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칼의 노래'가 큰 위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마음을 위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글을 읽고, 또 글을 쓰는 것이었다.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나는 김훈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라 생각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아픔을, 세상에서 받은 깊은 상처를, 그리고 지울 수 없는 외로움을...
'칼의 노래'에서 자주 뒤척이고 자주 우는 것은 바다가 아니라 김훈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게는 한겨레21의 방자한 쾌도난담과 현장기자로 돌아온 김훈의 기사가 옳고그른 가치판단의 대상이기보다는, 늘상 서걱거리며 세상을 사는 사람의 어려운 독백으로 느껴졌다. ... 오늘 내가 모르던 김훈을 만났다.
* 다음은 인터넷한겨레의 [기동취재팀 25시]에 권태호 기자가 올린 글이다.
* [기동취재팀 25시]는 한겨레신문 민권사회2부 기동취재팀의 취재후기이다.
[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1]
추석 직전 <한겨레> 편집국에서는 인사가 있었습니다. 지난 1년반 동안 사회부 기동취재팀장을 맡았던 저도 경제부로 돌아갔습니다. 기동취재팀을 떠나면서 이것저것을 정리하던 중 쓰다가 놔둔 뉴스메일 두 편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하나는 지난 2월 이후로 중단됐던 '가수왕 열전 6편'이고, 또 하나는 '김훈 선배' 관련 뉴스메일입니다. '가수왕 열전'은 저의 개인적 경험이 강한 탓에 다른 란에서 다시 이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지난해 기동팀에 함께 있었던 김훈 선배 관련 메일은 '기동취재팀 25시'란에 소개해야할 것 같습니다.
애초 이 뉴스메일은 지난 3월과 4월 두 차례에 걸쳐 '김훈 기자는 어디로 갔느냐? 왜 한 마디 설명도 없나?'라는 <한겨레> 여론매체면 '한겨레 비평'에 실린, 오창익 간사의 물음에 대한 답신 메일 성격으로 준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그날 일상에 치이다보니 기동취재팀을 떠난 지금에서야 이 글을 띄웁니다.
김 선배(호칭을 무엇으로 해야할 지 난감하네요? 그냥 제가 평소 김 선배를 부르는 호칭을 그대로 쓰겠습니다)는 정확하게는 지난 1월20일자로 <한겨레>를 떠났습니다. 지난해 2월 <한겨레>에 입사했으니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한겨레>를 떠났군요.
먼저 김훈이란 누구인지부터 먼저 설명드려야겠군요.
1. 김훈이란?
김훈은 1948년 5월 5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소설가 김광주씨의 2남3녀중 셋째로 태어났습니다. 김광주(1910~1973)씨는 50년대말-60년대초 국내 무협소설 1세대 작가로 <정협지>, <비호> 등으로 유명합니다. 지난해 김훈 선배는 선친의 작품인 <비호>를 재출간하면서 서문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소년 시절에 병석에 누운 아버지의 구술을 받아서 무협지 원고를 대필했다. 그것이 내 문장 공부의 입문이었다.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그 원고료로 밥을 먹고 학교도 다녔고 용돈을 타서 술도 마셨다. 그 아이가, 그 아버지의 나이가 되도록 늙어서 다시 그 책을 펴내니 눈물겹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김훈 선배의 아버지, 김광주씨 이야기부터 할까요?
김광주씨는 수원생으로 경기고보를 졸업한 뒤, 1933년 상하이 남양의과대학에 입학합니다. 이후 그는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서 이봉창, 윤봉길 의사와 함께 생활하면서 동인극단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당시 김광주씨는 상하이 홍구공원에 폭탄을 투척할 사람으로 윤봉길 의사와 함께 거론되다 김구 선생이 막판에 윤봉길 의사를 낙점한 일화도 있습니다. 만일 김광주씨가 낙점받았다면 김훈은 태어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김광주씨는 광복후에도 김구를 보필했으며 1947년 경향신문 문화부장, 편집국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김훈 선배는 2대에 걸친 소설가 겸 기자 집안 출신인 셈입니다. 애초 김광주씨는 정통(?) 소설을 쓰다 말년에 접어들면서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래는 지난해 김훈 선배가 <한겨레> 기자로 있을 때, <오마이뉴스>가 김훈 선배에 대해 쓴 글의 일부입니다.
