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을 순례하다 최 건 차
2021년 여름 딸이 사는 바이킹의 나라 아이슬란드를 두 주간 여행했다. 어디서나 산행을 즐겨 하기에, 마침 이스라엘 제약회사 책임자로 와 있는 한국인의 아들이 등산을 좋아해 나와 외손자 두 녀석의 가이드가 돼주었다. 우리는 최근에 마그마가 폭발했다는 ‘파그라달스’화산을 등반하기로 했다. 시뻘건 불길이 솟구쳐 올라 흐르다가 굳어져 있는 계곡에서는 아직도 열기가 느껴졌다. 먹은 갱엿 같은 거대한 용암이 떡 반죽처럼 넓게 펼쳐져 있어 작은 덩어리를 몇 개 기념으로 챙겼다. 이틀 후에는 아이슬란드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예이샤’산으로 향했다.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하면서도 축구로 다져진 외손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주어 가슴이 벅찼다. 한국인 최초로 정상에 올랐다는 증거로 인증함에 나의 저서 <산을 품다>을 남기고 왔다.
세계적인 계곡,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패키지로 가보았다. 높고, 넓고, 크고, 깊은 계곡의 길이가 엄청나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용맹스러운 인디언들은 멸족당했거나 사라지고 순해 빠진 한 족속만 남아서 그랜드캐니언을 지키며 코로라도 주정부의 보호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아이맥스 화면으로 그 광활함을 보았다. 南호주 아들레이드(Adelaide)에 갔을 때는 호주 시민으로 현지에 사는 아들의 안내로 모리알타(Morialta)산을 등반했다. 높은 유칼립투스 나무에서 잠자는 코알라를 보면서 야생올리브와 무화과가 익어가는 계곡을 아내와 걸었는데, 나를 두고 먼저 천국에 갔다.
웬만한 추위나 더위를 가리지 않는 등산가들도 한여름에는 계곡을 그리게 된다. 깊은 골짜기에서 흐르는 물들이 모여 암벽을 타고 쏟아져 밤이면 선녀들이 멱을 감을 것은 같은 폭포와 소沼가 생긴다. 물은 암반 사이를 더 헤집고 흘러 크고 작은 웅덩이들을 만들어 낸다. 그런 곳에서는 버들치와 송사리들이 모여 살고 더 깊고 넓은 천연수영장도 만들어 놔 한여름이면 피서객들이 찾는다. 국립공원 일부와 상수도 보호구역의 계곡에서는 물가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반면에 상수도와 관련이 없는 지방의 도립공원이나 군립공원에서는 안전하게 물놀이를 즐길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일부 서민들은 여름 물놀이에 적당한 산간의 계곡을 찾는다. 산속 계곡에서 부는 바람은 망망대해에서 불어오는 해풍에 비길 바가 아니다. 신선함으로 더위는 물론 마음속까지도 시원하게 해준다.
유년 시절 나는 여름이면 탐진강 상류 냇가와 계곡에서 멱을 감으며 자랐다. 냇물에서 징거미와 모래 속에 반쯤 숨어있는 모래무지를 잡고, 계곡에서는 땅벌에 쏘이면서 산딸기와 다래 으름을 따 먹고 가재를 잡으며 놀았다. 소년 시절에는 부산 영도 2송도와 건너편 1송도가 물놀이터였고, 가끔은 광안리해수욕장으로 원정을 다녔다. 20대 해운대에서의 군대생활은 동백섬을 아지트로 삼고, 해수욕장을 앞마당처럼 ‘장산萇山’계곡을 트레킹하면서 송정해수욕장까지 섭렵했다. 미8군 카투사 시절, 대구 캠프핸리에서는 여름철 주말이면 포항 해수욕장의 미군 휴양소에서 한여름을 즐겼다.
늘 냇가나 바다에 친숙했는데 내륙의 수원에 살면서부터는 패턴이 산행으로 바뀌게 되었다. 바다는 가끔이고, 산을 오르고 내리면서 시원한 물이 흐르는 계곡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연중 산행으로 한여름에는 반바지 차림으로 계곡물에 풍덩 빠져 멱을 감고 더위를 식힌다. 수년 전 지리산 구룡계곡을 찾았을 때였다. 가파른 암벽을 타고 폭포수처럼 세차게 흐르는 물살에 간신히 붙어서 아슬아슬하게 멱을 감았다. 그리고 엄청 무더운 어느 중복 날에는 열두폭포로 유명한 포항 ‘내연산’에서 하이킹을 했다. 물가에 접한 노송들이 아름다운 고찰 보경사를 지나니, 지리산을 무대로 한 빨치산 남부군 영화를 촬영했다는 안내문이 보였다.
산세와 계곡이 지리산 못지않겠구나 싶었다. 정상을 향해 한참을 오르는 중인데 폭염이 매우 심하다며 하산하라는 방송이 들려 아쉽게도 ‘문수봉’까지만 오르고 말았다. 나 혼자여서 물가 나무 그늘에서 도시락을 먹고 물속에 풍덩 빠져들었다. 깊은 계곡물에 사는 물고기들은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먹잇감으로 여겨서인지 크고 작은놈들이 떼거리로 달려들어 입질해대는 통에 간지러움으로 나름의 호사를 누렸다.
