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국
오승철
그래, 언제쯤에 내려놓을 거냐고?
혼자 되묻는 사이 가을이 이만큼 깊네
불현듯
이파리 몇 장 덜렁대는 갈참나무
그래도 따라비오름 싸락눈 비치기 전
두말떼기 가마솥 같은
분화구 걸어놓고
가난한 가문잔치에 부조하듯 꽃불을 놓아
하산길 가스름식당
주린 별빛 따라들면
똥돼지 국물 속에 펄펄 끓는 고향 바다
그마저 우려낸 몸국,
몸국이 먹고 싶네
남극노인성
휙하니 하늘을 긋는 별똥별도 아니고
턱하니 터를 잡은 북극성도 아니고
초저녁 자리젓 뜨러
나가다가
보는 별
서귀진성西歸鎭城 터만 남은 솔동산에 올라서면
바다 끝 하늘 끝 사이
걸쳐놓은 숟가락같이
고단한 물마루 위에 걸쳐진 불배 몇 척
불배 몇 척, 걸쳐진, 고단한 저 물마루
별을 보라
간신히 길 하나 돌려 세우고
한 마디 굳이 삼킨 채 홀로 뜨는 별을 보라
단 한 번도 너에게 소원 빌어 본 적 없다
수평선 위 한 뼘 가웃
내 그리움의 한 뼘 가웃
둥그런 윤회의 길섶 한 뼘 가웃 별이 뜬다
봄꿩
대놓고 대명천지에
고백 한번 해본다
오름만 한 고백을 오름에서 해본다
갓 쪄낸 쇠머리떡에
콩 박히듯 꿩이 운다
월하정인
- 조선 정조 때 제주에는 계축 · 갑인 · 을묘년으로 이어지는 큰 흉년이 있었다. 만덕
할망이 백성들을 구휼했던 것도 이때였으니.
그래도 세상이 좋아 몇 잔술 세상이 좋아
내리 삼년 흉년에도 길 따라온 멍석딸기
까짓것, 까짓것 하다
다 털리고 말겠네
'백년 숭년에도 먹다 남은 게 물'이라고?
그러네,
갑인년이라 어찌 곱게 불러줬겠나
객줏집 만덕할망도 그냥 있질 못하는
칠월도 어느 보름
개도 컹컹 허기진 밤
경복궁 뒷골목의 허리춤 돌아들면
뜯기다 남은 달이야 떠 있거나 말거나
그래, 아슬히 놓친 개뼉다귀 같은 것아
평생 내 등에 걸린 가난한 그리움아
수천의,
수만의 별빛이
저 초롱불만 하겠는가
돗 잡는 날
때 아닌 왕벚꽃이 펏들대는 겨울이었다
똥돼지 목 매달기 딱 좋은 굵은 가지
꽤애액
청첩을 하듯
온 동네를 흔든다
잔치,
가문잔치,
그 아시날 돗 잡는 날
자배봉 앞자락에 가마솥 내걸리고
피 냄새 돌기도 전에 터를 잡는 까마귀 떼
'솥뚜껑 배옥 열고
익어신가 한 점 설어신가 한 점'*
4.3동이 내 누이 시집가던 그날처럼
한 양푼 서러운 몸국
걸신들린 밤이었다
* 제주속담에서 차용.
애월의 달
- 순동선생
벌써 두런두런 서너 사람 온 것 같고
개 짖는 소리 따라
올레길 돌아들면
고내봉 한자락 끌고 청매화도 와 있었다
세월에 힘이 부친 분재들도 내려놓고
부엉이 들고양이가 서리하다 남은 닭
오늘은 닭을 잡는 날
씨암탉을 잡는 날
닭다리 날갯죽지
막걸리잔 오가는데
"제 죽음 직감했는지 알 하나 낳고 갔어"
노시인 툭 흘린 한 마디
먹먹한 애월의 밤
겡이죽
어선 몇 척 태흥포구
경매도 다 끝나고
세멘바닥 윷판이라도 벌일 것 같은 오후
가끔씩 도둑고양이 순찰하듯 다녀간다
이곳에선 '게죽'이나 '깅이죽'이라 하지말라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 없는 파도처럼
"뭐 마씸?"
되묻기 전에 말하시라 겡이죽!
따져보면,
수평선은 넘겨야할 낙선落線이다
모로 가든 도로 가든 사람팔자 윷가락 팔자
한 세상 생비린내마저 녹여낸
저 겡이죽
별어곡역
설령
하늘에 건 맹세는 아닐지라도
가자, '이별의 골짝' 억새물결 터지기 전
아리랑 첫 대목 끌고
거기 가서 헤어지자
기차마저 그냥 가는 타관객리 정선선
기다림은 다해도 간이역은 남아 있다
한때의 섰다판처럼
거덜 난 민둥산아
곤드레막걸리 한 잔
콧등치기국수 훌훌
떠밀리고 떠밀린 아우라지 구절리
단판에 이별을 건다
암세포 같은 그리움아
딱지꽃
신제주 어느 변두리 골목과 골목 사이
거미줄 그어놓듯 해장국집 차린 아내
때때로 중국말 제주말 걸려들고 있었다
누구의 한때인들 끗발 한 번 없었으랴
밤마다 가슴에 쓴 사직서를 내밀고
철지난 세상에 나와 저 혼자 핀 딱지꽃
이승을 뜰 때에도 이렇게 혼자라면
성당의 저녁미사는 뭐 하러 드리는가
불빛이 불빛에 기대 싸락눈 달래는 밤
판
1.
