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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 10:34-42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 10:34-42 / [칼을 주려고 왔다;눅12:51-53,14:26-27] 내가 이 땅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 35) 나는 아들을 그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을 그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며느리를 그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 36) ㄱ) 사람의 원수는 바로 그 집안 식구이다 (ㄱ. 미7:6) 37) 만일 너희가 나보다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를 더 사랑한다면 너희는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만일 너희가 나보다 너희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한다면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38) 만일 너희가 자기가 져야 할 십자가를 회피하고 나를 따르려 한다면 너희는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39) 자기 목숨만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그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은 그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환영하는 사람;막9:41] 너희를 환영하는 사람은 나를 환영하는 사람이고, 나를 환영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환영하는 것이다. 41) 만일 너희가 예언자를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여 환영한다면 너희는 예언자가 받는 것과 같은 상을 받을 것이다. 또 만일 너희가 선하고 믿음이 깊은 사람을 믿음의 사람이라 하여 환영한다면 너희는 그들이 받는 상과 같은 상을 받을 것이다. 42) 또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사람은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다.'
부르심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다는 진리를 선포하며 권능을 행하는 영광의 길입니다. 그러나 더욱 거세지는 핍박 안으로 들어가는 고난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제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인 예수님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인내하며 제자의 길에 서는 충성과 헌신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심을 마치시면서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제자의 길을 걸으라고 당부하십니다.
검을 주러 왔노라(34-36)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자 화평의 왕으로 오셨습니다(사 9:5; 마 5:9). 그런데 검을 주러 왔는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평화와 세상이 추구하는 평화가 완전히 다르다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신령한 것과 썩어질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면 반드시 처음에는 갈등과 불화가 일어납니다. 이 갈등은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족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큰 관계로 번져갑니다.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7-39) 참 복음을 전함으로써 시작된 이 갈등과 불화는 가족이 원수가 될 정도로 심각해집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혈연관계보다 주님과의 관계를 더 중히 여기고, 과감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평안과 거짓 평안이 아니라 영원한 평안과 참 평안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도입니다. 그렇게 자기 목숨을 잃으면 더 큰 목숨을 얻습니다. 100년 정도 사는 생명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생명으로 살아납니다. 지금은 비록 갈등하고 불화하지만, 가족들에게 이 세상에서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주게 됩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40-42)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 전도자를 영접하고 환대하는 사람들이 받을 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도에 관한 가르침이 핍박으로만 끝나지 않고, 전도자들을 영접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들이 받을 상으로 끝났다는 사실은 핍박 속에서 복음을 전할 제자들에게 매우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전도하러 현장에 나가면 영접할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현장으로 나가면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일하시고, 열매를 거두시며, 상을 주십니다.
적용: 당신은 지금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의 길에 서 있습니까?
어느 중년 성도가 대학 병원의 한 수술실에서 혀의 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취주사를 손에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며 "마지막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글로 쓸 수는 있겠지만 혀를 사용하는 언어는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간호원 조수, 견습 의사들이 둘러선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는 심각했고, 잠시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저마다 만일 나라면, 만일 내게 한마디 언어만 남아 있다면 누구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드디어 입이 움직이고 두 줄기 눈물이 흐르더니 “주 예수여 감사합니다.”라고 세 번 되풀이 했습니다.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끼리만 아는 비밀인 것입니다.
< 설 교 >
영광스러운 제자가 되려면
마 10:32-42 / 최영기 목사
영광 뒤에는 언제나 고난과 희생이 있습니다. 이번 word cup 축구 대회에 출전해서 돌풍을 일으킨 한국 축구팀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AP 통신에서는 이번 word cup 축구 대회의 우승팀은 독일과 브라질 경기에서 이긴 팀과 한국 팀 둘이라고 했답니다. 세계 유수한 언론 기관으로부터 이러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여간 영광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광이 있기 위하여서는 그 뒤에 피눈물 나는 체력 단련과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국민의 우상이 되다시피 한 히딩크 감독은 이러한 훈련에 참여하여 결과를 얻지 않으면 아무리 개인기가 좋고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어도 대표 선수 팀에서 제외하여서 마침내 4강에 돌입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이 영광의 대상이기보다는 조롱이나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고난과 희생을 말해주기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산상 설교, 특히 8복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또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셔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백성 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하여 치르어야할 대가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I. 예수님을 시인하여야한다
1. 예수님을 시인 않는 자를 예수님이 시인할 수 없다
이 구절은 사람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아서 당신도 상응하게 대하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유치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만 예수님은 당연한 말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미국에 오래 살면서도 시민권 취득을 거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국에 눌러 살며 미국에서 사는 혜택은 다 누리면서 미국에 관하여 적대감을 갖고 있는 우스운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이러한 사람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외국에 가서 사고를 치고 체포되었다고 합시다. 그 나라 당국자가 대사에게 연락하여 이 사람이 미국 사람이라고 물으면 아무리 오래 미국에 살았다할지라도 미국 시민인 것을 부인할 것입니다. 자신이 미국 시민이 되기를 거부한 사람을 미국 시민이라고 시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고백의 종교입니다. 사도 바울도 입으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했습니다(롬 10:10).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서 예수님이 나의 주라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한 사람을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제자라고 시인할 수는 없습니다.
32-33절의 초점은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 보다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가 인간 예수님을 시인하느냐 부인하느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결정 짓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핵심이지만 예수를 부인하며 예수님도 부인하시겠다는 경고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합니다.
2.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부인하는 것이다
우리는 총부리를 이마에 대고 너예수 믿을래 안 믿을래? 결단을 강요당하고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시인하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위기 상황을 맛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인할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남에게 숨기려합니다. 직장이나 사업체에서도 그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릅니다. 이처럼 숨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할 때에 오는 핍박과 조롱을 두려워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할 때에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야하는 것이 부담이 되어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숨기는 것이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정말 예수님이 구세주이고 오직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이웃에게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그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을 믿는다면 우리는 핍박과 조롱이 두려워서 예수님 믿는다는 말을 못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을 감추는 사람은 예수님의 성품이나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고 이러한 사람은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부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는 분들은 자신은 살피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가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회개하시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어서 담대하게 남 앞에서 예수님 믿는 사람임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예수님께서 "이 사람, 내 사람입니다." 시인받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II. 가족으로부터의 핍박을 예상하여야한다
1. 예수님은 중간 입장을 허락하지 않는다
34-36절에서 예수님은 가족들로부터 오는 핍박을 말하고 계십니다. 가장 가까운 부자간의 관계가 깨집니다. 모녀간의 관계가 깨집니다. 가장 가까워야할 사람들이 원수지간이 됩니다. 이처럼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하여 가족간에 갈등이 생기고 균열이 생기는 것은 예수님의 본질과 상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중립적인 입장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처녀 몸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은 불륜의 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통하여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요 14:6).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과대 망상증 환자거나 독선에 빠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인류의 죄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만큼 못된 짓을 한 중범죄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모든 기독교인들은 거대한 사기극에 말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관하여서는 중간 입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경배하던지 천하에 가장 사악한 사기꾼으로 매도하든지. 그러므로 안 믿는 가정에서 한 사람이 믿을 때에 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2. 핍박을 이기고 가족을 구원하여야한다
예수님은 부모나 자녀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적합하지 않 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한은 중간 입장이 없기 때문에 신앙으로 인하여 핍박하는 부모나 자신과 타협한다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안 믿는 가정에서 처음 믿으시는 분들은 가족으로부터 핍박을 예상하여야합니다. 그러한 핍박을 견디고 이겨서 가족들을 구원하시기 바랍니다.
III. 죽기를 각오하여야한다
1. 죽기를 각오할 때에 산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고 했습니다(38절). 이 말을 듣는 제자들은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즉시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십자가에 처형 받을 사람은 재판정에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될 자리까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즉시 "아, 저 사람이 죽으러 가는구나." 하고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즉시 덧붙이십니다.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고 찾는 사람은 잃을 것이라는 것입니다(39절). 말을 바꾸면 죽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2. 죽고자하면 살고, 살고자하면 죽는 것이 영적인 원칙이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아마 순교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신앙을 지킨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는 의미로도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사실 죽기를 결심하면 삶이 자유스러워지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사실 죽기를 결심하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담대해질 수 있고 순수해질 수 있고 평안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죽고자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 원리는 순교에서만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도 적용이 됩니다. 죽으면 살고 살려면 죽습니다. 남편에게 사랑 받고자 남편을 들볶고 사랑을 요구하는 아내치고 남편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적습니다. 그러나 남편 사랑 받기를 포기하고 남편을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순종하기를 결심한 아내 가운데에는 아내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애를 바둥바둥 쓰는 사람은 더 사람들의 경멸의 대상이 되어갑니다. 그러나 인정받기를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습니다. 죽으면 살고 살고자하면 죽는 원리는 스포츠에서도 적용되는 것을 봅니다. 저는 골프를 치지 않지만 골프를 칠 때에도 이기려고 애를 바득바득 쓰면 더 점수가 안 나온다고 합니다. 승부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려 할 때에 오히려 점수가 잘 나온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목회자 세미나에서 목회자님들에게 목회를 즐기려면 목회를 놓으라고 말씀드립니다. 목회 성공을 포기하고 오직 주에게 충성할 것만을 결심할 때에 비로소 목회가 재미있어집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목회의 성공을 포기했을 때에 세상적으로도 성공한 목회를 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이 재미있고 능력이 나오고 기적을 체험하기 위하여서는 죽기를 각오해야합니다. 즉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미적지근하게 믿지 마시고 죽기를 각오하고 믿으셔서 믿음 생활의 기쁨과 보람,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IV. 상을 바라야한다
주위에 칭찬듣고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제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시선을 천국과 천국의 상에 고정시켜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의 보상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상이 무엇인지는 성경에 분명히 나와있지 않습니다. 영적인 세계와 천국이나 지옥은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상은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도들은 천국의 상을 설명할 때에 영광의 면류관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40-42절 말씀의 초점도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자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보상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부터 다음 세 가지 교훈을 발견합니다.
1. 예수님은 제자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신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저는 성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서 배우자를 칭찬하면 많은 경우에 "나도 괜찮은 사람이에요." 식의 코멘트를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자녀를 칭찬했을 때에 그런 표현을 하는 부모는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것에 기초하여서 부부간의 사랑보다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이 더 끈끈하다는 결론을 느낍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기 때문에 자녀를 칭찬하면 무조건 자신이 칭찬 받은 것처럼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를 가진 부모 앞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자녀에 관해 부정적인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처로 남습니다. 또 어떤 분에게 잘 보이기를 원하면 그 자녀를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한 비난을 자신에 대한 비난처럼 듣고 자녀들에 대한 칭찬을 자신에 대한 칭찬처럼 듣는 이유는 자녀들이 귀하고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들을 맞아들이는 사람들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는 바로 이러한 끈끈한 사랑을 갖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숨을 걸고 주님을 섬기기로 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그의 기쁨이 주님의 기쁨이 되고 그의 아픔이 주님의 아픔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죽기를 결심하고 주님을 섬겨서 이러한 사랑을 맛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2. 큰 사역자를 섬김으로 큰상을 받는다
주님은 천국에서 큰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큰 사역자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대접하면 의인의 상을 받고 예언자를 대접하면 예언자의 상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천국에 가서 많은 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역자들, 특히 선교사들을 잘 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교사 한 분이 우리 교회를 방문하시고서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선교금이라도 구걸하러 온 사람처럼 취급을 해서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런데 서울 침례교회 교인들은 진정으로 반기고 기쁨으로 섬겨주는 것을 발견합니다." 아마 예언자를 대접하면 예언자의 상을 받고 의인을 대접하면 의인이 받을 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잠재의식 속에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교사님이 방문하시든지 목회자 세미나 기간에 목회자님들을 모실 때에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분들이 받을 상에 우리를 동참시켜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듯이 주님의 사역자들을 잘 공궤하셔서 천국에 가서 많은 상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3. 작은 사역자를 섬겨도 상이 있다
주님은 목회자뿐만이 아니라 주님의 작은 사역자를 잘 섬겨도 상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42절). 크건 작건 상관없이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역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주님을 생각할 때에 이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 목자들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섬김의 본을 보여서 존경을 받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그러나 목자들에게 섬김만 받으려고 하지 말고 목자들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목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들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목자가 받을 상을 나누어 받을 찬스가 되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 명절 때를 계기로 그 동안 잘 섬겨주었던 사실에 감사 표시를 하기도 하고 생일을 기억하여 surprise party를 열어주시기 바랍니다. 목자들이 기뻐할 때에 주님이 기뻐하시고 그곳에 상이 있을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섬겨주는 주일 학교 교사들도 섬기시기 바랍니다. 유아부, 영아부, 유치부, 유년부, 중고등부 교사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님이 42절에서 말씀하시는 작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요 사역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면 절대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냉수 한그릇이라는 것은 작은 호의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필요을 채워준다는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덥고 물이 귀하기 때문에 물을 냉수 한 그릇을 주는 것이 생명과 죽음의 차이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물 한 그릇을 주는 것은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도 교사의 필요을 채우주시고 필요하달 때에는 자원 봉사도 하셔서 선생님을 기쁘게 하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상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섬기는 곳은 나의 자리입니다
마 10:32-45 / 이일기 목사
테레사 수녀가 어느날 한 어린이의 상처를 지극한 정성으로 치료해 주고 있을 때였습니다. 인근에 살던 주민이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은 잘 살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안 드십니까? 이런 삶에 만족하십니까? 이때 테레사 수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옆이나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이 시간이든지, 물질이든지, 힘이든지, 재능이든지, 기술이든지,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서 이웃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 섬기는 자세로 활용할 때 비로소 성숙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섬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섬김 받기를 좋아합니다. 우리는 섬김 받는 것을 좋아하지만 실상은 섬김을 늘 받고 사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밤이나 낮이나 계속적으로 섬김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입니까? 성숙하지 못한 바로 갓난아기입니다.
이 갓난아기는 늘 어른이 섬겨 주어야 하는데 엄마의 섬김, 아빠의 섬김, 언니의 섬김, 할머니의 섬김 등 항상 보살핌으로 섬겨 주어야 합니다.
날마다 꼼짝도 못하고 드러누워서 먹여 달라, 입혀 달라, 기저귀 갈아 달라, 심지어는 자다가 깨어서도 어머니의 섬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데 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숙한 사람들은 섬김 받기보다는 섬길 줄 아는 생활을 합니다.
1. 주님께서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크고자 하는 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 일종의 히브리 용법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함으로 뜻을 강조하고자 하는 메시지입니다.
크다, 으뜸이 되다, 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무래도 사람들 속에서 좀 돋보이고자 한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이 말씀이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는 다툼이 일어났을 때 이미 주신바 되었습니다.
막 0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 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36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눅 22:24~27).
43절에서 섬기는 자는 집사로 번역되었고(딤전 03:08) 종은 당시의 노예제도에서 이해되어야 할 용어입니다.
그렇다면 큰 사람 으뜸이 되는 사람이란, 일하는 사람 그것도 노예의 위치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42절에서 집권자들을 말씀하셨는데 이들은 섬김을 받는 사람들로서 바깥 사회에서 언제나 나를 섬기라고 호령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데리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섬겨 주는가를 기준으로 해서 그 사람의 높음을 대개 결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높임을 받는 사람은 자기를 섬기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데리고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기고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합니다.
마 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어떤 사람이 위대한 사업가이겠습니까? 아무래도 많은 손님을 섬기는 사람일 것이며 또 누가 성공한 사람이겠습니까? 역시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일에도 낮아진 마음과 섬기는 자세로 일을 한다면 그 일은 대단한 가치가 있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서울 할렐루야교회 성도 가운데 양복을 만드는 집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상당히 성공한 분으로서 많은 사람이 애용을 하는데 그분이 쓴 간증을 읽어보면 손님의 옷을 주문 받아 맞출 때 항상 예수님의 옷을 맞추듯이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섬김의 태도를 배운 사람과 안 배운 사람은 삶의 질이 다릅니다.
섬긴다는 것이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성숙하고 위대한 삶이라면 여러분은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섬김을 받으면서 살아 왔습니까?
아니면 여러 사람을 섬기면서 살아 왔습니까? 섬김을 받는 사람은 조금만 서비스가 모자라면 불평을 하지만 종의 위치에서 섬기는 사람은 좀 잘 못 되어도 전혀 불평을 하지를 않습니다.
2. 섬김은 가장 고상한 삶의 목적입니다.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을 섬기러 오신 일이며 섬김의 최고봉은 자신의 몸을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표가 그러할진대 그 섬김은 우리에게 얼마나 고상한 삶의 목표가 되겠습니까? 사업을 해도 손님을 잘 섬기고, 선생님을 해도 학생들을 잘 섬기고, 다른 어떤 일을 해도 섬기는 태도로 한다면 아마 좋은 일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데는 끝이 없으며 얼마든지 일을 찾아서 유익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단 한 가지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만 없으면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왜 선행을 하지 않습니까? 선행을 하고 나팔을 불어도 누가 알아주지 않거나 칭찬을 해 주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것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선과 얼마나 많은 섬김이 나타나겠습니까? 섬김은 가장 고상한 삶이며 예수님의 삶이 그러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갈 05:13절을 보겠습니다.
갈 0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이 말은 서로서로 섬기라는 말로서 한쪽만 계속 섬기다 보면 무척 피곤해 지니까 같이 섬기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섬김의 교훈을 주실 때 세족식을 통해서 서로서로 섬기는 교훈 주셨음을 여러분은 잘 알지요(요한복음 13:03~17).
여러분은 발에 대해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람의 지체 중에서 하루의 일과를 보면 발이 제일 피곤한 것 같습니다. 손이 일하지 않을 때에도 발은 일해야 하고,
입이 일하지 않을 때에도 발은 일해야 하는 그야말로 발은 하루 종일 일해야만 하는 지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얼굴이나 귀를 씻어 주시지 않고 발을 씻어 주신 것은 아무래도 제일 피곤한 부분, 제일 수고하면서도 제일 인정받지 못하는 부분을 알아주라는 뜻(?)이 혹 들어있는 것 아닐까요?
세수하고 난 후에 바르는 로션을 발에 발라 주는 사람 보았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 발을 씻어 주셨던 것입니다. 요즘은 발 마사지를 많이 한다고요? 예, 많이 하면서 가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문화에서 볼 때 남자들은 섬김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해 왔고 그렇게 생활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도, 바울도 서로서로 섬기라고 했으니 남자도 여자처럼 동일하게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편들께서 부엌에 들어가서 설거지를 해 주십니까? 요즘은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몇 십 년 전 재래식 부엌일 때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일은 결코 흔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는 여자 분들이 놀랠 정도로 한번 섬겨 보십시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늘 섬김을 받는 사람은 아이들이고 어른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서로서로 섬기라고 했으니 믿는 우리는 남자들도, 어른들도, 아이들도 모두가 섬기는 모습을 보여야 하며 특히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기는 모습도 보여야 합니다.
갈 05:13절에서 바울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는데 좀 고상하게 표현해서 섬긴다는 의미이지 사실은 종노릇을 하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이라는 말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인격이 떨어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종으로서 섬기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아십니까?
성경은 종이라는 단어로 가득 차 있는데 모세나 사무엘을 보고도 종이라고 했으며 주님 자신도 45절에서 내가 섬기러 왔노라고 종의 처지를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은 내가 종이 되기 위해 왔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앉아서 섬김 받는 사람들을 크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다니면서 섬기는 그 사람을 크게 보십니다.
아직도 신앙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데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며 사람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고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 거기에 맞게 섬겨 주는 사람은 언제든지 만나고 싶어지나 항상 목을 곧게 하여 섬김 받으려 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기피 대상입니다.
3. 섬기는 자에게는 자기만이 누리는 복이 있습니다.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서로서로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으로서 그렇게 하면 행복해진다고 했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섬김 자체의 기쁨을 압니다.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이며 섬기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의 정신을 닮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해 자신을 바치는 헌신,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생활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그 자체가 곧 낮아짐, 즉 섬김으로 요약되는 용어입니다.
골 0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주님을 섬기듯이 성도들도 섬기고, 가족도 섬기고, 이웃도 섬기려 한다면 거기엔 삶의 기쁨이 있지만, 반면 섬김의 아름다움을 인식하지 못하고 섬긴다면 때로는 섬기는 것 때문에 짜증이 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쁨으로 섬기는 사람을 볼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이 가정이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데 이 가정에 섬김으로 인해 누리는 기쁨의 축복을 크게 주옵소서…….
어떤 의무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섬기는 일을 하였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섬기는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만족이 있습니다.
자기의 몸도, 마음도, 시간도, 재능도, 물질도 남을 섬기는 마음으로 활용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모르는 하늘의 기쁨을 맛봅니다.
직장에서도 나에게 맡겨진 일만 겨우 해 놓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손대지 못하는 것들을 동료들을 위해 섬기는 태도로 일 할 때 모두가 나에게 호감을 가질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풍족케 해 주고 돌보아 주는 직장인이 되어질 때 여러분은 직장에서 인정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학교, 학신회 선생님으로 지원해서 어린 후배들을 섬겨 보십시오. 섬김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섬길 일이 있으며 거기에는 자신만이 누리는 기쁨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 여러분! 섬김이 너무도 격조 높은 말씀이라 여겨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섬기는 자란 특별한 사람, 이를 테면 성자 같은 사람들이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모두는 내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 보겠다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섬기려는 사람은 자유하지만 섬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초조하고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섬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하지 않을뿐더러 불행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칼 바르트. 섬김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상대방을 위하여 행동하는 의지(Will)와 수고(Working) 행동(Doing)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자신의 물질, 재능, 건강, 시간 등을 가지고 상대방을 위하여 사용하는 거룩한 희생 이것이 진정한 섬김입니다. 그것이 살아감의 의미이며 더없이 존귀한 가치입니다.
서로 섬기지 않고 한쪽만 섬길 때는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섬김의 멋을 아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감격함으로,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자원하여 주님이 힘을 주셔서 하는 것으로 알고 섬겨나가는 생활이야말로 진정한 섬김(디아코니아)입니다.
벧전 05:0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말씀을 맺습니다.
어느 시어머니가 밥을 안치고는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일렀습니다. 갓 시집온 며느리는 밥 짓는 경험이 없는 터라 밥물이 넘치는 줄도 모르고 계속 불을 때다가 그만 밥은 타고 솥은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놀란 며느리가 전전긍긍하고 있자 시어머니는 내가 물을 너무 적게 부어서 그렇게 되었다며 며느리를 위로했고, 시아버지는 내가 부엌에 땔감을 너무 많이 들여서 그랬다라고 했으며, 신랑은 제가 너무 물을 적게 길어 와서 그렇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침 길 건너에 술집이 있었는데 그 집에서도 새 며느리에게 불을 때라고 하여 불을 땠는데 역시 밥은 타고 솥은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시어머니가 욕설을 퍼붓고 구박을 하자 며느리는 내가 일부러 그랬느냐며 대들었고, 시아버지는 어디서 말대꾸냐며 호통을 쳤으며, 이를 지켜보던 신랑이 손찌검을 하자 새댁은 그래 날 죽이라 하면서 대들었습니다.
