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한·일병탄 조약 체결 직후 서울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조선총독부 관리와 이완용 등 매국 조약 추진 주모자가 고종과 순종을 앞세워 기념 촬영을 했다.
광복 63주년이 지나도록 우리 사회에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는 속설이 상식처럼 굳어져 있다. 과연 현실은 어떨까. <시사IN>은 이 속설이 믿을 만한지 알아보기 위해 그 실상을 직접 들여다보기로 했다. 조사 범위는 매국 조약 체결 등에 가담해 그 대가로 귀족 작위와 은사금, 은사 토지를 하사받은 매국형 친일파 10여 명과 그 후손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또 일제 식민지 통치기구의 국회 격이라 할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참의를 지낸 상당수 친일파 후손도 살펴보았다. 대표적 친일파 명단을 놓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족보를 추적해 확인 가능한 후손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독립운동가의 경우는 임시정부 요인과 기미독립선언에 참가한 33인 대표, 그리고 안중근 의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 등 민족의 선각자들 후손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20~25쪽 딸린 기사 참조).
결론부터 말하면 3대 이상 흥한 ‘대표 친일파’ 후손은 ‘대표 독립운동가’ 후손보다 훨씬 많았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흥한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잖은 친일파 후손이 사회 각계에 포진해 대를 이어 기득권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선 매국 조약 체결 등으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친일파부터 살펴보자. 구한말 군부대신으로 을사늑약을 조인하고, 1910년 한·일 병탄 조약 체결에도 간여한 을사오적 이근택의 집안은 대표 친일파 가계로 통한다. 그의 형 근호와 동생 근상이 함께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는데 습작자까지 합치면 조선 귀족을 6명 배출한 집안이다. 이 때문에 일제 식민지 지배 당시에도 독립지사들은 이근택 5형제를 ‘5귀’라 부르며 지탄했다.
1910년 한·일병탄 뒤 일본 정부에서 훈1등 자작을 수여받은 이근택은 작위를 아들 창훈에게 습작했다. 창훈의 두 손자는 광복 후 교육 분야에 진출해 활약해왔다. 1998년 세상을 뜬 맏아들 이상우씨는 공주대 총장을 역임했고, 동생은 현재 공주대 물리학과 명예교수이다. 이근택의 형 이근호도 1910년 한·일병탄 조약 체결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아 매국형 친일파로 분류된다. 그의 후손은 2005년까지 선대의 친일 재산을 되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9건 낸 적도 있다.
교육계에 뿌리 내린 ‘자작 민영휘’ 후손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작위를 받은 친일파 중 교육 분야에 뿌리를 내린 또 다른 집안으로는 ‘자작 민영휘’ 후손을 꼽을 수 있다. 구한말 조선왕족이던 민영휘는 한·일병탄 직전 일제의 조선 병합을 지지하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친일 매국 단체 간부로 이름을 올리고 활동했다. 그 공로로 병합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매국공채 5만원을 받았다. 초기에 관직을 이용해 모은 재물을 불려 일제 강점기 조선 최대 갑부 반열에 올라섰다.귀족 출신으로는 드물게 대자본가로 변신한 민영휘는 일제하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분류된다.
ⓒ시사IN 백승기
친일 매국단체 간부로 한·일병탄을 지지해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민영휘가 세운 휘문의숙(휘문고) 교정에 세워진 민영휘 동상.
민영휘의 후손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자리한 휘문고교를 상속받았다. 민영휘의 증손 민덕기씨는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풍문여고를 세웠다. 학교법인 휘문의숙은 민영휘의 증손자인 민인기씨가, 풍문학원은 고손자인 민경현씨가 각각 이사장을 맡았다. 현재 휘문고 교정에는 민영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른 후손의 사회 진출도 화려한 편이다. 막내 아들의 장남인 민병도씨는 제일은행장과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민병도씨의 장남 민웅기씨는 텔레비전 드라마 <겨울연가> 촬영지로 유명한 강원도 춘천의 남이섬 유원지를 소유하고 있고, 둘째 아들도 기업체를 경영한다.
민영휘의 후손은 광복 뒤 이승만 정부에서 휘문의숙을 세운 공로로 표창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민영휘를 친일파로 분류하는 데 불만이다. 그러나 일제 때 조선총독부도 교육 관련 표창장을 줬다는 점에서 그의 교육사업 진출이 친일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1907년 대한제국 군부대신을 지내다가 한·일신협약 체결로 군대 해산에 앞장선 이병무는 ‘정미칠적’으로 분류된다. 해산된 군대가 의병을 일으키자 강경 진압했던 이병무는 한·일병탄 때는 시종무관장으로서 병탄 조약 체결에 협조해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병무의 자작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은 이는 입양 아들 이홍묵이다. 이병무의 증손자 이진씨는 5공화국 때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노태우 정부 초기 국무총리 비서실장과 환경처 차관을 역임한 그는 현재 웅진그룹 환경경영담당 부회장이다. 그는 대학과 기업을 오가며 경제와 환경의 통합을 강조하는 ‘친환경 경영체제’ 주창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경술국적’ 민병석 아들, 대법원장 지내
한·일병탄 조약 체결에 가담해 ‘경술국적’으로 불리는 민병석은 이완용과 처내종 간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을사늑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와 깊은 교분 관계를 맺었던 민병석은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가 쓰러지자 장례 조문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한·일병탄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다섯 차례에 걸쳐 역임한 대표 친일파였다. 큰아들 홍기씨는 민병석의 자작 작위를 세습했고, 둘째 아들 복기씨는 일제 때 경성제대 법과를 나와 식민지 사법부에 진출했다. 민복기씨는 집안의 친일 행적과 상관없이 정부수립 후 제 5·6대 대법원장을 맡는 등 법조계의 거물로 활약하다가 지난해 작고했다.
민병석의 세 아들 중 일본 히도쓰바시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장남 민경성씨는 일본계 기업체 사장이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아버지의 뒤를 이은 둘째 민경택씨는 서울지법 판사, 서울지검 검사 등을 거쳐 변호사로 일하다 작고했다. 서울대와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을 나온 셋째 민경삼씨는 기업인이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전권대신으로 조인을 총괄했던 박제순은 1910년 내부대신을 맡아 한·일병탄 조약 체결에도 앞장섰다. 그 공로로 훈1등 자작 작위를 수여받고 중추원 고문이 됐다. 박제순의 아들 박부양은 중추원 서기관이 되었고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과 나란히 조선 귀족 모임인 동요회 이사를 지내면서 일제 강점기 내내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의 아들 박승유씨는 서울대 음대와 미국 남가주 대학 음대를 졸업한 뒤 성악가로서 강원대 음대 교수를 역임했다.
조선 왕족의 종친 가운데도 구한말 귀족 작위를 받고 식민지 지배에 적극 협력한 사람이 있다. 이해승이 그런 경우다. 이해승은 한·일병탄 후 21세에 후작 작위와 매국공채 16만2000원을 받았다. 종친 가운데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낸 이기용과 함께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는 등 적극 친일에 나선 이해승은 광복 후 반민특위에 끌려갔지만 이승만 정부가 반민특위를 해체하면서 풀려났다. 그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씨는 현재 서울 홍은동에 있는 그랜드 힐튼 서울호텔 회장 겸 동원 INC 회장이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지난해 이해승이 친일 대가로 경기도 포천에 조성한 토지 약 200만㎡(시가 300억원대)를 국가 귀속하기로 결정했다.
