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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라 하심
마 10:24-33
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26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32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 10:24-34 / 제자가 스승보다 더 위대할 수 없으며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다. 25) 제자가 스승만큼 되고 종이 주인만큼 된다면 기쁜 일이 아니겠느냐? 집주인인 나를 바알세불이라고 하였으니, 너희에게는 얼마나 더 심한 말을 하겠느냐? 26) [무서워하지 말라;눅12:2-7] 그러나 너희를 위협하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진리가 드러날 때가 오면 그들의 더러운 속마음이 환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27) 지금 내가 어두운데서 말한 것을 밝은데서 외치고, 내가 너희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28) 너희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몸과 영혼을 다 지옥에 던져 파멸시킬 수 있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 29) 참새 두 마리의 값이 얼마냐? 겨우 한 앗사리온이 아니냐? 그러나 그 중의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30) 아버지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헤아리시는 분이 아니냐? 31)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 훨씬 더 귀하지 않느냐? 32) [나를 안다고 하면;눅12:8-9]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하겠다. 33) 그러나 만일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 34) [칼을 주려고 왔다;눅12:51-53,14:26-27] 내가 이 땅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천국 복음 전파에 나선 예수님과 스승의 권세와 권능을 대리하는 제자들은 점차 강도가 더해지는 거부와 핍박을 함께 받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예수님이 제자들보다 먼저 고난을 경험하시는데, 이것이 제자들에게는 큰 위로입니다. 이미 인간의 시간 속에서 고난을 통과하고 궁극적인 승리를 경험하신 예수님은 사명의 수행을 앞두고 긴장하는 제자들을 격려하십니다. 격려는 “두려워하지 말라”로 요약됩니다(26, 28, 31).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24-27)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옳으며 선하다는 사실이 밝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승이자 주인이신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데도 핍박받으신 것처럼, 종인 제자들도 같은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때가 되면 그들이 의로운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온 세상이 알게 됩니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28-31) 제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핍박자보다 그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이 더 위의 권세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는 모든 권세 위의 권세이신 하나님의 주권과 세심한 보호 안에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핍박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보호 아래 있는 그들의 본질인 영혼까지 죽일 수는 없습니다. 최후 심판 때가 되면 제자들을 핍박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습니다.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32-33)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담대하고 당당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말입니다. “시인한다”란 말은 공개적인 고백을 뜻합니다.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주(主)로 고백하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제자들을 안다고 시인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부르시는데, 이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뿐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제자들이 하나님과 맺게 될 관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제자인 내가 하나님과 맺게 된 친밀한 관계의 표현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나님이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하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 안에서 세상은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적용: 당신은 예수님을 주(主)로 고백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 고백의 삶에서 제자로서 내가 지닌 능력이 나옵니다.
아무리 완전한 지식도 인간의 지식에는 그림자가 있고 반대 이론이 50%는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가르쳐 준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내 죄와 죽음에서 나를 구속하셨다는 지식,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의 부활이 내 부활이라는 사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 부르고 그가 나를 죽도록 사랑하신다는 사실, 주님이 다시 오시고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은 천지가 없어지고 내가 열 번 죽어도 절대 확신하는 성령이 내 영에게 가르쳐 준 지식입니다.
< 설 교 >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마 10:24-33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라.”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를 넘어 막 마을로 가려다가 너무나 밝은 얼굴로 뛰어 노는 한 꼬마를 만났습니다.
“공동묘지 근처인데 너는 무섭지 않니?” 이렇게 묻자 꼬마는 “아뇨!”라고 하면서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봤습니다. “왜 무섭지 않지?” 다시 묻자 꼬마는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우리 아빠가 이 묘지 관리인 이거든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사41:10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려움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 발을 묶어버립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누리는 삶을 살지 못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마음에 평안도 기쁨도 사랑도 머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두려움에 사로잡힌 마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극복해야 할 가장 절실한 문제 중에 하나는 바로 이 두려움이라는 문제입니다.
특별히 우리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해 나감에 있어 천국 대표선수가 되어 영혼을 추수해서 천국 창고에 들이는 추수꾼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이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두려움을 극복해야 할까요?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런 죄의식도 양심의 가책도 두려움도 없이 살인을 즐기는 사람들을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 데 놀랍게도 우리 사회에 1%가 넘는다고 합니다.
참으로 사람이 무섭고, 사람이 두려운 세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런 미치광이 같은 광적인 인간을 두려워하는 두려움과는 또 다른,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16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이리 같은 세상 사람들 속으로 보냄을 받은 양과 같은 존재들이라는 겁니다.
이리는 양을 물어뜯어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리 가운데 처한 양은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복음에 대해 관대하지 않고 적대적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각종 기사 이적을 베풀어 주시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동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군중들의 요구대로 행동하지 않으시고, 신령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와 믿음을 요구하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배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만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나를 미워했으니 너희들도 미워할 것이다. 너희가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는 일도 발생할 것이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내용들은 실제로 1세기 당시에, 그리고 2세기를 걸쳐 3세기 초까지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절에 많이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런데 로마사를 읽어 보면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이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황제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서 아주 심하게 박해한 적도 있고, 어떤 황제는 좀 너그럽게 대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 더 심한 곳도 있고, 좀 덜한 곳도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이 국교로 되어 있는 나라들 가운데서는 기독교 신앙 때문에 투옥되고, 추방되고, 가산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저 북녘 땅에서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박해가 심해질 때에 순교자도 많이 나오고, 배교자도 많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환난과 핍박을 당한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신앙이 굳세어서 환난과 핍박을 이겨내고 순교자가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런 삶이겠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내 믿음이 연약해서 배교자가 된다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 이는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신앙 때문에 목숨을 빼앗기는 일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우리를 죽이려고 드는 세상 정신은 동일합니다. 신앙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불편함을 겪을 수 있고,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만이 죽이는 게 아닙니다.
중상모략이나 조롱을 함으로써 어떤 사람의 인격이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을 우리는 인격살인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거짓말로 진실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간질로 좋은 관계를 해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살아갈 때에, 세상은 복음과 복음을 믿고 따르고 전파하는 우리를 미워하여 저와 여러분의 인격을 짓밟으려 들 수도 있고, 우리의 명예를 빼앗아 버리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신앙을 빌미로 우리가 가진 지위나 신분을 박탈하려고 할 수도 있고, 진실을 왜곡하고 억울한 누명을 우리 성도들에게 씌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신앙 때문에 가족 간의 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걸 두려워합니다. 잠언 29장 25절에 보면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올무에 걸린 짐승은 꼼짝 못하고 사냥꾼에게 붙잡히게 되어 있습니다. 두려움은 사탄 마귀가 친 올무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을 두려워함으로 올무에 걸리게 되면, 사탄 마귀의 밥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신앙은 숨통이 막혀 버리고, 신앙 성장이나 인격 성숙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영위해 나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두려움을 몰아내는 길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첫째로,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 여러분!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역설적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뱅겔은 “하나님만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도들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사람이 나를 해칠 힘이 있고, 내 힘으로는 그것을 막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권세 있는 사람 앞에서 기가 죽고 주눅이 들어버리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권세 있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성도들을 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다같이 28절과 29절 말씀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데, 심지어 미물인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이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는데요? 다같이 찾아서 함께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복음 12장 4절에서 6절 말씀입니다. (시작)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여러분! 이 두 말씀 속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씀은 지옥 관련 말씀입니다.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그렇다면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는 누구이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그 반대로 살아갑니다.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것을 두려워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던져 넣는 하나님은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으면 자기 죄로 인해 지옥에 간다고 사람들에게 말을 하면 지옥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교회를 나오는 사람들 중에서도 지옥을 별로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 가보지 않고서 어떻게 지옥이 실재하는 것을 알 수 있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꼭 내가 가봐야만 실재하고 내가 가보지 않았으면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있지도 않은 지옥을 있다고 거짓말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실 때 지옥은 허구나 상상속의 장소가 아니라, 실재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또한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풍랑이 일고 배에 물이 들어와 잠기게 되었을 때 죽음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 40절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거나 작기 때문입니다 두려움뿐만이 아니라 염려도 걱정도 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거나 작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30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 있는 자는 사람이나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히11:33-38)
그런데 여러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두 말씀 속에서 좀 다른 점을 못 느끼셨습니까? 똑 같이 참새를 예로 들고 있는데 조금 다릅니다.
마태복음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고 있습니다. 뭐 좀 느껴지는 바가 없으십니까? 마태복음대로 하자면 참새 네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는 뭘 의미할까요? 많이 팔아주니까 한 마리는 덤이라는 겁니다. 한 때는 겨울에 1층 마트 앞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저는 자주 붕어빵을 사먹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1,000원에 두 개인데 2,000원 어치를 사면 4개가 아니라 하나 더 얹어줘서 5개 주시는 거 있죠? 덤으로 하나 더 얻는 이 기분이 아주 쏠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덤으로 얻는 참새 한 마리의 생명까지도 함부로 그 누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좀 더 풀어서 말씀드리자면 바로 이런 뜻입니다. “너에게 위협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그들 마음대로 행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결코 너를 해치지 못한다.
그러니 너는 권세가 있고, 힘이 있는 사람을 두려워할 게 아니고, 세상 권세자들을 주장하시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한다.”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는 것 때문입니다. 싫은 소리 듣거나 비난 받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초대 성도들은 별의별 누명을 다 뒤집어썼습니다. 성만찬을 오해해서 성도들은 사람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식인종으로 비난받았습니다.
신자들이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며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는 것 때문에 근친상간을 즐기는 자들로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기에 반역자들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을 섬기지 않기 때문에 무신론자들, 불경한 자들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역사상 복음의 원수들이 성도들을 박해하고 죽일 때는 “예수 이름 때문에 죽인다.”고 하지 않고, 국법을 어긴 반역자, 매국노 또는 민심을 교란하고 혹세무민하는 자라는 죄목으로 죽였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신앙을 지키기 때문에, 엄청난 오해를 받고, 손해를 보고, 때로는 죽임을 당합니다.
오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런 억울함을 당하는 것, 누명을 쓰는 것 때문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 중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잠깐 동안은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때가 되면 다 밝혀진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성경 말씀은 절대 무오한 진리이기에 우리는 신앙 양심을 따라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다윗은 억울한 일을 참으로 많이 당했습니다. 시편 37편에 다윗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에 취했던 믿음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은 억울함을 당했을 때에, 자신을 억울하게 만드는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했습니다.
묵묵히 참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꾸준히 선을 행하면서 믿음으로 걸어가노라면, 하나님께서 가장 합당한 때에 모든 것을 드러내어 나의 억울함을 반드시 밝혀주신다고 했습니다.
시편 37편 5절과 6절 말씀입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만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운명을 좌우할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의 모든 힘이 있는 자들을 주관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 절대 주권자 하나님만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미물인 참새 한 마리의 생사도 주장하시는 하나님, 내 모든 사정을 아시고 때가 되면 나의 누명을 벗겨주시고 억울함을 풀어주시며 나의 의로움을 정오의 태양빛처럼 밝히 드러내 주시는 바로 그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면 한 가지 믿음이 더 필요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사랑을 신뢰하라!”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이 얼마나 섬세한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는 분이신지를 말씀해 주심으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다같이 30절과 31절 함께 읽습니다. (시작)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 숫자까지 다 세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고 하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의 피 값으로 사신 당신의 자녀들을 왜 돌보지 않으시겠느냐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온전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결코 자녀들에게 해로운 일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당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만에 하나 환난과 시련을 허락하신다면 거기에는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더 깊이 온전하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더 깊은 신앙과 인격의 성숙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크신 사랑을 세상 사람들에게 밝히 보여주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18절 말씀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의 진정한 뜻인 겁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온전히 신뢰할 때에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된다는 말씀입니다.
설사 우리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신다면 결코 혼자 걷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어떤 때보다도 더 세밀한 손길로 우릴 보호하고 계심을 깨달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앞서 간 신앙의 선배들 중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하심을 제일 많이 경험한 사람 중에 한 분은 다윗일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말년에 압살롬의 난을 당하기 전에도, 이미 수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는 한평생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수없이 많은 두려운 상황들 속에서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방패로 삼고, 피난처로 삼고, 요새와 산성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의 믿음에 신실하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다윗 편에 서 주셨습니다. 다윗을 위하여 모든 일을 선하게 이루어 주셨습니다. 다윗을 철저하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윗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간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그 분의 세밀하고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세상 그 어떤 사람도, 그 어떤 악한 사고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셋째로, 담대하게 주님을 시인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담대하게 주님을 시인하며 살라.”
다같이 32절과 33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그렇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당당하게 시인하며 살아야 할 것을 주님이 요구하고 계십니다. 교회 안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잘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 나가서 주님을 시인하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우리 옛말에 “다리 부러진 장수 성 안에서 큰 소리 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수는 성 밖에 나가서 적군과 마주하여 큰 소리를 지르며 싸워 이겨야 그 가치를 드러내는 겁니다. 성 안에서 제 아무리 큰 소리 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우리 주님을 시인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시인하며 산다는 것은 “매사에 하나님께서 나의 언행심사를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생각하며,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으로 말씀의 원리를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여러분? 기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시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시인하신다는 말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인정해 주시고,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을 시인하며 말하고 행동한 것들을 다 책임져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신하고,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신뢰하게 되면, 그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적대적인 환경도 두렵지 않으며, 심지어 죽음까지도 두렵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더 이상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만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후로는 무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 매 순간 엄습해 오는 모든 두려움을 다 내려놓고서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면서 담대하게 주님을 시인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당신 자녀들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완벽히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앞길을 온전히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바로 이 믿음 가지고 험한 이 세상을 넉넉히 헤쳐나감으로 마침내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 이상호 목사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제일 방해가 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중요한 일, 무슨 뜻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에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 일이 잘 될까, 이 일이 성공할까 하는 두려움,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 결과에 대한 두려움, 책임감에 대한 두려움 등이 있습니다. 이 두려워하는 것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 마땅히 할 말을 하지 못하 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에 몇 번이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가 조사해 보았더니 무려 366번이나 있답니다. 그러니 윤달있는 해까지 하루에 한번씩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셈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26절에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고, 28절에도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또 31절에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전도하러 떠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 전에 이미,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사람들을 삼가라고 하셨고, 전도하러 갈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으며, 끝까지 견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주님이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전도하러 나갈 때 가장 큰 문제가 두려워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딤후 1:7,8에 보면 사도 바울이 목회자였던 디모데에게 전도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8)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두려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데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두려워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우리들이 추수감사절 새생명 전도축제를 앞에 놓고, 또 한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생애 동안에,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성도들이 되기 위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하는 일은 떳떳한 일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떳떳치 못한 일을 하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우리들이 거짓말을 한다거나 남의 것을 도둑질한다거나 남에게 부끄러운 일을 한다면 우리는 그 일을 하면서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일은 그런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떳떳한 일을 하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 26절, 27절을 보세요.
