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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 요한의 제자
마 11:1-6
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 11:1-6 /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분부를 마치고 계획하신 여러 마을로 가서 설교를 하려고 그곳을 떠나셨다. 2) [침례 요한이 보낸 사람들;눅7:18-23] 감옥에 있던 침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모두 전해 듣고 자기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3) 물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요한에게 돌아가 내가 한 일을 너희가 본대로 알려라. 5) ㄱ) 맹인이 보게 되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기쁜 소식을 듣는다. (ㄱ. 사 61:1) 6) 그리고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전하라.'
본문은 예수님보다 먼저 사역하던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의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1-3)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권능과 사명을 주셨습니다. 본 단락의 “그들의 여러 동네”는 갈릴리 지역을 말합니다. 갈릴리 지역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집중적인 사역에 놀랐습니다.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막 1:22). 반면에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와서 복음을 전했던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서 마음이 약해진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3). 예수님이 메시야가 맞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믿음이 깊은 사람이라도 고난이 파도처럼 밀려오면, 한순간에 낙심이 오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했습니다(고전 10:12).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4-6) 예수님은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5). 아마도 세례 요한의 생각에 예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에 악한 로마 황제와 헤롯 왕을 심판하시고 자기와 같은 사명자들을 구해주셔야 한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나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6).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고난이 올 때 나를 믿지 못하고, 나를 떠나려는 잘못된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연약하기에 누구나 실족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도가 실족하지 않으려면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예수님처럼 승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적용: 당신은 세례 요한처럼 고난이 올 때 낙심하며 실족한 적이 있나요? 혹시 있다면 그 실족한 상황을 분석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기도하길 바랍니다.
저는 주의 종입니다. 제게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순간조차 제가 주님을 섬기는 것보다 주님이 저를 더욱 섬기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명령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제 몫이 되고 천사들까지 저를 도와줍니다. 나아가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능가하는 방식으로 저를 섬기시고 주님 자신을 제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 누구보다 위대한 종입니다.(토마스 아 켐피스)
< 설 교 >
장애인의 해방
마 11:1-6 / 김상복 목사
몇 주 전에 교회에서 점심 후 옥상의 야외 광장으로 올라가보았습니다. 요즘 우리 교회 주변의 자연이 너무 아름다워서 산책하기에 참 좋지요. 올라가보니 한 여성과 아이 두 사람이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우리 교회 사랑부 학생이고 옆의 여성은 선생님인 것 같았어요. 제가 보니까 선생님이 아이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아이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냥 걷고 있어요. 잠시 후에는 선생님이 노래를 불러주는데 아마 신나는 노래인지 어깨도 들썩이고 발꿈치도 오르락내리락 하더군요.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아, 선생님 한분이 장애 어린이 한 명을 돌보기 위해 자기의 재능과 인생과 사랑을 쏟아 붓는구나!’ 참 멋진 장면이었습니다. 제가 감동을 받고 언덕을 돌아가는 중에도 제 눈에는 그 두 사람의 모습이 계속 보였습니다. 감사해요.
우리 교회는 주일에 사랑부와 주중에 사랑의 학교를 운영하며 장애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진 특권 중의 하나입니다. 장애아들의 부모님들께 감사하고 아이들에게도 감사하며 아이들을 돌보는 선생님들께는 정말 특별한 감사를 드립니다. 때로는 한 아이에게 두 명의 선생님이 필요한데, 한 아이가 두 분 선생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어디 많겠습니까?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장애인들을 위해 오신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 요한이 헤롯왕의 잘못을 책망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 머지않아 죽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물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바로 당신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가 직접 예수님에 대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신체적인 장애인은 물론 경제적인 장애인이라 할 수 있는 가난한 자들까지, 우리 주님께서는 장애인을 구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장애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신체적 장애가 있고 정신적 장애가 있습니다. 후천적 장애와 선천적 장애가 있습니다. 신체적 장애 중에는 내부적 장애와 외부적 장애가 있습니다. 외부적으로 시각, 청각, 언어, 지체, 뇌성, 안면 장애 등이 있어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부적으로도 신장, 심장, 간, 호흡기, 요로장애, 간질 장애 등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신적 장애로는 지적장애, 자폐, 성격장애, 학습장애 등이 있습니다. 이 모든 장애들은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만, 여기 앉아서 예배드리는 여러분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각종 사고로 장애인이 되든가 연세가 높아가면서 어떤 종류의 장애든 장애를 겪게 될 것입니다. 전에는 이곳 3층 성전까지 자유롭게 계단을 걸어 올라왔는데 어느 날부터 그것이 힘들어집니다. 걸어 올라가기보다 에스컬레이터를 먼저 찾게 되고, 승강기가 자꾸 눈에 보이기 시작하면 벌써 몸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즘 저는 주일에 교회 계단을 올라가시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 저분들이 계속 저 계단을 잘 걸어 올라갈 수 있도록 강건하게 하여주옵소서’하는 간절한 기도가 제 마음에 있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어느 나이에 이르면 장애인이 됩니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눈이 잘 보이지 않고 귀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아내와 TV를 같이 보면 저는 잘 안 들려서 볼륨을 조금 크게 하고 제 아내는 귀가 좋으니까 소리를 줄입니다. 제가 장모님과 20년을 함께 살았는데, 저녁밥을 잡수시고도 왜 저녁을 안 주느냐고 하셨어요. 제가 독한 사위가 된 것입니다. 금방 저녁을 드셨는데도 기억이 안 나셔요. 제 장모님은 너무나 훌륭하신 분입니다. 저는 그렇게 착한 분을 제 아내 외에 별로 만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달라지셨어요. 처음에 우리는 그것이 치매인줄 몰랐습니다. 주위에서 치매 걸린 사람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마지막에는 자기 딸을 보고 “너는 누구냐?”하셨습니다. 자기 딸을 못 알아보는 지경에 이르자 제 아내가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장모님이 그러고 싶어서 그러셨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위의 장애인들을 어쩌다 우습게 보거나 무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러분,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미래의 모습입니다. 원치 않지만 언젠가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가 있고 또 영적 장애가 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들리지 않고, 머리가 있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보이질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진리를 들어도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 속의 죄와 죄성은 계속 나를 괴롭힙니다. 내 마음은 죄를 범하고 싶지 않으나 죄를 범합니다. 내게 사물을 보라고 주신 눈으로 범죄 하는 일들도 얼마나 많습니까. 육신의 장애를 가지게 된 것은 억울하지만 그 장애는 단지 불편할 따름일 뿐 영혼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죄의 장애는 영혼을 죽입니다. 무서운 것은 육신의 장애가 아니라 내적인 장애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도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30-31절)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인 장애, 정신적인 장애, 영적인 장애자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은혜의 때를 선포하라. 그 날이 오니라.”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 우리의 모든 장애가 다 회복되고 영원히 부활하신 아름다운 주님의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바라며 소망 가운데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장애를 겪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이요, 그 연수는 길어야 70, 80년입니다. 우리 앞에는 영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시는 은혜의 날이 우리 앞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은 우리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가르쳐 줍니다. 보통 사람을 통해서는 느끼기 힘든 깊은 사랑을 가르쳐줍니다. 요즈음 세계적으로 퍼지고 있는 악법이 있는데 안락사에 관한 것입니다. 지금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아이가 앞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는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죽여도 된다고 법으로 허락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이 땅에 살면서 신체적, 정신적 장애 때문에 고생하지 않도록 미리 죽이라는 겁니다. 이런 악법들이 계속 하나 둘씩 생기고 있습니다. 세상은 죽음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은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문화입니다.
만약 유럽의 안락사법대로 처리했다면 헬렌 켈러는 죽었어야 합니다. 못 듣고, 못 보고, 말도 못하는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장애에도 불구하고 헬렌 켈러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었습니까! 누구의 사랑이었습니까? 헬렌 켈러의 선생님이었던 설리번 선생님의 사랑입니다. 헬렌 켈러는 아무것도 모르는 짐승 같은 아이였습니다. 설리번 선생님은 그런 아이를 끌어안아 주었고, 사물을 손으로 만지게 하여 그 느낌을 알게 하고, 하나씩 하나씩 깨닫게 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의 하나로 남게 만들었습니다.
장애가 인간을 폐허로 만들 수 있는가? 헬렌 켈러의 이야기를 보건데,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헬렌 켈러가 이 세상에 없었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얼마나 더 황폐했겠습니까? 한 여성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세상은 달라졌습니다. 장애인에게 희망이 생겼고 그 부모들은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장애는 불편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죽이지는 않습니다. 장애인 역시 우리처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주를 다 합친 것보다 더 가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가치를 건강하냐 아니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자체에 둔다는 것을 깨닫고 살기를 원합니다.
장애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장애를 극복했습니다. 독일의 작곡가 베토벤이 그렇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12년 동안 전혀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으로 지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베토벤의 최고의 작품들은 청각 장애가 된 이후에 만들어졌습니다. 교향곡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 5번 황제, 교향곡 9번 등 그의 천재적인 위대함이 청각장애로 들을 수 없었을 때 나타났습니다. 육신의 장애는 내적인 건강이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살아있고 영혼이 건강할 때 육신의 장애를 얼마든지 극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강병우 박사를 보십시오. 얼마나 훌륭합니까! 시각장애인으로서 장애를 딛고 백악관 차관보까지 지냈습니다. 최근에 보니 그의 아들도 오바마 정부의 차관보가 되었습니다. 장애는 불편할 뿐이요 외적인 장애가 내적인 사람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내면의 사람, 속사람, 정신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이 강건해지면 육신의 장애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다녀가신 송명희 시인도 장애를 가진 분입니다. 그 분이 이 강단에서 이야기를 할 때 여러분은 그의 말을 알아들으셨습니까? 저는 한 마디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 분의 몸은 완전히 뒤틀리고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그 어머니는 다 알아 들으시고 통역을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몸이 뒤틀리는 젊은 여인이지만 그분이 쏟아낸 수많은 찬송과 시들은 얼마나 비장애인인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큰 감동을 안겨 주는지 모릅니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신체적 장애가 있다고 그 사람을 무시하거나, 사전에 제거해야 한다는 악법을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는 장애인들을 모두 모아서 큰 배에 태웠습니다. 그리고 태평양 한 가운데에서 배를 폭파시켜 모두 죽였습니다. 세상은 불편한 자들을 죽이는 죽음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문화입니다.
세계적인 우주 물리학자인 영국의 스티븐 호킹 박사는 온 몸이 뒤틀리는 장애를 가졌습니다. 최근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합니다. 말도 못합니다. 서울대학교의 이상묵 교수가 사고로 전신 장애를 입은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비록 몸은 불구요, 제대로 말할 수 없고 움직일 수 없고 다닐 수도 없지만 이분들의 위대함은 내면의 건강함에 있습니다. 육신의 장애는 불편할 뿐이요, 속사람이 강건하고 힘이 있을 때 모든 것을 극복하고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육신의 작은 문제들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장애입니다. 내면의 장애, 영적인 장애를 조심하십시오. 내면의 장애는 사람을 죽이고 폐인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육신의 장애는 극복될 수 있습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라고 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먼저 생각나십니까? 그 분은 미국의 훌륭한 대통령입니다. 소아마비로 평생 걸어 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장애보다 훌륭한 대통령으로서 기억합니다. 육신의 장애는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의 장애와 영혼의 장애를 조심하십시오.
스웨덴의 레나 마리아는 두 팔이 없습니다. 그녀는 팔 없이도 물고기처럼 수영을 즐기는 스웨덴의 장애인대표 국가 수영선수입니다. 팔이 없는 몸에 숄을 덮고 나와 복음성가로 찬송을 할 때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까.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의 찬송 소리보다도 레나 마리아의 찬송 소리는 우리의 가슴을 더욱 울립니다. 영혼을 흔드는 찬송입니다. 그가 육신의 장애인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의 영혼에는 장애가 전혀 없습니다. 그의 얼굴이 얼마나 밝고 아름답습니까.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체불만족”이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분이지요. 물론 그의 오체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훌륭한 글과 좋은 생각, 밝은 모습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가 이동하기 위해 전동차를 타고 있는 것을 보면, 팔과 다리가 없이 그저 상체만 동그랗게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슈퍼마켓의 카트 위에 앉아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분을 통해서 일본 열도는 물론 우리까지 감동을 경험했습니다. 육체적 장애는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영혼까지 불편해져서는 안 됩니다. 마음에 장애가 생기면 안 됩니다. 우리의 육체는 부족해도 영과 혼, 우리의 내면이 주님 안에서 강건하여 우리 평생에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에 얽매이지 말하고 하십니다. 영혼의 불구가 육신의 불구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외적인 장애를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내적인 장애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마18:8). 예수님께서는 만일 내 손으로 아내와 자식을 괴롭히고 직장동료들을 괴롭힌다면 그 손을 잘라 버리고, 멀쩡한 다리로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다니면서 죄를 범하고 산다면 다리를 자르고 가지 말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장애는 부활과 생명으로 다시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장애는 고칠 길이 없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내 영혼이 병들고 장애가 있어서 하나님께 제대로 영광 돌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에 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지도 못한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 주셔서 우리의 눈이 뜨이고 입술이 열려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섭섭하게 만들고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이 아침에 우리의 모든 장애가 주님의 은혜로 깨끗하게 치유 받게 되기를 원합니다.
축복을 유통하는 삶
마 11:1 / 이정익 목사
성경의 주제는 “전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당부도 “세상 만민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 진 말씀이기 때문에 다 중요하지만 예수께서 직접 가르치신 교훈들은 더 중요한 말씀들입니다. 그 말씀들이 모두 4복음서인데 4복음서의 끝부분에서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전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예수님의 다급하신 몸짓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들과 여러 동네로 가르치고 전도하기 위해서 떠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4장에서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마태복음 5-7장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산상수훈은 모든 교훈의 기준이고 척도입니다. 성경에 많은 말씀들이 있지만 그 말씀들은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풀이한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산상수훈은 중요한 내용이고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8-9장에서 각종 병자들을 고치십니다. 고친 병자들의 모습을 주시해 보면 모두 불치의 병들이라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8장에서 나병환자를 고칩니다. 바다의 풍랑을 명하여 잔잔하게 하십니다.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십니다. 9장에서는 중풍병자를 고치고 혈루병자를 고치며 나면서부터 눈이 어두운 장님이 눈을 뜨고 말 못하는 사람을 입을 열게 하여 고칩니다.
이 사건들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시대에 그런 병들은 메시야만이 고칠 수 있다고 믿었던 병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병들을 예수님이 지금 제자들과 사람들 앞에서 고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내가 누구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말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오시리라고 예고된 메시야다 라는 점을 세상과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 이고 주님이구나 하는 것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시고 다음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제부터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십니다. “너희는 이스라엘 집으로 가서 잃어버린 양을 구원하라, 가면서 천국이 가까웠다고 전파하라, 가서 병든자를 고치고 죽은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쫓고 .. 가서 집집마다 평안을 빌라, 만일 너희가 전하는데 영접하지 않고 거부하면 발의 먼지를 떨고 그 동네를 떠나라, 그 동네는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리라.”(마태복음10장6-15절) 그리고 경고도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핍박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리라(16-18), 혹시 목숨을 잃게 되는 일도 있으리라(39), 그러나 두려워 말라 하나님이 너희를 지키시리라(27-30), 너희가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으면 하늘에서 상이 있으리라(40-42).”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을 아주 강하게 교육하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제자들을 내 보내시고 여러 동네로 전도하러 떠나셨다고 했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지금 예수님의 온갖 관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온갖 관심은 전도에 있습니다. 본문은 이 전도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고상하게 주문하고 부탁하고 강조하신 내용이 전도이고 영혼구원입니다. 성경의 중심은 “전도”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예수를 파송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오늘 우리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전도는 가장 고상한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부분입니다. 전도하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이해할 것이 있습니다.
전도의 중요성
전도는 왜 해야 하는가. 먼저 네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입장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21절에 의하면 전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녀는 부모를 기쁘게 해야 합니다. 성도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전도입니다. 영혼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선포하신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먹고 아들을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서 죽이신 그 사실을 세상에 전하는 일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다음은 전도자의 입장입니다. 전도는 사람을 옳은 데로 이끄는 일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이끈 사람은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날 것(다니엘12장2-3절)이라고 했습니다. 전도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하고 복된 길을 안내해 주는 일입니다. 어디서 맛있는 음식만 먹어도 누군가를 데리고 가고 싶어집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여주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내가 먼저 복을 받는 일이고 또 그 복을 나누고 유통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전도대상자의 입장에서 보면 전도는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로마서10장14절)입니다.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8장30절을 보면 이디오피아의 내시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때 빌립이 찾아가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느냐고 물이니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알겠는가”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전도대상자 편에서 보면 전하는 일은 복음을 듣게 해 주는 기회입니다. 마가복음16장16절을 보면 “믿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가장 선한 사업입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어야 합니다. 외쳐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가장 긍휼여기는 일이 전도행위입니다. 누군가는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때 알려주는 사람이나 알게 되는 사람은 모두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제가 태어난 시골 고향에 조그만 교회가 있었다는 것이 오늘 생각해 보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일이었는가를 종종 생각합니다. 내가 태어난 고향 작은 마을에 있었던 조그만 교회, 그 교회 때문에 오늘 내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가 오늘 내 눈을 뜨게 해 주었고 내 인생을 만들어 주었고 내 인생을 바뀌게 해 주었습니다. 만일 내 고향 조그만 마을에 그 교회가 없었더라면 오늘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합니다. 제가 태어난 주변에 절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 집 더 가까이에 있었던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듣고 자랐습니다. 그때 그 종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면 나는 절간에서 울려 퍼지는 목탁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오늘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 것입니까. 이것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여기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은 어떤 경로를 거쳐서 왔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사건입니다.
우리나라가 아주 어둑할 때 서양의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 준 것도 저는 하나님의 절묘한 타이밍에 의해서 보내어진 사신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산속에서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우리도 선교사를 많이 보내야 합니다. 동네마다 교회를 더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그들의 인생의 방향도 틀어 주어야 하고 그것이 오늘 먼저 믿은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전도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알려주고 전하는 일입니다. 끝으로 사탄의 입장에서 보면 전도는 사탄의 권세나 세력이나 아성을 무너트리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수많은 영혼들이 멸망으로 또는 사탄의 수하로 넘어가게 됩니다. 오늘 불신자들이 사탄을 추종하느라고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습니까. 오늘 사람들이 얼마나 사탄에 충성을 다하며 충실하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전도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4복음서에서 마지막으로 당부하시기를 “너희는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전도 순서
사도행전1장8절을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전파의 순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먼저는 “예루살렘과 유다”입니다. 이것을 “동질문화권” “Mission I” 이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전도할 때 가장 먼저 전할 대상은 “내 가족과 친척과 이웃”이라는 말입니다. 전도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그 다음은 “사마리아”입니다. 이것을 “유사문화권” “Mission II”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전도대상은 “내 동포, 내 민족”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땅끝”입니다. 이것을 “타문화권” “Mission III”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세계선교입니다. 전도에도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는 가까운 곳부터 전도하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사역을 고향에 가서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을 무시하고 거절하였습니다. “저게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하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다른 곳으로 가서 고치고 가르치고 기적을 베풀어 은혜를 주었습니다. 내가 받지 않으면 그 주어질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가는 법입니다. 마태복음10장5절을 보면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당부하시기를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로도 가지 말고 차라리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먼저 “네 동족부터 전도하라”는 뜻입니다. 전도는 먼저 “내 주변, 내 가족부터” 입니다.
다음 순서는 먼 곳을 전도하는 일입니다. 내 동포들이고 내 민족이고 저 북한 동포들이 여기게 해당됩니다. 먼저는 내가 복을 받아야 하고 그 복을 내 동포 내 민족이 함께 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축복을 유통하는 삶입니다. 그 다음에는 타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세계 선교입니다. 간혹 오늘 우리나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꼭 해외에까지 나가서 돈을 써가면서 선교를 해야 하느냐고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 무지한 소리입니다. 우리나라가 다 복음화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나라를 다 복음화 하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습니다. 미국의 선교사들이 미국을 다 복음화하고 떠났더라면 오늘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과 유다가 다 복음화가 되어 사마리아로 간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도 전도했지만 동시에 사마리아로 나아갔고 땅 끝까지 나아갔던 것입니다.
전도의 유의점
전도할 때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전도할 때는 반드시 장애물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전도를 하면 선뜻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복음, 새것, 새길, 새 방법은 선뜻 받아들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 안에는 변화, 새길, 새방법의 원리와 힘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새것이나 변화를 싫어합니다. 사람은 모두 안주하려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마음도 생각도 의식도 제도도 다 변화시키는 능력이 들어 있습니다. 복음은 누룩과 같습니다. 누룩을 밥에 넣으면 술이 되듯이 복음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개혁이, 변화가, 쇄신이, 끊고 맺음이, 때로는 단절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리적으로 이 변화를 싫어합니다. 사람들 중에서도 권세자들이 더 이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독재국가일 수록 복음을 한사코 거부하고 막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오늘 선진국들은 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변화되었고 선진국이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개화바람이 한창 불어올 때 사람들이 한사코 기독교를 반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새 시대의 물결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새 물결, 새 시대의 조류, 복음의 물결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올 때 많은 피를 뿌리고 들어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반드시 이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것도 은혜입니다. 그 과정에서 원동력이 발생합니다. 반대가 강할수록 강한 힘이 솟아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들이 이상한 여자와 결혼하려고 할 때 반대하면 더 강하게 나옵니다. 반대하지 말고 더 풀어주고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강하던 마음이 약화됩니다. 장애물 없이 안일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태국은 우리보다 복음이 들어온 역사가 배가 오래 되었지만 오늘 태국의 복음화 율은 아주 미미합니다. 태국은 복음이 들어올 때 순교자 한사람을 배출하지 않았습니다. 온실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온실속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조그만 장애가 오면 속수무책으로 넘어집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강한 것은 무서운 장애물들을 잘 넘겼기 때문입니다. 전도에는 반드시 각종 걸림돌을 만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열정입니다. 복음은 전파하는 사람의 열정을 타고 전파되고 확장되어 갑니다.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목숨을 내 놓는 전도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전도하다가 귀신을 내 좆아주는 사건으로 (사도행전16장19-34절)고발되어 많은 매를 맞습니다. 그 매는 태장이었을 것입니다. 태장은 40에서 하나를 감한 매를 말합니다. 그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옥중에서 찬송을 부릅니다. 기분이 좋아서 찬송한 것이 아니고 39대의 매를 맞는 동안 엉덩이가 터지고 찢어지고 피가 흘렀을 것입니다. 그 상처들이 밤이 되니까 쓰리고 아파왔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 같았으면 아프다고 비명을 질렀겠지만 사도바울은 그 아픔의 비명을 찬송으로 바꾸어 불렀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하늘의 하나님이 내려다 보셨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순간 사도바울이 열정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지진이 일어나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기적은 열정이 있고 감동이 있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전도는 열정의 산물입니다. 오늘 교회에 이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열정이 있는 교회에는 오늘도 기사와 이적이 나타납니다. 그곳에 영혼이 구원받고 변화 받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트려 송두리째 주님 머리에 붓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주님이시다” 라는 말을 듣자 마다 바닷물로 뛰어 들어가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오래 믿은 분들일 수록 이 열정이 다 식어져 갑니다. 그리고 오늘 새신자들이 열정적입니다. 문제는 오래된 분들이 문제입니다. 이 오래된 분들은 열정도 식어지고 체험도 잊혀져가고 사명감도 희미해져 갑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라고 하면 온갖 핑계를 들어서 회피합니다. 새신자들이 들어와 열정적으로 일하면 또 길을 막습니다. 그것을 교회의 텃세라고 합니다. 그런 교회는 부흥하지 못합니다. 전도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이런 방해가 따릅니다. 사탄의 역사가 따릅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인구가 5천만 명입니다. 그 5천만 명 중 25%인 1200만 명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수는 부풀려진 숫자이고 정확히 말하자면 800만 명 정도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고 얼마나 구원받은 사람이 많으냐가 문제입니다. 전도는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먼저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누구에게 전도할 동기가 발생합니다. 알고 가져본 사람이 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은 전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하시고 훈련하시며 보여주시고 가르쳐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나가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할 일이고 받은 축복을 세상에 그리고 이웃에 나누며 유통하는 삶입니다.