매국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파 후손 가운데는 멸문한 집안도 있다. 대한제국 법무형사국장으로서 명성황후 폐비 조처를 주도해 시해 사건을 돕고 10년간 일본으로 망명한 조중응이 그런 경우다. 일본에서 돌아와 이완용 내각 농상공부대신으로 한·일병탄에 앞장선 조중응은 그 공로로 자작 작위와 은사금 10만원을 받았다. 이후 중추원 고문을 맡아 친일에 앞장선 조중응은 정실부인을 서울에 두고도 일본 여성과 도쿄에서 따로 결혼해 슬하에 자녀를 뒀다. 자식이 없던 서울의 정실부인은 양자를 입적했지만 대가 끊겼고, 대신 일본 부인과 자녀가 조중응 사후 작위와 재산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러면 매국형 친일파 중 당대에 쌍벽을 이루며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 이완용과 송병준의 후손은 어떻게 지낼까.
구한말 내각총리대신으로 한·일병탄에 앞장선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은 병탄 후 중추원 고문으로 백작 작위와 은사금 15만원을 받았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일선 동화의 결실을 손상하는 경거망동과 황당무계한 유언 선동을 중지하라”고 만세운동 비난 담화를 발표해 그 공로로 1920년 후작으로 승작했다. 1926년 이완용이 사망한 후 귀족 작위와 재산은 손자 병길이 습작했다.
이병길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이완용의 직계 종손인 이윤형씨가 상속권자다. 일제 때 일본인 고위 관료 자녀의 교육기관이던 경성제1사범대 부속학교를 거쳐 동성고교와 홍익대를 나온 그는 광복 뒤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1960년대 말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발탁으로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지냈다. 그 뒤 17년간 캐나다에서 살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국내에 들어와 이완용 땅찾기 소송에 뛰어들어 한때 승소 판결로 수십억원을 챙기기도 했다.
한편 이완용의 셋째 손자(이병길의 동생)인 이병주씨는 1962년 9월21일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가 일본 정부에 생활 보장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그를 귀화시키고 환대했다. 일본에 귀화한 이병주의 아들 이석형씨는 1979년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뒷산에 있던 이완용 부부의 묘를 파내 화장해버렸다. 이완용의 관 뚜껑에는 일왕이 부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위대훈위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阮 副議長 二位大勳位 牛峯李公之柩)’라 쓰여 있었다. 작업하던 인부가 이 관 뚜껑을 인근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전달해 한동안 역사 자료로 소장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있던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이 소식을 듣고 내려와 원광대 총장을 설득해 가져다 태워버린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친일 사학자라고 비판받던 고 이병도 박사는 이완용과 우봉 이씨 집안 친척이다. 고 이병도씨의 두 아들이 현재 서울대학교 이장무 총장과 이건무 문화재청장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씨의 오랜 땅찾기 작업은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와 국가 귀속 조처로 현재는 주춤한 상태다. 송병준 후손, 집요하게 ‘땅 찾기’ 나서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던 매국노 송병준은 구한말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한·일병탄 때는 친일 매국단체 일진회 총재 자격으로 병탄에 앞장선 인물이다.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왕실재산조사위원장을 맡아 전국 각지의 토지대장 수천만 평에 자기 이름 석 자를 세겨넣은 송병준은 1925년 뇌일혈로 숨졌는데, 재산과 작위는 아들 송종헌이 물려받았다. 송종헌 역시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전국적 세도가로 행세했다.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친일파 이해승의 후손이 운영하는 그랜드 힐튼 서울 호텔.
그의 아들 송재구는 일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뒤 1930년 홋카이도에서 ‘조선목장’ 약 2640만㎡를 경영했다. 광복 후 송종헌은 용인군 내사면 추계리 99칸짜리 저택과 전답을 긴급 처분한 뒤 서울로 피신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9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송재구의 아들이 바로 송돈호씨로 서울 역삼동에서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인천·경기·강원 등지에 걸쳐 있는 송병준 명의 토지 상속소송을 주도하며 각종 사기 사건을 일으키다가 2007년 4월 구속됐다. 올해 초 보석으로 나온 송돈호씨는 최근 헌법재판소에 친일재산 특별법 위헌소송을 냈다가 기각당하는 등 여전히 송병준 땅 찾기에 집요하다.
친일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은사금, 은사 토지를 받은 매국형 친일파 후손보다 광복 후 사회·경제적으로 더 강고한 기득권을 구축한 친일파 후손이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던 그룹이 그들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중추원 참의는 1910년 한·일병탄 직후부터 임명되기 시작해 광복 때까지 70여 명이 거쳐갔다. 1910년 10월 초대 참의 임명자는 종신직이었지만 1921년부터는 3년 임기로 일제 식민지배 공헌도에 따라 돌아가며 역임했다. 오랜 친일 행적이 쌓여 공로를 인정받아야 참의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친일파로 분류된다.
호남 지방의 대지주였던 김연수는 일제 때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경성방직을 경영했다. 친일 기업인으로 활동한 그는 1935년 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경성방직 사장 직함과 함께 수록돼 있다. 1940년 중추원 참의를 맡은 김연수는 태평양 전쟁 때 거액의 국방헌금을 기부하면서 군수산업에 뛰어들었다. 이 기간 중 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국민의용대 등 친일 단체 간부로서 각지를 돌며 학병 지원 연설을 많이 벌였다.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특위가 해체되면서 풀려난 김연수는 1961년 전경련의 전신인 전국경제협의회장을 맡는 등 재계 원로로 행세했다.
김연수는 7남6녀를 두었는데 장남 고 김상준은 삼양염업 명예회장, 차남 고 김상협은 16대 국무총리를 지내고 작고했다. 3남 김상홍은 현 삼양사 명예회장, 5남 김상하는 삼양사 회장을 맡고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같은 신체시로 이름을 알린 육당 최남선도 중추원 참의 출신이다. 3·1운동 때 문화계 대표로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은 그 후 변절해 일제 식민사관을 유포하던 어용단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고,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최남선 역시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처벌은 면했다. 최남선의 장남 최한웅 교수는 서울대 의대 소아감염학 권위자로 이름을 날렸다. 최남선의 맏손자는 피부과 전문의이고, 또다른 손자는 경기대 경영학부 교수로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사업가로 명성을 떨친 문명기도 참의 출신 친일파로 분류된다. 제지업과 수산업, 금광 개발에 뛰어들어 부를 쌓은 그는 태평양 전쟁 때 국방헌금을 냈다. 아울러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조직해 비행기 헌납운동을 벌이며 가미카제 특공대를 옹호하는 친일 활동을 폈다. 또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 함대를 물리치기 위한 일제 해군 ‘헌함운동’도 벌이며 앞장서 자기의 광산을 일제에 기부했다. 이런 공로로 1941년 중추원 참의가 됐다. 그의 맏손자인 문태준은 서울대 의대와 미국 토머스제퍼슨 대학원을 수료한 뒤 7대부터 10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현재 남평 문씨 대종회장이다. ‘친일 내력’ 노출되는 정치권 진입 적어
정치인 가운데도 일제 시대 중추원 참의를 선조로 둔 이가 있다. 강릉 갑부로서 1936년 중추원 주임참의에 임명된 후 1941년 연임한 최준집의 아들 최돈웅 전 의원이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자기 회갑연을 취소하고 국방헌금으로 1000원을 납부한 사실이 매일신보에 보도될 정도로 일제에 충성했다. 그의 아들 최돈웅씨는 8·14·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2년 대선 때는 이회창 후보의 대기업 상대 불법 선거자금을 거둔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특사로 풀려났다. 재계의 거물 중 선대가 중추원 참의인 경우도 있다. 호남의 대표 친일 부호로서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된 현준호의 후손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1920년 호남은행을 설립해 대표를 지낸 현준호는 한때 민립대학 설립 등 민족교육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되고부터 지역 간척사업 이권을 따내는 등 일제와 밀착 행보를 보이며 민족운동과 결별했다. 현준호 역시 1935년 총독부 편찬 공로자 명단에도 올랐다.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가 조직한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나서 전쟁 지원을 역설했던 그는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징병제 홍보와 학병 지원 권유 등에 적극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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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재산조사위가 발족(위)해 활동 2년째를 맞지만 친일파 후손의 불복으로 난항을 겪는다.