"(26)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27)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주님께로부터 들은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고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담대하게 증거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는데, 그들이 전하는 것은 아무리 드러나고 알려져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이렇게 떳떳한 일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전도하다가 남에게 욕을 먹을 수 있습니다. 남의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남의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남의 제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일 없지만, 잡히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떳떳한 일이며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언젠가는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도리를 알고, 예수님의 구원진리를 깨닫고, 구원을 받고 보면 예수믿는 일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이 때부터 친구들에게 예수님 믿자고 말할 수 있고 당당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하지 못하는 까닭은 전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나 다른 사람들의 반응, 이것으로 인해 자신이 받을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 할 필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떳떳한 일, 너무나도 좋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단종파나 사이비종파를 전하는 것입니까? 그들은 잘못된 진리를 전하면서도 얼굴에 무엇을 깔았는지 집 문을 두드리고 자신들의 믿음을 설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이 참된 것을 알지도 못하고, 그 결과를 알지 못하고 전하는 것을 보면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떳떳지 못한 것을 전하면서도 자신있게 전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진 우리 믿는 성도들은 왜 움츠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참 진리의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참 좋은 소식을 전하고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입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증거하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이 떳떳하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28절, 29절입니다. "(28)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29)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당당히 전하지 못하는 것은 그 후 우리가 당할 불이익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복음 전하는 삶을 살아갈 때, 핍박과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핍박이라고 해야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정도입니다. 옛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붙잡히고 매맞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요한만 제외하고는 모두 순교로 그들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예수님 믿기가 매우 어려웠던 시기입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사는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죽고 사는 일은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가치를 가진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데 하물며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람들이 우리를 죽일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령 사람들이 우리를 죽인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죽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 뿐이요 우리의 영혼까지는 손대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자의 몸과 영을 다 멸할 수 있는 분이시니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오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잘 보이려고 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보면 자연히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해야 할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28-29절)
이것은 죽음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인생의 문제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공과 실패, 건강한 것과 병드는 것, 사업이 실패하든지 잘되든지 하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주권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우리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나의 몸과 영혼을 다 주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왕의 금 신상 앞에서 절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풀무 불 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풀무 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고 그들보고 금 신상 앞에 절하라고 했습니다. 정말 사람으로서 두려울 수밖에 없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하지 않으시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혹 하나님이 그들을 그렇게 죽게 하신다 해도 그들의 몸만 타는 것이요 그들의 영혼은 죽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니 무엇이 두려웠겠습니까? 결국 그들은 그러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풀무 불 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극렬한 풀무불도 그들을 사르지 못했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그을리지 않았다고 성경은 증거했습니다. 그들은 살아나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증거했습니다.
4세기에 크리소스톰이라는 위대한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황금의 입을 가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설교를 잘 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정부에 의해서 그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설교도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핍박을 당했을 때 이렇게 자문자답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죽음일까?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고 죽음까지도 유익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귀양가는 것일까? 두렵기는 하다. 그러나 이 지구와 지구상의 어디에 가도 주님은 거기 계시지 않는가? 재물을 잃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세상에 빈손으로 왔고 갈 때도 빈손으로 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에서 무섭다고 하는 것이 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또 세상의 좋은 것도 나는 그저 웃어넘길 것뿐이다. 나는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물을 사모하지 않으며 죽음에 위축되지도 않겠다."
사랑하는 여러분, 크리소스톰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홀로 우리의 생명을 주장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영원까지 주장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잃는 것은 이 세상의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어차피 우리가 다 이 세상에 내어놓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의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30절에 "우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섬세하게 우리를 보살피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보통 때도 이렇게 우리를 보살피시겠거든 하물며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어려움을 겪고 핍박을 받는데 보살피지 않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일찍이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곡식을 창고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천부께서 먹이시지 않느냐? 들의 백합화를 보라. 길쌈도 아니하되 저 꽃이 입은 영광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너희를 먹이고 입히시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보통 때에도 이렇게 먹을 것, 입을 것을 다 주시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고, 사명감을 가지고 사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건강하게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가정과 직장, 사회에서 여러분이 받은 달란트만큼 하나님을 위해 살아간다면 역시 하나님의 섬세한 보살핌이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스데반이 순교 당할 때의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그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 때 스데반이 보니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서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승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왜 이때는 서 계셨을까요? 어떤 주석가는 말하기를 순교 당하는 스데반이 너무나도 장해서, 그가 그 고난을 뚫고 잘 승리하기를 응원하시느라고 그렇게 서 계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들이 고난 받는 현장을 다 보고 계십니다. 보실 뿐만 아니라, 필요할 때는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시고 돌보시고 계십니다. 어느 정도로 세밀하게 돌보시는가 하니, 우리의 머리털을 다 세실 정도로 세밀하게 돌보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보는 어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창공은 신기하고 놀라운 광경이었고 여행으로 마음은 들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행도중 비행기가 갑자기 불안정한 기류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는 비행기가 갑자기 떨어지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며 마치 비행기가 추락이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내에 있던 손님들은 모두 사색이 되어 어떤 이는 십자가를 붙잡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두려움으로 회개기도를 드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맨 앞좌석에 앉아 있던 소녀는 아무 두려움이 없이 오히려 무척 재미있는 표정을 지으면서 태연히 앉아 있었습니다. 다른 승객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얼마 후 비행기가 안정을 찾은 후 손님들이 소녀에게 이상스럽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얘야, 너는 비행기가 진동하며 무서운 속도로 떨어질 때 무섭지 않더냐?"
“아뇨, 전혀 무섭지 않았어요.” “우리는 모두 두려웠는데 너는 왜 무섭지 않았지?” “그건요, 우리 아빠가 이 비행기를 조종하고 있거든요.”
여러분, 유능한 아빠가 조종사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비행기가 요동할 때에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창조주시며 그분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나 핍박이 있다고 해도 주님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부인합니까?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입술로 주님을 부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지요? 마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입술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처럼 입술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로는, 침묵으로 주님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격언에 보면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할 때에 가만히 침묵하고 있으면 거기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침묵함으로 기회주의자가 될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묵으로 주님을 부인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시인해야 합니다.
셋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행위로 주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시인하지요. 또 말할 때 침묵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을 들어보면 그럴 듯한데 행동을 보면 전혀 '아니올시다' 입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주님을 부인하지 말라고 하셨고 시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시인하는 데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대해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 나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가?
내가 그것을 인하여 어떤 손해를 받을 것인가를 생각할 때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을 잘 해결해야 전도하는 삶을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하는 것이 떳떳한 것임을 알 때,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이 보살피시고 계심을 알 때 그렇습니다. 이 세 가지를 잘 알고 마음으로 깨달아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천국의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증인으로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두려워 말라
마 10:24-33 / 김영규 목사
신앙 공개를 두려워 말라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믿을 때에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비난을 받았습니까? “그래, 믿기를 잘 했다! 열심히 믿어라!” “기왕이면 예수 믿기를 잘 했다!” 아마 이런 칭찬보다는 비난을 먼저 받으셨을 겁니다. “야, 너는 지금까지 잘 지내다가 왜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니?” “왜, 갑자기 예수냐?” “왜 하필이면 예수냐?” 단지 비난받는 것에 머물지 않고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한 사람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참 신앙에는 칭찬보다 비난이 많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내 믿음을 남에게 알리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26절, 28절, 31절에서 거듭 거듭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믿음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을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믿고 있는지, 담대히 알리세요. 기독교는 公告白(public confession)의 신앙입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고백해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증표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9-10) 뿐만 아니라 둘째로는, 복음을 증거하는 계기가 됩니다. 하나님은 내 삶을 통해서 내 믿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십니다. 셋째로는, 내 믿음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함으로써 성숙되는 기회가 됩니다. 즉, 내 믿음이 확고해집니다. 그러므로 주저 없이 내 믿음을 공개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것은 용감하면서도 유독 신앙을 나타내는 것은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나약함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본능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자기 능력으로 가정을 세우고, 자기 능력으로 사업도 하고, 자기 능력으로 자식도 키우고, 자기 힘으로 세상살이를 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자기가 아닌 누구를 의지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합니다. 신앙도 그래요.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곧 내가 나약해진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야, 너도 이제 약해졌구나!” 그렇게 보이기 싫어서 신앙을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신앙인으로서의 삶에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내가 갑자기 성자가 된 줄로 생각합니다. 아주 부담스럽습니다. 무슨 말 한 마디만 잘못해도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러면 쓰나!” 하면서 핀잔을 듣습니다. 성숙되지 못한 인격, 잘못이 많은 삶 때문에, 쉽사리 내가 예수 믿는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고 지냅니다. 교회를 몇 년 씩 다니는 데도 주위 사람들이 내가 신자인 줄을 모릅니다. 셋째는 내 신앙의 가변성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행동이나 처신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합니다. 지금은 내가 믿음을 가졌지만 혹시나 내 신앙이 중단되거나, 변질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어떤 사유로 두려워하든지 공통점은 하나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입니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자유분방하게 살았는데, 믿음을 가진 후부터는 매사에 사람들의 평가를 받는 것이 부담스럽기만 합니다. 넷째는 신앙 때문에 받는 불이익입니다. 내가 신자인줄 모를 때에는 별 일이 없었는데, 알려진 후로는 이래 저래 압력을 받습니다. 곱지 않은 시선, 혹은 비난, 물심 양면의 손해를 당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 믿음을 드러내어 외치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사실을 담대히 알리세요. 오래 믿었든지 처음 믿는 사람이든지 상관 없습니다. 내 신앙을 드러내십시오.
당당히 내 믿음을 알리십시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당당히 믿음을 고백하십시오. 내 믿음을 인하여 사람들에게 당하는 여러 가지 박해를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와 주님의 관계를 세 종류의 관계로 비유하십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첫째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둘째는 상전과 종의 관계입니다. 셋째는 집 주인과 그 집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만일 누가 선생을 욕한다면 그 제자들이 욕먹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일 누가 상전을 비방한다면 그 종들 역시 비방을 받을 것입니다. 만일 누가 집 주인을 악평한다면 그 집 사람들 역시 악평을 당할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요, 상전과 종의 관계요, 집 주인과 그 하속의 관계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라고 비방했습니다. 죄를 씌우고 욕하고 때리고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비방을 당하고 욕 먹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밝은 곳에서 외쳐라! 큰 소리로 내 믿음을 알려라! 이단 사이비 교주들은 아주 은밀하게 가르칩니다. 밤중 어두운 데서 전합니다. 귓속말로 전합니다. 밤 12시 집회, 은밀한 산 속의 비밀 기도회! 속지 마세요. 성경은 분명히 이런 은밀한 사람들을 경고합니다.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롬2:16)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항상 당당합니다. 유대인의 회당 예배에 이런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랍비가 귓속말로 대언자에게 말하면 그는 회중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세요.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진리는 대낮에 당당히 전파됩니다. 결코 음성적으로 전해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요18:20-21)
그러므로 사람들이 무어라 말하든지 개의치 마세요. 오직 내 믿음을 당당히 드러내세요. 예배 생활을 드러내십시오. 기도하는 모습을 드러내세요. 일상의 말과 행실을 통해서 내 믿음을 보여주세요. 가정 예배를 드리세요. 직장에서 성경을 읽으세요. 친구들과 얘기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세요. 대문에 십자가를 달고, 자동차에 물고기 표시를 하세요. 식사 때마다 감사 기도를 하고, 길에서 찬송을 부르세요. 만나는 사람마다 내가 다니는 교회를 얘기하고, 받은 은혜를 말씀하세요.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이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쁨으로 여러분을 평가하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 하라
우리는 오직 하나만 두려워하면 됩니다. 즉,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 하세요.
先人들의 말씀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고 합니다. 밤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줍니다. 사나운 짐승보다도 귀신보다도 사람이 무섭습니다. 강도들이 무섭고, 폭력배들이 무섭습니다. 요즘 어딜 가나 폭력배들이 횡행합니다. 법정에도 폭력배, 입찰에도 폭력배, 정치인 근처에도 폭력배, 건설 현장에도 폭력배, 유통 없자들 근처에도 폭력배...폭력배들이 무섭습니다. 그런가 하면 합법을 가장한 권력의 폭력도 무섭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강도나 폭력배에게 죽는 사람보다 권력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킬링 필드”, “인종 청소”, “르완다 내전”, “수단 내전”, “이디오피아 내전”, “보스니아 내전”, “자폭 테러”, 각종 독재자에 의한 고문과 살인 등등.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이 가장 무섭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폭력은 종교의 폭력입니다. 가장 무서웠던 전쟁의 배후에 종교가 있습니다. 히틀러의 살인이나 십자군 전쟁,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성격의 전쟁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믿음 때문에 당하는 폭력과 죽음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에게 당하는 폭력과 죽음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그 까닭이 뭘까요?
첫째로, 사람은 우리의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사람의 몸은 어차피 시한부적인 존재입니다. 병들어 죽든지 전쟁이 나서 죽든지 사고로 죽든지 남에게 맞아 죽든지 순교하든지 결국은 죽습니다. 우리 몸은 땅에서 잠깐 살다가 사라져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육체를 떠나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어떤 죽음으로 육신을 떠났든지 우리 영혼은 다음의 삶으로 옶겨갑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은 아무도 손댈 수 없습니다. 강도나 폭력배나 공권력이나 그 누구도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 몸과 영혼의 다음 단계를 결정하십니다. 사람은 우리의 몸을 죽일 수는 있지만 살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흙으로 돌아간 몸을 부활시키십니다. 사람은 우리의 영혼에 티끌만큼도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 은 우리의 영혼을 지옥에 멸하기도 하시고 하나님 품에 두기도 하십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7) 그러므로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fear of God is the fear that cancel fear”(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두려움은 모든 두려움을 없애는 두려움이다” 이 세상에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외에 없습니다. 육체든지 영혼이든지 죽음이든지 삶이든지 하나님만이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의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그 능력으로 천국과 지옥을 주장하시고, 현세와 내세를 주장하시고, 물질과 靈界를 주장하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철저히 지켜 보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참새의 삶을 생각해 보세요. 군참새 집에 가면 꼬치에 죽 끼어서 팔리는 것이 참새의 운명입니다. 비싸지도 않습니다. 본문에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입니다. 앗사리온은 로마 화폐로써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불과합니다. 요즘 우리 돈으로 한다면 천 원, 혹은 이천 원 정도나 될까요? 생명의 가치에 비한다면 터무니 없는 값입니다. 이러한 값 싼 참새의 생명도 하나님이 지키시는 한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혹시 참새 사냥을 해 보셨습니까? 쉽게 잡히지 않습니다. 언젠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길에 참새 한 마리가 비실비실 하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도 날지를 않아요. 부상당한 참새인줄 알고 살금살금 다가가서 잡으려고 했더니 휙 날아갔습니다. 조금 날다가 또 내려 않길래 또 쫓아가서 잡으려고 했습니다. 또 날아가버렸습니다. 결국은 못 잡았어요. 저는 성경의 참새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놈의 생명을 지켜주시는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우리는 참새보다 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참새에게 가지신 관심의 천 배, 만 배 우리에게 더 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주님은 심지어 우리의 머리털 개수까지 다 세고 계십니다. 여러분 중에 아무리 자기 몸을 아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머리털을 세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침에 머리 빗으면서 “야, 오늘 35개 빠졌구나!” “오늘은 50 개 빠졌구나! 참 아깝다.”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사람의 머리털 수는 서양 사람이 8만 개 정도, 동양 사람은 10만 개 정도라고 합니다. 머리 부위에 따라 측면에서는 1평방 cm당 130개 정도, 정수리 부분은 200개 정도로 나 있습니다. 머리털은 하루에도 수 백 개씩 빠지고 새로 나옵니다. 이러한 신체상의 변화를 우리 자신은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 정도로 우리의 삶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난 당하는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억울한 일을 당하며, 눈물 흘리는 것을 모르시겠어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박해 당하고, 병들고 아파하는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가 비방을 당하고 억울해 하는 것을 다 아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고생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런 고난 속에서도 바울은 항상 이겼다는 점을 말하려는 겁니다. 바울이 강해서 이긴 게 아닙니다. 주님이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11사도가 다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버리신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순교를 사명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순교당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순교 당하는 순간까지 모든 박해자들을 이겼고, 모든 약함을 다 이겼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7-58)
주님을 시인하십시오
주님을 시인하세요. 그것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바라시는 일입니다. 是認이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是認이란 말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국가 간의 외교 관계입니다. 현재 한국과 중국은 뗄 수 없는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입니다. 정치 군사적으로도 미국 못지않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1992년 이전까지는 서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피차 이 세상에 중국이란 나라는 없었고, 한국이란 나라는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외교적 승인으로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외교적 승인이란 피차간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시인하는 행위입니다. 현재 북한이 핵을 내걸고 미국에 떼를 쓰는 게 뭡니까? 외교적 승인을 해달라는 겁니다. 대한민국은 소련이나 중국이 인정하고 있는데, 미국이나 일본은 북한을 승인하지 않고 있습니다. 외교적 승인이 없는 한 북한이란 나라는 지구상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국가 간에 외교적 승인이 없는 한 진정한 관계는 맺어질 수 없습니다. 한중 외교 관계가 없던 1992년 이전에 교역량은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수교 후에는 매년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2003년 9월에는 수출 351억 달러, 수입 219억 달러로 교역량은 총 570억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992년 3.5%에서 현재는 20%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도 외교적 승인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의 구주이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나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관계가 정식으로 맺어졌음을 선포하는 선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부터 내 인생의 목자시오, 주인이시오, 보호자시오, 공급자이십니다. 나는 주님을 영접함으로써 이제 주님의 자녀요 주님의 양이 되었습니다. 주님과 항상 교제합니다. 모든 신령한 것들을 주님께 공급받습니다. 내 모든 삶을 주님께 아룁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끊임없는 교류가 일어납니다. 주님을 시인한 결과입니다.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라고 하십니다. 입으로 주를 시인하고, 행동으로 시인하세요. 가정 생활을 통해서, 사회 생활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인은 외형적 관계에 있지 않고 실질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주님을 마음 한 가운데 구주로 모셔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나를 시인하면”이란 말은 헬라어로 “내 안에서 시인하면”이란 뜻입니다. 이미 나의 마음에 와 계심을 알고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자는 이미 예수님과 실질적인 관계가 맺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공적으로 선언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선언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 입으로 주님을 시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시인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인정하듯이 주님은 우리가 자녀임을 인정하십니다. 특별히 주님은 아주 중요한 두 곳에서 우리를 인정해 주십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의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아버지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때에 우리는 형편 없는 죄인의 모양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스가랴 3장에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 섰는데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성직자라 해도 하나님 앞에서 보면 더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하물며 일반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갈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주님이 우리를 변론해 주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저들의 죄를 대신하여 생명을 바쳤습니다.” 주님의 변론 하나로 모든 죄는 용서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시인하지 아니하면 주님도 우리를 심판대 앞에서 변론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제아무리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운다 해도 여전히 죄는 드러날 것이며, 하나님의 판결은 지옥의 형벌로 결정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시인할 때 주님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시인해 주십니다.
