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주의 사관에 물든 역사학계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라고 주장하고 있는 위만조선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위만(재위 BCE 194~BCE 180)은 본래 중국 한족 출신으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죽마고우였던 노관의 부하이다.
중원을 평정한 한 고조는 여태후와 더불어 개국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이 때 연나라 왕 노관은 흉노로 달아나고, 위만은 조선인으로 변장한 뒤 부하 1천 명과 함께 왕검성에 와서 번조선의 준왕에게 거짓 투항을 했다.

이에 준왕은 덕으로써 그를 받아주고 서쪽 변경을 지키는 수비대 책임자로 임명까지 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한족 망명 집단을 이끌고 몰래 세력을 기른 위만은 이듬해 준왕을 배반하고 왕검성을 쳤다. 그리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스스로 왕이 되었다(BCE 194).
『삼국유사』에서 말한 위만조선은 바로 우리 민족의 서쪽 영토였던 번조선의 한 모퉁이를 잠깐 강탈하여 지배했던 위만정권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 역사학계에서는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준왕을 잡아먹은 위만 같은 배은망덕한 자가 고조선의 정통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사기』에도 분명히 위만을 연나라 사람[燕人]이라고 기록했을 뿐 아니라, 안정복의『동사강목』에서는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라 했고,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용은 ‘위만은 한 명의 강도에 불과하다[乃一强盜]’고 하였다.
이처럼 위만은 중국 한족의 인물로서,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한 떠돌이 도적인 것이다.
위만정권은 손자 우거왕 때에 이르러 밖으로는 한 무제의 침입과 안으로는 지도층의 분열로 인해 결국 망하게 된다(BCE 194~BCE 108).
옛 조선은 과연 한나라에게 망했나?
전국을 통일한 진(秦 : BCE 221 전국통일 ~ BCE 207 멸망)나라가 15년 만에 망하고 난 후, 한 고조 유방(劉邦)과 초패왕 항우(項羽)가 6년 동안 아주 피가 터지도록 싸운다. 결국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고 한(漢 : 전한 BCE 206~CE 8)제국을 열게 되는데, 그 7대 임금이 무제(武帝 : BCE 141~ BCE 87)다.
오늘의 사가들은 북쪽의 흉노를 굴복시킨 한 무제가 자신감을 얻어 동북방의 고조선을 쳐들어왔다, 그리하여 준왕(準王)을 몰아내고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그 자리에 식민지 한사군을 설치했다고 한다. 마치 준왕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무엇인가?
준왕은 고조선의 서쪽 날개였던 번조선(番朝鮮)의 부단군이었을 뿐이다. 또한 진조선(辰朝鮮)의 마지막 제왕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장수들의 거듭된 화란 속에 퇴위하여 고조선 본조시대가 마감(BCE 238년)된 것은, 찬적 위만(衛滿)이 번조선을 점거하여 스스로 왕위에 오르기(BCE 194년) 44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특히 고열가 단군 시절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춘추시대 BCE 722~ BCE 403, 전국시대 BCE 403~ BCE 221)의 혼란기에 처해 있었다. 사실이 그러할진대 당시 한족이 고조선을 위협한다거나 고조선을 찬탈할 여력이 어디 있었겠는가!
- 조선 역사를 부활시킨 동명성왕, 고두막한
한 무제는 흉노를 토벌한후 그 여세를 몰아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북부여로 쳐들어온다. 그런데 당시 북부여의 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은 워낙 심성이 유약하여 제대로 맞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그리하여 우리 조선 민족이 다 넘어가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하는데, 이를 지켜보고 있던 고조선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손 고두막한(高豆莫汗)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한 무제의 군대를 물리치고 나라를 구한다.
고두막한은 기원전 108년, 졸본(卒本)에서 나라 이름을 ‘북부여’에서 동방의 대광명이라는 뜻의 ‘동명(東明 :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이라 바꾸고 동명왕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기원전 87년에는 북부여를 계승하여 조선 역사 부활의 푯대를 다시 세우니, 이분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동명성왕(東明聖王)이다.
이 때 본래 북부여 4대 단군의 승계자인 해부루(解夫婁)가 동쪽으로 가서 가섭원(迦葉原) 땅에다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에 있는 부여라는 뜻으로 동부여(東夫餘)라 했다. 해부루는 북부여 4대 단군의 동생이다. 그리하여 고두막한이 북부여의 5대 고두막 단군이 되는데, 그때부터 북부여의 후기시대[後北夫餘]라고 한다. 북부여는 시조 해모수(解慕漱) 단군으로부터 6대 만인 고무서(高無胥) 단군 때에 막을 내린다.
6대 고무서 단군은 딸만 셋이었다. 그 둘째딸이 소서노(召西弩)인데, 고주몽과 혼인을 시켜 사위로 삼아 주몽으로 하여금 북부여를 계승토록 한다. 그리하여 고주몽이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었으며, 그 후 기원전 37년에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로 변경하여 고구려 700년 역사의 창업 시조가 된 것이다. 이것이 고조선이 멸망한 후 열국시대로 들어서는 과정이다.
KBS 전주 특집프로그램

- 왜 중국인들은 부여사를 말살했을까?
북부여가 단군조선을 계승하였다. 이것이 한민족 고대사의 국통맥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역사에서는 북부여 역사라는 게 완전 말살됐다. 그 역사의 원형이「삼성기」상, 하 두 편과 「단군세기」에 나온다. 「단군세기」에는 47대 단군 역사가 나오고 「북부여기」상, 하에는 북부여의 역사가 나온다.
「북부여기」상에 해모수 단군서부터 역대 단군들이 나오는데, 5대 단군 고두막한이 바로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은 중국 한족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할 위기에 놓인 우리 동방 조선의 역사를 부활시킨 인물이다. 그런데 중국 한 무제가 고두막한을 죽이려고 덤벼들었다가 참패를 당했다. 한 무제가 패퇴한 대사건, 이것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수치였다. 중국 5천년 역사에서 당태종이 안시성에 와서 양만춘 장군한테 화살을 맞아 눈 빠진 것보다 더 부끄러운 사건이다.
그래서 중국의 역사가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이 이 북부여 역사를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 역사의 맥, 사통의 허리가 잘려버렸다. 그래서 국통 맥이 연결이 안 된다. 지금 역사학자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부여의 역사를 중국의 사료에 맞추어 꿰매고 있다. 그러니 너덜너덜하다. 이렇게 꿰매면 이런 작품이 나오고, 저렇게 꿰매면 저런 작품이 나오고, 전부 애꾸눈이처럼 찌그러져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전에 방영했던 주몽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아들로 나온다.
그게 다 중국 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서 그렇다. 해모수와 주몽은 무려 120여년 이상 차이가 난다. 해모수는 북부여의 초대 단군이고 주몽은 6대 마지막 단군 고무서의 사위인데, 어떻게 주몽이 해모수의 아들이란 말인가!