소설가 김광주씨가 그의 아버지다. 김훈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는 매일 억겁의 술을 마셨다. 5년 동안 암을 앓았고 73년 작고했다. 가난했다. 아버지가 누워서 글을 불렀다. "거기서 점 찍어, 줄 바꿔"라고 했다. 김훈은 "그때 받아쓴 것이 문장수업이 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년인 나는 내 아버지의 쓰라린 위장을 위하여 남비를 들고 시장거리로 가서 해장국을 사 오곤 했다. 어느 겨울 새벽에 나는 해장국집 문지방에 낀 얼음 위에 자빠져서 끓는 국물을 뒤집어쓰고 허벅지에 화상을 입었다. 나는 선지와 콩나물을 바지 위에 뒤집어 쓰고, 빈 남비를 들고 춥고 어두운 새벽거리에서 울었다. 나는 이 세월들과 내 아버지의 생애를 뛰어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이를 갈면서 울었다"(주여, 망자를 당신 품 안에, 문학기행)
김훈 선배는 아버지인 김광주씨가 작고하던 1973년 <한국일보>에 입사합니다. 당시 그는 고려대 4학년 중퇴의 학력을 갖고 있었을 뿐입니다. 집이 가난하였던 그는 등록금을 제대로 못내 몇 차례나 휴학을 반복했고, 그러다 결국 졸업을 못했습니다. 굳이 기자가 되겠다는 생각도 딱히 없었던 김훈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라 밥벌이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했고(이전에는 막노동판에도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 와중에 <한국일보>의 입사지원 자격이 '고졸'이라는 점에 착안해 지원했습니다.(당시 다른 언론사는 모두 지원자격이 '대졸'이었습니다) 그러나 면접에서 '대졸'이 아니라는 게 문제가 됐습니다. 실제로 지원자격을 '고졸'로 했을 뿐 대학졸업을 하지 않은 사람이 한국일보 기자가 된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장기영 한국일보 회장이 당돌했던 김훈을 눈여겨 봐 김훈은 한국일보 기자가 됩니다. 김훈 선배에게는 아직 대학졸업장이 없습니다.
김훈은 <한국일보>에서 처음에는 기자의 초년이 으레 그러하듯 사회부 경찰팀(기동취재팀) 기자로 5년을 지냈습니다.(당시에는 경찰팀에서 지내는 기간이 지금보다 더 길었습니다) 이후 그는 문화부로 옮겨 문학을 담당했는데, 이때부터 그의 문재(文才)가 빛을 발합니다. 특히 저는 비록 보진 못했지만, 80년대 초반 김훈 기자를 아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듣자면, 한국일보에 연재한 '김훈의 문학기행'은 당시로선 엄청난 파격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조직생활에는 전혀 맞지 않는 인물인 김훈은 이후 한국일보에서도 몇 차례나 그만뒀다 다시 들어갔다를 반복하다, 이후 <시사저널> 편집장으로 또한번 이름을 떨칩니다. <시사저널>은 90년대 초반 시사주간지 시장이 만개할 때, 가장 먼저 시장을 열었던 곳입니다. 김훈은 그곳에서 기자로서 뿐 아니라 데스크로서의 능력도 발휘한 것입니다.
