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구데이 칸국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찾기
우구데이 칸국은 칭기스 칸의 3남인 우구데이가 칭기스 칸에게서 영지를 받아 세운 국가로 현재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와 중앙아시아 지역을 다스렸다. 수십년간 원나라와 대립했으며, 빠르게 중국에 동화된 원나라와는 달리 몽골의 유목민적 전통을 고수하는 데 힘썼다. 일부에서는 우구데이 칸국을 지배한 카이두를 원에 저항한 반란세력으로 간주하여 우구데이 칸국을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편집] 카이두 이전
우구데이 칸국은 칭기스 칸의 3남인 우구데이가 칭기스 칸에게서 받은 영지로부터 시작됐다. 우구데이가 받은 영지는 현재의 신장 웨이우얼 자치구 북서부 지역의 작은 땅이었다. 하지만 이 땅의 본래 주인인 우구데이는 이 땅과는 별 연관이 없었다. 1229년, 칭기스칸이 사망한 지 2년만에 쿠릴타이를 통해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선출된 우구데이는 1235년에 몽골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을 건설하고 그 곳에 자리를 잡았다.
1241년, 우구데이가 사망하자 킵차크 한국의 바투와 우구데이의 아들인 구유크 간의 분쟁이 발생했고 결국 구유크가 독단적으로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1246년에 왕위에 올랐다. 구유크의 즉위 이후 구유크와 바투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어 재위 3년째인 1248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치닫았지만 구유크의 사망으로 무산됐다. 구유크가 사망한 이후 바투는 톨루이 계의 소르칵타니와 손을 잡고 1251년에 쿠릴타이를 개최하여 톨루이 계의 몽케를 칸위에 올렸다. 이에 구유크의 미망인인 오굴 카이미시와 우구데이계의 왕자 시레문은 몽케를 제거하고 다시 우구데이계 대칸을 세우려는 음모를 세웠지만 발각당해 몽케에 의해 숙청당하고 말았다.
[편집] 카이두
이 부분의 본문은 카이두입니다.
몽케 칸의 숙청으로 우구데이계가 사실상 멸망하자 카이두는 자신의 영지에서 복수를 준비했다. 1259년, 몽케 칸이 사망하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여 1271년에 차가타이 칸국의 바락을 궁지로 몰아넣고 이후 차가타이 칸국을 복속시켰다. 차가타이 칸국을 복속시킨 뒤 원나라의 쿠빌라이와 여러 차례 대립하였으나 바얀에 의해 번번히 막혔다. 1294년에 숙적인 쿠빌라이가 죽자 기회를 노려 1301년에 차가타이 칸국의 두아와 함께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패배하고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도져 사망하였다.
[편집] 카이두 이후
카이두 사후 차가타이 칸 두아는 카이두의 유언대로 카이두의 둘째 아들 오르스를 옹립하지 않고 첫째 아들 차파르를 지지해 둘 간의 분쟁을 유도했다. 두아의 지지 덕분에 차파르는 2년 뒤인 1303년에 동생 오르스를 물리치고 칸위에 올랐다. 칸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1304년(혹은 1305년)에 차파르는 두아의 제의에 따라 전 몽골 제국의 평화 협정에 동의했다.
하지만 평화 협정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1306년에 차파르와 차가타이 칸국 간의 전쟁이 다시 발발하였다. 차가타이 칸국은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유린했고 원나라가 차가타이 칸국을 지원하고 나서자 차파르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차가타이 칸국에 항복했다. 차파르의 항복을 받아낸 두아는 원나라와 함께 우구데이 칸국의 영토를 분할한 뒤 차파르에게 작은 영지를 주었다. 하지만 두아는 차파르에게 영지를 준 지 얼마 안 돼 차파르를 쫓아내고 그의 동생인 얀기차르와 투그메에게 영지를 나눠주었다.
두아가 1307년에 죽고 차가타이 칸국이 칸위를 둘러싼 내분에 휩싸이자 카이두의 네 아들 차파르, 오르스, 얀기차르, 투그메는 힘을 모아 1310년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이 이끄는 반란군은 알말리크 근처에서 콘첵 칸이 이끄는 차가타이 칸국의 군대와 결전을 벌였으나 대패하였고 이 패배 이후 차파르는 원나라의 무종에게로 망명했다. 차파르가 원나라로 망명하면서 우구데이계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원나라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동: 둘러보기, 찾기
중국의 역사 v · d · e
원(元 ; 중국 대륙 국가로서는 1271년~1368년, 유목국가로는 1271년~1635년)은 중국과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한 영역을 지배하다가 명나라에 의해 북쪽으로 쫓겨난 뒤(통칭 “북원”) 유목민 국가로 1635년까지 존속한 몽골인 왕조로서, 몽골 제국의 대칸 직할 세습령이었다. 정식 국호는 대원(大元)이었다.