북부여는 단군조선과 고구려를 이어주는 잃어버린 열국시대의 역사의 맥을 이어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부여사를 잘 알아야 한다. 우리 한민족을 제대로 알려면, 한민족 정신의 뿌리를 알려면 부여사를 알아야 한다.
먼저 부여라는 나라 이름을 살펴보자.
첫째, 초대 단군 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이 부여(夫餘)다. 첫째인 태자가 부루(夫婁 : 2세 단군, 재위 BCE 2,240~BCE 2,182),
둘째가 부소(夫蘇 : 구려(원시 고구려, 고리국)에 봉해짐),
셋째가 부우(夫虞 : 진번국(요동의 제후국)에 봉해짐), 막내인 넷째가 부여(夫餘)이다. 단군성조는 막내왕자 부여를 도읍인 아사달의 서쪽인 녹산(鹿山 : 백악산 아사달, 지금의 길림성 장춘)의 제후로 봉한다. 이것이 원시부여, 부여라는 나라 이름의 기원이다.
둘째, 그런데 그 부여의 문화, 부여의 정신, 부여의 역사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감동을 줬는지, 44대 구물 단군 때 우화충의 반역사건(BCE 426)을 진압하고 나서 국력이 급속도로 쇠약해지자 나라이름을 바꾸게 된다. 나라를 운영하다가 도저히 안 되면 극적으로 모든 걸 일신하기 위해서 나라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이번 조선의 고종임금이 그랬고, 그 때 조선도 그랬다. 그래서 조선을 대부여(大夫餘)로 바꾼다.
셋째, 해모수(解慕漱)가 그 대부여의 중심지인 만주 땅에 세운 나라가 북부여(北夫餘)다. 즉 삼조선의 중앙 북쪽만 차지하여 국통을 계승을 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대부여에서 대 자를 빼고 북부여라고 한 것이다.
넷째, 고주몽이 어릴 때 자라던 나라, 동부여(가섭원부여)가 있다. 사실 북부여와 동부여의 역사는 4대 단군의 차이가 난다. 앞에서 말했듯이 북부여 4대 단군의 계승자였던 해부루가 피난을 가서 세운 나라가 동부여다. 그 역사만 해도 벌써 한 5, 60년 두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
이 밖에도 고두막한이 졸본 땅에 세운 동명부여(졸본부여)가 있고, 또 동부여 멸망 후 마지막 3대 대소왕의 동생이 압록곡 부근에 건국한 갈사(曷思)부여, 대소왕의 종제(從弟)가 고구려에 투항한 후 왕으로 봉해진 연나부(椽那部)부여가 있다. 또 백제 26대 성왕(CE 253~554)이 538년에 도읍을 웅진(곰나루)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한 후 ‘남부여(南夫餘)’로 국호를 변경하였다.

천자(天子)문화의 원 고향은 어디일까?
천자(天子)라는 말은 중국 한족이 먼저 쓴 게 아니다. 우리 동방 한민족이 먼저 썼다. 그 사실이 중국 사람의 기록에 있다. 후한시대의 채옹(蔡邕)은 『독단(獨斷)』에서 천자제도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천자는 동이족 임금의 호칭이다. 하늘을 아버지, 땅을 어머니로 섬기는 까닭에 하늘의 아들이라 한다(天子, 夷狄之所稱, 父天母地故, 稱天子).”
중국인들은 주변의 다른 민족에 대해 ‘동이서융남만북적(東夷,西戎,南蠻,北狄)이라 하여 오랑캐로 불렀다. 우리 민족을 가리켜 동방의 큰 활을 멘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동이족이라고 했다. 중국 중심의 천하사상(중화사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하느님의 아들, 제왕을 부르는 ‘천자天子’라는 호칭은 동방사람이 먼저 썼다고 밝혀 놓았다. 이 내용을 보면 천자는 부천모지(父天母地), 하늘을 아버지로 삼고 땅을 어머니로 삼았다. 천자는 천지(天地)의 아들이다. 하늘땅 천지부모의 아들인데, 이것을 하늘로 상징해서 하늘의 아들, 천자라고 했다. 천자는 본래 천지의 아들인 것이다.
- 천자(天子)에 대한 예(禮)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천자국임을 입증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고대 역사를 살펴보면 주변의 제후들이 천자에게 예를 올린 사건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4,300년 전, 요임금으로부터 정통을 물려받은 순임금이 태산에 올라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동방의 천자’를 찾아가 조근(朝覲)하는 예를 올렸다. 이 내용이 『서경』에 “동순망질 사근동후(東巡望秩 肆覲東后)”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순망질(東巡望秩), 동쪽으로 순행하여 산천에 제를 지내고 사근동후(肆覲東后), 동방의 임금님을 알현했다. ‘사근동후’에서 ‘근(覲)’은 『강희자전』에 ‘하현상(下見上)’, 즉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뵙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근친(覲親)가다, 조근(朝覲)한다고 할 때의 근 자로 ‘제후가 천자를 뵙는다’는 뜻이다. 왜 순임금은 하느님께 제를 올리고 나서 동방의 천자를 찾아뵈었을까?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여기에 동방 고대문화와 역사의 비밀이 다 들어있다. 순은 “제가 이제 천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하고 천지의 주인이신 상제님께 고하고 나서, 자기들을 다스리시는 동방의 천자님을 찾아뵙고 예를 올린 것이다.
여기서 순임금이 알현한 ‘동후(東后)’는 단군성조님을 말한다. 사근동후(肆覲東后)란 고조선의 제후 순이 동방의 천자인 단군왕검을 찾아뵈었다는 뜻인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이 ‘후’ 자를 제후 후(侯) 자로 해석을 하여 ‘가서 동방제후를 만났다’고 왜곡해 놓았다. 그러나 분명히 제후 후 자가 아니고 임금님 후(后) 자가 아닌가.
- 조선의 천자문화가 어떻게 중국으로 넘어갔을까?
그러면 조선의 천자문화가 어떻게 중국으로 넘어갔을까?
앞의 기록으로 보면 순임금은 동방 천자로부터 임명받은, 천자의 영향력 하에 살던 제후였다. 그런데 4,300년 전인 고조선 초기, 요임금 말엽부터 순임금 때까지 동북아 지역에 9년 홍수가 일어나 중국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다.
이때 요임금이 치수관인 곤에게 물을 다스리라고 하였으나 곤은 실패했다. 곤은 훗날 하(夏)나라를 연 우(禹)임금의 아버지다. 옛날에는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나 치수하는 일 등을 가가계승했다. 그래서 우가 아버지를 이어 치수를 맡았으나 방법이 없다. 이에 아주 지극한 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더니 천상의 신인이 나타나 ‘어디어디를 가면 누구를 만나리라!’는 계시를 내려 주었다. 해서 완위산(宛委山 : 회계산)에 가서 부루 태자를 만나게 된다.
