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보 신명균의 '시조전집'127p에는 박태보의 시 한수가 있다.
흉중에 불이나니-박태보 흉중(胸中)에 불이나니 오장(五臟)이 다 타간다. 신농씨(神農氏) 꿈에 보아 불 끌 약 물어보니 충절(忠節)과 강개(慷慨)로 난 불이니 끌 약 없다 하더라. 1)신농씨; 중국 고대 제왕의 이름. 농사와 제약을 가르쳤다 함. 2)강개; 의분. 박태보, 그는 누구인가?
인현왕후와 장희빈!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의 왕비와 후궁인 이 두 여인의 갈등. 장희빈의 원자(元子) 출산에 이은 인현왕후의 폐비(廢妃), 이후 인현왕후의 복귀와 장희빈의 사사(賜死)로 이어지는 이 시기는 조선 정치사에서 격동의 시대로 명명할 만하다. 라이벌인 이 두 여인의 부침에 따라 당시 정국은 세 차례에 걸쳐 소위 환국(換局)이라는 정치 주도 세력의 교체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학자, 관리들이 희생되었음은 물론이다.
당시 희생된 학자들 중에 박태보(朴泰輔)가 있었다. 국왕 숙종이 장희빈이 낳은 자식을 원자로 삼고 투기를 한다는 이유로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려 하자, 그는 직언을 하며 온몸으로 고문을 감당하여 의로운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었다.
뼈대 있는 집안, 뛰어난 학문적 재능, 준수한 용모 등 뭐 하나 뒤질 것 없이 모든 것을 갖춘 박태보. 그에게 닥친 모진 불운에 대해서는 조선왕조실록 등 연대기 기록에도 잘 나오지만, 특히 연려실기술, 박태보전을 읽어보면 그를 죽음으로 내몬 사건과 궁중에서의 가혹한 고문의 실상을 자세히 목도할 수 있다.
박태보의 비극적 죽음을 가져온 사건의 발단은 숙종의 인현왕후에 대한 폐출 시도였다. 1688년 10월에 아이를 갖지 못한 인현왕후와 달리 후궁 소의(昭儀)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어 이듬해인 1689년 1월에 숙종은 곧바로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자를 원자(元子)로 봉하고, 소의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삼는 일을 강행하였다. 이어 숙종은 인현왕후의 투기를 비난하는 비망기(備忘記)를 조정에 내림으로서 일이 급박하게 전개되자, 오두인, 박태보 등 약 80여 명이 모여 상소를 작성하기에 이른다.
당초 상소를 위해 모여든 선비 중에는 상소문 초본을 넣고 온 이들도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전 응교 박태보가 여러 글을 가져다가 손수 첨삭하여 글을 마무리했다. 이렇게 해서 전 판서 오두인을 상소 대표인 소두(疏頭)로 하여 승정원에 상소를 바쳤는데, 이때가 기사년(1689년) 4월 25일 오후 4시경이었다.
황혼 녘에 승지를 불러들여 상소문을 읽자마자 숙종은 상소를 올린 이들을 즉시 잡아다 친국(親鞫)할 것을 명령한다. 상소문에는 옛 성왕들은 배필인 왕비를 중히 여겼음을 지적하고, 설령 왕비에게 과실이 있더라도 망극한 죄명을 씌워서 무서운 위엄을 떨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이런 상소문의 내용이 숙종의 화를 돋운 것이다.
숙종이 박태보를 국문한 장소인 창덕궁 인정문. 당시 인정전 앞의 인정문, 숙장문 일대는 국문장으로 자주 쓰였다. 원래 한밤중에는 대역죄인이라도 국문하지 않았다. 하지만 숙종은 이날 밤 10시경 창덕궁 인정문(仁政門)에 나와서 급히 의금부 당상과 대신, 삼사 관리들을 부르고, 친국할 형틀을 준비하라고 재촉하였다. 이런 급박한 명령에 뜰에 쓸 횃불을 준비하지 못한 신하들은 심지어 궐문 가까이 있는 시전 가게를 헐어서 땔감으로 준비해야 했다.
국문장에서 숙종이 상소를 작성한 배경을 추궁하자 박태보는 당당하게 말했다. “군신, 부자는 일체이옵니다. 이제 어느 사람이 제 아비가 만일 지나친 노염을 내어 죄 없는 제 어미를 내쫓고자 하면 그 자식된 자가 어찌 울면서 제 아비에게 간하지 않으오리까? 신들이 만 번 죽을 마음으로 한 장 상소를 올렸을 뿐이지 어찌 전하를 배반할 뜻이 있겠습니까?” 박태보가 계속해서 말대답을 하자 크게 노한 숙종은 매를 몹시 때리라고 엄하게 분부하였다. 임금의 분노가 계속되고 호령이 더욱 엄하여 장치는 소리가 궁궐 너머 향교동에까지 들렸다. 이를 박태보전에는 골육이 다 깨져 유혈이 낭자한데도 박태보는 조금도 아프다는 소리를 내지 않자, 숙종이 부채로 안석(案席)을 치며, “이렇게 형장을 가했는데도 아프다는 소리가 없으니 이런 독한 물건이 무슨 일을 못하리오. 엄히 치라!” 했다고 전한다.
박태보가 두 차례의 엄한 매질을 동반한 심문에도 불구하고 승복을 하지 않자 이때부터 오두인, 이세화는 내버려 두고 화살이 박태보에게 집중되었다. 숙종은 반역죄로 다스리겠다고 선포하며 박태보에게 압슬형을 시행하라고 명령한다. 압슬형은 자갈이나 사금파리 같은 것을 바닥에 깔고 죄인을 무릎 꿇게 한 후 그 위에 널판을 올려 넣고 여러 사람이 널판에 올라가서 밟는 고문이었다. 당시 좌우에 각각 세 명의 건장한 나졸들이 널에 올라가 소리 맞춰 뛰자, 널판 속에서 박태보의 무릎뼈와 사금파리가 깨지는 소리가 날 정도였다. 압슬형이 이어지자 이를 집행하던 나졸은 그 참혹함에 울면서 뛰었으며, 좌우에서 보는 신하들도 얼굴빛을 잃고 물러났다. 그렇지만 박태보의 안색은 변함없고 한 번도 아프다는 소리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데 여기서 전해오는 이야기. 박태보가 죽으면서 하는 말 "내 후손은 인동장씨-장희빈-와는 혼인하지 말아라" 지금도 인동장씨와 반남 박씨 사이에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로부터 200여년 후 한 남자-반남박씨-와 한 여자가-인동장씨-가 사랑을 했다. 현대판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차후에 기회가 있으면 말하겠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 때 거제도에 모아놓았던 왕씨 일족들을 바다에 빠트려 모두 익사시켰다. . 지금 왕씨들도 이씨들과 혼인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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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글 "위록지마"와 마찬가지로, 최희응 교장선생님 카페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글 내용이야 어찌 됐든, 이 분의 지식은 도대체 그 끝이 어디일까 를 생각하게 합니다. 사통팔달 이란 말이 어울리는 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