무엇을 보려고
마 11:1-10 / 이필재 목사
예수님은 벌써 2천 년 전에 오셔서 인간 구원을 십자가로 완성하시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기다리던 메시야를 메시야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 영원한 실수요 불행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돌아가셨는가는 내가 너희가 기다리는 메시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을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이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 하였도다.”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는데도 메시야인 것을 알지 못한 불행을 말씀한 내용입니다. 10년 전이라 기억이 됩니다. 뉴욕에 유대인 랍비 메나킴 슈니어슨이라는 사람이 92세에 세상을 떠나니까 미국의 모든 신문들이 그 사건을 보도했습니다. 왜 그렇게 보도를 했느냐 하면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 가운데 약 50~60만 명이 슈니어슨을 메시야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추종자들은 절대로 그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죽으니까 50~60만의 미국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실망하는 모습을 모든 신문에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뉴욕에서 차지했던 비중은 매우 커서 그의 장례식에는 당시 뉴욕 상원이었던 알폰세드 아마토가 장례식에 조사를 하기 위해 참석을 했고 지금 현재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가장 유력한 루돌프 쥴리아 뉴욕 시장도 그 장례식에 참석한 바가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메시아관이 무너지는 침통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또 외부에서는 “그는 며칠 후에 부활할 것이다.” 이렇게 기대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다 지나가니까 요즘 그 사람들은 “예수도 슈니어슨도 메시야가 아니었다.” 라며 또 다른 메시야를 기다리는 불행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메시야를 예언한 선지자들은 아주 많이 있는데 맨 마지막 선지자가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지금까지 예언한 모든 메시야 사상을 종합해서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는 지금 오셨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나는 메시야를 만인 앞에 선포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마지막 예언자의 사명을 그렇게 선포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제일 먼저 선포했던 사람이 됩니다. 그는 그런 예언자가 되기 위해 보통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아닌 야인적 생활을 했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광야에 나가서 혼자 살고 몸에는 약대 털을 걸치고 음식은 야생 자연식품을 뜯어 먹으면서 지금까지 하지 아니한 새로운 종교의식인 세례를 줍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메시야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왔고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민중들이 그 주변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랬을 때 그는 선포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나는 메시야를 소개하러 온 선지자입니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 선지자로서 메시야를 소개하고 이후부터는 메시야의 인간구원 사역이 발표가 될 것입니다. 여기 이분이 메시야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게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합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여러분에게 세례를 줄 것입니다.” 이렇게 선포하는 것으로 자기 사명을 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에 대해서 큰 선포를 하셨습니다. “여자가 나은 자 중에서 세례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메시야를 제일 먼저 알아볼 수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이 땅에 메시야를 제일 먼저 선포해주는 사람이 되는 기쁨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가장 큰 자가 됐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로부터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함께 협조하면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이 땅에 인간구원의 사역으로 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세례요한은 신변에 큰 문제 하나가 발생하게 됩니다. 때에 그 나라의 왕은 헤롯 안티파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매우 비도덕성의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날 그는 로마로 여행간 동생을 돌아오지 못하게 합니다.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뺏어서 자기 아내를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왕궁에서 왕이 이런 부도덕한 일을 하니 이게 될 말이냐?’ 그러나 아무도 말 못합니다. 말했다가는 죽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폭군입니다. 이때 세례요한이 나서서 그 말을 한 것입니다. “왕은 그가 아니고도 다른 여인들이 그 주변에 궁녀로 얼마든지 있는데 왜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서 사느냐? 이것이 하나님의 의냐?” 그래서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요한은 헤로디아의 요청에 의해서 목을 베여서 머리를 소반에 담아오는 끔찍한 사형을 당합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이 감옥에 있을 때 일어난 일을 잠시 소개하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요한은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오셨는데 메시야가 왜 가만히 계시는가? 메시야는 메시야의 사역을 하셔야 되는데 메시야의 사역이 뭐냐? 헤롯과 같은 불의한 왕을 없애고 자기와 같은 선지자는 이 감옥에서 나가야 될 것 아니냐? 나 같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는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헤롯 같은 불의한 왕은 온갖 왕권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의인가? 옛날에는 그랬다 하더라도 이제 메시야가 오셨다면 이러한 불의는 이 사회에서 없어져야만 이것이 하나님의 의요 사회정의가 아닌가? 그런데 왜 메시야는 이리 잠잠하고 계신가?’ 답답해졌습니다. ‘지금 당장 나를 가두고 있는 이 옥문이 활짝 열려서 내가 선지자의 활동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헤롯 같이 부도덕한 나쁜 사람은 당장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죽어야 하나님의 의가 아닌가? 내가 메시야 선포를 제일 먼저 한 사람인데 어찌 메시야는 나의 이 감옥생활을 돌아보지 않고 계시는가?’ 세례요한은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면회하러 온 자기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예수에게 가라. 가서 내가 말하는 것을 전하라.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렇게 말하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세례요한의 믿음이 흔들린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가 정말 그리스도 메시야이신가? 아니면 또 다른 메시야를 우리가 기다려야 되는 것인가 모르겠다. 메시야면 이렇게 가만히 계실리가 없는데 왜 이렇게 가만히 계시는가?’
바로 이 문제가 우리들의 믿음에도 갈등을 주는 부분이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찌 저런 악한 사람들이 버젓이 왕 노릇을 하며 온갖 불의한 향락을 누리도록 내버려 두시며 정말 이 땅에서 의롭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토록 고난 속에 억울한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의인가?’이렇게 생각이 될 때 믿음은 흔들립니다. 이런 것이 계속되면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가? 나는 다른 하나님을 찾아봐야 하는가?’ 이런 갈등이 옵니다. ‘하나님이 만약 살아 계시다면 나의 이 억울한 사정에 개입하셔서 당장 선한 해결을 해주셔야 되는데 왜 잠잠하고 계시는가? 불의한 사람은 더 잘되고 의로운 사람은 오히려 억울하게 감옥이나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이 사회!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고 정직하게 티 없이 살려는 사람은 망하여 못살게 되고 부정직한 모리배들은 세상에 주인이나 된 듯 활개를 치고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인가?’ 이런 갈등이 오지 않겠습니까? 한 기업인이 저한테 오셔서 슬프게 “분식회계 가짜 장부를 수없이 만들어서 정부를 속여가면서 부정한 손을 흔드는 사람의 기업은 정부의 혜택도 많이 받고 날로 번창해 가고 나같이 일점일획도 속이는 것 없이 정직과 진실을 내어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의 기업은 불실기업으로 정리가 되는 세상이 하나님의 정의가 있는 사회입니까?” 물었습니다. “메시야라면 마땅히 메시야의 일을 해야 될 것 아닙니까? 지금 당신은 세상에 소개한 세례 요한이 불의의 세력에 짓밟혀 감옥에 갇혀있고 마귀의 종노릇하는 헤롯은 천하게 승리자같이 저렇게 떠들고 있는데 메시야는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시고 그렇게 갈릴리 촌구석에 틀어박혀 계셔야만 되겠습니까? 가서 말하라!”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그런 경우를 만납니다. 어느 늦은 밤에 예수님은 감람산 큰 바위에 홀로 앉아 깊은 고민과 슬픔을 나타내며 밤새도록 기도했다고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바라볼 때 ‘이제 몇 시간 후면 로마의 물리적인 힘이 서서히 그를 압박하기 위해서 다가오고 있는데 일이 급해지면 예수님도 심적 능력을 발휘해서 마침내 이 나라에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실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능력이 그때 나타날 것이다.’ 기대하고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군병들이 나타나는 그 순간부터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해져버렸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들이닥쳐서 마치 예수님을 도둑놈을 잡아가는 것과 같이 묶어서 끌고 갑니다. 예수님을 걷어차고 머리를 후려 때리고 욕을 하고 침을 뱉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죄도 없이 빌라도 법정과 가야바 법정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재판의 피고석에 서서 무게를 떨어뜨리고 심문을 당합니다. 이때에 예수는 말이 없었다고 그랬습니다. 채찍으로 때려서 예수의 몸은 피로 물들었고 십자가가 무거워서 여러 번 땅바닥에 쓰러지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걸친 옷은 땅바닥에 질질 끌려 흙투성이가 되고 온갖 백성들이 옆에서 “죽여라! 죽여라!” 소리를 지르는데 예수님은 아무 말이 없으십니다. 제자들은 판단했습니다. ‘이가 메시야라면 왜 이렇게 끌려가야 하는가? 왜 메시야의 일을 하지 않고 계신가?’ 그러나 숨이 넘어갈 때까지 메시야적 능력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고 예수는 죄를 범해 사형당한 갈릴리 출신의 반역자라는 이름 아래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때 메시야성을 의심하고 헛수고했다는 실망감으로 부지런히 옛날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답변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누구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메시야는 메시야가 가야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내가 지금 정확히 가고 있는데 너희가 생각하는 메시야의 길과 내가 가야하는 메시야의 길은 다르다. 내가 가는 메시야의 길을 보고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을 것이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메시야의 길이 구체적으로 뭐냐? 이 앞을 보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고 말해라. 내가 지금 가야하는 길은 헤롯 정부를 때려 부수고 요한을 옥에서 이끌어내어 더 강한 힘 있는 정부를 구성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 세상에 힘 있는 자들이 내 곁으로 다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문둥이, 귀머거리, 가난한 자, 소경된 자들은 나를 만나볼 기회도 없게 될 것이다. 나는 메시야의 길을 정확하게 가고 있다고 가서 말해라. 요한도 옥에서 나오지 말고 거기서 죽어야 하나님의 의가 살아날 선지자니라. 때가 되면 나도 그렇게 될 것이다. 가서 그렇게 말해라.” 그러고 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비유적 설교를 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이 말은 “너희가 메시야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냐? 세례요한의 외치는 소리가 광야에서 들려올 때 모든 군중들이 광야로 다 달려 나갔다. 그렇다면 그 의로운 선지자가 감옥에 있을 때 예루살렘의 모든 군중이 헤롯 궁전에 가서 데모를 하고 왜 의로운 사람을 감옥에 가뒀습니까 말해야 되는데 어디로 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나갔느냐?”
유대 나라나 애굽 하천가에 많이 나는 특별한 식물이 갈대입니다. 이 갈대 모습은 뿌리에서 머리까지 중간가지가 없습니다. 맨 마지막 머리 부분에서 여러 갈래 줄기가, 그리고 꽃봉오리가 생기기 때문에 머리 부분이 무겁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심하게 흔들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강풍이 불고, 비바람에 몰아치면 아예 쓰러져 없는 것 같이 되어 버립니다. “너희가 갈대냐? 어디 갔느냐? 세례 요한을 메시야라고 외치면서 그에게 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같이 다 쓰러져서 하나도 없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유대 군중 너희들은 다 갈대다. 요한의 제자들 너희들도 다 갈대 같다.” 요한이 외로운 감방의 죽음을 기다리는 힘없는 거지꼴 신세가 되었을 때 그의 제자들은 갈등이 왔습니다. ‘이대로 요한의 제자로 남아야 되는가? 그렇다면 그와 함께 우리도 죽음의 길을 선택해야 되는가? 아니면 재빠르게 방향을 돌려 잡아 헤롯 편에 충성을 맹세할 것인가?’ 흔들렸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줄을 잘 서야 출세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느 줄을 잡아야 살 만할 것인가? 세례 요한을 따라다니다 집안 망하는 것이 아닌가?’ 흔들려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 세례 요한도 갈대가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를 메시야라고 제일 먼저 선포해준 사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소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선지자 부르심을 받은 사람! 나는 그의 신들메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 요한이 오늘 제자들을 내게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묻다니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여러분이 오늘 교회에 오셨습니다. 무엇을 보려고 오셨습니까? “그 교회 옷 잘 입은 사람들이 있다더라. 명품 입은 사람들 구경 가자!” 그러기 위해 오셨습니까? “좋은 자동차 타고 오는 사람들 많이 있으니까 좋은 차 구경하러 가자! 갈보리교회 건물이 아름답다더라. 그 건물 보러 가자!” 갈보리교회는 한국 교회 건축 책에 소개가 제일 잘 되었습니다. 저도 그 책을 가지고 있는데 교회 건축하는 교회마다 그 책을 펴보다가 갈보리교회를 거의 한 번씩 다녀갑니다. 오늘도 저녁때 교회 건축할 교회에서 수십 명이 오셔서 보고 가도록 저와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건물 보러 가자!” 교회는 본질적 의미를 상실할 때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보려고 교회 나왔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우리 한국 사람들은 세계에서 성지순례를 제일 많이 다닌다고 평가가 나왔습니다. 가보면 어떻게 성지순례를 많이 나왔는지 팀이 많아서 그 좁은 갈보리 산 올라가는 길에서 사람을 잃어버립니다. 가이드들은 잃어버리는 것이 제일 신경 쓰입니다. 일행 중에 한 사람을 잃어버리면 어디 가서 찾습니까? 그래서 버스 탈 때마다 인원수를 셉니다. 열심히 따라다니라고, 길 잃어버리지 말라고 앞에서 무엇을 하나 듭니다. 한국 사람들은 태극기를 많이 듭니다. 태극기만 들고 따라오라고 하면서 높이 드니까 그것만 보며 길 잃어버리지 않고 열심히 따라옵니다. 성지순례가 끝나고 “잘 보셨습니까?” “보긴 뭘 봐요? 태극기만 보다 말았는데….” 여러분이 사랑을 받으려고 교회 오셨습니까? 내가 하지 않는 사랑을 누구한테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친절을 바라고 교회 오십니까? 내가 베풀지 않는 친절을 누가 나한테 한단 말입니까? 인정받으려는 사람이 너무 많아질 때 교회가 어지러워집니다. 그래서 습관이 나빠지는 교인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 사람들은 어느 교회를 가든지 항상 입에 붙은 소리가 “틀렸다, 틀렸다, 틀렸다!” 이 말입니다.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 왔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성경의 진리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부정부터 가르칩니다.
오늘 예수님은 약간 실망하시는 겁니다. “내게로 오는 자여! 나에게서 무엇을 보려고 왔느냐?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고 나갔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어느 날 예수님은 기적을 창출 하셔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 후 사람들이 어떻게 되지요? 떡을 바라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무엇을 얻으려고 교회 나왔느냐? 무엇을 얻으려고 주님을 만나고자 했느냐?” 우리는 예수를 보려고 교회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주는 이 생명의 진리를 가지고,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예수의 제자로 살기 위한 교훈을 예수로부터 받아서 그렇게 살려고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 곁에 계시지 아니하지만 말씀 안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우리가 교회 오는 것인데 그 믿음이 갈대 같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그 교회 나가서 실망했다.” 무엇을 얻고자 했기에? 나로 하여금 예수를 만나게 해준 교회! 내가 주님을 영접할 수 있게 한 말씀의 선포! 영생을 보도록 눈을 뜨여준 교회! 어떤 때는 사람들이 “아, 그 교회가 틀렸다.” 그러면 “당신은 뭐야? 당신이 교회야. 교회 본래 의미는 거기 나와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야! 당신이 교회이면서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해?” 어느 날 한 여인이 자기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애는 큰 아들이고 이 애는 작은 아들입니다. 임금님이 되실 때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소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말의 뜻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고려시대, 이조시대 우리나라 정부의 권력 구조를 좌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시행해서 임금님 다음으로 권위 있는 자를 우의정, 좌의정이라 했고 혹은 우시중, 좌시중이라 했습니다. “그 두 자리를 우리 두 아들에게 주시옵소서.” 이 여자는 공로가 있습니다. 세베대의 아내 살로메입니다. 예수님 공동체를 위해서 돈을 제일 많이 썼습니다. 또, 예수님과 친척 간입니다. 예수님의 이모가 됩니다. 자기 두 아들이 일찍이 예수님의 제자가 됐는데 평소에 보니까 예수님이 자기 아들 요한을 제일 사랑하는 게 나타납니다.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이 예약을 미리 해둬야 되겠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겁니다. 넉넉히 공로가 있는 여인이요 혈통적으로 가까운 집안이요 자기의 두 아들이 일찍이 예수의 제자로 헌신하고 있으니까 ‘할만하다. 괜찮다. 절대로 거절 안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너희들이 원하는 것과 내가 가는 길은 정 반대 방향이니 이를 어쩌면 좋겠느냐? 너희가 지금 원하는 것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도 알거니와 그게 하고 싶어서 그러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리라. 내가 가는 길은 이 길이다. 이것이 메시야의 길이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겠느냐?”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또 교회를 다니면서 진리에 초점이 흐려지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시험받습니다. 왜? 자기의 소욕이 채워지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적었을 때 나의 관심사는 항상 어느 것이죠? ‘이 교회에서 내가 무슨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 교인들에게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은 무엇인가? 목사는 나한테 무엇을 좀 줄 수 있을 것인가? 주님은 나한테 어떤 것을 주실 것인가?’ 여기에 대한 관심이 큽니다. 그러나 믿음이 커지면 이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무엇을 드릴까?’입니다. ‘어떤 것을 드려야 이 교회에 유익하고 어떤 일을 해야만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될 것인가?’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는 그런 제자를 훈련시키고 있는데 그 제자들마저도 정반대 요청을 했습니다. “무엇을 보려고 나갔기에? 너희가 무엇을 얻으려고 내게 왔기에?” 오직 예수를 바라고 우리는 교회에 오는 겁니다. 다른 목적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그날부터 갈등이 생깁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서 주려하는 자는 불평이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 속에 계시된 예수님의 진리를 만나기 위해서 나의 삶을 가장 고귀하게 사는 길은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주신 이 진리를 손에 붙잡고 이 길을 따라서 내가 살 것이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원하고 훈련시키십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의 의미를 잘 깨달아서 바람에 흔들리지 마십시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꺾어져 안 보이는 그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지 마시고 “무엇을 얻으려고 내게 왔기에? 나한테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입니다. 여러분, 그런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에 나타난 주님의 마음을 저희들이 살피게 하옵소서.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무엇을 얻으려고, 무엇을 보려고 교회 나왔느냐? 너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내게 요청하느냐?” 주님의 마음을 살필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주어짐으로 이 시대에 주님을 향해 드릴 수 있는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흔들리지 말자
마 11:1-12 / 엄기호 목사
세례 요한은 분봉왕 헤롯이 그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일과 그의 모든 악행을 책망하고 비난했다는 이유로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 ‘마카이루스' 성에 약 1년 간 감금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하늘로부터 오신 이'(요 3:31),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포하였고(요 1:29), '나는 그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한다'(요 1:27),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요 1:34)라고 하면서, 최고의 겸손으로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또한‘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마 3:11)이요, '세상을 심판하실 분'(마 3:12)이라고 말하며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실하게 믿고 증거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예수님께 제자들을 통하여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오실 그이'란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400백 년 동안 긴 영적암흑기가 계속되던 때에 하나님의 사명을 잘 감당했고,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으며, 악을 거부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을 소유자이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은 세례요한이었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 들은 대로 전하고, 행한 표적은 본 대로 전하며, 체험한 것은 경험한 대로 전하라. 가감 없이 전하라'고 하시면서, 소경이 보게 되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는다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기원전 700여 년에 살았던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성취되었음을 가리키는 말씀이며(사 29:18 ; 사 35:5-6 ; 사 42:7), 이는 장차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질 천국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간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이 얼마나 큰 인물인가를 말씀하시며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의지가 견고하고 신앙인격이 강직하여 사람(특히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좋은 옷을 입으며 뽐내던, 왕궁의 사람들처럼 외모에 치중하는 자가 아니라, 그 내면에 믿음과 기쁨, 평안과 하늘의 보화로 가득했던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또한 ‘선지자보다 나은 자다.'라고 하시고,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제일 큰 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 칭찬받은 세례 요한이지만 그의 흔들리는 모습은 성령 충만한 성도, 믿음의 성도에게도 얼마든지 신앙이 흔들리는 위기가 올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흔들릴 수 있는 요인들은 무엇일까요?
흔들리는 외적 원인
본문 7절에 “흔들리는 갈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갈대란 약한 인간, 지조 없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갈대는 언제 흔들립니까?
바람이 불어올 때 흔들립니다. 바람은 기압의 변화로 일어나는 대기의 움직임을 말하지만 들뜬 마음, 혹은 유행에 따라 일어나는 기운이나 버릇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좋은 바람은 사회를 바로잡을 수도 있으나 못된 바람들은 사회를 좀먹는 악습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누군가 갈대를 헤치고 들어올 때 갈대는 흔들립니다. 교회에도 좋은 사람이 들어와 유익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도둑이나 강도와 같은 사람이 들어와 성도를 흔들고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으므로 늘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외적으로는 교회를 비판하고, 내적으로는 개인을 헐뜯고 불만과 불평을 말하는 부정적인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흔들리는 내적 원인
먼저, 가늘고 견고치 못하기 때문에 흔들립니다.
예수님을 믿었으면 굵고 견고하게 믿어야 합니다. 사탄의 속삭임에 흔들리고 거짓 진리를 듣고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우리 신앙이 견고치 못함을 의미합니다.
기도 시간이 줄어들고, 교회 출석을 게을리 하며, 말씀을 듣고 배우는 횟수가 줄어들면 신앙의 줄기는 가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속이 비어있기 때문에 흔들립니다.
사람은 그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불심(佛心)을 그 마음에 담고 있으면 불자요, 공자의 교훈을 담고 있으면 유림입니다. 이기심과 미움과 탐욕을 담고 있으면 타락한 자요, 불신과 의심을 담고 있으면, 마귀의 종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신앙의 알맹이가 그 속에 있어야 합니다. 쓸데없는 것으로 채워져 있거나, 비어있으면 그 신앙은 흔들리거나 부러지는 법입니다.
마지막으로 몸에 비해 잎과 꽃이 너무 많을 때 흔들립니다.
허영과 외형에 너무 치중할 때 그것은 속빈 강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내실을 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당하지 못하는 허영된 생활이나 신앙은 자기를 넘어지게 합니다. 과실이 많이 달렸다고 적과를 하지 않으면 그 가지가 찢어지거나 열매가 익기 전에 떨어져버려 결실이 아주 적습니다.