그 때 단군성조의 맏아들 부루 태자(夫婁太子 : 2세 단군)는 단군성조의 명을 받고 오행치수지법(五行治水之法)이 담긴 《금간옥첩(金間玉牒)》을 우에게 전수해 주었다. 이 내용이 『환단고기』와 후한(後漢) 시대의 조엽(趙曄)이 쓴 사서 『오월춘추(吳越春秋)』에 나온다. 우는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9년 홍수를 다스리는 데 성공한다. 그 공덕으로 민심을 얻은 우는 후에 하나라를 열었다. 하나라는 순임금으로부터 법통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당시 우에게 전한 《금간옥첩》 속에는 치수의 요결뿐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천자의 도와 동방 고조선의 정치제도, 문화가 수록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국가 경영 지침서를 내려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큰 법도, 〈홍범구주(洪範九疇)〉다. 이를 줄여서 ‘범주’라고 한다. 영어 카테고리(category)의 번역어 어원이 바로 4,300년 전 〈홍범구주〉다.
공자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하여 ‘조술요순(祖述堯舜)하시고 헌장문무(憲章文武)하시니라’(「중용(中庸)」30章). 즉 ‘요임금과 순임금의 사상, 심통, 법통을 근본으로 하고 문왕과 무왕의 국가통치 제도를 본받았다’고 하였다. 이 요순임금의 국가 경영 지침서, 그것이 바로 부루 태자가 전한 홍범구주인 것이다. 홍범구주의 다섯 번째가 황극(皇極)사상이다. 황극에 대해 주자는 “황극은 천자의 보위(寶位)다.”라고 정의했다.
황극은 나라의 임금님이다. 하늘도 땅도 인간도 전부 임금님이 주인이다. 그만큼 천자의 자리가 지엄하기 때문에, 천자의 역할, 천자의 영향력이 너무도 엄청나서 ‘천하에 미친다’고 했다. 또한 모든 인간의 삶과 죽음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에 ‘황극은 천하지중(天下之中)이다’라고 했다. 바로 이 황극으로부터 천자사상이 나온 것이다.
천자제도의 기틀, 동양문화의 근본정신이 담겨있는 《금간옥첩》이 중국에 전해짐으로써 동방 고조선의 천자문화가 본격적으로 중국 문화의 토양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 계기가 된 역사적인 대사건, 세기적인 대사건이 바로 9년 홍수이다.
이후 전국(戰國 : 전국시대 BCE 403~ BCE 221)을 통일한 진(秦)왕 정(政)은 스스로 천자국을 자처하며 자신을 시황[秦始皇]이라고 칭했다. 진시황 이전의 중국의 역대 통치자들은 다 왕이었다. 흔히 성왕이라 하는 요, 순, 우, 탕, 문 무왕도 다 왕이었다. 고대 중국을 천자국으로 묘사한 것은 모두 한(漢) 대 이후 중국 사가들에 의한 조작이며 윤색인 것이다.
- 황제의 칭호를 되찾은 고종
천자문화의 본향인 조선에서는 고조선 이후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 천자 칭호가 계승되어 왔다. 우리 민족은 하늘의 자손, 천제의 아들이라는 의식을 갖고 성신의 가르침[神敎]을 받아 내려 인류를 다스려 온 천손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개벽의 땅 한반도로 내몰린 동방 조선은 중국의 거듭된 침략을 받으면서 차츰 중국의 속방으로 전락해갔다. 그리하여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 25대 충렬왕에 이르러서는 그 호칭을 왕으로 내려 부르게까지 되었다.
그렇게 사대주의에 빠진 나약한 역사의식으로 600년 세월을 보내다가, 19세기에는 국력이 급격히 쇠약해져서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 때 본연의 역사정신의 푯대를 세워 천자국의 황통을 회복하려는 비장한 마지막 시도가 있었다.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임금 고종은 1897년, 천자국의 위상을 되찾기 위해 국호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고려 충렬왕 이후 약 700년 만에 황제라는 호칭을 되찾은 것이다. 그럼 여기서 궁금증이 들 것이다. 왜 고종임금은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썼을까? ‘대한제국’의 ‘대한(大韓)’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 ‘대한(大韓)’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늘에는 삼신三神, 땅에는 삼한三韓으로, 삼신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옛 조선[古朝鮮]은 조정을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다[分朝管境]. 이것을 삼한관경제라고도 한다. 관은 관리한다, 경영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국경을 셋으로 나누어 세 분의 왕이 각각 다스렸다는 뜻이다. 나라 이름은 조선인데 현실적으로는 요동의 진한, 요서의 번한, 한반도 전체 마한, 이렇게 삼한으로 다스린 것이다. 마한은 하늘의 정신, 번한은 땅의 정신을 상징한다. 그리고 천지의 주인, 천지의 중심인 태일太一을 상징하는 곳이 진한이었다. 진한의 강역은 만주지역이며 수도 아사달은 지금의 하얼빈 지역이었다. 그리고 남경, 즉 마한의 수도는 지금의 평양이며, 번한의 수도인 서경은 단재 신채호 선생에 의하면 안시성이다.
조선이 망국의 운으로 들어서자 고종임금은 웅대했던 옛 조선 삼한의 혼을 되찾기 위해, ‘삼한일통(三韓一統)’이라는 의미로 ‘대한’을 붙여서 ‘대한제국’이라 칭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역사학자들은 ‘삼한일통’의 ‘한’을 남삼한(南三韓)으로 얘기한다. 본래의 대륙삼한이 아니라 조선이 망하고 이주해 내려온 ‘백제, 신라, 가야’의 전신인 한강 이남의 삼한인 마한, 번한, 진한에서 왔다는 것이다. 아니, 과연 고종임금이 그 작은 삼한을 염두에 두고 국호를 ‘대한’으로 정했다는 말인가! 그건 정말로 잘못된 해석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본래 옛 조선의 회복을 꿈꾸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했다. 광활한 대륙을 다스리던, 단군성조가 세운 조선! 요임금 순임금이 즉위를 하고 나서 큰 절을 올린 천자의 나라 동방 조선! 고종은 조선의 천자문화, 황제문화의 역사 정신을 그대로 드러내어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했던 것이다.
고조선은 조물주 삼신三神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서 삼신 하나님의 삼신제도에 맞추어 나라를 삼한, 셋으로 나눠서 다스렸다. 그런데 이것이 중국의 마지막 왕조.까지 그대로 전해 내려왔다.
중국 심양(瀋陽)을 가보면 청나라의 토대를 닦은 후금(後金 : 청淸의 전신)의 태조 누루하치[奴兒哈赤]의 궁궐이 있다. 그 고궁 마당에 들어서면 중앙에 누루하치가 앉던 누각이 있고 좌우로 부왕인 좌익왕(左翼王)과 우익왕(右翼王)이 앉는 누각이 있다. 그리고 좌우 각각 네 명씩 해서 총 여덟 명의 수령이 앉는 전각이 배치되어 있다.