현준호는 한국전쟁 시기에 북한군에 피살됐다. 현준호의 후손은 대개 재계로 진출했다. 현우실업 대표인 현양래는 현준호의 손자이다. 현주호의 아들 고 현영원씨는 현대상선 회장을 지냈다. 현영원씨는 딸 넷을 두었는데 둘째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현 회장은 1955년생으로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1976년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과 결혼해 현대가와 혼맥으로 연결됐다.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은 현정은 회장의 어머니인 김문희씨의 동생이라서 두 사람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이기도 하다. 친일파 후손의 사회 진출에서 특징은 학계·경제계·관료·문화예술 분야에 몸담은 이가 많다는 점이다. 정치 분야 진출도 없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그 수는 적었다. 이는 후손이 선거운동 등에서 자기의 집안 내력이 노출되는 정치권 진출을 꺼렸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이들 대표적인 친일파 후손이 현재 사회·경제적으로 ‘잘나간다’고 해서 무턱대고 조상의 친일 ‘덕분’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 가산을 탕진하고 온갖 고초를 겪었던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에 비해 친일파 후손은 선대가 만들어준 ‘요람’에서 근대적 교육 기회를 충분히 누리거나 유산 상속 등으로 출발부터 남달랐다. 비교적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친일파 후손까지도 경제 형편은 유복한 편이었다. 아직도 조상이 친일 대가로 조성해둔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국가기관을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이는 경우도 많다. 광복 63주년을 맞아 민족정기 확립을 위한 국민의 관심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대의 친일 시비에 휘말린 박근혜 의원, 홍라희 삼성리움미술관장,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이장무 서울대 총장(왼쪽부터).
한국 사회에서 요직을 차지한 이들 가운데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도 많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은 한국 사회 친일 논쟁의 중심에 있다. 9년 전 ‘박정희전대통령기념관’ 설립을 놓고 국가보조 논쟁이 벌어질 때도, 4년 전 열린우리당이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들고 나올 때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불편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올 8월 말에 발간할 <친일인명사전>에도 박정희(창씨명: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전 대통령의 이름이 올라갈 예정이다. 잊을 만하면 부친의 친일 행적은 이렇게 박근혜를 괴롭힌다.
재계 1위 삼성 역시 친일파 후손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삼성리움미술관장의 부친이 일제시대 판사를 지낸 홍진기씨이기 때문이다. 홍진기의 이름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예정이다. 홍진기씨는 광복 이후에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등 국가 요직을 거치고 중앙일보 회장까지 지냈다. 현재 중앙일보 회장은 그의 아들 홍석현씨다. 친일에 관해서는 홍석현·홍라희 남매의 외가 쪽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남매의 외조부 김신석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사주 일가도 친일 시비의 단골 대상이다.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증조부는 계초 방응모. 그는 조선에 일본어 보급률이 낮다며 일어 상용운동을 주장한 인물이며, 친일 잡지인 <조광>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계초 역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여기에는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도 이름을 올렸다. 인촌은 중·일전쟁 이후 부일협력의 길을 걸었는데 그가 <매일신보>에 쓴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는 논설은 유명하다. 암으로 투병하다 지난 2월 타계한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이 인촌의 손자이다.
학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2006년 서울대 총장으로 취임한 이장무 교수(64)가 대표적이다. 그의 조부 이병도는 중추원 산하의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친일 사학자. 한국 고대사 연구의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받는 이병도는 일제의 식민사관 형성에 일조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장무 총장 취임 당시, 선친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동생 이건무씨(62·현 문화재청장)도 덩달아 곤욕을 치른 바 있다.
“독립군 할아버지 저는 배를 곯아요”
독립유공자 유족 6283명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60%를 넘고, 봉급생활자는 10% 남짓이며, 중졸 이하 학력이 55% 이상이다. 이들은 대부분 비참하게 산다. 일부는 친일파 후손에 밀려 외국으로 피했다.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 직전 안중근 의사가 동생 정근·공근에게 유언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 일가 중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40명을 넘는다. 서훈을 받은 사람만도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안 의사를 비롯해 안 의사의 동생 정근·공근, 사촌 명근·경근, 조카 춘생·봉생·원생·낙생 등 11명에 이른다.
독립운동가가 많은 집안인 만큼 일제의 탄압은 혹독했다. 1909년 10월29일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뒤 그의 가족은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갔다. 그러나 일제의 추격은 러시아에까지 미쳤다. 1911년 여름 안 의사의 맏아들 우생(분도)은 여섯 살에 일제의 밀정에게 독살당했다.
광복 뒤에도 친일파에게 탄압받아
독립운동의 최고 명가 안중근 가문은 광복 후 빛을 보지 못했다. 부인 김아려 여사는 광복된 고국을 밟지 못하고 중국 상하이에서 숨을 거뒀다. 광복 뒤 귀국한 안 의사 일가는 대부분 김구 선생과 같은 계열에서 활동하다가 탄압받았다. 안 의사의 사촌 동생 경근씨는 4·19혁명 후 ‘민주구국동지회’를 만들어 정치에 나섰다가 5·16 군사정권에 의해 7년간 투옥됐다. 안 의사의 조카 민생씨는 평화통일 운동에 매진하다 역시 5·16 군사정권에 의해 10년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일제 때 명근씨가 감옥살이를 한 서대문형무소 내의 같은 감방이었다고 한다. 외교안보연구원 본부 대사로 일하던 안 의사의 조카 진생씨는 1980년 전두환 정권 때 강제 해직당한 뒤 충격을 받고 쓰려져 8년간 투병하다 숨졌다. 안 의사의 조카 민생씨는 중국 옌지에 있는 사촌 동생 경옥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 우리는 안중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왜놈에게 죽어야 했는데, 광복 뒤에는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의 피해는 여전하다”라고 한탄했다.
이같은 푸대접과 설움 속에 안 의사 유족은 해외로 뿔뿔이 흩어졌다. 안 의사의 차남 준생씨가 1951년 부산에서 죽자 자식들은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전문의로 일했다. 장녀 선호씨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차녀 연호씨는 시애틀에서 살았다. 한국외대 신운용 박사는 “상하이에서 바이올린을 켜며 생계를 이어가던 준생씨는 일본의 공작으로 장충단공원에 있던 박문사에 이토 히로부미 아들과 참배하기도 했다. 안 의사 가족들은 광복 공간에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안 의사의 딸인 현생씨의 딸 황은주씨는 미국에서 살다가 귀국했고, 은실씨는 미국에 있다. 안 의사의 외손녀 황은주씨는 “광복 후 국내에는 우리 집안이 자리 잡을 곳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안공근 선생의 자손은 고향인 북한으로 갔고, 연생씨 가족은 파나마에 산다. 안 의사의 사촌 형제인 봉근씨 가족은 독일에 산다. 독립운동가들은 광복 뒤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그래서 독립유공자 후손 가운데 외국에 거주하는 이가 많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이자 흥사단을 창립한 민족계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다. 장남 필립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했고, 차남 필선씨는 하워드 휴즈 항공 부사장을 지냈다. 장녀 수산은 미국 해군 역사상 최초로 여성 포격 장교를 역임한 뒤 미국 안전보장국에서 비밀정보 분석가로 활동했다. 차녀 수라와 3남 필영도 미국에 있다. 안창호 선생의 자녀는 대부분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지만 한국과의 왕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차리석 선생의 회갑을 맞아 임시정부 요인이 기념 촬영했다. 앞줄 가운데가 김구 선생, 뒷줄 가운데가 차리석 선생.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던 박희도 목사는 이 일로 2년 동안 복역했다. 하지만 일제 말 잡지 <동양지광> 주간으로 있으면서 훼절해 친일의 길로 들어선다. 박 목사 아들은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의료행정직으로 일하다가 ‘변절자 후손’이라는 오명을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갔 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자부심은 사치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 미생씨는 김구 선생의 장남 인씨와 결혼하면서, 절친했던 두 집안은 혼맥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슬하에 세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세 딸은 어릴 때 모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맏아들 인씨도 광복을 앞둔 1945년 3월 28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둘째 아들 김신씨는 공군참모총장·교통부장관을 지냈다. 신씨는 진·양·휘 3남과 1녀 미를 두었다. 진씨는 참여정부에서 주택공사 사장을 지냈지만 협력업체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양씨는 상하이 총영사를 거쳐 보훈처장으로 일한다. 휘씨는 광고대행사 에에블리 대표로 있다. 미씨는 김호연 빙그레 회장의 부인이다.