욕심껏 하나님께 구해, 하나님이 허락하셔도 감당할 만한 그릇이 준비되지 못하면 결국 흔들리고,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으려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 개인은 약해도 서로 뭉치면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성도가 분열하고 나뉘는 것은 죄악이요,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반목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비방은 불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불신하게 하고 성도들로 낙심케 하는 악한 죄악입니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분열하고 비방하고 당파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어느 시인이 ‘늙지 말고, 성숙해져라'고 말했듯이 단순히 허무와 쇠퇴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보다 충실하고 풍성한 결실을 맺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성숙을 방해하는 나태함과 게으름, 부정적인 사고방식, 급한 성격과 혈기, 고집과 자존심, 방탕과 무절제와 정욕을 버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또한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주님의 풍요한 복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인내와 사랑으로 채우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은혜로 채우며, 그리스도의 충성과 헌신으로 채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 기둥을 박고 우리 자신을 붙들어 매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8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주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허물과 상처투성일 지라도 우리는 주 안에서 굳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진 질그릇 같고, 바람에 곧 부러질 갈대 같을 지라도 우리는 주의 터에 굳게 박혀있는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기둥, 믿음의 기둥에 의지하기 바랍니다. 구원이 되시는 예수 안에 깊이 기둥을 박고 나아가기 바립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라는 기둥에 우리 자신을 붙들어 매고, 예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성도가 되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며, 비가와도 요동하지 않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강풍이 불고, 폭풍이 밀려와도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는 승리하는 신앙인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마 11:1-15 / 박지온 목사
오늘 본문을 통해서 제목을 "네가 무엇을 보느냐?" 이렇게 잡았습니다. 사실은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의 길이 달라지고, 또 승패가 이루어지는 사실을 우리가 많이 보게 됩니다. 다락방 사역에도 많은 사람들이 왔습니다 만은, 다른 엉뚱한 것을 보고, 시험 들고, 넘어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볼 것을 본다는 초기 메시지 속에서 이 사실이 많이 강조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거의 낙심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 교회 다니는 사람보다도 교회 다니다가 낙심 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요. 그래서 이 다락방 사역을 하면서 그들을 만나보고, 다시 회복시킬 것을 회복시킬 때에, 새 힘을 얻는 그런 사실들을 우리가 많이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볼 것을 못 보고, 쉽게 말해서 참 복음을 못보고, 복음 안 믿는 것을 보았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이 엉뚱한 그런 방향으로 갑니다. 이것을 우리가 흔히 '종교라!' 그렇게 말하죠. 뭐 예를 들어서 참 생명! 새 생명! 이것을 못보고 육신적인 것! 인간적인 것! 욕심적인 것! 이것을 보고, 또 그것을 마음에 관심을 둘 때에, 또 그것을 구하고 있을 때에, 이 기복주의가 나오고, 또 종교가 나오고, 또 아무리 애를 써도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라는 것은 너무 좋은 일입니다. 참 선하고, 착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종교의 배경 이기도합니다.
그러나 왜 우리가 종교에 대해서 경계를 해야되느냐 하면, 종교는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축복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사단이 그것을 이용하기 때문에... 그래서 종교라는 사실에 대해서 자꾸 경계를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도, 교회 일을 하면서도 자칫 잘못하면 영원한 생명, 참 복음,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는... 교회 일을 하면서도 자꾸만 다른 일을 봅니다. 인간적인 것보고, 육신적인 것보고, 그렇게 되면 뭐가 나오느냐? 수단이 나와야 되고, 방법이 나와야 되고 이런 것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신비로 빠지기도 하고, 종교에 빠지기도 하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이제는 다른 열매와 결과가 나오게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그런 어떤 배경에서 성경에서 중요한 말씀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통해서 우리 예수께서 뭘 말씀했느냐 하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왔느냐 그러면서 세례요한에 대한 것도 되지만, 세례요한을 보는 세상, 사람들에 안목에 대해서도 말씀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7절이죠.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뭔가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또 그 볼 것을 보기 위해서는 어떤 볼 수 있는 장소로 나가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되었을 때 오는 불행을 총체적으로 여기에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서 뭐 쉽게 말해서, 좋은 옷을 입고, 또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가면 볼 수 있다! 그런데 광야에 가서 그런 것을 찾을 수가 있느냐? 이 인간들이 엉뚱한 욕심과 정욕으로 참 복음을 찾지 못할 때에, 다른 것을 찾으려고 애쓸 때는 엉뚱한 결과가 나옵니다. 결국 말해서 교회 와서 복음을 보고, 복음을 찾으려고 안 하고, 교회 와서 다른 것을 찾으려고 그럴 때에 욕심과 정욕을 채우려고, 그럴 때에 이것은 너무 불행스러운 그런 사실이 됩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여기가 좋사오니 복된 자리입니다!" 진짜 믿습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그러고서는 복된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좋은 것을 내 기준으로 해서 뭐냐? 참 생명을 찾으려는 눈을 못 뜨고, 다른 것을 찾으려고 그럴 때는, '여기가 좋사오니' 다른 게 나옵니다.
쉽게 말해서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해서 메마른 땅, 광야에 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그런 꼴이 되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는 실망과, 거기에는 고통만 따라올 수밖에 없는 그런 곳이죠. 그러니 교회라는 곳에서 여러분들이 많은 사람들이 왔다가 실망하고 가는 배경이 그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잘난 사람 보기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교회는 옷 잘입은 사람보기 위해서 오는 게 아닙니다. 교회는 목사가 '잘났다, 못났다!'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교회 목사가 복음 전하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교회 와서 복음 들으면, 교회로서는 여러분에게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요. 그곳에 모든 것이 포함이 되어 있고 모든 축복과 은혜가 약속이 되어지는 겁니다.
역시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눈이 여러 가지 환경과 사건을 통해서 세례요한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점을 오늘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1장 4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무슨 말씀이냐 하면, 요한이 옥에 갇혔고, 오랫동안 뭔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옥에 갇혔고, 이제 죽음 직전에 이런, 그런 지경에 요한이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께 가서 이렇게 물어 보라 그랬습니다. 뭐냐하면, '정말 당신이 메시야입니까! 우리가 오실 이를 기다리는데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아니면 당신이 정말 맞습니까!' 이런 질문을 했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한 것이 바로 4절입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말하라! 그러면서 5절에 쭉 기적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며 그 다음에 6절에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했어요.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랬습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죠.
여기에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요한복음 1장 30절에 보면, 30절부터 쭉 나가면서 34절까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한 그런 증거가 나와있어요. 30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29절에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말씀하고, 33절에는 성령으로 세례주실 자라! 말씀하고 34절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 세례 요한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선포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나도 위대한 분이요. 너무나도 엄청난 역사를 일으킬 자로 묘사되고, 선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요한의 지금 이 옥에 갇혀있는 동안에 뭘 느끼게 되느냐 하면, 세례요한의 기대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 기대와 전혀 다르게 엄청난 위엄과 영광으로 역사 될 것으로 기대했는데, 뭐냐하면 그 기도와 전혀 다르게 초라하게 나타났습니다. 아주 세례요한의 생각과, 또 그 다음에 그 제자들의 생각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데 대해서 여기 문제가 있죠. 그래서 우리가 이점에서 주의해야 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믿음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세상 적으로 이점에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시험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그 이름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그러면서도 오늘 성경에 말씀한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실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11장 6절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러분들 생각으로 예수가 어떨 것이다! 여러분의 생각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어떤 축복과 은혜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인간적인 생각과 욕심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게 주실 은혜와 축복을 상상하다가는 뭐가 오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오히려 실족하게 되겠다! 그런 내용입니다. 많은 경우 이점이 우리에게 현실로 나타나거든요. 교회 와서 '축복을 받는다!' 그러면 성경대로 축복이 아니고, 우리의 욕심과 생각에 의해서 축복을, 그리고 상상하고 그대로 안되면 하나님 죽었다! 그러고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제가 오늘 이번에 그 동경에 가서도 어떤 사람을 만나서, 하나님을 믿었는데, 하나님의 이런 축복과 은혜를 주실 줄 알았는데, 그래서 자기 부모를 향해서도, 하나님을 믿는 부모는 복을 받을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니까, 뭐라 그러냐 하면, '내가 안 믿겠다!' 왜? '내가 생각하는 그런 축복을, 당신들이 받으면 믿고, 아니면 안 믿겠다!' 이게 세상사람들의 생각이거든요. 교회 나오는 여러분들도 많은 경우 이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복을 받으면 믿겠고, 아니면 안 믿겠다!' 그래서 예수께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왔기 때문에, 예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 이름으로 실족하지 아니하면' 실족이 아니라 낙심만 안 해도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 중요하게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죠.
이때에 세례요한의 이런 어떤 의심이나, 이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그런 문제점을 조금 짚어가면서 우리 자신을 한번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례요한이 처한 환경이 그런 모든 여건이, 그런 입장이, 그런 의심을, 그런 문제를, 그런 낙심을 가져올 수 있도록 배경이 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예수님께서 메시아요. 그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요. 더 큰 권능이요. 능력자라면 세례요한이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예수께서 들었을 것이고, 안다 그러면 한번쯤은 뭔가 위로의 말씀도 주시고, 한번쯤은... 예를 들어서 인간적으로 찾아 올 수도 있는데, 뭐 한번도 안 찾아오시고, 전혀 냉정하시고, 연락도 한번 없으시고, 이러니까 뭔가 세례 요한이 쫌 그럴 수 있어요.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좀 느끼는 것은, 여러분 예수 믿고, 은혜 받게 되고, 은혜롭고, 뭔가 인간적으로 다 잘되면 문제는 괜찮은데, 예수 믿고, 또 주의 일을 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뭔가 자기에게 큰 어려움이 왔고, 힘든 일이 왔다 그러면, '교회가 그럴 수 있느냐? 아무개 장로가 그럴 수 있느냐? 누가 그럴 수 있느냐?' 이러면서 뭐냐? 누구를 의심하느냐? 하나님께 대해서 낙심하게 됩니다. 이런 배경이 너무 많거든요. 그 세례요한이 어떤 면에서 이런 환경에, 이런 낙심으로 나왔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잘 보셔야 합니다. 오히려 낙심은 더 큰 믿음을 일으키는, 믿음을 이끌어 내는 과정일수 있습니다. 낙심만 안 하면, 말하자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만 잃지 않으면, 그런 문제를 가지고 올 수 있더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뭐라 그러느냐 하면, 6절에 보면,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 15:7)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창 15: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지금까지 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다고 계속 말했거든요. 계속 말하고, 아들도 준다고 계속 말했는데, 아들 주신다고 말한 후에 20년이 넘도록 못 받았고, 축복을 주신다고 말했는데, 계속해서 또 돌아다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15장에 축복을 주신다고 또 말씀하니까! 뭐냐하면 의심이 생깁니다.
환경과 지금까지 이어온 이 일들 때문에 의심이 생겨서 뭐라 그러느냐, 하나님께 감히 이런 말을 합니다. "(창 15:8)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나님이 이 땅을 주실 것을 뭐로 나한테 증거 해줄 겁니까! 증명해 주십시오!' 어떤 면에서, 여러분 이 말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이 말조차도 나올 수 없어요.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제시한 것이 제사였습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였습니다. 창세기 15장에 제사제도! 그러면서 짐승을 다 배를 갈라 가지고, 또 이렇게 제사를 지내는 그런 사건을 말씀을 해 주셨죠.
그 다음에 사사기 6장 36절에 보면,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그러면서 37절에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려고 약속을 했거든요. 기도온에게!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기드온의 환경이 그렇지 못합니다. 미디안에게 계속 약탈당하고,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습니다. 이럴 때에 기드온이 하나님 앞에 기도한 겁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바로 여기에 내용입니다.
뭐냐하면 여러분 극단적인 환경과 ,어려운 문제 속에서 낙심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에 갖다놓아도, 말하자면 믿음만 포기하지 않으면, 여기에 더 큰 영광스러운 믿음으로 이끌어 오는, 그러니까 업그레이드 해주는 귀중한 기회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양털을 놓고는 하나님 양털에만 이슬이 있게 하시고 땅은 마르게 하옵소서' 그 다음에 또 그 한번 다시 합니다. '양털에는 바짝 마르고 땅만 젖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그대로 증거를 주셨습니다. 비로소 기드온이 일어나서 기드온 300명의 용사가, 그 엄청난 군대를 횃불과 항아리 들고 나가서 승리하게 하셨던 우리의 신앙의 역사를 볼 수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환경과 사건과 일들이, 낙심할 수밖에 없을 때에 오는 불 신앙들이, 이건 어쩔 수 없이 들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때에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그 순간이 엄청난 믿음으로 이끌어 올릴 수 있는, 사실을 보게 하는 기회입니다. 이 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엄청난 축복과 은혜의 기회를 보게 하시고, 인도해 나가시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역사 속에서도 많은 경우 반복이 되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나는 이 다락방 사역을 하면서 이런 어떤 기회가 오늘 우리에게 사실적인 기회로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런 생각도 해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믿고, 여러분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엄청난 복음은 환상이나 꿈이 아니다!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뭐라 그랬느냐 하면,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랬습니다. 무슨 말이냐? 복음은 환상이나, 아니면 막연한 이론이 아니다! 사실이다! 그러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말하라! 복음을 그냥 막연하게 설명하려고 하지말고, 사실을 말하라! 그리고 '사실을 말하라!' 그럴 때에 반드시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이게 증거라는 것이거든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사실 속에 간단한 것 아닙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증거를 약속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에, 하나님이 명령하실 것까지도 실행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를 주신 것이 성경에 약속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복음을 받을 때에, '예수는 모든 문제 해결 자다!' 그럴 때에 뭐냐하면, 이론이다! 막연한 어떤 이론으로 느끼고 있을 때가 많아요. 아닙니다. 그런 말씀할 때에 말씀 속에서는, 그 명령 속에 할 수 있는 힘까지 주신다는 것이 성경에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뭔가 '치료를 한다! 치료를 받는다! 한 주간 약속을 받았다!' 그러면 내가 현장 속에 들어갔을 때에, 하나님이 그것조차 주시겠다는 축복과 은혜의 약속이, 성경에 사실로 인도되는 약속인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치유라고 제가 늘 말씀을 하고 보는데, 치유라는 것이 뭐 특별히 고친다! 이게 아니거든요. 복음을 바로 깨달을 수 있도록 되는 것이 치유입니다. 영적 병이 들어놓으면, 영적인 문제가 생기면 복음을 못 깨닫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그런 문제가 해결되면 복음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깨닫게 하시는 역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뭔가 신앙 생활하면 뭔가 하나님께서 막 빛을 주시고, 어떤 뜨거움을 주시고, 어떤 신비로운 것을 주어서 탁 눈을 열게 하시고, 이런 쪽으로 옛날에 우리는 생각이 갔었다! 이것이죠. 그런데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은 복음은 뭐냐? '복음은 맨 정신이 되는 것이 복음이다!' 한번 받아합시다. "복음은 맨 정신에 되는 것이다!" 이 말이 좀 이상한데, '맨 정신이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은, 뭔가 막 허왕되고, 뭔가 기적을 바라고, 뭔가 욕심을 바라고, 뭔가 이런 게 다 사라지고, 이 사라지고 정상적이 되는 것이 복음이다! 옛날에 우리 뭔가 믿음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뭔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막 기적을 내려주고, 뭐 돈 뭉텅이를 내려주고' 그게 아닙니다.
여러분 그리고 일반 신앙 생활하면, 이상하게 해도 뭐 돈 뭉텅이가 떨어져야 되는데, 그 말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게 하늘나라의 영광이죠. 그러나 이 땅에서 여러분과 제게 주신 축복은 맨 정신으로 살아야 됩니다. 내가 일하는 데로 복을 받는 것이 성경에 축복이라는 배경이 가장 기본적인 겁니다. 상이라는 배경에 지난번에 설명을 드렸죠. 그렇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뭐냐? 복음은 사실입니다. 상식이하의 것도 아니고 상식수준에서 얼마든지 우리가 받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이것이 꿈으로 어떤 아니면 이상으로 아니고 현실적으로 사실적으로 이 축복과 은혜가 와질 것도 믿고 내가 누려질 사실도 확인하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누리고 있는 것이 성경은 복음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치유된다! 그럴 때에, 치유는 뭔가 하루아침에 치유되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맨 정신이 돌아오고, 그 다음에 지극히 상식적으로 돌아오고, 뭔가 지극히 머리가 정상적이 되고, 이런 것이 치유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이 성취된다!' 그럴 때에 '아, 맞구나!' 말씀 들으면 말씀이 믿어져요. 그 말씀이 뭐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워져서 믿어지는 게 아니고, 정상으로, 맨 정신으로, 그 말씀이 믿어지고, 그 다음에 그 말씀가지고 붙잡고, 묵상하고, 그 다음에 그 말씀가지고 묵상할 때에, 그 말씀이 한 주간, 그 묵상한데로 성취가 되는 것을 보게 되고, 그래서 이것이 꿈이 아니고 사실적으로 하나하나 진행이 되어 가는 현실을, 현실을 이상하게 보는 게 아니고, 진실하게 볼 수 있는 이런 어떤 역사와 축복이 바로 복음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이것이 안 되었기 때문에, 예수 처음 믿는 사람들이 엉뚱한데 시간 다 보내고, 뭔가 부지런하고 열심히 일해야 될 때는 일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하는데 시간 다 빼앗기고, 이런 경우가 많고, 그래서 세상에 인정을 받아야 될 때에는 인정을 못 받고, 이런 어떤 것들이 반대로, 역으로 나가던 것들이 너무 많은 겁니다. 우리가 주일 성수 한다! 그럴 때에, 주일 성수하면, 주일날 못한 것 하나님께서 월요일 날 한꺼번에 쏟아 부어 주리라! 물론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실 것은 주일성수 안 한만큼 손해가 옵니다. 그러나 주일성수 안 한만큼 손해가 오는 것 같은데, 그 다음에 따지고 보면 이 손해가, 손해가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러니 맨 정신을 이걸 뭔가 그 사실자체가 여러분 생활과 사건에 하나하나 생활화 되어가게 될 때에,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가 여러분에게 실질적으로 임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성공할 수 있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게 복음이고, 승리할 수 있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게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직장이나 일터에 이길 수 있는 생각을 하게 하고, 이길 수 있는 삶을 살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뭐냐하면 성공할 수 있는 생각은 안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생각만 하고,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면서, 성공한다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신비주의자들이나 생각하는 것이고, 쉽게 말해서 이런 것입니다. 일터에 가서 일을 전혀 안하고 맨 날 놀고,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복을 주시리라!' 이것은 종교인들이 하는 것이고, 이것은 뭔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지, 내가 일터에 갔으면 일을 해야 되는 겁니다. 공부할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되는 겁니다. 기술을 익힐 때는 기술을 익혀야 되는 겁니다.
복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럴 때에 맨 정신으로 살아가요. 그러면서 사실적인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이 여러분 생활과 삶에 이게 습관이 되도록, 이게 현실적인 삶으로 이어져야 되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날 여러분 말씀들을 때에, '말씀을 묵상하라!' 그럴 때에, 주일날만 예수 믿고 교회 왔다는 식으로, '아, 오늘 복 받겠다! 한 주간 복 받겠다!' 그런 말씀이 아니고, 주일날 여러분 오면, 말씀을 딱 받잖아요. 말씀 받으면, 그 말씀을 마음속에 딱 묵상하게 됩니다. 한 주간 계속해서, 그래서 이 묵상을 한다! 그럴 때에 그 말씀을 내 마음속에 계속해서 묵상하게 되면, 그 말씀이 성취되는 역사가 말씀에 힘이 있고, 능력 있는 그런 실제와 사실을 보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어떤 역사를 말씀해 주시면서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소경이 눈을 뜬다고 했어요. "(마 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그때당시 유대인들에게 쉽게 볼 수 있는 그런 불치병들입니다. 기후가 건조한 땅이고, 또 먼지가 많은 땅이라서 소경들이 많았다! 그 다음에 또 역시 마찬가지로 나병환자들이 많았고, 이런 어떤 것들이 그때 그 당시에 흔히 일어났던 그런 문제들이죠. 이런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면서도 불치병들입니다. 그러면 복음이라는, 하나님이 이 분을 참 메시아로 보냈다는 증거로 뭘 했느냐? 선지자들이 예언하신 그 예언의 말씀이 이 사람을 통해서 성취가 되어지게 될 때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 사람이라는 신뢰성이 여기서 확인되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런 역사들을, 구약에 이미 예언이 되었던 그 예언처럼, 오늘 여기에 설명하는 겁니다. '소경이 보고, 문둥병이 낫게되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다!' 그렇게 말씀했죠.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과연 참 복음을 잡았을 때에, 많은 경우 불치의 병들이 떠나게 되는 기적들이 나오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다락방 사역을 하면서, 특별히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낫는다! 된다!' 이 말에 배경이 뭐냐하면, 참 복음이라는 증거로, 이런 사실과 역사들이 나오더라 이겁니다.
이번에 가서 그 우울증이라는 문제가지고 일본에 메시지를 전해 드렸는데, 그 일본에 가니까, 우울증이라는 말을 가지고 이제 전하게 되니까, 뭐라고 말을 하느냐하면, '우울증이 있는 사람이 너무 많다!' 이겁니다. 그러니 저녁을 먹다보니까 어떤 한 분을, 우리 그 신 목사님이 아주 참 잰틀맨인데 그 식당에서 영접을 시켜요. 일본말을 하니까 알아듣지는 못하고, 부지런히 설명을 하더니만 이 사람이 밥 먹다가 밥도 안 먹고 앉아 가지고, 남은 밥 다 먹었는데 둘은 앉아 가지고 막 이야기하면서, 그 설명을 하고 영접을 하는데, 이 일본인이 손을 잡고 영접기도를, 그 여럿이 많은데서 하더라 구요. 하고 난 후에 뭐라 그러느냐 하면, '이 분이 그 우리 금방 들어온 누구 친구인데, 일본인 친구인데, 아무리 영접을 시키려고 그래도 영접을 안 하더라' 이겁니다. 지금까지!
그리고 만나 가지고 아무리 영접을 시키려고 그래도 다른 소리하고, 자꾸 영접을 피하고, 그런데 그 날은 왜 했느냐?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우울증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메시지를 전했는데, 이 사람이 멀쩡한데 뭐가 왔느냐? 우울증이 와 있었어요. 우울증이 와 있는데다가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이 사람이 메시지를 받으면서 뭔가 느낌이 있었던가 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문제가 해결되는 거니까! 그러니 이 사람이 설득력이 생겨 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설명이, 그 먹는 자리에서 설명을 했어요. 그러니까 '영접하겠냐?' 이러니까 '영접하겠다!' 이겁니다. 일본인들은 뭔가 우리하고 조금 다른 것이, 확실하다 싶으면 자기 의사를 분명히 하게 돼요. 그러니까 여럿이 앉아 있으면 또 낮선 사람 아닙니까! 앉아 있는데서 손을 잡고 막 예수를 그리스도로 따라서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영접을 그 동안 안 했는데, 했다고 그러면서 이야기를 해요. 무슨 이야기냐? 여러분 참 복음을 붙잡게 되면,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기적과 역사가, 이것도 내가 바라는 기적과 역사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따라서, 기적과 역사가 그의 형편과 사실과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일에 합당하도록 이루어주신다! 성취해 주신다! 이 사실들이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많은 경우 체험했던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 생활 속에 너무 많지만 항상 우리가 못 보게되는 이유가 뭐냐하면, '내 생각으로 기적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내 뜻대로 기적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받아합시다. "이미 우리 가정에 놀라운 기적이 이루어졌다!" 할렐루야! 이 찾아내지를 못합니다. 볼 것이 보여지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감사가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바라는 기적을 이루어 주옵소서!' 그건 욕심과 정욕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많은 경우 실패하고 넘어지는 그런 것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어떤 배경들을 조금 놓고 성경이 오늘 중요하게 뭐라 그랬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보내시면서 메시아 되는 증거를, 또 메시아의 증거로 보아야 될 것을 뭐라고 또 말씀했느냐 하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그랬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많은 말씀을 다 해석을 못하고요. '가난한 자들이 복음이 전파된다!' 그랬는데, 정말 그 복음은 구약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원하는 그런 어떤 수준과, 그런 어떤 청중이 아닌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때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은 복음을 전파할 대상이 아닙니다. 가르칠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소용이 없어요. 거기 가르치면 뭘 받아야 됩니까? 돈을 받아야 되는데,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은 과외를 시킬 수가 없어요.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을 줄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약에 메시아는,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율법주의자들과 달리 그분은 이 땅에 오셨을 때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한다!' 말하자면 돈이 없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돈을 주고 교습을 받을 수 없는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이다!'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어 가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편 72편 2절에 보면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4절에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또 12절에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시 72:13)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이사야 61장 1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참 복음이라는 증거가 여기에 있다! 다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가 구약에 쭉 예언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선호한 부자들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소외시켜 놓았던,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때에 이 사람이 바로 메시아의 증거다! 그 사실입니다. 그 세례요한이 그러니까 '볼 것을 보라!' 이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다락방 사역을 하면서 내가 많이 깨달았다는 것, 이전에 교회봉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아하, 그때 그것을 놓쳤구나!' 싶은 게 있어요. 교회가 부흥이 되려고 그러면 기도하고, 막 그렇게 좀 열심을 내었을 때에, 그때에 특징이 뭐냐하면 꼭 이상한 사람을 붙여줘요. 그러면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이 한사람에게 빼앗기는 시간이 너무 많아요. 그때는 뭐 한사람, 이상한 사람이 들어오면 그것 붙잡고 몇 날 몇 일을 기도하고 그랬으니까!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 사람을 좀 붙여주시려면 쓸만한걸 붙여 주던지 이상한 것 붙여서 힘만 빼고 사람 죽을 지경입니다! 안됩니다!' 낙심했을 때가 많았거든요.