한나라 원제(元帝 : 재위 BCE 49~BCE 33)의 후궁인 왕소군(王昭君)이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연지(閼氏)가 되어 흉노 땅에서 생애를 마치는데, 그 기록에도 흉노의 좌현왕(左賢王), 우현왕(右賢王) 얘기가 많이 나온다. 그 모든 것이 삼신사상에서 온 것이다. 이처럼 동북아는 중국이 됐든 우리 조선이 됐든, 저 멀리 몽골도 이 삼신(三神)문화의 틀에 따라서 나라를 통치했다. 그게 다 역사에 나오는 얘기다. 그런데도 지금 학자들이 이걸 못 본다. 왜? 우주의 창조섭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우주론을 모른다. 또 도를 안 닦아서 신관(神觀)에 약하다. 진리의 근본을 못 본다. 그러니 역사에 눈을 못 뜨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역사의 뿌리를 다 잃어버렸다. 그들이 말하는 소위 정통사학에서는 백만 년이 가도 역사의 뿌리를 못 찾는다. 절대 찾을 수가 없다!
뿌리 뽑힌 한민족혼
이제 ‘뿌리 뽑힌 한민족혼’을 보자. 여기서부터 중요한 것은 우리 한민족사의 국통맥이다. 한반도는 ‘지구의 혈 자리’로서 지구촌 해양문화와 대륙문화가 하나로 수렴 통합되는 중심지이며, 선천의 인류문명사가 총체적으로 종결되고 후천 새 역사가 시작되는 중심 땅이다. 그런데 최근 한반도를 둘러싸고 동북아에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선천의 마지막 역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일본과 중국은 동서고금을 통해 지구촌의 어떤 나라도 저지른 적이 없는, 남의 역사를 통째로 강탈하여 제멋대로 왜곡하고 먹어치우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우리의 상고사는 중국과 일본에 의해 너무도 오랫동안 왜곡과 말살의 질곡에 갇힌 채 신음해 왔다. 역사의 맥이 단절되어 천애의 고아 아닌 고아가 된 동방의 한민족! 선천 상극의 인류사에서 강대국들이 저질러 온 온갖 불의가 ‘동북아의 고대사’에 압축되어 있다.
동북아 삼국 간에 벌어지고 있는 총성 없는 역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독도 망언! 벼랑 끝에 서 있는 한민족의 미래! 동북아의 시원역사, 그 진실을 바로잡지 못한 채 오늘날 한민족은 혼 빠진 역사의 주인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인류의 꿈은 간도수(艮度數)에
- 자연의 춤사위, 팔괘(八卦)
간(艮)도수(天度地數)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팔괘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진리의 근본을 깨닫는 것은 이 팔괘의 이치에 있다. 음양의 법칙을 알아야 된다는 말씀이다.
나무 한그루의 생명 운동을 알면 팔괘가 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나무 전체를 보면 뿌리와 줄기가 있다. 뿌리와 줄기는 음양 한 짝이다. 뿌리는 보이지 않는다. 땅 밑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뿌리’가 ‘손(巽)괘’이고 뿌리에서 쭉 뻗어 올라오는 ‘줄기’는 ‘진(震)괘’다. ‘진’은 봄기운이다. 양 기운으로 쭉 뻗쳐 올라온다. 진(震)의 성질이 그렇다. 진괘를 보면 두 효는 음이고 제일 아래에 양효가 있다. 음이 꽉 누르고 있어 반발을 하며 뻗는 양의 힘이 가장 강한 것이다. 그게 목(木) 기운이다. 그걸 뇌성벽력으로도 얘기하고, 제우스 신화에서는 번개로도 얘기했다. 사람으로는 진괘를 장남, 손괘를 장녀로 비유한다.
그 다음에 이파리가 있고 꽃이 핀다. 줄기에서 뻗어 나온 꽃과 열매가 음양 짝이 된다. ‘꽃’은 ‘태(兌)괘’, 꽃이 피고 나면 맺는 ‘열매’가 ‘간(艮)괘’다. 간은 열매다. 형상으로 말하면 자연계의 산(山)도 간이다. 간은 음 기운이 딱 멎어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아래에 음효가 두 개 있고, 위에 간상련으로 양 기운이 음에 묶여 있다. 가장 정적이면서 무언가 거대한 생명의 약동이 느껴지는 것이 산이다.
그리고 태(兌)가 꽃인데, 간태(艮兌)가 합덕하여 간은 막내아들(小男), 태는 막내딸(小女)이다. 뿌리에서 줄기가 뻗어 올라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때, 나아가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는 생성의 전 과정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음양의 두 요소가 있다. 즉, 나무의 모든 변화를 이끄는 근원, 나무를 존재하게 하는 생명의 근본이 있다. 바로 ‘물’과 ‘불’이다.
불은 태양에서 온다. 그 태양 불이 ‘이(離)괘’다. 그 다음에 땅속에 있는 물 기운은 ‘감(坎)괘’다. 이 물과 불이 생명의 중추 작용을 한다. 사람으로는 중남(中男), 중녀(中女)다.
‘감(坎)’은 물인데, 하늘에서는 달(月)이다. 그리고 불[離]은 태양(日)이 근원이다. 감리일월(坎離日月)
나무의 뿌리와 줄기, 꽃과 열매는 일월의 물과 불 기운을 받아 생성된다. 물과 불을 받아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이렇게 해서 여섯 괘다. 이 여섯 괘를 사람으로 말하면 한 아버지 어머니 밑에 있는 3남 3녀다. 이 모든 생명은 하늘과 땅에서 태어나 하늘과 땅의 변화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지를 뜻하는 ‘건곤(乾坤)괘’가 있다.
뿌리와 줄기 ‘진손震巽’, 꽃과 열매 ‘간태艮兌’, 그리고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물과 불 ‘감리坎離’, 천체로 말하면 일월日月, 이 여섯은 건곤 천지부모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부 팔괘다. 이처럼 나무 한그루에서 팔괘의 이치를 쉽게 배울 수 있다. - 간도수란?
간(艮)은 열매다. 간艮은 초목의 열매요, 인간의 열매요, 문명의 열매이며 역사의 열매다. 방위로 말할 때는, 문왕팔괘에서 동북방이 간방(艮方)이라고 했다. 동북방에서 변화가 끝나고 새로 시작된다. 다시 말해서 동북방에서 열매를 맺는다. 동북방에서 변화의 한 주기가 끝난다. 그래서 동북방을 간방이라고 한다. 열매는 ‘씨종자’다. 열매 속에 뿌리, 줄기, 이파리, 꽃 등 변화의 모든 과정이 다 들어있다. 열매에는 종과 시가 함께 존재[終於艮 始於艮]한다. 그런데 이 말은 그런 변화의 생명, 변화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간방의 한민족, 그 한민족의 삶의 과정이 곧 자연의 봄철과 여름철 과정을 다 거쳐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류역사의 종시終始, 마무리와 새로운 시작, 이것이 바로 간도수다. ‘종만물시만물자(終萬物始萬物者)는 막성호간(莫盛乎艮)이라, 간艮은 만물의 변화를 끝매듭 짓고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는 곳으로, 간방보다 더 번성한 것이 없다’고 했다. 이 간艮보다 더 번성한 게 없다. 간艮보다 그 변화가 더 강력한 것이 없다.