둘째로, 우리가 기도하는 모든 곳에서 주님은 우리를 시인해 주십니다. 즉,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인정받아야 되는 곳은 종말 심판의 장소만이 아닙니다. 현세의 매 순간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곳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주님은 우리 기도가 받아들여지도록 우리를 위해 변론해 주십니다. 주님 때문에 응답이 있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할 때에 주님의 공로가 없다면, 우리 기도는 응답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 기도는 항상 열납 됩니다. 어디서든지 주님을 불러 보세요. 그리하면 주님은 나타나시고 역사하십니다. 사도들을 보세요. 그들은 가는 곳마다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주님은 그 때마다 많은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사도들의 손길을 통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났습니다. 귀신이 쫓겨갔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게 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풍랑을 이기며, 뱀에 물려도 살아났습니다. 주님을 시인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능력입니다.
기도 생활은 우리가 주님을 시인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스위치를 켜면 전기가 들어옵니다. 수도 꼭지를 틀면 물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주님이 응답하십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3-1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4)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주님을 시인하는 곳에,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어디서든지 주님의 이름을 인정하고 부르세요. 그것이 곧 성도의 축복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 10:24-33 / 박조준 목사
지난 몇 주간 동안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을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제자를 택하신 일 그리 고 제자들을 세상에 내어 보내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제자의 길은 결국 평탄한 길이 아니라 환란과 핍박의 길인 것을 예고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핍박을 받을 것을 각오하지 않으 면 그리스도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한번은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너 자신을 부 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많은 사람이 다 물러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남아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험하고도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가지 못할 길은 아닙니다. 핍박과 환 란이 기다리는 길이지만 못갈 길은 아닙니다. 왜? 오늘 읽은 말씀 가운데 세번 반복되는 말들이 있습 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는 말씀입니다. 26절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 말라 28절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31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앞으로 당할 일들을 솔직하게 말씀하시니까 은근히 속으로 두려운 생각을 가지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살펴 보아도 세계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어느 민족 어느 가정을 막론하고 문자 그대로 공포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 이 지구상에 전보다 더 큰 어려움이 일어날까? 언제 3차 대전이 이 땅위의 어느 구석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월남 전쟁 때는 혹 시 월남에서 이런 세계적인 불행의 도화선이 되지 않을까? 얼마 전만 해도 중동의 전쟁이 3차 대전의 시작이 아닌가? 온 세계인류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6.25 사변의 참담한 경험을 가진 우리 민족은 얼마 전만 하더라도 남북한의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적십자사 대표단과 남북 조절위원들이 서로 휴전선을 넘나들면서 대화의 기회 를 가지며 화해의 무드가 조성되어 가는 듯 할 때 우리는 얼마나 희망을 가지고 잘되기를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당장에 통일은 어렵더라도 흩어진 가족과 친지가 서로 안부라도 알고 지낼 수 있었으면 또 는 서로 헐뜯고 싸움을 거는 일이라도 없이 서로가 안도감을 가지고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국민 의 기대였습니다. 그러나 요사이 사정을 보면 북한에서 7 . 4 공동성명을 무효화 한다고 일방적인 발표를 하고 전이 나 다름없이 남한에 대하여 호전적인 자세로 무력 적화통일을 부르짖으며 일당백 의 표어를 내걸고 전쟁준비가 다 되었다고 임전태세에 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전쟁에 대한 불안 또는 정치에 대 한 불안, 경제에 대한 불안 가운데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럴때 우리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물론 두려워하는 마음 즉 이 공포심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우리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로써 하나 님께서 이 본능을 우리 인간에게 주실 때에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고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공포라는 감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높은 곳에 올라가면 무서워합니다. 또는 깊은 곳을 들여다 볼 때도 두려워합니다. 혹은 어린이들이 어두운 밤을 만나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높은 곳에 올라가거나 깊은 곳을 내려다 보거나 어두운 밤을 만나거나 낯선 사람을 대할 때 조심하게 됩니 다. 이런 의미에서 본래 공포심은 우리 인간생활을 도와주기 위해서 생명을 보존하는데 유익하기 위 해서 우리의 유익한 본능 가운데 하나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다음부터는 모든 우리를 유익하게 해주는 본능이 본래의 지경 을 지나서 도에 넘치게 되고 또한 변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두려워하여야 할 하나님을 두려 워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어떤 때는 도에 지나치게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공포심이라는 것은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 인간생활을 해하는 여러가지 하나의 감정적 요소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람의 생명에 있어서 심리적 생활 육체적 생활에 있어서 오히려 해독을 끼치게 되었다고 오늘의 과학자들이 연구결과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령 심리적으로 보아도 사람이 두려운 마음에 싸이게 되면 볼 것도 바로 보지 못하고 들을 것도 바로 듣지 못하고 발할 것도 바로 말하지 못하고 말하자면 그 심리상태가 마비되는 것입니다. 애들이 흔히 쓰는 말로 얼어 버리고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리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육체적인 것도 그렇습니다. 즉 두려운 마음은 우리 건강에도 얼 마나 손해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 몸에 병이 생기는 것이 꼭 병균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 니다. 반드시 부상을 당해서만 오는 것도 아닙니다. 소위 기능적 질병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러가지 심리관계로 육신에 지장을 주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특별히 신경 계통의 병, 소화기 계통의 병, 또는 혈압이나 심장병 같은 것은 대개 두려운 마음이 싸여서 근심과 염려로 세월을 보낼 때 이런 병이 우 리에게 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두려운 가운데서 근심과 걱정, 염려에 싸여 얼마 동안을 지나게 되면 그 사 람의 신경이 쇠약해지고 마지막에는 점점 예민해지다가 정 심해지면 히스테리같은 상태로 될 수가 있 습니다. 결국 사람이 이렇게 두려운 가운데 싸이게 되면 그 심리상태가 육체까지도 점점 마비가 되어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써커스의 삐에로도 줄을 타다가 무서운 마음이 생기게 되면 떨어진다고 합니다. 전쟁에 나가는 군 인도 흔히 무서운 생각에 휩싸이면 그 싸움에 지고 만다고 합니다. 어떤 병에 든 사람도 그 병 때문 에 죽는 것이 아닌가고 두려운 생각이 들면 그 병에서 일어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보통 무 서운 마음이 일어날 때 미신을 숭배합니다. 왜? 무서운 액을 피해 볼려고 미신을 쫓아간다고 합니다. 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 인간생활에 주는 해독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여러분 ! 이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두려움을 이기고 튼튼한 마음으 로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서 활보하면서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 ! 분명히 들으세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제자 로 삼아주신 것은 이 두려운 마음을 이기고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기쁘고 즐겁 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믿는 사람들 가운데 아직도 이런 평강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 읽은 말씀가운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거듭 거듭 주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두려워 할 둘 모르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1 . 26절에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감추인 것이 들어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즉 진리는 언제나 승리하기 때문에 진리편에 선 사람은 당장에 어떤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라틴 격언에도 진리는 위대하고 진리는 승리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진리를 믿는 우리는 이 신앙 때문에 어떤 어려움을 받거나 희생을 당하고 심지어 수 교 당하는 한이 있어도 모든 것은 사실대로 밝혀질 날이 올 것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 다. 시편 37편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 하지 말찌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 할 것임이로다. 여호와 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너희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의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찌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 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찌라 도 없으리로다. 진리 위에 짐시 어려움을 당하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결국 진리는 이깁니다. 땅을 차지 합니다. 그 러므로 진리인 복음을 전하는 일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전파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밀 씀처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인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에 두려워 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스코틀란드의 유명 한 요한 녹스가 세상을 떠나 고별 예배를 드릴 때 그에 대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한 나머지 결코 어떤 사람도 두려워하지 아니한 사람이 여기에 누워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편 에 하나님편에 서게 되면 진리 아닌 어떤 인간의 세력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새벽 기도회때 읽은 시편 18 : 6 - 7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하였습니다. 2 . 28절에 몸을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육체는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에는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 의 몸을 옥에 가둘 수는 있으나 그 영혼을 구속할 수 없습니다. 왜? 영혼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 문입니다. 빌립보의 관원들이 바울과 실라의 육신을 때리고 깊은 옥에 가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영은 오히려 더 자유로워 하나님께 찬미하며 기도로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인간의 형벌은 영원한 형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워 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전에 랍비 가운데 요하난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중병에 들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번은 그의 제자들이 병 문안을 갔었다고 합니다. 요하난은 제자들을 보자 슬피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대하신 선생님 ! 왜 우십 니까? 그때 요하난의 대답이 내가 오늘 인간의 왕 앞에 끌려가고 있다면 그가 내게 노해도, 감옥에 넣어도,나를 죽여도 염려하지 않을 걸세. 또 혹시 말로 달래거나 뇌물로 그를 매수할 수도 있을거야.
그러나 지금 나는 영원하신 왕 하나님 앞에 끌려가고 있어. 그의 분노, 그의 투옥, 그의 사형선고는 영원한 것이고 말로나 뇌물로도 통하질 않아. 그리고 지금 나에게는 두 길이 있는데 에덴으로 가는 길과 지옥으로 가는 길이야. 그런데 어느 길인지 자세하지 않아, 그래서 울고 있어.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 심판은 영원한 것입 니다. 인간적인 심판이나 형벌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며 영원합니다. 그러 므로 인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3 . 31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할 세째 이유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된 우리를 자상하게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부모는 우리를 혹시 잊을 수 있고 버릴 수 있으나 하나님은 그의 자녀된 우리를 잠시라도 잊지도 아니 하시며 버리지 아니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사람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이렐이란 분은 시편 136편을 아주 의미깊게 해석하였습니다. 이 시편에서는 창조주 하나님 하늘 과 땅을 지으시고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신 하나님을 말하고 그 다음으로는 역사의 하나님에 대해서 말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애굽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구해 내시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워주신 하나님 을 말씀하였습니다. 끝으로는 모든 육체에서 식물을 주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계를 만 드신 하나님의 역사를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식물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류 역사의 대 사건에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인간의 육체를 키우시고 돌보시는 가운데도 나타나십니다. 우리의 쓸 것도 미리 아시고 주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참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꽃 하나 하나를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아 주시지 않겠느냐? 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애가 어머니 곁에서 잠을 자다가 밤에 깨어보니 참 캄캄합니다. 어머니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아니합니다. 자연히 어린애는 무서워서 웁니다. 어두워서 무섭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그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다시 잠이 들겠습니까? 아무리 어두워도 어머니가 옆에 있다가 아이의 가슴에 손을 얹고 두드리시며 엄마 여기 있어 어서 자라 하면 그 어린아이의 울음은 뚝 그치고 평안한 마음으로 조금 있다가 잠이 듭니다. 무엇이 어린아이로 하여금 무서운 것 없이 평안히 잠이 들게 하였습니까? 어 머니의 손입니다. 그 애기에겐 어머니의 손을 통해서 어머니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 어린이로 하여금 무서울 것이 없이하고 평안히 잠들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 여러 곳에 거듭거듭 두려워하는 우리를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면서 하나님의 손으로 우리를 두드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주님을 의지하고 믿는 길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어 보 면 약한 인생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고 약속하고 권면하신 것이 여러번 나 옵니다. 창세기 15:1에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26:24에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열왕기하 6:16에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이사야 41:10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가 약하다고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은 강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진 것이 없다고 두려 워 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불같은 시험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만납니 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기게 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약속을 분명히 믿습니까?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리라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마 10:24-33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반복하셨습니다. 26절에서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고, 28절에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으며, 31절에서도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누구에게 왜 하신 것입니까? 오늘 본문보다 앞에 있는 마10:1에서는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했고, 마10:5에서는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했으며, 오늘 본문보다 뒤인 마11:1에서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했습니다. 즉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그들을 전도파송하시기에 앞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말씀은 열두 제자들을 통하여 오늘 우리 모두를 향해 주신 말씀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마지막 절인 32절과 33절에 가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 우리를 포함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제자도"(Discipleship)에 관한 가르침이 이 본문 속에 들어있음을 예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그의 명령을 따라 사방에 흩어져 다니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예수의 제자들로서 알려지게 될 것과 그 때부터 그들이 당하게 될 미움과 박해를 예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예견과 예고의 말씀을 우리는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22-23절에서 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그래서 제자들이 그러한 미움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용감하게 복음을 전하도록 격려하실 필요를 느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고, 특히 세 번씩이나 반복하신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24-25절의 말씀은 제자들이 미움과 박해를 받게될 때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께서 먼저 받으실 고난을 생각함으로써 세상사람들로부터의 미움과 박해를 이길 것을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24-25절의 말씀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그 의미가 아리송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맥락을 떠나서, 예를 들어,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는 말씀을 "제자는 절대로 선생보다 나을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인류에게는 오직 퇴보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언제나 제자가 선생보다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선생보다 더 훌륭한 제자들이 있었기에 인류는 오늘날과 같은 눈부신 문명세계를 발전시켜온 것입니다. 요14:12에 보면 예수님 자신도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24-25절 말씀의 참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미 받기 시작하셨고 앞으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받게 될 미움과 박해와 고난을 염두에 두시고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24절의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하신 말씀은 그 뜻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온갖 박해와 십자가라는 극도의 고난을 받을 것인데 제자들은 그보다 더한 박해와 고난을 받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고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시키신 것입니다. 25절의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하신 말씀은 그 뜻입니다. 25절 하반절의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하신 말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집주인에, 제자들은 그 집 사람들에 비유하셨습니다. 이미 바리새인들을 위시하여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마9:34)고 비방했었고 아예 예수님 자신을 유대인들이 마귀로 여기는 바알세불 즉 이방신의 우두머리로 몰아세우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도 그들이 그렇게까지 박해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박해를 가할 것은 더더욱 분명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하신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 박해를 받을 것이라는 뜻이기보다, 제자들도 박해를 받을 것은 더더욱 분명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과 같이 그들도 미움과 박해를 받을 것임을 예고하시고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당할 고난이 주님과 함께 받는 영광과 승리의 고난임을 상기시키시며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26절을 봅니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여기서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의로우신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그의 심판의 날을 상기시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의 모든 일은 반드시 다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게 되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미움과 박해와 고난을 받은 사람들은 의인으로 드러날 것이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의인들을 박해한 자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자들로 드러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박해를 당할 때마다 이 의로우신 심판자 하나님과 그의 심판의 날을 생각함으로써 낙심하거나 위축되지 말고 인내하며 끝까지 당당하게 복음의 진리를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밀히 조용히 가르쳐주신 모든 말씀을 겁먹지 말고 나가서 큰 소리로 외치라는 것입니다. 27절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그러나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밝은 곳에서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은 스스로에게 박해와 죽음까지도 자초할 수 있는 일임을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으며 그것을 제자들에게 감추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람들이 몸은 죽일 수 있어도 결코 영혼을 죽일 수 없음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상기시키시며 세상사람들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오직 온 세상의 주인이시고 참된 생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것이 28절의 말씀입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이렇게 제자들에게 오직 하나님 외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음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보다 더 확실하게 제자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시며 그들 앞에 놓인 위험과 박해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용기와 담대함을 잃지 않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참새 한 마리나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하나님의 주권과 돌보심 가운데 있는 것인데, 바로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고 그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29-31절은 그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그러므로 이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사람이 두려워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마지막 심판의 날에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하늘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되고 승리와 영광과 하나님나라의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2-33절의 말씀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여기서 "나를 시인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신뢰하며 그에게 충성을 선언한다는 뜻입니다. 박해받는 상황하에서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신뢰하며 그에게 충성을 선언한다는 것은 죽음까지도 무릅쓰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인정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상급으로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라." 훗날 사도 요한에게 주신 계시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3:5)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르려는 무리들의 제자도에 대한 몇 가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온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도록 예수님에 의해 파송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일을 행하기 위하여 이 세상으로부터 여러 모양으로 미움과 박해와 고난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러나 그러한 위험과 박해와 고난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믿음으로 오히려 더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그 외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참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의로우신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불의에 굴하지 않으며, 지금 당장보다 나중의 승리와 영광과 영원한 삶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제자들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얻은 제자도를 가슴 깊이 새기며 주님 앞에서 받은 바 사명을 성실하고 한결같이 행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의 일 하다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맙시다. 주의 일 열심히 하고 바르게 하려면 꼭 미움과 비방과 박해와 고난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미움과 비방과 박해와 고난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더 괴로움이 큽니다. 겉으로는 안 그런척하면서 뒤에서 숨어서 미워하고 비방하며 박해하고 고통을 줍니다. 그러기에 더 큰 환멸을 느끼며 더 크게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숨어서 행하던 비방과 박해도 다 드러나고 부당하고 억울하게 당하던 고난도 다 밝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의 의를 드러내실 것이며 악을 행한 모든 자들에게 정의의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언제나 마지막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고 흔들림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예수님의 제자의 자격요건
마 10:24-42 / 안병호 목사
아무리 자식이 부족해도 누가 내 자식 욕하고 흉보면 싫어한다. 아무리 내 남편이 부족해도 남이 흉보면 싫은 것이다. 이것은 싫으나 좋으나 자식이나 남편은 나와 분리 될 수 없는 공동 운명체 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신자와 예수님과는 서로 분리 될 수 없는 공동 운명체이므로 예수님은 신자가 세상에서 인정을 받지 못할 때 기뻐하지 못하고 신자 역시 예수님이 존귀함을 받지 못할 때 마음이 아픈 것이다.