그러던 김훈은 엉뚱한 이유로 시사저널을 그만둡니다. <한겨레21>이 지금은 없어진 '쾌도난담' 코너에 적장이나 다름없는 김훈을 초청했고, 이 초청에 응한 김훈은 "나는 남자들보다 더 뛰어난 여자를 본 적 없다" 등 가부장적이고 다분히 군국주의적인 발언을 마구 쏟아낸 것입니다. 당시 패널로 함께 했던, 역시 또다른 면에서 '보통 아닌' 최보은 선배조차 반격을 하기보단 '왜 이런 자리에서 이런 발언을 하는 것인지' 그 진의를 파악하느라 오히려 어리둥절해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진 뒤, <시사저널> 기자 일부가 사표를 내고, 여성계를 중심으로 김훈 비난여론이 들끓자 김훈은 사표를 던집니다. 당시 그의 행동과 이후 진행과정이 너무도 황당해 '위악적'이라는 해석이 따라붙기도 했습니다. 나는 당시 김훈을 잘 몰랐지만, 마치 김훈이 칼로 자기 배를 찌르는 듯한, 끈을 매달지 않고 번지점프를 하는 듯한,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듯한 그런 서늘한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김훈은 야인으로 머물면서 전국을 풍륜(風輪)이라고 이름붙인 자전거를 타고 달린 뒤 쓴 수필집 <자전거 여행>(2000), 이어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칼의 노래>(2001) 등을 쓰며 지냈습니다.
김 선배가 들려준 이야기 한 토막. <자전거 여행>을 앞두고 새 자전거를 사 마당에서 바퀴를 굴리고 있으니, 형수가 김 선배에게 한 마디 했답니다. "이 양반이 벌라는 돈은 안 벌고, 다 늙어 무슨 자전거냐"고. 그러자 김 선배가 대꾸 했습니다. "모르는 소리 마라. 이 자전거가 우릴 먹여살릴거다"라고. 김 선배의 말처럼 그 자전거는 지금 김 선배를 먹여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2002년 초 김 선배는 우연히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현장기자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그 터는 <한겨레>가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비공식적인 이런 바람은 <한겨레>의 공식라인을 타고 논의됐고, 그리고 그해 2월 김훈은 부국장 대우 사회부 기동팀 취재기자로 입사합니다. 김훈으로서는 7번째 회사입니다. 이때 홍세화 선배도 역시 부국장 겸 편집위원으로 <한겨레>에 나란히 입사합니다. 나이는 비슷하지만 사고방식과 살아온 이력은 전혀 극과 극인 두 사람이 말입니다.
김훈의 <한겨레> 입성은 한 차례 진통을 겪기도 합니다. <한겨레> 일부 기자들은 김훈의 한겨레 입사를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지나온 이력과 보수적인 색채 등이 <한겨레>에 적합하지 않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조선일보>의 동인문학상을 그가 받은 것도 작은 이유 가운데 하나이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는 <한겨레>가 똑 같은 생각만을 가진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라는 반론에 부딪혀 그리 강렬하진 않았고, 무엇보다 그가 데스크가 아닌 현장기자를 원했다는 점에서 이를 <한겨레> 뿐 아니라 한국언론의 한 실험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한겨레> 내부에서 더 강했습니다.
김훈의 이력을 중심으로 이야기했는데, 김훈이란 사람은 사물에 대한 깊은 성찰이 돋보이긴 하나 그 내면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 김훈을 잠시나마 겪은 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삶을 관조하는 듯한 그가 작은 일(우리가 생각하기에)에도 화를 참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김훈의 더 자세한 가족사와 자녀관계 등은 개인 프라이버시라 생각돼 이쯤에서 더이상의 언급은 피하도록 하겠습니다.