간방(艮方)보다 변화의 모습들이 더 강렬하고 구체적인 데가 없다. 간방(艮方) 한반도는 분단이 된 채 이념의 극한 대결이 아직도 안 끝났다. 지구촌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최후의 분단국이다.
성언호간(成言乎艮), 천지 역사의 목적이 동북 간방에서 완성된다, 이러한 간소식에 대해, 간도수의 결론에 대해 알아야 된다.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 한민족은 역사의 진실이 왜곡 날조되어 혼을 완전히 상실했다. 동방 역사의 진실을 바로잡는 길이 무엇인가? 내가 한국인이 되는, 진정한 한국인이 되는 도道가 어디 있는가? 시원 역사를 바로 세우고 민족혼을 되찾아야 한다.
중국은 그동안 4,700년 전의 황제 헌원을 중국민족의 시조라고 주장해 왔었는데, 이제는 역사를 더 소급해 올라가 우리 동이족의 조상인 배달국 5세 태우의(太虞儀) 환웅의 12번째 막내 아들 태호복희(BC 3528∼BC3413), 까지 중국의 시조로 끌어들여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켰다.
태호 복희씨는 풍산(風山)에 살면서 성(姓)을 풍(風), 이름은 방아(方牙))이고, 우리나라 태극기의 팔괘를 처음 그었고, 주역을 만든 동양 역(易)철학의 시조이며, 태호 복희씨가 마지막으로 도읍을 정했던 곳이 진(陳)국, 지금의 중국 하남성 회양현인데, 지금도 회양현에 가면 태호 복희씨의 무덤이 있고, 그 앞에‘태호복희지묘’라고 쓴 비석이 세워져 있다.
태호 복희씨가 동방 한민족[東夷]의 혈통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중국의 사서(史書)에 “태호복희왕은 진국의 출신이다.(帝出於震)”『태평어람』卷78 「제왕세기」태호복희씨조]
“태호복희가 동이족이라는 것은 고대로부터 공인되어 온 일이다.”『夷夏東西說』, 중국학자 부사년(傅斯年)
『태평어람太平御覽』:송나라 때 이방(李昉)이 편찬한 책에‘震’국은『주역』 설괘(說卦)에“만물이 출호진(出乎震)하니, 震은 東方也”라고 한데서 알 수 있듯, 동쪽지역을 뜻하며,‘동방’이라는 말은『후한서』「동이열전」서문에“東方曰夷”라 하였으므로, 태호복희가 우리 동이족임을 뜻하는 것이다.
『환단고기』에는“태호복희(BC3528∼BC3413)는 동방 구이(九夷)족 중, 풍이(風夷)족 출신으로 제5대 태우의 환웅천황의 12번째 막내아들로 태어났다.‘크게 밝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복희씨는 지금의 행정관에 해당하는 우사(雨師)의 직책을 맡았으며, 우주 생성변화원리의 이치를 담은 팔괘를 처음 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인슈타인이 자기의 학설에 붙일 명칭을 고심하다가 동양의 팔괘의 효를 구성하는 음양(陰陽)개념에서 힌트를 얻어 ‘Relativity’(상대성) 이라는 단어를 가려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또한 그가 동료에게 보낸 한 편지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유럽 과학의 발전은 두 가지의 위대한 성과를 기초로 하고 있다. 하나는 그리스의 철학자가 형식논리의 체계를 발명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실험을 통해서 인과관계를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한 동양의 현철들은 비록 이 두 가지 길을 거치지 않았으나, 놀랍게도 동양에서는 그러한 것의 발견이 모두 이루어져 있었다.”(참조:『역으로 본 현대과학』)
또 양자역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닐스 보어는 음양의 이치를 담은 태극문양에서 힌트를 얻어 양성자(+)와 전자(-)로 이루어진 원자모델을 발견하는 업적을 세웠으며, 후에 태극마크를 가문의 문장(紋章)으로 삼기도 했다.
동양의 지혜에서 발명의 힌트를 얻은 서양문명사의 또 다른 인물로 라이프니쯔 이다.
서양에서 이진법은 17세기초에 고안되어 나왔는데, 이원론에 심취해 있던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가 주역 이론에 이진법이 함축되어 있는 것을 보고 체계를 정립시켰다.
그는 베이징에 있는 프랑스 전도사 부베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주역을 배우고 괘상(卦象)을 스스로 연구하여 1697년‘파리 과학 학술원’에서 자신이 구상한 개념을 정리하여 「이진법 정수론 주해」 라는 논문을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1709년에 복희팔괘와 함께 이진수를 나타낸 분석표를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면서,“주역은 모든 과학의 열쇠이다.”라는 부베 신부의 신념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복희팔괘는 세 개의 효(爻)를 이용하여 ‘건태리진손감간곤’라는 여덟 개의 괘상를 표시하고 있다. 라이프니츠는 양(1)을 1, 음(0)을 0으로 생각하고 고쳐 쓰게 되는데, 팔괘를 이진수로 나타내면 111, 110, 101, 100, 011, 010, 001, 000과 같다.
이후 부호논리학의 대가가 되면서 “나의 불가사의한 이진법의 새로운 발견은 5천여 년 전 고대 동양의 복희왕이 발견한 철학서이며 문학서인 주역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라고 고백하게 된다.
18세기 라이프니츠가 세상의 언어 표현을 몇 가지 간단한 기호 속에 모두 담으려는 꿈을 힐베르트, 괴델, 튜링으로 이어지는 수학자들이 실현하려고 애썼고, 그 과정에서 튜링이 최초의 컴퓨터를 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은 27세인 1938년에 이진법으로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튜링 기계’를 세상에 소개하면서 현대 디지털 컴퓨터의 추상적인 모델을 제시하게 된다. 또한 튜링은 1943년 12월, 콜로서스(Colossus)라는 세계 최초의 전기로 동작하는 연산 컴퓨터를 만들어 독일군의 무적 암호 에니그마(Enigma)를 해독했다.
이는 최초의 컴퓨터로 알려진 미국의 에니악(ENIAC)보다 2년이나 빠른 것이다. 그후 튜링의 아이디어는 1951년 ‘폰 노이만’에 의해 현대 컴퓨터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에드박(EDVAC)이 만들어졌고, 과학자들은 수많은 계산 방식을 자동으로 수행하는 디지털 컴퓨터의 핵심에 접근하게 된다.