예, 같은 일이지만 섬김의 자세로 일을 하면 일에 대한 실수가 따라도 능히 이해가 되고 사랑의 눈으로 보면 모든 문제가 단번에 풀려집니다.
반면 섬김의 정신이 없고 사랑의 눈이 감겨져 있는 상황에서 일을 하면 매사에 문제가 꼬이기만 하고 풀리는 일은 계속 요원(遙遠)할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법칙에서 가능한 역설적 축복을 다시 한번 상기합시다. 크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라. 으뜸 되고자 하면 종의 자리에 들어가라. 받으려고 하면 먼저 주어라. 낮아지면 높아지리라. 죽으면 살리라.
신앙인의 삶은 높아도 낮은 자같이, 있어도 없는 자같이, 부해도 겸손한 자리에 처해야 합니다.
평화 사랑
마 10:33-36 / 김동호 목사
우리는 어려서부터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습니다. 그 증거로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공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즘 ‘과연 그 말이 사실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공하지 않은 것은 ‘혹시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힘이 없어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민족은 참 공격적이고 사나우며 싸움을 좋아하는 민족처럼 보여 지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과연 우리 민족이 과연 평화를 사랑하였던 민족이냐 아니냐는 것을 규명하는 것은 잘 모르겠으나 현재 우리 민족은 평화를 위한 교육과 훈련이 그 어느 민족 보다도 필요한 민족이라고 하는 데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는 교인들이 모인 교회마저도 분란과 분열이 그치지 않아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평화에 대하여 무지하며 훈련이 되어 있지 않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정말 말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공부하고 훈련하고 기도하여야 할 주제 중에 하나가 바로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당분간 계속될 평화에 대한 설교에 집중하시고, 그 설교를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놓치지 마시고,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 어느 누구보다, 그 어느 교회의 교인들보다 평화를 사랑하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평화에 대하여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트러블 메이커가 아닌 피스 메이커로서 가정과 세상과 교회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평화하면 너무 개념이 넓고 커서 잘못하면 막연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평화를 좀더 구체적이고 실감이 나는 말로 다시 정의하자면 ‘사람과 사람간의 좋은 관계와 좋은 사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과의 사이와 관계가 좋은 것을 우리는 평화라고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을 우리는 불화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피스 메이커가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 있다면 사람들과 좋은 관계와 사이를 유지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무엇이 사람들과의 관계와 사이를 나쁘게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데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하기 전, 다시 말해서 이 땅에 죄가 들어오기 전 아담과 하와의 사이가 좋았습니다. 아담이 하와를 보고 한 첫 말인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너무나 아름답고 훌륭한 말이었습니다. 아담에게 하와는 남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자기 자신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정말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후 아담이 하나님께 하와에 대하여 한 말은 ‘저 여자 때문에’였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평화를 느낄 수 있고, ‘저 여자 때문’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불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쌓았던 사건이 나와 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였을 때 저들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형벌은 언어가 혼잡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언어가 혼잡해 짐으로 저들은 함께 있을 수 없게 되었고 저들은 온 지면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과 3장을 살펴보면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과 정 반대의 사건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들은 승천하실 때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에 모여 있는 것이 무척이나 위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모여서 함께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의 탑을 쌓았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았던 것과는 정 반대가 되는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저들은 그러다가 오순절 성령 충만함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나타나게 되자 저들에게 처음 나타난 은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방언의 은사였습니다. 방언의 의미는 창세기 11장에서 흩어졌던 인간의 언어가 하나로 다시 회복되는 것을 보여는 주는 것이었습니다. 언어의 회복을 통하여 저들은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저들은 모이기를 힘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쁘고 순전한 마음으로 함께 떡을 떼며 놀랍게도 누구도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말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서로의 것을 함께 나누어 쓰는 공동체가 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안에서 한 형제 자매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이전에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있었고, 오순절 성령 충만함을 받았던 초대교회 안에 진정한 의미의 평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평화가 죄의 문제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평화는 없습니다. 악이 있는 곳에 평화는 없습니다. 불법이 있는 곳에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와 악과 불법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피스 메이커가 될 수 없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피스 메이커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법과 의를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9절에 보면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마지막 절인 21절에 보면 악에게 지지 말고 싸워 이기되 악으로 악을 이기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악과 싸운다고 하는 명분이 있어도 그 싸움에 악이 사용된다면 그 자체가 패배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장에 보면 악으로 악을 이기는 것 중에 하나를 악에게 복수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복수는 선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상대방이 악한 자라고 하여도 그에게 복수하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 나오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복수의 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수의 법이 아니라 책임의 법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전혀 서로 다른 말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전자는 책임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후자는 복수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복수를 이야기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말씀하지 않고, 책임을 이야기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약은 복수를, 그리고 신약은 용서를 가르친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한번도 원수에 대한 복수를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이마에 가인의 표를 주신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함부로 사람에 대하여 복수하거나 심판하지 말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 같은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우리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이처럼 불안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복수에 있습니다. 복수가 복수를 낳고, 작은 복수가 큰 복수를 낳고 있기 때문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 복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나 평화에 대한 싸움은 악과의 싸움인데 악과의 싸움은 악이 아닌 선으로 하여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만큼 평화는 악에 대하여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명분이 있다고 하여도 악한 방법으로 싸움을 하면 그것은 이미 진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2절에서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평화에 있어서 악은 그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평화를 사랑하여 피스 메이커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악한 흉내도 내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결국 피스 메이커가 아니라 트러블 메이커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싸우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무조건 악을 덮어주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선으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평화는 싸우지 않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평화는 싸움을 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얻어질 수 없습니다. 죄와 악과 불법을 미워하여 그것과 싸우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주시기 위하여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시는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평화는 옳지 못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무조건 덮어 주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도리어 옳지 못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드러내고 그것과 싸워 그 문제를 해결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바로 진리의 검인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서 잘못 사용되어지고 있는 말 중에 하나는 ‘은혜스럽게 합시다.’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 것은 웬만하면 그냥 적당히 덮어두고 넘어가자는 말과 동의어로 종종 사용되곤 하는데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생각을 불식시키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검을 주러 오셨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가 넘치게 하려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가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려면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잘못과 죄와 불법에 도전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힘들고 아프고 부끄러울지라도 그것을 무릅쓰고 그것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수술해야 할 것입니다. 남과 다른 교회에 개혁을 요구하기 이전에 먼저 우리 자신에게 그 칼과 화살을 들여대야만 할 것입니다. 그것이 힘들고 어렵고 부끄럽다고 적당히 덮어주고 은폐하고 타협하려고 한다면 우리 교회 안에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악과 싸우되, 악과 싸울 때 절대로 악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악은 흉내도 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의 악과도 싸워야 하지만 자신의 악과도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악을 행 한자라고 하여도 나는 그에게 악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상대방에게는 이길 수 있을는지 모르나 악에게는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사람과의 싸움이 아니요 악과의 싸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싸울 때 사람과 문제를 동일시하는 우를 범합니다. 문제와는 싸우되 사람과는 싸우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복수는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복수는 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와는 싸워도 복수는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렇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사람까지 잡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살리려 하다가 문제까지 덮어 버립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사람까지 잡으면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람을 보호한다고 하다가 문제를 덮어 버리면 그 또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불화는 사람을 잡아도 생기고, 문제를 덮어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잡지 않는 것에 대하여서는 다음 주에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합니다. 오늘은 문제를 덮지 않는 것, 악과 싸우는 것을 더 치중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서울이 평화라면 그 서울은 절대로 모로는 갈 수 없는 서울입니다. 평화의 서울을 가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똑바로 가야만 합니다. 우리는 목적만 옳다면 수단과 방법은 좀 옳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종종합니다. 목적도 중요하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과 방법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가 넘쳐나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죄와 악과 불법과의 전쟁을 선포하여야만 합니다. 교회 재정을 인터넷에 공개하여 할 수 있는 대로 투명하고 정직한 교회가 되려고 발버둥질 치는 것도, 교회 안에서 사용되고 있던 불법 소프트웨어를 정품으로 다 바꾸기 위하여 수 천 만원의 예산을 투입하는 까닭도 다 우리 교회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평화가 넘쳐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교회 안에는 그 동안 관행화되고 습관화되어 죄처럼 느껴지지도 않는 많은 잘못과 불의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과 싸워야만 합니다. 그 싸움은 절대로 만만한 싸움이 아닙니다. 올해 들어서 저는 정직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였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그 말씀에 도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교인들이 정직에 도전하여 거짓과의 싸움을 시작하였습니다. 정직하게 사업을 하기 위하여 싸우다가 벌써 회사 문을 닫은 교인도 생겨나게 되었고, 아직 문을 닫지는 않았지만 그 때문에 많은 손해를 보고 있는 교인도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하나님의 식대로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회사의 사활이 걸려 있는 중요한 계약을 스스로 포기하였다는 교인의 메일도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교인은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그 동안 정말 무늬만 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데 최근 예배와 설교에 은혜를 받으면서 그와 같은 엄청난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경의 말씀과 같이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인들이 정직하게 살기 위하여, 바르게 살기 위하여 생명을 걸고 싸움을 시작하였는데 교회가 둔하다면 안 될 일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미처 해결하지 못한 모든 불의한 관행과의 전쟁을 선포해야만 할 것입니다. 다만 정직 뿐만 아니라 미움과 시기와 다툼과 분쟁과의 전쟁을 선포해야만 할 것입니다. 악은 물론이고 악의 모양까지도 버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평화의 가장 큰 적은 죄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지는 이유도, 세상의 평화가 깨지는 이유도, 교회의 평화가 깨지는 이유도 바로 죄와 불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평화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하여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 일들을 한 주일씩 설교해 나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그 첫째 시간으로 죄와 악과의 싸움입니다. 악은 물론이고 악의 모양까지도 버리는 철저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 도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가 먼저 고쳐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게는 여러분들이 놀라시겠지만 나름대로의 비자금 통장이 있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 바른교회 운동과 청소년 전도 운동에 쓰라면 교인들이 주신 돈을 따로 모아 관리하는 통장입니다. 제 양심에 어긋나게 사적으로 돈을 쓴 일은 없으나 그래도 일종의 비자금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통장에 있는 돈을 (몇 천 만원 정도 됩니다) 공식적인 교회재정으로 들여 놓겠습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투명하게 그 재정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디에 얼마를 쓸 것인가는 저에게 위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돈이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쓰여졌는가는 언제나 투명하게 드러나도록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요즘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평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교인 여러분들이 다 평화를 위하여 쓰임 받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평화에 도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태초에 가정이 있었다
마 10:34-39 / 김영봉 목사
(In the Beginning was Family)
1.
안녕하셨습니까? 지난 열흘 동안 여러분의 기도에 힘입어 한국 방문을 잘 마치고 건강하게 돌아왔습니다. 기도해 주신 성도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주일 설교해 주신 조영진 감리사님께 감사드리며, 교회를 잘 지켜 준 목회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떠나 있어 보면, 역시 교회의 주인은 담임 목사가 아니라 성도들이며 또한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한국 방문을 계획하면서 주저됨이 많았습니다. 갑작스럽게 쇠약해진 어머님을 5년 만에 뵈러 가는 길이었지만, 신분 문제로 혹은 생활상의 문제로 인해 5년 혹은 10년이 넘게 가족과 헤어져 사는 분들이 우리 교우들 가운데 적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에 부담은 있었지만, 당신의 살을 깎아 먹이시듯 저희 자식들을 길러주신 어머님을, 그래도 정신이 온전할 때 찾아뵙고 싶어서, 홀로 바람같이 다녀왔습니다. 아무 일도 만들지 않고, 가족 외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최소로 만들고, 며칠 동안 어린 아이처럼 되신 어머님 곁에 머물다 왔습니다. 하루는 아버님께서, "대 와싱톤한인교회 담임목사가 늙은이 식사나 챙기고 있으니 어떡한다니?"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속에 배인 아버님의 마음을 느끼고는 참 감사했습니다. 불과 며칠의 만남이었지만, 충분히 값있고 의미 있었다 싶어, 감사했습니다.
사실, 5년 만에 귀국하면서 가족만을 만나고 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수소문을 하여 만나자는 분도 계셨고, 기왕에 왔으니 설교를 해 달라는 분도 계셨고, 하루라도 집회를 해 달라고 청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저는 그 부탁을 ‘복음을 전할 기회’라고 이름 짓고 응하여 분주하게 돌아다니다가, 하루 이틀 정도 어머님을 뵙고 올 수도 있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가정이 제게 너무도 소중했습니다. 복음 전파도 중요하고 선교도 중요하지만, 이 시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가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저를 가족처럼 여기고 찾아와 준 친구와 제자 몇 명을 만나는 것으로 시간을 다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가정은 제게 이토록 중요합니다. 아니, 저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정은 이토록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몇 해 전, 성경에 나오는 가정 이야기들을 엮어 책으로 내면서, 저는 <태초에 가정이 있었다>는 제목을 단 적이 있었습니다. 가정은 인류 사회에서 제일 처음으로 탄생한 공동체입니다. 또한 가정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사람이 생긴 이후 처음으로 생겨난 것은 국가도 아니요, 학교도 아니며, 교회도 아니고, 바로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은 인간 사회를 위한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2.
기독교에 대한 오해들이 많습니다만, 기독교가 가정을 소홀히 하는 종교라는 오해처럼 근거 없고, 사실과 다르며, 억울한 것이 또 있을까요? 한국에 있을 때, 한 번은 택시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기사 양반과 기독교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때 제가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고 운을 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나이가 지긋하신, 권태와 피로감으로 인해 찌들대로 찌든 모습의 그 기사께서 버럭 화를 내시면서, "아니, 가족도 몰라보고, 조상도 몰라보는 그런 후레자식들의 종교를 뭐 하러 믿어요? 자식들이 혹시 교회에 미치지 않을까 무서워요. 내 친척 중에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도대체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니까요."
저는 그 기세에 눌려, "아, 그러시군요!"라고 말하고 말았습니다. 더 화를 돋구었다가는 교통사고를 낼 지 모를 만큼, 그분은 흥분하셨습니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처음부터 자초지종을 말씀 드려가며, 기독교가 그런 종교가 아님을 설명해 드리고 싶었습니다만, 그럴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저 속으로, "그게 아닌데, 왜 이렇게 지독한 오해가 발생했을까?"하고 생각만 하다가 목적지에서 내렸습니다.
그 기사 분에게는 설명드릴 기회가 없었지만, 여러분에게는 그럴 기회를 가지기 원합니다. 이번에 5회 연속 설교 "가정을 생각하다"를 마련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은 버지니아 공대 총격 사건은 우리로 하여금 가정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번의 연속 설교를 통해 가정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고, 기독교 신앙과 가정생활이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를 생각해 보기를 기대합니다. 그럼으로써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부름을 새롭게 느끼고, 그 부름을 따라 가정을 회복시키는 일에 마음을 다해 보는 기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가정’ 이야기를 하면 소외감을 느끼실 분들이 계십니다.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사람이 별로 없는 분들이 그렇고, 또한 이런 저런 일로 인해 가정에 상처를 입은 분들이 그렇습니다. 부부에 대해 말할 때, 홀로 사시는 분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녀에 대해 혹은 부모에 대해 말할 때, 자녀가 없거나 부모가 없는 분들은 소외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번 연속 설교에서는 그런 분들도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힘써 볼 것입니다. 아니,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육신적인 가족을 돌보도록 할뿐 아니라, 육신적인 가족 너머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에게 여쭙겠습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 너무 쉬워서 뭔가 함정이 있는 것 같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가정이 우선입니다. 태초에 가정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태초에 교회가 있었습니까? 창세기를 뒤져 보십시오. 창세기에는 교회가 나오지 않습니다. 가정만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도 가정 단위로 했습니다. 제사장도 없었습니다. 각 가정에서 가장이 제사장의 역할을 했습니다. 혹은 족장이 한 부족의 제사장 역할을 했습니다. 가정이 우선입니다. 가정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왜 가정이 아니라 교회가 우선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가정의 일과 교회의 일이 서로 대립할 때, 교회 일을 우선하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가정의 불화를 감수하고라도 교회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실제로, 기독교가 가족을 등한히 하게 하는 ‘후레자식의 종교’라고 비판받을만한 일들이 교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이러한 현실에 대해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교회를 우선하도록 잘 못 가르친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필요한 일들에 몰두하다 보니, 가정의 일을 등한히 하도록 오도하는 경우가 발생했습니다. 목회가 교인들의 영적 성장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데,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목회자나 혹은 평신도 지도자들의 야심으로 인해 그릇된 길로 가는 경우가 왕왕 일어납니다. 이럴 때, 가정은 교회로 인해 심한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저의 장인이신 도건일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교회 예배당 건축을 위해 작정 헌금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늘 그렇게 하듯, 집회를 통해 예배당 건축의 중요성을 각성시키고는 건축 헌금을 작정하게 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 헌금 작정서를 살펴보는데, 아주 가난하게 사는 가정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액수의 헌금을 작정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목사님이 보실 때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건축이 진행되는 동안, 그 가정은 힘껏 헌금을 했으나, 작정한 액수에 턱도 없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 가정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그들의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분과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다가 목사님께서 어느 날 그분의 건축 헌금 약정서를 들고 그분을 심방했습니다. 그분들과 함께 기도한 후, "지금까지 헌금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작정한 헌금을 다 드린 것으로 믿으십시오. 이 헌금 약정서는 제가 두 분이 보는 앞에서 찢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마음의 부담을 치워 주셨습니다. 두 분은 목사님의 행동에 감격하여 흐느껴 울었고, 그 이후로 더욱 진실한 마음으로 기쁘게 섬기시며 살아가셨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진실로 성도들의 영혼을 살피는 목회자의 심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당면한 건축 빚과 씨름하면서도, 한 성도의 영혼의 짐을 두고 고민하며 이런 결단을 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한 영혼을 먼저 생각하고, 교회보다 가정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실제로, 가정이야 깨지든 말든, 그 사람의 영혼이야 질식하든 말든, 약속한 헌금을 완납하라고 강요하는 목회자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형편입니다.
4.
가정보다 교회 일을 우선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는 책임을 모두 목회자나 평신도 지도자들이 뒤집어 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습니다. 잘 못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가정 일을 내버려두고 교회 일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지만, 다른 이유 때문에 가정 일에 소홀히 하고, 그 빈자리를 교회 일로 메우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욕심에 따라 행동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하는 것으로 정당화시킵니다.
아내를 대면하기 싫어서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남편들이 있습니다. 남편을 대면하기 싫어서 교회 일에 몰두하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서로 책임을 떠밀다 보니, 험한 말로 ‘집구석’에 들어가기 싫어, 교회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모의 잦은 싸움으로 인해 집 밖으로 떠도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집안에서 해야 하는 허드렛일이 싫어서 교회에서 하는 ‘사역’에 몰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 때문에 가정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집안 꼴이 말이 아닌데, 아이들 형편이 말이 아닌데, 부부 관계가 말이 아닌데,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밖으로 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폴 스티븐스(Paul Stevens)가 쓴 <영혼의 친구, 부부>(Marriage Spirituality)라는 책은 이 연속 설교를 하는 동안에 꼭 읽어 보도록 천거하고 싶은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부부가 영혼의 친구로 성숙해 가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제안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가정과 사역의 문제도 다룹니다. 교회를 통한 사역에 있어서 부부 혹은 가정의 합의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는 강조합니다. 진정한 사역은 부부의 합의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사역을 통해 부부가 서로를 더 깊이 알고 사랑하는 결과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도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사역도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서 나온 사역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흘러 넘쳐 나와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빈 곳을 채우기 위한 사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야망을 이루기 위해, 혹은 내 취미 생활을 위해, 혹은 내 공명심을 채우기 위해 행하는 사역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내 안을 채움으로써 흘러 넘쳐야 비로소 올바른 사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역할 때, 그 사역은 가정이나 가족에게 짐이 되거나 상처를 입히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부부의 사역 그리고 가족 전체의 사역으로 인해 가정이 더 화목해지고 행복해지며 온전해집니다. 그러한 변화가 없다면, 혹은 교회에서의 사역으로 인해 가정생활이 더욱 더 악화되어 간다면, 잠시 멈추어 스스로를 살펴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사역보다 가정이 먼저입니다. 교회의 필요를 위해 "사역이 가정보다 더 먼저입니다"라고 말할 법한 목사가 하는 말이니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가장 우선적으로 기대하시는 것은 가정을 올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 어떤 사역도 부부 관계를 해치거나 자녀를 방치하거나 가정을 사막처럼 만든다면 그 사역은 중단 되어야 마땅합니다.
5.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여쭙겠습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이라구요? 그러면 제가 왜 또 여쭙겠습니까? 바로 위에서 드린 말씀을 생각해 보시면, "교회가 우선입니다"라고 답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가정이,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그 모습대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아니, 교회에서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가정의 참된 회복이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우선이라고 답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예수님의 말씀은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듣기도 어렵습니다. ‘평화의 왕’이라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34절). 참, 무시무시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칼을 들고 서로 맞설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아들과 아버지,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맞설 것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36절)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만 떼어 놓고 보면, 기독교는 가정을 해체하고 파괴시키는 종교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말씀을 곡해하여 가족을 원수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볼 때, 두 가지의 질문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왜 가족이 갈라지게 되느냐?"는 질문입니다. 37절 이하에 그 답이 나오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원인입니다. 둘째 질문은 "자기 가족을 원수시 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문맥을 보면, 가족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 믿지 않는 가족들이 믿는 가족을 원수로 여기고 배척한다는 뜻입니다. 믿는 가족이 믿지 않는 가족을 원수처럼 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가족을 미워하거나 원수시 해서는 안 됩니다. 때로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은 인간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모릅니다만, 그 감정을 그대로 두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감정을 품고 있어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을 원수처럼 대하는 가족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믿지 않던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갈 때, 처음에 일어날 수 있는 혼란과 갈등과 아픔을 예고해 줍니다.