2. 김훈의 <한겨레> 생활
김훈은 입사 이후 그의 바람대로 데스크가 아닌, 사회부 기동취재팀에 배치됐고, 출입처는 종로경찰서였습니다. 종로경찰서에는 기존의 1진 기자가 있었으니, 김훈은 형식상으로는 종로 2진이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50대 중반의 경찰기자가 30대 중반의 캡에게 전화로 보고를 합니다.(김훈은 컴퓨터를 다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른 기자들처럼 컴퓨터로 보고를 하는 게 아니라 전화로 보고했습니다. 그는 입사 이후 처음 몇 차례 자판연습을 한 적도 있긴 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나이든 제게 컴퓨터를 배우라고 하는 건 인권침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그래서 김 선배가 원고지에 기사를 쓰면 이를 종로1진 기자가 컴퓨터로 쳐 보내거나, 아니면 김 선배가 직접 팩스로 보내왔습니다. 물론 김 선배는 이메일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회사에서 부여한 이메일로 김 선배에게 아무리 메일을 보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김 선배는 보지도 않으니까요. 그러다가 몇 달 뒤 종로1진 기자가 김 선배의 이메일을 대신 열어준 적이 있는데 그때 저희 회사 메일서버가 잠시 다운됐습니다. 그 이후로 순전히 메일서버 관리를 위해 종로 1진 기자는 수시로 김 선배의 메일을 대신 열어줬지만, 김 선배는 그렇게 보내오는 메일은 잘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김 선배에게 뜻을 전하려면 편지로 해야 합니다. 제가 기동팀원들 또는 김 선배에게 보내는 메일도 이 종로1진 기자가 대신 열고 프린트로 뽑아 김 선배에게 건네주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김 선배가 회사에 들어온 것은 2002년 2월초였고, 제가 사회부 기동팀장으로 발령받은 것은 그해 3월 12일이었습니다. 처음 인사발령을 받았을 때 저는 솔직히 김 선배가 무척 부담스러웠습니다. 저를 제외한 기동팀 1진 8명 가운데 나머지 기자들은 대부분 1-5년차인 후배들이었고, 그 아래로 수습기자 9명이 오글오글하게 배치돼 있는데 김 선배를 제가 어떻게 대해야할 지 난감했기 때문입니다. 김 선배를 난감해한 것은 저뿐 아니라 종로경찰서를 출입하는 타사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뻘의 기자가 오니 기자실에서 마음 편히 드러누울 수도 없고, 행동 하나하나도 조심스러웠다고 하니까요. 그러나 김 선배가 원래 무뚝뚝한 편이라 다른 기자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기자실에도 오래 머물지 않다보니 나중에는 있는 듯 없는 듯 했다고 하더군요. 어느 신문의 한 기자는 김 선배를 처음 보고 사인을 부탁했다가 거절당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옵니다.
김 선배는 아침에 전화를 걸어 "캡이세요? 김훈입니다. 지금 종로경찰서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이러저러한 일이 있는데, 이를 기사로 써보겠습니다. 몇 매를 보내면 될까요?"라고 차분하게 그 나름의 보고를 합니다. 김 선배를 가끔 필요한 현장으로 보내 기사를 보낼 것을 '지시'하기도 하는데, 이때 김 선배에게 전화를 걸면 늘 격앙되고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마치 수습기자가 캡의 전화를 받듯 "네, 접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너무 깎듯이 전화응대해 제가 민망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김 선배는 저와 대여섯살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다른 경찰팀 후배기자들은 마치 아들, 딸 대하듯 편하게 대하면서도 캡인 저에게만은 깎듯하게 존대말을 쓰고, 의도적으로(제가 보기에는) 어려워했습니다. <한국일보>에 있을 때 김 선배의 후배였던 기자가 <한겨레>에서 부장을 맡고 있기도 한데 말입니다. 처음에는 이런 처사가 조금 서운하기도 했지만, 조직과 계통을 중히 여기려는 김 선배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됐습니다.