“제자가 그 선생 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과 제자와의 관계는 분리 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병행 구절을 보는데 종과 제자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종이란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곧 주인의 재산인 노예를 의미한다. 종과 주인은 일생동안 서로 분리 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런 점에 있어서 종과 같이 일생동안 예수님과 분리될 수 없는 연대감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이 말씀에서 제자란 종처럼 주인에게 예속 되었을 뿐 아니라 감히 주인과 같은 자로 인정함을 받는 놀라운 특권이 있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우리를 자신과 하나 된 신분으로 보신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를 영접하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아무나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제자가 되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Ⅰ。제자가 되는 첫 번째 조건은 핍박을 받아야 된다.
10:25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해 받아 핍박을 받았듯이 너희들도 오해 받아 핍박을 받을 것이다 는 의미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자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을 했다. 요한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고 비난 했다. 예수님을 마귀로 몰아버린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을 정신병자로 몰아 버린다는 뜻이다. 미국 같은 나라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취급하여 정신병원에 가두어 버린 것이다. 흔히 우리 교포 가운데 영어가 시원치 않아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또한 그런 경우에 항의 하다 경찰에게 미움을 받으면 정신병자 취급하여 정신 병원에 감금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처럼 무서운 일이 없다. 아마 예수님 당시에도 종교적인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귀신 들린 자로 몰리게 될 때 그 사회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추방당하게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무서운 핍박인지 모른다. 예수님에게도 이런 핍박을 했는데 하물며 그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핍박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떤 핍박을 받아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첫 번째 이유는 모든 것이 밝히 들어 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26,27).
“그런즉 저희를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기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26).
감추인 것이 어느 날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감추어졌던 모든 진실이 드러나게 되는 날이 반드시 있게 될 것이다. 원수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무엇을 했는가, 그들이 핍박한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떻게 벌을 받을 것인가 등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의인이 누구인가, 그들이 한 일이 무엇인가 그들이 영화롭게 했던 분은 누구인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얼마나 고귀한가, 그들이 어떤 상을 받을 것인가 등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영광의 날에 그들의 영광 가운데서 얼마나 빛날 것인가를 생각할 때 그들이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어두운데서 이른 것을 광명한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으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27)
예수의 제자는 핍박이 있다고 해서 결코 진리를 말하지 못하고 침묵만 하고 있는 자가 아니다. 어떤 자들 앞에서도 어두운데서 주님으로부터 듣고 깨달은 말씀을 조용한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귀속 말로 들은 진리를 담대하게 선포해야 한다. 예수님도 아무 말하지 않고 불의를 보고도 침묵만 하고 있었더라면 십자가에 죽지 않았을 것이다. 담대하게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진리를 말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까지 당한 것이다. 바울도 어떤 권세 자들 앞에서도 감히 쇠사슬에 매인 것 외에는 나와 같기를 원한다고 담대히 진리를 선포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제자는 어디서나 어떤 핍박과 위험이 있을지라도 진리를 선포해야한다.
두 번째 이유는 어떤 핍박도 우리의 영혼을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는 자를 두려워하라.”(28) 여기서 “멸하는”이라는 말은 전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내려지는 영원한 심판에 대한 고통을 의미한다. 여기서 “지옥”은 심판 날 후에 악인의 몸과 영혼이 거할 처소를 말한다. 몸과 영혼의 전인적인 인격의 구원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제자에게는 있다. 그러므로 잠시 동안의 이 땅에서의 몸의 위험을 조금도 두려워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않고 핍박을 담대히 감당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이유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29-31).
10:30 /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하나님께서는 죽어가는 참새까지도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함께 하심으로 지켜 주신다는 것이다. 하물며 참새보다 귀한 인간을 지켜 보호하신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30절 말씀에서 “세는 것”은 단순히 계산한다는 말이 아니라 가치를 더하고 관심을 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제자는 하나님께서 깊이 관여하시고 보호하신 분이시다.
32,33에서 예수님은 장차 충실하게 제자의 직분을 감당한 제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해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10:32-33 /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그러므로 제자들은 어떤 핍박이 있을지라도 사람 앞에서 예수를 시인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 앞에서 예수를 시인한다는(confess in Christ) 말이 무슨 듯인가? 나는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을 공표한 것이다.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 우리를 통해서 예수를 보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이 제자를 시인한다는(confess in him) 말의 뜻도 예수님이 제자 안에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보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보시게 될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믿게 될 때 우리는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희생이 있고 핍박이 있어도 능히 핍박을 감당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이 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한 자는 예수의 제자의 자격이 없는 자이다.
Ⅱ. 예수님의 제자의 조건은 예수님을 사랑해야한다.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우리는 부모도 사랑해야 하고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사람을 똑 같이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람에 따라서 사랑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결혼한 남편보다 옛날 애인을 더 사랑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단 결혼을 했으면 남편을 이 세상 어떤 남자보다 가장 사랑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누구도 다른 자식과 자기 자식을 똑 같이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는 누구를 가장 사랑해야 하는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 이 말에 대해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예수님을 그 누구 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고 했지 예수님만 사랑하고 이제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흔히 기독교인들 가운데 잘못 생각하여 예수를 믿는 후로는 부모도 남편과 아내도 자식도 전혀 돌보지 않고 무관심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도 고르반하고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 부모에게 안 드려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성경의 가르침은 결코 그것이 아니다. 성경은 부모도 사랑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라고 하였다. 성도들끼리도 사랑하라고 하였다. 신자는 사랑에 있어서 믿지 않는 자와 비교해 볼 때 비교할 수 없도록 사랑이 넘쳐야 하는 것이다. 다만 본문에서 가르치는 것은 부모보다도, 처자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철저한 하나님 우선권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지 예수님 사랑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다 미워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많이 있는 것이 문제이다. 남편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한다든가 아내를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경우가 있다. 물질을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합당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을 때 이삭을 사랑하지 말도록 하신 것이 아니고 이삭보다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도록 하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이 오히려 빼앗아 갈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제일 많이 사랑해야 한다.
언젠가 옛날 온마음교회 나왔던 성도가 집에를 찾아 왔었는데 자기가 과거 온마음 교회에 다닐 때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던 가를 이야기 했다. 그런데 그때처럼 행복했던 때는 없다고 하였다. 다시 한번 그 때의 첫사랑을 회복하고 싶다고 하면서 성경공부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 동안 장사를 했는데 장사하는 열심보다 예수님을 더 섬긴다면 얼마나 믿음이 좋아질 것인가라고 말했다. 참으로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도록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면 이것처럼 큰 축복이 없고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리라 믿는다.
Ⅲ.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지 않는 사람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8)
십자가를 진다는 말씀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듯이 제자도 십자가를 저야 한다는 말이다. 문자적으로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 아니고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아무리 그 일이 어렵고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이라도 즐겁게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흔히 십자가를 진다고 하면 하기 싫은 일, 고통스러운 일을 억지로 감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부담스러운 남편, 부담스러운 부모 등을 섬겨야할 때 이것을 자기 십자가라고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자발적으로 감당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 고통스럽고 많은 희생이 있더라도 심지어 죽음의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 일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당할 때 십자가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명하시는 모든 일을 짐이나 부담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감당해야 한다. 억지로 마지못해서 한다면 그것은 결코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자기 부인이 남편을 내조하는데 있어서 기쁨으로 어떤 어려움도 다 극복하고 감당해야 그 일이 참으로 십자가요 그 십자가를 지게 될 때 남편에게도 큰 기쁨이 되고 부부사이의 사랑은 돈독해 질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마지못해서 와이샤쓰 하나를 대려 주는데도 짜증을 내고 정성 드려 밥한 끼를 해주지 않고 페스트푸드나 사다 놓고 먹고 싶으면 먹고 먹기 싫으면 말라는 식으로 하면 무슨 사랑이 가겠는가? 그러면서도 항상 남편을 위해서 자기는 큰 짐이나 진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것은 남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니다.
무조건 고통을 당한다고 해서 그것이 십자가가 아니고 십자가는 마음에 자원하는 마음이 있고 자발성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지 않는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격이 없는 자이다. 물론 우리의 육적인 성품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 자발적이 될 수 없고, 부담이나 짐이 안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지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함으로 우리가 육의 소욕을 죽이고 영의 지배를 받게 될 때 그 때부터는 예수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모든 일이 참으로 즐거워서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앞을 다투어 자발적으로 한다. 우리 주님은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상을 쓰며 억지로 하는 일을 별로 기뻐하시지 않는다. 제자는 이처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보통의 축복이 아니다. 예수님의 대리자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의 전권 대사이다. 장차 하나님 나라에 가면 하나님이 친히 영접해 주시고 상급을 주시는 그런 사람이다. 우리는 이름 있는 교수의 제자만 되어도 앞길이 열리게 된다. 그래서 누구의 제자냐 하는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배경이 된다. 하물며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른다. 그 제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 가지 기본적인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 예수님을 위해서 핍박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을 위해서 많은 해를 받아야 한다.
결코 그것이 손해 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다 갚아 주시고 책임 져 주시기 때문이다.
둘째,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 보다도 예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부모도 사랑해야 고 자식도 사랑해야 하고, 남편도 아내도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 누구 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다.
셋째, 자기 십자가를 저야 한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모든 일을 스스로 선택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야 한다. 아무리 힘이 들고, 희생이 요구되고, 감당하기 어려워도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감당해야 한다. 그리할 때 아! 나는 예수의 제자이구나 하는 확신이 들게 될 것이다. 여러분에게 이 세 가지 제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었습니까? 아직 갖추지 못했다면 이런 자격을 갖추고 싶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이 제자의 조건을 갖춘 훌륭한 제자가 되기를 빕니다.
주님의 시인을 받는 길
마 10:26-33 / 이한규 목사
< 하나님을 주목하고 시인하라 >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다. 진실하게 믿으면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병도 낳게 하신다. 그러나 병이 낫는 것 이상의 기적이 마음의 병과 인격 장애가 치유되고 변화되는 것이다. 사람의 변화는 쉽지 않다. 내 힘만으로는 사소한 악습도 잘 끊지 못한다. 남을 변화시키려고 너무 안달하지 말라. 나도 나를 쉽게 바꾸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쉽게 바꾸겠는가? 그러나 진실로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선한 변화가 일어난다.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지만 사실상 기독교 믿음의 본질은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기적을 믿음의 핵심 근거로 삼는다. 강신무당도 기적을 내세운다. 그러나 기독교는 믿음의 근거를 기적이 아닌 계시에 두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라는 지식에 둔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믿는다’라는 사실보다 ‘하나님’에 더 강조를 둔다. “얼마나 열심히 믿느냐?”보다 “얼마나 바르게 믿느냐?”가 중요하다.
성경에 나오는 치유의 기적은 누가 주셨는가? 하나님이다. 병자가 나았다는 사실보다 하나님이 치유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만사를 주관하신다. 그 진리는 하나님이 기적을 주신다는 사실보다 위대한 진리다. 하나님을 기적을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기적 외에 나머지 평범한 삶도 방치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기적의 하나님으로만 제한하면 참된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 힘들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일도 주관하시고 평범한 일도 주관하신다. 즉 하나님은 기적적인 일부의 삶만 주관하시지 않고 기적 외에 수많은 평범한 삶도 주관하신다.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전인격을 맡길 때 선한 변화의 기적이 나타난다. 때로 하나님은 이미 주신 복을 빼앗아 가시기도 한다. 하나님을 무섭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왜 복을 주셨는가를 기억하라는 뜻이다. 늘 하나님만 바라보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주목하고 시인해서 하나님의 주목과 시인을 받는 것이다.
< 주님의 시인을 받는 길 >
본문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주님이 누구를 시인하고 누구를 부인하는지에 대한 말씀이 나온다. 주님의 시인을 받는 성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박해를 두려워하지 말라
박해를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문 26절을 보라.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왜 박해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람이 자신의 행위를 숨겨도 하나님은 사람의 모든 행위를 아시고 공의로 심판하신다. 결국 이 말씀은 정직하고 담대하게 살라는 뜻도 있고 은밀히 선을 베풀라는 뜻도 있다.