그런 혼란과 갈등과 아픔을 견디지 못해 믿음을 포기하면 그 사람은 영생을 잃어버립니다. 37절에서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아버지께서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면, 아버님의 뜻을 존중한다는 핑계로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문제를 참되게 해결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고통이 두려워 수술을 하지 않으려는 환자와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해결책은 가족 모두가 믿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 기도하며, 박해를 견디고, 선한 행실로써 진리를 드러내는 노력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8절에서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태초에 가정이 있었습니다만, 가정 이전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가정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정보다 먼저입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하와보다 하나님이 먼저였습니다. 하와에게도, 아담보다 하나님이 먼저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간의 삶의 기초이며, 가정생활의 기초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이 온전히 회복되기 위해서는 온 가정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복음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세워질 때, 가정은 제대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6.
이 대목에서 저의 가정 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읽은 예수님의 말씀이 저의 가정에 그대로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제 가정의 신앙의 이력은 4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국의 초대 교인들이 다 그랬듯이, 처음에는 증조할머니 혼자서 믿으셨습니다. 남편과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0리도 넘는 길을 걸어 새벽기도회와 예배에 참여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첫째 며느리인 저의 할머님께 이어졌습니다. 시집오신 할머니께서는 시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셨습니다. 할아버지의 박해는 더욱 거칠었습니다만, 할머니께서는 굳굳하게 믿음을 지키셨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가정 안에 있는 남자들은 하나도 믿지 않았습니다. 두 여인은 주부로서 해야 할 일을 정성으로 받들면서 묵묵히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 신앙이 3대에 이르러 제 모친에게 이어졌습니다. 제 어머님은 시집오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시집에 오시어 시어머니와 시할머니와 함께 세 여인이 믿음 생활을 하면서, 점점 가정 안에서 믿음의 영향이 강해졌습니다. 믿음의 영향이 가정 안에 점점 두드러지게 나타나자, 세 여인의 신앙에 대한 남성들의 박해도 컸습니다. 부모님은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연애결혼을 하셨는데, 아버님은 결혼하면 함께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어머님께 약속하고는, 결혼하고 나서 입을 씻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는 한 때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어머님의 신앙생활을 반대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제 가정의 별로 많지 않은 불화의 원인들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믿지 않던 가족들이 예수를 믿는 가족들을 박해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저도 때로, "이럴 바에야 차라리 믿지 않으면 얼마나 속 편할까? 왜 엄마는 저렇게 고통을 받으시면 서도 교회를 다니려 하시는 걸까?"라고 의문을 가졌을 만큼, 불안 가운데서 지내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박해로부터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저의 형제들은 자주 작전을 짜야 했습니다. 분노한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에서 오시는 어머님을 중도에 다른 곳으로 인도하기를 여러 번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은 아버님을 미워하기는커녕,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셨고, 그분을 위해 눈물의 기도를 드렸고, 마침내 그 견고하던 아버님의 불신의 성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날이 왔습니다.
이렇게 하여, 4대째 이르러 온 가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을 고백하고 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박해자였던 아버님은 신실한 신앙인이 되시고 존경받는 장로님으로 은퇴를 하셨고, 4대째에 이르러 목사도 한 사람 나오게 되었고, 5대에 이르기까지 믿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이 온전해지려면 아직도 한 참 멀었고, 형제들의 가정 가정이 온전한 모습으로 회복되기에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과거에 증조할머님으로부터 어머님께 이르기까지 겪으셔야 했던 박해는 충분히 보상되고도 남았습니다. 지금의 우리 가족의 행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것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7.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한 번 더 여쭙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까? 그게 정답입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라는 질문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만큼이나 잘못된 질문입니다. 질문이 잘못되면, 답도 잘못됩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잘 해야 합니다. 똑똑한 아이들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물으면, "둘 다 좋아"라고 답합니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가르쳐 주는 겁니다. 그러면 알아듣고 질문을 멈춰야 하는데, 어리석은 부모는 굳이 또 묻습니다. "에이, 그래도,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거 아냐? 누구야, 응? 누가 더 좋아?"라고 따져 묻습니다. 명석치 못한 아이는 이 순간에, "부모 중 어느 한 편을 택해야 하는 거구나!"라고 오해하게 됩니다.
"교회가 우선입니까, 가정이 우선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둘 다 우선입니다"가 맞습니다. 교회와 가정은 취사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교회의 삶을 통해 가정이 회복되어야 하고, 가정의 회복은 다시 교회를 통한 사역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더 큰 가정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고리는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를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태초에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가정은 참된 사랑과 이해와 용서와 용납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참된 쉼이 있고, 참된 위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이 인간의 죄로 인해 깨어졌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곳, 서로 상처 주는 곳, 서로 미워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쉼이 없고, 더 이상 위로가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가장 먼저 우리 개인에게 일어나야 하고, 그 다음 우리 가정에 일어나야 합니다. 깨어진 가정들이 태초의 가정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일을 위해 오셨습니다. 가정은 복음의 능력이 가장 먼저 나타나야 하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일이 우리 각자의 가정에 일어나도록 하십시다. 그 일을 위해 먼저 우리 각자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도록 힘쓰십시다. 더욱 영적 생활에 힘쓰십시다. 우리가 영적으로 회복되지 않고는 그 어떤 노력도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내 가정이 회복되려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나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그분의 은총의 빛으로 내가 새로 지어져야 합니다. 한 번 그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 지어져 가야 합니다. 잘 믿는 것 같은 우리는 얼마나 자주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그 어느 순간에도 더 이상의 변화가 필요 없는 완성품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매일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변화가 내 배우자에게, 내 자녀들에게, 형제들에게 그리고 부모에게 파급되어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성 생활의 신비입니다. 한 사람이 진실하고 일관되게 영적 생활을 해 나갈 때, 그 사람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그 영향력이 미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의 영적 감화력에 이끌려 변화되어 갑니다. 때로 시간이 걸리지만, 이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가정이 하나의 작은 교회가 되는 것, 하나의 영적 공동체가 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이 바라고 기도해야 할 목표입니다. 나에게 그 마음이 있다면, 그리고 그 일을 이루려는 열심이 내게 있다면,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은총을 허락해 주실 것이며, 그로 인해 태초의 가정으로 회복되어 나갈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 모두에게 이 거룩한 마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일을 향한 열심이 불 일 듯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그 마음과 열심을 가진 모든 심령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가정이 영적 공동체로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한 영적 가정으로 성숙해 가기를 기도합니다.
태초에 가정을 세우신 주님,
오늘의 가정들을 보시면서 아파하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제가
주님 안에서 새로 지어지게 하소서.
저의 변화로 가정이 변화되게 하소서.
저의 가정을 영적 공동체로 만들어 주소서.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십자가를 능히 지고 가게 하소서.
우리 교회를,
아니 이 땅의 모든 교회를
영적 가정이 되게 하셔서
혈육을 넘어서 사랑스러운 가족을 만나게 하시고,
또한 혈육의 가정을 회복시키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주님께 합당한 제자
마 10:34-39 / 김영규 목사(정윤교회)
검을 주러 왔노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주님께 합당한 제자들”입니다. 본문은 제자도의 결론부에 해당 됩니다. 여기서 주님은 주님께 합당한 제자의 조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자칭 유능한 제자가 좋은 제자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의 평가가 좋다고 좋은 제자도 아닙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조건에 맞아야 좋은 제자입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좋은 제자는 누구일까요?
주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한 가지 오해를 풀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사도십니다.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려고 오셨습니다. 제자들 역시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검을 주려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34절)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과 다툼이 시작됩니다. 그것도 가장 친밀한 가족 속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5절)
아주 당황스런 장면입니다. 아마 제자들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면 당장에 평화가 실현되리라고 기대했을 겁니다. 병자들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면 가족이 화목해지고 평화가 찾아오리라!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제자들이나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자주 오해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으로 오해했습니다.(마5:17) 메시아가 이 세상에 유대인 천국을 세우리라고 오해 했습니다.(요18:36) 이런 오해가 있을 때마다 주님은 그 오해를 바로잡으셨습니다. 본문도 마찬가집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이 세상 나라에 평화가 오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세계 평화가 오기는커녕 큰 다툼이 일어납니다.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평화가 아니라 갈등이 된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검을 주셨습니다. 물론 그 검은 쇠로 만든 칼이 아닙니다. 말씀의 검, 복음의 검입니다.(엡6:17) 복음을 전파할 때에 가정불화가 일어납니다. 가장 가까운 자식과 아버지 사이에, 딸과 어머니 사이에,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불화가 발생합니다. 여기 “불화”(dicavzw)란 단어는 자르고 나눈다는 뜻입니다. 가족 사이에 나뉘고 갈라집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가족이 나뉘고 갈라진다면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일부러 불화와 갈등을 일으키려고 오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부득불 갈등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갈등은 진정한 평안을 얻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갈등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갈등 자체가 목표는 아닙니다. 평화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큰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헤롯 대왕은 자기 외에 어떤 왕이 태어났느냐고 소란을 떨었습니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는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죽이도록 사주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고 사형 선고를 내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얼마나 큰 갈등입니까? 그러나 그 결과로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하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들, 하나님과 원수 된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내게 일어나는 신앙적 갈등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겪는 갈등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일시적 갈등을 통과하면 영원한 평화가 다가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 영혼의 평화가 다가옵니다. 진정한 평화는 “평화가 있으라!”는 립서비스가 아닙니다. 싸우지 말라고 하는 훈계가 아닙니다. 평화는 이벤트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와 종족들이 서로 전쟁하고 죽입니다. 매일 폭탄 테러로 죽는 사람이 몇 백 명인지 모릅니다. 평화는 먼저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져야 얻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성취되지 않고, 먼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성취됩니다. 그 평화는 외적인 평화가 아닙니다. 마음에서, 영혼에서 이루어지는 내면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풀어야만 평화가 다가옵니다. 영혼의 평화! 오늘 바로 이 평화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할 때에, 영혼의 평안을 얻습니다. 갈등을 두려워 마세요.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평화를 생각하면서 담대하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검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그 검을 받았습니다. 복음의 검, 십자가의 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과 싸우는 검이 아닙니다. 죄와 싸우는 검입니다. 마귀와 싸우는 검입니다. 불신앙과 싸우는 검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의 검을 휘두를 때에 사람들 마음에서 갈등이 일어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것인가, 아니면 거절할 것인가? 그러나 결단 하세요. 영혼의 평화는 사람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킬 수도 없습니다. 평화는 예수님이 주십니다.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로 지켜집니다. 우리가 가진 칼, 우리가 가진 무기, 우리가 가진 능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전투 없는 승리는 없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평화를 얻기 위해, 즉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한 싸움을 거쳐야 합니다. 복음을 위한 갈등, 죄와 싸우는 투쟁을 두려워 마세요. 주님은 내게 복음의 칼을 주셨습니다. 이 칼을 사용하세요. 이런 불화의 과정을 통과하여 세상 사람이 얻지 못한 영원한 내면의 평화를 얻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족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자
검을 주러 오신 주님은 또 한 가지 중대한 선언을 하십니다. 주님께 합당하지 않은 제자들이 있다! 여기 “합당하다”는 말은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제자로서 가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두 종류의 제자들을 언급하셨습니다. 첫째는 가족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36절)
왜 하필이면 가족을 비교의 대상을 삼으셨을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가 가족입니다. 부모 자식 사이는 가장 끈끈하고, 단단하고, 오래 가는 인간관계입니다. 그런 가족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주님의 제자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들이나 성직자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진정한 주님의 제자로써 가치가 없습니다.
이 말씀에 담긴 중대한 의미는 주님의 위치입니다. 주님은 내 인생에 어떤 위치에 계시는가? 나는 주님을 어떤 위치에 모시고 있는가? 이 질문은 필연적입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갈등이 일어났다면 당연히 이 문제에 부딪치게 되어 있습니다. 가족이 먼저냐, 주님이 먼저냐? 가족을 위해 주님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주님을 위해 가족을 버릴 것인가? 오늘 내게 질문 해 보세요. 나는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 어떤 분들은 이런 심각한 질문을 일부러 기피합니다. 그런 질문은 하지 말고 그냥 믿자! 예수 믿은 지 수 십 년이 지나도록 이런 질문을 하지 않고 믿는 분들이 많습니다. 결단해야만 합니다. 어른들은 가끔 아이들을 놀리느라고 난처한 질문을 합니다. “아빠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 그러면 아이들은 아주 곤란한 처지가 됩니다. 면전에서 누가 더 좋다고 말하면 듣는 사람 마음이 상하잖아요. 그래서 똑똑한 아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둘 다 똑같이 좋아!”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분명한 선택을 강요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한 번 공개적으로 물어봅시다. 지금 여러분은 부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지금 여러분은 자식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나는 부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나는 자식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좀 난처하지만 우리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반드시 이 고백을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새로운 질서 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부모가 왕이었습니다. 명령권자가 부모였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왕초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이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이런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주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그 고백은 단순한 세례의 과정이 아닙니다. 삶의 새로운 질서 속에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명목상 왕이 아닙니다. 허수아비 주인이 아닙니다. 명실상부한 왕이시고 주인이십니다. 실권을 행사하십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주인으로 모셨을 때에 나는 주님의 지배권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당연히 첫째 위치에 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부모가 갖지 못한 실권을 다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죽고 사는 문제에 관여할 수 없지만 주님은 관여 하십니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부모는 자녀의 성별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자녀의 혈액형, 수명, 성품, 두뇌, 신체조건, 그 어느 것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다 결정하십니다. 주님은 지금도 내 머리털을 헤아리시고, 내 생존을 주관하십니다. 부모 역시 주님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실상을 알고 주님의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신앙 밖에 있을 때는 사람이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안 이상 주님이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계명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제5계명과 제4계명이 상충된다면 어떤 계명을 먼저 따라야 할까요? 즉, 주일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부모님이 등산을 가자고 하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부모님이 간음죄를 짓고 도적질을 하라고 하면 어쩌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법이란 알고 지키면 편합니다. 큰 유익이 됩니다. 자연법칙을 알고 따르면 육신이 편합니다. 모든 문명의 이기들은 다 자연 법칙을 알고 응용하는 데서 발생했습니다. 영적 질서도 마찬가집니다. 영혼의 법칙을 알고 따르면 영혼이 평안합니다. 안식과 기쁨을 누립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사셨든지, 이제부터는 주님을 최고 위치에 모시고, 주님을 첫째로 사랑하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을 그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주님께 가치 있는 제자의 첫째 조건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자
주님께 합당하지 않은 제자들이 또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38절)
이 말씀을 뒤집으면, 주님께 합당한 제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사도나 목사나 선교사만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들은 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공통의 의무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막8:34, 마16:24)
그러면 모든 성도들이 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물론 주님의 십자가와 똑같은 십자가를 질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남의 죄를 대신 지고 죽는 십자가, 대속적인 십자가입니다. 오늘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남의 죄를 대신 지는 십자가는 아닙니다. 우리는 남의 죄를 질 능력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오해합니다. 십자가는 고난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생스러우면 무조건 십자가를 졌다고 합니다. 도적질하고 감옥에 간 것도 십자가를 진 것입니까? 잘못하고 욕먹는 것이 십자가입니까? 남에게 할 도리를 하지 못해서 푸대접 받는 것이 십자가입니까? 육신이 병들었다고 다 십자가입니까? 돈 없어서 고생한다고 다 십자가입니까? 십자가는 단순한 고생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십자가는 신자들이라면 예외 없이 매일 지는 십자가입니다. 사도나, 목사나, 평신도나, 누구든지 예외 없이 다 지는 십자가입니다. 그런 십자가는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 십자가가 무엇인지 알려면 마태복음 10장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종합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천국 복음을 전하라. 병든 자를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라. 여행을 위해 가장 간편한 차림을 하라. 어느 집에 들어가거든 평안을 빌어라. 박해를 당하라! 견디면서 주님을 시인하라!
제자들의 삶을 요약하면 이런 것들입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라! 즉, 말씀 사역입니다. 병든 자 약한 자를 고쳐주라! 치유와 돌봄의 사역입니다. 재물을 몸에 지니지 말라! 돈에 매달리지 않는 삶, 적절한 물질생활입니다. 박해와 고난을 견디는 삶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 십자가란 특별한 업무가 아니라, 일상생활입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사는 일과가 곧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십자가를 거대한 과제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가서 매달려 죽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십자가는 오직 주님만이 지신 십자가입니다. 영원한 역사에서 오직 한 번 밖에 없는 십자가입니다. 오늘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일생에 한번만 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매일 매일의 삶 자체입니다. 매일의 삶에서 복음을 전하고, 매일의 삶에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약한 자를 돌아보고, 매일의 삶에서 욕심 부리지 말고, 매일의 삶에서 주를 시인해야 합니다. 내 삶의 일과가 곧 십자가을 지는 삶이란 점을 잊지 마세요.
십자가를 질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부인(否認)입니다. 즉, 자아가 죽는 일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눅9:23, 막8:34)십자가는 죽음의 사형 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사형틀을 지고 다니라는 말입니다. 매 순간 죽어라!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지위와 신분을 내려놓으시고,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죄인들의 화해를 위해서! 주님은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오늘 내가 십자가를 제대로 질 때에, 나를 통해서 화해와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이 위로 받습니다. 소망을 얻습니다. 삶의 길을 찾습니다. 반대로 내가 십자가를 제대로 지지 않으면 복음이 전파되지 않습니다. 약한 사람이 돌봄을 받지 못합니다. 귀신이 활개 칩니다. 넘어진 사람이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게 원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먼저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은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아가 죽는 것은 곧 십자가를 지는 첫 단계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 매일 죽는다고 했습니다.(고전15:31) 매일 매일 자기를 부인하는 데서부터 십자가를 지시기 바랍니다. 가치 있는 제자의 두 번째 조건입니다.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지키는 문제입니다. 내 목숨을 어떻게 간수할 것인가? 주님께서는 목숨을 간수하는 데 관심 두지 말고, 목숨을 잃는 데 관심을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얻는 것이 관심사가 아니고, 목숨을 잃는 것이 관심사입니다. 내 목숨을 어떻게 잃을 것인가? 내 목숨을 어떻게 버릴 것인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9절)
목숨 자체는 소중합니다. 천하보다 소중한 것이 내 목숨입니다.(마 16:26) 그런데 제자들은 그 목숨을 지키는 데 주력하지 말고 잃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목숨을 잃되, 주를 위해 잃어야 합니다.
그 목숨을 주를 위해 잃는다? 물론 일차적인 의미는 순교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복음을 위해 일하다가 순교 당했습니다. 그러나 지구상의 많은 신자들이 다 육신적으로 순교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곧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기 삶의 포기를 의미합니다.(롬12:1-2) 내 자신을 위한 것들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 사는 자, 주님의 명예를 위해 사는 자,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
십자가는 희생의 장소입니다. 주님께서 목숨을 버리신 곳입니다.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해서! 그렇다면 오늘 내 목숨도 십자가에 버려져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주님을 위해서 내 목숨을 기꺼이 내 놓고 있나요? 주님의 권세를 위해 내 권세를 포기하고 있나요? 주님의 명예를 위해 내 자존심을 버렸나요? 존귀한 사람 앞에서든지 비천한 사람 앞에서든지 주님을 위해 자신을 버리세요. 살아 있지만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이 되세요. 그것이 곧 주를 위해 목숨을 잃는 삶입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은 곧 목숨을 얻는 일입니다. 목숨을 얻는다는 의미가 뭔가요? 하나님 품안에서 영생을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이미 하나님 품안에서 영원한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 생명은 가장 가치 있는 진정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생명을 잃는 것에 과도히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육신의 생명을 조만간 끝납니다. 나는 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지상의 생명에 매달리지 마세요. 보다 못한 자기 목숨을 얻으면 더 가치 있는 주님이 주신 생명을 잃습니다. 보다 못한 내 목숨을 잃으면 더 나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른 제자들이 얻을 참 목숨입니다.
기복주의는 무엇이고, 참 복음은 무엇입니까?
마 10:34 / 이광희 목사
본 회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어느 학술대회에서 발제교수가 본 회퍼의 평화사상에 대해 정의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고, 고난의 길은 곧 평화를 실현하는 길’ 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나 한국교회는 현재 고난 받기는 꺼려하고 영광만을 바라보고 있다’면서 ‘한국교회는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또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기에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는 비폭력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데 이 비폭력 방법은 위대하지만 고통과 희생이 뒤따른다’고 말하면서 ‘비폭력 방법은 지는 것 같으나 이기는 방법이며, 빛의 자녀들이 사용하는 방법’ 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평화를 원하지 전쟁이나 폭력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수많은 전쟁과 폭력과 살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요 평화의 종교라고 하면서 이를 위해 예수님 이름을 앞세워서 전쟁을 치르기도 했으며, 위의 학술대회의 예처럼 사회의 불의나 인류의 평화를 위해 역시 예수님 이름을 앞세워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항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활동을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좋게 봐 주어야 하는 것이지만 폭력적인 방법이던 비폭력적인 방법이던 인류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그런 일들을 교회에서 예수님 이름을 앞세워 하는 것이 과연 신앙이고, 복음이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아니면 불의의 정권이나 세상의 폭력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항거하는 것은 비복음적인 일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항거를 하는 것은 복음적이고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입니까?
복음이 뭡니까? 한 마디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화로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화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건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선재적으로, 그리고 성육신 하셔서 하신 일들에서 그 성분과 방향과 목적을 정신과 사상적인 면으로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표면적으로는 각이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다 성도의 인격의 온전(주님의 성품을 닮는 것)을 위한 목적으로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깨달을 때 성경의 표면적 문자적인 것에서 우리를 주님의 성품으로 닮게 하고자 하는 그 근본목적을 주격으로 세우고 깨달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의 근본을 이것으로 세우지 않고 있다면 이는 거짓적, 이질적, 이단적인 신앙자라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하시건 당신의 정신과 사상과 목적이 그 질과 사상 면에서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병자를 고친 것도,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다 거기에는 우리의 온전을 위한 교훈과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이게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이것을 깨닫는 것을 계시를 깨달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학술대회에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모순에 대해 폭력이 아닌 비폭력적으로 항거해야 한다고 말을 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고, 교회에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복음일까요?
폭력적인 방법이던 비폭력적인 방법이던 그런 일에 교회가 예수이름으로 참여하는 것은 세상을 위한 일입니까, 천국을 위한 일입니까? 세상을 위한 일이라도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면 주님을 닮지 못하고, 비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면 주님을 닮게 되며, 그것은 복음이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주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까? 주님을 닮는 것이 방편에 의해 되는 것입니까, 사상과 정신에 의해 되는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겉 표면, 즉 방편을 본다고 하셨습니까, 진리를 따르는 인간의 그 중심을 본다고 하셨습니까?