김 선배는 아침에 종로경찰서에 나가 아침보고를 마치고 나면 취재를 나가거나 종로서 앞 참여연대 느티나무 카페 또는 인근 커피숍에서 원고지에 기사를 씁니다. 연필로.(김 선배는 필통을 가지고 다니는데, 직접 칼로 연필을 깎아서 섰습니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왼손으로는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움켜쥐듯 머리를 받칩니다. 왼손 둘째와 셋째 손가락 사이에 끼인 담배에서 담배연기가 피어오르고, 오른 손으로 기사를 씁니다. 끈 달린 뿔테 안경을 쓰고서. 이 모습을 매일 바라보는 중년의 커피숍 아주머니가 그 모습에 반했다던가 어쨌던가 하는 이야기도 전해오긴 합니다. 김 선배는 또 마감시간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거리의 컬럼은 오전에 보내는게 일반적이었고, 어떤 기사도 오후 3시를 넘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조간신문의 1판 마감시간은 오후 4시-4시30분입니다. 김 선배는 식사자리에서 저희들에게 <시사저널> 편집장 시절, 마감시간을 넘긴 기사는 아예 읽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넣어버리고 그 지면은 광고로 메꿨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모든 기사를 일필휘지로 쓴 건 아닙니다. 그는 사석에서 "오후에 갑자기 취재지시를 받을 때는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린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큰 산처럼 밀려온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한겨레> 기동팀은 매주 월, 목요일 회사에서 회의를 합니다. 김 선배는 이때 회사에 들어옵니다. 봄, 가을에 김 선배는 노란색 파카에 실로 짠 연푸른색 스웨터, 오래된 청바지를 즐겨 입었습니다. 늘 바깥에 머무는 현장기자에게는 별도의 책상이 없습니다. 회의를 앞둔 10-20분의 시간동안 김 선배는 책 등을 쌓아두는 사회부 공용책상 맨끝 귀퉁이에 앉아 원고지에 기획아이디어를 써 제게 제출합니다. 나이든 분에게 제대로 된 자리 하나 마련해 드리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려 회의가 있는 월, 목요일이면 김 선배의 고정석인 그 자리를 미리 치워두기도 했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팀원들은 함께 회식을 하는데 김 선배는 두 번에 한번꼴 정도로만 참석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김 선배에게 세대차를 느끼긴 힘들었습니다. 김 선배가 유행어를 읊거나 신세대 노래를 하는 등과는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지만 기본 바탕이 닳고 닳은 '어른'이기보다는 세상살이를 잘 모르는 '아이'의 마음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면, 김 선배도 자신의 학창시절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주곤 했는데, 보성고등학교 시절 반 친구들에게 자장면을 사주기 위해 학교 공사판에 뒹굴고 있는 철근을 책가방 여러 개를 잇대어 몰래 숨겨 빼돌려 팔아먹었다가 담임선생에게 들켜 몽둥이로 100대를 맞았던 일 등을 전해주며 우리들을 박장대소 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김 선배가 싫어하는 말이 '나이 들었다' 또는 '할아버지' 등의 말입니다. 6월 월드컵 거리응원 당시, 김 선배는 폴리스 라인 바깥에서 취재를 하다가 김 선배를 몰라본 전경들에게 "할아버지, 이런 곳에 계시면 위험해요"라는 말을 듣고 꽤 오랫동안 "괘씸한 놈들"이라고 분개해 했던 적이 있습니다. 또 지난해 3월 부산 중국민항기 추락사고 당시에도 현장취재차 부산에 내려가 병원에서 유족들을 취재하고 있는데, 당시 대통령 후보 당내경선 중이던 노무현 후보가 위로차 왔다가 유족들과 함께 있는 김 선배의 손을 잡고 "얼마나 심려가 크십니까?"라고 해 김 선배가 황당해 했던 적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칼의 노래>를 읽은 것은 아마 그 이후였던 것 같습니다.
3. 김훈의 기사
서울 종로구 인사동 술집골목에는 밤마다 지식인, 예술가, 언론인들이 몰려들어 언어의 해방구를 이룬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논하며 비분강개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술버릇이다. 그 술집골목 한복판에 '라파엘의 집'이라는 시설이 있었다. 참혹한 운명을 타고난 어린이 20여명이 거기에 수용되어 있었다. 시각.지체.정신의 장애를 한몸으로 모두 감당해야 하는 중복장애 어린이들이다. 술취한 지식인들은 이 '라파엘의 집' 골목을 비틀거리며 지나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전 한닢을 기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파엘의 집'은 전세금을 못 이겨 2년 전에 종로구 평동 뒷골목으로 이사갔다.