나의 헌신을 드러내지 말고 남이 몰라주어도 속상해하지 말라. 오히려 나의 은밀한 헌신을 나만 아는 것으로 인해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짓고 기뻐하라.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사람들이 큰 헌신을 감춘 나를 몰라주고 작은 헌신을 드러낸 남만 칭송해도 억울하거나 속상해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다 알아주시고 갚아주심을 믿기 때문이다.
<월새기> 사역을 하면서 감동할 때가 많다. 세상에서는 큰 손 고객이 직원에게 더 요구하고 더 대접받으려 하고 심하면 갑질도 하지만 <월새기> 사역의 큰 손 후원자는 저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저희 사역자들에게도 너그럽게 대하고 어쩌다 통화가 되면 요구는 없고 따뜻한 위로와 감사의 넘치게 말을 해 준다. 가끔 저희 사역자가 감사를 표현하면 자신이 더 감사하다고 한다. 그처럼 선교하고 큰 손 헌신을 하다 보면 점차 언행도 선해진다. 결국 소리 없는 헌신은 선한 인격이 체질화되는 엄청난 복도 가져다준다.
하나님의 일과 선교 사역에 소리 없는 큰 손 후원자가 되는 비전을 가지라. 크게 헌신한 나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전혀 속상해하지 말라. 그때 “이 헌신은 하나님 앞에 기억되어 다른 축복의 열매를 낳을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이 참된 헌신이고 그런 참된 헌신에 하나님이 더욱 넘치는 보상을 허락하신다. 나의 공로를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오히려 기뻐하라. 그로 인해 불의의 사고가 막아지고 하나님이 축복의 뒷문을 든든히 막아주셔서 다른 축복이 새 나가지 않게 하실 것이다.
2.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본문 28절을 보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요한계시록 21장 7-8절을 보면 성도에게 두려움은 불신과 행악과 살인과 음행과 마술과 우상숭배와 거짓과 같은 큰 죄로 언급되고 있다. 왜 두려워하는 것이 큰 죄인가? 하나님을 패배자처럼 만들고 점차 두려움이 학습되면서 결국 파멸을 낳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밤에 밖에 나가자고 떼쓰는 것을 막으려고 “지금 밖에 달걀귀신이 기다리고 있어.”라고 하면 어른에게는 장난이 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정서적인 충격이 된다. 그러면 어른이 되어도 집 밖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또한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어어, 저거 뭐야?”라고 하면 어른에게는 장난이 되지만 어린아이에게는 정서적인 충격이 된다. 그러면 허상을 진짜로 여기면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고 그런 두려움이 학습되면 점차 병적인 공포로 진전된다.
한 여인이 비행기 사고로 가족을 잃고 비행기 공포증이 생겼다. 비행기가 자동차보다 훨씬 안전하고 사고 확률이 적다는 합리적인 생각도 그녀의 두려움을 해결하지 못했다. 그처럼 과거에 만들어진 기억과 상처의 연장선상에 있는 두려움도 많다. 두려움의 대상이 실제적인 것이거나 상상의 산물이거나 상관없이 현재의 정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사소한 두려움도 경시하지 말고 말씀으로 잘 털어내라.
3. 하나님을 더 알려고 하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믿음이 생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첫째, 하나님은 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다(29절). 한 앗사리온에 두 마리가 팔리는 참새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다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가치 없게 보이는 생명체도 돌보신다는 뜻이다. 하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제자를 돌보시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너희 아버지’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나를 돌보신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한 성도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다.
둘째, 하나님은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다(30절). 나보다 나를 더욱 잘 아시는 하나님은 나의 체질과 감정을 아시고 나의 형편과 슬픔과 고독까지 아신다. 나를 잘 아신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몸과 삶의 곳곳에 미쳐 있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 나를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보증한다. 그 사실을 알고 용기를 내라.
셋째, 하나님은 나를 귀히 여기는 하나님이시다(31절). 본문에서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첫째는 선악이 다 드러날 것이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고(26절), 둘째는 박해자가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고(28절), 셋째는 제자는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존재이기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31절).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라. 하나님은 그 믿음을 결코 외면하지 않고 영생의 복과 영향력의 복을 허락하실 것이다.
4. 예수님을 시인하고 전파하라
예수님은 승천 전에 2가지 명령을 남기셨다.
첫째,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는 명령이다(행 1:4). 그때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 날짜를 묻자 예수님은 그 날짜는 그들의 알 바가 아니라고 하셨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재림 날짜를 알겠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면 현실 극복 능력과 문제 극복 능력이 크게 약해진다. 하나님이 모르게 하시는 것은 모르는 상태로 놔두고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라.
둘째,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명령이다(행 1:8). 증인이란 헬라어는 순교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순교했다. 그런 고난과 박해가 예상되어도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릴 때는 가만히 기다리지 말고 일하면서 기다리라. 증거하는 삶은 인생을 활기차게 만들고 성도를 성도답게 만들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든다.
기독교는 명상의 종교가 아니라 증거의 종교이기에 진리의 실천을 중시한다. 진리가 온전하게 되려면 내가 확신한 진리가 남에게도 진리가 되도록 하라. 복음 증거는 성도의 기본 사명이다. 다 신학교에 가라는 말은 아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처음 목격한 목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체험 후에 곧 자기 일터로 돌아갔다(눅 2:20). 그처럼 무작정 신학교나 기도원에 가기보다 자기 삶의 현장에서 성도답게 사는 일부터 시작하라.
말로만 주님을 시인하지 말고 삶으로도 주님을 시인하라. 말의 시인은 있지만 삶의 시인이 없으면 남들의 냉소를 받고 주님과 교회를 오히려 부끄럽게 만든다. 차라리 말은 조금 줄이고 성도다운 삶으로 주님을 시인하라. 예수님을 어떻게 사람 앞에서 나타내느냐에 영혼의 성패가 걸린 줄 알고 삶으로 예수님을 전파하라. 예수님을 말보다 삶으로 전파하려고 하면 점차 선한 인격이 체질화되면서 다른 성공과 승리도 따라온다. 늘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증거하며 사는 주바라기 인생으로 살라.
진짜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마 10:26-33 / 소강석 목사
옛날, 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밤에 한 아줌마가 공동묘지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앞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무슨 도깨비가 나타난 줄 알고 아줌마는 깜짝 놀라서 간이 떨어진 줄 알았습니다. "아저씨! 무슨 인기척이라도 하시고 오셔야지요? 얼마나 놀랐는지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그러자 아저씨가 아줌마에게 "그래도 아줌마는 오줌이라도 안쌌잖어유? 나는 얼마나 놀랬는지 다 오줌으로 젖었시유?"
삶은 하나의 공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끝없는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질병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사고에 대한 두려움... 세상에는 얼마나 두려움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진짜 두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진짜 무서운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몸이 죽는 것보다 영혼이 죽는 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물론 육신이 죽는 것도 정말 무섭고 두려운 일입니다. 죽음은 모든 관계를 다 단절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형수들이 사형장으로 갈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1초라도 더 살고 싶어서 갈지 자로 걸어간다고 합니다. 하늘 한번보고 땅한번 보고. 그러다가 실족하여 넘어지면 일어나면서 하는 말이 "워매, 하마터면 죽을뻔 했네"
또 니이체는 인생을 줄타기에 비유했습니다. 외줄기 가는 줄에 생명을 걸고 한발자국, 한발자국씩 발을 떼어놓는 곡예사야말로 가장 심각하고 진지한 인생의 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줄을 타는 곡예사는 뒤로 물러설 수가 없습니다. 방심도, 휴식도, 체념도 불가능합니다. 곡예사는 떨어져 죽지 않기 위해 정신을 차리고 집중을 다해 외줄을 걸어갑니다.
바로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니 이런 외줄타기 인생은 죽음을 두려워 할 수 밖에요.
그러나 이런 육신의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거든요.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예수 믿는 자에겐 영원한 천국이요 믿지 않는 자에겐 영원한 지옥입니다. 천국은 영원히 우리 영혼이 사는 곳이요, 지옥은 우리 영혼이 영원히 저주를 받고 죽는 곳입니다.
지옥은 쉬지 않고 유황불이 타는 곳입니다. 구더기가 쉬지 않고 살을 뜯어먹는 곳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 영혼이 이런 곳에 떨어진다고 한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기독교가 한창 핍박을 당하고 있던 때 서머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폴리갑이라는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가 로마황제를 주로 안 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는다고 사형장에 섰습니다.
서머나의 총독이 마지막으로 폴리갑에게 권고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만 부인하고 로마황제를 주라고 한번만 시인해라. 그러면 살려주겠다" 고 합니다.
그러자 폴리갑은 말합니다. NO! 아니오."우리 주님은 80평생에 나를 단 한번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는데 내가 어떻게 주님을 부인할 수 있겠소. 만일 당신이 나에게 한시간 동안만 복음들을 기회만 준다면 다시는 이런 말을 나에게 하지 않을 것이요. "
그러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총독의 호위병들과 군중들이 저놈이 아직 뜨거운 불꽃 맛을 안 봐서 그렇다고 하면서 짐승의 밥이 되게 하지 말고 불에 태워 죽이자고 합니다. 그래서 서머나 총독은 폴리갑을 뜨거운 풀무불에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폴리갑이 엄숙한 자세로 총독에게 합니다.
"당신은 나를 잠깐 뜨거운 불에 던지지만 당신이야말로 영원히 뜨거운 지옥 불에 던져지고 말 것입니다."
바로 그때 폴리갑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같이 광명한 모습이었고 총독의 얼굴은 두렵고 떨리는 공포의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마치 그 얼굴은 지옥의 그림자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서머나의 총독은 그런 지옥의 얼굴을 보여야 했겠습니까? 그는 영혼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짜로 무서운 것은 육신이 죽는 것보다 영혼이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감사합니까? 다 예수 믿고 지옥가지 않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천국가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2) 육신의 병보다 영혼의 병이 더 무섭습니다.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생명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건강입니다. 그러므로 건강은 인생의 재산이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참으로 건강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건강을 지키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잘먹고 좋은 약도 먹고 또 휴가도 적절히 즐깁니다. 특별히 요즘은 휴가철 피크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산으로 바다로 나가고 있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지금 교회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세인들은 지금 산이나 바다에 가서 휴가를 즐기고 있습니다. 지리산, 설악산의 계곡에서 발을 담그며 수박을 먹거나, 시원한 해수욕장에서 수영하다가 파라솔 밑에 누워 쭈쭈바를 빨아먹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재미나겠습니까?
그러나 주일날 그러다가 영혼이 병들면 안됩니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안됩니다. 육신의 건강을 생각하고 휴가를 즐긴다고 하다가 영혼이 병들면 안됩니다. 그것은 가장 큰 불행을 낳고 마는 것입니다.
육신의 건강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지켜져야 합니다. 육신의 쉼과 휴가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누려야 합니다. 그래야 육신도 건강하고 영혼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주일 성수를 외면하고 예배를 외면한 채 휴가를 즐기다가 영혼이 병들면 큰일납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영혼이 병들면 그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건강을 잃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영혼이 병드는 것입니다. 육신의 병을 얻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영혼이 질병을 얻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이 병들면 육신의 병은 자동 따라옵니다. 그러나 영혼이 건강하면 육신의 건강도 자동 따라옵니다.
요한3서1:2 :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가 잘되고 육체도 강건해 집니다. 그러므로 올 여름은 더 영혼건강을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풍성한 영성관리를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3) 재물이나 명예를 잃는 것보다 신앙을 잃는 것이 더 무서운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이라고 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참으로 필수 불가결한 수단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에서 돈 가지고 안 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돈을 그렇게 좋아하지요. 돈을 많이 벌려고 얼마나 안달 부달입니까? 돈이 얼마나 좋은가하면 귀신도 지나가다가 돈을 보면 깜짝 놀랄 정도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좋은 돈을 잃어보세요. 그 많은 돈을 사기 당하고 부도 당해서 잃어 버렸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속상하고 미칠 일입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돈 잃고 나서 생명까지 끊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싸우는 많은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대부분 돈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을 잃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입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신앙보다 더 귀한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믿음 때문에 구원받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행복한 영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돈벌다가 믿음 떨어지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돈을 많이 소유하고 움켜쥐려다가 믿음이 떨어지면 그것은 참으로 큰 불행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소유하고 움켜쥐었어도 믿음이 손해 봤다면 그것도 축복이 아닙니다. 차라리 돈에 손해가나고 돈을 잃었다 할지라도 믿음이 더 컸으며 믿음이 성숙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돈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는 명예가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예를 잃는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명예를 잃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잃어 버리는 것은 가장 큰 손해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것은 다 손해 볼 수 있어도 영적인 것을 손해 보면 안됩니다. 믿음이 도둑맞는 것은 절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이렇게 오늘 본문은 믿음관리, 신앙관리를 잘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 여름에는 믿음 지키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둡시다.
4) 사업의 실패보다 소명과 사명의 실패가 더 무섭습니다.
사업은 인생의 본업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업이 성공하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반면에 사업에 실패하면 인생자체가 실패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업보다 더 중요한 본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소명과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사업보다 중요한 것이 소명과 사명입니다. 사업실패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명실패입니다. 사업실패는 한순간의 일이 될 수 있지만 소명실패와 사명실패는 영원한 실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스로를 가장 비참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올 여름에는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삽시다. 영혼관리를 우선 순위로 삼고 믿음 뺏기지 않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고 사명을 실패하지 않게 최선을 다합시다. 그럴 때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시고 여러분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과 지옥을 두려워하라
마 10:28 / 박덕기 목사
지난 11월 15일 일본 북부인 홋카이도 태평양 연안 쿠릴 열도에서는 리히터 구모 8. 1의 강진이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금번 지진이 일본 열도에서 직접 일어났다면, 일본이 멸망할 정도의 강진이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10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강진이어서, 일본 기상청에서는 즉시 태평양 연안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로 하여금 고지대로 대피할 것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이와 함께 러시아 동부, 대만 등에는 쓰나미 경보가, 알래스카 일부 지역과 워싱턴 주, 하와이, 필리핀, 인도네시아에는 쓰나미 주의보가 각각 발령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상대로 커다란 해일은 밀려오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2004년도 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 발생한 지진 쓰나미로 수십 만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대참사가 일어났던 것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진 해일은 연안에서 먼 곳에서 발생했을 때 도착하는 시간이 1-2시간이 걸리므로 경보발령을 받고 즉시 대피하면 생명을 건질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면 동물들은 미리 예감을 하고 대피를 하여 화를 면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청난 쓰나미 경보를 듣고도 대피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꼼짝없이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동물보다 훨씬 더 어리석고 미련한 인생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2년 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던 쓰나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재앙인 죽음과 지옥에 대해서 경고하려고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지구상에서는 날마다 200만 명 이상이 죽어간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까지 역사상 어떤 대홍수도, 어떤 쓰나미도 하루 동안에 200만 명씩이나 목숨을 앗아갔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라고 하는 대홍수는 날마다 어김없이 2백만 명 이상을 집어삼키고 있고, 어느 날 저와 여러분도 마침내 이 죽음의 대홍수에 휩쓸려 목숨을 잃게 되는 날이 틀림없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그 죽음을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닥치는 필연적인 숙명이요, 저와 여러분에게도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 올 가장 확실한 사건입니다. 아무리 과학 문명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화려한 문화가 꽃피워도, 인간을 이 죽음의 운명에서 구해 낼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강한 군왕이요, 천하가 벌벌 떠는 정복자라 할지라도, 죽음의 폭군 앞에서는 모두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힘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찾아오면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많고 중요한 직책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사정이 참작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인생을 죽음 저편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이 이기는 것이 많습니다. 사망이 돈을 이깁니다. 돈 많은 자도 죽습니다. 사망이 권세도 이깁니다. 권세 있는 자도 죽습니다. 사망이 과학을 이깁니다. 과학자도 의사도 죽습니다. 사망이 철학자도 이깁니다. 사망이 청년도 이기고, 남자도 이기고, 어린이도 이깁니다. 아무리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이라도 사망이 찾아오면, 행복은 깨어지고 가정은 여지없이 파괴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 최대의 원수요, 원수 중의 원수입니다. 인간 중에 죽지 않는 자 누가 있습니까? 석가도 죽었습니다. 공자도 죽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어린이도 다 죽음 앞에서는 굴복했습니다.