그러니까 다락방 사역을 하면서 중요한 것이 뭐냐하면, 교회가 부흥되는 증거가 뭐냐? 이상한 사람이 많이 들어오면, 교회 부흥의 증거랍니다. 그게 하나님의 시작이에요. 이게 뭐냐? 예수가 메시아요, 그리스도시라는 증거요. 첫째인 겁니다. 왜? 그런 사람이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길은 한길뿐이니까!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락방 사역을 하면서, 뭐 특별히 치유사역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야, 다락방에 만큼 이상한 사람이 많이 들어온 데가 없고, 다락방인 만큼 뭔가 이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들어온 단체도 없겠구나!' 그런 것을 느꼈을 때가 많거든요.
'아, 이것이 복음이구나!' 말세에 갈 때가, 말세에 여러 사람들이 박대를 받고, 말세에 있는 사람들이 해결 받을 수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메시아이기 때문에, 그분이 참 구원자이시기 때문에, 참 구원자이신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다락방이라는 곳이, 뭐 다락방이다! 말할 것도 없죠. 참 복음을 가진 교회에, 참 복음을 가진 자에게, 참 복음의 증거로 이런 역사가 나올 수밖에 없구나! 이들이 왔다 하나님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일으켜 나가시는 사실과 실제가 체험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엄청난 축복과 은혜가 여러분과 저의 문제거든요.
그리고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어요. '예수께서 오셨다! 메시아라는 증거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이 배경 속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도저히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 이상한 사람들만 이렇게 모두 모였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할 수 없다는 증거로 이 축복과 역사가 시작된다!
여러분 어떤 면에서 기독교에 역사가 부자의 역사가 아닙니다. 요즘 복음 받게 되면, 복음 받는다! 참 돈 떨어진 사람 복음 받고, 이상한 사람이 복음 받는 경우가 많거든요. 왜? 어렵고 힘드니까 복음을 찾아 온 것이거든요. 그런데 우리 힘으로, 우리 능력으로는 엄청난 세계 복음화 이루어 나갈 수 없는 겁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가난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 하신다는 사실을 증거 하시는 것이 기독교요, 참 복음에 증거다! 그렇게 해석을 한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나는 이 교회 건축하고, 또 이 덕평 수련원, 총신 연구원을 매입을 했습니다. 사놓고 보니까, 강서로도 뭐 한 60억 교회 대 건축을 시작했어요. 우리도 지금 현재 대 건축을 수주100억 자리 교회를 지으려는 단계입니다. 그 다음에 전부다 지금 이제 다락방에서는 전부 교회 건축한다고 다같이 일을 벌여놓고 있는 이 판에, 이러는 참에 뭔가 돈 내어놓으라는 겁니다. 아마 오늘도 이제 그 당회를 해야 되는데 여러분에게도 또 뭔가 이 참에 하나님의 역사를 지금 봐야 되거든요. 있는 데서, 우리가 할 수 있는데서 하면 '아, 돈 있었으니까 했다!' 그러나 전혀 우리가 할 수가 없는데서 하나님은 세계 복음화의 엄청난 역사를 지금 이루어 가시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셔야 될 일이지,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 건축도 뭔가 우리 교인들 가만히 보니까, 꼭 여기게 똑 같아요. 가난한 자들이 복음을 받았는데, 부자가 없어요. 부자가 있어도 그저 촌부자지 부자가 없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세계 복음화라는 엄청난 일을 맡겼거든요. '아, 이것이 난 처음에는 그 돈이 다 어디 있냐? 이런 쓰여질 때에 돈이 없고, 돈이 다 어디 있냐?' 이런 소리를 하고 그랬는데, 돈이 어디 있는 게 아니고 그게 정상이다! 복음은 누가 하느냐?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겁니다. 믿음입니다. 비록 우리가 할 수 없는 것 같고, 할 수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믿음을 담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향할 때에, 여러분 가정과 교회에 축복이 다가 아니고, 여기에는 엄청난 기적과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사실을 말씀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가난한 자로 복음을 시작했지, 부자로 시작 안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부자로 시작했다. 지속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어떤 면에서 정말 우리교회가 복음 전할 수 있는 교회요, 세계복음화의 교회다! 할 수 있는 이유가 가난한 자로 시작했기 때문에, 더 확실한 증거입니다. 왜? 하나님이 하셔야 되기 때문에, 오늘 성경에서 말씀했습니다. 부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필요 없습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는 부자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부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 땅에 힘있는 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 자신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가 있기 때문에, 그 분의 권세와 능력으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분을 신뢰하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확실히 붙잡고, '네가 무엇을 보느냐?' 여러분과 저의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이 말세에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보여주실 것을 보고, 믿을 것을 볼 수 있는, 귀중한 축복과 은혜가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의심과 침체에 빠졌을 때
마 11-15 / 최영기 목사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하다 보면 때때로 의심과 회의에 빠지게 될 때가 있고, 그래서 신앙이 상승하고 전진하지 못하고 침체 상태에 빠지거나 오히려 퇴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종교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마틴 루터는 수년 동안 절망 가운데 있었고, 불신앙과의 숱한 갈등을 경험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육체의 유혹을 이길 수는 있다. 그러나 신에 대한 불경건과 낙심이라는 유혹에 대항해서 싸우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거의 잃어버리고 낙심이라는 파도와 폭풍우에 시달려 거의 죽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놀라운 상상력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것들을 마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묘사했던 죤 번연은, 수많은 불신앙과의 갈등을 경험한 후 "내 일생중에 겪었던 시험중에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복음의 진실성을 의문시했던 것만큼 견디기 어려웠던 시험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지난 세기 최대의 정통적이고 보수적인 목회자로 손꼽히는 영국의 로이드 죤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느 사람이 그의 신앙 생활 가운데서 의심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다시 한번 그의 신앙의 기반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며, 거짓된 평안을 누리거나 주제넘은 신앙주의에 안주해 있지나 않은지를 확인하여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이나 교회 역사 중에서 위대한 성도들 역시 거의 몇 차례 의심과 침체의 늪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러한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세례 요한, 그 세례 요한이 의심과 침체에 빠지게 된 원인 또 그것을 다루시는 예수님의 방법을 살펴보는 중에, 우리의 의심과 영적인 침체 상태도 치유받게 되를 바랍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 10장의 12 제자 파송에 대한 교훈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12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병고치는 권세를 주어 파송 하시면서 여러 가지 그들이 지켜야 할 제자도에 대해 당부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마 10:37-39을 보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12 제자들에게 주어진 제자도는 바로 우리들이 그렇게 살고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할 수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고, 이에 저희 여러 동리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본받을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고 지시하고, 가르치시지만 아니하고, 명하신 그대로 실천하시고, 솔선수범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가르치신 대로 자신이 실천하는 것, 이것이 사실 목회자들에게 또는 구역장 교사들에게 제일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 다음 2-3절을 보면 오늘의 주제가 되는 내용으로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먼저 당시의 세례 요한의 형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릴리의 실권자 헤롯 안티파스는 로마에 있는 자기 동생을 방문합니다. 그 방문 기간중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범한 것으로 전해져 옵니다. 헤롯은 집에 돌아와 아내와 이혼하고 동생에게서 빼앗은 제수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같은 천인공노할 악행을 전해들은 세례 요한은 헤롯을 단호하게 책망을 합니다. 헤롯 같은 패륜아 잔인한 독재자를 책망한다는 것은 결코 안전할 수가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세례 요한은 붙잡혀 사해 동편에 있는 '마카이루스'의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옥중 생활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특별히 세례 요한에게는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례 요한은 광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생애 대부분을 넓고 탁트인 광야에서 맑은 바람을 호흡하고 또 광활한 하늘을 지붕삼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어둡고 공기마저 탁한 좁은 감옥안에 있게 되었고, 아마 사슬에 묶여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형편은 세례 요한과 같이 광활한 자연속에 살았던 사람에게는 죽음과 같은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아마 이렇게 생각하였을는지 모릅니다. 만일 예수가 메시아라면 어찌하여 그의 선구자인 내가 이러한 고통 가운데 지내도록 내버려 두실까? 어찌하여 예수님은 도와주지도 않고, 가엽게 여기지도 않고 그냥 죽어 가게 내버려 두실까? 이렇게 세례 요한이 의심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고통스러운 환경 가운데서 비롯된 육체적 감정적인 요인이었던 것같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심과 침체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의 질병을 고쳐 주시지 않을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토록 나를 가난하게 내버려 두실까? 세상을 살다 보면 사면초가가 될 적이 있습니다. 하는 사업이 잘 되지 않습니다. 자녀도 내 마음처럼 자라 주지 않습니다. 부부 관계도 원만치 못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나쁩니다. 몸에는 병이 있습니다. 친구도 이웃도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세상만사 생각하면 골치만 아픔니다. 죽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럴 때 하나님의 존재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 본 적이 없으십니까?
세례 요한이 의심과 침체에 빠진 또 다른 원인으로는 정신적 영적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미 메시아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손에 도끼를 들고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를 찍어 버리는 메시아,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시는 진노가 가득한 심판자 메시아, 이것이 세례 요한의 메시아 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 자신은 무슨 기적을 행하지 않았지만, 메시아가 오시면 놀라운 권능으로 헤롯 같은 악한은 당장 심판해 버리고, 조국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가 정말 그리스도인가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이라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 것이다 라고 기대했다가, 그 기대가 어긋날 때 하나님을 의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플 때 기도하면 언제나 고쳐 주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몇 배로 갚아 주실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실 것이다, 이렇게 기대했다가 그렇지 않으면 의문이 생기고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섬길 가치가 있는 것일까? 예수 믿어 가지고 무슨 유익이 있는가? 라고 의심을 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의 의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어떠했습니까? 4-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메시아에 대하여 이사야가 예언한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세례 요한에게 알려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구약 성경에 대해,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메시아 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물론 예수님께서는 산상 보훈에서 심령의 가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본문은 물질적 가난도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H. Stowel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복음은 특별히 가난한 자가 받아들이기 쉽다. 2)복음은 가난한 자가 혼자의 힘으로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비싼 값을 치르어야 살 수있는 것은 아니다. 3)복음은 기회 면에서도 가난한 자에게 알맞다. 복음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마음의 문제이다.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에 대해서 Dr. Guthrie는 "국왕 곁에 나아가 왕궁의 영예를 향유하고, 국가의 높은 관직을 차지하는 자들은 주로 지체가 높은 자들이다. 왕의 총애는 비천한 삶을 사는 낮은 곳에 내려오는 법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의 은총은 비록 산꼭대기는 말라 있을지라도, 골짜기 아래에는 축축이 남아 있는 축복의 이슬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들에는 단 하나의 보석도 남겨 놓지 않으면서도, 낮은 덤불에는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달아 놓고, 넓은 잔디위에 진주들을 깔아 놓으시는 것이다. 이 나라는 약하고 온유하고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을 위한 나라이다"고 아름답게 묘사를 했습니다.
6절에는 예수님의 한 마디 경고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잘못된 메시아관, 잘못된 예수 그리스도관, 이것 때문에 유대 민족처럼 실족한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 11:27에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했는데, 올바른 예수 그리스도관을 갖는다는 건 참으로 복된 일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간 다음 예수께서는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대부분의 말씀이 요한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너희는 세례 요한을 갈대처럼 흔들리고 불안정한 사람으로 보느냐? 아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이냐? 너희들은 세례 요한이 사치와 안일을 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더냐? 옳다.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그는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왜냐하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멀리서 메시아를 대망 하면서 예언하였으나, 세례 요한은 직접 메시아를 바라보며 증언했기 때문이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 까지니,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 세례 요한은 한 시대의 끝을 맺었고, 새 시대의 막을 연 사람이다. 세례 요한은 말 4:5절에 예언된 엘리야이다"
이와 같은 내용들이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이며 칭찬입니다. 사람들은 면전에서 칭찬하고 아첨하다가, 돌아서면 비방하고 욕하는데, 예수님은 의심 때문에 질문하러 보낸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선지자가 되어 가지고 메시아가 누구인지도 모른단 말이냐? 나에 대하여 의심을 하다니 그래 가지고 어떻게 선지자 노릇을 할 수있겠느냐? 책망을 하시지 않고, 그들이 떠난 다음 보지도 듣지도 않는데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최대의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가장 나쁜 점을 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요한의 최선의 것을 보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구원받고서 의심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의심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아닙니다. 통증이 육체에 고통을 주듯이, 의심은 영혼에 해악을 끼칩니다. 통증은 하나의 경고요, 어딘가가 탈이 났다는 신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의심이 있다면 설사 그가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라 할지라도, 그러한 의심들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표시입니다.
영적 침체의 징후들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약화되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짐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일에 열정이 줄어들게 되고, 헌신의 마음이 점점 없어짐이고,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는 일에 게을러지는 것이고, 경건 생활에 관심이 점차 적어지는 것이며, 드디어는 죄에 대하여 두려움이 적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영적인 쇠퇴기에 있는 성도는 기도하지 않게 되고, 양심이 마비되고,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사라지고 불안과 불만족이 자리잡게 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이것은 세례 요한이 옥중에서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지난 날 예수님에 대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거한 바가 있고, 세례 요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매어 주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했으며, 예수님은 흥하여야겠고, 자신은 망하여야 하리라고 까지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확실히 증거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하면서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1)육체적 감각적인 감옥의 고통 때문에 2)정신적 영적인 원인으로 예수님을 심판자로만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위대하고 강력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이렇듯 의심과 침체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연약한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세익스피어는 낙망의 순간에는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라파엘도 한 때는 자신이 화가라 불리울 자격이 있는가를 의심했다고 합니다. 가장 위대한 성도들도 때로는 세례 요함처럼 의심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기전,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생각, 우리가 갖고 있는 메시아관, 예수관이 잘못되어 있지 않은가를 먼저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의심은 잘못된 메시아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심에 대한 가장 큰 해결 방법중 하나는 다시 성경을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틀린 것이 아니고, 내가 틀린 것을 발견할 수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계속해서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옥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 세례 요한에게 자신의 하시는 일을 전해 주면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엘라 휠러 윌콕스라는 시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내 가진 모든 배가 돛대는 부러지고 돛이 찢어져
난파하여 돌아올 지라도 나는 주님을 의심치 않으리!
모든 죄악에서 나를 건져 주시며
결코 실패함이 없는 주님의 손을 나는 믿으리
내가 찢어진 돛 때문에 울지라도
내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외치리.
어려움이 벌떼처럼 몰려들고
슬픔이 비처럼 쏟아질 지라도 나는 주님을 의심치 않으리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만
내가 원하는 곳에 이를 수 있다고 나는 믿으리
내 십자가 아래서 신음하고 분노할지라도
모진 손상을 통해서
보다 큰 얻음을 보게 되리.
이 시가 오늘 우리의 믿음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한 마디로 너무도 너그럽고 인자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낙심중에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시사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엄마가 어린아이를 사랑으로 어루만지듯, 하나님은 엘리야를 사랑으로 어루만져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며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 중에 세례 요한처럼, 또는 엘리야처럼 의심과 침체 상태에 빠져 있는 성도가 있으시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성도들을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고, 의심과 근심을 치유해 주시고, 새 힘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의 장애인 사역
마 11:1-6 / 김상복 목사
오는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장애를 훌륭하게 극복한 분들 중에 강영우 박사가 있습니다. 강 박사님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마치고 현재 백악관의 대통령보좌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 분의 경우를 보면 장애가 문제가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장애 때문에 낙심할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최근 ‘말아톤’이라는 영화가 장안에 화제와 감동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 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우정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전통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매우 좋지 않은 문화와 습관이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던 시절만 해도 아침에 장애인을 만나면 재수 없다고 침을 뱉는 악한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문화적 성숙으로 점차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유엔에서는 1981년 세계보건의 해를 맞아 전 세계적으로 장애인의 날 행사를 벌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의 날이 제정되었고 보건복지부, 장애인복지진흥회, 장애인복지시설협회, 장애인고용촉진공단 등 장애인들을 돕기 위한 국가적, 사회적인 노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스티븐 호킹 교수도 장애인학자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는 매우 심한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도 세계적인 물리학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의 저서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의 책을 읽었다는 위로를 받을 셈으로 끝까지 읽기는 했지만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이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장애인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무시하고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미국에 레이 찰스라는 흑인가수가 있습니다. 최근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를 20세기 최고의 가수로 선정한 것을 보았습니다. 흑인에다 눈마저 보지 못했지만 세계적인 가수로서 자기 역할을 잘 해냈습니다. 정치인으로는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치에 큰 역할을 했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있습니다. 시인 송명희씨는 장애가 심해서 그 분이 하는 말은 어머니밖에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의 아름다운 시는 한국교회에 얼마나 큰 영적인 축복을 베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분의 시에 곡을 붙인 많은 찬송가가 불리고 있습니다. 장애는 물론 어렵습니다. 그러나 장애가 저주는 아닙니다. 장애가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장애아들을 위한 ‘사랑부’와 ‘사랑의 학교’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교회에는 일찍이 앞선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이미 17년 전부터 정신장애아들을 영적으로 돕고 생활을 돌보고 있습니다. 장애아들은 주일에는 사랑부에서, 주중에는 사랑의 학교에서 매일 새로운 학습 경험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1층에 내려가시면 사랑부와 사랑의 학교 학생들의 작품 발표회를 볼 수 있습니다. 매년 해오고 있는 발표회지만 올해는 솜씨가 부쩍 발전해서 무척 감동적인 자리가 되고 있습니다. 관람하시면서 그들을 칭찬하시고 위로도 해주시기 바랍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제시한 건강의 기준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신체적 건강(Physical health)입니다. 둘째, 정신적 건강(Mental health)입니다. 셋째, 사회적 건강(Social health)입니다. 원만하고 건전한 대인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정서적,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해도 장애인입니다. 넷째, 영적 건강(Spiritual health)입니다. 삶의 모습을 우주와 만물,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삶과 죽음 고통 기쁨 등 종합적이고 원만하게 볼 수 있어야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중 어느 하나가 부족해도 장애인입니다. 몸에 부족함이 있거나 정신에 모자람이 있거나 사회성이 결여되었거나 영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장애인입니다. 그렇다면 장애인 아닌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어느 면에서건 우리는 모두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육체적 장애인이 아닐지라도 그렇게 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교통사고, 안전사고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후천적으로 장애인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 참 훌륭한 젊은이가 있습니다. 믿음도 좋고 인물도 출중한데 2주 전에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위로를 하러 갔던 제가 오히려 그로 인해 격려를 받았습니다. 부모님 안색이 조금이라도 어두워지면 농담을 하며 위로하는 그는 비록 몸은 장애를 지니게 되었지만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누구 못지않게 건강한 젊은이였습니다.
사고가 아니라도 질병으로, 또는 나이가 들면서 대부분의 사람이 신체 장애인이 됩니다.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어느 분은 손의 관절에 병이 와서 더 이상 연주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대학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할 때 이런 일이 생기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보통 사람도 나이 40, 50세만 되면 손과 다리의 관절들이 조금씩 고장이 납니다. 오늘 아침 1부 예배 후에 여러분들이 교회에 오시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기도 탑에 올라갔습니다. 많은 분들이 1층 입구에서부터 옥외계단을 걸어서 3층 본당까지 올라오시는데, 쉬지 않고 끝까지 올라오시는 분은 건강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걷는 것이 싫어지고 자꾸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어지면 몸에 장애가 오기 시작했다는 징후입니다. 장애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장애인을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1986년에 한 달 동안 중국과 북한을 다녀온 후 갑자기 시력이 나빠져서 안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누구에게나 닥칩니다. 건강할 때 서로를 돕고 사랑의 손길을 펴며 사시기 바랍니다.
회개하라고 외치던 세례 요한은 헤롯대왕에 의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시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당신이 바로 오신다고 했던 그 분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릴까요?”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11:5). 예수님은 완벽한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은 자까지 온전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학습장애로 공부를 못하여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장애인을 치유하고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오셨습니다.
장애에는 육체적 장애만이 아니라 마음의 장애도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몸은 건강하나 영적으로 장애인인 자들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도다.” 이해가 된다 하더라도 실천이 잘 되지 않습니다. 손이 움직이지 않고 다리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알기는 알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순종하는 행위가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일어서서 걷고 뛰고 찬양해야 되는 줄은 아는데 실천이 안 되는 이들은 영적인 장애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8년 동안 허리가 굽은 사람, 38년 동안 걷지 못한 사람, 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 신체가 마비된 사람, 귀머거리, 마른 손, 벙어리를 고치시고 심지어 잘린 귀를 붙이시는 등 장애인들을 위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기적 38가지 중 30가지가 장애인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육체적 정신적 또는 성격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난 성격으로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잘못된 습관 때문에 삶이 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원만한 인생을 살지 못하는 모습도 많이 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장애자를 돕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면 장애로부터 해방이 되고 자유를 얻고 치유를 받습니다.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환자 자신이 직접 접근을 해야 됩니다. 많은 환자가 예수님께 접근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당신이 하기를 원하시면 나를 얼마든지 장애에서 구출해주실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접근한 사람들은 모두 치유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인생에 장애가 무엇이든 그것이 고통과 짐이 된다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고쳐주실 것을 믿고 오십시오. 그분께 다가가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십자가에서 나의 장애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시고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정신적 영적 신체적 성격적 장애를 풀어주시옵소서.” 믿음으로 간구하면 여러분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장애인 주위의 친지들의 믿음으로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죽어가는 딸을 위해 아버지가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모든 병을 고치고 모든 장애에서 해방시켜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십시오.” 본인이 스스로 도움을 구하지 못할지라도 주위에서 그를 위해 부르짖으면 예수님께서 도움을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 자신이 직접 환자나 부모를 찾아가기도 하셨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주여, 낫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네 침상을 들고 일어나 집으로 가라.”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여러 가지 장애로 인해 받는 고통이 많습니다. 우리에게는 해결할 능력이 없고, 의사조차 어떻게 할 수 없을 때라도 2천년 전에 자유와 해방을 회복시키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동일하게 도움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움을 주실 때 손을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손을 환자의 눈이나 몸에 대거나 얹기도 하시고 상대방의 손을 붙잡아 일으키기도 하셨습니다. 눈에 흙을 발라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손은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으로 사랑을 표현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그 아름다운 손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아프고 힘들고 슬프고 외로워서 인생을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는 형제자매가 여러분 주위에 있으면 손을 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그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그들을 끌어안고 등을 어루만지며 쓰다듬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익한 도구로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도 도움을 주셨습니다. 치유를 명령하셨습니다. “나아라.” “일어나라.” “손을 펴라.” 질병을 꾸짖고 책망하기도 하셨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잘못된 말 한 마디 때문에 건강한 사람이 정서적 충격을 받고 평생 장애인이 되는 경우를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 내 언어가 치유의 언어, 회복의 언어, 축복의 언어가 되게 해 주옵소서.” “믿는 대로 되리라.” 믿었습니다.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어를 주셨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믿음의 언어, 치유의 언어, 영적인 언어를 가르쳐주셔서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언어로 주위의 아픈 자들을 치유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에너지가 흘러들어갔습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사회적,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에게는 건강한 에너지가 흐릅니다. 균형 있게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건강의 에너지가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악수를 하거나 잠깐 시간을 같이 보내도 무언지 모르게 그의 건강한 힘이 우리에게 전해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하고 장애가 있으면 에너지가 부족해서 오히려 상대방의 에너지를 빼앗아가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만나면 피곤하고 힘드니까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단 한 가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참 단순합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방법이 효과가 있습니다. 2000년 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동일한 효과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와서 건강을 온전히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아픈 가슴을 끌어안고 주님께 와서 부르짖으며 주님과 대화하고 치유를 구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경제적, 사회적, 정신적, 정서적, 육체적 그 어떤 장애에도 예수 믿는 사람의 방법은 한 가지입니다. 주님께 와서 건강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건강한 에너지가 넘쳐서 여러분이 움직일 때마다 다른 사람에게 치유의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대가없이 공개적으로 치유하셨습니다. 본인은 포기했지만 예수님이 따라가셔서 고쳐주신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실 필요가 없다고 했음에도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많은 이들은 사람 만나는 것을 회피합니다. 그럼에도 기도로 찾아가고 또 직접 찾아가는 발걸음을 통해 장애가 치유되는 역사가 우리로부터 시작되어 주위로 번져가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장애인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면에서는 이미 장애인입니다. 서로 돕고 사랑하고 기도하고 유익이 되어야 됩니다. 장애인을 무시하거나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격려해주어야 됩니다. 여러분 중에 기업을 하시는 분이 계시면 단순노동이 필요한 일거리는 우리 교회 사랑의 학교에 주십시오. 그 젊은이들이 수입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 자신감을 갖도록 도와주고 싶습니다. 다른 분들도 헌금과 몸으로, 시간과 재능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장애인을 가진 가정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구역이나 지역에서 서로 협력해서 단 몇 시간이라도 그 어머니에게 휴식의 시간을 줄 수 있고, 장애인의 외출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구체적인 도움의 손길을 펴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지을 때도 장애인들이 편리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했습니다. 시각장애인 단체에서 이번 여름수련회를 우리 교회에서 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 교회 시설이 그들에게 너무 편리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던 일을 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하고 가난하고 질병이 있는 자들을 위해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들을 위해 사랑의 손길을 폄으로써 장애인에 대한 악한 습관이 있던 이 땅에도 아름다운 사랑의 꽃이 피기를 원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마 12:1-6 / 김영규 목사
세례 요한이 던진 중요한 질문
본문 내용은 간단합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아주 중요합니다. 세례 요한이 한 질문은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질문입니다. 또한, 주님이 하신 대답은 우리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해답입니다.