칠흑의 하늘에겐들 허기가 왜 없겠는가
2.
허기가 왜 없겠는가 칠흑의 가슴에겐들
제주시 칠성로 돌아 별자리로 걸린 국자
3.
국자도 나무 국자 손금처럼 금이 가도
별 방향 가늠해야 섰다 끗발 난다면서
밤새껏 북극성 따라 고쳐 앉는 자리하며
4.
따져보면, 밀항이리
벽랑국 세 공주도
또 그렇게 세 공주와 눈 맞춘 탐라 사내의 첫날밤도
생 한번 걸어도 좋을
판을 벌인 것이니
5.
팔자 사나운 게
사람만이 일이겠나
제주와 일본 사이 일본과 제주 사이 '죽을 운속에 살 운 있다'는 밀항의 바
다, 현해탄 그 허기의 바다〈4 · 3〉이며, 〈재팬드림〉, 끝내 못 돌아온 내 누
님의 별 하나
엎어적 갈라적 하며
칠성 끌고 가는 밤
누이
쇠똥이랴
그 냄새 폴폴 감아올린 새순이랴
목청이 푸른 장끼 게워내는 울음이랴
초파일
그리움 건너
더덕더덕 더덕밭
낙장불입
공룡 발자국 따라 생각 없이 오던 강,
울주 천전리 각석
그냥 가질 못 했는가
몸 한번 꿈틀한 자국 고스란히 남아 있네
그건,
강이 아닌 사람의 일이었네
하늘에 고백하는
나스카 문양이듯
장삿길 나의 아버지 그 목선도 거기 있네
이승과 저승이야 흥정하듯 오가는 거
물 쓰듯 세월을 쓰고
본전 생각 간절한 가을
내 생애
회심會心의 일타一打,
아차 싶은
'풍' 껍데기
매봉에 들다
하늘은 말씀으로 세상을 거느리고
도랑물은 구름으로 하늘을 거느리네
봄날이 다하는 길목
누가 날 거느리나
볼장 다 본 장다리꽃
설렘도 그쳤는데
삼십 년 외면해온 그 오름에 이끌렸네
첫 시집 못 바친 봉분
무릎 꿇고 싶었네
사랑도 첫사랑은
한 생애 허기 같은 거
주거니 받거니 잔 돌리는 장끼소리
봄 들판 깽판을 놓듯 푸릇푸릇 갈아엎네
터무니 있다
홀연히
일생일획
긋고 간 별똥별처럼
한라산 머체골에
그런 올레 있었네
예순 해 비바람에도 삭지 않은 터무니 있네
그해 겨울 하늘은
눈발이 아니었네
숨바꼭질 하는 사이
비잉 빙 잠자리비행기
〈4·3땅〉중산간 마을 삐라처럼 피는 찔레
이제라도 자수하면 이승으로 다시 올까
할아버지 할머니 꽁꽁 숨은 무덤 몇 채
화덕에 또 둘러앉아
봄꿩으로 우는 저녁
"셔?"
솥뚜껑 손잡이 같네
오름 위에 돋은 무덤
노루귀 너도바람꽃 얼음새꽃 까치무릇
솥뚜껑 여닫는 사이 쇳물 끓는 봄이 오네
그런 봄 그런 오후 바람 안 나면 사람이랴
장다리꽃 담 넘어 수작하는 어느 올레
지나다 바람결에도 슬쩍 한번 묻는 말
"셔?"
그러네 제주에선 소리보다 바람이 빨라
'안에 계셔?' 그 말조차 다 흘리고 지워져
마지막 겨우 당도한
고백 같은
그 말
"셔?"
비양도 2
이승의 어느 길목 걸어놓은 풍경같이
옹포마을 한 자락 걸쳐 입은 풍경같이
누구라 종일 홀리나, 혼자 우는 풍경같이
화성의 지표면 같은 화산섬에 내가 서면
학생 하나 선생 하나 교실까지 따라온 게
찔레꽃 하얀 물소리 담장을 넘고 있다.
바다가 뱉어놓은 게딱지만한 저 집들
할망바당* 숨비소리, 그 소리만으로도
해풍에 때 절은 삶의 공대뼈가 만져진다.
"무슨 팔자에 비양도 나곡 해녀로 나신디사…"
굳이 묻지 않아도 툭 내뱉는 파도소리
둥그런 범종의 저녁, 노을 한 채 지고 온다.
* 할망바당 : 늙은 해녀들만 물질하는 수심이 얕은 바다.
그리운 붉바리
파장 무렵 오일장 같은
고향에 와 투표 했네
수백 년 팽나무 곁에 함께 늙은 마을회관
더러는 이승을 뜨듯 주섬주섬 돌아서네.
돌아서네 주섬주섬
저 처연한 숨비소리
살짝 번진 치매낀가 어느 해녀 숨비소리
방에서 자맥질하는 그 이마를 짚어보네.
작살로 쏜 붉바리 푸들락 도망친다고
팔순 어머닌 자꾸
허공을 겨냥하지만
결국엔 민망해져서 피식 웃을 뿐이지만
어디로 떠났을까
몽고반점 그 고기는
마지막 제의祭儀이듯 물질을 끝냈을 때
한 생애 땟국 같은 일 초경처럼 치른 노을
ㅡ『제6회 한국시조대상수상작품집』(고요아침, 2016)
ㅡ『시조시학』(2016,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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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몸국 외 17편 / 오승철..제6회 한국시조대상 특집
sun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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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03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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