김구 선생 집안은 사회적으로 대접받은 유일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볼 수 있다. 후손은 비교적 잘 교육받았고 정부의 배려와 기념사업회의 지원이 뒤따랐다.
그러나 일신과 가문의 안녕을 뒤로하고 항일투쟁의 길로 들어선 대다수 독립운동가는 후손이 뿔뿔이 흩어지고 집안은 몰락했다. 가산은 모두 빼앗겼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가슴속에 품은 자부심만으로 가난의 벽을 넘기는 어려웠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은 교육에까지 여력이 미치지 않았고 가난의 대물림은 3, 4대를 이어갔다. 하지만 어디에도 정부의 손길은 없었다. 어렵게 사는 후손에 대한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는 아예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숨을 거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들 수범씨는 일제 때 은행에서 일했다. 하지만 광복 후에는 직업을 잃었다. 신채호 선생이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수범씨는 자유당 정권에서 신변을 위협받았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고 한다. 수범씨는 넝마주이·부두 노동자 등 떠돌이로 살아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로 하야한 이후에야 은행에 다시 취업할 수 있었다.
ⓒ시사IN 강은나래 인턴기자
효창공원에 있는 차리석 선생 묘비를 어루만지는 차영조씨.
신채호 선생은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신고를 거부하고 1912년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신채호 선생의 대한민국 국적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 아직까지 무국적자 신분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단재 선생 명의의 땅과 집은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씨는 “나라를 되찾은 지 63년이 지났어도 아직까지 아버님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나라와 싸워야 한다.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쳤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이 땅에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치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비서장을 지낸 차리석 선생의 아들 영조씨는 친일파 후손이 떵떵거리는 사이 숨어 지냈다고 한다. 영조씨는 “백범이 암살당하자 임시정부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가족은 숨어야만 했다. 영조씨의 어머니는 아들의 성 ‘차(車)’에서 획을 없애 ‘신(申)’씨로 바꾸어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라고 말했다. 영조씨는 열아홉 살 때까지 신씨로 살았다. 스리랑카 사람이 독립운동가 대 이어
차리석 선생은 1945년 9월9일 환국을 준비하다 과로로 쓰러져 해방된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숨졌다. 광복 뒤 영조씨의 인생은 고달픔과 배고픔으로 점철됐다. 어머니 김씨는 좌판을 벌이고, 생활용품 행상에 나섰다. 하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영조씨는 동냥을 해야만 했다. 영조씨는 “아침마다 한 숟가락씩 문전걸식으로 살았다. 월사금은 한 번도 못 냈고, 도시락도 싸본 적이 없다. 우물물만 실컷 먹고 살았다”라고 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어머니 김씨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영조씨는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영조씨는 ‘아이스케키’ 장사, 여관 심부름, 국밥 배달 등 돈 되는 일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시사IN 백승기
장병준 선생의 장손 하정씨(오른쪽)는 스리랑카 양아들 오산다 씨(왼쪽)의 도움으로 말년을 보낸다.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장관을 역임한 장병준 선생의 4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 구한말 신안군 장산도 일대에 염전과 전답을 가지고 있던 천석꾼의 재산은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다. 독립운동을 한다고 자식 교육은 뒷전이었다. 장병준 선생의 장남 경식씨는 제대로 배우지 못해 그럴싸한 직업도 가져본 적이 없다. 이 악순환의 고리는 손자 하정씨(65)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하정씨는 경기도 용인시 한 시골 마을에서 정부의 도움 없이 쓸쓸한 말년을 보낸다.
홀로 지내는 하정씨를 돌보는 사람은 한국에 일하러 온 스리랑카인 오산다 씨(30). 오산다 씨는 “스리랑카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인지 한국에 와서 독립운동 자손이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하정씨는 2006년 오산다 씨를 호적에 올리고 정식 양자로 입양했다. 오산다 씨의 여권 국적은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서는 오산다 씨에게 주민등록을 내주지 않아 그는 강제 출국될 위기에 처했다. 하정씨는 “할아버지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양아들 오산다가 주민등록을 받아 대를 이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내 생의 마지막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사는 김덕천씨(68)는 조선의열단 선전부장,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내무차장, 국무위원 등을 지낸 운암 김성숙 선생의 손자다. 김성숙 선생은 자유당 시절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는 정치활동을 펼쳐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유품으로 남긴 일기장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오늘 200원을 꾸어 쌀을 사왔다. … 내가 독립운동을 하고 정치를 한다고 돌아다니면서도 가족을 굶기고 살고 있구나.” (1955년 2월23일) “가끔 할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한다”
덕천씨의 아버지 정봉씨는 일제 때 징용을 나갔다가 덕천씨가 세 살 되던 해에 돌아왔는데, 한동안 정신이 이상해져서 경제생활을 거의 하지 못했다. 덕천씨는 턱뼈에서 구강암이 발견돼 보훈병원을 찾았으나 독립유공자가 광복 후에 사망했을 경우에는 2대까지만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조항 때문에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지난 5월 아내를 위암으로 잃었지만 형편이 어려워 변변한 치료 한번 받지 못한 채 보내야 했다. 덕천씨는 “할아버지가 이승만을 추종했더라면 잘 먹고 잘살았을 텐데 하는 원망도 든다”라고 말했다.
ⓒ시사IN 강은나래 인턴기자
김덕천씨가 조부 김성숙 선생과 조모 정씨 부인의 사진을 보이고 있다.
2008년 8월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는 223명, 유족은 6283명이다. 이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무려 60%를 넘고, 고정 수입이 있는 봉급생활자는 10%를 조금 웃돈다. 유족 가운데는 직업이 일정치 않아 수시로 바뀌고, 그나마 봉급생활자 중에도 특히 경비로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 1919년 서울 4대문 사건의 주동자로 옥고를 치렀던 이원근 열사의 손자 이승봉씨는 경비 일을 한다. 조선 총독 암살 계획을 세워 옥고를 치른 방한민 열사의 손자 방병건씨도 최근까지 경비원으로 일했다. 유족 가운데 중병을 앓는 사람이 두 집에 한 집꼴이었고, 중졸 이하 학력이 55%를 넘었다. 가난은 의료와 교육의 공백을 낳고, 다시 가난으로 대물림됐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공식은 철저히 들어맞았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대한민국에서 친일파 후손은 선대의 부와 명예를 고스란히 이어받았고, 독립유공자 자손은 선대의 가난과 피해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는 게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일본에 당했는데 정부에 또 당하니…”
독립유공자 유족 중 1114명이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 살 길이 없는 ‘무대책 유족’이다. 정부는 국경일에만 유공자 이름을 ‘팔아먹은’ 뒤 나 몰라라 한다.
[48호] 2008년 08월 12일 (화) 14:52:28
강은나래 인턴 기자
1919년 3월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거행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낭독 장면. 정춘수 등 4명은 불참했다(기록화, 최대성 作, 독립기념관).