중국 역사에서의 원나라는 송나라 다음에 등장한 통일 왕조이다. 이후 주원장의 명나라에게 중국 통일 왕조의 위치를 물려주게 된다. 하지만 원나라는 지배층뿐 아니라, 제도 및 문화에서도 기존 몽골 제국의 유목국가적인 특성이 강하다. 그 때문에 원나라라는 호칭 대신 유목민의 나라를 가리키는 울루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대원 울루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편집] 역사
쿠빌라이 칸 이전의 몽골 국가의 현황은 몽골 제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원나라는 1260년 칭기즈 칸의 손자이며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으로 즉위한 쿠빌라이가 1271년 몽골 제국의 국호를 '대원'으로 고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몽골어로는 다이온 이케 몽골 울루스(Dai-ön Yeke Mongγol Ulus), 즉 '대원대몽고국'(大元大蒙古國)이다. 원나라는 유목 국가인 몽골 제국의 직계 국가임과 동시에, 중국화된 명칭과 제도로 중국 역사상의 통일 왕조로서의 위치 역시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대칸의 지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쿠빌라이의 몽골 제국 전체에 대한 통솔력은 쇠퇴한다. 원나라가 성립된 전후에 중앙아시아에서는 오고타이의 후손인 하이두가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자립하는 등 칸의 권위가 크게 변화하면서 몽골 제국은 재편의 과정에 들어선다. 이러한 과정 끝에 원나라는 몽골 제국 중 쿠빌라이의 후계자로 이어지는 대칸의 직접 지배가 미치는 영역으로 사실상 한정된 지배력을 행사하는 쿠빌라이 가문의 세습령(울루스)이 되었다.
[편집] 몽골 제국의 재편
1259년 제4대 대칸인 몽케가 남송 원정 중에 병사하고, 몽골고원에 있던 수도 카라코람을 수비하던 막냇동생 아리크 부케는 몽케파의 왕족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어 서부의 차가타이 가문 등 여러 왕가의 지지를 얻어 대칸의 지위를 얻었다. 이에 몽케와 함께 남송 원정 중이던 둘째동생 쿠빌라이는 윤11월에 군대를 되돌려 내몽골에 들어서 동쪽 3왕가(칭기즈칸의 동생 가계)등의 지지를 얻은 다음, 이듬해 3월에 자신의 본거지였던 내몽골의 개평부(開平府;훗날의 상도(上都)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지위에 앉았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 사성 처음으로 몽골고원 남북에 두 명의 대칸이 들어서게 된다. 몽케의 장례를 치루고, 제도(帝都) 카라코람에서 즉위한 아리크 부케가 대칸으로서의 정통성은 확보한 셈이었으나, 군사력을 장악한 쿠빌라이 역시 아리크 부케를 배신자로 여기고 자신이야말로 정당한 대칸이라고 주장했다.
쿠빌라이와 아리크 부케의 양군은 여러 차례 격돌하였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력과 화북의 물자를 장악한 쿠빌라이에게 전세가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서전인 1261년 시무토노르 전투에서는 쿠빌라이가 승리했으나, 아리크부케는 북서쪽 몽골의 오이라트의 지원을 얻어 저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 산하의 제후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가고, 차가타이 가문마저 아리크 부케에 대한 지원을 끊자, 1264년 아리크부케는 결국 쿠빌라이에게 항복했다. 이 일련의 전란을 승리자 쿠빌라이를 정통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아리크부케의 난이라고 불렀다.