2023년 8월 15일엔 우리 서수원신협 산악회에서 치악산 세렴폭포가 있는 계곡을 찾아 물놀이를 했다. 그리고 올여름에는 문경 대야산 용추계곡을 트레킹 하고서 모두가 물속에 뛰어들어 더위를 날리기도 했다. 비가 내리지 않아 생긴 웅덩이에는 큼직한 버들치와 송사리들이 우글대고 있어 매운탕 생각이 간절하다며 군침을 삼켰다.
산행은 등성이와 계곡을 오르고 내리는 삶의 여정이다. 전국의 유명산 계곡을 찾아 오르고 내리며 시원한 계곡물에 멱을 감을 때면 유소년 시절이 아스라하게 떠올려진다. 어느 해 여름 계곡 물가에서 개복숭아를 따려다 홍수의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냇가 봇둑에 있는 나뭇가지에 걸려 간신히 구조됐던 정황이 아직도 생생하다. 2010년 2월 10일은 간밤에 내린 눈이 쌓이고 계속 내렸다. 이런 날 북한산 백운대에 올라야 한다며 산행을 나섰다. 칼바위를 어렵게 넘고 대동문을 지나 노적봉 삼거리의 암반 계곡에서 3번을 굴러 넘어졌다. 난간대가 눈에 덮여 날 보이지 않은 백운대를 간신히 오르고, 하산 후에 진단을 받아보니 오른쪽 갈비뼈 3대가 완전히 부러진 상태였다. 6개월간 깁스를 하고 지내다가 낫게 되어 산행을 또 시작하게 되었다.
모처럼 설악산에서 풍광이 수려하고 기氣가 세다는 백담사 수렴동 계곡으로 행했다. 봉정암에서 1박을 하고 대청봉에 오른 후에 한계령으로 하산하는데 비가 내려 미끄러웠다. 안개가 낀 10여 미터 앞에서 까마귀 두 마리가 땅에서 엉겨 붙어 싸우다가 인기척에 휙 하니 날아갔다. 왠지 기분이 이상해져 조심스럽게 내려가는데 까마귀가 싸우던 지점에서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정신 혼미해 지면서 팍 미끄러지다가 나무에 걸려 멈추게 되었는데 오른쪽 어깨가 아파 움직여지지 않는다. 한참을 앉은 채로 뭉그적대며 왼쪽 어깨에 배낭을 겨우 걸치고 한계령 가까이에 내려와 119에 실려 인제 병원으로 갔다. 진단 결과 오른쪽 어깨 인대가 끊어져서 팔을 고정한 채로 귀가하여, 아내에게는 괜찮은 척해가면서 인대가 다 붙기까지 4개월 동안 산행을 못했다.
위험이 떠르는 산행은 계곡에서 가끔 사고를 당한다. 어느 해 필리핀에 여행을 갔다가 마닐라 근교의 ‘팍상한폭포’를 구경하러 두 사람씩 카누를 타고 현지인 도우미가 밀어주는 데로 계곡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폭포에서 시원하게 물세례를 받고 맨 나중에 약간 낡은 카누를 타고 도우미 없이 내려가는데, 앞에 탄 체구가 큰이가 상체를 일으키는 통에 카누가 갸우뚱하다가 전복되고 말았다. 우리는 각자 물속에 빠진 채로 흘러가다가 사고를 알고 모터보트로 달려온 현지인 안전요원들게 구조되었다.
내가 수렴해 본 국내의 유명산 계곡들을 열거해 본다. 지리산의 뱀사골계곡, 피아골계곡, 구룡계곡, 치악산의 세렴폭포계곡, 설악산의 십이선녀탕계곡, 비선대계곡, 수렴동계곡은 경관이 수려하고 규모가 대단한 곳이다. 포항 내연산의 열두폭포계곡, 문경 대야산의 용추계곡, 양평의 용문산계곡, 가야산의 홍류동계곡도 대단하다. 해운대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장산의 폭포수계곡은 낙차가 큰 폭포가 있어 수심이 깊은 소沼와 바로 위에 폭포사라는 절이 있다. 그리고 청송 주왕산에는 주왕紂王에 대한 전설이 서려 있는 계곡이 압도적이지만, 물속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 아쉬운 곳이다.
뱀 모기가 없는 아이슬란드에 또 가보고 싶다. 그림 같은 푸른 벌판에는 소 말 양들이 풀을 뜯고, 웅장한 계곡의 거대한 폭포들은 눈이 시리도록 환상적이다. 울진 매봉산에도 다시 오르고 싶다. 금강송지대를 지나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할 때는 골짜기에 설치되어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열두 다리를 건너게 된다. 그 다리들을 다 거쳐서 내려오면서는 노천온천수에 발을 씻을 수가 있어 매력이 넘치는 산 계곡이다. 2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