중심을 보신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모든 사건과 환경 가운데서 앞에서 말한 궁극적이고 목적적인 주님의 인간을 향한 그 뜻을 소원 목적적으로 잡은 상태로 나아가는 그 마음을 보시고 그런 자에게 성령님께서 역사해서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입혀 천국을 주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고 누리며 살게 해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중심은 없는 채 전쟁과 폭력과 갈등으로 고통당하는 인간들을 위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폭력적인 방법이 아닌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고, 복음이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고난당하심이 인간세상의 육적 세상적 평화를 위함입니까,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함입니까? 육적 세상적 평화를 위함이라면 주님께서 친히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전쟁)을 주러왔다’(마10:34)고 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8)고 하셨다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이 평화가 인간세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제외한 채 인간들끼리의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앞에서 말한 인간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 하나님과의 단일로 되고,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천국의 질과 성분의 영능의 실력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까?
인간끼리 평화하는 그 질과 성분이 인간이 하나님의 인격으로 단일로 돼서 하나님과 평화가 되는 이 평화와 질과 성분이 같은 것입니까? 만일 같다면 천국은 하나님과 같은 성분과 성질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 안 믿어도, 즉 인간이 하나님의 성분과 성질로 만들어지지 않아도 세상에서 인간평화를 위해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인간끼리의 평화를 말씀하는 것이란다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온전을 위해 주셨다’(딤후3:16, 17)고 하는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단일성은 없어도 인간끼리 평화만 되면 인간이 하나님의 온전으로 닮아지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개인이 우상이나 만물 앞에 가서 세상의 복을 받길 원하며 비는 것은 샤머니즘적 기복사상이고, 개인의 사욕을 위함이 아닌 인류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 빌고, 이를 위해 비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그건 기복사상이 아닌 참 신앙이고, 복음이고, 그런 삶을 사노라면 핍박과 고난을 겪게 되니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까?
개인이던 인류 전체이던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고 우상에게나 만물 앞에서 빌면 이건 기복사상이 맞습니다. 그러면 개인이던 인류 전체이던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고(여기엔 세상의 평화도 포함됨) 하나님 앞에 와서 빌면 신앙이고, 복음입니까? 더 더군다나 하나님께 비는 것만이 아니고 이를 위해 폭력이 아닌 비폭력적으로, 그것도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 몸으로 참여하는 것은 더 큰 신앙이고, 더 큰 복음입니까?
샤머니즘적 기복신앙도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이 분명하고,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인류평화를 위해 예수이름으로 비폭력으로 매진하는 것도 역시 세상과 세상에 속한 일이 분명합니다. 아닌 말로 인류평화를 위해 일하는 분들이 온 인류가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설령 그런 목적으로 한다고 해도, 그리고 그 일이 실현이 돼서(실은 실현이 되지도 않겠지만) 온 세상이 전쟁과 폭력과 갈등이 멈추고 평화가 도래한다고 해도 평화를 누리는 그 사람들이 영적이고 신령하고 영원하고 천국적인 주님의 인격과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진 것입니까? 인간이 육적인 평안을 누리게 되면 주님의 성품이 닮아지는 것입니까?
아닌 말로 하나님은 제외한 채 인간끼리 평화하는 일을 하면 인류에게 평화가 오게 되지만 모든 사람을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게 하면 인류평화가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까? 모든 인류가 주님의 마음을 가지면 전쟁과 폭력과 다툼이 생길까요?
그렇다고 해서 내세복음주의적인 진리본질의 신앙을 가진 자가 인류평화를 위한다는 목적 하에 사람을 주님을 닮게 하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적이 세상의 평화이고, 그 목적을 위한 방편이 주님을 닮게 하는 것이라면 이 역시 세상을 위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세상을 위해 이용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러니까 이 기회에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갈 곳은 신령한 세계인 천국이고, 우리가 장차 그곳에 가서 그 나라를 다스리고 누리며 살려면 그 나라에 적응할 수 있는 영적인 실력인 주님의 인격과 성품의 옷을 입어야만 가능하기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고, 아무리 충성봉사를 하고, 아무리 종교적 이력과 업적을 많이 쌓아도, 아무리 신학적 지식이 풍성해도, 아무리 예수이름으로 인류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덧입지 못하면 우리가 장차 영원히 거할 그 천국에서는 초라한 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계속해서 세상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육적 세상적 신앙생활을 한다면 한 마디로 그 사람이 아무리 천국을 믿는다고 해도 실은 천국에 대해 희미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서나 주님의 나라에서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나는 주님 앞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더라도 세상 사람의 요구를 이루어주는, 세상 사람이 알아주는 그런 사람으로만 살면 족한 것입니까? 교회(성도)는 세상일에 수종드는 자입니까, 주님의 일에 수종을 드는 자입니까? 그러면 주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세상일이 잘 되게 하는 것입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인격 면에서 영적이고 신령하고 천국적인 주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되게 하는 것입니까?
본 회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어느 학술대회에서 발제교수가 본 회퍼의 평화사상에 대해 정의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고, 고난의 길은 곧 평화를 실현하는 길’ 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나 한국교회는 현재 고난 받기는 꺼려하고 영광만을 바라보고 있다’면서 ‘한국교회는 샤머니즘적 기복신앙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또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이기에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는 비폭력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데 이 비폭력 방법은 위대하지만 고통과 희생이 뒤따른다’고 말하면서 ‘비폭력 방법은 지는 것 같으나 이기는 방법이며, 빛의 자녀들이 사용하는 방법’ 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평화를 원하지 전쟁이나 폭력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수많은 전쟁과 폭력과 살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특히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요 평화의 종교라고 하면서 이를 위해 예수님 이름을 앞세워서 전쟁을 치르기도 했으며, 위의 학술대회의 예처럼 사회의 불의나 인류의 평화를 위해 역시 예수님 이름을 앞세워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항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평화를 위해 활동을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좋게 봐 주어야 하는 것이지만 폭력적인 방법이던 비폭력적인 방법이던 인류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 하에 그런 일들을 교회에서 예수님 이름을 앞세워 하는 것이 과연 신앙이고, 복음이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아니면 불의의 정권이나 세상의 폭력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항거하는 것은 비복음적인 일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항거를 하는 것은 복음적이고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입니까?
복음이 뭡니까? 한 마디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화로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화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건 성경을 통해 예수님께서 선재적으로, 그리고 성육신 하셔서 하신 일들에서 그 성분과 방향과 목적을 정신과 사상적인 면으로 살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표면적으로는 각이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다 성도의 인격의 온전(주님의 성품을 닮는 것)을 위한 목적으로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깨달을 때 성경의 표면적 문자적인 것에서 우리를 주님의 성품으로 닮게 하고자 하는 그 근본목적을 주격으로 세우고 깨달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신앙의 근본을 이것으로 세우지 않고 있다면 이는 거짓적, 이질적, 이단적인 신앙자라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하시건 당신의 정신과 사상과 목적이 그 질과 사상 면에서 이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병자를 고친 것도, 죽은 자를 살리신 것도 다 거기에는 우리의 온전을 위한 교훈과 목적이 들어 있습니다. 이게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이것을 깨닫는 것을 계시를 깨달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학술대회에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모순에 대해 폭력이 아닌 비폭력적으로 항거해야 한다고 말을 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고, 교회에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복음일까요?
폭력적인 방법이던 비폭력적인 방법이던 그런 일에 교회가 예수이름으로 참여하는 것은 세상을 위한 일입니까, 천국을 위한 일입니까? 세상을 위한 일이라도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면 주님을 닮지 못하고, 비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면 주님을 닮게 되며, 그것은 복음이 되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주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까? 주님을 닮는 것이 방편에 의해 되는 것입니까, 사상과 정신에 의해 되는 것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겉 표면, 즉 방편을 본다고 하셨습니까, 진리를 따르는 인간의 그 중심을 본다고 하셨습니까?
중심을 보신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성도가 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모든 사건과 환경 가운데서 앞에서 말한 궁극적이고 목적적인 주님의 인간을 향한 그 뜻을 소원 목적적으로 잡은 상태로 나아가는 그 마음을 보시고 그런 자에게 성령님께서 역사해서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입혀 천국을 주님과 함께 영원히 다스리고 누리며 살게 해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중심은 없는 채 전쟁과 폭력과 갈등으로 고통당하는 인간들을 위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마땅히 폭력적인 방법이 아닌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고, 복음이고, 주님의 고난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고난당하심이 인간세상의 육적 세상적 평화를 위함입니까,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함입니까? 육적 세상적 평화를 위함이라면 주님께서 친히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전쟁)을 주러왔다’(마10:34)고 한 말씀은 무엇입니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8)고 하셨다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이 평화가 인간세상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제외한 채 인간들끼리의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앞에서 말한 인간이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 하나님과의 단일로 되고,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천국의 질과 성분의 영능의 실력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하나님과의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까?
인간끼리 평화하는 그 질과 성분이 인간이 하나님의 인격으로 단일로 돼서 하나님과 평화가 되는 이 평화와 질과 성분이 같은 것입니까? 만일 같다면 천국은 하나님과 같은 성분과 성질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 안 믿어도, 즉 인간이 하나님의 성분과 성질로 만들어지지 않아도 세상에서 인간평화를 위해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인간끼리의 평화를 말씀하는 것이란다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온전을 위해 주셨다’(딤후3:16, 17)고 하는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단일성은 없어도 인간끼리 평화만 되면 인간이 하나님의 온전으로 닮아지는 것입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개인이 우상이나 만물 앞에 가서 세상의 복을 받길 원하며 비는 것은 샤머니즘적 기복사상이고, 개인의 사욕을 위함이 아닌 인류의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 빌고, 이를 위해 비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면 그건 기복사상이 아닌 참 신앙이고, 복음이고, 그런 삶을 사노라면 핍박과 고난을 겪게 되니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까?
개인이던 인류 전체이던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고 우상에게나 만물 앞에서 빌면 이건 기복사상이 맞습니다. 그러면 개인이던 인류 전체이던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자고(여기엔 세상의 평화도 포함됨) 하나님 앞에 와서 빌면 신앙이고, 복음입니까? 더 더군다나 하나님께 비는 것만이 아니고 이를 위해 폭력이 아닌 비폭력적으로, 그것도 핍박과 고난을 당하면서 몸으로 참여하는 것은 더 큰 신앙이고, 더 큰 복음입니까?
샤머니즘적 기복신앙도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이 분명하고,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인류평화를 위해 예수이름으로 비폭력으로 매진하는 것도 역시 세상과 세상에 속한 일이 분명합니다. 아닌 말로 인류평화를 위해 일하는 분들이 온 인류가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설령 그런 목적으로 한다고 해도, 그리고 그 일이 실현이 돼서(실은 실현이 되지도 않겠지만) 온 세상이 전쟁과 폭력과 갈등이 멈추고 평화가 도래한다고 해도 평화를 누리는 그 사람들이 영적이고 신령하고 영원하고 천국적인 주님의 인격과 성품의 사람으로 만들어진 것입니까? 인간이 육적인 평안을 누리게 되면 주님의 성품이 닮아지는 것입니까?
아닌 말로 하나님은 제외한 채 인간끼리 평화하는 일을 하면 인류에게 평화가 오게 되지만 모든 사람을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게 하면 인류평화가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까? 모든 인류가 주님의 마음을 가지면 전쟁과 폭력과 다툼이 생길까요?
그렇다고 해서 내세복음주의적인 진리본질의 신앙을 가진 자가 인류평화를 위한다는 목적 하에 사람을 주님을 닮게 하는 일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적이 세상의 평화이고, 그 목적을 위한 방편이 주님을 닮게 하는 것이라면 이 역시 세상을 위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세상을 위해 이용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러니까 이 기회에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갈 곳은 신령한 세계인 천국이고, 우리가 장차 그곳에 가서 그 나라를 다스리고 누리며 살려면 그 나라에 적응할 수 있는 영적인 실력인 주님의 인격과 성품의 옷을 입어야만 가능하기에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믿고, 아무리 충성봉사를 하고, 아무리 종교적 이력과 업적을 많이 쌓아도, 아무리 신학적 지식이 풍성해도, 아무리 예수이름으로 인류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주님의 인격과 성품을 덧입지 못하면 우리가 장차 영원히 거할 그 천국에서는 초라한 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계속해서 세상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육적 세상적 신앙생활을 한다면 한 마디로 그 사람이 아무리 천국을 믿는다고 해도 실은 천국에 대해 희미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에서나 주님의 나라에서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나는 주님 앞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더라도 세상 사람의 요구를 이루어주는, 세상 사람이 알아주는 그런 사람으로만 살면 족한 것입니까? 교회(성도)는 세상일에 수종드는 자입니까, 주님의 일에 수종을 드는 자입니까? 그러면 주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세상일이 잘 되게 하는 것입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인격 면에서 영적이고 신령하고 천국적인 주님의 성품의 사람으로 되게 하는 것입니까?
내가 세상에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39 / 박상래 목사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라고 말을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평강의 왕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산상수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심으로 평화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을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화를 위해 사시다가 평화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께서 어떻게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이 말씀에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지금까지 평강의 왕, 화평케 하시는 분, 사랑의 주님으로 알고 있는데 왜 주님께서 불화케 하시는 분, 분쟁을 일으키시는 분,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신 분으로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에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1) 위장된 평화와 싸우기 위해 검을 주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 주님이 생각하시는 평화는 다른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평화는 단순히 평안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닌 위장된 평화, 거짓된 평화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통치할 때 가장 큰 핍박은 신사참배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사참배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죄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신사참배를 거부했습니다. 여기에 종교탄압이 시작됩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죽였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엄청난 핍박과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핍박과 싸워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신사참배를 결정한 것은 가톨릭이었습니다. 일본의 잔인한 협박을 이기지 못한 로마교황청에서 신사참배는 하나의 국민의례와 같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같은 결정은 일본의 종교탄압정책에 굴복당한 것이었습니다. 사제들도 신사참배에 동참했습니다. 천주교인들은 신사참배에 참석했습니다. 가톨릭은 더 이상 탄압받지 않고 평안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핍박과 탄압을 피하기 위해 신사참배와 타협해서 가지는 평안, 이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위장된 평화이며 거짓된 평화입니다.
불의와 싸우지 아니하고 악한 악마와 싸우지 아니하고 적당히 타협하거나 굴복해서 얻어지는 평안함. 그것은 거짓된 평화, 바로 이장된 평화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바로 이런 위장된 평화가 아니라, 이런 위장된 평화와 싸워서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폴리갑 목사님은 80이 넘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 때문에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받은 로마의 장교가 폴리갑 목사님이게 간청을 했습니다. “영감님! 한 마디만 하시면 평안히 사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한 마디만 하시면 평안히 사시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비참하게 가혹한 죽음을 당해야 합니다.” 그때 폴리갑 목사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80년이 넘는 나의 생애 가운데 주님은 단 한번도 나를 배반하신 적이 없으신데 내가 어찌 주님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결국 폴리갑 목사님은 불에 태워 잔인하게 순교를 당하셨습니다. 불의와 타협하거나 굴복당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된 평화, 위장된 평화와 싸우기 위해 검을 가져야 합니다. 불의와 거짓과 사탄의 세력과 싸우지 아니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굴복함으로 얻어지는 평안함을 참된 평안이 아나라 위장된 평화입니다. 위장된 평화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속임수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위장된 평화와 싸우기 위해 검을 가져야 합니다.
2) 참된 평화를 이루기 위해 검을 주러 오셨다.
참된 평화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거짓과 불의와 사탄과 전쟁을 통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은 마태복음 10장 32-33절 말씀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내가 검을 주러 왔다, 가족끼리도 불화가 일어나겠고 집안에서도 다툼이 일어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로마서 10장 9-10절에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 때문에 사자 밥이 되기도 했고 불에 태워죽기도 했고 땅굴 속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사람들 앞에서 부인하면 평안함을 가질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 앞에서 부인하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부인한다고 하셨기에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핍박과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가정에서 부모가 신앙을 반대하면 어찌할 것인가? 남편이 교회 가는 것을 반대하면 아내는 어찌할 것인가?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것은 다 양보할 수 있어도 신앙은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가정 안에 불화가 일어나고, 부부 간에 불화가 일어난다 해도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검, 성령의 검을 들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힘써 싸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온 가정이 화목하고 가정의 천국을 이루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버지와 아들이 다투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다투는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예수님보다 부모님을 더 사랑하고 예수님보다 남편과 자식을 더 사랑해서 믿음을 빼앗기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는 자입니다. 이 사람은 영생을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참된 평화를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믿음의 길, 신앙의 길, 구원의 길, 영생의 길을 위해서는 가족 간의 분쟁, 부부 간의 분쟁, 부모와 자식 간의 분쟁이 있다 해도 말씀의 검, 성령의 검을 들고 그리스도인들은 싸워서 이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싸움을 위해서 주님은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천년 교회 역사에 가장 훌륭한 신학자 두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어거스틴과 칼빈을 꼽습니다. 어거스틴은 두왕국 사상을 말했고 칼빈도 이어받았습니다. 하나는 세상의 왕국이요, 다른 하나는 영원한 왕국입니다. 세상 왕국에는 세상의 왕이 있고 영원한 나라에는 왕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세상에는 육신의 아버지가 계시고 천국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세상에는 세상 법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왕국에 속해있는데 두 개의 왕국에 충실해야 합니다. 세상 법을 지켜야 하고 하나님 나라의 법도 지켜야 합니다. 세상 왕에게도 충성해야 하지만 하나님 나라 왕이신 하나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세상 나라에서도 성실하게 살고 하나님 나라에도 성실히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나라는 하나님 나라에 충성하는 것을 방해해도 안 되고,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에 충성하는 것을 방해해도 안 됩니다. 그러나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에 갈등이 일어날 때, 세상의 법과 하나님의 법에 충돌이 일어날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요?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시인하지 아니하면 천국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정하지 않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영원하신 천국의 믿음의 법을 지키고 그리해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 나라는 잠깐이고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육을 가졌기에 육을 위해 살아야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영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지켜야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법도 지켜야 합니다. 세상일에도 충실하게 살아야 하지만 신령한 일에 충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에 더 우선순위를 두느냐? 하는 것입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두 가지 중 선택해야만 할 때에는 어찌할 것입니까?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모님 말씀이기에 순종해야 하지만 믿음을 버려라, 교회를 다니지 말라는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님께 불순종돼도 부모님과 다툼이 일어나도 부모님께 핍박을 받는다 해도 믿음을 지켜야 구원과 영생의 길이 열려진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며 가정을 복음화 시켜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반대하는 부모님 뜻을 따라 신앙을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 분쟁이 일어나도 핍박이 온다 해도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부모를 위해 기도해서 신앙의 길로 인도해야 합니다. 믿음의 길, 생명의 길, 구원과 영생의 길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평화, 영원한 평화, 구원과 영생을 소유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검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빼앗으려 덤벼드는 사탄의 세력을 말씀으로 검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거짓 평안과 불의와 악한 사탄과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아니하고 싸워서 믿음을 지켜야 하고 구원과 영생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내가 세상에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3) 말씀의 검, 성령의 검을 가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며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하나님의 말씀의 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온갖 거짓과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말씀의 검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세상에서 박해와 핍박을 성령의 검으로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불의와 타협하고 사탄의 세력에 굴복함으로 얻어지는 평안은 참된 평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오도록 사탄과 악마의 속임수로 찾아와 위장된 평화입니다. 위장된 평화는 우리 영혼을 병들게 만들과 망하게 합니다. 이런 불의와 사탄의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예수께서는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 때문에 분쟁이 일어난다 해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가정에 불화 생기고 부부 간에 불화가 생겨도 타협하거나 굴복당하면서 위장된 평화를 바라지 말고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검, 성령의 검을 들고 불의와 사탄의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영생과 구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영생을 얻는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말씀의 검과 성령의 검을 가지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칼을 주러 오셨다는 예수님
마 10:34-39 / 인명진 목사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는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칼을 주러 오셨다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마땅히 칼을 가진 사람이어 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예수님께서 주신 칼을 가지고 계십니까?
칼은 싸움을 할 때 쓰던 무기입니다. 칼을 잘 쓰는 사람이 장수가 되었고 칼을 잘 쓰는 군대가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이 무기를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개인 간의 싸움도 처음에는 말싸움으로 시작되어 좀 지나면 주먹질을 하고 본격적으로 싸울 때는 칼싸움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칼부림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칼을 주러 오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싸움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것입니 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싸움을 붙이러 오셨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께 서 직접 하신 말씀입니다. 하던 싸움도 말리실 예수님께서 그러실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 는 정말 칼을 주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을 평화의 왕이라고 말합니다. 미움을 사랑으로 갈등이 있는 곳에 평화를 주러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천사들이 이 땅에 평화를 주로 오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의 이런 상식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혹시 우리가 잘못 생각할까봐 강조해서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혹시 이 말씀을 기록한 마태가 잠시 착각해서 기록한 말씀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2장 51절에 똑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 로라 이렇게 보면 마태의 착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도무지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말씀이 더 러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0장 16절을 보면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뱀과 비둘기가 어울리지 않는데도 뱀과 비둘기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 다. 요한계시록 1장 8절에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 이 다른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가 되라는 알쏭달쏭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7절에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으뜸이 되기 위해서는 올라가야 하는데 내려가고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 다. 그럴 듯한 말씀이긴 하지만 비현실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깊은 뜻이 있다 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에 지구의 무게와 같은 무게가 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는 이 말에도 높고 깊은 뜻이 있습니다. 평화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칼이 있어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칼은 잘라냄, 베어냄을 말합니다. 무 엇을 끊어내는 결단이고 아픔입니다. 그러므로 평화는 무엇인가 베어내고 잘라내는 결단이 있고 아픔이 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평화는 값없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싸움, 비장한 결단, 우리의 삶속에서 무엇인가를 베어내는 아픔 속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평화에 대한 깊은 뜻은 35-36절 말씀을 보면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내 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 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우리가 세상에서 한 평생 살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식구입니다. 부 모와 자식, 아내와 남편, 평생 동안 함께 살아야 할 우리 인생의 한 부분입니다. 때로는 이 사람들 때문 에 웃고 울고 행복하고 속상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목숨을 바쳐 사랑하고 때로는 미워하 고 원망합니다. 때로는 이들 때문에 죽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이들 때문에 살맛이 나기도 합니다. 평생 동안 이렇게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져 웃고 울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랑하고 가 장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감사하고 가장 원망하는 사람도 이들이며, 나를 행 복하게 하기도 하고 나를 불행하게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아시고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말씀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주신 것은 평생을 살아가면서 놓지 못하는 끈을 끊어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부부 가 한 평생을 살면서 사랑한다고 하지만 나중에는 집착이 됩니다. 우리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도 집착으 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서로가 집착을 하기 때문에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기대하게 됩니 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싸움을 하게 됩니다. 부부싸움은 상대에 대한 집착과 욕심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집착의 끈을 끊어야 편안할 수 있습니다.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집 착의 끈에 매여 있는 한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에게 감사할 수 없습니다. 서로가 자유로워질 때 서로에 대 한 감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믿지 못하는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 이 아니라 집착 때문입니다. 이 끈을 끊어야 합니다. 자식에 대해서 자유로울 때 자식과의 관계가 아름다운 관계 행복한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집착의 끈으로 묶어놓으면 나중에는 견디다 못해 질식하게 됩니다. 자식을 묶고 있던 집착을 끈을 끊어서 자식이 자유롭게 해주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묶어놓는 집착의 끈을 끊어내야 자유로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식에 대한 집착의 끈, 부부에 대한 집착의 끈, 사람에 대한 집착의 끈을 끊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칼 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칼을 주시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보이지 않는 끈에 꽁꽁 묶여서 살아갑니다. 직장이라는 끈에, 일이라는 끈에 꽁꽁 묶여서 꼼짝 못하고 살아갑니다. 돈 이라는 끈에 묶여 돈 때문에 쩔쩔 매며 살아갑니다. 명예, 권력의 끈으로 묶여서 걱정하고 속상해 하며 살아갑니다.