“우리 유족은 진흙 같은 가난 속에 산다.” 1919년 3·1 기미독립선언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천도교 대표로 참여했던 권동진 선생의 증손자 권혁방씨(78)는 유족의 삶을 진흙탕에 비유했다. 그는 “사람이 한번 진흙탕에 넘어지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온 힘을 다해 간신히 밖으로 나오다 곧 다시 쓰러지는 곳이 진흙탕이다”라고 말했다. 독립운동을 하고 3대만 망하면 다행이고, 진흙 같은 가난에서 빠져나오기까지는 100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한탄이었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의 유족에 대해 최대 손자녀(3대)까지만 보상 및 예우를 한다. 1945년 8월14일 이전에 사망한 독립유공자의 경우 손자녀(3대)까지, 그 이후에 사망한 독립유공자의 경우는 자녀(2대)까지만 보상금을 받는다. 이에 따라 민족대표 33인 중 8인의 유족만이 혜택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나머지 유족의 생활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천도교 장로 신분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홍병기의 손자 홍재웅씨(73·인천시 남구)는 최근 사정이 딱하게 되었다. 바느질로 재웅씨를 키운 노모는 치매와 중풍으로 10년간 앓다가 1996년에 사망했다. 닭튀김 장사를 하던 재웅씨는 사업에 실패하고 3년째 당뇨와 심한 치매를 앓고 있다. 딸들의 도움을 받지만, 그래도 아내 김송자씨(69)는 하루 수당 4만5000원을 받는 동사무소 공공근로를 나가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홍병기 장로는 해방 4년 후인 1949년에 사망해 아들(2대)까지만 보상금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 이승훈 선생의 5대 자손 이기대씨(54·서울 마포구)도 전혀 보상금 혜택을 못 받는다. 그는 지하 셋방에 살면서 포장마차를 운영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으나, 보훈처에서는 실태조사조차 나온 일이 없다. 이승훈 선생은 3·1운동 당시 기독교 측 수장이었다. 의료·교육·취업 지원도 못 받아
보상금 지급 대상에서 소외된 대다수 유족은 의료·교육·취업 지원 혜택 역시 받지 못한다. 1919년 당시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1937년 작고한 유여대 목사의 후손 창근씨(29)도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부친 유효창씨가 지난해 5월31일 사망하면서 가족에게 적용되던 의료지원 혜택도 한꺼번에 중단됐기 때문이다. 창근씨는 병환이 깊은 73세 노모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한다.
보훈처로부터 보상금을 받는 8인의 후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33인 민족대표 중 신사참배 거부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다 1937년 사망한 신흥식 선생의 유족으로 손자 덕수씨(78·서울 마포구)가 있다. 선대의 독립운동으로 가세가 기울면서 교육을 못 받고 자란 덕수씨는 젊었을 적부터 막노동판을 전전해 허리가 성할 날이 없었다. 현재는 허리를 거의 못 쓴다. 그의 아내도 지난해 뇌수두증 수술을 한 이후, 현재까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거동조차 불편한 몸으로 서울시 광진구에 있는 지정 병원을 찾아가기 힘들어 가까이에 있는 병원에 다니면서 보상금을 병원비로 쓰는 상황이다. 박기수씨(59·전북 정읍)는 독립운동가 박준승 선생의 손자다. 기수씨는 10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혈압이 있는 높은 윤정자씨(53)는 병석에 있는 남편을 대신해 남의 논농사에 쫓아다닌다. 함께 사는 둘째 아들 박정민씨(37)는 소를 40마리 키운다. 올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여파로 소 값이 많이 떨어졌다. 엊그제는 소 한 마리를 사료값도 안 나오는 330만원에 팔아야 했다. 보훈처에서 매달 나오는 140여 만원으로는 세 식구의 생활이 빠듯하다. 그래도 아내 윤씨는 “이렇게라도 사는 것이 다행이다. 다른 유공자 후손은 더 힘들게 산다”라고 전했다.
ⓒ시사IN 백승기
홍재웅씨가 건국훈장 대통령상을 추서받은 조부 홍병기 선생의 훈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물론 민족대표 33인의 후손 중 제 손으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들도 있다. 나일선씨(73)는 천도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운동을 벌였던 나인협 선생의 손자다. 나인협 선생은 광복 6년 후 병사했다. 일선씨는 해방도 되기 전에 간암으로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해 보따리 장사를 하던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고등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호텔 등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현재 일선씨의 아들 나명재씨(45)는 산부인과 의사로 평택시에 개인 의원을 운영한다. 33인 후손 중에는 나일선씨 외에 서울 성수동에서 물류회사를 경영하는 이갑성 선생의 손자 이재현씨를 포함한 7명만이 자수성가해 비교적 안정된 삶을 되찾은 것으로 조사됐다.
광복절이 오면 해마다 150여 명의 독립유공자가 새로 발굴돼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 후손은 이미 3·4대 이상 내려와 실제 보상금의 수혜자는 10~20%뿐이다. 또한 보상금을 받지 못하는 유족의 경우는 광복회에서 정식으로 활동할 수 없다. 광복회 정관에 의하면, 본회 등록은 독립유공자 본인 혹은 그 유족 중 보상금을 받은 자로 제한돼 있다. 독립유공자협회 김삼열 회장은 “광복절만 되면 가슴이 답답하다. 정부는 국경일에만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팔아먹고, 결국 종이쪽지 하나 주고 끝낸다”라고 말했다. 2008년 6월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 유족은 6283명이다. 그 중 유족등록증을 소지하고도 보상금을 받지 못한 채 생계 대책도 없는 유족이 1114명이다. 극빈층에 속하는 유족에게만 제공되는 생계지원비 월 25만원을 제외하면, 그들은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다.
민족대표 33인의 유족은 조상의 명예를 더럽힐까 봐 “잘살고 못사는 것이 조상 탓은 아니다”라면서도 자신들이 물려받은 유산이 ‘가난’이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매년 광복절이 오면 독립유공자의 남루한 생활이 언론을 통해 조망되곤 한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이번 광복절에도 의례적인 행사를 치르고 내년 3·1절까지 잊힐 것이다. 33인 유족회 권혁방 전 회장이 “우리는 과연 일제로부터 독립했다고 보는가”라고 기자에게 묻고는 이렇게 탄식했다. “일본놈에게 당하나, 같은 한국 사람에게 설움을 받나 똑같다.”
1910년 한·일병탄 조약 체결 직후 서울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조선총독부 관리와 이완용 등 매국 조약 추진 주모자가 고종과 순종을 앞세워 기념 촬영을 했다.
광복 63주년이 지나도록 우리 사회에는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 친일 매국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는 속설이 상식처럼 굳어져 있다. 과연 현실은 어떨까. <시사IN>은 이 속설이 믿을 만한지 알아보기 위해 그 실상을 직접 들여다보기로 했다. 조사 범위는 매국 조약 체결 등에 가담해 그 대가로 귀족 작위와 은사금, 은사 토지를 하사받은 매국형 친일파 10여 명과 그 후손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또 일제 식민지 통치기구의 국회 격이라 할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참의를 지낸 상당수 친일파 후손도 살펴보았다. 대표적 친일파 명단을 놓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족보를 추적해 확인 가능한 후손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독립운동가의 경우는 임시정부 요인과 기미독립선언에 참가한 33인 대표, 그리고 안중근 의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 등 민족의 선각자들 후손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20~25쪽 딸린 기사 참조).
결론부터 말하면 3대 이상 흥한 ‘대표 친일파’ 후손은 ‘대표 독립운동가’ 후손보다 훨씬 많았다.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흥한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하다. 적잖은 친일파 후손이 사회 각계에 포진해 대를 이어 기득권을 이어가고 있었다.
우선 매국 조약 체결 등으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친일파부터 살펴보자. 구한말 군부대신으로 을사늑약을 조인하고, 1910년 한·일 병탄 조약 체결에도 간여한 을사오적 이근택의 집안은 대표 친일파 가계로 통한다. 그의 형 근호와 동생 근상이 함께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를 받았는데 습작자까지 합치면 조선 귀족을 6명 배출한 집안이다. 이 때문에 일제 식민지 지배 당시에도 독립지사들은 이근택 5형제를 ‘5귀’라 부르며 지탄했다.