'라파엘의 집' 한달 운영비는 1200만원이다. 착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1천원이나 3천원씩 꼬박꼬박 기부금을 내서 이 시설을 16년째 운영해오고 있다. 후원자는 800여명이다. '농부'라는 이름의 2천원도 있다. 바닷가에서 보낸 젓갈도 있고 산골에서 보낸 사골뼈도 있다. 중복장애 어린이들은 교육이나 재활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안아주면 온 얼굴의 표정을 무너뜨리며 웃는다. 인사동 '라파엘의 집'은 술과 밥을 파는 식당으로 바뀌었다. 밤마다 이 식당에는 인사동 지식인들이 몰려든다. hoonk@hani.co.kr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는다. 외국 대사관 담밑에서, 시위군중과 대치하고 있는 광장에서, 전경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다. 닭장차 옆에 비닐로 포장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먹는다. 된장국과 깍두기와 졸인 생선 한 토막이 담긴 식판을 끼고 두 줄로 앉아서 밥을 먹는다. 다 먹으면 신병들이 식판을 챙겨서 차에 싣고 잔반통을 치운다.
시위 군중들도 점심을 먹는다.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준비해 온 도시락이나 배달시킨 자장면을 먹는다. 전경들이 가방을 들고 온 배달원의 길을 열어준다. 밥을 먹고 있는 군중들의 둘레를 밥을 다 먹은 전경들과 밥을 아직 못 먹은 전경들이 교대로 둘러싼다. 시위대와 전경이 대치한 거리의 식당에서 기자도 짬뽕으로 점심을 먹는다. 다 먹고 나면 시위군중과 전경과 기자는 또 제가끔 일을 시작한다. 밥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밥만이 각자의 고픈 배를 채워줄 수가 있다. 밥은 개별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시위현장의 점심시간은 문득 고요하고 평화롭다.
황사바람 부는 거리에서 시위군중의 밥과 전경의 밥과 기자의 밥은 다르지 않았다. 그 거리에서, 밥의 개별성과 밥의 보편성은 같은 것이었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밥이 그러할 것이다. hoonk@hani.co.kr
김훈이 쓴 '거리의 컬럼' 중 두 편을 골라 봤습니다. 김훈은 사회부 취재기자로서는 특이한 형태인 '거리의 컬럼'이란 자기 영역을 갖고 있었습니다. '거리의 컬럼'은 사회면에 원고지 3매 분량으로 쓰는 짧디 짧은 컬럼입니다. 김 선배는 거리의 컬럼 외에도 르포, 일반 스트레이트 기사 등을 쓰기도 했지만 <한겨레> 사회면에서 김훈은 '거리의 컬럼'으로 기억됩니다. 김훈은 3월부터 11월까지 모두 31편의 '거리의 컬럼'을 썼습니다. 윗 글(기사)에서 보아 알 수 있듯 김훈의 '거리의 컬럼'의 특징은 현장성, 간결성, 함축성, 그리고 간접성 등입니다. 저는 많은 기자들이 이중 많은 부분을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라파엘의 집'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 김훈은 기사에서 호소하거나 촉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옮겨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관조적 전달은 백마디 호소보다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곤 합니다. 김 선배의 기사는 또 하나, 무엇보다 팩트(fact)가 튼실합니다. 그저 책상머리에서 긁적인게 아니라 생동감이 있습니다. 현장에서 쓴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김훈 선배는 '거리의 컬럼' 보다 르포 기사에서 그 진가를 더 발휘하곤 했는데 그 르포 기사에는 밥상머리의 반찬 하나하나까지 빼곡히 적어놓은 적도 있습니다. 아래 기사를 한 번 보십시오.
탑골공원에서 노인들이 사라졌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은 지난 반세기 동안 노인들의 놀이터, 사교장, 그리고 시국성토장이었다. 탑골공원은 지난 3월 관람시간을 한 시간 이내로 제한했고 음식물을 들여오거나 돗자리·신문지를 깔지 못하도록 했다. 나무벤치도 모두 돌벤치로 바꿨다. 돌벤치는 여름에도 엉덩이가 시려 노인들은 앉을 수가 없다. 탑골공원에서 내몰린 노인들은 걸어서 15분 거리인 노인복지센터(올해 4월 개관)와 종묘광장으로 옮겨갔다. 복지센터에는 하루 3000-3500명, 종묘광장에는 2000-3000명의 노인이 모인다. 복지센터에는 탁구·당구·노래방 시설이 있고, 오래 기다리면 이발이나 목욕도 무료로 할 수 있다. 점심시간이면 이 일대에서 3000여명의 노인들이 무료급식을 기다린다. 이가 성치 않은 이들을 위해 메뉴는 호박나물, 숙주나물, 무국, 두부조림 같은 것들이다. 비가 오면 지하주차장이나 처마 밑에서 밥을 먹는다.