이처럼 음양은 이진법을 낳고 이진법을 응용한 사칙연산 계산기는 컴퓨터로 이어지고 있다. 세상 모든 만물에 수를 대응시켜서 짝수와 홀수로 분류하여 0과 1로 표시한 것은, 주역에서 만물을 음과 양으로 분류시킨 것과 동일하다.
0이 곧 무극이며 1이 곧 태극이다. 그리고 하나에서 많음으로 많음에서 하나로 귀착시키는 논리의 과정은 전체에서 부분에 이르기까지 질서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같이 현대문명의 밑거름에는 이진법의 발견이 있었고, 그것은 동양의 역(易)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방 배달국의 주역 팔괘원리는“5,700년 전에 우리나라 태호 복희씨가 처음으로 시획팔괘(始劃八卦)를 하시고, 우주의 이법인 주역을 처음 그려 내놓았다.
"인류문화의 모태가 주역(周易)이다. 태호 복희씨가 내놓으신 주역문화를 바탕으로 각 민족의 문화가 펼쳐지게 되었으므로 주역이 인류문화의 모태가 된다.
동,서양의 삼신관(三神觀)
다시 국통맥을 보면, 고조선은 나라를 삼한으로 다스렸다. 이것을 보는 것이 우리 한민족 역사의 뿌리와 진리의 근원, 깨달음의 근원, 우주론의 근본 문제다. 동방은 조물주를 삼신(三神)이라고 한다.
조물주의 창조의 덕성인
조화신 造化神 (父: 만물을 내시고),
교화신 敎化神 (師: 以神設敎,가르치시고),
치화신 治化神 (君: 다스리시고)의 창조의 본성을 가지고 삼신(三神)이라 하는 것이다.
삼신(三神)의 본성은
첫째, 만물을 창조하는 조화신의 역할이 있고,
둘째, 깨달음을 열어주는, 가르쳐서 변화시켜주는 교화신의 역할,
셋째는 다스리는, 통치하는 치화신의 역할이 있다.
동방의 이 삼신三神 의 문명을 열어서 제도화 시키는 과정이 바로 한민족의 뿌리 역사인 환국-배달-조선의 역사다. 즉 우리 민족의 시원 국가인 환국, 배달, 조선은 삼신의 삼수三數 법칙으로, 삼신의 세 가지 창조 덕성을 생활 문화로 뿌리내린 것이다. 조물주 삼신 상제의 첫 번째 본성인 조화신의 특성을 몸으로 체득한 것이 조화시대 환국이다. 그 때는 모든 백성이 광명으로 살았다(white shaman). 밝아서 아주 거짓없이 진실하게 살았다.
그 다음, 교화신의 기운으로 문명을 열어 나간 나라가 배달국이다. 문자를 만들고 농경문화를 열고, 시장문화를 열어 교역을 하고, 약재를 만들어 병을 고치는 등 실제로 문명을 열었던 시대였다. 그리고 세 번째 치화시대가 고조선이다. 조선을 개국한 단군성조는 훨씬 더 지존하신 분이다. 이분은 삼신 상제의 정신을 인간의 역사 통치 질서에 뿌리를 내려 나라를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다시 말해서 뿌리 문화를 취합하여 삼신 상제의 가르침을 통치 역사로 제도화시켰다. 이것이 중요하다. 먼저 교화시대인 배달국을 연 거발환 환웅이 백두산 신시에 나라를 처음 건설할 때 환국으로부터 받아내린 가르침이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제세이화(濟世理化), 광명이세(光明以世)다.
백성들을 다스려 진정한 하늘 백성으로 만드는 통치 이념을 배달국 환웅천황께서 처음으로 열어주신 것이다. 그리고 삼신의 질서, 삼신 상제의 창조 코드인 삼수(三數)를 통치원리로 하여 나라를 삼한으로 나눠 다스린 것이 조선, 정확히 말해서 단군조선이다. 이 조선을 후대의 한양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옛 조선, 고조선이라고 한다. 국통을 안다는 것은 우리 한민족사의 국통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삼신상제가 오시는 방위가 동북방, 그것을 음양의 이치, 팔괘의 원리로 간방이라고 한다. ‘간(艮)은 지야(止也)라’ 간은 멈추는 곳, 그치는 곳이다. 즉 간(艮)에서 천지의 뜻이 이뤄지고 우주변화의 한 계절(선천역사)이 끝난다. 그칠 지 자!
고종은 나라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천자국의 종주로서 세계만방에 천자국임을 선포한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의 국호 ‘대한민국’의 뿌리다. 그런데 그 ‘대한’은 어디서 왔느냐? 앞서도 말했듯이 ‘大韓’은 삼신의 창조섭리, 삼신상제의 광명정신에서 온 것이다. 하늘에서는 삼신으로 부르고, 땅에서는 삼한으로 부른다. 삼신 상제의 뜻을 계승하여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세 분의 왕이 다스렸던 웅혼한 삼한의 혼을 다시 통일한다고 해서 고종임금이 ‘대한’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국호 ‘대한’의 비밀 코드를 푸는 열쇠인데, 이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고조선이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것이 인식 안되면 大韓이라고 쓸 수도 없고 부를 수도 없지 않겠는가.
더욱이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대다수 역사학자들은 고조선이라는 나라의 우리 시원 역사 자체를 부정한다. 신화라고 가르친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고조선의 시원역사를 제대로 아는 게 밥 먹고 사는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말한다.
우리 역사의 국통을 아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아는 게 아니다. 우리 민족이 섬겨 왔던, 하느님, 삼신상제님의 창조 섭리, 인간이 어떻게 태어나고, 인생의 참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우주의 봄여름철을 살아왔느냐 하는 삶의 과정과 역사의 깊은 섭리를 아는 것이다. 우리의 고대역사는 간도수(艮度數) 실현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배달국의 시조는 지금으로부터 5,900년 전, 동방 땅에 처음 나라를 세운 거발환 환웅천황이다. 환국 말기에 천부인과 제세핵랑군 3,000명을 이끌고 와 백두산 아래 천평(天坪)에 신시(神市)를 열었다. 총 18대의 환웅천황이 다스리시며 1,565년 동안 번창한 배달 문명은 삼신 상제의 가르침을 한민족의 삶의 이념으로 뿌리내려 주었다. 그 배달국을 계승한 것이 삼한이며, 그 나라를 전체 조선(朝鮮)이라고 하고, 구체적으로는 단군조선이라고 한다.
초대 단군성조가 배달국의 법통을 계승하여 아사달을 수도로 나라를 세워, 총 47대 단군이 2,096년간 통치하였다. 단군조선이 건국한 지 1,048년이 지나, 정치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22대 색불루 단군에 이르러 도읍지를 백악산 아사달(현재의 길림성 장춘)로 천도를 한다.