철학자 키엘 케에골은 “인생이란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감방에 갇혀 있다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고, 날마다 도처에서 사망의 슬픈 곡성이 들리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사실 인간이 가진 모든 불안의 근본 뿌리는 죽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을 집어삼키고도 만족할 줄 모르는 사망, 우리의 사랑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삼키는, 저주스럽고 철천지원수와 같은 것이 곧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왜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을까요? 인간은 본래 7. 80년 살다가 늙어 죽도록 지음 받았을까요? 죽음이란 인간에게 찾아오는 자연 현상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로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그럼 죄란 무엇일까요? 죄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람을 죽였다든지, 강도짓을 했다든지, 간통을 했다든지 하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도소 에 가본 적이 없는 않은 사람은 죄가 없다고 우겨대기도 하고, 아직 한 번도 남을 해롭게 한 적이 없다고도 하고, 꼭 예수 믿어야만 되느냐? 꼭 교회에 나가야만 하느냐? 라고 항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라고 하는 것은 결코 살인, 강도, 간음 같은 행위만을 의미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과 빗나간 말과, 행동과, 생각을 말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만이 아니라, 악한 마음과 생각, 악한 성품 모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서 과연 누가 나는 죄가 하나도 없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요?
1)예화-어떤 사람이 진찰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묻자 그가 말했습니다. “방귀가 너무 자주 나와요, 그런데 소리도 없고 전혀 냄새가 안 나거든요.” 잠시 동안 진찰을 한 후, 의사는 하루에 한 알씩 먹는 처방 약을 주면서 며칠 후에 다시 오도록 하였습니다. 며칠 후 그 사람이 다시 의사에게로 왔습니다. 의사가 상태는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처방해 주었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내 방귀는 너무 지독하거든요?” 의사가 말했습니다. “그 약은 당신의 코를 치료하는 약이었소” 코에 이상이 생겨서 독한 냄새를 맡지 못했던 사람처럼, 양심이 병들어 가지고 자기가 죄인인 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2)예화-어느 날 교수님이 강의를 하려고 들어서자 학생들이 마구 웃어댔습니다. 교수님의 바지가 터져 팬티가 다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르는 교수님은 “조용히 하세요.”하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계속 웃어대자, 교수님이 근엄하게 말했습니다. “계속 웃는 놈도 나쁘지만, 계속 웃기는 놈이 더 나빠” 이 또한 자기의 허물과 실수를 깨닫지 못하고서 한 말입니다.
3)예화-50보 100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전쟁터에서 개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고, 백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때 기겁을 한 병사 하나가 정신없이 도망을 하여 100보쯤 가서 섰습니다. 또 한 병사는 50보쯤 도망을 친 후, 백보를 도망친 병사에게 겁쟁이라 비웃었습니다. 웃기는 얘기입니다. 50보나 100보나 도망친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의 죄라고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속에 50보 들어간 것이나 100보 들어간 것이나, 죄에 빠진 것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남과 비교하여 나는 죄 없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모두 50보 100보 차이의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모독하는 죄를 하나 더 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몇 가지나 될까요?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은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죄는 그보다 적을까요? 이렇듯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과 빗나간 말과, 행동과, 생각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죄의 형벌은 어떤 것일까요? 모든 범죄에는 형벌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는 것도 보았고,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아들들이 감옥에 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죄를 지으면 이렇게 대통령이라도 또는 대통령의 아들이라도 대가를 치르도록 되어있습니다. 범죄한 사람은 설혹 죄악이 들통 나지 않더라도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되어 있고, 양심의 가책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렇게 범죄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죄의 형벌, 또는 죄의 대가가 따르게 되는데, 성경은 이 사실을 가리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는데, 죽음의 종류가 천차만별이지만 죽음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1)육체적 사망-인간은 신체와 영혼 두 가지로 합성된 존재입니다. 우리가 살았을 때는 몸과 영혼이 하나로 신비하게 연합되어 있지만, 사람이 죽게 되면 몸과 영혼이 서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신체와 영혼의 분리, 이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불신자들-영혼이 떠나갔다는 말을 사용한다) 인간의 몸은 영혼의 집과 같은 것입니다. 영혼이 떠난 인간의 몸은 시체요 송장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천하 없는 미인이라도, 아무리 항우 같은 장사라도 영혼이 떠나면 송장에 불과하고, 영혼이 떠난 인간의 몸은 추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영혼인 것입니다.
2)영적 사망-이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꽃꽂이의 꽃은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3)영원한 사망-이것은 죄의 형벌 중에서 가장 무서운 영원한 지옥 형벌을 의미합니다. 육체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해지는 것을 말하는데,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지옥을 어떠한 곳이라 가르쳐 줍니까?
1)무저갱-바닥의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두운 곳을 말합니다.
2)옥-옥이기 때문에 일체의 자유가 없습니다. 여행 다니지 못하고, 제사 음식 먹으러 올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지옥이라 하겠습니까?
3)불못-지옥은 세세무궁토록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입니다. 그래서 단 5분도 견딜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통 가운데 화상을 입는 것만큼 참기 힘든 고통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 시대에 예수 믿다가 잡혀 들어가면 화형을 당하는 순교자들이 많았습니다. 화형을 당할 때에 연기가 올라와서 뜨거움을 느끼기 전에 질식을 해버리면, 그 사람은 평안하게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기에 질식을 당하지 아니하고, 서서히 장작더미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를 받아가면서 죽어가는 그 사람의 고통은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극한의 몸부림이었다고 합니다. 일단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못인 지옥에 가면 어떻게 됩니까?
1)피할 수 없습니다-지옥에는 그 어디에도 피난처가 없습니다.
2)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지옥에서는 뉘우치고 예수 믿어 구원받을 기회가 다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3)시간이 계산되지 아니합니다―만사에 다 때가 있으나, 지옥은 시간을 계산할 수 없는 영원한 처소입니다. 그 곳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고 했습니다.
4)안식이 없습니다―밤낮 잠시도 쉼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의사도, 부모 형제도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전혀 손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아무런 위안도, 아무런 쾌락도 누릴 수 없는 곳입니다.
5)구더기도 죽지 않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없는 곳입니다-그곳에서 사람마다 불로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6)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곳입니다-지옥으로 떨어진 수천수만 영혼들의 통곡 소리와 비명 때문에, 더욱 공포와 전율에 떨게 되는 곳입니다. 세익스피어는 ‘리차드 3세’라는 희곡에서 지옥의 현실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내 양심이 수천 개의 혓바닥을 가졌구나. 수천 개의 혓바닥이 제각기 책망을 나에게 늘어놓는구나!”라고 탄식하였습니다.
7)털끝만한 소망도 없는 곳입니다-단테는 그의 신곡 지옥 편에서 지옥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곳은 슬픔의 도시로, 영원한 고통으로, 버림받은 족속에게로 들어가는 문이로다. 이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이여,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모든 희망을 버리라!’ 이 얼마나 절망스런 말입니까?
여기 메어리 케더린 백스터 여사가 쓴 “정말 지옥은 있습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이렇게 신비 체험을 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죄인들을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의 예수님이 듣기에도 진저리쳐지는 지옥이라는 용어를 13번 이상이나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인간에게 몸과 영혼이 있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옥이 있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자신이 망하더라도 진리가 바로 서기를 원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거짓말을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지옥이 없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있다고 하시면 지옥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모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에게는 모두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슬픈 마음, 기쁜 마음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네모난 것인지 둥근 것인지, 빨간 색인지 노랑색인지 보이지 않습니다. 공기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전기도 바람도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기가 작용하니까 그 결과 전기불이 보이고, 바람이 부니까 그 결과로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눈에 안 보이니까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없다는 사람은 너무도 무지몽매한 인생인 것입니다. 동물원이 아닌 대한민국의 산에 호랑이가 사느냐? 살지 않느냐?를 증명하려고 할 때, 호랑이가 산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쉽습니다. 누가 호랑이를 보았다든지, 발자국을 보았다든지, 배설물을 보았다든지 하면 한국에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호랑이가 한 마리도 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면, 백두산에서부터 한라산까지 산이라고 하는 모든 산, 모든 골짜기, 나무 숲, 바위굴을 샅샅이 다 조사해 보고 나서야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모두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면, 저 태양계와 은하계에 있는 수를 알 수 없는 수십억 개의 별을 다 탐사해보고 나서 없다고 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하는 것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주장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지옥에 대해 경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지옥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곳이면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인생들 중에는 마치 하룻강아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지옥에 가면 가지 별 수 있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옥의 실상을 너무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지옥의 고통과 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은,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곳에 가면 안 된다고 경고해주신 것입니다.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사람을 가리켜 막장인생이라고 합니다. 섭씨 40도가 넘는 깊은 굴속에서 시커멓게 탄가루가 앉은 점심을 들고 온몸에 땀이 뻘뻘 흐르는 것을 참으며 8시간 동안 중노동을 합니다. 공기는 탁하기가 그지없어 호흡할 때 탄가루가 몸속에 들어가 허파에 쌓이게 되고 급기야는 폐가 굳어지는 규폐 병이라는 병이 듭니다. 그러면 광부의 일을 멈추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되고, 병이 악화되어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광부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막장인생이라고 부르는가 봅니다. 그와 같은 막장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자기의 자식에게 무어라고 말할까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공부 열심히 하고 너도 나를 따라 탄광에 와서 일해라”아마 이렇게 말할 부모는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광부의 아들이 쓴 시가 목을 메이게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나는 공부를 못하니까 광부가 되겠지..../아버지는 절대 광부가 되지 말라고 하신다./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죽어도 광부는 되지 말라고 하신다.
막장 인생을 사는 아버지의 피맺힌 절규가 아들의 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는 광부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몸으로 체험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차라리 거지가 될지언정 절대로 그곳에 와서는 안된다고 힘써 만류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무릅쓰고서라도 아들이 그곳에 오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의 고통스러움을 인간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가장 적극적으로 인생들이 그곳에 가는 것을 막으십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죄를 대신해서 죽기까지 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자신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심판에 이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러분은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여름에 땀 흘려 열심히 일하고 먹을 것을 예비해 놓았던 개미는 겨울이 와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지만, 여름내 노래나 부르고 놀았던 베짱이는 겨울이 오자 얼어 죽었다고 하지 않아요? 특별히 지혜가 없는 보통 사람들만 되어도 가을이 깊어 가면 월동 준비를 합니다. 겨울 동안에 먹을 김장도 하고, 연탄도 들여 놓고, 난로도 점검하고 이렇게 월동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낙엽이 다 떨어지고 서리가 내려도 항상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리라고 믿고, 아무런 준비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내일을 위해서 준비를 합니다. 월동 준비를 하고, 결혼 준비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노후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준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을 위해 준비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사랑하는 여러분의 가족들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시겠습니까?
카터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그분은 박대통령에게 여러 번 간곡히 전도했다고 합니다. 그 때에 박대통령이 믿어야 했습니다. 그 때 박대통령이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기회를 놓쳤습니다. 전도를 받은 지 몇 개월 후에 그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 한 번 얻지 못하고, 하나님이라고 불러 볼 틈도 없이 모든 것이 끝나버린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생각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오늘 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곡히 전도하고 권면할 때 여러분 꼭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영원한 지옥 고통의 두려움을 모르는 인생들에게는 제아무리 ‘바르게 살아라’ ‘착하게 살아라’라는 도의교육, 윤리 교육이 전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죄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지옥 형벌을 믿지 않는데서 저질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아무리 잔인한 폭군이라도 인간의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죽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살인범이라도 인간의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절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히 인간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 형벌을 두려워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죄가 하나도 없다면 절대로 예수를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만일 죄가 한 가지라도 있다면 반드시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야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고,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죄를 용서받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찬란한 천국에서 영원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지옥 신앙과 교회 부흥
마 10:28 / 김홍도 목사
지난 11월 15일 일본 북부인 홋카이도 태평양 연안 쿠릴 열도에서는 리히터 구모 8. 1의 강진이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금번 지진이 일본 열도에서 직접 일어났다면, 일본이 멸망할 정도의 강진이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10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강진이어서, 일본 기상청에서는 즉시 태평양 연안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로 하여금 고지대로 대피할 것을 당부했다고 합니다. 이와 함께 러시아 동부, 대만 등에는 쓰나미 경보가, 알래스카 일부 지역과 워싱턴 주, 하와이, 필리핀, 인도네시아에는 쓰나미 주의보가 각각 발령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상대로 커다란 해일은 밀려오지 않았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2004년도 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 발생한 지진 쓰나미로 수십 만 명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대참사가 일어났던 것을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진 해일은 연안에서 먼 곳에서 발생했을 때 도착하는 시간이 1-2시간이 걸리므로 경보발령을 받고 즉시 대피하면 생명을 건질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면 동물들은 미리 예감을 하고 대피를 하여 화를 면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엄청난 쓰나미 경보를 듣고도 대피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꼼짝없이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동물보다 훨씬 더 어리석고 미련한 인생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2년 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던 쓰나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재앙인 죽음과 지옥에 대해서 경고하려고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지구상에서는 날마다 200만 명 이상이 죽어간다고 합니다. 저는 아직까지 역사상 어떤 대홍수도, 어떤 쓰나미도 하루 동안에 200만 명씩이나 목숨을 앗아갔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라고 하는 대홍수는 날마다 어김없이 2백만 명 이상을 집어삼키고 있고, 어느 날 저와 여러분도 마침내 이 죽음의 대홍수에 휩쓸려 목숨을 잃게 되는 날이 틀림없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그 죽음을 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닥치는 필연적인 숙명이요, 저와 여러분에게도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 올 가장 확실한 사건입니다. 아무리 과학 문명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화려한 문화가 꽃피워도, 인간을 이 죽음의 운명에서 구해 낼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강한 군왕이요, 천하가 벌벌 떠는 정복자라 할지라도, 죽음의 폭군 앞에서는 모두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힘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찾아오면 아무리 바쁘고, 할 일이 많고 중요한 직책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사정이 참작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인생을 죽음 저편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이 이기는 것이 많습니다. 사망이 돈을 이깁니다. 돈 많은 자도 죽습니다. 사망이 권세도 이깁니다. 권세 있는 자도 죽습니다. 사망이 과학을 이깁니다. 과학자도 의사도 죽습니다. 사망이 철학자도 이깁니다. 사망이 청년도 이기고, 남자도 이기고, 어린이도 이깁니다. 아무리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이라도 사망이 찾아오면, 행복은 깨어지고 가정은 여지없이 파괴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 최대의 원수요, 원수 중의 원수입니다. 인간 중에 죽지 않는 자 누가 있습니까? 석가도 죽었습니다. 공자도 죽었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남자도 여자도, 노인도 어린이도 다 죽음 앞에서는 굴복했습니다.
철학자 키엘 케에골은 “인생이란 사형 언도를 받은 죄수들이 감방에 갇혀 있다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날마다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고, 날마다 도처에서 사망의 슬픈 곡성이 들리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습니다. 사실 인간이 가진 모든 불안의 근본 뿌리는 죽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을 집어삼키고도 만족할 줄 모르는 사망, 우리의 사랑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삼키는, 저주스럽고 철천지원수와 같은 것이 곧 사망인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에게 왜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을까요? 인간은 본래 7. 80년 살다가 늙어 죽도록 지음 받았을까요? 죽음이란 인간에게 찾아오는 자연 현상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형벌로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합니다.