저는 일찍부터 모든 끈을 끊어보자 생각하고 자식에 대해서도 돈에 대해서도 끊고 살아가고자 했습니 다. 그런데 마지막 놓지 못하는 것이 명예에 대한 끈이었습니다. 무엇인가 되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래서 제가 이 욕심을 끊어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제 마음속에 앞으로 무엇을 해야지, 어떤 자리에 올라 가야지 하는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무엇인가 되어보려는 끈을 버리고 난 후 얼마나 편안하고 자유 로운지 모릅니다. 집착에서 벗어나니까 무엇이 되어보려는 욕심에서 벗어나니까 한없이 자유롭고 마음 에 평화가 넘치고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면 끈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습니다. 돈도 좋아하는 기색만 보이면 찰싹 달라붙어 우리를 동여맵니다. 돈에 대한 욕심과 집착의 끈을 끊어내고 돈의 위력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돈이 있으면 쓰고 없으면 말고 돈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명예도 권력도 마찬가지고 자식도 마찬가지입 니다. 좋아하는 기색만 보이면 우리에게 꼭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꼼짝하지 못하게 우리의 목 을 조여 맵니다.
우리가 가진 집착의 끈을 끊어내기 위한 칼이 있어야 합니다. 무딘 칼로는 안 되고 날선 칼이어야 합니 다. 우리를 조여매고 있는 끈이 워낙 질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젊은이들은 부모에 대한 욕심, 집착의 끈을 끊어야 합니다. 부모들에 대해서도 쿨 해야 합니다. 부모들이 자식에 대한 기대와 집착의 끈을 끊어 야 하는 것처럼 자식들도 부모에 대한 욕심과 집착도 끊어야 합니다. 자식을 출가시킨 부모들은 늘 자식 을 기다리고 전화 한 통이 없는 것을 섭섭해 합니다. 그런 것도 다 끊어야 합니다. 자기들이 잘 살면 그것 으로 됐습니다. 오면 고맙고 안 와도 그만입니다. 효도는 자식이 자라면서 다 한 것입니다. 태중에 있을 때 우리에게 기쁨을 주었으며 자라면서 온갖 재롱을 떨고 학교에 들어가고 그런 것들이 다 우리가 받은 효도입니다. 그 다음부터 자식들이 잘 하는 것 다 덤입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 앞에서 쩔쩔 매지 말고 건강하면 건강한 대로 병들면 병든 대로 살아야 합 니다. 건강해야 한다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집착하면 그것이 병이 듭니다. 끈을 끊으면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끈에 매이면 평생 동안 꼼짝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서 살게 됩니다. 자존심도 끊어야 합니 다. 지금 남과 북이 막혀 있는데 제가 보기엔 자존심 때문입니다. 하고 싶은데 자존심에 매여서 어려운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일의 끈도 끊어야 합니다. 먹고 살만큼만 일하고 기쁘고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내 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세상은 내가 없어도 아무 일 없이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이 근심과 걱정에 매여 행복하지 못하고 고달픈 인생을 사는 것을 보셨습니다. 돈과 부모와 자녀와 명예와 권력에 꼭꼭 묶여서 종처럼 살아가는 것을 보셨습니다. 저 끈을 끊어야 인간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칼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얽어 매고 있는 집착의 끈 욕심의 끈을 끊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이 넘치게 해주시려고 칼을 주려고 오신 것입 니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끈을 끊고 거기에서 자유로워야 우리 인생이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인생 이 될 것입니다.
나는 무슨 끈에 매여 있는가, 내 목을 감고 있는 끈은 무엇인지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꼼 짝 못하게 하는 끈이 돈, 명예, 자존심, 권력, 자식 그 무엇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 우리에게 주신 칼을 손에 들고 하나하나 끊어내야 합니다. 에베소서 6장 17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검으로 끈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 끈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에게 칼을 주시는 것입니다. 칼을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끈을 끊어버리고 다시는 종의 멍에 를 지지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칼을 주신 것입니 다. 이 귀한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합당하려면
마 10:34-39 / 김광일 목사
어떤 젊은 부부가 새 동네로 이사를 갔습니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하다가 옆집 여자가 빨래 너는 것을 보더니 아내가 말합니다. “빨래가 저게 뭐야. 빨래를 할 줄 모르는군요. 세제를 좋은 것으로 써야 하는데” 라며 혀를 찹니다. 남편은 밖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이웃집 여자가 빨래를 널 때마다, 아내는 옆집 여자가 빨래를 잘 못한다고 핀잔을 늘어놓았습니다.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옆집 빨래 줄에 깨끗하게 세탁된 빨래가 널린 것을 보고 아내가 깜짝 놀라며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옆집 여자가 오늘은 빨래를 제대로 했네.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남편이 말합니다. “응,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우리집 창문을 닦았지.” 인생도 이같이 마음의 창문이 얼마나 깨끗한가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법입니다.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 말씀도 먼저 깨끗한 내 마음의 창을 통하여 받아 들여야 허락하는 은혜를 소유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내 마음에 맞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합당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형식적 신앙에 치우쳐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모습과 거리가 멀게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멋대로 신앙생활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합당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것 때문에 하나님의 가치를 잃지 않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즉 세상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모세, 욥, 다니엘, 오바댜를 비롯한 많은 선지자와 성도들은 박해가 있었지만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고 승리했습니다. 하나님께 합당하였을 때 얻어진 결과였습니다. 그러기에 어떠한 박해나 어려움 앞에서도 무릎을 꿇거나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순간을 위해 영원을 포기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더 더욱 안 됩니다.
본문 34절 이하는 예수께서 복음이 세상에 전해질 때 일어날 일과 이에 대해 제자들이 견지해야 할 바른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이 가르침은 매우 역설적인 내용입니다. 일반적 기대와는 어긋나는 당혹스러운 내용이기도 합니다. 본문에 ‘검’과 ‘불화’ 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화평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화의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진주와 같다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헌신할 때 필연적으로 심각한 갈등과 분열을 초래하는 일이 있음을 가르치는 내용이 나옵니다. 편하고 쉽게 믿으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통과 눈물의 대가를 치르지 못한 사람은 물에 떠내려가는 죽은 고기처럼 세파에 휩쓸려 믿음을 버리고 결국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고통과 대가를 치른다 해도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되는 길을 택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합당하려면,
첫째로 더 사랑해야
중국의 어느 선교사는 우리나라 최고의 의과대학을 졸업하시고 큰 병원원장으로 일하셨는데,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던 이 분이 예수를 알게 되고, 만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예수를 알고 나니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 주를 위해서 살겠다는 생각이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병원장을 그만두고 자신의 달란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중국 의료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중국의 한센병 환자를 위해 병원을 세우는 등 열심히 의료선교를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교사에게 “선교사님, 한국의 안정된 직업과 명예를 포기하고 중국의 선교사로 가셨는데 힘들지 않으십니까?” 라고 묻자 선교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을 알고 난 뒤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해서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한국에서 편안하게 원장으로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행복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서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려고 했고, 목숨을 걸고 거룩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복음 전하는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많은 물질을 바쳤고,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37절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혈연적이고 인본적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물론 가족 사랑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우선된 본분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십니까? 예수께서는 차선이나 여분으로가 아닌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리스도 자신보다 다른 그 어떤 것을 더 사랑하는 자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제자란 예수를 적당히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가장 사랑하는 자입니다. 크게 쓰임 받은 자들의 공통점은 예수를 상대적으로가 아닌 절대적으로 사랑한 자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지금 보다 더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것보다 예수를 우선적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합당한 자의 모습이 됩니다.
둘째로 더 따라야
제임스 마이트너(James Meitner)는 알래스카(Alaska)를 연구하여 책을 많이 썼습니다. 40세부터 80세까지 40년간 연구하였기에 알래스카에 대한 최고의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알래스카에 대한 책은 많이 썼지만 알래스카를 가 본 적이 없습니다. 너무 추워서, 죽으면 아내가 과부되고 아이들이 고아될 것 같아서 못 갔습니다. 80세가 되도록 안 갔습니다. 심장병이 들어 수술하고 누워있던 그가 생각했습니다. “알래스카 연구를 40년 했는데 알래스카를 못보고 죽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아니다.” 그는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알래스카로 갔습니다. 영하 52도에 에스키모들과 같이 살고 고래잡이도 같이 나가고 연어잡이도 같이 나가고 알레스카를 경험하게 됩니다. 생생하게 보고 연구를 하고 나서 남긴 말이 있습니다. “어째서 40년 전에 이런 결단을 못했을까? 어째서 40년 전에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과감한 결단이 없었던가?” 누구나 제 때 결단하지 못한데 대한 후회가 많습니다. 단순해야 합니다. 집중해야 됩니다. 행동해야 합니다. 철저한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주께서 부르시는 대로 응답하고 나갈 때 비로소 제자가 될 것입니다.
본문 38절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십자가는 로마의 사형 도구로써 관례에 따라 죄수들은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반역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형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은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불명예스럽고 치욕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는 일이 고통스러운 일인 것을 각오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예수의 십자가와 제자들의 십자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동참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은 인간의 인내로 견디기 어려운 최고의 고통이지만 가치 있는 일이기에 따라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십니까?. 지금보다 더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를 따라야 합니다. 더 이상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더 이상 머뭇거려도 안 됩니다. 언제나 바라보는 십자가가 아니라 지고 따르는 십자가가 되어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더 잃어야
주기철(朱基徹) 목사는 일제 치하에서도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였습니다. 7년 옥고를 겪다가 1944년 4월 21일 순교하였습니다. 한때 일본 경찰은 그를 회유하려 가출옥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주 목사는 산정현 교회에서 최후의 유언 같은 설교를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님, 80넘어 늙으신 내 어머님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의 병든 아내를 주님께 부탁하고, 나의 어린 자식들과 나의 사랑하는 양떼를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산정현의 이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의 피 발자취를 따라 가려고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맙시다. 풀과 같고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결단코 하나님 외에 무릎 꿇고 절할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 보다 차라리 죽어 없어져 주님 향한 정절을 깨끗이 지키려 합니다. 주님 따르는 죽음은 나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 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주기철 목사는 주님 때문에 순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잃은 주기철 목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 39절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여기의 목숨에 해당하는 원어 ‘프쉬케’ 는 ‘혼이나 생명’으로 번역됩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다는 것은 시한부적인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며 잃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세상의 일시적인 가치를 위해 영원한 가치를 버리는 자는 영혼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순교를 피하기 위하여 신앙을 버린다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것도 버리고 포기하며 잃어야 합니다.
예수를 위해 잃어버리십니까? 얼마나 포기하십니까? 예수를 위해 생명을 드릴 때 그것은 죽는 것이 아니며, 재물을 바칠 때 그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고, 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게 될 것이라’ 역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보다 더 잃어야 합니다. 움켜쥐고 있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부디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보다 더 예수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보다 더 예수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지금 보다 더 예수를 위해 잃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내 멋대로의 신앙이 아닌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서의 복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등을 두려워 말고 부딪쳐서 극복하라!
마 10:34-39 / 전순기 목사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은 그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들 속에는 아주 중요한 영적인 진리가 역설적으로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님 때문에 가족 간에 갈등이 생기고 불화하게 되는 일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거라는 겁니다. 그 때에 갈등을 피하거나 타협해서는 안되고, 갈등과 마주쳐서 이겨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의 요점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에 우리의 가족들이 우리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가장 큰 원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가족이란 우리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족들의 반대나 핍박을 이겨내지 못하면, 주님의 제자가 되는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가족들의 반대나 핍박을 이겨내야 한다는 겁니다. 가족들의 반대나 핍박을 이겨내는 일은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힘든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내가 죽는다는 말인데, 내가 주님을 위해서 내 목숨을 잃고자 하면 오히려 얻을 것이고, 내 목숨을 얻고자 하면 오히려 잃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쉽게 말해서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 죽고자 하는 자세로 싸우면 살고, 죽는 게 두려워 꽁무니를 빼는 자는 오히려 죽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은 ‘누워서 식은 죽 먹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죽기로 각오하고 싸우는 자세로 해야 승리한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믿지 않는 가족이나, 좀 더 확대 적용한다면, 내게 육신적인 가족 외에 또 하나의 가족처럼 여겨지는 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는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이 혹시라도 아직 가족 구원을 다 이루지 못한 성도들의 마음을 더욱 더 무겁게 만드는 설교가 될까 염려가 됩니다. 또 이미 온 가족이 다 믿고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은, 오늘 말씀은 나와 상관이 없다고 여기고 귀를 막아버릴까 염려가 됩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기를 미리 부탁을 드립니다.
저는 오늘 설교 말씀을 통해서 아직 가족 구원을 이루지 못한 성도들은 큰 위로와 격려와 도전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족 구원을 이루셔서 온 가족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시는 성도님들의 경우는, 이제 확대된 가족 즉 가까운 친지들을 복음화 하는 일에 헌신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다.
필연적인 갈등과 분쟁
34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가족 간에, 다시 말해서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갈등과 분쟁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가족 간에 갈등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일어나지만, 본문에서 다루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입니다. 신앙적인 이유로 갈등과 분쟁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살아라!”고 가르쳐주시는 삶의 목표, 삶의 방식, 삶의 자세와 태도가 세상의 그것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으로 다양한 종류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람 사람마다 다 나름대로의 인생관과 가치관이 있습니다. 그 인생관과 가치관들 중에는 고상한 것도 있고, 유치하고 저급한 것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양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세상 사람들이 가진 다양한 인생관과 가치관에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요소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 인생관은 인간 자신을 삶의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는 선언이 세상의 가치관과 인생관의 근본 철학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가치관은 창조주 하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삼는 가치관입니다. 주님은 인생의 참된 목적이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있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처럼 이 세상을 살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야 할 영적인 존재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주님을 믿어야 한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또 주님은 우리가 땅에 보물을 쌓는 어리석음을 벗어나 영원한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가는 길과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길이 너무도 다르기에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주의해서 보면, 예수님 자신도 육신의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이런 종류의 갈등을 겪으셔야 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예화) 동생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30세가 된 어느 날부턴가 집을 나간 후로는 아예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전도한답시고, 온 동네방네 돌아다니고, 얼마나 바쁜지, 식사할 겨를도 없고 제대로 주무실 시간도 없이 밤낮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동생들이 보기에 형님이 꼭 미친 것처럼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또 세상 돌아가는 걸 보니까, 정부 당국자들이 예수의 인기가 치솟는 것을 고깝게 생각하고 경계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형님이 당시에 기득권을 다 가지고 있는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과도 갈등을 일으키며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까 동생들 보기에 형님은 지금 매우 위험한 짓을 하는 것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에도 자칭 메시아였던 유다라는 사람이 일어나 로마 통치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는 바람에 근 2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모친과 아우들은 걱정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는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고 찾아 온 적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마12:46). 우리가 잘 알다시피 이런 갈등과 불화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예수님은 결말이 이렇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세상과의 갈등과 분쟁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정면으로 충돌하셨습니다. 그 때에 세상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선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실패하시는 것 같았지만, 예수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도 예수님이 겪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갈등과 불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소속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15:18-19). 또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하셨습니다(요16:33).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그런 일이 발생할 때에 놀라지 말고, 위축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이제 서서히 언행심사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달라지면, 가까운 가족들과 친지들이 제일 먼저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우리에게 화가 나게 되고, 우리에게 압력을 가하여 신앙생활을 포기하게 만들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반대하고 말릴 때에, 회유하기도 하고, 위협과 협박 공갈을 하기도 하고, 또는 폭력이 행사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은근히 왕따를 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정말로 가까운 사람이 신앙생활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이런 갈등과 분쟁이 발생했을 때에, 갈등과 분쟁을 피하려고 타협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가족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쪽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 편에 서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는 겁니다. 신앙 문제는 양보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게 주님을 대하는 합당한 태도라는 겁니다.
이럴 때에 타협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시부모님이 반대한다든지 아니면 남편이 핍박한다든지 하면, “이렇게 갈등을 일으키면서까지 할 필요가 뭐 있나? 시부모님 돌아가신 다음에 나중에 믿으면 되지.”라고 생각하고 교회 출석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반대하는 부모님 몰래, 또는 남편 몰래 나가자.”는 식으로 타협의 길을 찾는 겁니다. 그래서 반대하는 가족들 눈치를 보면서, 다른 데 간다고 하면서 교회를 오거나, 안 되면 쉬고, 교회를 다니다 말다 하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렇게 처신하는 게 얼핏 보면 지혜로운 것 같지만, 이렇게 하면 결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도 없고, 가족을 구원하는 일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천국의 가치를 보여주는 길
우리가 가족들, 친지들과 불화를 일으키더라도 주님 편에 서는 일을 택할 때에 두 가지 중요한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첫 번째 열매는 우리들 자신의 믿음이 연단되고 성숙되는 것입니다. 불가마 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아름다운 도자기가 탄생되듯이, 참 신앙은 시련과 연단을 통하여 탄생합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점에서 부딪치는 가족들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우리의 신앙은 강하게 연단됩니다.
가족들과 친지들과의 갈등은 큰 고통이 되는데, 그럴 때에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강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등이 두려워서 피해 버리면, 하나님이 도우심을 경험할 수가 없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신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갈등을 두려워하여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갈등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 역경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더 많이 경험하게 되는 법입니다. 가까운 가족들과의 갈등과 불화로 인해서 고통스러워하며 눈물을 흘릴 때에, 우리는 가까이 오셔서 우리를 품어주시며,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시는 자애로운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믿음은 더욱 더 굳건해집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내주하는 주님의 생명은 더욱 더 풍성해집니다.
갈등과 불화를 감수할 때에 거두는 두 번째 열매는 영적인 세계를 전혀 알지 못하는 불신 가족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분명히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가족을 제일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들은 가족도 소중하지만, 가족보다 하나님이 더 소중한 분임을 압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가족들을 사랑하는 길임을 압니다. 그래서 가족 사랑과 하나님 사랑이 충돌할 때는 어떤 오해를 받고 어떤 핍박과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기꺼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가족들의 강한 반대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굽히지 않고, 하나님 편을 선택하게 될 때에, 불신 가족들은 대단히 화가 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도대체 예수가 뭐 길래? 교회가 어떤 곳이 길래? 저렇게 욕을 먹고, 비난을 받고, 매를 맞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버티어 내는 것일까?” 궁금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교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가족들보다 하나님을 선택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로만이 아니라, 그 가치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함으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입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등이 심한 경우에는 목숨까지도 내 놓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핍박이 심했을 때에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는데, 순교자들이 마지못해서 목숨을 빼앗긴 것이 아니고, 기쁨으로 자기 목숨을 내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족들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자기 목숨입니다. 그러니 목숨까지도 신앙을 위해서 내어놓을 때에 신앙의 가치는 최고로 입증이 되는 겁니다. 로마시대에 무시무시한 핍박 가운데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올 때에, 기독교인들을 처형하던 로마 군인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성도들이 평화로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다는 기록을 보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가족들이나 친지들과 갈등과 분쟁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피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주님 편에 서야 하는 지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타협하거나, 굴복해 버리면, 주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신앙의 가치를 입증하여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가족들과의 갈등을 이겨내고, 가족들을 구원해내려면, 이제 우리는 고생할 각오해야 하고, 손해 볼 각오해야 하고, 오해 받을 각오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때리면 맞을 각오도 해야 하고, 집에서 쫓겨날 각오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38절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까?
십자가는 하나님의 생명을 세상에 전달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생명이 된 것입니다. 이 원리는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누군가가 대신 죽어야 생명이 전달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후서에서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고후4:10-12).
믿지 않는 가정에서 누군가가 먼저 신앙생활을 출발했다면, 이제 그 사람은 그 가족들의 구원을 위해서 선교사로 파송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는 이제 가족들을 위한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족 구원이라는 열매가 맺히는 법입니다.
신앙적인 문제에는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결코 뒤로 물러서거나 타협하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됩니다. 대신에 다른 문제에서는 많이 양보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 하는 것 외에 다른 일에서 흠 잡히는 일이 없어야 하고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고 정말 어렵습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이 반대하고 핍박할 때에 너무도 고통스러울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표현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두려움을 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 주석을 다 쓰신 고 박윤선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내가 지기 전에는 엄청나게 무거워 보이지만,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기로 결심하고, 막상 십자가를 지고 나면, 새털 무개처럼 가벼워집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기로 했는데, 십자가의 고통이 뭔지를 아시는 주님께서 나를 그냥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모른척 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가면 십자가를 진 나를 주님께서는 품에 안으실 것이고, 때로는 등에 업고 가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게는 성령께서 그 마음에 십자가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넉넉히 이기게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에게는 충분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본문 39절 말씀에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희생하여 썩어지는 밀알이 될 때에, 그것은 나의 육신의 생명을 잃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편안하게 사는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육신적인 삶의 안녕을 포기할 때에, 내게는 신령한 주님의 생명이 풍성하게 부어지고, 그리고 내게 부어진 주님의 생명은 내 사랑하는 가족들, 친지들에게로 흘러가서 그들도 주님의 생명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기도로 싸워 이기라!