그리고 그동안 병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번한과 마한에 병권을 일부 나누어 줌으로써 삼한 체제의 동요가 서서히 일기 시작하였다. 이에 삼한관경의 체제는 무너지고 대신 독립된 병권이 인정되는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의 삼조선 체제(分權管境)로 개편되었다.
그 후 고조선 말기 43대 물리 단군의 재위 말기인 기원전 426년에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화충이 반란을 일으켜 아사달이 점령되고 물리 단군이 피난길에 붕어하고 만다. 이 때 구물 장군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군을 토벌하고 44대 단군으로 즉위한다. 그리고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국호를 조선에서 대부여로 개칭하고 백악산에서 장당경(요령성 개원)으로 천도하였다.
나라를 근본적으로 혁신해서 다시 살려보려고 몸부림쳤으나 이미 진조선(진한)의 중앙정부 권력은 크게 약화되고 번조선(번한)과 마조선(마한)의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중앙정부인 진조선의 권한이 축소되고, ‘좌우의 두 조선’이 형식적으로 진조선을 받드는 형국이 되자 장군들의 반역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고조선은 점점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38년, 47세 고열가 단군에 이르러 마침내 고조선은 2,096년의 장구한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고조선이 망하면서 역사의 무대는 북삼한에서 한강 이남의 남삼한으로, 대륙에서 반도로 옮겨오게 되었다. 즉, 동방 문명의 원 핵 자리요 숨구멍인 동북 간방(艮方)으로 조여들어 온 것이다. 이로써 한민족은 본격적인 간(艮)도수 실현의 역사 시대를 준비하게 되었다.
‘구변지도’끝에 이루어지는 ‘大韓’
고조선이 어떻게 망하느냐, 그리고 우리 민족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가느냐는 것을 예언한 사람이 있다. 9천년 역사를 이어 온 우리 한민족의 국운을 예언한 위대한 인물, 그가 바로 고조선 6대 달문 단군 때의 신지(神誌) 발리(發理)이다. 그는 대우주의 조화옹하느님이신 삼신상제를 예찬하고 한민족사의 뿌리 되는 歷代 열성조의 성덕과 치적을 칭송하면서, 단군조의 앞날과 한민족의 국운에 관한 예언을 남겼다. 그것이 『신지비사(神誌秘詞)』이다.
여기서 그는 ‘이 땅 東國의 역사는 아홉 번 바뀐다[구변지도(九變之道)]’고 했다. 즉, 삼신상제의 섭리로 수도 셋을 두고 세 임금이 다스리는 삼경의 균형이 무너지면 고조선이 망한다. 그 후 나라 이름이 크게 아홉 번 바뀐 뒤에 새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발리의 예언처럼 실제로 우리나라는 ①환국 ②배달 ③조선 ④북부여(열국시대) ⑤고구려(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4국시대)
⑥대진국(발해)·통일신라의 남북국 시대 ⑦고려 ⑧조선 ⑨상해임시정부 ⑩대한민국으로 아홉 번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신지 발리가 한민족 통사의 대강을 논하면서 전하고자 한 진정한 뜻은 과연 무엇일까? 아홉 번 변한다는 것은 열 번째로 나라이름이 바뀌어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는 뜻이다.
그것은 분열의 극단을 뜻하는 ‘9’수의 천지 상수 원리에 의해 나라이름이 아홉 번 변하면서 한민족이 선천의 분열시대를 종결짓는다는 것이며, 나아가 10무극의 통일시대인 후천세계를 열고 완전한 통일국가로 거듭 태어나리라는 의미인 것이다. 아홉 번은 3×3=9로, 생장성(生長成) 삼변성도(三變成道,세 번에 걸쳐 완성된다. 이루어진다)의 원리를 의미한다.
삼신상제의 섭리에 의해
1단계 환국-배달-조선의 뿌리국가 시대, 2단계 북부여를 중심으로 하는 열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 대진국(발해)과 후신라의 남북국시대, 3단계 단일왕조 시대인 고려-조선을 거쳐 주권재민의 임시정부시대로 들어선다. 이 임시정부시대를 거쳐 오늘의 대한민국이 열렸는데 이 나라가 또 남북으로 분단이 되었다. 이처럼 세 번 변화를 거쳐 온 한민족의 분열과 통일의 역사 과정은 장차 지구의 중심 땅이 될 간방艮方,동북방의 남조선에서 실현되는 인류문명 대통일 도수, 즉 간(艮) 도수에 의해 그 종지부를 찍는다. 출처: 개벽 실제상황
우리나라의 국호는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대진국(발해), 고려, 조선, 대한민국으로 국통이 이어져 왔으며 9번의 국호(九變之道)가 모두 다 광명(光明)을 상징하고 있다.
①환국(桓國)은 광명의 나라(桓은 하늘의 광명을 나타낸다)
②배달국(倍達國)은 광명이 비친 땅(밝땅→밝달→배달) 달(땅): 응달,양달.
③조선(朝鮮)은 조일선명(朝日鮮明):아침의 해가 선명하게 밝아온다는 의미
④부여(扶餘)는 아침에 먼동이 뿌옇게 밝아오는 나라,
⑤고구려(高句麗)는 고대광려(高大光麗) 즉 높고 크게 빛나는 나라,
⑥대진(大震)국은 동방 진(震)자를 썼으니 광명이 처음으로 올라오는 나라(발해는 외부에서 부르던 명칭이고, 발해인들은 스스로 대진이라고 불렀다. 광명의 바다라는 渤海도 역시 광명의 나라를 뜻한다),
⑦고려(高麗)는 고구려와 같다
⑧조선(朝鮮)은 밝은 아침의 나라,
⑨대한민국(大韓民國)의 韓은 인간의 광명을 나타낸다.
오호嗚呼라. 정유기政猶器하고 인유도人猶道하니 기가리도이존호器可離道而存乎며 국유형國有形하고 사유혼史有魂하니 형가실혼이보호形可失魂而保乎아. 병수도기자竝修道器者가 아야我也며 구연형혼자俱衍形魂者가 역아야亦我也니 고故로 천하만사天下萬事가 선재지아야先在知我也니라. 연즉기욕지아然則其欲知我면 자하이시호自何而始乎아.
오호라! 정치는 그릇(器)과 같고 사람은 도(道)와 같으니, 그릇이 도를 떠나서 어찌 존재할 수 있으며,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혼과 같으니, 형체가 그 혼을 잃고서 어찌 보존될 수 있으리요. 도와 그릇을 같이 닦는 자도 나요, 형체와 혼을 아울러 발전시키는 자도 나로다. 그러므로 천하만사 가운데 먼저 할 일은 나를 아는 것(天下萬事先在知我)이다. 그러한즉 나를 알려면 무엇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겠는가?