먼저 질문을 할 당시 세례 요한의 처해 있던 환경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 세례 요한은 사해 동쪽에 있는 한 城의(마케러스 성으로 추측되는 곳) 깊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가둔 사람은 헤롯 안티파스란 사람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헤롯”이란 이름이 자주 나옵니다. 신약 성경에 등장하는 헤롯은 대략 5명 정도 되는데, 거의 100년 가까이 이스라엘 지역에서 행세했던 한 집안사람들입니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헤롯은 헤롯 대왕으로 예수님 탄생 시에 베들레헴의 신생아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했던 인물입니다. 다음으로 나오는 헤롯들은 그의 아들, 손자, 증손자들입니다. 헤롯 대왕은 다섯 명의 여자로부터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이 아들들은 각자 정치적인 야욕과 탐심이 가득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각기 로마 황제에게 로비 활동을 해서 영토를 차지하려고 애썼습니다. 로마 황제 케사르는 헤롯의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할하여 각기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분봉왕이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을 가둔 사람은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그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역을 다스렸는데, 매우 교활하고 모략에 능한 인물입니다. 그는 異腹兄인 헤롯 아켈라오와 권력 투쟁을 벌이는 한 편, 異腹 동생인 헤롯 빌립과도 갈등을 빚었습니다. 특히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를 가로챘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책망한 것이 세례 요한입니다. 아무리 고약한 왕이로서니 동생의 아내를 가로채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은 인륜에도 어긋나는 일이고, 유대인의 율법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에게 공개적인 질책을 받자, 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세례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더니 결국에는 목을 베는 斬刑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절박한 시기에 할 말도 많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이 질문 한 마디를 유언처럼 던지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세례 요한이 선지자로서 행한 마지막 사역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세례 요한은 이 질문 하나를 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도대체 왜 이 질문이 그렇게 중요한 질문일까요?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질문 내용은 간단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 질문은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것입니다. “오실 그이”란 말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의 예언 가운데 “실로”가 오신다고 했습니다. 실로는 곧 메시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러 차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6-7)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11:1-5)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61:1-3)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사35:5-6)
유대인들은 누구나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400년 이상 나라를 잃고 외국의 지배를 받아 왔습니다.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알렉산더 제국, 시리아, 로마제국...등의 압제를 받으면서 메시야가 나타나기를 갈망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구세주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세례 요한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회개를 외치면서 메시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요한의 차림새를 보면 전형적인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에 살았습니다. 이런 모습은 유대인들이 400년 동안이나 보지 못했던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열광을 받으러 온 선지자가 아닙니다. 그의 사명은 오직 메시야를 세상에 소개하는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메시야가 곧 나타날 것이라고 알렸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는 요한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외쳤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도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야의 앞길을 예비하러 온 선구자로서 그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을 세상에 소개한 세례 요한이 오늘 새삼스럽게 예수님이 누구냐고 묻고 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그 이유가 뭘까요? 대개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 자신의 의구심 때문이란 해석이고, 둘째는 제자들에게 메시야를 확인시켜 주려고 한 질문이란 해석입니다.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합니다. 우선 세례 요한 자신의 의구심입니다. 세례 요한이 훌륭한 선지자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구약의 선지자입니다. 요한 자신도 전통적인 메시야관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전통적 메시야관이란 정치적인 메시야입니다. 메시야가 나타나서 유대인을 해방시킵니다. 원수들을 멸하고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 국가를 창설합니다. 메시야가 왕이 되어 유대인은 전 세계를 지배한다는 생각입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소개는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적을 지켜보니 그가 생각했던 이런 메시야 하고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았습니다. 왕이 되셔야 될 분이 낮고 천한 모습으로 사십니다. 심판을 하셔야 될 분이 심판은커녕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병자를 고치고, 죄인을 용서하십니다. 도대체 헷갈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전 유대인을 대표해서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진 겁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려야 됩니까?”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세례 요한 자신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전 인류에게 알리기 위해서 최후로 질문을 던졌다는 해석입니다.
어떤 동기에서 질문을 했든지 결과는 마찬가집니다. 예수님이 과연 우리가 믿고 의지해야 될 메시야인가? 아니면 다른 메시야를 기다려야 하는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맡겨도 되는 일인가? 내 생명, 영혼, 내 운명, 내 가정, 내 인생 전부를 맡겨도 되는 분인가? 이런 결단 없이 예수를 믿는다면, 껍데기 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나는 과연 예수를 누구로 알고 믿는지 확인해 보세요.
너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라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기 전에 자신이 행하는 일들을 보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요, 철학이 아니라 삶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당연히 삶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주님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여섯 가지 표적들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표적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이 표적들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만 나타난 작용을 말한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지 나타나는 증표를 얘기한 겁니다. 그러면 언제 내게 이런 이적들이 일어났나요? 내게 이런 표적들이 일어난 것을 보았습니까? 체험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기적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그 하나 하나에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 영적 의미가 뭘까요? 그 내용을 살펴보면서 내게도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소경을 고치신 일입니다. 성경에서 소경이란 병은 영적인 의미가 아주 큰 병입니다. 즉, 영적으로 눈 먼 사람을 가리킵니다. 육신적으로도 앞을 보지 못하면 답답합니다. 사물의 모양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어요. 카메라 촬영에 관심 있는 분들은 빛과 어두움에 따라서 색깔이 어떻게 변화무쌍한지 경험하실 겁니다. 눈은 인생의 창문입니다. 눈이 밝아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영의 눈은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눈 뜬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39-41)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의 눈을 뜨게 하시는 분입니다. 마음에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안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신 사람은 천국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영혼의 세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모신 사람은 영혼의 세계가 보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천국이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을 알면 천국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의 섭리가 보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신 救贖의 역사가 보입니다. 시대가 보이고, 하나님의 심판이 보입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보입니다. 바로 이런 눈이 떠졌다면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주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육신의 눈으로 보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의 눈에 뭐가 보이면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 즉 믿음의 눈으로 보셔야 됩니다.
둘째로, 앉은뱅이를 고치셨습니다. 앉은뱅이란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말합니다. 발 걸음은 인간의 행동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앉은뱅이란 행동이 죽은 사람입니다. 알면서도 행치 못하는 사람, 죽은 행실의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면서도 행치 않습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행치 않는 게 아니라 행치 못합니다. 거짓말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 합니다. 새치기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새치기 합니다. 도적질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도적질 합니다. 간음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간음합니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유행가 제목대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알면서도 행치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탄식했습니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15,18-19,21-24) 알면서도 행치 못하는 도덕적 불구, 행실의 불구자들! 인생은 바로 그런 불구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적 불구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자유가 있다면, 믿음으로 행동할 수 있다면 주님이 그 마음에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문둥이를 고치셨습니다. 문둥병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부정한 병으로 언급됩니다.(레위기13장) 문둥병 자체가 부정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문둥병보다 더 보기 흉한 병도 많습니다. 문둥병이 특별히 부정하게 취급된 것은 죄를 상징하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은 죄의 성질과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문둥병이 몸을 썩게 하듯이 죄는 영혼을 썩게 합니다. 문둥병이 감각이 없고, 아픔이 없듯이 죄를 짓는 자도 감각이 없고 아픔이 없습니다. 마약, 도박, 알콜중독, 도적질, 살인, 강도, 모든 죄가 그렇습니다. 웃으면서 저지르고, 웃으면서 감옥 갑니다. 양심이 마비되고 영혼이 죽어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문둥병자가 세상에서 격리되듯이 죄를 지으면 감옥으로 격리됩니다.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격리되어 지옥에 떨어집니다. 문둥병이 완치가 없듯이 죄도 치유 불능한 병입니다. 바로 이런 병을 고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넷째로, 귀머거리를 고치셨습니다. 귀머거리를 고치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병입니다. 이 세상에 수 많은 소리가 있습니다. 의미 있는 소리도 있고, 의미 없는 소리도 있습니다. 노래 소리 같은 음악, 가까운 사람끼리 나누는 다정한 대화 소리, 새 소리나 풀벌레 소리가 다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소리를 구별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귀입니다. 귀머거리는 의미 있는 소리든지, 의미 없는 소음이든지 듣지 못합니다. 소리 구별을 못해요. 귀머거리는 바로 바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영적이 청각 장애를 뜻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11:15,13:9, 눅8:8)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4:2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2:7,11,17,29, 3:6,13,22) 영적인 귀가 열려야 됩니다. 잡소리만 듣는 귀에서 진리를 듣는 귀로 변해야 합니다. 공중에는 수만 가지 전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수신기 주파수를 제대로 맞추면 음악도 들리고 말소리도 들립니다. 우리는 귀를 고쳐야 됩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 마음의 귀, 영적인 귀를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다섯째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죽은 자 가운데서 육체적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죽은 직후에 살리셨습니다. 관을 떠메고 장사지내러 가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죽은지 사흘이 지나서 시체에서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 부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생명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영혼의 소생을 상징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적으로는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은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과 끊어진 채로 소망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다가 불현듯 죽음이 다가오면 절망하면서 떠나갑니다.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영혼의 죽음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은 하나님 품에 살 때에 최상의 행복을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버린 상태에서 살다가 지옥에 떨어지고 맙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품에서 살지 못하고, 하나님과 원수된 채로 살아갑니다. 바로 이런 영적 죽음에서 우리를 건지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여섯째로,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가난은 앞서 말씀드린 모든 불행의 종합입니다. 가난은 불행한 인생을 만듭니다. 가난하면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몸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합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부요함에 달려 있습니다. 요즘도 보세요. 가난한 사람은 어디를 가나 천대를 받습니다. 남의 눈에 가난한 모습으로 다녀 보세요. 음식점엘 가도 푸대접, 관공서를 가도 푸대접, 심지어는 종교인들도 푸대접을 합니다. 인도의 카스트를 보면 수드라 계층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가난하면 비참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가난은 물질적 가난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영적인 가난은 더 큰 문제입니다. 마음에 만족이 없고 기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 유흥가를 전전하며 육신의 향락에 빠진 사람들, 돈의 노예가 되어 인간성을 잃어버린 사람들....모두가 영적인 파산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제 요약해 봅시다. 주님은 각종의 의미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런 일들은 메시야가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런 이적을 행하신 것은 예수님이 곧 메시야란 증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말로 하지 않으시고 나타난 증표로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논리적으로 아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모심으로 내 인생이 전면적으로 바뀌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인생이 변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알면서도 행치 못하는 도덕적인 불구를 고치세요. 예수님을 통해서 문둥병과 같이 썩어가는 죄의 병을 고치세요. 예수님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 영적인 소리, 바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혼의 귀가 열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 죽음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적으로나 육신적으로나 가난의 비극을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런 것을 얻지 못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인하여 실족하지 말라
남은 일은 하나 뿐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서 여전히 의문을 품고 신뢰하지 못한다면 신앙은 헛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음은 물론 풍성한 은총과 축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결혼한 부부가 서로를 의심하면서 맡기지 못한다면 결혼 생활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가정의 남편이 아내를 의심한 나머지 일가족이 자살을 했습니다. 남편은 자녀들의 혈액형이 자신과 다른 것을 가지고 아내를 의심했습니다. 아내도 남편도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의 혈액 검사가 잘못 됐어요. 오해는 비극을 불러 옵니다. 그런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오해하는 것만큼 큰 불행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구주로 보내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죄를 대신 덮어 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하나님 품까지 인도하시는 목자십니다. 악한 영들을 제압하시고 우리를 자유케 풀어주신 주님이십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요, 보호자시요,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확실히 알고 맡기든지 그만 두든지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1-6) 주님을 믿는 것은 고사하고, 주님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자들이 있습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사8:13-15) 이스라엘의 두 집은 곧, 유다와 이스라엘의 두 왕국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메시야 때문에 걸려 넘어져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 조금 안다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성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 조금 아는 척 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교회를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 조금 아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아무 종교도 없는 사람들보다, 무엇이든지 믿는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아무 철학도 없는 사람보다 개똥철학이라도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아는 것이 병입니다. 그릇된 편견이나 선입견을 말하는 겁니다.
오늘 주님은 여러분께 어떤 분이십니까? 세례 요한의 질문을 해 보세요. 주여 우리가 주님을 믿어야 됩니까? 다른 분을 믿어야 됩니까? 그 해답은 간단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고쳐진다면 주님은 우리의 메시야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눈을 떴다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행동의 불구를 고쳤다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문둥병과 같은 죄악 된 본성을 고쳤다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바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렸다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면, 주님으로 말미암아 가난을 벗어났다면, 나는 주님의 사람입니다. 주님은 정말 나의 구주십니다. 전폭적으로 믿고 주님께 모든 인생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오 해
마 11:1-6 / 박세갑 목사
제자들에게 처음 일을 맡겨 파송하신 후, 주님은 몸소 가르치시며 전하시는 일을 더욱 힘 있게 계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주님께는 여러 가지 새로운 문제들이 생기고 그것들이 주님의 사역에 장애물이 됩니다. 11장은 이런 문제들이 생생하게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충성스러운 사람의 내부에 어떤 혼돈이 일어났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세례 “요한”은 정말 충성스러운 사람입니다. (요1;19~34)을 봅시다. 사람들이 ‘요한에게 네가 누구냐?’ 묻자 요한은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고 대답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주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 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그는 자신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자기는 오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는 본분과 자기가 준비한 길로 메시야가 오실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기에 나아오심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하고 확인 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야가 민족적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회복하는 정치적 차원의 해결사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정치가이며 정복자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오직 세례 요한 만이 예수님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시는 속죄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은 사람들로 회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하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세우시는 나라에 들어가려면 회개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세례를 줌으로 오실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은 그가 오시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어떤 나라이고 어떤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비교하면 요한이 오실 메시야가 어떤 분이시고 그의 사역이 무엇인지 충분히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던 사람이 오늘 본문의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몇 가지 의견이 있어 왔습니다. 터툴리안 같은 초대교회의 교부는 요한 자신이 메시야에 대한 회의를 가졌다고 주장하고, 크리스소톰 같은 설교가는 요한이 제자들의 의구심을 풀어주기 위하여 주님께 제자들을 보내어 문제를 제기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는 앞서 표현한 대로 요한이 주님께 제자들을 보낼 때 그 자신이 당황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요한의 질문은 그가 주님께 불신이나 불충의 마음을 가진 것이 아니라 혼란한 생각을 가졌다고 보겠습니다.
요한이 보기에는 주님께서 자신이 예상했던 방법대로 행동하시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올바른 신념을 의심하거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주님의 방법입니다. 원래 요한은 광야의 생활에서부터 엄격한 금욕생활을 하였고 당시의 죄악을 무섭게 책망합니다. 마3;7절 이하를 보면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를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로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 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나는 너희에게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그는 죄악에 빠진 도시를 떠나 광야로 나갔습니다. 요단 강가에서 거칠고 엄격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는 히브리 역사의 마지막 선지자로 당시의 죄악을 날카롭게 책망하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위대하고 권능 있는 개혁자로, 악습과 폭정을 일소하고, 귀한 것을 모으고 악한 것을 파멸하시는 심판자로 선언하였습니다. 그는 지금 몸은 비록 옥에 있지만 선지자로서의 열심이 그의 마음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이 궁금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전하는 주님에 대한 소식은 많은 사람이 모이고 그 속에서 병자를 고치시고 친절과 사랑을 베푸시는 것들입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은 심판의 말씀이나 저주의 말들을 하나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신 모습이지 결코 심판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감옥의 요한은 큰 혼동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요한의 생각에는 세상에 죄악이 만연함으로 그것을 태워버릴 강한 불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였기에 마땅히 심판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쳐 죽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한의 생각과 달리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이런 일들이 요한을 혼란에 빠지게 했고 그 것에서 벗어나려고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어 주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솔직하게 질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우리에게 조금은 선문답 같이 들립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요한의 질문도 놀라운 것이지만 주님의 대답의 말씀은 더욱 놀라운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요한의 이해를 도우시려고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셨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말씀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 이였습니다. 이 말씀은 (사61;1)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요한이 주님의 대답의 말씀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왕이신 주님의 임무에 대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와 신원의 때를 선포하시러 오신 분이십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완성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신원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을 통하여 주님의 대답을 들은 요한은 주님의 사역을 알았을 것이고 자기가 주님의 사자로써 큰 소리로 외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는 이제 주님의 사역의 크고 위대함을 이해했을 것이며, 심판이 임하기 전에 자비와 은혜의 사역이 있으며, 치유와 위로와 축복의 사역이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혹시 주님께 대하여 혼란된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를 혼동하게 하는 일들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햇빛에 안개가 사라지듯이 궁금한 문제들이 해결될 것입니다.
성경에 이런 오해와 혼동의 일들이 왜 기록되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까? 우리에게 요한이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확고한지 흔들렸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런 요한의 이해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신앙의 승리의 기억들이 많지 않고 실패의 기억이 많은 것은 예수님께 대한 이런 이해들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정치적, 군사적 해결사로 이 땅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자랑은 언제나 세상의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영적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실패는 언제나 기독교의 이름으로 세상의 보상을 원하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육체적으로 편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보상이 없습니다. 이것이 언제나 성도를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예수 믿어서 받은 게 무어냐?” 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죄가 무엇인지 알았고 죄를 거부하는 자리에 서고 의 와 진리와 거룩함을 알고 그렇게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죄와 거룩의 사이에서 죄를 선택하지 않고 거룩을 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보상입니다.
우리에게 성공이나 행복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판단되어야 하고 죄와의 관계에서 죄를 버리고 외면하고 단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혼동을 일으키면 여러분은 예수 믿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의심과 회의를 거름 삼아 믿음을 키우라!
마 11:1-6 / 전순기 목사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괴로운 일이 여럿 있는 데, 그 중에 하나는 마음속에 의심과 회의라는 먹장구름이 자주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잘 믿고 싶습니다. 확신하고 싶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꾸 의심이 들어옵니다. 신앙생활에 회의가 옵니다. 그러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 가운데, 의심과 회의에 빠져보지 않은 성도들이 있을까요? 아마 한 분도 안 계실 겁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또 예수님에 대해서, 그가 행한 이적과 기사들, 십자가와 부활, 천국과 지옥, 기도 응답에 대해서, 등등,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도 회의도 없이 받아들여지고 믿어졌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위대한 증언을 남겼던 세례 요한 조차도 의심과 회의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에 그 탄생이 예언되어 있었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평생을 성령 충만하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경건한 제사장이었던 아버지와 기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신앙교육을 잘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대종파 중에서 가장 엄격한 엣센파에 속해서 철저하게 경건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그리고 가장 겸손하게 증거했던 사람입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습니다(마3:11,12). 또“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겸손하게 고백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아닌지 의심하고 있음을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의심과 회의가 왜 오는지, 또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좋은 지침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의심과 회의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잘 해 나갈 수 없게 됩니다.
의심과 회의는 신앙생활의 발전과 성숙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역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회의는 잘만 다루면, 오히려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데에 좋은 거름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의심과 회의를 신앙의 성숙과 발전을 위한 영적인 비료로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찾아오는 의심과 회의
성도들에게 의심과 회의가 찾아오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공연한 두려움이나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의심과 회의에 빠지는 것을 죄로 여기고 양심의 가책을 받습니다. 또 의심하면 하나님께서 기도 응답을 안 해 주시고, 복을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심과 회의에 빠지는 것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의심하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실 뿐 아니라, 우리더러 불쌍히 여기라고 명령하십니다(유1:22).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를 보십시오. 부활을 경험한 다른 제자들이 기뻐하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소식을 전할 때에, 도마는 부활을 의심하며“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외쳤습니다.
여드레 후에, 도마와 제자들이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문이 닫혀 있는데, 갑자기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평안을 선포하시며,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 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심으로 의심을 벗어나 확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보십시오. 주님은 도마를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의심하는 도마를 정죄치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시던 주님이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 중에서 혹시 의심과 회의에 빠져 고통 받는 분들이 있다면, 주님께서 도마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불쌍히 여겨주시고, 찾아와 만나주시고, 확신 주심으로 의심과 회의를 극복하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의심과 회의를 극복하여 신앙 성장의 밑거름이 되게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의심과 회의가 찾아오는 원인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왜 우리의 신앙생활에 의심과 회의가 찾아오는 지 그 이유와 원인을 발견해 내야 합니다. 본문에서 세례 요한이 의심과 회의에 빠진 이유와 원인을 찾아보면, 오늘도 우리들이 의심과 회의에 사로잡히는 이유와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의심과 회의에 빠진 이유와 원인은 두 가지로 정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첫 번째 이유와 원인은 요한이 기대하는 대로 예수님께서 행동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어떻게 행동하기를 기대했습니까?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 말씀의 내용을 주목해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를 했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하실 것을 기대했는지를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이“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분이라고 증거했었습니다(마3:11,12).
