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위(示威)
차은량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 형제 울부짖던 날 손
가락 깨물며 맹세하면서 진리를 외치는 형제들 있다. 밝은 태양 솟아
오르는 우리 새 역사 삼천리 방방곡곡 농민의 깃발이여 찬란한 승리의
그 날이 오길 춤추며 싸우는 형제들 있다.
2000년 12월 21일, 전국의 농민들이 일시에 일어섰다.
아침 9시, 면사무소는 시끄러웠다. 거리 곳곳에 배치된 경찰과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모여드는 트랙터의 굉음 소리, 머리가 허연 노인들
과 20대의 젊은 농부들은 물론 젊은 여인들과 다리에 도 없는 안노
인들까지 그 수가 만만치 않았다.
원색의 깃발들이 나부끼고 사람들은 모두 색색의 머리띠를 두르거나
어깨띠를 둘렀다. 면사무소 마당에서 결의에 찬 출정식이 끝나고 북소
리에 맞추어 구호가 시작되었다.
- 농축산물값 보장하고 농가부채 해결하라.
전국 농민 총 단결로 농민 살길 찾아보자.
- 농촌 회생 대책 없는 정치인들 각성하라.
우리 농민 다 죽는다 농가부채 특별법 재 정하라
뒤이어 이어지는 농민 가의 곡조가 구슬프기 짝이 없다. 여기저기
무전기를 들고 뛰어 다니는 경찰들의 눈초리가 오늘만큼은 하나도 매
섭지가 않다. 시위가 계획된 후 남편은 여러 날을 경찰의 감시를 받았
다. 밤늦도록 남편을 찾는 전화가 끊이질 않았다. 추수 갈무리도 다
끝냈으니 붙잡혀 들어간들 대수냐며 쓴웃음을 짓는 남편에게 그저 누
구 다치지 않게 평화롭게 하라는 말만 거푸해댔다.
출정식을 마친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십 수대의 트랙터를 선두
로 스피커를 장착한 트럭이 뒤를 따랐다. 마이크를 든 선창자가 구호
를 선창하면 군중들은 북소리에 맞추어 제창을 하였다. 구호를 외치는
사이사이 농민 가를 부르고 다시 구호를 외치는 동안 어느새 대열은
정리되고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교통을 정리하는 경찰들과 한
쪽 도로를 점유하며 행진을 하는 농민들의 대열이 일사불란하다.
대열은 농협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
한바탕 구호를 외치고 농민 가를 부른 후 부녀회원들이 끓여 내 온
국수를 경찰과 면직원, 농협직원들과 농민들이 한데 어울려 먹었다.
오늘 행사에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가 을 모았다. 돼지를 낸 사람,
빵과 우유를 낸 사람, 과일을 내고 술을 내고 피로회복제까지 수북히
쌓여 있다.
점심을 먹은 농민들은 두 대의 버스에 올라 중심가인 상당공원으로
향했다. 트랙터를 몰고 청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가 고속도로를 점유
하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경찰의 원천봉쇄로 무산되었다.
시내로 들어서기 전부터 밀리는 차량에 도로가 막히기 시작했으나
그리 늦지 않은 시간에 집결지인 상당공원으로 청원군 지역의 농민들
이 모두 모였다.
사람들이 내쏘는 눈빛들이 형형 했다.
14개 면 지역의 회장들이 삭발 식을 하는데 남편도 거기에 있었다.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다. 산다는 게 무엇인가. 막연한 의문이 검은 구름처럼 피어올랐
다.
삭발 식이 끝나자 노도와 같은 농민들의 함성이 장천에 울려 퍼지고
확성기를 매단 트럭의 무리를 따르는 풍물 놀이패들 사이사이로 농민
들의 끝도 없는 행렬이 뒤를 이었다. 시내의 한 쪽 차선은 완전히 마
비되었다. 중앙선을 따라 여경들이 노란 띠를 늘어뜨려 교통을 정리하
며 느린 속도로 따라왔다.