행촌 이암(1297∼1364,고려시대) 선생이 저술한 <단군세기> 서문
첫댓글 적은 외부의 적보다도 내부의 적이 더 교활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일제시대에도 친일파들이 더 악날했다는 것을 상기합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우리역사 뿌리를 말살시키기 위해 꿈꾸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철밥통이 깨지고 영원한 민족반역자들이 되기 때문에..
환단고기를 토대로 주장하시려면 일단 환단고기가 진서라는 것부터 증명하시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역사를 학문이 아니라 신화로 만드는 주장은 그만 좀 올라왔으면 좋겠습니다. 역사 카페에 올리시려면 최소한 윗글에서 종교색이나 도참색은 좀 빼고 올려 주시면 좋겠군요. 운영진에서도 조금 규제를 하실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합니다. 환단고기 옹호론을 올리는 것을 문제라 볼 건 아니겠지만, 이처럼 종교색이나 도참색 강한 글은 좀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주장에 대한 근거도 없이 특정 종교단체의 글을 단순 퍼나르기 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대종교는 단군을 국조 혹은 교조로 하는 한국의 고유 종교입니다.
조선[단군]시대에는 무천 혹은 대천, 고구려에서는 경천, 신라에서는 숭천, 고려시대에는 왕검교, 조선시대에는 '고삿날'이라는 민속화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09년 나철이 대종교를 창설했습니다.
즉, 종교도 역사인것입니다.
종교적인 필요에 의해 고대의 역사를 전승시켰을 경우, 전달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원래 기록을 윤색했거나 첨착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규제를 한다는 것은 설득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명치호태왕님의 말씀처럼 환단고기가 진서인가, 증명하는것이 순서일듯 합니다.
미주가효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우리땅님의 주장처럼 종교도 역사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역사의 대상이지 주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종교에 의해 윤색된 역사적인 주장을 이카페에 올리는것은 적절하다고 판단할수 없습니다.
지나가나님// 그렇다면 역사의 주체가 무엇인지요?
역사란 현제를 제외한 과거 모든것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종교만 그 역사에서 제외할수 있습니까?
윤색되거나 왜곡된 역사를 밝히는것이 지금 우리들이 이곳에서 하는것이 아닙니까?
그것도 토론을 통해서 말입니다.
님의 논리는 앞 뒤가 맞지 않습니다.
후... 환단고기 옹호론까지는 딱히 뭐라 하진 않습니다. 그러니 윗글은 그런 수준을 넘어 이미 종교적, 도참적 글로 한 단계 더 나아간 수준으로 이미 '역사 글' 이 아니라 '종교 글' 이나 '도참 글' 이 되어 버린 글입니다. 이 카페가 종교 글이나 도참 글까지 용인해야 할 지 의문입니다. 위 글의 일부 예를 들자면,
"동북아는.... 이 삼신 문화의 틀에 따라 나라를 통치했다. ... 그런데 지금 학자들은 이걸 못 본다. 왜? 우주의 창조 섭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우주론을 모른다. 또 도를 안 닦아서 신관에 약하다. 진리의 근본을 못 본다"
-> '도' 를 닦자는 글입니다. '도를 아십니까' 라는 유명한 종교가 생각나는군요. 이게 역사글로 보이십니까, 종교 글로 보이십니까? 다음 예로 계속 갑니다.
"간艮 은 열매다.... 방위로 말할 때에 문왕팔괘에서 동북방이 간방이라 했다. 동북방에서 변화가 끝나고 새로 시작된다... 인류역사의 ... 마무리와 새로운 시작 이것이 바로 간도수다. .... 천지 역사의 목적이 동북 간방에서 완성된다. 이러한 간소식에 대해 간도수의 결론에 대해 알아야 된다.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 내가 한국인이 되는, 진정한 한국인이 되는 도道 가 어디 있는가?"
"... 삼신상제의 섭리에 의해... 한민족의 분열과 통일의 역사 과정은
장차 지구의 중심 땅이 될 간방, 동북방의 남조선에서 실현되는 인류문명 대통일의 도수, 즉 간도수에 의해 그 종지부를 찍는다. (출처 : 개벽 실제상황)"
-> 이런 내용들은 환단고기가 참이냐 거짓이냐와는 별개입니다. 환단고기 옹호론자라고 해서 반드시 대순진리회의 종교적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으니까요. 환단고기의 주장이 전체든 일부든 일정정도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거야 물론 가능하겠지만, 이와 같은 종교적 주장까지 '역사적 글' 이라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런 글이 계속 용인된다면, 나중에 이 카페에서 개신교계와 대순진리회계의 글이 서로 싸우는 상황도 용인해야 할 겁니다.
미주가효님// 별것도 아닌내용을 가지고 열변을 토하고 있군요.
위 글에 일부지 전체는 아니잖습니까?
도참이니 종교니 이전에 결국 환단고기를 토대로 만든자료니 그 환단고기 진위여부부터 따지고 넘어가야 한다는것입니다.
제가 지적한 것이 별 것 아닌 내용일까요? 제가 인용한 부분이 결국 윗 글에서 글쓴이가 궁극적으로 주장하고 싶은 부분들로서 글의 핵심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즉, 윗글은 역사글의 탈을 쓴 그저 종교 글에 불과한 것일 뿐입니다. 환단고기 진위여부는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지적한 부분의 핵심이 아닙니다. (다른 분의 지적과 제 지적을 혼동하지 마시길) 저는 남당유고를 위서라 보는 편이지만 남당유고의 해석을 올리는 정성일님의 글에 딴지를 걸지 않습니다. 진서/위서논의와 별개로 역사를 역사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쓰려는 글은 모두 가치있는 글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같은 논리로 환단고기를 진지하게 해석하는 글이 올라와도 역시 그걸 딱히 딴지 걸진 않습니다. 그러나 환단고기의 외양으로 무장한 종교 글이 올라오는 건 이야기가 다르지요. 설사 환단고기가 진서이고 환단고기 내용의 (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부분이 진짜 역사임이 밝혀진다 하더라도 위의 대순진리회 종교글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존재가 실제라고 하여 유태교나 기독교의 주장이 모두 진리인 것처럼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지요. 역사와 종교는 별개의 것입니다.)
흠. 그냥 환단고기를 비롯한 진위 여부가 불투명한 자료 등을 따로 올리는 공간을 만들어두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자료 정리도 할 겸 그렇게 해두면, 역사와 신화(?)를 분명하게 선을 긋고 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
사실 저도 남당유고 때문에 게시판 따로 만드는 게 좋겠다고 건의드렸었는데, 이뤄지지가..^^:;
뭐 바쁠테니깐요. ^^
아예 환단고기 전문토론방을 만들어야 할지도...모르겠군요.
환단고기 추종&옹호세력의 문제점을 하나 지적하자면 그들의 행동은 종교인의 포교행위와 같으며, 학문적 비판기능을 찾아볼 수 없다는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