아리크부케의 항복으로 인해 대칸의 지위는 다시 통합되었으나, 중국 서쪽의 중앙아시아의 여러 칸국에서의 대칸의 위신은 큰 타격을 입었다. 1269년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던 차가타이 가문의 바라크와 오고타이 가문의 하이두, 그리고 주치 가문(킵차크 칸국 혹은 금장한국(Golden Horde))의 여러 왕이 탈라스 하반에서 모여 중앙아시아의 대칸령을 분할해 쿠빌라이에 대항해 자립의 태도를 명확히 했다. 이윽고 오고타이 가문의 하이두가 중앙아시아 여러 왕 사이에서 맹주의 지위를 확립하고, 하이두의 반항은 몽골 제국을 동서로 나뉘게 된 항쟁으로 발전하게 된다.(하이두의 난)
그 사이 쿠빌라이는 중국식 정치기관인 중서성(中書省)을 설치하고,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람에서 중국 북부의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로 옮겼다. 지방에는 몽골 제국의 금나라 공략의 과정에서 자립해 몽골에 귀의하여 화북 각지에서 호족 노릇을 하던 한족 현지군벌(한인세후)과 몽골인 귀족, 중앙정부와의 지배관계를 정리하고, 각 교통로에 총관부(고려의 쌍성총관부 등)를 설치하는 등 중국지배에 적합한 갖가지 제도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271년, 국호를 대원이라고 하고 기존의 중국 통일 왕조의 맥을 잇게 된다. 이로써 칭기즈 칸이 세운 거대한 몽골 제국은, 서부의 여러 칸국들과 중국의 대칸령 사이의 느슨한 연합으로 재편되었다.
[역사적 배경]
무인정권(武人政權) 말기 최우가 집권하여 도적이 횡행하자, 이들을 잡기 위해 용사를 선발, 경찰부대를 조직하고 이를 야별초(夜別抄)라 하였다. 그 뒤 인원이 늘고 기구가 확대되어 좌별초·우별초로 나누어져 편성되었다.
이후에 몽고군에 잡혔다가 탈출해온 군사와 장정들이 새로 신의군이라는 별초부대를 창설하였다. 이리하여 좌별초·우별초와 신의군이 합쳐서 삼별초를 구성하였다. 이것은 몽고와의 전쟁이 일어난 뒤 얼마 안 된 시기였다.
1232년(고종 19) 최씨정권이 정부를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한 뒤 대몽항전의 전 시기를 통해 삼별초는 가장 강력한 전투병력이었다. 삼별초는 국가 재정에 의해 양성되고 국고에서 녹봉을 받는 등 권신의 사병과는 구별되었다. 그러나 권신의 정치권력과 너무 깊이 유착(癒着)되어 있어 사병적 성격이 농후하였다. 삼별초의 난의 기본적 요인은 우선 삼별초라는 강력한 전투병력이 권신들과 깊은 유착관계에 있었다는 정치적 특수상황에 있다 해야 할 것이다.
1259년 고려의 태자 전(뒤의 원종)이 부왕을 대신해 몽고에 입조(入朝)함으로써 30년간 계속된 몽고와의 전쟁은 종식되고 화평이 수복되었다. 이 때 최씨정권은 타도되어 일단 왕정이 복구된 형세였으나,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여전히 무인들이었다. 이러한 무인의 권력은 1270년(원종 11)까지 존속되었으며, 10여 년간의 고려의 내부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삼별초를 비롯한 무인들은 출륙환도(出陸還都), 즉 개경환도(開京還都)를 거부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결전(決戰)을 사양하지 않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대해 왕실은 몽고에 접근, 무인들의 세력을 억제하고 출륙환도를 단행함으로써 명실공히 왕정복구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반면 몽고는 배후에서 왕실을 조종해 반몽고세력을 배제하려고 획책하였다. 결국 강화도의 중신회의에서 개경환도를 확정하자 삼별초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삼별초의 성격과 경력으로 보아, 세력 근거지이며 항전의 군사기지인 강화도를 철수해 개경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당시 개경은 몽고군에 호위된 국왕이 장악하고 있었고, 몽고의 대군(大軍)도 주둔해 있었다. 그러므로 환도는 삼별초의 해체를 의미하였다. 특히,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당한 상황에서 명부가 몽고군에 넘어가면 보복을 각오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별초는 강화도를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몽고병과 싸워 적개심에 불타는 그들은 출륙환도를 계기로 고려가 몽고에 종속화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일반 민중들도 친몽적인 왕실파의 패배주의적 태도에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민간의 동향에 힘입어 삼별초는 그들의 반란을 반몽고·반정부의 자주·독립 수호운동으로 제고(提高)하였다.