노인들은 80% 이상이 할아버지들이다. 가끔씩 '우리 영감'을 찾아나선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 틈을 헤집고 다니며 인상착의를 설명한다. 노인들이 종묘광장과 복지센터 사이를 왕래하면서 낙원동, 종로2가 등 이 주변에 노인용품을 파는 노점상들도 들어섰다. 노점상들도 노인이다. 중고 회중시계, 구두, 지갑을 비롯해 돋보기, 효자손, 관절염약, 트로트 음반, 모시 속옷, 부채, 밀짚모자 등 파는 물건도 대개는 오래된 것들이다. 찢어진 우산을 꿰매거나, 닳은 구두 뒤축에 징을 박거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노점상들도 있고, 장기판을 빌려주는 노점상도 있다. 그러나 노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오후 6시 이후 이 거리는 다시 젊은이의 거리로 돌변한다. 광장도 데이트하는 젊은이들 차지가 되고 노점상들도 떡볶이, 액세서리, 핸드폰 가입권유로 항목이 바뀐다.
노인들이 어디서 자는지, 아침밥과 저녁밥은 어디서 먹는지 알 수 없다. 아침이면 또 이 거리에 노인들은 몰려온다. 김훈 기자 hoonk@hani.co.kr
김훈의 기사 중 또 하나는 간결성입니다. 그 간결성은 전체적인 내용의 압축이기도 하고, 또 문장의 간결성이기도 합니다. 그의 문장 하나는 대개 1~3형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또 문장의 물리적 길이 또한 짤막짤막합니다. 저는 김 선배의 이런 문장형태를 그의 선친 김광주의 무협지에서 발견할 수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문장과 기사는 압축될 때, 그 폭발력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김 선배에게 제가 이런 제안을 한 적도 있습니다. "김 선배, 굳이 3매에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더 말하시고 싶으시면 5~6매, 아니 10매도 좋으니 거리의 컬럼을 얼마든지 더 길게 쓰셔도 괜찮습니다"라고. 그러나 김 선배는 "아니, 저는 3매가 좋습니다"라고 대답했고, 그가 <한겨레>를 떠날 때까지 거리의 컬럼이 3매를 넘어선 적은 없었습니다.
김훈 선배는 그러나 스트레이트 기사에는 약했습니다. 아니 약하다기 보다 지금 쓰는 기사형태와 맞지 않다고 하는 편이 올바른 표현이겠군요. 그래서 김 선배의 스트레이트 기사를 받을 때는 난감했습니다. 마치 옛날 신문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죠. 김 선배의 스트레이트 기사는 제가 요즘 형식으로 완전히 바꿔 데스킹했습니다. 그리고 기사를 손질한 뒤 요즘 쓰지 않는 표현이나 한겨레 표기방식 등을 김 선배에게 알려줬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제가 이렇게 "이런 표현은 스트레이트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한겨레에서는 이렇게 쓰지 않는다"는 식으로 전화를 하면 김 선배는 이를 연필로 받아적었다가 다시 꺼내 읽어보고 이를 다음 기사 쓸 때에는 바로잡았다고 합니다. 이를 나중에 전해들었을 때 죄송스럽기도 하고, 또 작은 곳 하나에도 치열함을 잃지 않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김훈은 <한겨레>에 입사하자마자, 철도청 노조원들의 열악한 노동상황을 기사로 쓴 '철도청 달력엔 빨간 날이 없다'는 기사로 첫 테이프를 끊은 뒤, 이후 부산 중국민항기 추락 현장(3월), 월드컵 거리응원 현장(6월), 허일병 의문사 사건(8-10월), 부산아시아경기대회(9월), 미선이 효순이 사망사건(11월), 세습사회(12월), 대선현장(12월) 등을 취재했습니다. 김 선배가 쓴 기사량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김 선배가 <한겨레>에 있을 동안 가장 몰두했던 기사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허원근 일병 의문사 사건이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너무 길어 생략하겠지만, 이 사건은 당시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시각이 전혀 달라 팽팽하게 맞섰던 것이기도 합니다. 김 선배는 이 사건에 대한 몰두가 아주 깊었습니다. 몇 차례나 지방출장을 갔고, 관련자들을 만나 증언할 것을 직접 설득하기도 했습니다. 김 선배는 자신의 기사에 대해 가타부타 말한 적이 없는데, 딱 한 번 허 일병 사건과 관련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허 일병 기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해 기사량을 줄이려고 하자, 김 선배가 전화를 걸어와 "제가 이런 전화 처음 하는데요. 