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말씀 곧,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라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증거케 하신 말씀은 율법의 행위로 인해 칭의가 될 수 없고 구원받으며 거듭나게 할 수 없다는 말이지 율법 자체가 필요 없다거나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다시 말해 할례나 많은 선행들, 신앙적 행위들, 예식과 관행들, 엄청난 헌금과 작정들 등과 같은 행위들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고, 사실상 다른 그 어떤 것들도 아닌 어떻게든 반드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곧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온 세상과 전 인류,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에 빠진 우리 인생들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 있어 유일한 길과 통로와 접점 등의 위치와 역할의 구주로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을 위한 값과 대가들을 대신 다 치르심과 함께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말씀대로 믿음으로만 말씀 그대로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되고, 말씀이신 하나님의 것,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전적으로 거듭나게 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그러한 율법 자체의 이유들이나 의미들이나 필요들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이며, 실상 예수님께서도 율법을 폐하심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고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엇보다 율법의 한가운데 있는 십계명은 오늘날에도 중요하지 않을 수 없고, 수많은 율법의 말씀들이 지금도 그대로, 또는 직접적, 간접적으로 쓰이거나 지켜야 하거나, 특히 신약의 말씀들이나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고, 예표와 계시가 되며, 몽학선생과 같이 안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에 있어 할례나 짐승들의 피 제사, 성전에서의 제사, 정결 예식 등과 같이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이미 이루어 졌거나 해결되고 온전해 지며 완전히 대체된 말씀들도 많고..
또한 시대와 나라들, 시간과 공간들을 관통하고 뛰어 넘는 성경의 특성상 음식이나 나병, 관례, 이방인, 흠 있는 것들 등에 있어서의 규례와 명령들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시대나 지역, 상황이나 관점 등에 따라 성경의 앞뒤에 맞추어 맞게 통찰하고 감안하며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씀들도 많기에 성경 전체적으로 잘 분별하고 해석하면서 적용해야 하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실상 그러한 사실 가운데 진정 그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의의 구원과 율법의 행위는 서로 영역이나 쓰임이나 역할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우선 우리 인생들에 있어 거듭남의 의와 구원에 참예케 됨에 있어서는 결코 우리 인생의 힘이나 세상의 방법들로는 아예 안 되는 것이며, 그 어떠한 행위들로도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이고, 실상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신해서 논할 수 있는 자체부터가 아닌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의 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에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이듯이 꼭 원죄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늘 이 시간 우리 앞에 있는 구약과 신약의 말씀들과 같이 하나님의 다 셀 수도 없을 정도의 많고 다양한 법들 앞에서 극히 일부라도 우리 인생들의 힘이나 세상적인 방법들로 해결할 수 있는 죄와 문제들, 진정 그러한 정도와 분량들, 개념과 이치들이 아닌 것이고, 조금만 통찰해 봐도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세상 끝 날과 영생에까지 이어지고 해결되어야 하는 차원인 것이 구원의 영역인 것이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전적으로, 반드시 오직 한 가지 어떤 식으로든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목숨값으로 인해, 곧 다시 한 번 더 강조하면 전 인류보다, 온 우주보다도, 더 나아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 모든 시간과 공간보다도 더 크신 성자 하나님이시자 구원자이시며 중보자이시고, 특히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인생들 사이의 길과 통로와 접점 등과 같은 위치와 역할이신 구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값으로 우리 인생들에 있어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의 이르기까지의 모든 대속과 대신, 나음과 화평 등에 있어 대신 다 치르신 대가와 그로 인해 시대와 나라들을 넘어 모두 다 이루신 구원에 믿음으로 참예케 됨이 아니고서는 불가하며, 실상 다른 방법이나 대체는 얘기 자체가 안 되고 사실은 불필요한 것이면서 무의미한 것임이 아닐 수 없는 사안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러한 이신칭의적인 구원과 함께 또 다른 측면이나 차원에서 볼 때 율법을 포함해서 신구약의 말씀들 그 하나하나가 행위적 측면이 내재되고 포함된 상태에서 심히 중요하고 필수적이며 절대적이지 않을 수 없음은 우리 인생들에 있어 죄와 심판들, 하나님의 뜻과 복들, 메시야와 구원의 일들,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 진정 기도 응답 한 번에 있어서까지 그 길을 알게 하고 참여할 수 있게 하며 통로가 되고, 생생히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주며, 안내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특히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자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연약한 육신의 몸을 입고 살면서 죄악들과 싸우며 회개하고 돌이키면서 더욱 말씀으로 살게 하며 더더욱 살아 있는 믿음이 되게 하고, 무엇보다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의 역사들을 더욱 더 생생하고 풍성하게 누리게 하며, 특히 말씀 가운데 보여 주시고 약속하시며 예비된 하늘의 힘과 역사들, 응답과 복들, 무엇보다 말씀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역사들을 제대로 사모하고 실제로 누리며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하면서 살아 있고 깨어 있으며 승리하는 믿음, 하나님께서 기뻐 역사하시기에 합당한 믿음, 참으로 그 자신 뿐 아니라 온 지경을 형통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부흥의 일들로 가득하게 하는 믿음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고, 사실은 말씀대로의 믿음에 있어 행함이라는 것이 분리될 수 있는 자체가 아닌 것이며, 어떤 식으로든, 얼마 만큼이든지 간에 반드시 포함되는 것이고, 그에 있어서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제한과 한계들, 시간과 공간들을 뛰어넘어 정확히 아시는 것이며, 진정한 믿음에 있어 그런 차원에서 하나하나, 순간순간 감안하신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실상 따지고 보면 원론적으로는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제대로 된 말씀의 신앙 한 번, 단 하나, 단 한 순간에 있어서조차도 우리 인생들의 힘과 의, 세상적 능력과 방법들이 아닌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과 은혜와 능력의 이치, 원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순간순간마다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특히 그로 인해서만 죄와 세속과 정욕과 자기 소견들 등과 같은 잠자고 미지근하며 병들고 죽은듯한 신앙이 아닌 주야로 더욱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의 깨어 있고 살아 있으며 치열하고 뜨거우며 생생하고 견고하며 강력한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 가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바로 그러한 말씀의 결단과 몸부림들과 함께 가장 직접적으로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갈수록 더 충만케 되고, 근원적으로는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으로 인한 온갖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의 생생함과 강렬함들에 실제로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면 진정 그렇듯 살아 있는 믿음, 장성하는 믿음, 갈수록 더 강한 군사와 같은 믿음이 되고, 영적인 생명과 능력과 기업들을 생생하게 누림들에 있어서 다른 그 무엇보다 구약의 율법을 위시한 모든 말씀들을 사모함과 그 속에서의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실천들, 곧 제대로 된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 아주 중요한 것이고 실제적인 것이며 절대적인 것임이 아닐 수 없기에 사실상 어떤 방법으로든 다른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우선을 두고 최고의 열정을 쏟으며 더욱 더 치열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믿음의 결단과 몸부림들이 생각 이상으로, 상상 이상으로 긴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자 복음의 능력에 생생하고 강렬하게 거하고 누림들에 있어서의 기준이자 관건인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 핵심적이고 실질적인 이치와 통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페북두란노서원66'중에서 인용과 추가/밀알서원)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10월 21일(월)2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