그럼 죄란 무엇일까요? 죄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람을 죽였다든지, 강도짓을 했다든지, 간통을 했다든지 하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도소 에 가본 적이 없는 않은 사람은 죄가 없다고 우겨대기도 하고, 아직 한 번도 남을 해롭게 한 적이 없다고도 하고, 꼭 예수 믿어야만 되느냐? 꼭 교회에 나가야만 하느냐? 라고 항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죄라고 하는 것은 결코 살인, 강도, 간음 같은 행위만을 의미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과 빗나간 말과, 행동과, 생각을 말합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만이 아니라, 악한 마음과 생각, 악한 성품 모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서 과연 누가 나는 죄가 하나도 없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요?
1)예화-어떤 사람이 진찰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사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묻자 그가 말했습니다. “방귀가 너무 자주 나와요, 그런데 소리도 없고 전혀 냄새가 안 나거든요.” 잠시 동안 진찰을 한 후, 의사는 하루에 한 알씩 먹는 처방 약을 주면서 며칠 후에 다시 오도록 하였습니다. 며칠 후 그 사람이 다시 의사에게로 왔습니다. 의사가 상태는 어떠냐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처방해 주었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내 방귀는 너무 지독하거든요?” 의사가 말했습니다. “그 약은 당신의 코를 치료하는 약이었소” 코에 이상이 생겨서 독한 냄새를 맡지 못했던 사람처럼, 양심이 병들어 가지고 자기가 죄인인 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2)예화-어느 날 교수님이 강의를 하려고 들어서자 학생들이 마구 웃어댔습니다. 교수님의 바지가 터져 팬티가 다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르는 교수님은 “조용히 하세요.”하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학생들이 계속 웃어대자, 교수님이 근엄하게 말했습니다. “계속 웃는 놈도 나쁘지만, 계속 웃기는 놈이 더 나빠” 이 또한 자기의 허물과 실수를 깨닫지 못하고서 한 말입니다.
3)예화-50보 100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전쟁터에서 개전을 알리는 북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고, 백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때 기겁을 한 병사 하나가 정신없이 도망을 하여 100보쯤 가서 섰습니다. 또 한 병사는 50보쯤 도망을 친 후, 백보를 도망친 병사에게 겁쟁이라 비웃었습니다. 웃기는 얘기입니다. 50보나 100보나 도망친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의 죄라고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속에 50보 들어간 것이나 100보 들어간 것이나, 죄에 빠진 것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남과 비교하여 나는 죄 없다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모두 50보 100보 차이의 죄인일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모독하는 죄를 하나 더 짓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몇 가지나 될까요?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은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죄는 그보다 적을까요? 이렇듯 성경에서 말씀하는 죄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과 빗나간 말과, 행동과, 생각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죄의 형벌은 어떤 것일까요? 모든 범죄에는 형벌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가는 것도 보았고,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아들들이 감옥에 가는 것도 보았습니다. 죄를 지으면 이렇게 대통령이라도 또는 대통령의 아들이라도 대가를 치르도록 되어있습니다. 범죄한 사람은 설혹 죄악이 들통 나지 않더라도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되어 있고, 양심의 가책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이렇게 범죄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죄의 형벌, 또는 죄의 대가가 따르게 되는데, 성경은 이 사실을 가리켜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는데, 죽음의 종류가 천차만별이지만 죽음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1)육체적 사망-인간은 신체와 영혼 두 가지로 합성된 존재입니다. 우리가 살았을 때는 몸과 영혼이 하나로 신비하게 연합되어 있지만, 사람이 죽게 되면 몸과 영혼이 서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신체와 영혼의 분리, 이것을 가리켜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불신자들-영혼이 떠나갔다는 말을 사용한다) 인간의 몸은 영혼의 집과 같은 것입니다. 영혼이 떠난 인간의 몸은 시체요 송장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천하 없는 미인이라도, 아무리 항우 같은 장사라도 영혼이 떠나면 송장에 불과하고, 영혼이 떠난 인간의 몸은 추합니다. 그 때문에 사람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영혼인 것입니다.
2)영적 사망-이것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꽃꽂이의 꽃은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것과 같습니다.
3)영원한 사망-이것은 죄의 형벌 중에서 가장 무서운 영원한 지옥 형벌을 의미합니다. 육체적으로 죽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해지는 것을 말하는데,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지옥을 어떠한 곳이라 가르쳐 줍니까?
1)무저갱-바닥의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어두운 곳을 말합니다.
2)옥-옥이기 때문에 일체의 자유가 없습니다. 여행 다니지 못하고, 제사 음식 먹으러 올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지옥이라 하겠습니까?
3)불못-지옥은 세세무궁토록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못입니다. 그래서 단 5분도 견딜 수 없는 곳입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통 가운데 화상을 입는 것만큼 참기 힘든 고통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 시대에 예수 믿다가 잡혀 들어가면 화형을 당하는 순교자들이 많았습니다. 화형을 당할 때에 연기가 올라와서 뜨거움을 느끼기 전에 질식을 해버리면, 그 사람은 평안하게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기에 질식을 당하지 아니하고, 서서히 장작더미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를 받아가면서 죽어가는 그 사람의 고통은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극한의 몸부림이었다고 합니다. 일단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못인 지옥에 가면 어떻게 됩니까?
1)피할 수 없습니다-지옥에는 그 어디에도 피난처가 없습니다.
2)다시는 기회가 없습니다― 지옥에서는 뉘우치고 예수 믿어 구원받을 기회가 다시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3)시간이 계산되지 아니합니다―만사에 다 때가 있으나, 지옥은 시간을 계산할 수 없는 영원한 처소입니다. 그 곳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고 했습니다.
4)안식이 없습니다―밤낮 잠시도 쉼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의사도, 부모 형제도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서, 전혀 손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아무런 위안도, 아무런 쾌락도 누릴 수 없는 곳입니다.
5)구더기도 죽지 않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없는 곳입니다-그곳에서 사람마다 불로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6)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곳입니다-지옥으로 떨어진 수천수만 영혼들의 통곡 소리와 비명 때문에, 더욱 공포와 전율에 떨게 되는 곳입니다. 세익스피어는 ‘리차드 3세’라는 희곡에서 지옥의 현실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내 양심이 수천 개의 혓바닥을 가졌구나. 수천 개의 혓바닥이 제각기 책망을 나에게 늘어놓는구나!”라고 탄식하였습니다.
7)털끝만한 소망도 없는 곳입니다-단테는 그의 신곡 지옥 편에서 지옥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곳은 슬픔의 도시로, 영원한 고통으로, 버림받은 족속에게로 들어가는 문이로다. 이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이여,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모든 희망을 버리라!’ 이 얼마나 절망스런 말입니까?
여기 메어리 케더린 백스터 여사가 쓴 “정말 지옥은 있습니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은 이렇게 신비 체험을 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옥이라는 말을 직접 사용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게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죄인들을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신 사랑의 예수님이 듣기에도 진저리쳐지는 지옥이라는 용어를 13번 이상이나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인간에게 몸과 영혼이 있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지옥이 있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자신이 망하더라도 진리가 바로 서기를 원하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거짓말을 모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지옥이 없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있다고 하시면 지옥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모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에게는 모두 마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슬픈 마음, 기쁜 마음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네모난 것인지 둥근 것인지, 빨간 색인지 노랑색인지 보이지 않습니다. 공기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전기도 바람도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전기가 작용하니까 그 결과 전기불이 보이고, 바람이 부니까 그 결과로 나무 가지가 흔들리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눈에 안 보이니까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없다는 사람은 너무도 무지몽매한 인생인 것입니다. 동물원이 아닌 대한민국의 산에 호랑이가 사느냐? 살지 않느냐?를 증명하려고 할 때, 호랑이가 산다는 것을 증명하기란 쉽습니다. 누가 호랑이를 보았다든지, 발자국을 보았다든지, 배설물을 보았다든지 하면 한국에 호랑이가 살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호랑이가 한 마리도 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면, 백두산에서부터 한라산까지 산이라고 하는 모든 산, 모든 골짜기, 나무 숲, 바위굴을 샅샅이 다 조사해 보고 나서야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모두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면, 저 태양계와 은하계에 있는 수를 알 수 없는 수십억 개의 별을 다 탐사해보고 나서 없다고 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하나님도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하는 것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주장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지옥에 대해 경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지옥이 얼마나 무섭고 고통스러운 곳이면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인생들 중에는 마치 하룻강아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지옥에 가면 가지 별 수 있나?’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옥의 실상을 너무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지옥의 고통과 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은, 우리 인생들로 하여금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곳에 가면 안 된다고 경고해주신 것입니다.
탄광에서 석탄을 캐는 사람을 가리켜 막장인생이라고 합니다. 섭씨 40도가 넘는 깊은 굴속에서 시커멓게 탄가루가 앉은 점심을 들고 온몸에 땀이 뻘뻘 흐르는 것을 참으며 8시간 동안 중노동을 합니다. 공기는 탁하기가 그지없어 호흡할 때 탄가루가 몸속에 들어가 허파에 쌓이게 되고 급기야는 폐가 굳어지는 규폐병이라는 병이 듭니다. 그러면 광부의 일을 멈추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되고, 병이 악화되어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광부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막장인생이라고 부르는가 봅니다. 그와 같은 막장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자기의 자식에게 무어라고 말할까요? “사랑하는 내 아들아, 공부 열심히 하고 너도 나를 따라 탄광에 와서 일해라”아마 이렇게 말할 부모는 세상에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느 광부의 아들이 쓴 시가 목을 메이게 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나는 공부를 못하니까 광부가 되겠지..../아버지는 절대 광부가 되지 말라고 하신다./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죽어도 광부는 되지 말라고 하신다.
막장 인생을 사는 아버지의 피맺힌 절규가 아들의 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는 광부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를 몸으로 체험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차라리 거지가 될지언정 절대로 그곳에 와서는 안된다고 힘써 만류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무릅쓰고서라도 아들이 그곳에 오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의 고통스러움을 인간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가장 적극적으로 인생들이 그곳에 가는 것을 막으십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죄를 대신해서 죽기까지 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자신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 예수를 믿기만 하면 심판에 이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러분은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여름에 땀 흘려 열심히 일하고 먹을 것을 예비해 놓았던 개미는 겨울이 와도 아무런 걱정이 없었지만, 여름내 노래나 부르고 놀았던 베짱이는 겨울이 오자 얼어 죽었다고 하지 않아요? 특별히 지혜가 없는 보통 사람들만 되어도 가을이 깊어 가면 월동 준비를 합니다. 겨울 동안에 먹을 김장도 하고, 연탄도 들여 놓고, 난로도 점검하고 이렇게 월동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낙엽이 다 떨어지고 서리가 내려도 항상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리라고 믿고, 아무런 준비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은 인생이라고 하지 않을 수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내일을 위해서 준비를 합니다. 월동 준비를 하고, 결혼 준비를 하고, 취업 준비를 하고, 노후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든 준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영원을 위해 준비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과 사랑하는 여러분의 가족들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시겠습니까?
카터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그분은 박대통령에게 여러 번 간곡히 전도했다고 합니다. 그 때에 박대통령이 믿어야 했습니다. 그 때 박대통령이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기회를 놓쳤습니다. 전도를 받은 지 몇 개월 후에 그가 어떻게 세상을 떠났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회개할 기회 한 번 얻지 못하고, 하나님이라고 불러 볼 틈도 없이 모든 것이 끝나버린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생각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오늘 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곡히 전도하고 권면할 때 여러분 꼭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영원한 지옥 고통의 두려움을 모르는 인생들에게는 제아무리 ‘바르게 살아라’ ‘착하게 살아라’라는 도의교육, 윤리 교육이 전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죄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지옥 형벌을 믿지 않는데서 저질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아무리 잔인한 폭군이라도 인간의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죽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살인범이라도 인간의 몸은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절대로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능히 인간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 형벌을 두려워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죄가 하나도 없다면 절대로 예수를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만일 죄가 한 가지라도 있다면 반드시 예수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해야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고,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죄를 용서받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찬란한 천국에서 영원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의 값 나의 의미
마 10:29-31 / 이정익 목사
마 10:29-31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사보다 귀하니라.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가운데서 가장 큰 사랑은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700년 전부터 이사야가 장차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탄생하실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대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혀 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은혜가 눈을 뜨게 하신 은혜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하셔서 세상을 보고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보고 깨닫고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천국 보는 신비한 눈도 뜨이게 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나의 값을 알게 하신 것은 은혜 중 은혜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 핵심 되는 말씀으로 우리의 값을 집중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참 마음이 든든해지고 넉넉해지고 세상에 겁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은 나의 값에 대해서, 나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참새 한 마리 값이 얼마나 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참새구이 집에 가 보셨습니까. 참새를 구워놓은 것을 보면 참 보잘 것이 없고 볼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새 발의 피라고 말합니다. 아주 보잘 것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참새 두 마리 값이 한 앗사리온이라고 했습니다. 한 앗사리온은 당시 노동자 임금의 16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러면 참새 한 마리 값은 32분의 1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푼돈도 안 되는 아주 적은 금액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참새 한 마리에게도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뜻이 없으면 팔리지도 않을뿐더러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참새 한 마리의 생존, 삶, 죽음까지도 하나님이 관여하고 계시다고 말씀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너희 머리털 까지도 세신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니라.” 이 비유 속에서 아주 소중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값이고 나의 삶이고 나의 의미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너의 값을 알라”
이 말씀대로라면 나 자신은 과소평가 하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적어도 나는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계신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나의 값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천하보다 귀하다, 창세전에 너희를 택하여 세웠느니라., 땅에서 풀어라 그리하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이 말씀들은 모두 나의 값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온통 관심은 세상을 사랑하는 일, 성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눈이 뜨입니다. 그렇게 뜨인 눈으로 보면 나의 값을 알게 되고 나의 존재의 의미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냥 억지로 읽고 하루 읽을 분량을 빨리 읽어버리니까 성경을 읽어도 이 성경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가르쳐 주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어느 대학생 아들이 머리를 길게 하고 예배를 등한히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아버지 마음이 속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운전면허증을 땄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차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몇 가지 조건을 주었습니다. 첫째 학교성적을 올려라, 둘째 매일 성경을 읽으라, 셋째 머리를 단정히 깎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많이 변했습니다. 성적도 올랐습니다. 성경도 읽었습니다. 예배도 잘 참석했습니다. 아버지는 마음이 놓였습니다. 얼마 후 아들이 차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 분부를 잘 따라 줘서 고맙다, 그런데 머리는 왜 깎지 않았느냐?” 아들이 대답합니다. “성경을 읽다 보니까 삼손, 예수, 모세는 모두 머리를 기르던데요.” 아버지가 생각해 보니까 이 놈이 상당히 건방집니다. 그래서 이놈을 어떻게 혼내줄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분들은 모두 걸어 다니셨단다, 너도 걸어 다녀라.”오늘 성경을 모두 이렇게 읽습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에 감동으로 깨우침으로 다가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자신의 값을 모릅니다. 의미도 가치도 뜻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비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자신의 값이 더 비참해지고 더 함부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마약에 찌들어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 폐인이 되어 살아갑니다. 알코올에 중독 되어 대낮에도 비틀거리고 다니는 청년들을 보면 참 마음이 답답해옵니다. 대낮에도 젊은이들이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또 한밤중에 대로를 질주하는 폭주족들을 보십시오. 모두 10대,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입니다. 얼마나 폭주를 하는지 무서울 정도로 거리를 달립니다. 그러다 넘어지면 죽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그렇게 달리다 넘어지는 죽을 텐데 위험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대답하기를 “신나게 달리다 죽으면 좋지요”하고 대답합니다. 그들에게서 내일, 미래, 값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자신을 그렇게 업신여기니까 남들도 나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너무 자만해도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너무 비굴해도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넉넉하고 화려하고 성공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부족하고 초라하고 성공하지 못하면 비관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런 것들만 좋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 부족하고 초라한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점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한탄하며 살아갑니다.