[발단]
강화도의 중신회의에서 개경환도를 결의한 이후, 당시 몽골에 갔다가 돌아오던 원종은 삼별초의 동태를 듣고 사람을 보내어 그들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삼별초의 저항이 더욱 거세지자 원종은 삼별초의 폐지를 결의하고, 강압적으로 해산할 것을 명령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하였다. 이에 삼별초는 그 명단이 몽골군에게 넘어갈 것으로 판단하여 1270년 6월 1일 배중손, 노영희를 지휘관으로 삼아 원종을 폐하고, 왕족인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새 왕으로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경과]
새로 왕을 세우고 관부를 설치한 삼별초는 반란 3일 뒤 공사 재물을 접수하고 강화도에 남아 있는 귀족·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 배를 태워 진도로 보냈다. 이때 선박 1,000여 척이 동원되었다. 근거지를 진도로 옮긴 것은 몽고군의 반격을 예상하고 섬에 강력한 군사기지를 설치해 제해권(制海權)을 장악, 해전에 약한 몽고군에 대해 전략상 우위를 확보하려는 작전이었다.
진도로 옮긴 지 얼마 안 되어 전라도 일대를 제압하였다. 해안 도서지방은 물론, 내륙지방도 점차로 삼별초의 세력권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스스로 진도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복속의 뜻을 표하는 자도 있었다.
이때 나주에 와 있던 전라도토적사참지정사(全羅道討賊使參知政事) 신사전(申思佺)과 전주부사 이빈(李彬)이 삼별초의 위세에 눌려 개경으로 도망쳐왔다. 전주·나주와 같은 내륙의 큰 도시도 포위되어 공격을 받았다.
1270년 9월 조정에서는 추밀부사(樞密副使) 김방경(金方慶)을 대신 전라도추토사(全羅道追討使)로 임명해 토벌을 명했고, 몽고의 원수 아해(阿海)도 동행하였다. 고려·몽고 연합군의 진격으로 형세는 약간 정부군에 유리하게 된 듯하였다.
그러나 삼별초의 기세는 꺾이지 않아, 전라도 지방의 도서와 해안은 물론, 경상도의 남해·거제·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마산)·동래·김주(金州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 등지가 삼별초의 군사적 활동 범위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11월 삼별초는 탐라(耽羅 : 제주도)를 공략, 남방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전라도·경상도의 조운(漕運)이 차단되어 정부는 큰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
고려·몽고의 연합군은 여러 차례 진도를 공격했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271년 5월 홍다구(洪茶丘)가 새로운 몽고군 지휘관에 임명되면서 김방경·흔도(忻都)·홍다구의 연합군이 진도를 공격해 겨우 성공하였다.
이때 승화후 온은 홍다구의 손에 죽고, 배중손은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진도 함락 당시 남녀의 포로가 1만 여 명이었다고 하며, 그 가운데에는 인질로 잡힌 귀족·고관의 가족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삼별초는 파멸 직전의 타격을 받았으나 완전히 굴복하지는 않았다. 살아남은 여당들은 김통정(金通精)을 수령으로 받들고 본거지를 제주도로 옮겨 항전하였다. 제주도로 이동해 우선 방어진지의 구축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1272년부터는 맹활동을 전개해 자주 본토를 공격하고 전라도와 경상도의 요지에 큰 피해를 주었다.
이 해 11월에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 지금의 경기도 부천)를 공격해 부사와 그 처를 납치했고, 또 합포에서 전함 20척을 불태웠다. 남도의 세공(稅貢)을 해상에서 약탈해 조운에 큰 피해를 주었다.
[결과]
삼별초는 최후까지 분투했으나 기울어진 대세는 어찌할 수 없었다. 원나라 세조(世祖)는 일본 정벌의 기지로서 탐라를 중요시해 1272년 8월 사신을 보내 탐라 공략에 대한 적극책을 촉구하였다. 이에 홍다구는 김통정에게 선무 공작을 폈으나 성과가 없자, 1273년 2월 김방경·흔도·홍다구의 연합군은 다시 탐라를 공격해 삼별초를 평정하였다. 이때 연합군은 병선 160척, 수륙군 1만 명인(고려군 6,000명, 몽고군 2,000명, 한군 2,000명)이었다. 4월 수령 김통정은 산중으로 피신했다가 죽고, 여당 1,300여 명은 포로가 되었다. 이리하여 삼별초의 반란은 약 3년 만에 진압되었다.