이 기사는 꼭 내보내 주셨으면 합니다"라고. 김 선배는 꿈에서 허 일병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허 일병이 나타나 "진상을 꼭 밝혀달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김 선배를 이야기할 때, 피해갈 수 없는 것이 80년대 신군부 정권 등장 당시의 용비어천가입니다. 김 선배는 이 이야기를 잘 하진 않았습니다. 이는 김 선배에게는 큰 상처이기도 합니다. 당시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용비어천가를 쓸 것을 신문사쪽에 강요합니다. 어느 누구도 이를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부담은 밀려밀려와 당시 7년차 기자였던, 글 잘쓴다고 소문난 김훈에게까지 떠넘겨졌습니다. 그리고 김훈은 이를 그대로 받아 나중에 그의 이력에 큰 오욕으로 남게될 지도 모를 용비어천가를 기꺼이 썼습니다. 나중에 김훈은 이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누군가는 써야한다. 그런데 아무도 쓰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쓰고 말겠다"라고.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저는 변명으로 듣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김훈이 세속적인 출세나 야망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기에 저는 김훈의 그 말을 믿습니다.
김 선배는 회사를 떠나면서 의문사규명위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의문사규명위 사무실에 가는 게 너무 싫었다. 왜냐하면 장준하 등 70년대 의문사를 당한 사람들의 당시 사건기사를 내가 썼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이들의 의문사에 대해 제대로 규명조차 않은 채 쓴 것이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중앙정보부 직원, 경찰 등이 조사를 받고 피의자 신분이 되었는데, 그 피의자 중에는 나도 포함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지금 그때처럼 역시 그들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의문사규명위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캡은 자꾸 나를 보고 의문사규명위에 가라고 한다. 그러니 꾸역꾸역 갈 수 밖에"라고.
빨리 기동취재팀 일을 매듭짓고 싶었는데 글이 너무 길어져 변죽만 울리고 본론에 들어가진 못한 채 다음 편으로 넘겨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왜 김훈이 한겨레를 떠났는가'라는, 비록 이제는 묵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주제에 곧바로 들어가지 않고 김훈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언급한 것은 김훈이라는 개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지 않고선 그가 한겨레를 떠난 이유를 설명해도 오해하기 십상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김훈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지니고 있기에 그의 행동에 대해 보통 사람의 잣대로 평가할 경우, 우리는 그를 오해할 수 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다음 편에서는 '김훈과 도올 김용옥', '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 '김훈과 <칼의 노래>', '김훈의 요즘' 등을 이야기하고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혹 모릅니다. 이 글을 본 김 선배가 역정을 내시고 자신의 이야기를 더 이상 쓰지 말라고 하신다면 2편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첫댓글 티비랑 냉담한지 오래지만, 어쩌다 우연히 사과나무 김훈편을 보게되었지. 나도 김훈의 눈빛에 매료되었다우. 특히 그의 작업실 한켠에 걸려있던 "살아가되 집착하지 않는다"라는 문구. 이거 우리가 찾는 그것 한마디로 표현한거잖아. 그자우 민영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