1910년 한·일병탄 뒤 일본 정부에서 훈1등 자작을 수여받은 이근택은 작위를 아들 창훈에게 습작했다. 창훈의 두 손자는 광복 후 교육 분야에 진출해 활약해왔다. 1998년 세상을 뜬 맏아들 이상우씨는 공주대 총장을 역임했고, 동생은 현재 공주대 물리학과 명예교수이다. 이근택의 형 이근호도 1910년 한·일병탄 조약 체결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아 매국형 친일파로 분류된다. 그의 후손은 2005년까지 선대의 친일 재산을 되돌려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9건 낸 적도 있다.
교육계에 뿌리 내린 ‘자작 민영휘’ 후손
일제에 협력한 대가로 작위를 받은 친일파 중 교육 분야에 뿌리를 내린 또 다른 집안으로는 ‘자작 민영휘’ 후손을 꼽을 수 있다. 구한말 조선왕족이던 민영휘는 한·일병탄 직전 일제의 조선 병합을 지지하며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친일 매국 단체 간부로 이름을 올리고 활동했다. 그 공로로 병합 당시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매국공채 5만원을 받았다. 초기에 관직을 이용해 모은 재물을 불려 일제 강점기 조선 최대 갑부 반열에 올라섰다.귀족 출신으로는 드물게 대자본가로 변신한 민영휘는 일제하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분류된다.
ⓒ시사IN 백승기
친일 매국단체 간부로 한·일병탄을 지지해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민영휘가 세운 휘문의숙(휘문고) 교정에 세워진 민영휘 동상.
민영휘의 후손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자리한 휘문고교를 상속받았다. 민영휘의 증손 민덕기씨는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풍문여고를 세웠다. 학교법인 휘문의숙은 민영휘의 증손자인 민인기씨가, 풍문학원은 고손자인 민경현씨가 각각 이사장을 맡았다. 현재 휘문고 교정에는 민영휘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다른 후손의 사회 진출도 화려한 편이다. 막내 아들의 장남인 민병도씨는 제일은행장과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민병도씨의 장남 민웅기씨는 텔레비전 드라마 <겨울연가> 촬영지로 유명한 강원도 춘천의 남이섬 유원지를 소유하고 있고, 둘째 아들도 기업체를 경영한다.
민영휘의 후손은 광복 뒤 이승만 정부에서 휘문의숙을 세운 공로로 표창을 받았다는 점을 들어 민영휘를 친일파로 분류하는 데 불만이다. 그러나 일제 때 조선총독부도 교육 관련 표창장을 줬다는 점에서 그의 교육사업 진출이 친일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지적을 받는다. 1907년 대한제국 군부대신을 지내다가 한·일신협약 체결로 군대 해산에 앞장선 이병무는 ‘정미칠적’으로 분류된다. 해산된 군대가 의병을 일으키자 강경 진압했던 이병무는 한·일병탄 때는 시종무관장으로서 병탄 조약 체결에 협조해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았다.
이병무의 자작 작위와 재산을 물려받은 이는 입양 아들 이홍묵이다. 이병무의 증손자 이진씨는 5공화국 때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노태우 정부 초기 국무총리 비서실장과 환경처 차관을 역임한 그는 현재 웅진그룹 환경경영담당 부회장이다. 그는 대학과 기업을 오가며 경제와 환경의 통합을 강조하는 ‘친환경 경영체제’ 주창자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경술국적’ 민병석 아들, 대법원장 지내
한·일병탄 조약 체결에 가담해 ‘경술국적’으로 불리는 민병석은 이완용과 처내종 간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을사늑약 이후 이토 히로부미와 깊은 교분 관계를 맺었던 민병석은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이토가 쓰러지자 장례 조문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한·일병탄 공로로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다섯 차례에 걸쳐 역임한 대표 친일파였다. 큰아들 홍기씨는 민병석의 자작 작위를 세습했고, 둘째 아들 복기씨는 일제 때 경성제대 법과를 나와 식민지 사법부에 진출했다. 민복기씨는 집안의 친일 행적과 상관없이 정부수립 후 제 5·6대 대법원장을 맡는 등 법조계의 거물로 활약하다가 지난해 작고했다.
민병석의 세 아들 중 일본 히도쓰바시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한 장남 민경성씨는 일본계 기업체 사장이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아버지의 뒤를 이은 둘째 민경택씨는 서울지법 판사, 서울지검 검사 등을 거쳐 변호사로 일하다 작고했다. 서울대와 미국 노스웨스턴 대학을 나온 셋째 민경삼씨는 기업인이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전권대신으로 조인을 총괄했던 박제순은 1910년 내부대신을 맡아 한·일병탄 조약 체결에도 앞장섰다. 그 공로로 훈1등 자작 작위를 수여받고 중추원 고문이 됐다. 박제순의 아들 박부양은 중추원 서기관이 되었고 이완용의 손자 이병길과 나란히 조선 귀족 모임인 동요회 이사를 지내면서 일제 강점기 내내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의 아들 박승유씨는 서울대 음대와 미국 남가주 대학 음대를 졸업한 뒤 성악가로서 강원대 음대 교수를 역임했다.
조선 왕족의 종친 가운데도 구한말 귀족 작위를 받고 식민지 지배에 적극 협력한 사람이 있다. 이해승이 그런 경우다. 이해승은 한·일병탄 후 21세에 후작 작위와 매국공채 16만2000원을 받았다. 종친 가운데 일본 귀족원 의원을 지낸 이기용과 함께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는 등 적극 친일에 나선 이해승은 광복 후 반민특위에 끌려갔지만 이승만 정부가 반민특위를 해체하면서 풀려났다. 그는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됐다. 이해승의 손자 이우영씨는 현재 서울 홍은동에 있는 그랜드 힐튼 서울호텔 회장 겸 동원 INC 회장이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지난해 이해승이 친일 대가로 경기도 포천에 조성한 토지 약 200만㎡(시가 300억원대)를 국가 귀속하기로 결정했다.
매국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파 후손 가운데는 멸문한 집안도 있다. 대한제국 법무형사국장으로서 명성황후 폐비 조처를 주도해 시해 사건을 돕고 10년간 일본으로 망명한 조중응이 그런 경우다. 일본에서 돌아와 이완용 내각 농상공부대신으로 한·일병탄에 앞장선 조중응은 그 공로로 자작 작위와 은사금 10만원을 받았다. 이후 중추원 고문을 맡아 친일에 앞장선 조중응은 정실부인을 서울에 두고도 일본 여성과 도쿄에서 따로 결혼해 슬하에 자녀를 뒀다. 자식이 없던 서울의 정실부인은 양자를 입적했지만 대가 끊겼고, 대신 일본 부인과 자녀가 조중응 사후 작위와 재산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그러면 매국형 친일파 중 당대에 쌍벽을 이루며 나라를 팔아넘기는 데 앞장섰다는 평가를 받는 이완용과 송병준의 후손은 어떻게 지낼까.
구한말 내각총리대신으로 한·일병탄에 앞장선 매국노의 상징 이완용은 병탄 후 중추원 고문으로 백작 작위와 은사금 15만원을 받았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 “일선 동화의 결실을 손상하는 경거망동과 황당무계한 유언 선동을 중지하라”고 만세운동 비난 담화를 발표해 그 공로로 1920년 후작으로 승작했다. 1926년 이완용이 사망한 후 귀족 작위와 재산은 손자 병길이 습작했다.