상당공원에서 체육관까지의 시위가 허락된 거리는 불과 1.5KM남짓
되는 짧은 거리였다. 그 짧은 거리를 2시간이 넘도록 시위행진 하였
다. 가다가 멈추고 멈추다가 또 가고, 시간이 점차 지나자 마이크를
든 선창자가 목이 쉬었는지 발음이 분명하질 않았다. 나도 모르게 훌
쩍 트럭으로 뛰어올라 마이크를 받았다.
- 농축산물 값 보장하고 농가부채 해결하라
배추 한 포기 백 원이 웬 말이냐
전국농민 총 단결로 농민 살길 찾아보자
- 재해대책 운운말고 농업재해보상법 보장하라
- 농촌회생 대책 없는 정치인들 각성하라
뜻밖에 아녀자의 출현 때문이었는지 방송국 기자들이 몰려들어 카메
라를 들이댔다.
-
의료 보험료 인상 철회하고 한. 칠레 무역협정 중단하라
- 농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라
나 역시 얼마가지 않아 목에서 소리가 나질 않았다. 다시 뛰어내려
와 장구를 둘러메고 풍물을 놀고, 다시 구호를 외치다 보니 어느 사이
2차 집결지인 체육관에 이르렀다.
평화적 시위였다. 다친 사람도 없고 밀리고 밀리는 몸싸움도 없었
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농민들 중에 가슴으로 피를 흘리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겠으며 분노가 하늘에 닿지 않은 사람 또한 누군들
있었을까.
해산을 하고 다시 버스에 올랐을 때 경찰서 정보과장이라는 사람이
차에 올라왔다. 그는 다들 고생하셨다며 다친 사람이 없어 다행이라는
인사를 하고 내려갔다. 울컥 눈물이 솟았다. 그의 할 일은 우리를 막
는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그를 괴롭히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번 일로 농정이 어느 만큼 개혁될지, 농촌이 어느 만큼 회생될지
는 아직 짐작 할 수 없다. 다른 지역에서는 사람이 다치고 분신을 기
도하고, 고속도로가 막혔으며 수많은 차량이 부셔졌다. 힘들여 농사지
은 배추를 실어다가 도로에 내던지는 모습의 사진들이 신문에 실렸다.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고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연행된 사람들을 내 놓
으라는 시위가 또 이어졌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일한 만큼 빚을 지는 농민들, 그 억울한 현실은 바로 잡아야 한다.
동냥바가지를 허리에 꿰차고 아메리카로, 유럽으로 식량 구걸을 가지
않으려면 우리는 지금이라도 우리 농촌의 현실을 만방에 알리고 우리
스스로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삭발한 남편의 두상은 보기 싫지 않았다. 그러나 염색했던 머리카락
이 잘려나간 그의 머리는 40대 초반의 나이를 짐작 할 수 없는 백발
이었다. 까끌까끌한 그의 머리가 안쓰러워 자꾸만 콧등이 시큰거렸다.
우리들의 함성이, 서러운 몸짓들이 하나로 모아져 온 국민이 수입쌀
을 먹는 비극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한 일인들 못 할까. 내
머리카락인들 제물로 바치지 못할까.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6학년생인 아들이 제 아빠의 머리를 보
더니 눈가가 촉촉이 젖으며 하는 말이 기특하다.
“아빠와 뜻을 같이 하는 의미에서 저도 삭발하겠습니다.”
2001/ 10집
첫댓글 우리들의 함성이, 서러운 몸짓들이 하나로 모아져 온 국민이 수입쌀
을 먹는 비극을 막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한 일인들 못 할까. 내
머리카락인들 제물로 바치지 못할까.
학교에서 돌아온 초등학교 6학년생인 아들이 제 아빠의 머리를 보
더니 눈가가 촉촉이 젖으며 하는 말이 기특하다.
“아빠와 뜻을 같이 하는 의미에서 저도 삭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