[의의와 평가]
삼별초가 고려·몽고 연합군의 우세한 병력의 공격에도 3년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첫째, 삼별초가 매우 우수한 전투병력이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배후에 남도 각처의 농민들이 삼별초의 항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정부와 몽고군에 대해 투쟁하려는 굳은 결의가 민중 사회의 내부에 고양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경상도 밀성군(密城郡)·청도군(淸道郡)의 농민들은 진도의 삼별초에 호응해 관헌을 습격하고 폭동을 일으켰다가 1271년 1월에 진압되기도 하였다. 또 같은 시기에 개경의 관노(官奴)들이 삼별초에 동조해 몽고의 다루가치(達魯花赤)와 정부 관료를 죽이고 진도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가 탄로되어 처형되기도 하였다. 이 사건들은 당시 반정부·반몽적인 민중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들의 저항정신이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서로 동조하게 된 것은 삼별초 반란의 역사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준다.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고의 정책과, 조국의 예속화와 종속적 위치를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국왕 및 그 일파의 행동에 반발, 항거한 병사들의 폭동이었다. 이것이 민중들의 동조와 지지를 얻어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연합군을 상대로 3년간 버틸 수 있었다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삼별초의 항쟁기간에 정부는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자력으로 사태를 수습할 능력은 없었다. 그리하여 항상 몽고군의 군사적 원조를 받아 토벌작전을 진행하고 육지에 있는 농민들에게 가혹한 억압을 가하였다. 이것은 이미 왕실 중심의 고려왕조가 완전히 민심에서 이탈되어 몽고의 종속정권으로 전락되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금나라의 문제와 같이 원나라의 문제는 해당지역에서 천하의 중심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것이었을 겁니다... 서쪽으로 치우진 지역도 그렇고, 동쪽으로 치우친 지역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백성을 생각하는 현자의 leadership이라기 보다는, 황제의 권위로 부귀영화를 더 많이 가지려는 지방 호족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죠... 삼국의 싸움을 종식시킨, 고려의 건국과 해당위치로 추정되는 지리적 요소를 고려해 보면, 많은 지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납득할 수 있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지금의 중국 수도가...대륙의 북동으로 치우친 걸 보면...수도가 꼭 중앙에만 있으란 법은 없습니다...더군다나 원나란 킾착크한국과 차가타이한국이 모두 서역을 먹고 있기에...서역엔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그 때 까지도 아직 대륙의 중심인 고려를 완전히 먹지 못했던 작전상태이니...대륙의 중심인...돈황이나 우루무치의 공격방어가 가장 용이한 현 몽골(낙랑+현도?)도 임시 것점으로 괸찮았을 겁니다.
첫댓글 가끔 글이 날라가는 사고가 생겨...급하게 글을 쓰는 버릇이 있습니다...이제 대충 글 교정이 됐습니다...지송합니더...완전 틀리게 쓴 대목이 있으니...성급하게 벌써 다 읽으신 선생님들께선...다시 한 번 읽어 주십시여...ㅡ. .ㅡ
금나라의 문제와 같이 원나라의 문제는 해당지역에서 천하의 중심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것이었을 겁니다... 서쪽으로 치우진 지역도 그렇고, 동쪽으로 치우친 지역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백성을 생각하는 현자의 leadership이라기 보다는, 황제의 권위로 부귀영화를 더 많이 가지려는 지방 호족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죠... 삼국의 싸움을 종식시킨, 고려의 건국과 해당위치로 추정되는 지리적 요소를 고려해 보면, 많은 지식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납득할 수 있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지금의 중국 수도가...대륙의 북동으로 치우친 걸 보면...수도가 꼭 중앙에만 있으란 법은 없습니다...더군다나 원나란 킾착크한국과 차가타이한국이 모두 서역을 먹고 있기에...서역엔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그 때 까지도 아직 대륙의 중심인 고려를 완전히 먹지 못했던 작전상태이니...대륙의 중심인...돈황이나 우루무치의 공격방어가 가장 용이한 현 몽골(낙랑+현도?)도 임시 것점으로 괸찮았을 겁니다.
지금의 북경은 해안도시가 되지요... 산업사회 이후에, 공장에서 만든 물품을 배를 타고 이동하여 판매하는 상업이 발달한 이후에 번영한 도시라는 것입니다. 전세계의 모든 해안도시는 산업사회 이후에 많은 발달을 합니다. 1900년 이후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