사슴 한 마리가 자기의 잘생긴 뿔에 도취했습니다. 물에 비친 자신의 뿔을 보면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다리를 볼 때마다 다리가 초라해서 언제나 불만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냥개에게 쫓겨 도망을 갑니다. 가다가 가시넝쿨에 뿔이 걸려 그만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때 이 사슴이 이렇게 외칩니다. “뿔만 없었어도. 뿔만 없었어도.” 요즘 탤런트들, 유명가수들이 마약으로 도중하차하는 젊은이들을 보게 됩니다. 그 젊은이들이 평범한 젊은이들이었다면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약에 손대는 일은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1류, 화려함, 유명, 성공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류, 화려함, 성공이 만능도 아니고 다 좋은 것도 아닙니다. 살다보면 때로 초라한 것도 좋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문제가 있다면 초라하면 우선 “저 사람은 불행하겠구나.”하고 생각하는 사회분위기가 문제입니다. 제멋대로 생각합니다. 자기기준에서 생각하고 판단해 버립니다. 사람의 행불행을 이 세상의 기준대로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일입니까. 겉보기에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감취어진 내면의 모습이 불행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행복하겠느니 불행하겠느니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신의 값을 알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주님은 나의 값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도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공중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다, 하물며 너희야 말하면 무엇 하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값입니다. 누가 뭐래도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고 살아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남들도 나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도 받을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본문을 보면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면 팔리지도, 떨어지지도, 죽지도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참새 한 마리에게도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있고 섭리를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기기를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너희 값은 엄청나다”그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나와 교제하고 함께 하시고 같이 일하실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자꾸만 나와 의논하자고 말씀하십니다. 미래에 대해서, 장래에 대해서, 할 일에 대해서, 진로에 대해서,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상의하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말은 “나와 상의하자” 그 말입니다.
대화는 참 좋은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대화가 많을수록 좋습니다. 모든 문제나 오해 그리고 어려움을 푸는 열쇠는 대화가 최고입니다. 상대와 깊은 교제를 나누고 사이좋게 하는 요소도 “대화가 최고”입니다. 사람은 대화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섭리하시고 응답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길을 안내하시고 갈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래서 대화인 기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 전 뉴욕 타임지가 발표한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의료진들이 불임환자를 치료하는데 기도하며 치료하니까 크게 효과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의료진들이 불임환자 199명을 상대로 해서 기도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질까 하고 연구를 했습니다. 한 부류의 환자들에게는 환자들의 사진과 형편 그리고 병명의 내용을 적어 미국, 캐나다, 호주에 있는 신앙인들에게 기도요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그룹에게는 기도 없이 그냥 치료했습니다. 그랬더니 나타난 결과가 기도하며 치료한 그룹이 성공률이 배나 더 많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말합니다. 내가 남의 아픔을 위해서 기도하는 기도에 효과가 왜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나의 진로의 문제, 앞날의 문제, 운명의 문제를 놓고 기도한다면 그 기도가 얼마나 진지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계획을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보이시고 이루시고 성취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참새 한 마리는 하찮고 노동자 임금의 32분의 1 값밖에 안되는 존재인데도 하나님은 그 참새 한 마리에게도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하물며 너희야 말하면 무엇 하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힘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자신 있게 살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에게 백이 되시고 힘이 되시고 배경이 되십니다.
“미래를 신뢰하는 일”
하나님이 나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믿어야 합니다. 나의 미래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내 뜻대로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살아온 지난날을 되돌아보십시오. 내 뜻대로 된 것이 뭐 한가지나 있습니까. 대부분 나의 생각이나 나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길을 여기까지 걸어왔습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분명히 믿기는 우리는 앞날도 그렇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섭리이고 뜻이고 인도하심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복된 삶은 이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를 받고 보호를 받고 안내를 받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 삶이 최고의 복된 삶입니다. 성령의 하시는 일은 모든 것을 합동해서 유익하게 인도하시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분에게 나의 미래와 장래와 앞길을 맡기면 다름이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지난날도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앞날도 그렇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성령의 인도를 철저하게 믿고 살아간 사람이 존 번연일 것입니다. 존 번연은 영국이 낳은 청교도이고 극작가입니다. 이 분이 신앙의 이유로 국왕의 명령을 어겨 미움을 받고 감옥에 갇힙니다. 어느 날 옥사장이 한밤중에 조용히 문을 열어주면서 “잠깐 집에 가서 쉬고 오세요.”하고 은전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존 번연히 감옥을 나와 집으로 가다가 곧 돌아왔습니다. 간수가 왜 빨리 돌아왔느냐 하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의 호의는 고마운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것은 성령의 인도가 아닌 것 같아서 왔다”면서 다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왕이 감옥시찰을 나왔습니다. 존 번연이 감옥에 잘 있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갔습니다. 옥사장이 그 순간 간이 콩알만 해 졌을 것입니다. 하마터면 목이 달아날 뻔 했습니다.
그래서 이 옥사장이 존 번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셔서 나도 살고 당신도 살았습니다. 앞으로는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당신 마음대로 나갔다 오십시요“. 이 성령이 하시는 일은 모두 이렇게 유익하게 안전하게 덕을 쌓으면서 살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이 하나님이 합동해서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획을 가지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신 증거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 증거는 우리에게 달란트와 재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다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 재능을 활용해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고 세상에 이바지 하고 하나님께 영광의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계획을 가지고 계신 증거들입니다. 그것을 수고하고 땀을 흘려 연구해서 자신만이 가진 재능으로 개발해서 사용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개발한 사람은 그것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갑니다. 누구보다도 더 개발한 사람은 그 분야에 프로가 됩니다.
김미현은 단신인데도 세계적인 프로골프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더 수고했을 것입니다. 그가 퍼팅연습을 하는데 10원짜리 동전을 10개 포개놓고 그것을 하나씩 쳐내는 연습을 밤을 새워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퍼팅하면 그 좁은 홀 컵에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농구선수 이충희는 경기가 끝나면 쉬러가는 것이 아니고 연습장으로 가서 천개의 공을 던져 슛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공을 던지면 바구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소질이 있다고 연습도 안했는데 던지면 들어가겠습니까? 세상에 그런 일은 없습니다. 등반가 허영호는 이 세상에서 높은 산은 다 정복한 등반가입니다. 그는 매일 아침 32km를 뛰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높다는 산을 다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고도 안하고 힘쓰지도 않고 안 된다고 불평을 합니다. 모두 쉽게 살려고 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이루어놓은 것을 뺏고 거짓으로 속이며 살아갑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겠습니까. 그렇게 살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나의 값을 알고 발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인도하실 만큼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얼마나 소중한 깨달음이고 축복이고 힘입니까. 예수님은 이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라
마 10:32-33 / 김영규 목사(정윤교회)
시인하는 삶, 부인하는 삶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라!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리고 전파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습니다. 때로는 주님을 전하다가 박해를 당하고 죽기까지 했습니다. 그럴지라도 끝까지 견디라고 하셨습니다. 그 견디는 것은 가만히 당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면서 버티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이 곧 우리의 신앙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10:32-33)
먼저 시인(是認)한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시인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oJmologevw”입니다. “oJmo”는 동일하다는 뜻이고, “logevw”는 말한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것을 말하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이렇게 말하고, 예수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며 저렇게 말하는 것이 시인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예수님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시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행위입니다. “시인”이란 말을 영문성경은 두 가지 단어로 번역합니다. 하나는 confess(KJV, ASV, )이고, 다른 하나는 acknowledge(RSV, NIV)입니다. confess는 고백한다는 의미도 있고 스스로 인정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acknowledge는 승인한다, 혹은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한글 공동번역과 현대인의 성경에는 “안다고 하면”이란 말로 번역했습니다.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현직 대통령을 알고 있지만 대통령은 나를 모릅니다. 이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서로 교제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를 잘 아는 것이 시인한다는 말의 뜻입니다.
시인하는 삶은 상대를 인정하는 삶입니다. 인간사회에서의 모든 인간관계는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 됩니다. 한 여자를 아내로 인정하고, 혹은 남편으로 인정하면 부부관계가 됩니다. 비즈니스 파트너로 인정하면 상거래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삶을 나눌 상대로 인정하면 친구가 됩니다. 정치적 동반자로 인정하면 같은 정당인이 됩니다. 사실상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상대를 인정하거나 혹은 인정하지 않는 데서 발생합니다. 상대를 인정하는 것은 관계의 기반입니다.
국가 간의 관계도 마찬가집니다. 외교관을 보낼 때 “아그레망”이란 게 있습니다. 어떤 인물을 대사나 공사 같은 외교 사절로 보낼 때, 먼저 상대국의 의향을 타진합니다. 이 사람을 보내려고 하는데 이의가 없습니까? 이의가 없으면 외교관을 받아들이는 나라에서 아그레망을 보냅니다. 영어로 하면 agreement입니다. 당신들이 보내려고 하는 사람을 인정합니다, 동의합니다. 그러면 보내는 나라의 국가원수는 외교관에게 신임장(letter of credence)을 줍니다. 외교관은 다시 이 신임장을 가지고 상대국 국가원수에게 전달하고, 상대국 국가원수가 이를 받아들이면 외교관으로서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만일 보내려는 외교관을 상대국에서 인정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이렇게 거부당한 사람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라고 합니다. 승인받지 못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승인받지 못한 사람은 외교상 기피 인물이 되어 당사국 사이의 관계에서는 배제됩니다. 반대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진 사람은 '페르소나 그라타(persona grata)'라고 합니다. 승인된 사람입니다. 승인된 사람은 외교관의 특권을 누리면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외교 관례에 나타난 아그레망이 바로 오늘 말씀하는 “시인”(是認)입니다. 내가 상대를 교제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시인보다는 부인이 많은 사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대를 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을 인정하지 않고 아내가 남편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가정이 흔들립니다. 여당이 야당을 인정하지 않고 야당이 여당을 인정하지 않으니 정치가 혼란스럽습니다. 사업주가 근로자를 인정하지 않고 근로자가 사업주를 인정하지 않으니 노사 관계가 깨집니다. 왜 병영 문화가 살인으로 이어집니까? 전쟁 나면 함께 싸워야 될 전우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학교에서 따돌림이 일어납니까? 평생을 서로 도와주고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인정하고, 가난한 자가 부자를 인정해 줘야 제대로 된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이루어집니다. 왜 교육 현장이 황폐화 되나요? 공부에 재능이 없는 아이들을 인정해 주고, 공부에 재능 있는 아이도 인정해 줘야 합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밤낮 입시 제도를 놓고 싸웁니다. 스승이 제자를 인정해 주고 제자가 스승을 인정해 줘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교육이 황폐화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시인하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배척하는 태도를 갖지 말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양심과 판단을 인정하세요. 물론 범죄 행위까지 인정하란 말은 아닙니다. 범죄 행위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하고, 판단을 존중하고, 결정을 존중해야 합니다. “당신은 왜 그래?” “당신은 왜 나하고 달라?”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존재를 인정하고, 그 삶을 인정하세요. 상대를 인정하는 것은 인간 사회의 기반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하는 삶의 출발입니다.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 하는가
그러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32)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일까요? 물론 신앙고백이 첫째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내가 이 모든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이와 같은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시인은 그 정도의 입술 고백이 전부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고백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 앞에서 삶으로써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끼리 서로 사랑을 고백합니다. 먼저는 말로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해! 하늘만큼 땅만큼! 그러나 그 고백으로 끝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행동이 나타납니다. 선물을 사줍니다. 힘들 때 도와줍니다. 슬픔의 자리에 함께 합니다. 병들면 곁에 있고 위로해 줍니다. 위험한 일을 당하면 목숨을 걸고 구해줍니다. 입술의 고백이 아닌 삶의 고백! 그것이 바로 진정한 시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어떤 결혼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좋아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굉장히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습니다. 외모나, 성품이나, 행동이나 다 맘에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여자와 사귀어야 할까요? 사귀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죽는 날까지 함께 하기로 한 아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원한 남편으로 맞은 영적 아내들입니다. 제아무리 그럴 듯 한 우상이 나타나도 우리는 절대로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주인,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내게 사기와 도적질을 제안했습니다. 한 번만 거짓말 하고, 한 번만 죄를 지으면 평생 편하게 먹고 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그것을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고, 전도하고, 봉사하는 일은 때로는 하기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세상 친구가 다가와서 속삭입니다. 얘, 오늘은 교회에 가지 말자! 오늘 하루만 빠지고 낚시하러 가자! 그래 평생 드릴 예배인데 하루쯤 빠진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그것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세상 친구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행위입니다. 주님이 계시기에 다른 신들을 거부하고, 우상을 거부합니다. 주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살인하지 않습니다. 간음하지 않습니다. 도적질 하지 않습니다. 거짓말 하지 않습니다. 탐내지 않습니다. 그것이 사람들 앞에 더 강력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하는 입술의 고백보다 더 강력한 고백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돌에 맞아 죽고,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들이 사람들 앞에서 보여준 사람들 앞에서의 시인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표시를 많이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아브라함의 아내, 아들, 하인들까지 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강력하게 믿는지, 얼마나 진실하게 믿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으로 가서 제단 위에 아들을 묶어 올렸습니다. 칼을 들었습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이 인정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인정하는지, 첫 번째로 감동을 받은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입니다. 이삭은 자기 아버지가 얼마나 하나님을 믿는지,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자신을 묶어 제단에 올려 놓을 때에 그는 알았습니다. 아하! 우리 아버지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구나!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중심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주일을 성수하고, 헌금 생활을 하고, 계명을 지키는 것을 볼 때에 내가 주님을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시인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땅에서 시인하면 하늘에서 시인 된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면 그 결과가 하늘에 전달됩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했는데,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나를 시인하십니다. 나는 땅에서 주님을 시인했는데 주님은 하늘에서 나를 시인해 주십니다. 주님이 나를 시인하시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적 의미의 시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그 때에 주님이 나를 인정해 주십니다. “이 사람은 내가 죄를 대신 갚은 사람입니다! 자녀로 받아 주세요!”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 모든 죄를 사하시고 자녀로 받아 주십니다. 천국 시민이 됩니다. 영생을 누립니다. 하나님의 모든 축복의 참여자가 됩니다.
둘째는 기도적 의미의 시인입니다. 내가 땅에서 무엇을 구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어주십니다. 나를 보고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이신 주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간구하기 때문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주님께서 하늘에서 나를 시인하심으로써, 땅에서 드리는 나의 기도가 항상 하나님 아버지께 받아들여집니다. 놀라운 기도 응답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6-11)
금식은 가장 간절한 기도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끼니를 굶는다고 금식이 아닙니다. 금식하는 자는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입술로 기도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행위입니다. 즉, 사람들의 결박과 멍에와 압제를 풀어줘야 합니다. 주리고, 헐벗고, 유리하는 빈민을 먹이고 입혀야 합니다. 못사는 골육을 기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멍에, 손가락질, 허망한 말을 제거해야 합니다. 주린 자와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해 줘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입술 기도가 아닌 행동의 기도요,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행위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은 하늘에서 나를 시인하십니다. “아버지 저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그래서 내가 땅에서 올인 모든 기도가 응답 됩니다. 빛나는 인생이 됩니다. 병이 급속히 치료됩니다. 공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여호와의 영광에 나를 호위합니다. 무슨 기도든지 응답 받습니다. 부르짖으면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둠이 낮이 됩니다. 주님이 항상 인도하십니다. 메마른 곳에서도 영혼의 만족을 얻습니다. 뼈가 견고하게 됩니다. 즉, 건강한 삶이 됩니다. 내 인생은 물댄 동산이 됩니다. 끊어지지 않는 샘물이 됩니다. 명목상 자녀가 아닙니다. 실질적인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자녀가 됩니다. 이것이 다 어디서 옵니까? 내가 사람들 앞에서 주를 시인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다가오는 축복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