이병길은 아들 형제를 두었는데 이완용의 직계 종손인 이윤형씨가 상속권자다. 일제 때 일본인 고위 관료 자녀의 교육기관이던 경성제1사범대 부속학교를 거쳐 동성고교와 홍익대를 나온 그는 광복 뒤 한동안 숨어 지내다가 1960년대 말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의 발탁으로 대한사격연맹 사무국장을 지냈다. 그 뒤 17년간 캐나다에서 살았지만 1980년대 말부터 국내에 들어와 이완용 땅찾기 소송에 뛰어들어 한때 승소 판결로 수십억원을 챙기기도 했다.
한편 이완용의 셋째 손자(이병길의 동생)인 이병주씨는 1962년 9월21일 일본으로 밀항해 들어가 일본 정부에 생활 보장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그를 귀화시키고 환대했다. 일본에 귀화한 이병주의 아들 이석형씨는 1979년 전북 익산군 낭산면 낭산리 뒷산에 있던 이완용 부부의 묘를 파내 화장해버렸다. 이완용의 관 뚜껑에는 일왕이 부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이위대훈위 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阮 副議長 二位大勳位 牛峯李公之柩)’라 쓰여 있었다. 작업하던 인부가 이 관 뚜껑을 인근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전달해 한동안 역사 자료로 소장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당시 서울대 교수로 있던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이 소식을 듣고 내려와 원광대 총장을 설득해 가져다 태워버린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친일 사학자라고 비판받던 고 이병도 박사는 이완용과 우봉 이씨 집안 친척이다. 고 이병도씨의 두 아들이 현재 서울대학교 이장무 총장과 이건무 문화재청장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이완용의 증손자 이윤형씨의 오랜 땅찾기 작업은 친일재산조사위원회의 조사와 국가 귀속 조처로 현재는 주춤한 상태다. 송병준 후손, 집요하게 ‘땅 찾기’ 나서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던 매국노 송병준은 구한말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한·일병탄 때는 친일 매국단체 일진회 총재 자격으로 병탄에 앞장선 인물이다. 일제로부터 백작 작위를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왕실재산조사위원장을 맡아 전국 각지의 토지대장 수천만 평에 자기 이름 석 자를 세겨넣은 송병준은 1925년 뇌일혈로 숨졌는데, 재산과 작위는 아들 송종헌이 물려받았다. 송종헌 역시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조선농업주식회사를 설립해 전국적 세도가로 행세했다.
일제로부터 후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친일파 이해승의 후손이 운영하는 그랜드 힐튼 서울 호텔.
그의 아들 송재구는 일본 메이지 대학을 졸업한 뒤 1930년 홋카이도에서 ‘조선목장’ 약 2640만㎡를 경영했다. 광복 후 송종헌은 용인군 내사면 추계리 99칸짜리 저택과 전답을 긴급 처분한 뒤 서울로 피신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9년 뇌일혈로 사망했다. 송재구의 아들이 바로 송돈호씨로 서울 역삼동에서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그는 1990년대 중반부터 서울·인천·경기·강원 등지에 걸쳐 있는 송병준 명의 토지 상속소송을 주도하며 각종 사기 사건을 일으키다가 2007년 4월 구속됐다. 올해 초 보석으로 나온 송돈호씨는 최근 헌법재판소에 친일재산 특별법 위헌소송을 냈다가 기각당하는 등 여전히 송병준 땅 찾기에 집요하다.
친일 대가로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은사금, 은사 토지를 받은 매국형 친일파 후손보다 광복 후 사회·경제적으로 더 강고한 기득권을 구축한 친일파 후손이 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던 그룹이 그들이다. 요즘으로 치면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중추원 참의는 1910년 한·일병탄 직후부터 임명되기 시작해 광복 때까지 70여 명이 거쳐갔다. 1910년 10월 초대 참의 임명자는 종신직이었지만 1921년부터는 3년 임기로 일제 식민지배 공헌도에 따라 돌아가며 역임했다. 오랜 친일 행적이 쌓여 공로를 인정받아야 참의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 역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친일파로 분류된다.
호남 지방의 대지주였던 김연수는 일제 때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경성방직을 경영했다. 친일 기업인으로 활동한 그는 1935년 총독부가 발간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경성방직 사장 직함과 함께 수록돼 있다. 1940년 중추원 참의를 맡은 김연수는 태평양 전쟁 때 거액의 국방헌금을 기부하면서 군수산업에 뛰어들었다. 이 기간 중 국민총력조선연맹·조선임전보국단·국민의용대 등 친일 단체 간부로서 각지를 돌며 학병 지원 연설을 많이 벌였다.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됐다가 특위가 해체되면서 풀려난 김연수는 1961년 전경련의 전신인 전국경제협의회장을 맡는 등 재계 원로로 행세했다.
김연수는 7남6녀를 두었는데 장남 고 김상준은 삼양염업 명예회장, 차남 고 김상협은 16대 국무총리를 지내고 작고했다. 3남 김상홍은 현 삼양사 명예회장, 5남 김상하는 삼양사 회장을 맡고 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같은 신체시로 이름을 알린 육당 최남선도 중추원 참의 출신이다. 3·1운동 때 문화계 대표로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은 그 후 변절해 일제 식민사관을 유포하던 어용단체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고,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최남선 역시 광복 뒤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처벌은 면했다. 최남선의 장남 최한웅 교수는 서울대 의대 소아감염학 권위자로 이름을 날렸다. 최남선의 맏손자는 피부과 전문의이고, 또다른 손자는 경기대 경영학부 교수로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사업가로 명성을 떨친 문명기도 참의 출신 친일파로 분류된다. 제지업과 수산업, 금광 개발에 뛰어들어 부를 쌓은 그는 태평양 전쟁 때 국방헌금을 냈다. 아울러 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조직해 비행기 헌납운동을 벌이며 가미카제 특공대를 옹호하는 친일 활동을 폈다. 또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 함대를 물리치기 위한 일제 해군 ‘헌함운동’도 벌이며 앞장서 자기의 광산을 일제에 기부했다. 이런 공로로 1941년 중추원 참의가 됐다. 그의 맏손자인 문태준은 서울대 의대와 미국 토머스제퍼슨 대학원을 수료한 뒤 7대부터 10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현재 남평 문씨 대종회장이다. ‘친일 내력’ 노출되는 정치권 진입 적어
정치인 가운데도 일제 시대 중추원 참의를 선조로 둔 이가 있다. 강릉 갑부로서 1936년 중추원 주임참의에 임명된 후 1941년 연임한 최준집의 아들 최돈웅 전 의원이다. 그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후 자기 회갑연을 취소하고 국방헌금으로 1000원을 납부한 사실이 매일신보에 보도될 정도로 일제에 충성했다. 그의 아들 최돈웅씨는 8·14·1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2002년 대선 때는 이회창 후보의 대기업 상대 불법 선거자금을 거둔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특사로 풀려났다. 재계의 거물 중 선대가 중추원 참의인 경우도 있다. 호남의 대표 친일 부호로서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된 현준호의 후손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1920년 호남은행을 설립해 대표를 지낸 현준호는 한때 민립대학 설립 등 민족교육에도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930년 중추원 참의가 되고부터 지역 간척사업 이권을 따내는 등 일제와 밀착 행보를 보이며 민족운동과 결별했다. 현준호 역시 1935년 총독부 편찬 공로자 명단에도 올랐다.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가 조직한 시국강연회에 연사로 나서 전쟁 지원을 역설했던 그는 태평양 전쟁 말기까지 징병제 홍보와 학병 지원 권유 등에 적극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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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재산조사위가 발족(위)해 활동 2년째를 맞지만 친일파 후손의 불복으로 난항을 겪는다.