이 말씀은 메시아가 오시면 의인과 죄인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의 말은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 관을 보여줍니다. 세례 요한은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제 하나님의 공의로 모든 죄인들, 세리들을 심판하실 것을 기대했고,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짓밟은 악한 로마 군대를 심판하여 물리칠 줄로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로마 군대를 심판하여 물리치시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은 마땅히 심판받아야 할 죄인들과 세리들과 창기들을 심판하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저들을 용서해 주시고, 친구가 되어 밥도 같이 잡수시고, 저들의 병든 몸과 마음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요한이 생각했던 것처럼 심판하시는 사역이 아니고, 긍휼과 사랑을 베푸시는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은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오늘 우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지 않으면 의심과 회의에 빠져듭니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는 약속들을 주장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도한 대로 응답해 주시지 않을 때가 더 많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대로 행하시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럴 때에 의심과 회의가 찾아옵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분들에게 의심과 회의는 자기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 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컨대, 병을 고치거나, 사업에 축복을 받거나, 어떤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지금도 많은 성도들이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런데 그게 자기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나? 성경이 정말 사실인가? 사람이 만든 거 아닌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게 맞나?”의심하게 됩니다. 기도해도 소용없는데, 교회 나갈 필요가 있나? 회의가 옵니다.
또 어떤 때는 악한 사람이 잘 되고, 선한 사람이 고통 받은 것을 볼 때에 의심과 회의가 옵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저렇게 악한 짓을 하는 자들을 심판하시지 않는가? 의로운 사람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게 맞나?”의심이 됩니다. 그렇다면 “정직하고 의롭게 살 필요가 어디에 있나?” 하는 회의에 빠질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와 원인은 세례 요한이 지금 너무 오래도록 극한의 고통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헤롯왕이 자기 동생 빌립의 부인 헤로디아를 빼앗아 차지한 죄를 노골적으로 책망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헤롯왕은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고, 또 세례 요한이 군중들이 너무도 존경하고 따르는 선지자였기 때문에, 함부로 해치지 못하고 그냥 세례 요한을 감옥에 가두어 두고 있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감옥에 갇혀서 고통을 당하는 요한은 생각이 많았을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님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봉사했는데, 죽은 자를 살리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능력 많으신 예수님께서 어째서 자신을 구해주지 않는 것인지 의심과 회의가 밀려왔을 겁니다. 세례 요한의 의로운 삶에 대해서 전혀 보상이 없는 셈입니다. 그러니 요한은 자신이 지금까지 한 일들이 다 헛된 일처럼 여겨졌을 지도 모릅니다.
이점에서 우리들 대부분은 세례 요한과 같습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 있을 때에, 우리는 어서 속히 주님께서 오셔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나를 고통 중에서 건져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에 즉시로 응답을 받고 고난에서 건짐을 받게 되기보다는, 하나님이 들은 척도 안 하실 때가 더 많습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수없이 해 보았습니다.
환난과 질고를 당하고, 심각한 갈등과 분쟁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한숨과 눈물의 세월을 보낼 때에,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고 마음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럴 때에 의심과 회의의 먹장구름이 쉽사리 우리 마음을 뒤덮어 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회의와 의심의 먹장구름이 몰려와 우리 마음을 덮어버릴 때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감옥에 갇혀 있는 몸이니까, 자기가 가는 대신에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어“당신이 메시아가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메시아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한 행동에서 우리는 의심과 회의를 극복하는 중요한 한 가지 팁을 발견하게 됩니다. 뭡니까? 따라해 보십시다.
예수께로 나아가 질문하라!
의심과 회의가 밀려올 때에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가서 질문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주님 왜 응답하시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겁니까? 왜 이런 자들을 가만 두시는 겁니까?”등등, 주님 앞에 나아가서 상한 마음을 토해내며 질문해야 합니다. 그것이 의심과 회의를 극복하는 으뜸가는 원리입니다.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난제들 속에서 순간순간 주님께 기도로 질문을 던지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즉시 답을 얻는 일도 종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들은 오랜 시간 기도의 씨름을 할 때에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의심과 회의가 몰려올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 중에 질문을 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당신 앞에 나와서 기도하며 질문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시편 32편 8절에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우리를 훈계하십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시고 훈계하십니다. 성경 말씀은 불이며, 방망이며 날카로운 검입니다. 성경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갭니다. 마음의 생각과 뜻을 분별합니다. 성경 말씀은 살아서 우리의 양심을 찔러 회개케 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로 하나님께 물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양하게 답을 주십니다. 어떤 때는 위로를 주십니다. 어떤 때는 ‘그건 네 욕심 때문이다. 욕심을 버려라. 집착하지 말라.’고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그건 계속 기도할 문제가 아니고, 이미 알고 있는 걸 행동으로 옮기면 되는 일이라는 것이 깨달아집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다 보면, 내가 지금 붙잡고 씨름하는 그것이 짧은 내 생각에서 나온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시고,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생각이 더 분명해지기도 합니다. 과연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는 말씀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떤 때는 기도하고 난 후에도 과연 좋은 열매가 맺힐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기도하면서도 마음에 평안이 오지 않고 답답하고, 기도한대로 응답해 주실 지 의심이 될 때에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그럴 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을 꼭 붙잡으십시오. 또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과 함께 어찌 모든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상황은 여전히 어려워도 마음에 주님의 평안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원리를 배워보겠습니다. 저를 따라서 복창해 봅시다.
성경 말씀을 붙잡아라!
의심과 회의를 극복하는 두 번째로 중요한 원리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해 주신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4,5절에“너희는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사35:5-6,61:1).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풀어서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요한아! ‘메시아가 오면 메시아는 이러이러한 일을 해야 해!’라는, 네 생각과 기준을 가지고 나를 판단하지 말고, 성경 말씀에 메시아가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할 것이라고 했는지를 기억하고, 그 말씀이 이뤄지고 있는지 안 이뤄지고 있는 지를 봐. 그러면 내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거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가 오시면 하실 일이라고 예언한 그 일이란다. 그러니까 의심하지 마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 안에 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 안에서 답을 찾지 말라는 겁니다. 말씀보다 내 생각이나 지식이 앞서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겠다는 의심이 들어오고, 하나님을 찾는 모든 노력이 헛된 일이 아닌가 의혹이 생겨 마음이 괴롭다고 합시다.
그러면 자신의 짧은 지식이나 경험만으로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을 내리지 말고 하나님이 계신 증거를 찾아보거나, 반대로 하나님이 안계시다는 것을 입증해 봐야 하지 않겠냐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그 증거를 찾겠습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역사를 한 가지만이라도 찾으면 됩니다. 그 일이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닐지라도 상관없습니다. 또 과거든, 현재든 언제든지 한 번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증거가 발견되면,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이 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우리는 동서남북 오대양 육대주를 다 뒤져 봐야하고, 또 온 우주를 다 탐사해 봐야 합니다. 과거로도 돌아가 봐야 하고, 미래로도 가 봐야 합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무신론을 주장하는 건 정신 나간 짓입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려면 적어도 하나님처럼 전지전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 말씀은 자기중심적인 생각, 지식, 경험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존재나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서 판단하고 의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으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회의와 의심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우리 믿음의 근거와 기초를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이나 생각이나 소원 성취에다 두지 말고, 성경 말씀에 두어야 합니다. 성경 66권의 말씀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진리입니다. 객관적으로도 진리라는 증거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순종한 성도들이 얻은 주관적인 증거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에 의심과 회의가 올 때에 성경 말씀을 꽉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고 있는 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며 깨달은 것을 기록한 경건 서적들을 자주 읽어보십시오. 그들이 체험한 하나님을 통해서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의심과 회의를 물리치는 세 번째 원리를 배워보겠습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행함으로 의심을 물리치라!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를 이방인 고넬료에게 보내어 전도하게 하시려고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통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을 상상도 못합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율법적인 전통 때문에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부정한 사람과 교제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종교적인 규범에 의하면 이방인은 부정한 존재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교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건 잘못된 편견과 고정관념일 뿐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베드로의 잘못된 고정관념과 편견을 깨트려주시고 이방인 고넬료에게 보내어 복음을 전하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부정한 짐승들과 곤충들이 가득한 보자기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시며, 그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행동할 생각을 하지 않고 앉아서 이게 무슨 뜻인가? 의심과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이게 무슨 뜻일까?’속으로 의심하고 있을 그 때에 고넬료가 보낸 종졸 두 사람이 베드로가 묵고 있는 집에 도착해서 베드로를 찾습니다. 그 때에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앉아서 머리만 굴리며 의심하지 말고 일어나 내려가 함께 가서 네 눈으로 보라는 겁니다. 행동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환상이 무슨 뜻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심과 회의를 물리치는 또 하나의 좋은 팁을 발견하게 됩니다. 의심과 회의를 물리치는 비결은 한 마디 말씀이라도 말씀대로 순종하고 실천하여 행동으로 옮겨 보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동해 보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대로 순종해 보면,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면 의심과 회의는 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예화)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면 말이나 행동이 없어지고, 방구석에 처박혀 움직이려고 들지 않습니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우울증 환자를 억지로라도 밖으로 끌어내어 운동을 시키고,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햇빛을 보게 해 주는 겁니다.
의심과 회의에 빠진 신자는 우울증에 빠진 사람과 비슷한 현상을 보입니다. 예컨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의심과 회의에 사로잡히게 되면, 신앙적인 행동이 사라집니다. 의심과 회의에 빠지게 되면, 기쁨과 평안이 사라지고 신앙의 열정이 식어집니다. 그러므로 의심과 회의에 빠진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기 어렵습니다. 기도하기도 어렵습니다. 교회 출석조차도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움직여야 합니다. 강한 의지력을 발동해서 기도하는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자리에 나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성도들은 서로 도와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권면한 것처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을 본받지 말고 더욱 모이기를 힘쓰고”모여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히 10:24,25절). 그래서 목장활동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열정적인 사람을 만나면 열정이 전염되고 확신 있는 사람을 만나면 확신이 전염되는 법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신앙생활에 의심과 회의는 필연적으로 찾아옵니다. 의심과 회의를 거름 삼고 자라는 나무가 믿음이라는 나무입니다. 믿음이란 의심과 회의를 이겨내는 힘입니다. 의심과 의혹이 없는 믿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심과 회의를 싸워 이기는 일 없이는 결코 신앙의 성장이나 성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의심과 회의가 전혀 없다는 것이 강한 믿음의 증거가 아닙니다. 의심과 회의가 전혀 없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건 말하자면, 우리 몸 안에 병균이 하나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몸 안에 병균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병균이 없으면 면역도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사람에게 강력한 병균이 침입하면 감당을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에 면역력을 길러주기 위해서 약화된 병균을 몸에 넣어줌으로 우리 몸이 병균과 싸워 이기게 함으로 항체가 생기게 합니다. 그게 백신주사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의심이나 의혹이 아예 없어야 좋은 믿음이라는 오해를 버려야 합니다. 좋은 믿음은 오히려 많은 의심과 의혹이 밀려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앙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심과 회의가 찾아오는 것을 겁내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의심과 회의가 찾아올 때에 절대로 거기에 매여 있지 말고, 주 앞에 나와 주님께 기도로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항상 성경 말씀으로 돌아가서 말씀에서 증거를 찾으시고 답을 찾으십시오.
제일 좋은 길은 한 마디 말씀이라도 순종하고 실천해 보는 겁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부디 의심과 회의를 거름으로 삼아 자신의 믿음을 가꿀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마태복음 11:2-15 / 최지승 목사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례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로 오신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4, 15)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께서 오심으로 그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시작이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어 영원히 죽었던 인생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영원한 죽음을 향해 점점 더 멀리 달아나는 비참한 인생들에게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찾아오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무 소망이 없음, 영원한 죽음이라는 비참한 현실 속으로 참 생명과 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기쁨의 소식, 복된 소리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 외치신 첫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회개하고 그 복음을 믿으라 하셨습니다. 나같은 죄인을 하나님 나라로 영접하시는 유일한 조건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그가 누구든지 스스로 주인이 되고 왕 노릇하며 살았던 지난 날의 죄를 회개하고 인생의 참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지난 수요일에 열린 러시아 월드컵 축구 한국과 독일전 조별 예선 경기는 승리의 기쁨과 탈락의 아쉬움을 동시에 남긴 특별한 경기였습니다. 한국 팀이 디팬딩 챔피언 독일 팀을 2:0으로 당당하게 물리쳤지만 멕시코가 스웨덴에 3:0으로 무참하게 깨지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16강 진출이 무산되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경기가 끝난 멕시코는 당연히 16강 탈락인 줄 알고 짐을 싸서 귀국해야 했는데 한국 팀이 그것도 후반전 추가 시간에 두 골을 넣어주는 바람에 스웨덴과의 경기에 지고도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F조의 16강 진출 팀들이 결정 된 것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구원에 관련해서 얻은 교훈이 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한국 팀이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2:0으로 이겼다는 승전보가 그날 멕시코에게는 기가 막힌 기쁨의 소식이었습니다. 멕시코는 패배하여 이미 끝장이 난 팀이었는데 한국 팀의 승리 덕분에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순전히 한국 선수들의 투혼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멕시코 사람들이 ‘땡큐 코리아’를 외치며 멕시코 국기 대신 태극기를 게양하고 길거리에서 한국인들을 만나면 행가레를 쳐주면서 마치 망했던 나라를 구해준 은인을 모시듯 감사 인사를 했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웠으면 그랬겠습니까? 한국 승리, 독일 패배 그것이 그날 멕시코인들에게는 복된 소식 바로 복음과도 같았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한국 덕분에 16강에 진출할 기회를 얻은 멕시코인들의 심정에 비유하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멕시코는 게임을 마친 순간 자력으로는 16강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독일 팀이 한국을 이기고 올라간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한국 팀이 이겨주는 바람에 자력이 아니라 타력으로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한국의 승리가 곧 멕시코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죽으라고 싸워 이기고도 탈락한 한국 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그것이 그들에게는 복음과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며 영원한 죽음의 길에 들어섰던 우리가 바로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는 패배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가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날 위해 십자가 지고 죽으신 주님의 희생을 생각하면 죄송하고 부끄럽지만 주님의 십자가가 곧 나의 구원이 되었으니 그것이 복음입니다.
세례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힌 후 갈릴리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신 것은 예수께서 성취하실 이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파한 복음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승리하신 것을 믿음으로 받으면 그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가 된다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여러분은 이 기쁨의 소식을 믿음으로 받고 천국 백성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고 승리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는데 어찌하여 세상은 여전히 죄악이 성행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지금도 환난과 핍박을 당하며 심지어 죽임을 당하며 삽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것이라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가까이 왔다고 하신 하나님 나라는 아직도 멀리 있거나 아예 오지 않은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앞서 등장하여 천국복음을 전하며 오실 메시야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부정을 책망했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요단강에서 만난 나사렛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던 요한은 가슴이 벅차 오르고 드디어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비록 옥에 갇혔지만 나의 할 일을 다 했다는 보람과 함께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로부터 나사렛 예수의 활동 상황을 전해 들은 요한은 혼란이 생겼습니다.
오실 그분은 죄악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영광스럽게 회복시키실 위엄과 능력으로 충만한 왕처럼 등장하실 것이라 기대했는데 나사렛 예수는 너무나도 부드럽고 유약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보였다고 하며,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고 귀신이 들린 사람들을 고쳐준다거나 죽었던 소녀를 살렸다고도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신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악한 세상을 향해 불같은 심판을 기대했는데 세상의 약자들과 버림 받은 사람들과 친구하며 자비와 긍휼을 베풀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성경에 예고된 그분과 어떻게 어울리는지 연결이 잘 되지 않아 혼란이 왔고 과연 그가 오실 그분이 맞는지 의혹이 생겼습니다. 견디다 못한 요한은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듣고 싶어서 예수께 제자들을 보내어 “당신이 과연 오실 그분이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오늘 본문의 줄거리이며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살다간 신앙의 선배들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을 칭찬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지만 그 위대한 선지자 요한도 지금 이 땅에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사람 세례 요한이었지만 아직 감추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몰랐습니다. 그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대교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처음 세상에 오실 때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선포하러 오셨고 재림주로 다시 오실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왕권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영원한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비밀이 그에게는 아직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요한이 우리보다 지혜가 부족하거나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 왕권의 신비스런 비밀에 대한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다른 유대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나사렛 예수을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로 믿고 그의 길을 예비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미미한 사람일지라도 요한에게조차 감추어진 이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이 점에서는 요한보다 복이 있다는 뜻에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없지만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 하셨습니다. 왕의 오심을 환영하며 그 왕의 다스림 속에서 새 생명을 얻어 살게 되었으니 그런 점에서 요한보다 더 큰 복을 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이 영광스런 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공식 사과도 깨끗하게 못하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면서 잊을만 하면 우리 국민들의 속을 확 뒤집어 놓는 일본 때문에 분통이 터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말도 안되는 일로 어깃장을 놓는 일본의 행동을 두고 분한 마음에 툭 터져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런 놈들을 그냥 두시는가’ 그래서 일본 땅에 지진이 발생하고 화산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걱정과 불쌍한 마음보다는 이참에 일본 열도가 바다에 폭싹 가라앉아야 한다고 악담을 하게 됩니다.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 눈에 보여야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왔구나 라고 인정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가 일본에게 억압을 당할 때 고통 속에 부르짖었던 것처럼 로마제국의 압제 아래 살던 유대인들도 해방의 날, 구원의 날, 심판의 날을 고대하며 얼마나 많이 부르짖었겠습니까? 로마제국이 한 순간에 땅 속으로 꺼지고 바다에 던져지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또 기다렸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의 백성을 짖밟던 로마가 심판을 당하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이 먼저 그 흔적도 없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도 사모하며 기다리던 이스라엘은 나라 없는 백성으로 세계 곳곳에 흩어져야 했고 1900여년 동안 설움을 당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도대체 악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으며 그의 나라는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였다는 말인가? 이것이 많은 사람들 특히 그 나라를 사모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어떤 대답을 하고 있습니까?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답하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주시는 답변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요한에게 가서 나로부터 보고 들은 것을 전해주라. 눈 먼 자가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듣지 못하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셨습니다.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주님은(사35장) 오시리라 예고된 그분에 대한 약속이 오늘 나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요한에게 분명히 전해주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오자 아름다웠던 세상에 각종 어두움의 그늘이 드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항하는 사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에서 왕노릇 하며 질병과 사고와 죽음의 권세로 억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이 어두움의 통치 아래 신음하며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죽음과 전쟁과 질병 앞에 두려워 떠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어두움의 세상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시려고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오시는 순간 사탄의 세력은 그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자라갈수록 사탄의 통치영역은 좁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귀신이 물러가는 이적이 나타났고 각종 병자들을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진정한 왕이 누구신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사탄은 더이상 왕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왕이 오셔서 죄로 가리워진 사람들의 영의 눈을 뜨게 하셨고, 가려진 귀가 열리며, 입이 열려 드디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께서 행하신 능력을 보고 그 복음을 믿음으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행하신 모든 이적들은 오시리라 예고된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증거였습니다.
캄캄한 방에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더 큰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생명의 빛, 세상의 빛이신 예수께서 오시자 어두움에 갇혔던 세상이 빛으로 변했고 어두움으로 다스리던 사탄은 그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사탄은 더이상 죽음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자기 수하에 묶어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던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시는 순간 사탄은 그 권세를 잃고 꼬리를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아직도 죽음의 세력 앞에서 무기력합니까? 예수께서 주신 생명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불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망이라는 사탄의 통치권에 굴복하여 종노릇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과 빛의 사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더이상 사탄의 통치권 아래에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주께서 가신 그 길을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백성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와 해방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우리의 세상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침투하여 스며들어오고 있는 세상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탄의 불의가 투쟁하는 세상입니다. 왕의 오심으로 사탄이 이미 항복했지만 쫓겨가는 사탄의 패잔병들이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사탄의 불의를 물리치고 있다는 승전보가 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지금 진행 중입니다.
어제 레딩에서 열린 6.25 참전용사 위로회 예배에서 설교하신 목사님이 잠간 언급했던 것처럼, 북한군이 삽시간에 남쪽으로 밀고 내려와 국군이 낙동강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피흘리며 대항하고 있을 때 UN군이 우리를 도우러 온다는 소식은 승리를 확신케 하는 복음이었습니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고 국군이 북한군을 물리친 것도 아니지만 UN군의 참전은 우리의 승리를 확신케 하고 사기를 북돋아 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이 프랑스의 서부 해안 노르망디에 상륙했습니다. 연합군이 독인군을 패퇴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바꾼 그 날, 결정적인 승리가 확보된 그 날을 가리켜 역사는 ‘디데이(D-day)’라고 부릅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에도 독일은 최후의 저항을 계속했지만 마침내 독일은 패배하고 연합군이 최후의 승리를 합니다. 연합군이 독일의 항복을 받아 낸 날, 즉 완전한 승리의 날을 ‘브이데이(V-day)’라고 부릅니다.
현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디데이와 브이데이 중간을 살고 있습니다. 브이데이가 되어야 비로소 전쟁이 끝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이 싸움의 승리는 이미 확보되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 비로소 브이데이가 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영적 전투에서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요3:17) 하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 너무 늦어지는 것 같아 조바심을 내는 우리에게 성경을 이해하도록 돕는 키워드입니다. 디데이와 브이데이의 중간을 살고 있는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구원의 때입니다. 아직 문이 열렸을 때 그 문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어 기다리고 계시는 시기입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고난이 지겹고 두렵고 이해가 되지 않아 슬프지만 내가 지금 겪는 이 고난의 시간에 세상의 다른 편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의 어떤 영혼이 구원을 얻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떨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치처럼 사랑하십니다. 나같은 죄인을 불러 자녀 삼으신 주님은 지금도 그리고 내일이라는 시간에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 나라가 지금 우리 가운데 자라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기까지 이 땅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세상의 불의가 투쟁합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주님이 본을 보이셨던 삶을 따라갑니다. 당연히 고난이 있고 핍박과 재난과 억울함과 비웃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면 더 이상의 투쟁은 없습니다. 악은 소멸하고 오직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 땅에서는 구원받는 일이 계속 진행되지만 그 나라의 왕이 오시면 오직 심판이 있을 뿐 더 이상 구원의 기회는 없습니다.
그 날이 언제일지 우리는 모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2천년을 참고 기다리셨고 어쩌면 또 다른 천년과 2천년을 기다리시며 구원받을 자를 기다리실런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하늘로 오르시고 2천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를 구원하시려고 심판을 보류하신 것처럼 북한과 중국, 시리아와 아프칸, 일본과 이스라엘에 있는 영혼들에게도 천국 복음이 선포되고 그들 중에도 복음을 믿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모으시기 위해 얼마나 더 기다리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께 달린 일입니다. 이 부조리한 세상을 당장 심판하지 않고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심판을 보류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세상에 선포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그 비밀을 깨닫고 그 나라를 사모하며 들어가게 된 것은 기적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도 문 열어놓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송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질문한 세례 요한처럼 우리는 같은 질문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시리라 예고된 바로 그분이시며 다시 오실 영원한 그 나라의 왕이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며 오늘 나에게 주어진 천국시민의 삶을 주님과 함께 힘차게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례 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로 오신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4, 15)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께서 오심으로 그 나라가 사람들 가운데 시작이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어 영원히 죽었던 인생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영원한 죽음을 향해 점점 더 멀리 달아나는 비참한 인생들에게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찾아오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무 소망이 없음, 영원한 죽음이라는 비참한 현실 속으로 참 생명과 참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기쁨의 소식, 복된 소리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갈릴리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실 때 외치신 첫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회개하고 그 복음을 믿으라 하셨습니다. 나같은 죄인을 하나님 나라로 영접하시는 유일한 조건은 ‘회개와 믿음’입니다. 그가 누구든지 스스로 주인이 되고 왕 노릇하며 살았던 지난 날의 죄를 회개하고 인생의 참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지난 수요일에 열린 러시아 월드컵 축구 한국과 독일전 조별 예선 경기는 승리의 기쁨과 탈락의 아쉬움을 동시에 남긴 특별한 경기였습니다. 한국 팀이 디팬딩 챔피언 독일 팀을 2:0으로 당당하게 물리쳤지만 멕시코가 스웨덴에 3:0으로 무참하게 깨지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16강 진출이 무산되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경기가 끝난 멕시코는 당연히 16강 탈락인 줄 알고 짐을 싸서 귀국해야 했는데 한국 팀이 그것도 후반전 추가 시간에 두 골을 넣어주는 바람에 스웨덴과의 경기에 지고도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F조의 16강 진출 팀들이 결정 된 것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구원에 관련해서 얻은 교훈이 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한국 팀이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2:0으로 이겼다는 승전보가 그날 멕시코에게는 기가 막힌 기쁨의 소식이었습니다. 멕시코는 패배하여 이미 끝장이 난 팀이었는데 한국 팀의 승리 덕분에 죽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순전히 한국 선수들의 투혼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멕시코 사람들이 ‘땡큐 코리아’를 외치며 멕시코 국기 대신 태극기를 게양하고 길거리에서 한국인들을 만나면 행가레를 쳐주면서 마치 망했던 나라를 구해준 은인을 모시듯 감사 인사를 했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웠으면 그랬겠습니까? 한국 승리, 독일 패배 그것이 그날 멕시코인들에게는 복된 소식 바로 복음과도 같았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한국 덕분에 16강에 진출할 기회를 얻은 멕시코인들의 심정에 비유하면 조금 더 쉽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멕시코는 게임을 마친 순간 자력으로는 16강에 오를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당연히 독일 팀이 한국을 이기고 올라간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한국 팀이 이겨주는 바람에 자력이 아니라 타력으로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한국의 승리가 곧 멕시코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죽으라고 싸워 이기고도 탈락한 한국 팀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를테면 그것이 그들에게는 복음과 같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며 영원한 죽음의 길에 들어섰던 우리가 바로 그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우리는 아무 소망이 없는 패배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의 자리로 옮겨졌습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또 부활하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가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날 위해 십자가 지고 죽으신 주님의 희생을 생각하면 죄송하고 부끄럽지만 주님의 십자가가 곧 나의 구원이 되었으니 그것이 복음입니다.