우리가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들과의 갈등과 불화를 이겨내는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믿음의 기도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믿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날마다 나아가서 부르짖어 간구해야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약속을 믿고 기도하되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 것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악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가 나옵니다. 악한 재판장은 날마다 와서 원한을 풀어달라고 요구하는 과부를 처음에는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하도 졸라대니까 나중에는 귀찮아서 들어주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악한 재판장도 끈질기게 구하면, 귀찮아서라도 들어주는데, 하물며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자녀들이 밤낮 부르짖는 한 맺힌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속히 들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끈기 있게 기도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탄식하셨습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가 가까워질수록 세상에 이렇게 끈질기게 간구하는 믿음을 보기 어려울 거라는 말씀입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다가 낙망하고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기도하기는 하지만, 그 기도에 간절함, 열정이 너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주시면 좋고, 안 주셔도 할 수 없고.” 하는 식의 미지근한 기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래서는 곤란합니다. 이런 기도는 믿음 없는 기도요, 이런 기도는 응답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끈질긴 믿음의 기도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장애물이 너무 커 보여서 낙심하고 낙망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낙심하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기도하려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보다 더 크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전을 재건하다가 심각한 장애물에 부딪쳐서 낙심하고 있던 스룹바벨에게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믿지 않고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남편이나 아내, 부모님이나 자식들을 회개케 하고 예수 믿게 하는 일이 넘지 못할 큰 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자신은 도저히 이 산을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자신의 힘으로나 능으로는 할 수 없지만, 여호와 신 곧 성령께서 임하시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강퍅한 사도 바울을 거꾸러뜨려서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를 삼으신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어떤 강퍅한 사람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응답이 올 때까지 결코 물러서지 않고 끈질기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에게는 큰 산과 같은 장애물도 평지가 되어 버릴 줄로 믿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계속해서 스룹바벨을 격려합니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습니다(슥4:9). 우리가 믿음으로 시작한 일은 반드시 우리 손으로 마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도 바울께서도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외부 사람 전도하는 것보다 가족을 전도하고 친구를 전도하는 것이 더 어렵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고, 구하면 응답해주신다고 분명히 약속된 일입니다. 우리가 약속의 말씀들을 붙잡고 주님 앞에 나아가 끈질기게 부르짖어 간구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반드시 우리의 소원은 이뤄질 것입니다.
예화) 여러 해 전에 우리 교회를 다니다가 이사를 가신 여 집사님 한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불신 가정에 시집을 갔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힘겨운 시집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전도를 받아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말씀을 순종했습니다. 집사님은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가정을 돌봤습니다. 시댁 식구들에게 똑 부러지게 잘했습니다. 남편을 주님 모시듯이 섬겼습니다. 자녀들 잘 건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은 철저하게 했습니다. 주일 성수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새벽 기도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불신 남편이 강하게 태클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집사님은 강하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 함으로 가정에 소홀한 것이 있습니까? 시댁에 잘못 하는 게 있습니까? 당신에게 내가 소홀한 게 있습니까? 내게는 신앙생활이 기쁨이고 활력소인데, 어째서 나를 사랑한다는 당신이 내 기쁨을 막는 겁니까?” 남편이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신앙생활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점점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교회에 다닐 때는 남편도 함께 교회를 출석했었습니다. 이사를 간 후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남편 신앙이 이제는 아내보다 더 뜨거워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화평을 주러 온 게 아니고 검을 주러 왔노라는 말씀은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가장 큰 원수는 가까운 가족이며, 친지들일 수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불신 가족들과 신앙적인 면에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갈등과 분쟁이 없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입니다. 갈등을 두려워하고 피하거나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문제는 다 양보하고 희생하는 자세로 살면서 신앙만큼은 확실하게 선을 그어서 지켜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불신 가족들과 친지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구원의 가치를 드러내며 신선한 충격을 주어, 저들의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됩니다. 갈등과 분쟁 속에서 참아내며, 희생적으로 섬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누구나 다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에 주님의 생명이 나와 내 가족들 속에서 풍성히 역사하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믿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전심으로 부르짖어 간구하며 나아갈 때에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큰 산과 같은 장애물은 평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부디 가족이나 친지들과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고 부딪쳐서 극복하고 승리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39 / 박세갑 목사
문에 앞서 주님께서는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마10;12) 하셨고 이사야 선지자는 (사9;6)에서 주님을 “평강의 왕”으로 예언했고 (눅2;14)에는 주님의 탄생을 천사가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고 노래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평화의 실체이며 평화의 전달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내가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불화하게 하려 함이라.” 하십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고 역설적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전쟁을 없애고 시기와 미움을 없애는 사람들 가운데의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러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 것은 모르고 사람 사이의 다툼을 해결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신 것이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입니다. 이런 대치 관계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만들어 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이루고 있지 사람들과의 평화를 이룬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오해하여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보상을 세상의 것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실패하고 실수합니다.
참된 평화가 무엇입니까? 그저 이웃과의 다툼이나 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노예 된 자리에서 해방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회복하여 하나님과의 사랑 가운데 거룩하고 영광된 신분과 지위의 내용이 참된 평화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모두 죄와 사망의 노예로서 더러움과 무지와 헛된 것의 피해자입니다. 아무도 죄를 택하고 싶지도 않고 의식적으로 죄를 지으려 하지 않는데, 실제로는 죄를 짓고 맙니다. 왜냐하면 죄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야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 알고 죄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가 명령할 수 없습니다. 죄가 유혹할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죄에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주장하여 그를 노예로 굴복시키고 종으로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롬6;10~14)을 봅시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가 우리를 죄에 팔지 않는 한 죄를 짓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은 언제나 죄의 노예임으로 죄밖에는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는 죄에 대하여 십자가의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죽었고 주님의 부활과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산 자입니다. 그래서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입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지만 예수를 모르는 세상은 죄를 짓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신자가 세상을 살 때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복음은 한 가족을 최고의 결속력으로 묶어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족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복음이 본질적으로 파괴적 성향을 가졌거나 모순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을 대하는 인간의 부패한 죄의 성향과 반항적 기질이 이런 결과를 가져 옵니다. 주님은 이럴 때에 제자들에게 자연적으로 우리의 성품가운데 나오는 혈연적이고 인본적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하여 예수님 당신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내 부모 형제와 가족을 사랑하고 있고 또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그것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 된 자의 제일의 의무이고 본분임을 가르치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는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를 따르게 됩니다. 그 길이 위험과 고난이 가득하고 무가치해 보이고 때로 억울하기도 할지라도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실 당시 아직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지만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생각하시며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로마시대의 십자가형은 가장 흉악한 반역자나 살인자를 처형하는 도구입니다. 사형을 당할 죄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형장에 까지 지고 가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이런 시련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부정에 대한 실제적인 요구입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한 번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지만 이제 곧 그 길을 가실 것입니다. 자신이 본을 보이시며 거기까지 따라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화평하셔서 우리를 만나는 데에는 십자가라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입니다. 무엇에 대한 죽음입니까? 죄에 대한 죽음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교주나 수령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목표로 하여 사는 것이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요 주인으로 모시고 그로부터 공급되는 것으로 우리의 삶의 내용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의와 진리와 영원한 것으로 목표를 삶고 그 자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찾아가도 하나님의 주시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고 찾아가고 나누게 됩니다.
(고후4;10~12)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언제나 죽어서 다른 사람을 찾아간다고 말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죽은 모습입니다. 우리가 가진 구원과 진리와 의에 속한 모든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높이고 잘난 것을 자랑하는 세상의 것과 내용이 아닙니다. 죽어서 하나님의 자녀 된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와 싸워야 하고, 누구와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를 확인하십시오. 세상과 평화를 누리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을 포기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름을 내고 세상과 평화를 누리려는 마음을 죽이셔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본문에 말씀하시는“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 아래에 있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과 싸울 수밖에 없고 세상에게 환영 받지 못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금방 세상과 화목하고 싶어지고 십자가를 벗어 버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그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영원한 약속을 기억하시고 승리하시는 온사랑 교회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항하는 교회
마 10:34-39 / 김홍도 목사
문에 앞서 주님께서는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마10;12) 하셨고 이사야 선지자는 (사9;6)에서 주님을 “평강의 왕”으로 예언했고 (눅2;14)에는 주님의 탄생을 천사가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하고 노래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평화의 실체이며 평화의 전달자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내가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불화하게 하려 함이라.” 하십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고 역설적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는 사람들 사이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전쟁을 없애고 시기와 미움을 없애는 사람들 가운데의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러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과 싸우고 있는 것은 모르고 사람 사이의 다툼을 해결하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신 것이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 사이의 싸움입니다. 이런 대치 관계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만들어 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이루고 있지 사람들과의 평화를 이룬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오해하여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보상을 세상의 것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실패하고 실수합니다.
참된 평화가 무엇입니까? 그저 이웃과의 다툼이나 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노예 된 자리에서 해방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회복하여 하나님과의 사랑 가운데 거룩하고 영광된 신분과 지위의 내용이 참된 평화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모두 죄와 사망의 노예로서 더러움과 무지와 헛된 것의 피해자입니다. 아무도 죄를 택하고 싶지도 않고 의식적으로 죄를 지으려 하지 않는데, 실제로는 죄를 짓고 맙니다. 왜냐하면 죄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야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 알고 죄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가 명령할 수 없습니다. 죄가 유혹할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죄에 미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주장하여 그를 노예로 굴복시키고 종으로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롬6;10~14)을 봅시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아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우리가 우리를 죄에 팔지 않는 한 죄를 짓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은 언제나 죄의 노예임으로 죄밖에는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는 죄에 대하여 십자가의 주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죽었고 주님의 부활과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산 자입니다. 그래서 “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입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지만 예수를 모르는 세상은 죄를 짓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신자가 세상을 살 때 심각한 갈등과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복음은 한 가족을 최고의 결속력으로 묶어 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가족 내부의 심각한 분열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복음이 본질적으로 파괴적 성향을 가졌거나 모순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을 대하는 인간의 부패한 죄의 성향과 반항적 기질이 이런 결과를 가져 옵니다. 주님은 이럴 때에 제자들에게 자연적으로 우리의 성품가운데 나오는 혈연적이고 인본적인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 어떤 것보다 더 우선하여 예수님 당신을 사랑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내 부모 형제와 가족을 사랑하고 있고 또 사랑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그것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 된 자의 제일의 의무이고 본분임을 가르치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는 예수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를 따르게 됩니다. 그 길이 위험과 고난이 가득하고 무가치해 보이고 때로 억울하기도 할지라도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실 당시 아직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지만 주님은 자신의 십자가를 생각하시며 본문의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로마시대의 십자가형은 가장 흉악한 반역자나 살인자를 처형하는 도구입니다. 사형을 당할 죄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형장에 까지 지고 가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는 이런 시련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부정에 대한 실제적인 요구입니다. 예수님은 이때까지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한 번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지만 이제 곧 그 길을 가실 것입니다. 자신이 본을 보이시며 거기까지 따라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화평하셔서 우리를 만나는 데에는 십자가라는 방법 밖에는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입니다. 무엇에 대한 죽음입니까? 죄에 대한 죽음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교주나 수령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목표로 하여 사는 것이고,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요 주인으로 모시고 그로부터 공급되는 것으로 우리의 삶의 내용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의와 진리와 영원한 것으로 목표를 삶고 그 자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찾아가도 하나님의 주시는 것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고 찾아가고 나누게 됩니다.
(고후4;10~12)입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 하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언제나 죽어서 다른 사람을 찾아간다고 말합니다. 십자가 안에서 죽은 모습입니다. 우리가 가진 구원과 진리와 의에 속한 모든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높이고 잘난 것을 자랑하는 세상의 것과 내용이 아닙니다. 죽어서 하나님의 자녀 된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구와 싸워야 하고, 누구와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를 확인하십시오. 세상과 평화를 누리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을 포기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름을 내고 세상과 평화를 누리려는 마음을 죽이셔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본문에 말씀하시는“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 아래에 있고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과 싸울 수밖에 없고 세상에게 환영 받지 못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금방 세상과 화목하고 싶어지고 십자가를 벗어 버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그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영원한 약속을 기억하시고 승리하시는 온사랑 교회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 죽는 자
마 10:34-39 / 김영규 목사
내가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4-36) 주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부자간에 모녀간에 고부간에 불화가 생기며, 심지어는 원수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평화의 왕입니다. 주님 자신도 수 없이 평안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눅 1:29, 2:14, 7:50, 8:48, 요 14:27, 16:33, 20:19, 21, 롬 5:1, 10:15, 14:17, 엡 2:14, 골 1:20,히 6:20) 그런데 검을 주고 불화를 일으키고 원수가 되게 하시겠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정을 세우러 오신 분이지 가정을 깨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창세 때부터 가정을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멀쩡한 가족들이 서로 미워하게 하고, 원수 되게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주님이 오신 목적입니다. 즉, 주님은 가정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남편보다 더 중요한 것, 아내보다 더 중요한 것, 자식보다 더 중요한 것, 부모형제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위해 오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잠깐의 갈등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 중요한 게 뭡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입니다. 영생을 얻는 일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일, 영혼 구원을 받는 일입니다. 가정은 현세에서 가장 중요한 공동체입니다. 가족보다 더 중요한 관계는 없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잘 아십니다. 그러나 가정은 어디까지나 현세에서의 관계일 뿐입니다. 천국에까지 지금의 가족 관계가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현세의 삶에서 부부는 사별하면 재혼을 하기도 하고 이혼하기도 합니다. 자녀들도 부모가 있어도 버려지고 입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가족은 영원히 불변합니다. 사람들은 현세 가족만 생각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장 오늘이라도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즉,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영혼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내세가 있습니다. 그 내세를 어떻게 준비합니까? 바로 주님을 믿고 영접하면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일은 만사를 제쳐두고 먼저 해야 될 일입니다. 잠깐 발생하는 가족 간의 갈등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영생은 먼저 해결해야만 될 일입니다. 세상일도 그렇잖아요? 만일 우리가 출세할 수 있다면 잠깐의 고통은 누구나 감수합니다. 만일 억만 장자가 될 수만 있다면, 잠깐 감옥에 가는 것도 불사합니다. 만일 대권만 손에 쥘 수 있다면 잠깐 욕먹는 것은 얼마든지 감수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잠깐의 갈등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잠깐의 갈등을 감수해야 합니다.
둘째로, 영적인 대적들과의 실제적인 투쟁입니다. 인간 사이의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배후에 악한 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진 인간들은 악한 영들의 지배를 받습니다. 죄를 즐겨합니다. 이익이 된다면 무슨 거짓이든지 행합니다.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역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영접한 사람과 주변 사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은 자신을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8:12) 반대로 인간은 어두움속에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빛과 어두움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빛이 오면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성경에서 빛이 상징하는 것은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로, 빛은 생명입니다. 둘째로, 빛은 도덕적인 의로움입니다. 셋째로, 축복과 번영입니다. 반대로, 어두움은 죽음이나, 죄악, 혹은 불행을 의미합니다. 빛이 와서 어두움을 물리치려고 하니까 투쟁이 일어나는 겁니다.
빛이 강할수록 사물은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소를 말이라 하고, 콩을 팥이라 해도 모릅니다. 더러운 것을 깨끗하다 하고, 깨끗한 것을 더럽다 해도 모릅니다. 멀쩡한 사람을 장애인이라 해도 모르고, 장애인을 정상인이라 해도 모릅니다. 그런 곳에 빛이 비취면 모든 사실이 드러납니다. 주님 앞에서 악을 선이라 할 수 없고, 불의를 정의라 할 수 없습니다. 비 진리를 진리라 할 수 없고, 나쁜 것을 좋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더러운 양심, 은밀한 행동, 숨겨진 인격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세상은 주님을 배척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5,9-12)
어둠의 힘은 막강합니다. 죄악의 힘은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탄식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1-24) 악한 행실, 잘못된 습관, 불신앙의 사상, 무신론, 유물주의, 배금 사상... 참으로 고치기 힘듭니다. 얼마나 고치기 힘든지, 성경은 이런 말씀을 합니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13:23) 흑인이 백인이 되기 힘든 것처럼, 표범이 얼룩무늬를 바꾸기 힘든 것처럼 인간 본성도 바꾸기 힘듭니다.
사람이 삶을 바꾸기 힘든 것은 자신이 속한 조직 때문입니다. 가정, 친구, 회사, 국가와 민족, 마을, 이웃 등등. 조직에 속한 사람이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하면 당장 저항이 나타납니다. 특히 가족관계가 그렇습니다. 가족은 사고방식이나 모든 삶의 습관을 공유하려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주님을 영접한다면 큰 지각변동이 발생합니다.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사고 방식, 새로운 삶의 틀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예수 믿는 사람이 가족 시스템을 망가뜨렸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2:52-53의 말씀에 보세요. 일가족 다섯 식구가 제각기 대적자가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며느리! 신앙으로 인한 갈등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신앙 때문에 원수가 되었습니다. 유다 임금 아사왕은 신앙 때문에 모친 마아가를 폐위시켰습니다.(왕상15:13)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과 원수가 되었고(삼상25장), 다윗은 아들 압살롬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목적은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로 새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영적 투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갈등은 결코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일시적 과정에 불과합니다. 즉, 평화에 이르는 과정으로서의 갈등입니다. 주님의 목표는 갈등이 아니라 평화입니다. 그러나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에는 잠깐의 갈등, 검과 불화와 원수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를 목욕시키려면 떼를 쓰고 웁니다. 그러나 일단 목욕이 끝나면 단잠을 잡니다. 청소하는 일은 귀찮고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청소가 끝나면 상쾌합니다. 상처를 째고 꿰매는 것은 아픈 일입니다. 그러나 치료 후에는 평화가 옵니다. 잘못을 고칠 때에는 다툼도 있고 반발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 고쳐진 후에는 평화가 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될 것은 오히려 위장된 평화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갈등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정치적 갈등, 경제적 갈등, 문화적 갈등, 군사적 충돌, 생존의 경쟁... 이 모든 갈등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세상에 평화는 없습니다. 갈등이 존재할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위장된 평화”를 받아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평화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에만 주어집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믿기 위한 신앙의 갈등에 대해서는 문제 삼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실상을 알아야 합니다. 차라리 선한 투쟁을 거쳐서 진정한 평화에 이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천국의 평안, 빼앗기지 아니하는 평화를 위해 우리는 의로운 투쟁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신 劍의 의미입니다.
주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하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37-38) 얼핏 들으면 주님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에 부모나 자식, 형제나 자매보다 더 사랑해야 될 존재가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첫째로 사랑해야 될 대상입니다.
첫째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절대적 순서입니다.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인간관계는 이차적인 겁니다. 더 근본적인 관계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친구든, 민족이든, 가족이든, 혈육이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위에 존재할 뿐입니다. 인간은 생존의 기반을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존재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저는 날마다 길을 오가면서 이름 모를 들풀들을 봅니다.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강변에 누가 심지도 않았는데 수 많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생명의 경이로움을 봅니다. 팔당대교 아래쪽으로, 미사리 강변을 보세요. 생태의 보고입니다. 저는 저녁마다 황새, 왜가리, 물떼새, 각종 새들을 바라봅니다. 이 모든 생명체들이 하나님께 생존의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어요. 이 모든 것이 그저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모독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래요. 내 인생이 우연히, 자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모욕입니다. 우리 생명, 우리의 생존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지금도 그 사랑을 받고 있어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연히, 첫 번째로 해야 될 일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외아들을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첫 번째로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떤 불신 남편이 아내가 교회 가니까 예수를 나보다 더 사랑한다고 질투를 하고, 양단간에 결단을 내라고 했다고 합니다. 질투할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내 사랑하는 아내의 생명을 주시고, 내 가정에 복을 주신 것을 안다면 오히려 첫째로 사랑해야 될 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누구를 사랑하는 것보다 첫째입니다.
둘째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진리요 정당한 것 뿐입니다. 그러나 가족들이 요구하는 것들은 대부분이 이기적인 것들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님이 주신 계명이 뭡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생명 사랑, 영혼 사랑, 천국 사랑, 진리 사랑, 공의 사랑, 이것이 주님의 계명입니다. 그러나 가족들의 요구 사항이 뭡니까? 우선 내 욕심을 채워달라는 겁니다. 먹여 달라, 입혀 달라, 치장해 달라, 대접해 달라, 즐겁게 해 달라! 만일 이런 요구들을 다 들어준다면 범죄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요구보다 진리를 따르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진리보다 욕망을 따르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렇다면 가정 지옥을 만드시겠습니까? 가정 천국을 만드시겠습니까? 해답은 자명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두움과 불행은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진리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혈육이니까 용납하고, 불의인줄 알면서 도 가족이니까 따라갑니다. 사실상 인간의 범죄 행위 가운데 상당 부분이 가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생계형 범죄, 권력형 범죄, 부정부패의 이면에 보면 대개는 가족 관계가 있습니다. 혈육이기 때문에 부정과 부패와 사기와 거짓이 다 허용됩니다. 진리보다 혈육의 비리를 감싸는 비뚤어진 애정은 지옥의 것이며, 천국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타주의만 있고 이기주의는 없습니다. 혈육이나 인간 관계를 내세워 불의를 용납한다면 이는 하나님 나라의 원수입니다. 비록 부모나 형제나 자식이라 할지라도 진리 되신 주님의 앞에 우선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최대한 공경 받으시고 주님이 최대한 사랑받으시는 곳이 천국입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우선되는 곳이 천국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이 밝아집니다. 그런 사회는 질서가 세워지고 정의가 실현됩니다. 가장 불행한 사회는 하나님이 무시당하는 사회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각종의 권위가 무너진 사회입니다. 부모의 권위가 무너지고, 스승의 권위가 무너지고, 통치자의 권위가 무너진 사회는 가장 고치기 힘든 불행한 사회입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 위치에 있지 못한 사회는 어떤 사회든지 혼란스럽습니다. 무질서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 잘못된 가족 사랑보다 주님을 첫 번째로 사랑하는 가정이 복된 가정입니다.
목숨을 버리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37-39) 이 세상에 죽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살겠다고 발버둥 칩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내세우는 말이 뭡니까? “생존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생존권이란 말의 의미가 왜곡되어 있습니다. 언제부터 인가 우리 사회는 “생존권”이란 말과 “돈벌이”라는 말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돈 버는 것이 생존권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먹고 살아야겠다! 살아 남아야겠다! 내가 돈 버는 것을 막지 말아라! 그래서 그런지 생존권이란 말이 등장하는 곳마다 추악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국가도 없고, 질서도 없고, 양심도 없고, 도덕이고 뭐고 없고, 다른 사람은 죽든지 살든지 안중에도 없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주신 생존권은 아주 숭고한 것입니다. 이기적이지 않습니다. 서로의 생명을 살리려고 협력하는 생존권입니다. 내가 죽어도 남을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생존권입니다. 내가 살아 있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생존권입니다. 내가 살아 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풍성하게 되는 것이 생존권입니다. 정작 우리는 살려고 애쓰지 말고 죽으려고 애써야 됩니다. 그게 진정한 생존권입니다. 좀 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육신적으로 살아남는 것은 그다지 중대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결국은 죽습니다. 얼마간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은 다 죽어야 됩니다. 결국 죽을 육체의 생존권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진정한 생존은 영혼의 생존입니다. 이 영혼의 생명을 위해서 육신의 생명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육신의 생명도 귀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귀한 것이 영혼의 생명, 영생입니다. 바로 이 영생을 얻기 위해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살려고 애쓰지 말고,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즉, 주님을 위해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지고 가야 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누어 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주님이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는 오직 주님 홀로 지실 뿐 아무도 나누어질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누구도 주님과 같은 속죄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경통이나 관절염 걸린 것 가지고 십자가 졌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정적으로 힘들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십자가 졌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인류가 하나님께 받는 징계일 뿐입니다. 주님이 지라고 하신 십자가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감당해야만 될 의무들을 말합니다. 예배 생활, 기도 생활, 전도 생활, 봉사 생활이 다 십자가입니다. 특히 세상의 불의에 도전하고 싸우는 것도 중요한 십자가입니다. 주님을 믿는 것 때문에 때로는 욕을 먹고 온갖 불이익을 당합니다. 심하면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순교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위해 지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면 살고 십자가를 벗으려고 하면 죽습니다.
