
게 분재와 난 재배를 직접 가르치고, 각종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신기
술 익히기에 열을 올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연산홍을 만났다. 아니 하루 종일 함께 있었다. 어
느 새 정열이 넘치는 꽃빛깔, 계절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청록색 잎
새의 매력을 닮아갔다. 연산홍을 만나기 위한 섬세한 손 작업, 싱그러
운 얼굴로 맞이해 주는 연산홍을 보면서 창조주의 섭리를 더 깊이 깨
달았다. 인생의 의미를 되새겼다.
봄날이 가는 이즈음에, 해마다 연산홍으로 큰 꽃다발을 만들어 그 노
인에게 조심스럽게 드린다. 인생의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 그 분! 그
리고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
은 나를 바라보고 무엇을 느낄까. 또 어떤 교훈을 받을까. 아니면 그
노인처럼..... 연산홍이 필 때면 몸과 마음을 다시 한번 추스른다.
2001/ 10집
첫댓글 인생의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 그 분! 그리고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은 나를 바라보고 무엇을 느낄까. 또 어떤 교훈을 받을까. 아니면 그 노인처럼..... 연산홍이 필 때면 몸과 마음을 다시 한번 추스른다.
봄날이 가는 이즈음에, 해마다 연산홍으로 큰 꽃다발을 만들어 그 노
인에게 조심스럽게 드린다. 인생의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 그 분! 그
리고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
은 나를 바라보고 무엇을 느낄까. 또 어떤 교훈을 받을까. 아니면 그
노인처럼..... 연산홍이 필 때면 몸과 마음을 다시 한번 추스른다.
봄날이 가는 이즈음에, 해마다 연산홍으로 큰 꽃다발을 만들어 그 노인에게 조심스럽게 드린다. 인생의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 그 분! 그리고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은 나를 바라보고 무엇을 느낄까. 또 어떤 교훈을 받을까. 아니면 그노인처럼..... 연산홍이 필 때면 몸과 마음을 다시 한번 추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