세례 요한이 잡혀 옥에 갇힌 후 갈릴리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신 것은 예수께서 성취하실 이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전파한 복음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고 승리하신 것을 믿음으로 받으면 그 승리가 곧 우리의 승리가 된다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여러분은 이 기쁨의 소식을 믿음으로 받고 천국 백성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고 승리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는데 어찌하여 세상은 여전히 죄악이 성행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지금도 환난과 핍박을 당하며 심지어 죽임을 당하며 삽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것이라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가까이 왔다고 하신 하나님 나라는 아직도 멀리 있거나 아예 오지 않은 것은 아닌가 라는 질문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앞서 등장하여 천국복음을 전하며 오실 메시야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부정을 책망했다가 옥에 갇혔습니다. 요단강에서 만난 나사렛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던 요한은 가슴이 벅차 오르고 드디어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비록 옥에 갇혔지만 나의 할 일을 다 했다는 보람과 함께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한 기대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로부터 나사렛 예수의 활동 상황을 전해 들은 요한은 혼란이 생겼습니다.
오실 그분은 죄악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영광스럽게 회복시키실 위엄과 능력으로 충만한 왕처럼 등장하실 것이라 기대했는데 나사렛 예수는 너무나도 부드럽고 유약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보였다고 하며,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고 귀신이 들린 사람들을 고쳐준다거나 죽었던 소녀를 살렸다고도 합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신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악한 세상을 향해 불같은 심판을 기대했는데 세상의 약자들과 버림 받은 사람들과 친구하며 자비와 긍휼을 베풀고 있는 나사렛 예수가 성경에 예고된 그분과 어떻게 어울리는지 연결이 잘 되지 않아 혼란이 왔고 과연 그가 오실 그분이 맞는지 의혹이 생겼습니다. 견디다 못한 요한은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듣고 싶어서 예수께 제자들을 보내어 “당신이 과연 오실 그분이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오늘 본문의 줄거리이며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살다간 신앙의 선배들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세례 요한을 칭찬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지만 그 위대한 선지자 요한도 지금 이 땅에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사람 세례 요한이었지만 아직 감추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몰랐습니다. 그는 다른 유대인들처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대교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처음 세상에 오실 때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선포하러 오셨고 재림주로 다시 오실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왕권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영원한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비밀이 그에게는 아직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요한이 우리보다 지혜가 부족하거나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 왕권의 신비스런 비밀에 대한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다른 유대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나사렛 예수을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로 믿고 그의 길을 예비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찬을 받기에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이 미미한 사람일지라도 요한에게조차 감추어진 이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은 이 점에서는 요한보다 복이 있다는 뜻에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없지만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 하셨습니다. 왕의 오심을 환영하며 그 왕의 다스림 속에서 새 생명을 얻어 살게 되었으니 그런 점에서 요한보다 더 큰 복을 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도 이 영광스런 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공식 사과도 깨끗하게 못하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면서 잊을만 하면 우리 국민들의 속을 확 뒤집어 놓는 일본 때문에 분통이 터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말도 안되는 일로 어깃장을 놓는 일본의 행동을 두고 분한 마음에 툭 터져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런 놈들을 그냥 두시는가’ 그래서 일본 땅에 지진이 발생하고 화산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걱정과 불쌍한 마음보다는 이참에 일본 열도가 바다에 폭싹 가라앉아야 한다고 악담을 하게 됩니다.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 눈에 보여야 정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왔구나 라고 인정하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가 일본에게 억압을 당할 때 고통 속에 부르짖었던 것처럼 로마제국의 압제 아래 살던 유대인들도 해방의 날, 구원의 날, 심판의 날을 고대하며 얼마나 많이 부르짖었겠습니까? 로마제국이 한 순간에 땅 속으로 꺼지고 바다에 던져지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또 기다렸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의 백성을 짖밟던 로마가 심판을 당하고 사라진 것이 아니라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이 먼저 그 흔적도 없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그렇게도 사모하며 기다리던 이스라엘은 나라 없는 백성으로 세계 곳곳에 흩어져야 했고 1900여년 동안 설움을 당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도대체 악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으며 그의 나라는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였다는 말인가? 이것이 많은 사람들 특히 그 나라를 사모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어떤 대답을 하고 있습니까?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답하신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도 주시는 답변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요한에게 가서 나로부터 보고 들은 것을 전해주라. 눈 먼 자가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듣지 못하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셨습니다.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주님은(사35장) 오시리라 예고된 그분에 대한 약속이 오늘 나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요한에게 분명히 전해주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오자 아름다웠던 세상에 각종 어두움의 그늘이 드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항하는 사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에서 왕노릇 하며 질병과 사고와 죽음의 권세로 억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이 어두움의 통치 아래 신음하며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죽음과 전쟁과 질병 앞에 두려워 떠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어두움의 세상을 불쌍히 여겨 구원하시려고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오시는 순간 사탄의 세력은 그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자라갈수록 사탄의 통치영역은 좁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께서 가시는 곳마다 귀신이 물러가는 이적이 나타났고 각종 병자들을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진정한 왕이 누구신가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사탄은 더이상 왕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왕이 오셔서 죄로 가리워진 사람들의 영의 눈을 뜨게 하셨고, 가려진 귀가 열리며, 입이 열려 드디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왕께서 행하신 능력을 보고 그 복음을 믿음으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행하신 모든 이적들은 오시리라 예고된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증거였습니다.
캄캄한 방에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더 큰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생명의 빛, 세상의 빛이신 예수께서 오시자 어두움에 갇혔던 세상이 빛으로 변했고 어두움으로 다스리던 사탄은 그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사탄은 더이상 죽음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자기 수하에 묶어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던 예수께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시는 순간 사탄은 그 권세를 잃고 꼬리를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아직도 죽음의 세력 앞에서 무기력합니까? 예수께서 주신 생명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불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망이라는 사탄의 통치권에 굴복하여 종노릇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명과 빛의 사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은 더이상 사탄의 통치권 아래에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주께서 가신 그 길을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백성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와 해방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우리의 세상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침투하여 스며들어오고 있는 세상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탄의 불의가 투쟁하는 세상입니다. 왕의 오심으로 사탄이 이미 항복했지만 쫓겨가는 사탄의 패잔병들이 곳곳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사탄의 불의를 물리치고 있다는 승전보가 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지금 진행 중입니다.
어제 레딩에서 열린 6.25 참전용사 위로회 예배에서 설교하신 목사님이 잠간 언급했던 것처럼, 북한군이 삽시간에 남쪽으로 밀고 내려와 국군이 낙동강을 최후의 보루로 삼아 피흘리며 대항하고 있을 때 UN군이 우리를 도우러 온다는 소식은 승리를 확신케 하는 복음이었습니다. 아직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고 국군이 북한군을 물리친 것도 아니지만 UN군의 참전은 우리의 승리를 확신케 하고 사기를 북돋아 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이 프랑스의 서부 해안 노르망디에 상륙했습니다. 연합군이 독인군을 패퇴시키고 전쟁을 승리로 바꾼 그 날, 결정적인 승리가 확보된 그 날을 가리켜 역사는 ‘디데이(D-day)’라고 부릅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한 뒤에도 독일은 최후의 저항을 계속했지만 마침내 독일은 패배하고 연합군이 최후의 승리를 합니다. 연합군이 독일의 항복을 받아 낸 날, 즉 완전한 승리의 날을 ‘브이데이(V-day)’라고 부릅니다.
현재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디데이와 브이데이 중간을 살고 있습니다. 브이데이가 되어야 비로소 전쟁이 끝나는 날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이 싸움의 승리는 이미 확보되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이 비로소 브이데이가 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영적 전투에서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요3:17) 하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 너무 늦어지는 것 같아 조바심을 내는 우리에게 성경을 이해하도록 돕는 키워드입니다. 디데이와 브이데이의 중간을 살고 있는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구원의 때입니다. 아직 문이 열렸을 때 그 문을 통해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어 기다리고 계시는 시기입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고난이 지겹고 두렵고 이해가 되지 않아 슬프지만 내가 지금 겪는 이 고난의 시간에 세상의 다른 편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의 어떤 영혼이 구원을 얻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떨립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치처럼 사랑하십니다. 나같은 죄인을 불러 자녀 삼으신 주님은 지금도 그리고 내일이라는 시간에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 나라가 지금 우리 가운데 자라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입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기까지 이 땅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세상의 불의가 투쟁합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주님이 본을 보이셨던 삶을 따라갑니다. 당연히 고난이 있고 핍박과 재난과 억울함과 비웃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면 더 이상의 투쟁은 없습니다. 악은 소멸하고 오직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이 땅에서는 구원받는 일이 계속 진행되지만 그 나라의 왕이 오시면 오직 심판이 있을 뿐 더 이상 구원의 기회는 없습니다.
그 날이 언제일지 우리는 모릅니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2천년을 참고 기다리셨고 어쩌면 또 다른 천년과 2천년을 기다리시며 구원받을 자를 기다리실런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이 하늘로 오르시고 2천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를 구원하시려고 심판을 보류하신 것처럼 북한과 중국, 시리아와 아프칸, 일본과 이스라엘에 있는 영혼들에게도 천국 복음이 선포되고 그들 중에도 복음을 믿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모으시기 위해 얼마나 더 기다리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께 달린 일입니다. 이 부조리한 세상을 당장 심판하지 않고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심판을 보류하시는 것이니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세상에 선포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그 비밀을 깨닫고 그 나라를 사모하며 들어가게 된 것은 기적이며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도 문 열어놓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찬송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또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라고 질문한 세례 요한처럼 우리는 같은 질문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시리라 예고된 바로 그분이시며 다시 오실 영원한 그 나라의 왕이십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양하며 오늘 나에게 주어진 천국시민의 삶을 주님과 함께 힘차게 걸어 가시기 바랍니다.
세례 요한
마 11:2-14 / 박형근 목사
오늘 말씀은, 옥에 갇혀 있는 세례요한이,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묻기를‘오신다는 이가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성경에 보면, 세례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받으러 오는 예수님을 보며‘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외쳤지요. 남들이 아직 모를 때,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며,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도 들렸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이것을 보고 들은 세례요한이지만, 지금 억울하게 옥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지라, 제자를 보내서 물은 겁니다. 요한은, 왕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왕비 삼은 잘못을 지적하다가 옥에 갇혔지요. 아마‘내가 옳은 일을 하다가 죽게 되었는데,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날 구해주었을 텐데. 기다리던 분이 아닌가? 제자들에게 물어보게 해야지.’우리들도, 삶이 힘들거나 믿음이 식을 때. 자신이 예수님을 구주로 확실히 믿는지 잘 살피라 합니다.
예수님께선, 묻는 요한의 제자들에게‘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것이지요. 이어서‘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예수를 그리스도라 믿다가, 믿음에서 떠나지 않은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세례요한에게 네 믿음을 굳게 붙들라는 말씀이자, 오늘 우리에게도 하신 거지요.
지난 주,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세요.’할 때, 예수님께서‘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오랫동안 나를 본 너희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하느냐? 내가 한 모든 일은 내 안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니, 이를 못 믿겠거든 내가 한 일을 보고 믿으라.’예수님께서 세례요한 제자들에게‘내가 한 일을 세례요한에게 알리라.’하신 것과 같은 의미이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은,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이 하신 일로,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임을 보이신 겁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떠나자, 예수님께서 옆에 있는 무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 중에는, 광야에 세례요한을 보러 나갔던 자나, 요한의 제자였던 이도 있었지요. 베드로 동생 안드레가 요한을 따르다가, 예수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이 말씀에는, 속이 답답해서, 야외에 바람이나 쇠러 나간 거냐? 오늘날로, 교회에 다니는 것이, 답답한 세상 삶에 잠시 평안이나 위로를 받으러 나오는 거냐? 이지요.
예수님은 이어서‘광야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고 나갔느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느니라.’우리에게 적용하면‘보다 나은 삶, 부귀영화를 바라고 교회에 나오느냐?’광야에서‘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외친 세례요한은 거친 옷을 입었으니, 부드러운 좋은 옷을 보려면 왕궁에 가야지 하신 겁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는 첫째 이유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께 경배 찬양하러 나오는 거지요.
그와 함께, 예수님이 하신 일을 나누며, 배우고 익혀서, 성도다운 삶을 살려는 겁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 말씀에 나온, 예수님이 하신 일을 살펴봅니다. 불쌍한 맹인이나 못 걷는 사람이 치료받는 것도 중요하나, 그것에 담긴 영적 의미를 알고 그리 살아야지요. 하나씩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것은, 우리에게 영의 눈을 뜨라는 거지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이던 자의 눈을 예수님이 뜨게 하시니, 그 일로 시비를 겁니다.
일하지 않아야 할 안식일에 맹인의 눈을 고쳤으니, 율법을 어긴 예수는 하나님 사람이 아니라 하지요. 예수님은 그들에게‘너희가 본다고 하니 죄가 더 크다.’우리가 눈은 보면서, 맹인보다 못 하게 살지 않나 때로 살펴야 됩니다. 시기 질투나, 남을 비방하거나, 수군대는 거지요. 눈 뜬 우리에게 주님께서‘너희는 보는 고로 죄가 더 하다.’하시지 않을지 조심해야 합니다.
못 걷는 사람이 걸은 것은, 예수님이 하셨지만, 훗날,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 앞에서 구걸하던 날 때부터 앉은뱅이 손을 잡아 일으키며‘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했지요. 그가 일어나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제 자리에서 꿈지럭거리는 믿음으로 살지 않느냐? 예수 믿는 성도답게 삶에, 참 기쁨과 찬양이 있느냐?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 살피며 부족하면 고치라 합니다.
이어‘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성경에 나병이 자주 나오는 것은, 불치의 병이며, 병이 깊어져도 느끼지 못하다가 죽는 것이, 죄와 같기 때문이지요. 나병은 심해지면, 코가 떨어지고, 손가락이 빠져도 통증이 없습니다. 죄도 빠져들다 보면, 죄짓는다는 느낌이 없지요. 그저 별 의식 없이, 육체와 세상 것을 따르다 보면, 영 죽음을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것은, 죄지으며 죽음의 길을 가던 우리를 영생의 길로 구원해 주신 거지요.
못 듣는 자가 들으며, 병으로 귀가 먼 이가 있으나, 자신의 귀를 막고 들리는 진리의 말씀을 애써 듣지 않으려는 교인도 있지요. 자신이 이해가 되거너, 달콤한 것만 들으려 합니다. 이런 영적 귀머거리를, 예수님은 고치라 하시지요. 요한계시록에‘성령이 말씀하기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하는 말씀이 거듭 나오고, 복음송에도‘내 귀를 열어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우리의 찬양이 되어야지요. 우리 귀로 복음을 들으라 합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셨지요. 예수님은 믿는 이에게 죽음은 잠자다가 깨는 것임을 알려주십니다. 그러니, 안 믿는 사람처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너무 슬퍼 말라,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듯 살지 말라고 하시지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죽은 자들, 곧 잠자던 자들이 다시 일어나고, 그때 살아 있는 이들이 불려 올라가 주님을 맞아, 함께 영원을 누릴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알면, 죽음은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죽어야 천국에 들어가니, 기쁨으로 찬양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합니다. 성경의 가난한 자는 두 가지 의미입니다. 삶이 가난한 자, 어려움에 시달리는 자가 있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있지요. 복음은 둘 다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팔복에‘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복음이 전파되니 그런 겁니다. 지금까지 살폈듯이,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것은, 이런 것들을 깨닫고, 구원받은 자, 영에 눈 뜬 자, 기쁨의 찬양으로 펄쩍펄쩍 뛰는 자의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 대해 더 가르쳐 주시지요.‘광야에 선지자를 보러 나갔느냐? 옳다 내가 이르노니 요한은 선지자보다 나은 이라.’하시며, 구약 말라기 말씀을 인용하시지요.‘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내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 요한에 대한 말씀이라 합니다. 말라기서는 훗날 올 세례요한을 말하며, 그가 오실 메시야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 하지요.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 대해,‘여자가 나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아, 그러면 요한이 예수님보다 큰 자냐?’할 수 있으나. 예수님은 여자 마리아에게서 나셨으나, 성령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니 다르지요. 예수님은 이어서‘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세례요한이 크고 훌륭하나, 세상에서 몸으로 사는 사람이라, 천국에서 몸을 떠나 영으로 사는 이보다는 못하다는 것입니다. 몸은 영을 넘어설 수 없지요.
세례요한 당시,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권세로 하나님의 명이라 하며, 백성들을 억누르고, 온갖 사치와 유익을 누렸지요. 가난하고, 로마의 식민지로 살기에 답답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고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혹, 오늘도 비슷하지 않나 염려가 됩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참신하게 외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세례요한을 보러 모여 들었지요.‘저것이 하나님 선지자의 바른 모습이야.’
거기다가‘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외치니, 백성들의 숨통이 트였습니다. 이것이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알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한 것도, 예수님이 죽으실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보여 준 거지요.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세상에 나와 광야에게 외쳤기에, 많은 백성들이 따르며 오시는 메시야인 줄 알았으나, 요한은‘나는 아니요, 나는 그의 신발끈을 매는 종에 불과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나, 뒤에 오실 분은 불과 성령으로 주십니다. 예수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 합니다.’길을 예비하는 자임을 분명히 했지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겸손하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라 합니다. 하나는, 믿는 자의 본을 보여서 주님께 인도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하는 거지요. 그러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의 이 땅에서 하신 일뿐만 아니라, 그 후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성령이 강림하고 복음이 전 세계로 퍼진 것, 우리는 요한이나 예수님 제자들보다 아는 것이 많지요. 아는 것에 머물지 말고, 우리 삶으로 예수님이 구주이심을 증거하며, 그분에게로 인도하는 여러분 모두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엇을 보려 광야에 나갔더냐
마 11:2-11 / 지태일 목사
오늘 본문 마태복음 11:2-9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묻고 대답함으로 생각나게 하고 진실한 대답이 무엇인지 가르치고자 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보려고, 말씀을 들으려고 광야로 나간 무리들에게 하신 질문입니다. 그 질문은 바로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What did you go out into the desert to see?)라는 질문입니다. 왜 이러한 질문이 나왔습니까? 그것은 세례 요한 때문에 나온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죄없으신 예수님 스스로 공적인 의를 이루시기 위해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정도였습니다.(마3:13-17).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가리켜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마11:11).
세례요한은 당시의 구약의 여러 선지자들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사해 서편으로 길게 뻗은 황무지 유대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살았습니다(마3:4,막 1:6).
당시 로마의 정치적인 압제와 유대교의 타락으로 흑암이 덮여 있을 때 요한의 입은 가만히 다물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공적인 죄를 탄핵함에 있어서 그는 매우 투박한 언어를 사용했고 직설적으로 비판을 했습니다.
특별히 당시의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을 질책하는데 그들을 향해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표현은 "이 개만도 못한 것들아"라고 하는 욕보다 더 심한 욕입니다. 그는 이렇게 무시무시한 발언을 하고 죄를 지적하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세례 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모여들지만 어떠한 방법으로든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연일 주변의 여러 성읍들과 마을들로부터 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황량한 광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래도 세례요한은 많이 모여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 내 뒤에 오실 메시야를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 분을 위해서는 신발 끈을 고쳐 맬 수도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의 미움을 사 투옥되기 전까지 그의 광야 생활이나 사역, 멧세지는 그야말로 커다란 선풍을 일으켰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가 온 것같은 느낌을 가질 정도로 굉장했습니다.
당시 정치적으로 헤롯왕의 아들, 헤롯 안디바스는 매우 방탕한 기질을 가진 사악한 통치자였습니다. 그는 그의 사촌 여동생이자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가로챔으로 율법을 철저히 우롱하였습니다. 그의 신하들은 왕의 이러한 파렴치한 행동에 대하여 심히 분개하였으나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말 한마디 못하고 끙끙 앓고 있습니다만, 세례요한은 거침없이 헤롯에게 직언을 하였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막6:18)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먼저 크게 분개한 것은 그의 아내 헤로디아였고, 헤롯은 바른 말하는 세례 요한을 죽이려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후에 목이 베어지고 쟁반에 담겨 간교한 헤로디아에게 바쳐져 순교 당합니다.(마14:3-11).
옥에 갇혀 있던 요한은 그가 처형당하기 전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내가 만약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면 과연 지금 내 뒤에 오신 메시야는 누구인가? 과연 예수라는 분이 메시야가 맞는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왜 감옥에 있어야 되고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가?"라는 생각입니다. 이 말은 세례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이심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의 사역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 그 방법, 범위, 시간을 깨닫지 못하여 알고자 하는 심정으로 제자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어 물은 것입니다. 우리의 선생님 요한이 당신에게 묻는데 “오실 그이가 당신이십니까?"
그 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얻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그대로 전하라" 이 말씀들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입증하고 있습니다(마11:6).
이 때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본 바를 세례 요한에게 전하기 위해 떠나간 후에 예수님은 그의 말씀을 듣고 있던 무리들,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기 위해 광야에 나갔던 그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왜 광야에 나갔더냐?"고 묻습니다.
1.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7절)
7절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는가” 묻습니다. 여기서 사람에게는 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5감각이 있는데 눈으로 보는 시각이 있고, 귀로 들어보고는 청각이 있고, 코로 냄새를 맡아 알아보는 후각, 혀로 먹어 보고 아는 미각, 손으로 만져보고 아는 촉각이 있습니다. 다 본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본다, 들어본다. 냄새를 맡아 본다, 먹어본다, 만져본다. 본다는 말은 중요하게 사용되어집니다. 사람이 눈으로 보지 아니하고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확신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듣는 것이 낫다는 말입니다. 보지 않고서는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느냐가 문제입니다. 보는 관점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다시 어렵게 말하면 세계관입입니다.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보느냐?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적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라는 관점하에 보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입니다.