십자가의 원리는 내가 죽는 데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우선 다른 사람들이 살아납니다. 한 알의 곡식은 아무 것도 아니로되, 땅 속에 묻혀서 썩어지면 많은 수확을 내게 됩니다. 인간은 많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부수지 않고 죽지 않으면 남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몇 년 전에 시외버스가 강물에 빠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을 데리고 이 차에 타고 있었습니다. 사고가 나자 차는 강물에 빠지고 사람들은 차 안에 갇혔습니다. 이 사람은 얼른 창문을 열고 나와서 정신 없이 다른 사람들을 구해냈습니다. 한참 구조하다 보니 물은 차 안으로 차들어 왔고 자신의 초등학교 3학년 된 큰 아들이 물 속에 잠겨버렸습니다. 발을 구르며 찾았지만 결국 죽었습니다. 두 사람을 못 건졌는데 그 중에 하나가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이 분이 만일 다른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자기 아들만을 먼저 구해냈더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 사고 현장에는 경찰이 많이 와 있었습니다. 구경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뛰어들어 건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이 현장을 보셨다면 무어라 하시겠습니까? “모두가 잘났지만 내게는 합당치 않도다.” 자신을 죽이는 자만이 그리스도 왕국에 합당한 존재입니다. 자기를 죽이지 않고 살아 남고자 하는 자는 아무리 유능한 사람일지라도 주님에게는 합당치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세요. 주님은 유능과 무능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유식과 무식을 따지지 않고, 가진 것과 못 가진 것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다만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가 만을 따지십니다. 천국은 이타적 희생으로 세워지는 나라입니다. 모두가 다 남을 위해 자기를 죽이는 곳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사는 길입니다. 우리의 육체를 죽이면 우리의 영혼이 살아납니다. 내 자신이 죽으면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8)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우리에게 심각한 문제는 잘못된 자아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자아가 죽지 않습니다. 사사건건 내 주장만 내세웁니다. 남이야 손해를 보든지 말든지,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남이야 수치를 당하든지 말든지 내 주장만 내세웁니다. 남을 돌아보는 데는 한 없이 인색하면서 남이 자기를 돌아보지 않은 것은 수첩에 적어 놓고 섭섭해합니다. 내 이익을 위해서는 남의 목숨을 우습게 알면서, 남의 가슴을 아프게 한 일에 대해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는 기꺼이 목청을 높이면서, 남을 위해서는 변론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자아는 수 천 번 죽고 또 죽어도 아까울 게 없습니다.
자신을 죽이세요. 육신의 욕망을 죽이세요. 주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나라를 위해 자아를 죽이세요. 내 몸을 죽이면 주님이 살리십니다. 내 자아가 죽으면 우리 안에 주님이 사십니다. 내 고집이 죽으면 주님의 지혜가 살아납니다. 내 이기심이 죽으면 사랑이 살아납니다. 내 개똥철학이 죽으면 주님의 고상한 사상이 살아납니다. 내 욕망이 죽으면 주님의 선한 사업에 대한 의욕이 살아납니다. 내 소유를 포기하면 주님의 나라가 내 것이 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죽이면 대신 남들이 나를 사랑해 줍니다. 죽고 사는 법칙을 배우세요. 나 하나 죽음으로써 만사가 살아나는 것이 천국의 법칙입니다. 나 하나나 살고자 하여 모든 사람을 죽이는 것이 바로 지옥의 법칙입니다. 이 세상은 지옥입니다. 가정 지옥, 회사 지옥, 학교 지옥, 사회 지옥...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나만 살고자 하는 이기적 마음 때문입니다. 나 하나 죽고 모두가 사는 천국의 법칙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내 삶의 모든 현장에서 실천에 옮기세요. 내가 속한 모든 곳이 달라질 겁니다. 가정이 달라지고, 회사가 달라지고, 친구들이 달라질 겁니다. 요셉이 가는 곳이 축복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다니엘이 가는 곳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야곱 때문에 라반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나를 죽이는 성도들의 삶이 있는 곳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납니다. 바로 이런 법칙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검을 주러 오신 주님
마 10:34-39 / 이수영 목사
매년 맞는 성탄절이지만 그때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되새겨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 자신이 그의 오심에 대해 하신 말씀들을 통해 그 뜻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눅19:10에서는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첫째 목적이 그 무엇보다도 구원에 있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하고 아직 동거하기 전에 마리아가 이미 아이를 가진 사실을 알고 조용히 두 사람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한 말도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잃어버린 자를 찾아”라고 하신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의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그저 편안히 앉아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친히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다니시며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하신 것도 뭇 사람이 죄인이라고 수군거리는 부자 세리장 삭개오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셔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눅19:1-10). 여기서 우리는 성탄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중 하나로서 “전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막1:38-39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는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다니실 수 있는 모든 데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다니시며 그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삶을 사셨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들 또한 복음의 사각지대에 잃어버려진 채 있는 이들을 찾아 나서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전도사역을 우리의 최우선의 사명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성탄절이 이 전도의 사명을 새롭게 일깨우는 기회가 된다면 우리의 성탄절은 참으로 의미 있는 성탄절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은 그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우리에게 확실한 섬김의 자세와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다니시며 죄인을 구원하시는 사역을 어떻게 수행하셨는지를 아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마20:28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섬기며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까지 하신 것이 예수님의 복음전도사역이었고 구원사역이었던 것입니다. 전도는 입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섬김의 자세가 확실하게 있어야 하고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섬김의 자세와 희생을 다짐하는 사람들은 성탄절을 바르고 뜻 깊게 맞이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을 밝히신 예수님 자신의 말씀 중 오늘 특별히 관심을 기울여볼 말씀이 본문 중 첫 절의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일단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상당히 충격적인 말씀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평화의 왕”이신 우리 주님답지 않은 말씀 같이 들리기 때문입니다. 옛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하며 그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을 때 수많은 천군천사들이 찬송하며 외친 것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였습니다(눅2:13-14).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전파의 사역을 시작하시며 제일 먼저 가르치신 것 중의 하나가 실제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마5:9)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본문의 34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하신 말씀은 예수님 자신과 모순되는 말씀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일에 관해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이루고자 하신 일이 궁극적으로 참된 평화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가 우리에게 주러 오신 평화는 단순히 “투쟁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러 오신 평화는 죄의 극복, 악과의 전쟁, 잘못된 길을 지지하는 자들과의 대립관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검을 주러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까지 우리에게는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싸우지 않으면 안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족 간의 화목은 참으로 중요하고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상위의 가치를 실현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긴장과 갈등과 투쟁이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치체계에서 최상위에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것이며,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37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 하신 말씀은 바로 그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검을 주신다는 것은 적대세력이나 위협세력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세력에 의한 위협이 실재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에 대비하고 경계해야 함을 말합니다. 필요하면 싸워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검은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싸울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검을 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주의 군사들로, 하나님나라의 군대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주의 몸 된 교회를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과 맞서 싸울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엡6:11-12에서 “마귀의 간계를 대적하기 위한” 싸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사도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참된 평화는 마귀와 그 마귀가 이용하는 이 세상의 악한 세력들과의 싸움과 승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거룩한 전쟁을 하시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도 검을 주러 오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인류구원의 전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도의 전쟁, 성령께서 이끄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에 우리를 군사들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을 바로 인식하고 거짓 평화주의자들을 분별하며 이 전쟁을 위한 군병들로서의 소명에 바르게 응답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성탄절은 참으로 빛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검을 “주러” 오셨다는 말씀을 의미 있게 새겨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칼을 휘두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검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검은 강철로 만든 검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검을 말하되 성령의 검(엡6:17), 진리의 검, 말씀의 검,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계1:16, 2:16, 19:15, 21)을 말합니다. 그 검은 적의 심장을 찌르기 전에 먼저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야 하는 검입니다(히4:12). 그 검은 적의 목을 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머리를 밀기 위한 검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전도의 사명을 새롭게 하는 우리가 됩시다. 섬김과 희생의 자세를 새롭게 가다듬는 우리가 됩시다. 하나님나라의 군대,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들로서의 소명을 새롭게 하는 우리가 됩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파괴하러 달려드는 세력들이 일으키는 전쟁을 직시할 줄 아는 우리가 됩시다. 거짓 평화주의자들의 교활한 말장난을 분별할 줄 아는 우리가 됩시다. 우리 앞에 놓인 거룩한 전쟁을 수행할 각오를 다지며 성실히 대비하는 우리가 됩시다. 하나님의 뜻을 좇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며 성령의 지혜와 인도하심을 의지하여 두려움 없이 끝까지 싸우는 우리가 됩시다. 마귀와 세상권력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기고 여론을 조작하며 진리를 압살하는 데 성공한 것 같았지만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그 모든 악의 권세에 대해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그와 함께할 때 승리할 것입니다. 그 승리를 확신하며 오늘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멥시다. 본문 3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우리가 다시 사는 참 길입니다. 무릇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진리이고 우리의 전쟁의 무기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검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검을 피하지 맙시다. 그 검을 받아 높이 듭시다. 그 검으로 담대하게 싸우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완전한 위탁
마 10:34-39 / 성흥모 목사
우리는 주님의 고난 주간을 보내고, 부활주일을 보내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간다고 다짐하였지만, 지난주간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부활의 감격이 지금도 조금은 남아 있습니까? 따뜻한 봄철이 되었고, 들로 산으로 야유회도 나가고, 이런 저런 모임들이 있기에 따라다니고, 할 일도 많고 오라는 데도 많다보니 성금요일에 느끼던 신앙의 열정을 유지하기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예전에는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하는 것이 건전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회 생활의 하나였고, 매우 유익하고 잘 살 수 있다는 소망을 주었고, 심리적인 안정을 주었는데, 이제는 사회 상황이 하루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국민소득이 늘어가고 강력한 "기능적 대행물"(Functional Equivalent)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대표적인 것이 "여가산업"(Leisure Industry)입니다.
기독교 사회학자들은 대체종교(Alternative Religion)의 발달을 교회 성장 둔화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여가산업이란 한 사회의 경제적인 수준과 비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전 국토가 관광지화 되고 있으며, 전국에 휴양지가 널려있는데 골프장, 스키장, 수영장, 볼링장, 사우나, 한증막, 헬스 센터,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기만 하면 수많은 호텔과 모텔, 각종 위락 시설, 유흥시설이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휘황찬란한 모텔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봄이 되면 봄꽃놀이 휴가, 여름이 되면 하기 휴가, 가을이 되면 단풍관광, 겨울 눈꽃 축제 전천후 휴가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집집마다 TV가 완전히 보급되었는데, 기존 공중파 방송만이 아니라, 케이블 방송에 이제는 위성 방송까지 엄청납니다. 전에는 몇 개의 채널이었는데 이제는 수백 개의 채널로 볼거리가 많아졌습니다. 야외로 놀러 야외로 나가지 않는 사람들은 TV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주말의 시청 시간을 조사하였는데 평균 7시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사람들을 교회에 가지 못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한국 갤럽에서 조사 분석한 자료가 있는데, 비종교인들이 종교를 믿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대답한 것이 32.2 %로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한 영혼을 귀중히 여기고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로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정신을 차리고 전투적인 자세로 임하지 않으면 우리 도시를 덮고 있는 악한 영들에게 먹혀 들어갈 것입니다. 악한 영들의 간악한 꾀를 무력화시켜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많은 설교를 들었지만"이라는 짧은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몇 해 전 "영국 주간"(The British Weekly) 신문에 어떤 이가 투고한 글로 인하여 대단한 물의가 일어났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들은 설교를 대단히 중요시하고 그것을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나는 거의 빠짐없이 30년 이상을 교회에 다닌 사람으로 3천 번 가량의 설교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대단히 놀라운 사실 한 가지를 발견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 단 한 개의 설교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목회자들이 설교 말고 다른 일에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는 것이 더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런 글이 실린 후 몇 주에 걸쳐 별의별 반응과 응답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신문에 실렸고, 그 주간 신문은 많은 사람들의 토론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보낸 다음의 글이 신문에 실리면서 모든 소리와 소문들은 잠잠해졌습니다. "나는 결혼한 지 30년이 된 사람으로 그 동안 32,850번의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아내가 요리해서 차려준 음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내가 그 많은 음식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먹은 음식의 식단을 단 한 가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나에게 그 음식들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오래 전에 굶어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재미있는 말씀을 하셔서 관심 있게 들은 날도 있었고, 어떤 날에는 너무나 딱딱하여 제대로 듣지 못한 때가 있어도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인하여 자라날 수 있었고,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설교한 제목을 기억하라고 숙제를 내주는 분도 있지만, 혹시 지난주의 설교 제목은 기억할 수 있어도 지지난 주의 설교 제목은 기억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 것입니까? 오늘의 말씀은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의 양식으로 받아들이고 지나가지만 우리는 그 힘으로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성경공부의 하나로 자리잡은 베델성서 연구와 크로스웨이 성경 공부의 결론은 성숙한 제자 곧 그리스도인은 "섬김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지어주셨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하나로 합쳐놓았습니다. 사랑이란 구체적으로 섬김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이웃을 섬기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따로 있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은 하나의 계명이라는 몸체에 붙어 있는 두 개의 팔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읽을 때에 참으로 부담이 되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완전한 위탁"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에게 모두 맡기고 살아갈 때에 승리할 수 있고, 주님은 내 안에, 나는 주님 안에 거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작은 예수처럼 살아가는 것이요, 우리의 하는 모든 일들이 주님의 사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요, 성도들입니다. 주님만을 신뢰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일평생 주님을 믿는다고 하였는데 우리 주님으로부터 "너는 나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태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고, 누가는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완전한 위탁이 이루어져야 주님을 따라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주님을 제대로 따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1. 완전한 위탁자는 하나님만을 사랑합니다. (34-37)
34절-3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하셨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이 말씀을 읽어보면 좀 부담스러운 말씀인 것이 사실입니다. 먼저 말씀드릴 것은 이 말씀은 구약 미가7:6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가7:6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비슷한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분쟁과 불화를 주시려고 하신 것은 아니라, 불가피한 결과라는 점입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데 있어 철저한 헌신과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쉽게 오해되고, 오용되기 쉬운 교훈이기도 합니다. 신앙적인 신념이라는 것은 혈연의 힘보다 강한 것이 사실인데,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존귀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위험성도 낳는 것입니다. 정당하게 이해되고 적용될 때에는 최고의 존귀함을 가질 수 있지만, 오해되고, 오용될 때에는 최악의 위험성을 지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섬기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섬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37절 말씀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병행 구절인 눅14:26에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셨으며 막10:29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하여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들이 가족에 대한 사랑을 무조건 금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는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8-90% 정도의 우수한 사랑이 아니라, 100% 전부인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세상의 어떤 인간관계에 일어나는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이요, 우선하는 것이요, 절대적입니다.
우리들이 부모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사랑하고, 또 자식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주신 사랑입니다. 이러한 인간적이고, 혈연적인 사랑이 아주 중요하고 이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결단의 순간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섬김의 훈련과 사랑의 훈련은 가정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험한 사회를 살아가는 위대한 원동력은 바로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것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존 번연은 그의 가족을 위하여 신앙적인 양심을 버리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위하여 형무소에 들어가야 하는 결단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가족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마치 몸에서 살을 뜯어내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번연은 주님을 위하여 12년 간 감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마지막 예수님과 가족 중에 하나만을 선택하라면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만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다 주님을 위한 것이요, 주님이 사용하여야만 합니다.
2. 완전한 위탁자는 자기의 십자가를 집니다. (38)
38절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십자가가 무엇을 상징하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형대입니다. 십자가형은 유대인의 법이 아니라, 로마의 법이었습니다. 사형수는 자기가 죽을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가야만 합니다. 얼마나 기막히는 일입니까? 갈릴리의 유대인들은 로마에 납세 반대 투쟁을 벌이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죽어간 수백 명의 젊은이들이 메고 가던 십자가를 잘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하는 고난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었는데, 이 세상에서 영광의 길은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잘 살고 번영을 누리고 번성하려는 욕심은 사실 사탄의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영광이란 하늘 나라에 가서 누려야 할 것인데, 이 땅에서 칭찬 받고, 인정받고, 영광을 누리려고 한다면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살면 얼마나 산다고 하늘 나라에서 누려야 하는 영광을 고작 이 땅에서 누리려고 할 것입니까? 예수님은 한번도 이 땅에서 영광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알맞은 십자가란 없는 법입니다. 십자가를 고르는데 목걸이나 악세싸리 정도의 그런 적고 빛나고 멋진 십자가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이지 예수님이 지신 대속의 십자가, 만민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십자가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십자가를 지고 가야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온 것이 아니라면 건성 따라다닌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따르는 척 하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피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피한다고 하면 이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이라도 여러분이 원한다면 십자가를 피할 수도 있고, 생각하지 않고 주님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피할 수도 있고, 심지어 저항할 수도 있고, 아니면 십자가에 내 몸을 내어 맡기고 기쁘게 지고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당신의 피를 흘리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면서 값으로 사셨습니다. 당신의 흘리신 피 값을 주시고 우리를 멸망의 자리에서 구원의 자리를 옮겨주셨고, 그 피로 사셨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셨습니다.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하는 성도들이 주님을 위해 핍박을 받고 모욕과 천대를 받고 수치와 욕을 달게 먹고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억울하게 욕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말없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멸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유쾌한 일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순결한 삶을 살아가며, 남을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하며 나 자신을 말씀으로 쳐서 복종시키면서 주님을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십자가는 결코 사치품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치욕을 당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하여 죽은 일입니다. 우리의 적은 자존심도 못박아야 버려야 합니다. 죽은 사람은 꼬집어도 아프지 않습니다. 침이 뱉어도 더러울 것이 없습니다.
조오지 뮐러(G. Muller)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당신의 비상한 봉사에는 무슨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라고 할 때에 "나는 나에게 대하여 죽은 날이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뮐러는 자신에게 대하여 죽었습니다. 자신의 정욕을 죽여야 합니다. 칭찬과 비난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출세와 명예에 대하여 죽어야 하고, 물질과 소유욕도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라는 헬라어는 스타우로스( )라는 말인데, 사실 이 십자가라는 의미조차 없는 단순한 "말뚝"이었습니다. 그저 수직으로 세워놓은 말뚝입니다. 말뚝이다 보니 대패질 하나되어 있지 않는 거칠기 그지없는 말뚝입니다. 우리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제자들이 아주 미화시키고 처참하고 끔찍한 부분들은 다 생략한 기록입니다. 차마 사랑하는 선생님의 죽음이기에 처참한 부분은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완전히 발가벗긴 알몸뚱이로 말뚝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다만 심한 멸시와 모욕이라는 말로 처리하지만, 사람에게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비열한 짓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은 위선의 탈을 쓰지 않습니다. 결코 변명하거나 책임전가하지 않고 고상한 척 하지도 않고, 거룩한 척 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갈보리의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는 부활에 이르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빌1:29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며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어떤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제자가 아닙니다. 남달리 헌신하는 특정한 몇몇 사람에게만 붙여주는 말이 아닙니다. 특별한 성직자나 선교사가 된 사람만이 제자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무결하게 예수님을 닮았다고 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 사람들이요, 제자로서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재미에 취하여 앉아 있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막10:45이라고 할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최고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려 오셨으며, 주시기 위하여 오셨는데, 우리는 왜 더욱 섬김을 받으려 하고 더 얻으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3. 완전한 위탁자는 목숨을 다합니다. (39)
39절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목숨을 잃는 자는 목숨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 맡기고 나가야 합니다. 나도 살고 주님도 사는 방법은 없습니다. 내가 죽어야 주님이 살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내 목숨을 지키고, 내 체면도 유지하다가 주님 앞에 서겠다고 하지말고, 목숨을 걸고 믿어야 합니다. 목숨을 걸지 못하니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안 되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영성이 부족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걸지 않으니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 주님의 제자라 하면서 부분적인 위탁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때로 조용히 묵상하면서 주님을 생각해봅니다. 주님은 이 시간 나에게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그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주님이 원하시는 사역이 되기 위하여 자 자신을 주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지난주간에 노회 교역자를 위한 세미나가 설악동 추양 기념관에 있었습니다. 추양은 한경직 목사님의 아호입니다. 한목사님의 여러 활동하신 생전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한목사님의 1주기 추모식에서 낭독한 시의 일부가 동상 앞에 새겨 있었는데, 시의 전부를 찾고 싶어 영락교회 홈페이지를 뒤졌더니 있었습니다. 시인 고 훈 목사님의 시 "백목련 부활 꽃 피울 때"라는 시의 일부를 새겨놓았습니다.
"아무 말 없으셔도/ 무슨 일 안하셔도/ 당신은 우리의 힘이셨습니다. /한 사람을 만인만큼 소중하게/ 만인을 한 사람 대하시듯/ 어떤 요구에도 거절 못하시고/ 누구의 의견에도 손들어주시고/ 단 한 사람에게도 섭섭함 주신 일 없으신/ 한국의 성자여/ 한국의 작은 예수여 //
모든 것 가지고도/아무 것도 없으신 가난한 목자/ 아무 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 다 가지신 사랑의 목자/우리가 오늘 여기 이토록 슬픈 것은/당신이 주님 곁에 가심이 싫어서가 아니요/ 당신을 영원히 우리 곁에 두고 싶어서도 아닙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당신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당신 같은 스승은 하나도 없고/ 당신 같은 목자는 하나도 없는/이 텅 빈 세상이 너무 슬퍼서입니다."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당신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고/ 당신 같은 스승은 하나도 없고/ 당신 같은 목자는 하나도 없는/이 텅빈 세상이 너무 슬퍼서입니다//라는 말에 얼마나 충격적인지 모릅니다.
오늘 완전한 위탁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마지막 하나 예를 든다면 이런 위탁이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님은 제자훈련을 마치고 나가려는 목사님들과 한 성경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옛날 과부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가던 장면을 연상하면서 룻이 고백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거기에 "어머니"라는 말 대신에 "예수님"을 넣어서 함께 읽었습니다.
