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성지 해미읍성
충남 서산 해미면에 있는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읍성 가운데 가장 보존이 잘된 곳이에요. 해미읍성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조선 성종 임금 때 쌓은 성이에요. 읍성이란 산성과 달리 평야지대에 사람들이 사는 집을 둘러서 쌓은 성을 말해요.
해미읍성에는 천주교와 관련한 슬픈 역사가 서려 있어요. 우리나라에 처음 천주교가 들어왔을 때 천주교는 서학이라고 불리며 학문으로 연구되었어요. 그러다가 차츰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지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가르침은 백성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 나갔어요.
“유교를 근본으로 하는 우리나라에서 서양 오랑캐의 종교를 믿다니!”
“제사도 모시지 않는 천주교를 금지시켜야 합니다.”
선비들은 천주교를 반대하고 나섰고, 나라에서는 1786년부터 천주교를 믿지 못하게 했어요. 그로부터 백 년 가까이 천주교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어요. 특히 프랑스와 미국의 군함이 강화도를 침입해 온 일이 있은 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졌어요. 서양에서 들어온 종교인 천주교를 믿는 신자들이 서양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단지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어요.
1866년, 해미읍성에서도 천 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목을 베거나 매달아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돌로 쳐 죽이기도 했어요. 또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죽이기 위해서 구덩이에 산 사람들을 몰아넣고 묻어 버리기도 했어요.
“예수와 마리아를 믿지 마라. 그러면 살려 주겠다.”
관리들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말했어요. 하지만 천주교 신자들은 믿음을 버리지 않았어요.
“예수를 버리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어서 죽이십시오.”
천주교 신자들은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였어요. 살기 위해 종교를 버리거나 도망치지 않았어요. 해미읍성 근처에는 천주교 신자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어요.
해미읍성에서 천 명이 넘는 천주교 신자들이 죽었지만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은 겨우 70명 정도예요. 이미 이름이 알려진 사람들이나 신부들은 다른 곳으로 끌려갔고, 해미읍성에는 평범한 백성들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해미읍성은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던 것이지요.
해미읍성은 서울 합정동에 있는 절두산 기념관과 함께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로 불리고 있어요.
해미읍성에 있는 호야나무
해미읍성 안에는 호야나무라고 불리는 큰 고목이 하나 있어요.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 나무에 목 매달려 죽었어요. 또 나무에 사람을 매달고 활로 쏴 죽이거나 돌을 던져 죽였다고도 해요. 지금도 호야나무 가지에는 그때 사람들을 묶어 두었던 밧줄 자국이 남아 있어요.
서산 9경 중 제1경인 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
해미읍성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읍성이란 읍을 둘러싸고 세운 평지성으로 해미읍성 외에 고창읍성, 낙안읍성 등이 유명하다. 해미읍성은 조선 성종 22년, 1491년에 완성한 석성이다. 둘레는 약 1.8km, 높이 5m, 총면적 196,381m²(6만여 평)의 거대한 성으로 동, 남, 서의 세 문루가 있다. 최근 복원 및 정화사업을 벌여 옛 모습을 되찾아 사적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조선말 천주교도들의 순교 성지로도 유명하다. 천주교 박해 당시 관아가 있던 해미읍성으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수많은 신자가 잡혀와 고문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특히 1866년 박해 때에는 1천여 명이 이곳에서 처형됐다고 한다.
성내 광장에는 대원군 집정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와 나뭇가지에 매달려 모진 고문을 당했던 노거수 회화나무가 서 있다. 바로 성문 밖 도로변에는 회화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신도들을 돌 위에 태질해 살해했던 자리개돌이 있어 천주교도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성벽 주위에는 탱자나무를 심어 적병을 막는데 이용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 호야나무(회화나무)
감옥 입구에 서 있는 300년 된 나무로, 이 나무의 가지에 신자들의 머리채를 묶어 매달아 고문하였었고, 그 흔적으로 철사 줄이 박혀 있다.
해미읍성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