사실 사람은 저마다 제나름대로 마음의 안경을 쓰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쓰는 마음의 안경의 빛깔에 따라서 그 생의 빛깔이 여러 모양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노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노랗게 보입니다. 절망의 검은 안경을 쓰고 인생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어둡고 쓸쓸하게 보입니다. 장미색 밝은 안경을 쓰고 생을 내다보면 그의 생의 대부분이 장미 빛처럼 기쁨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회색빛 안경을 쓰고 생을 바라보면 인생이 음울한 회색빛으로 보일 것입니다. 인생 그 자체는 하나입니다. 어떤 마음의 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여러 가지 빛을 냅니다.
링컨(Lincoln)은 "사람은 자기가 결심하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마음가짐에 따라서 그의 생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입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부정적인 관점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장미를 보아도 누구는 장미의 가시를 보고 아프다고 불평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장미꽃을 보고 그 아름다움과 향기를 맡고 좋아합니다. 여러분은 매사를 어떤 관점으로 봅니까? 부정입니까? 아니면 긍정적입니까? 불평적입니까? 아니면 감사적입니까?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을 죽여 번제물로 바쳐야 하는 고민속에서 순종하다가 창22:13- 14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음으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을 친히 보았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다가 불타는 가시나무 불꽃 가운데에서도 타지 아니하는 모습속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고난중에도 버리시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았습니다. 넘실거리는 홍해 앞에서도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보았습니다.
야곱은 고향집을 떠나 먼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는 밤의 고독속에서 하늘과 연결된 사다리를 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 속에서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타는 불가마속에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친히 체험하고 보았습니다. 사사 기드온은 300명의 작은 숫자지만 미디안 군대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승리를 보았습니다. 10대 소년의 다윗은 큰 장수 골리앗을 향하여 날아가는 작은 물멧돌속에 함께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의 힘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좋은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 하나님의 선하심, 역사하심을 볼 수 있기를 바람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오셨습니까? 무엇을 보려고 오셨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건물을 보러 오셨습니까? 성가대를 보러, 찬양을 들으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누구의 얼굴을 보러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본문 7절 말씀을 보면 "저희가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세례요한이 외친 장소가 바로 광야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과 조건입니다.
그 광야에서 아비의 심정으로, 엘리야의 심정으로 외치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은 회개를 외치는 것과 기다리던 그리스도를 곧 맞이하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처럼 간단한 설교,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라는 설교입니다. 또 단순한 사역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랍비와 당대 석학의 가르침보다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에게 달려왔고, 서슴치 않고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몰려드는 모습을 보면 목적이 하나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질문을 속에는 그들이 각기 속 생각이 다름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지적의 질문이 바로 “너희가 무엇을 보려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광야를 찾는 목적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1. 첫 번째 질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나갔느냐? 묻습니다.(7절)
과야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는 말씀속에서 갈대(헬, 칼라몬)는 중심없이 이리저리 바람에 따라 중심을 이동하는 마음을 상징합니다.
1) 그런데 이 말은 특별히 예수님의 세례 요한에 대한 말씀인데 세례 요한이 흔들리는 갈대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을 강조하시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합니다. 끝까지 섬기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굽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소신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어떤 권력의 압제와 힘든 역경속에서도,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도 조그마한 미풍에도 쉽게 흔들리는 갈대같은 당대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세례 요한은 믿음과 양심을 굳게 지키는 자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떠합니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같지는 않습니까? 작은 바람에도 휩쓸려 가는 파도와 같지는 않습니까? 과연 그런 파도와 바람에 굴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셨습니까? (♬ 찬양, 거친파도 날 향해 와도 주와 함께 날아 오르리 폭풍 가운데 나의 영혼 잠잠하게 주를 보리라)
오늘날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신앙의 중심도 없이 그냥 왔다갔다하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삶에 변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믿음의 성장은 곧 행실이라고 하는 열매로 직결됩니다. 매번 반복합니다만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즉 가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해도 주님의 마음과 뜻을 알고 사랑하는 행위가 없으면 그 순간에 사단으로 정죄되어 질책을 받고 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에게 그와 같은 일이 닥치면 오히려 서운하고 사랑이 없느니 불평하고 떠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저 여자가 먹으라 해서 먹었다고 은근히 하나님을 원망했던 아담의 속물적 근성이 아직도 우리들 한구석에 불행하게 남아 있지 않는가 자신을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은 절대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님을 분명히 인정해 주시는 그런 말씀입니다.
2) 또 하나의 의미로 세례요한을 갈대로 취급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광야의 갈대라는 헬라어의 ‘칼라몬’이라는 말은 지휘봉이나 지팡이로 사용됩니다. 세례요한의 선지자적인 사역과 더불어 말년에 헤롯와의 미움을 사 감옥에 들어 갔을 때 오실 메시아가 예수님이신가 물으려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얼핏 요한이 예수님의 메시아성에 의구심을 품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는 그것이 아님니다. 세레요한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고 그의 오심을 준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로서 구속의 사역이 어떻게 진행될런지 그 방법과 범위가 어떻게 진행될런지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제자들의 혼란스러운 마음도 바로잡을겸 제자들을 보내어 물어 본 것입니다. 흔들리는 그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니면 그의 제자들처럼 뭔가 보이지를 않을 때, 어떤 시간이나 징표가 없다하여 혼란스러워하며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그가 결코 갈대가 아님을 확신시켜 주심니다. 감옥에 갇혀도, 메시야가 자신을 옥에서 이끌어내지 않더라도 세레요한은 의심하거나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흔들리는 갈대가 아님을 강조하여 우회적으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말씀으로 믿다가도 의심하며 스스로 예수님을 갈대와 같은 분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회자에게 대한 생각에도 흔들리는 갈대로 보고 판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 세례요한은 중심이 있는 사람임을 갈대를 통해 보여주심니다. 그냥 주어진 상황에 따라 되는대로, 바람부는 대로 사는 선지자가 아님을 말씀하심니다. 세례 요한의 삶은?
1)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그 목적을 기키고 이루기 위하여 사는 것, 입는 것, 먹는 것도 다 버립니다. 포기합니다.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2) 생각이 분명했습니다. 생각이 분명하다는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요, 그렇지 않은 것은 목숨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려워 않습니다.
3) 행동이 분명합니다. YES와 NO가 분명합니다. 나는 메시야가 아니다 분명히 합니다. 나는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분명한 것을 말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이루려고 할 때에 복잡해집니다.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 하려고 할 때 복잡해집니다. 내가 행할 것은 속히 행하시기 바람니다.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성공하면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사는 방법이 명확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저기서는 저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와 가정과 직장 그리고 이웃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역사하심으로 인한 하늘의 기쁨을 은혜를 풍성케 하기 위한 분명한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사명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할 때 승리할줄 믿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묻습니다.
3.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8절)
광야에 나간 또 다른 한 부류는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나갔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부드러운’이란 헬라어의 ‘말라코스’ 사치스런, 방탕한, 나약한 이런 뜻입니다. 이런 사치스럽고 방탕하고 나약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나갔느냐? 사실 광야에는 상식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을 턱이 없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 비유적으로 비꼬아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옷감을 볼 줄 아는 사람들, 옷감을 다루는데 익숙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비단이나 양모, 갖가지 폴리에스텔 섬유들은 예수님 당시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눅16:19)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자색 옷은 귀족이나 부자 계층만이 입을 수 있는 것이었고, 고운 베옷은 그 값이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에 그런 옷들은 서민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런 옷을 입을 사람들은 백성들의 눈에도 별로 띄지 않게 행동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서민들은 집에서 거칠게 짠 양털 옷이나, 염소나 낙타 가죽을 통으로 꿰맨 자루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세례 요한은 낙타 가죽을 뒤집어 쓰고 허리에 가죽띠를 매고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고운 옷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광야에 나갔더냐?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라고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요한의 입은 옷이 결코 많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최신 패션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대중의 인기를 얻을만한 그 어떤 요소, 부나 사치와는 거리가 먼 사람임을 보여주심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삶으로 그는 분명코 부나 사치와는 거리가 먼 그런 사람, 그런 생활이었습니다.
"옷이 날개"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어느 정도의 외모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외모만으로 한 사람을, 인격 전체를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니 외모는 결코 한 인격의 최종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은 예의로서 권장할만합니다. 같은 일을 해도 외모를 갖춘 사람이 나은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외형보다 내면이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세례 요한의 외형을 보심이 아니라 내면을 바라보시고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결코 그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고후4:16에서 “고난중에도 낙심치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왜,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워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겉 사람보다 속 사람이 중요합니다. 사도바울은 겉 사람보다는 속 사람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나이들어 겉사람은 늙고 부패하지만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짐을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나타난 그 능력은 그의 외모나 어떤 도구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그의 인격과 그의 메시지에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현대에 있어서도 전기 통신의 기능이나 고아고 수단, 그 밖의 여러 가지 문명의 이기 등을 이용할 수 있으나, 설교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설교자 자신인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고, 메시지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되어진 것이라면 분명코 능력 있는 사역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목사도 성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일차적으로 교회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모임입니다. 성도 개개인을 가리켜 교회라 말씀하심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조직이, 규모가 먼저 교회를 결정짓지 않습니다. 그 교회에 모인 성도들이 교회요 이를 귀중히 보심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옷을 입었느냐? 집은 어떤 집에서 몇 평에서 사느냐? 어떤 것을 갖추고 사느냐, 차는 뭐냐 종류는? 교회는 몇 평이냐? 교인이 몇 명이냐? 이런 것들 상관없이 저를 볼 때 교인들이 목사님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고 그렇게 보여졌으면 좋은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옷을 입든지 목사님으로 보여지고 보면 좋은 것입니다.
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교수님! 그러는데 그것 크게 자랑할 것도 없고 오히려 부족하고 부끄러운 일이 않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은 성경이고, 다음은 예배설교입니다. 70-80% 정도가 넌크리스챤입니다. 미션스쿨이니 이수 안하면 졸업을 못합니다. 그러니 억지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설교하기가, 성경을 가르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름니다. 쉽게, 재미있게. 아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구나, 교회에 다니는구나... 알려만 주어도 좋겠다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가르치는 방법이, 인격이, 삶이 얼마나 잘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늘 부족함을 느낌니다. 그런 이름을 듣는다해도 저는 목사로서 넥타이를 메고 양복을 입든, 막바지에 셔츠를 입고 벽돌을 나르던, 운전을 하던, 청소를 하든, 길에서 산에서 학교에서 만나도 목사로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강대상에 있을 때는 목사인 것 같은데 다른 곳에서는 목사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비극입니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도들에게 '목사인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외형이 아님니다. 외모가 아님니다. 무슨 조직이나 직분이 성도와 교회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직분 자체가 그를 위대하게 하는 것이 아님니다. 무슨 일을 만났다고 흔들리고 포기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도요 하나님의 자녀요 권속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이나 지위나 형편보다 우리 마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심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그래도 말씀위에 자신을 세워 나가고 그 말씀,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려는 그 마음을 하나님 기뻐하심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나 목회자를, 성도들을 각자 생각하는 대로, 느끼는 대로 얘기를 합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을 빼놓고 눈에 보여지는 면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외형도 중요하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외형적으로, 눈에 보이는 형편을 너무 중요시하지 말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성도가 제일 귀한 성도입니다. 좋은 교회입니다. 건강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교회인줄 믿습니다.
교회에서 세상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광야에 나가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을 보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부드러운 옷, 사치스런, 방탕하고, 나약한 이런 옷을 입은 사람을 보러 나온 것이 아님니다. 외형을 보러 나온 것 아님니다. 이런 생각이나 이런 요구에서 교회를 나오면 안됩니다. 광야에는 상식적으로 그런 사람이 없는 것처럼 교회에서는 없어야 하고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음성에 여러분의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음주일에 이어서 결론의 말씀을 나눔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마 11:2-11 / 박근호 목사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낸 이유에 대해서 성서학자들은 여러가지 견해를 내어놓고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신빙성있는 해석으로 여겨지는 것은 '요한이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요한은 그 당시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뭔가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견지에서 볼 때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정말 이분이 내가 길을 예비하고 이 민족이 기다려야할 바로 그 메시아인가'라는 회의가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례요한의 갈등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기에도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너무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자신을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던 세례 요한은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며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 태워버릴 심판의 메시아가 오고계심을 소개했습니다. 그가 전한 메시야는 도끼를 들어 나무뿌리를 내려찍듯이 그렇게 세상의 악을 없앨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자기는 그렇게 죄에 대항하여 싸우다 지금 감옥에 갇혀 고통받고 있는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죄인들과 한 식탁에 앉아서 먹고 마시고, 머리카락에 값비싼 기름을 발라주던 창기 출신의 여인으로 하여금 발을 씻게 하고 저들과 노닥거린다는 것입니다.
소문이란 게 이렇습니다. 한 입만 건너도 의미가 변하는 게 소문입니다. 그러니 소문이 건너 건너 감옥의 세례요한의 귀에까지 들렸을 때에는 어떤 내용으로 들렸겠습니까? 왜곡되고 부풀려진 그런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왜곡되었어도 그 바탕만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고 여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혼란에 빠진 겁니다. '이거 정말 그분이 오실 그분이었단 말인가?...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닐까...'
복음서에 보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다른 점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찾아와 비난을 퍼부으면서 따져 묻습니다. "우리는 당신네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소. 당신들은 전혀 의로운 자들 같지가 않소이다. 저 세례요한과 바리새인들을 좀 보시오. 저들은 자신들도 열심히 기도하고 백성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자기 자신을 억제하는 법과 온갖 종류의 심신수련법에 대해 말해 주지않소? 그런데 어찌 당신네들은 그 중에 그 어느 것도 하고 있지 않는 것이요?..."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 또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많은 점에서 달랐습니다. 세례요한은 평생을 수도승처럼 살았습니다. 마을이 아닌 동떨어진 사막에 기거했고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진 천연의 것 그대로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직물로 짠 옷 대신 낙타 가죽을 옷으로 입었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빵이나 포도주를 먹지 않고 자연식 그대로인 곤충이나 꿀 그리고 늪의 물을 떠 마시며 살았습니다. 그는 그렇게 세상과 떨어져 살면서 낮밤으로 기도하며 영성을 키웠습니다.
그런 자기금욕적 삶에 철저했던 요한은 메시야가 오심으로 인해 무언가 극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는 분명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는 더욱 기도를 중요시 여기시고, 성전이나 회당에도 자주 가시고, 열광적으로 할렐루야를 외치시고, 사람들을 모아 자주 철야와 금식을 하시고, 또 하나님을 찬양하는 집회를 여실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신앙적 안목에서 볼 때 예수님은 너무도 낮선 메시야, 너무도 동떨어진 메시야였습니다.
사람들이 제 삼자적 입장에서 볼 때도 하나님의 메신저라고 하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너무도 달랐습니다. 요한의 가르침은 몹시 두드러졌고 강렬하면서도 일방적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몰려오는 군중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독설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으니 누구든지 나무처럼 베어져서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던져질 것'이라고 거침없이 외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꾸물거리지 말고 당장 삶을 바꾸라'고 일갈했습니다.
그는 회개한 사람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단지 회개하지 않은 사람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만 매우 단호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장차 하나님의 분노, 하나님의 징벌이 내릴 것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요한의 메시지는 침울하고 엄격했고 어둡고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러한 요한의 스타일을 아이들의 장례식 놀이에다 비유하시고 당신의 그와 상반된 스타일을 아이들의 결혼식 놀이에다 비유하셨던 겁니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유할꼬. 너희는 장터에서 노는 고집스런 아이들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장송곡을 불러도 가슴을 치며 슬퍼하지 않더니, 지금은 내가 피리 가락에 맞춰 결혼식 노래를 불러도 춤추려 하질 않는구나..."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례요한도 하나님이 보낸 자이고 예수님도 하나님이 보낸 자인데 어찌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니까? 이 차이는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또 이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세례요한은 분명 하나님의 보냄받은 종으로서 의인이었고 예언자였습니다. 주님은 그를 가리켜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추켜세웠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낡은 방식, 즉 구약의 방식에 걸맞는 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을 끝으로 구약은 막을 내리는 겁니다. 13절 말씀을 보시면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그랬습니다. 즉 요한은 메시야 시대를 예고하는 구약의 최종적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를 메시야가 오기 전에 다시 올 것이라고 말라기에 예언된 엘리야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제 요한의 시대는 가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다른 것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임하는 겁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로서 사람들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고 불릴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온다'는 것을 알리는 복음의 전령이긴 했지만 그 자신이 복음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차이점을 아주 분명히 구분하십니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는 말은 "요한의 시대까지는 율법과 예언들이 있었지만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제 요한 이후로 변화가 오는데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물과 그리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 예언처럼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새로운 무엇, 새로운 시대, 새로운 시작을 알리려고 주님 위로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으로 인해 전에 없던 새로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고, 목자가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고, 가정 주부가 잃어버린 작은 동전을 찾고, 주인이 불청객을 반기고, 주님이 병들고 죄 많은 사람들을 찾는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전혀 다른 시대입니다. '장례식 놀이의 시대'에서 '결혼식 놀이의 시대'로 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차이였습니다.
요한은 슬퍼했지만 주님은 기뻐했습니다. 요한은 장송곡을 노래했지만 주님은 환희의 송가를 노래하셨습니다. 요한은 빵을 먹지 않았지만 주님은 당신이 친히 빵이 되어 스스로를 쪼개 주셨습니다. 요한은 포도주를 입에 대지도 않았지만 주님은 독 안의 물들을 전부 포도주로 바꾸어 잔치가 계속되게 하셨습니다. 요한은 낙타 가죽옷을 입었지만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사랑과 정을 기우려 직물로 길게 짠 옷을 입으셨습니다. 요한은 경고했지만 주님은 초대하셨습니다. 이렇게 달랐습니다. 그 둘의 삶의 스타일에 이런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차이가 요한에게는 미스테리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묻는 겁니다. "당신이 정말로 오시기로 되어 있는 바로 그 분이 맞습니까?..."
세례요한은 헷갈리고 있습니다. 그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요한은 구약에서 가장 큰 인물이다.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다. 그러나 신약의 인물 가운데 가장 작은 이라도 그 사람보다 더 크다!" 왜냐하면 신약은 천국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입니다. 거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무엇인가?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고 말합니다. "눈먼 자가 보고, 절름발이들이 일어나 걷고, 문둥병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먼 자가 들으며, 죽은 이들이 일으켜지고,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이것, 이것을 전하라!" 그리고 6절에서 아주 중요한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은 세례요한을 향해 '당신과 다른 나로 인해 넘어지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실족하지 않는 겁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 대림절기에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은 누구입니까?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우리를 천국으로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기쁨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굳어있고 두렵고 움추려서 맞을 저승사자 같은 분이 아니라, 기쁨으로 환호하며 맞아야할 우리의 신랑과도 같은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외따로 떨어져 있거나 자기 영역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함께 어울리시고 더불어 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같이 먹고 마시고, 우리와 같이 입고, 우리와 같이 노래하고, 우리와 같이 일하시면서 하늘나라에 속한 자로서 살아가야할 일상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은 이렇게 하늘의 은총을 땅으로 나르러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런 주님을 기다리면서 이 대림절기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기도가 불필요하거나 우리의 영성생활이 무가치하다는 게 아닙니다.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도하다 아기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영성이 닫힌 영성, 고립된 영성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성은 민족 앞에 열려있고 또한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영성이었습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축복한 후 모친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는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여기도 보면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으로 인해 넘어지기도 하고 일으켜지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는 겁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께 걸려 넘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서서 새출발합니다.
먼저 예수님에 의해 걸려 넘어지는 건 저들이 생각하는 메시야관에 예수님이 부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가진 고정된 틀속에 주님을 우겨넣어 맞추는 겁니다. 그런 저들에게는 예수님이 메시야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시각으로는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고 오히려 배척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예수님의 영성과 당시 세례요한 그리고 바리새인의 영성과는 다른 점이 참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영성과 삶의 스타일이 그 당시 종교인들에게는 낮선 것이었고 파격적인 것이었다는 얘기입니다.
혹시 여러분도 세례요한이 가졌던 이런 갈등을 겪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생각했던 메시야와 예수님의 모습이 동떨어지진 않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하지만 어느새 바리새인과 세례요한처럼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새술을 새부대에 담지 아니하고 그냥 옛부대에 담음으로 실족의 낭패를 보지는 않습니까?...
주님의 영성은 치유와 회복의 영성이었습니다. 보지 못하던 자로 보게 하고, 걷지 못하던 자로 걷게 하고, 더러운 자가 깨끗함을 받고, 못듣던 자가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하여 낙심하고 좌절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듣게 하는 영성이었습니다. 그러한 영성과 세례요한의 영성이나 바리새인의 영성은 달랐던 것입니다.
거룩해 보이고 멋져 보이기는 물론 세례요한과 바리새인들의 영성이 더 그럴듯해 보였을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가자 무리에게 요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요한이 머물던 그 광야로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나갔더냐?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보러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광야에 머물던 세례요한은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그가 바로 내 앞서 내 길을 예비하러 온 자니라. 내가 진정으로 말하건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영성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게 바로 진정한 영성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영성은 우리가 머무는 곳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 삶의 현장에도 이런 치유와 회복과 새창조의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전갈을 들고 간 제자들을 만난 세례요한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 이후의 이야기는 성서가 전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례요한조차도 또 한번 주님에 의해 변화되어야 했다는 겁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불의를 보며 거품을 내품었던 세례요한이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상의 온갖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되도록 기도하신 분이요 십자가에서 당신을 못박는 자들을 위해 오히려 '아버지여, 저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오니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던 분이십니다. 고발과 질책이 아니라 끝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푸신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셨습니다. 그런 분을 구주로 고백하는 자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런 분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까?...
러시아의 어느 작은 마을 사람들이 유대 랍비가 도착하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마을에 랍비가 오는 일이 좀처럼 드문 일이었기에 사람들은 그에게 물어볼 질문들을 잔뜩 준비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랍비가 도착을 하고 사람들은 반갑게 그를 맞아 마을회관에 모였습니다. 랍비는 그들의 분위기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은 자신들의 많은 질문에 대한 랍비의 대답을 들으려고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랍비는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참동안 그들의 눈을 빤히 바라만보더니 인상적인 가락의 콧노래 하나를 흥얼거렸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자 마을사람들도 랍비가 부르는 그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노래의 박자에 맞추어 스텝을 밟고 몸을 흔들면서 춤을 추었고 마을사람들도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그들은 모두는 곧 그 춤에 몰입되어 그 경쾌한 움직임에 완전히 동화되어서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잊었습니다. 춤의 황홀경에 빠진 그들은 완전히 하나가 되었고 진리로부터 떨어져 있던 분열된 마음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춤이 점점 느려지면서 완전히 멈추기까지 거의 한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은 언제 시간이 흘렀는지 느끼질 못했습니다. 이제 그들의 마음에는 그 어떤 긴장감도 없이 방안 가득히 고요와 평화가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그곳에 모인 마을사람들을 둘러보며 딱 한 마디 말로 자신의 말을 끝냈습니다. "이것으로써 내가 여러분의 질문에 답변을 했다고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은 같은 대답을 하신 겁니다. "여러분이 듣고 보는 것을 그대로 스승에게 전하시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성탄을 기리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이 대림절기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노래하고 주님과 함께 춤을 춰야 합니다. 그분의 가락에 맞춰서 노래하고 그분의 스탭에 맞춰서 춤을 춰야 합니다. 그분이 부는 피리소리에 우리의 스탭을 맞추고 몸짓을 맞춰야 합니다. 바로 그 춤이 균형과 조화를 상실한 우리의 영혼을 깨어나게 할 것이고 우리 삶의 매순간을 감동의 파도로 일렁이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영혼의 춤이 우리의 이웃들에게 치유와 회복과 살림의 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주님을 기다립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 저희 가운데 오셔서 영혼의 춤을 가르쳐주사 주님처럼 치유와 회복과 살림의 역사를 감당하는 우리의 신앙공동체가 되게 하소서!" 이 기도가 이 대림절기와 성탄절기에 우리의 노래가 되어 주님께 드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