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m 길이의 땅굴을 파 송유관의 기름을 훔치려 한(특수절도 미수) 일당이 지난 5일 경찰에 붙잡혔다. 송유관을 뚫어 기름을 빼돌리려 한 이모(48)씨 등 3명이다. 전남 여수경찰서에 붙잡힌 이들은 작년 10월부터 12월 말까지 전북 순창군 금곡면 한 마을 축사 땅 아래로 대한송유관공사의 송유관이 지난다는 사실을 알고 기름을 훔치려고 땅굴을 판 혐의를 받고 있다.
이씨 등이 쓴 수법은 기발했다. 이씨는 우선 전북 순창군에 있는 5950㎡(1800평) 규모 축사를 빌렸다. 그는 이 축사에서 불과 130m 떨어진 곳에 전남 여수에서 경기 성남까지 연결된 송유관이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축사를 빌리고, 삽·드릴·곡괭이·레일·지지대 등의 장비와 인부를 동원하는데 4000만원도 투자했다.
‘닭을 키우겠다’고 빌린 축사에선 땅굴 작업이 시작됐다. 축사에서 파기 시작한 가로·세로 1m짜리 땅굴을 12월까지 3개월만에 80m나 뚫었다. 다른 지역에서 잡힌 절도범이 “순창에서도 송유관 기름 탈취가 시도되고 있다”고 실토하지 않았다면 땅굴 작업은 지금까지도 계속됐을지 모를 일이다.
기름 도둑 이모씨 등 일당 3명이 송유관 기름을 훔치기 위해 뚫은 80m 땅굴. /여수경찰서 제공
이처럼 기름을 훔치는 ‘도유(盜油) 범죄’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도유범들은 이번 사건에 쓰인 축사처럼 ‘베이스캠프’를 마련한 뒤 땅굴을 뚫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과는 대부분 실패…질식사하는 경우 많아
2008년 4월 경북 경주에선 국도 옆에 있는 모텔이 베이스캠프로 이용됐다. 범인들은 모텔을 빌린 뒤 지하에서 송유관을 향해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땅굴을 뚫는 과정에서 적발된 이번 사건과 달리 이들은 송유관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그게 더 큰 비극을 낳았다. 기름을 빼내는 설비를 설치하는 작업 중에 휘발유가 새어나오면서 유증기(油蒸氣)가 발생했고, 그 와중에 땅굴이 무너지면서 범인 중 1명은 결국 흙더미에 깔려 사망했다. 나머지 2명도 붙잡혔다.
2009년 1월 전남 순천에선 발생한 도유 사건은 송유관에서 불과 10m 떨어진 곳에 있는 컨테이너가 땅굴의 시작점이었다. 이들 역시 송유관까지 도달했지만, 기름이 유출되면서 범인 중 1명이 현장에서 질식사했다. 송유관에서 흘러나온 기름은 주변 지역 땅을 오염시켰고, 인근 하천으로도 흘러 들어가 환경문제를 일으켰다.
기름도둑 이모씨 등이 뚫은 땅굴 현장 모습. 여러 장비가 널려 있다. /여수경찰서 제공
2012년 10월엔 충남 천안에서 창고를 빌려 기름을 훔치던 일당이 검거됐다. 이들은 지역 주민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창고를 빌리면서 동네잔치를 열고 선물을 나눠주기도 했다. 하지만 기름 도둑질에는 실패했다. 창고에서 400m 떨어진 송유관까지 호스를 연결해 기름을 훔치다가 불이 나면서 범죄의 전말이 드러난 것. 범인 3명은 모두 잡혔다. 작년 8월엔 충북 청원에 있는 주유소에서 송유관으로 땅굴을 뚫으려던 범인들이 제보로 잡힌 일도 있었다.
그렇다면 도유범들이 송유관에서 기름을 훔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전문가들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무척 위험한 일이라고 말한다. 송유관을 지나는 휘발유·경유 등 석유제품의 압력은 보통 50㎏/㎠에 달한다. 여기에 가로·세로 1cm의 구멍을 뚫었을 때 500m까지 기름 기둥이 생기는 강도라고 한다. 재질이 강철인 송유관을 뚫는 데까지 성공한다고 해도 강한 압력으로 기름이 뿜어져 나오면서 대형 화재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이 송유관을 교체하거나 보수할 때도 배관 양쪽의 밸브를 잠그고 기름을 빼낸 상태에서 조심스럽게 운용하는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송유관 압력 강해 위험…작은 구멍을 뚫었을 때 500m까지 기름 기둥 생기는 강도
또 기름에서 나오는 유증기의 독성이 강해 질식사할 가능성도 크다. 밀폐된 땅굴에서 산소는 부족해지는 반면, 유증기 농도는 점점 강해지면서 생명을 잃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2009년 전남 순천에서 일어난 사건과 같이 기름이 새어나오면서 토양과 수질오염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오염지역을 과거와 같은 상태로 돌리는 데는 적어도 2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도유 수법이 점점 지능화, 기업화되면서 관계 기관도 감시를 강화하고 있다. 대한송유관공사는 기름이 송유관에서 새어나가면 이를 바로 알려주는 누유(漏油) 감지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 송유관이 지나가는 주변을 직원들이 24시간 순찰할 뿐 아니라, 인근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명예 감시원 제도도 운영 중이다. 대한송유관공사 관계자는 “올해는 야간에 감시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적외선 탐지 카메라도 설치할 계획”이라며 “이제 도유 범죄는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