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홍무, 영락(명의 창립황제 주원장 및 영락제 시절)때의 대이민은 파란만장하며, 슬프고 길이남을 역사적 대사건이다. 지금은 시간적으로 근 600년이 흘렀음에도, 그들이 옮겨간 비장한 이야기는 아직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각지의 후손들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노래는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묻노니 나의 조상은 어디에서 왔는가?
산서홍동의 대괴수(큰 홰나무)에서...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산서홍동의 노관와(오래된 황새의 집)라네...
수백년동안 이 민요는 중국의 산동, 하남, 하북, 북경, 안휘, 강소, 절강 일대에서 연면히 전해져 내려왔고,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가가호호 부르지 못하는 사람이 없다. 명나라때의 이민역사는 그의 후손들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살아서 남아있는 것이었다.
<홍동현지>기록에 의하면, "대괴수는 북쪽 광제사 왼쪽에 있다. <문헌통고>에 따르면, 명나라 홍무, 영락제 때, 산서의 백성들을 북경, 산동, 하남 등의 곳으로 강제이주 시켰는데, 나무 아래가 집합장소였다. 전해지는 바로는 광제사에 주재관서를 두고, 증빙을 보고 노자돈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대괴수는 현재 존재하지 않으며, 절도 병난에 훼멸되었다... "이 문헌의 기록을 보면, 바로 중국의 화동, 중원등지에서 불리우는 민요와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나라때 산서홍동의 대괴수에서 백성들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도 믿을 수가 있다.
그렇다면, 명왕조는 왜 이처럼 대규모 백성을 이주 시켰는가? 민간에는 여러가지 전설이 전해진다. "호대해복수기"등. 그러나, 진정한 원인은 전쟁이 빈번했고, 홍수로 인한 자연재해와 역병으로 인한 재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 중략...
중국에서 전쟁과 재난에 휩쌓여 있을 때, 내지에 있던 산서성은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보냈다. 산서는 지리적 환경이 독특하여, 동쪽에서는 태행산이 병풍역할을 하고, 서쪽에는 여량산이 막아주고 있다. 가운데로는 분하가 흐르고 있는데, 그 중에서 진남평원은 아주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토지도 비옥하고 날씨도 좋아서, 물산도 풍부하고 사람도 많았다. 원나라 말기의 전쟁도 이지역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 ~중략~ 홍무 14년의 기록에 의하면, 하남과 하북의 인구는 모두 189만인데 반하여, 산서의 인구는 400여만에 달하였다. 즉, 산서성의 인구가 하남, 하북 두개 성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았던 것이다.
중국의 각 지방간 인구균형이 맞지 않은 것을 보고, 주원장과 그의 후계자인 영락제는 산서를 주시했다. 당시 홍동현은 진남(산서남부)에서 인구가 가장 조밀한 지역이었고, 남북왕래의 교통요지 였다. 그래서, 이민은 이곳을 중심으로 발생하게 된 것이다. 관청에서는 백성이주를 책임지는 부서를 홍등에 두고, 거기에서도 성북쪽의 광제사에 두었다. 이 절은 분하 옆에 있고, 길 옆에 있어서 지리적인 위치가 좋았다. 절 앞에는 큰 홰나무가 있었고, 홰나무 위에는 황새들의 집이 있었으니, 이 곳을 상징화 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것들 이었다.
대괴수, 노관와, 홍동현은 중국의 명나라때 대이민을 상징하는 말들이 되어 중국인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다.
<출처: http://blog.daum.net/shanghaicrab/14872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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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초기 산서에서 산동으로 대규모의 이주가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서, 과연 전쟁의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존재할 수 있었던 '진남'이라는 곳이 어디인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산동과 산서를 나눌정도의 산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이 사뭇다른 지리적 환경과, 사회환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초기 산서성의 인구가 하북과 하남을 합친것 보다도 많아서, 지역적으로 인구의 불균형이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랫글에서, 말씀 드렸듯이, 고려의 중심은 지금의 중앙아시아 부근으로 촛점이 맞추어 지고 있으며, 저는 이 산동과 산서를 나누는 기준의 산이 '천산'이 될 수도 있음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당시 고려의 수도였던 개봉부에 인구 집중현상이 뚜렸하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중앙과 지방의 심각한 격차로, 빈부의 격차가 진행되어 사회가 양극화 되었을 것이라는 현대적 해석을 가미할 수 있겠습니다. 이는, 오늘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서울과 지방의 격차와 유사하며, 동일한 사회적 갈등이 상당한 역사적 시점을 뛰어넘은 현재에도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과연, 당시에 수많은 인구의 이동을 일으킨 이유가 단지 인구분산 정책때문인지, 아니면, 산서에서 산동으로 왕조의 이동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속단할 수 없으나, 조선초(명나라초)는 같은 지역을 통해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단순한 왕조의 교체기가 아니라, 한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와 백성과 왕조가 동시에 힘이든 어려운 정치 및 사회 현실이었다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대의 신라의 경주는 한때 100만명이 거주하던 거대 도시였다는 기록이 다시한번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항상, 왕조의 교체기에는 수도권 인구집중 현상으로 백성의 통치가 힘들고, 지역간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기록을 1,000여년 전의 신라의 기록과, 500여년전 조선의 기록을 통해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다시한번 심각하게 고민해야할 단계라고 확신 할 수 있겠습니다.
첫댓글 산시 성의 소수 민족 조사(2000년) 소수 민족 인구 비율 한족 32,368,083 99,68% 후이족 61,690 0.19% 만주족 13,665 0.042% 몽골족 9,446 0.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