룻기 1:16절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예수님을 떠나며, 예수님을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예수님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예수님을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오늘 이런 헌신과 결단을 해야 합니다. 정말 지독한 결심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결단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끊임없이 싸우는 교회
마 10:34-39 / 김홍도 목사
여러분이 기도해 주셔서 하와이에서 두 집회를 모두 큰 승리 가운데 끝내고 안전하게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신체의 어느 부분에도 다 암병이 발생할 수 있으나 절대로 암병이 발생하지 않는 신체의 한 기관이 있는데 그것은 곧 심장입니다. 심장에 암세포가 발생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이유는 심장은 단 일 초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활동하고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살아 있는 교회, 즉 끊임없이 움직이고 원수와 쉬지 않고 싸우는 교회는 병들지 않고 계속 성장 발전하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환상 중에 한 교회의 지붕 꼭대기를 바라보니까 마귀들이 할 일이 없어서 지붕에서 깜빡깜빡 졸고 있더랍니다. 그 안을 들여다 보니까 교인들이 기도도 하지 않고 전도도 하지 않고 마귀와 싸우지도 않더랍니다. 그런데 또 한 교회의 지붕 꼭대기를 보니까 마귀들이 어쩔 줄 모르고 왔다갔다하며 안절부절하고 활동하더랍니다. 그 안을 보니까 교인들이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마귀와 영적 싸움을 하는 교회더랍니다.이와 같이 성령 충만하여 살아 역사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활동하며 영적 싸움을 쉬지 않고 계속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라고 부르고 예수님 탄생하실 때에 천사들이 “하늘에는 영광, 땅에서는 평화”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 말씀에는 그와 반대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그리고 또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이 아니라 싸움을 붙이러 오셨고 식구들끼리도 불화하고 원수가 되게 하려고 왔노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 믿고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마귀의 지배 밑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흑암에 살다가 빛으로 옮겨진 사람이 된 것이기 때문에 빛과 어둠이 충돌되고 하나님과 사탄이 충돌되는 일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화가 싫고 충돌이 싫다고 해서 영생, 천국을 포기한다면 결국 영원한 평화와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평화가 좋다하더라도 죄와 타협하고 마귀와 타협하면서 평화를 원한다면 결국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며 영원한 불행과 하나님과의 화평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고난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마귀와 싸우고 죄와 싸우고 육신의 정욕과 싸우는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많은 핍박과 수치와 오해를 각오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싸움이 싫다고 육신의 안일한 생활을 택한다면 결국 일시적 안락을 위해서 영원한 멸망과 고통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6절에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하시고 이어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5절에 보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하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찬들은 날마다 싸워야 하고 또 이겨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과 싸워야 할까요?
1. 죄와 싸워야 합니다.
장마철에 강물을 보면 시뻘건 물에 생명 없는 물건들과 죽은 동물들은 물결 따라 저항없이 둥둥 떠내려 가지만 생명 있는 물고기는 그 거센 물결과 싸우며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죄에서 구원받고 새생명을 가진 크리스찬들은 죄와 싸우고 불의와 싸워야 합니다. 저항없이 세상 물결 따라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으로 떠내려 가는 사람은 참 크리스찬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찬이란 사람이 술좌석에 가면 홀짝홀짝 술도 마시고 투전판에 가면 토닥토닥 고스톱이나 치고 친척들이 모여 제사상 차려 놓고 절하는 자리에서는 욕 안 먹으려고 꾸벅꾸벅 절을 하면서 아무 저항이나 투쟁이 없이사는 사람은 참으로 구원받은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예수님은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저항이 없고 투쟁이 없이 고난을 요리조리 회피해가며 살아가는 사람은 참된 크리스찬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러시아에서 공산당 혁명 당시에 나라를 둘러엎고 수백만 수천만 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 동방정교 신부들은 몇 일씩 회의를 열고 안일하게 앉아서 주교들과 신부들의 가운의 길이가 무릎 밑으로 몇 센치 내려가느냐 올라가느냐를 놓고 논쟁하고 있었다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마태복음 10장 37~39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마귀와 싸워야 합니다.
영혼이 거듭나서 영안이 조금이라도 열린 사람은 매일 매일, 순간 순간 사탄 마귀가 저항해 오고 핍박해 오고 유혹해 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때에 다투는 것이 싫다고, 욕먹는 것이 싫다고 마귀와 타협하거나 고난의 길을 피해 간다면 영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피해 가지 말고 타협하지 말고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장 7~8절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3~5절에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견고한 진을 깨뜨리고 파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믿음을 무너뜨리는 이론을 파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는 생각을 파하여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마귀의 저항이나 방해, 유혹이나 시험을 못느끼는 사람은 아직 초신자이거나 거듭나지 못했거나 영력이 약한 사람입니다. 마귀에게 대항하고 대적하고 싸워야지 타협하면 안됩니다.
3. 성경에 배치되는 이단과 싸워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고 믿음을 무너뜨리는 이단신학 사상이나 비진리는 대항해 싸워야 합니다. 교회를 파괴하고 수많은 영혼을 멸망시키는 사탄의 가장 큰 도구는 바로 이단신학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2서 1장 9~11절에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성경 진리 안에서 하지 않고 지내쳐 딴소리하는 사람들은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도 믿지만 율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단자들에게 얼마나 강경한 말씀을 했나 보십시오. 갈라디아서 1장 6절~9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단 교수 한 사람을 척결하는 것이 교회 100개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구라파나 미국에서 이단신학을 무심하게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수천 수만 교회가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에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일군들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단행할 때 로마 천주교가 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모금하려고 면죄부를 팔면서 비싼 것을 사면 많은 죄를 용서 받고 작은 것을 사면 작은 죄를 용서 받는다고 혹세무민하고, 심지어 헌금통에 돈을 넣으면 연옥에 떨어진 부모라도 천당에 보낼 수 있다고 전혀 성경에 위배된 일을 하는 것을 비롯해서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Witenberg) 대학 벽에 써 붙이면서 이단사상과 싸울 때 1527년 4월 17일 황제 카알 5세가 주도하는 보름스(Worms) 의회에 출두 명령을 받자 주위에서 가지 말라고 강권했습니다. 가면 출교 당하게 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에 루터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보름스에 있는 모든 집 기왓장들이 마귀가 되어 나를 공격할지라도 나는 그 자리에 서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루터의 목숨을 건 투쟁 때문에 중세기의 흑암의 장막을 걷어치울 수가 있었고 우리도 복음을 깨닫고 구원받을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이단신학과 비진리와 대항해 싸우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종교 개혁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개신교)를 “저항하다, 반항하다”의 뜻을 가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릅니다. 마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며 아무에게도 공격을 받지 않는 목사는 잘못되었다. 그것은 그가 올바른 교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증거이다. 왜냐하면 교리는 공격을 받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우리가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드는 목사가 되지 않도록 지켜 주시옵소서.”
4. 잘못된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합니다.
육신의 본능과 정욕대로 따라가면 결국 타락하고 마귀의 종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또 고린도전서 9장 25, 27절에서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못박힌 정욕이 다시 살아 발동하지 못하도록 날마다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합니다.
이런 영적 싸움을 싸우려면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무기는
① 기도입니다.
기도가 없이는 절대로 마귀를 이길 수가 없고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영적 싸움에 대해 에베소서 6장에서 말씀하시다가 6장 18~19절에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했습습니다. 마귀는 무릎 꿇는 신자, 뜨겁게 기도하는 교회를 무서워 합니다. 기도가 없이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② 말씀입니다.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검이 없이는 마귀의 시험을 받을 때마다 “기록되었으되” 하고 성경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기억해야 됩니다.
③ 예수의 피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피를 믿고 증거하는 것을 제일 무서워 합니다. 유월절 때 양의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른 집에 죽음의 사자가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우리 심령이 믿음으로 발리워 있을 때 결코 마귀가 이기지 못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서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고 했습니다. 자기 몸만 사리고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면 영적 싸움에 큰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불의와 죄를 보면서도 의분을 갖지 못하면 참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몇 주 전 전시형 목사님이 단테의 신곡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단테가 실제로 지옥의 광경을 보고 쓴 것이지 하나의 문학 작품이 아니라고 봅니다. 단테는 캄캄한 가운데 신음하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손바닥을 치며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들은 누구며 저 소리는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지옥의 사자는 대답하기를 “이 비참한 광경은 명예도 얻지 못하고 비방도 듣지 않으며 인생을 마친 자들의 비명들이다. 하나님께 충성도 않고, 항거도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하던 사악한 천사들의 무리 속에 뒤섞여 있던 이들. 하늘은 더렵혀질까봐 이런 자들을 쫓아냈고 지옥에서도 받아 주지 않으니 이는 사악한 자들이 오히려 뽐내려 할 것이기 때문이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마 10:40-42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냉수 한 그릇이라도”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여러분! 지난 목요일은 갑자기 날씨가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갔던 너무나도 추운 날이었습니다.
저는 사무실에 앉아서 말씀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똑똑 노크를 하는 겁니다. 들어오시라 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한 걸인이 밥 한 그릇만 얻어먹을 수 있느냐고 부탁하는 겁니다.
그런데 식당 냉장고를 살펴보니 공교롭게도 남아 있는 밥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밥이 없으니깐 밑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따스한 컵라면이라도 사서 드시라고 돈을 좀 드리려고 했더니 사양하면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 갈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그 분께 따스한 커피 한 잔을 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요즘에는 일산 지역 이 교회 저 교회 다녀 봐도 자기 같은 걸인을 맞아주는 곳이 없다는 겁니다.
특별히 추운 한파에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까지 겹쳐서 그나마 맞아주던 곳들도 아예 구제의 손길 자체를 끊어버려서 식사 한 끼 때울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서울에 있는 ‘밥퍼’ 같은 곳을 찾아 가야겠다고 하소연하는 겁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이 분이 지금 돈 좀 많이 달라고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걸인 분들이 원하는 것은 밥이 아닌 돈이었고, 또 그걸 받아서 밥 대신 술을 사먹는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목요일 만난 걸인 분은 좀 달랐습니다. 저는 따스한 커피 한 잔을 드리고 그 분과 대화를 나눈 후에 제 마음의 표시니까 밑에 내려가서 컵라면이라도 사서 드시라고 돈을 다시 한 번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부득불 안 받겠다고 사양하시는 겁니다. 저는 솔직히 돈을 끝까지 받지 않는 걸인은 처음 봤습니다. 더더욱 저를 놀라게 했던 것은 그 분이 봉투를 달라면서 작지만 교회에 헌금을 하고 가시겠다는 겁니다.
이번에는 제가 극구 사양을 했습니다. 이러시면 안 된다고... 가까스로 그 분을 보내드리고 나서 저는 한 동안 멍멍한 기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걸인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서 늘 대하곤 했던 제 자신을 질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성아! 너 진짜 목사 맞니? 그러고도 네가 진정 주의 종이라고 할 수 있어?’
그 순간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10장 42절 말씀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얼마나 약속하고 싶으시면 "결단코"라는 단어까지 쓰셨겠습니까?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반드시 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추운 겨울철에 여러분 주변을 돌아보시면서 나를 섬겨줄 사람만 찾지 마시고, 내가 섬겨야 할 그 누군가를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꼭 돈만이 아닌 "따스한 차 한잔을 마시면서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줌으로써 서로 간에 닫혔던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듯이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복을 더하여 주십니다. 남편과 아내! 목사와 성도! 우리 모두는 처음엔 서로 전혀 알지 못했던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기에 주 안에서 비로소 성도의 교제가 시작된 겁니다. 따라서 냉수 한 그릇, 따스한 차 한잔은 너무 소중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자녀라면 예수님처럼 섬김과 사랑의 교제야말로 천국 가는 그날까지 계속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비록 전도 현장으로 파송 받아 나가는 제자들에게 주신 격려의 말씀이지만,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는 오늘날 우리 시대를 경고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을 격려하셨습니다. 40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는 제자들을 파송하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는 예수님을 파송하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이해하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파송하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파송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가는 길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요,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있는 지금 이 곳 교회는 성도를 세상으로 파송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사랑 가운데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곳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우리 모두를 세상으로 다시금 파송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파송 받아 나아가는 세상은 결코 평탄한 곳이 아닙니다. 더욱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길은 더더욱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함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쯤해서 질문 하나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교회에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지금 교회에서 집과 직장으로 파송받는 것입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다 이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가시게 되는데, 그 발걸음이 집으로 되돌아가는 발걸음입니까? 아니면 집으로 파송받아 가는 발걸음입니까?
우리들 대부분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 교회에 나옵니다. 따라서 우리 삶의 본거지를 집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다니러 오는' 곳이고, 예배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의 본거지는 집이 아닌 '교회'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녀를 교회로 불러서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시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교회에서 받은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가지고 우리 모두를 삶의 현장으로 파송하십니다. 집으로 파송하시고, 일터로 파송하십니다.
따라서 이를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우리가 주일에 교회에 오는 것은 파송 받은 곳에서 파송하는 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일터로 가는 것은 다시금 세상으로 파송받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십니다. 세상은 그들이 평생 동안 살아야 할 곳입니다.
지금은 비록 예수님으로부터 훈련받는 과정이기에 짧은 기간 동안 전도인의 일을 하다가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오지만, 예수님이 떠나가시면 그들은 평생을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평생을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세상이 그들의 본거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파송 받아 간 곳 - 복음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파송 받아 간 곳에 불과합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더 많다 할지라도, 그곳은 예수의 이름으로 파송받아 간 곳일 뿐, 그곳이 우리 신앙의 본거지는 아닌 것입니다.
비록 일주일에 단 하루이지만, 그것도 예배드리는 시간이 고작해야 2-3시간에 불과하지만, 교회가 본거지이고, 본거지인 교회에서 더 많은 시간을 살아야 할 가정과 일터로 파송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삶의 현장으로 파송받은 우리는 바로 그곳에서 우리를 파송하신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주님의 사랑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러라고 우리를 삶의 현장으로 파송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삶의 현장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요 사신으로 파송받았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파송받은 저와 여러분이 가정에 있기에 그 가정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넘쳐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파송받은 우리가 직장에 있기에 그 직장은 한량없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파송받은 우리가 삶의 현장에 있기에 저와 여러분으로 말미암아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1절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우리가 누구를 영접하느냐 하는 것에 따라 그에 합당한 상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사람은 그 선지자가 받을 상을 받게 되는 것이고,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사람은 그 의인이 받을 상을 받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 예를 열왕기상 17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북 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3년 반 동안이나 비가 내리지 않을 거라고 예언을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때부터 3년 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가뭄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까마귀를 통해서 먹을 것(떡과 고기)을 공급해 주셨고, 그릿 시냇가에 흐르는 물을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자 결국 그릿 시내에도 물이 말라 버렸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시돈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한 과부를 통해 그를 공궤하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이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르밧으로 가서 한 과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엘리야가 만난 과부는 자신을 공궤할 만큼 부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마지막 남은 밀가루를 가지고 떡을 만들어서 아들과 함께 나눠 먹고는 죽으려고 한,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과부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엘리야 선지자는 그런 과부에게 "떡과 물을 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너무 가난해서 마지막 남은 떡을 먹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과부는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엘리야에게 설명합니다.
그런데도 엘리야 선지자는 13절에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14절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엘리야의 말이 너무 황당하고 화가 치밀어 오를만큼 무리한 요구임에도, 사르밧 과부는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의 말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자기들 먹기에도 부족한 떡을 엘리야에게 대접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말이지 엘리야의 말대로 엘리야 선지자뿐 아니라, 사르밧 과부와 아들까지도 가뭄이 끝날 때까지 먹을 것 전혀 걱정하지 않고 풍성하게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뭡니까? 누르고 넘치도록 복을 받았다는 겁니까? 아니지요? 엘리야의 말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고 순종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누르고 넘치도록 복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선지자를 대접한 사람에게 선지자의 상을 베푸신 하나님의 복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릿 시냇가에서 엘리야에게 떡과 고기를 공급해 주신 것처럼,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공궤한 사르밧 과부에게도 엘리야에게 주셨던 똑같은 복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가뭄이 끝날 때까지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누르고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의 이름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잘 대접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은 여기 있는 이대성 목사를 잘 대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여러분을 찾아가면, 그를 맞아들이는 것이 마치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처럼 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사람을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찾아오는 사람을 주님을 영접해 드리는 마음으로 영접하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지만, 주의 이름으로 찾아오는 사람을 괄시하는 사람은 주님이 직접 찾아가셔도 역시 괄시할 게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에는 이미 주님을 모실만한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이름으로 찾아가는 사람을 마치 주님을 맞아들이는 그런 심정으로 기쁘고 즐겁게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여러분 마음은 이미 주님을 영접한 아름다운 마음이 되고, 여러분 모두에게는 주님을 영접한 자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주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4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영접에 대한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41절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일하는 일꾼들을 잘 영접하라는 말씀이었다면, 42절 말씀은 작은 자 즉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을 영접하는 자에게도 상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작은 자'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41절에서 말한 선지자는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런 사람을 영접하는 것은 솔직히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도 못하고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1도 일어나지 낳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작은 자'를 영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높아지려고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친구를 사귈 때에도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 저 사람과 사귀면 내 체면이 높아질 수 있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보다 나은 사람과 사귀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친절히 대합니다. 좀 더 가까이 사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과 사귀면 도리어 내 체면에 손상이 되거나 내가 낮아진다고 생각하면서 상종하기를 꺼려합니다. 잘 사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이 나온 게 아닙니까? 끼리끼리 사귀고, 끼리끼리 논다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인간의 못된 심성을 엄중하게 꾸중하십니다. 오히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낮고 천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귀중히 여기고, 그들을 영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몸소 본을 보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존하신 하나님이셨음에도 낮고 천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분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예수님을 이렇게 말합니다. 빌립보서 2:5-8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를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항상 가장 연약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갖고 계십니다. 심지어 작은 자 하나를 늘 당신 자신과 동일시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작은 자 하나를 자신과 같이 여기신다는 말씀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마태복음 25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 의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5-36절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의외라는 듯이 질문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의인들을 향해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4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세계적인 암전문의인 원종수 박사님의 간증문 “Are you a real christian?" 속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열여섯 살 아이가 날마다 새벽을 깨우며 어머니랑 새벽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새벽 기도를 마친 후 어머니가 어떤 할아버지를 모시고 온 겁니다.
그 할아버지는 역 앞에서 지푸라기를 깔아놓고 지내시던 장님이셨는데, 저는 그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기쁜 마음보다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 들었습니다.
"종수야, 이 할아버지 목욕시켜 드려라." 그때 할아버지 옷을 보니 땀에 찌들고, 변 보시고 그냥 주무시니까 때가 쩔어서 옷이 마치 단단한 갑옷같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차마 도저히 손으로 만지지 못하고 나무 막대기로 옷을 벗겼어요.
할아버지의 몸을 보니 몸에도 하나 가득 갑옷이 끼어 있는 겁니다. 그래도 어머니가 하라고 하시니 꾸욱 참고서 할아버지 몸을 깨끗이 씻어 드렸어요...(중략)
그런데 그 할아버지를 모시고 그렇게 그 겨울을 지나는데 우리 집에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기도하는데 갑자기 우리 집에 쌀을 가져다주라고 해서 쌀도 놓고 가고, 어떤 사람은 지나 가다가 미역도 놓고 가고, 또 어떤 사람은 김치도 놓고 가고...
그러면서 그 추운 겨울을 따스하게 지내고 그 할아버지에 대해선 까마득히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 유학생들 집회가 있었는데, 예배드리기 10분 전 하나님 앞에 기도드릴 때에 갑자기 눈앞에 환등 슬라이드처럼 다섯 장면이 지나가는 겁니다.
할아버지 몸을 씻겨드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첫 번째가 제가 나무 작대기로 할아버지 옷을 벗기는 장면인 겁니다. 얼마나 창피하던지요...그 때 예수님께서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이렇게 속삭이시는 겁니다. "종야, 그게 바로 나란다..."
그 순간 저는 예수님께 이렇게 투정부렸지요. ‘예수님! 진작에 알려 주시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제가 나무 막대기로 할아버지 옷을 벗기지는 않았을 거 아닙니까?’
저는 원종수 박사님의 이 간증을 다시금 곱씹고 있었는데 그 때 우리 주님께서 저에게 바로 이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 말씀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후로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의 제자라면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나는 형제 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을 대접하고 돌보아 주는 것이 곧 우리 주님께 하는 것임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데는 뭐 대단한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42절에 보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냉수 한 그릇” 그런데 여러분? 왜 예수님은 그냥 물 한 그릇이라 하지 않고, ‘냉’(冷)이라는 단어를 붙이셨을까요?
그것은 물을 주는 자 입장이 아니라 받는 이의 입장에서 효용성을 더 강조하신 것이 아닐까요? 받는 이가 정말 시원하게 마실 수 있는 것까지 염두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추운 겨울 지난 목요일에 만났던 그 걸인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따스한 커피 한 잔이었던 겁니다.
그동안 교회가 복음 사역을 나름 열심히 해 왔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제 좀 더 신중하게 복음을 받는 이의 입장까지 헤아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복음은 전하기만 하면 됐지, 그 다음은 받는 이들의 책임이라는 사고는 없었는 지 반성해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의 실천 현장은 어디입니까? ‘일상’(日常)이 제자도의 실천 현장입니다.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더 깊은 도전을 주는 부분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상과 연결되는 현장이 바로 작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행위가 실천되는 일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상은 한자상으로 ‘반복되는 바쁜 삶에서 사람으로서 행할 도를 행하는 것’이라는 특이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마땅히 행할 것’이 세속과 분리된 종교적 영역이 아니라 ‘매일의 반복되는 삶의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예수님께서는 제자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냉수 한 그릇’입니다. '냉수 한 그릇'을 제공하는 것은 누구나가 다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또 남을 도와줄 만한 그 어떤 힘이나 건강이 없어도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일은’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무언가 가지고 있어야만 남을 도와줄 수 있는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내게 있는 바로 그것을 주면 되는 겁니다.
그 순간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단 하나!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를 보고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면 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마음을 품고서 그 마음을 삶속에서 실천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를 향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우리가 뭔가를 가졌느냐 가지지 않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베푸는 지극히 작은 섬김이 사랑 없이 주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귀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42절 말씀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습니다. (시작)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아멘.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답게 그 누군가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주님은 반드시 잊지 않으시고 더 크고도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제 후로는 주님의 참 사랑을 받은 진짜 제자답게 ‘냉수 한 그릇’을 제공하는 아주 작은 사랑부터 실천해 나감으로써 하나님을 진정 기쁘시게 해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