현준호는 한국전쟁 시기에 북한군에 피살됐다. 현준호의 후손은 대개 재계로 진출했다. 현우실업 대표인 현양래는 현준호의 손자이다. 현주호의 아들 고 현영원씨는 현대상선 회장을 지냈다. 현영원씨는 딸 넷을 두었는데 둘째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다. 현 회장은 1955년생으로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1976년 현대그룹 정몽헌 회장과 결혼해 현대가와 혼맥으로 연결됐다. 한나라당 김무성 의원은 현정은 회장의 어머니인 김문희씨의 동생이라서 두 사람은 외삼촌과 조카 사이이기도 하다. 친일파 후손의 사회 진출에서 특징은 학계·경제계·관료·문화예술 분야에 몸담은 이가 많다는 점이다. 정치 분야 진출도 없진 않지만 상대적으로 그 수는 적었다. 이는 후손이 선거운동 등에서 자기의 집안 내력이 노출되는 정치권 진출을 꺼렸으리라는 점을 시사한다.
물론 이들 대표적인 친일파 후손이 현재 사회·경제적으로 ‘잘나간다’고 해서 무턱대고 조상의 친일 ‘덕분’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 일제의 악랄한 탄압에 가산을 탕진하고 온갖 고초를 겪었던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에 비해 친일파 후손은 선대가 만들어준 ‘요람’에서 근대적 교육 기회를 충분히 누리거나 유산 상속 등으로 출발부터 남달랐다. 비교적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친일파 후손까지도 경제 형편은 유복한 편이었다. 아직도 조상이 친일 대가로 조성해둔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 국가기관을 상대로 법정 다툼을 벌이는 경우도 많다. 광복 63주년을 맞아 민족정기 확립을 위한 국민의 관심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대의 친일 시비에 휘말린 박근혜 의원, 홍라희 삼성리움미술관장,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 이장무 서울대 총장(왼쪽부터).
한국 사회에서 요직을 차지한 이들 가운데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도 많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행적은 한국 사회 친일 논쟁의 중심에 있다. 9년 전 ‘박정희전대통령기념관’ 설립을 놓고 국가보조 논쟁이 벌어질 때도, 4년 전 열린우리당이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들고 나올 때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불편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올 8월 말에 발간할 <친일인명사전>에도 박정희(창씨명: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전 대통령의 이름이 올라갈 예정이다. 잊을 만하면 부친의 친일 행적은 이렇게 박근혜를 괴롭힌다.
재계 1위 삼성 역시 친일파 후손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건희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삼성리움미술관장의 부친이 일제시대 판사를 지낸 홍진기씨이기 때문이다. 홍진기의 이름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될 예정이다. 홍진기씨는 광복 이후에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 등 국가 요직을 거치고 중앙일보 회장까지 지냈다. 현재 중앙일보 회장은 그의 아들 홍석현씨다. 친일에 관해서는 홍석현·홍라희 남매의 외가 쪽도 시끄럽기는 마찬가지다. 남매의 외조부 김신석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사주 일가도 친일 시비의 단골 대상이다.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증조부는 계초 방응모. 그는 조선에 일본어 보급률이 낮다며 일어 상용운동을 주장한 인물이며, 친일 잡지인 <조광>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계초 역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여기에는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도 이름을 올렸다. 인촌은 중·일전쟁 이후 부일협력의 길을 걸었는데 그가 <매일신보>에 쓴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는 논설은 유명하다. 암으로 투병하다 지난 2월 타계한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이 인촌의 손자이다.
학계라고 예외는 아니다. 2006년 서울대 총장으로 취임한 이장무 교수(64)가 대표적이다. 그의 조부 이병도는 중추원 산하의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친일 사학자. 한국 고대사 연구의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받는 이병도는 일제의 식민사관 형성에 일조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장무 총장 취임 당시, 선친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국립중앙박물관장이던 동생 이건무씨(62·현 문화재청장)도 덩달아 곤욕을 치른 바 있다.
“독립군 할아버지 저는 배를 곯아요”
독립유공자 유족 6283명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60%를 넘고, 봉급생활자는 10% 남짓이며, 중졸 이하 학력이 55% 이상이다. 이들은 대부분 비참하게 산다. 일부는 친일파 후손에 밀려 외국으로 피했다.
1910년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 직전 안중근 의사가 동생 정근·공근에게 유언하고 있다.
안중근 의사 일가 중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40명을 넘는다. 서훈을 받은 사람만도 최고 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안 의사를 비롯해 안 의사의 동생 정근·공근, 사촌 명근·경근, 조카 춘생·봉생·원생·낙생 등 11명에 이른다.
독립운동가가 많은 집안인 만큼 일제의 탄압은 혹독했다. 1909년 10월29일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뒤 그의 가족은 고향인 황해도 해주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옮겨갔다. 그러나 일제의 추격은 러시아에까지 미쳤다. 1911년 여름 안 의사의 맏아들 우생(분도)은 여섯 살에 일제의 밀정에게 독살당했다.
광복 뒤에도 친일파에게 탄압받아
독립운동의 최고 명가 안중근 가문은 광복 후 빛을 보지 못했다. 부인 김아려 여사는 광복된 고국을 밟지 못하고 중국 상하이에서 숨을 거뒀다. 광복 뒤 귀국한 안 의사 일가는 대부분 김구 선생과 같은 계열에서 활동하다가 탄압받았다. 안 의사의 사촌 동생 경근씨는 4·19혁명 후 ‘민주구국동지회’를 만들어 정치에 나섰다가 5·16 군사정권에 의해 7년간 투옥됐다. 안 의사의 조카 민생씨는 평화통일 운동에 매진하다 역시 5·16 군사정권에 의해 10년 동안 징역살이를 했다. 일제 때 명근씨가 감옥살이를 한 서대문형무소 내의 같은 감방이었다고 한다. 외교안보연구원 본부 대사로 일하던 안 의사의 조카 진생씨는 1980년 전두환 정권 때 강제 해직당한 뒤 충격을 받고 쓰려져 8년간 투병하다 숨졌다. 안 의사의 조카 민생씨는 중국 옌지에 있는 사촌 동생 경옥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거 우리는 안중근 집안이라는 이유로 왜놈에게 죽어야 했는데, 광복 뒤에는 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한 주구들이 권력을 잡게 됨으로써 애국자의 피해는 여전하다”라고 한탄했다.
이같은 푸대접과 설움 속에 안 의사 유족은 해외로 뿔뿔이 흩어졌다. 안 의사의 차남 준생씨가 1951년 부산에서 죽자 자식들은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들 웅호씨는 미국에서 심장병 전문의로 일했다. 장녀 선호씨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차녀 연호씨는 시애틀에서 살았다. 한국외대 신운용 박사는 “상하이에서 바이올린을 켜며 생계를 이어가던 준생씨는 일본의 공작으로 장충단공원에 있던 박문사에 이토 히로부미 아들과 참배하기도 했다. 안 의사 가족들은 광복 공간에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안 의사의 딸인 현생씨의 딸 황은주씨는 미국에서 살다가 귀국했고, 은실씨는 미국에 있다. 안 의사의 외손녀 황은주씨는 “광복 후 국내에는 우리 집안이 자리 잡을 곳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안공근 선생의 자손은 고향인 북한으로 갔고, 연생씨 가족은 파나마에 산다. 안 의사의 사촌 형제인 봉근씨 가족은 독일에 산다. 독립운동가들은 광복 뒤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그래서 독립유공자 후손 가운데 외국에 거주하는 이가 많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이자 흥사단을 창립한 민족계몽운동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건너갔다. 장남 필립은 할리우드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했고, 차남 필선씨는 하워드 휴즈 항공 부사장을 지냈다. 장녀 수산은 미국 해군 역사상 최초로 여성 포격 장교를 역임한 뒤 미국 안전보장국에서 비밀정보 분석가로 활동했다. 차녀 수라와 3남 필영도 미국에 있다. 안창호 선생의 자녀는 대부분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지만 한국과의 왕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차리석 선생의 회갑을 맞아 임시정부 요인이 기념 촬영했다. 앞줄 가운데가 김구 선생, 뒷줄 가운데가 차리석 선생.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던 박희도 목사는 이 일로 2년 동안 복역했다. 하지만 일제 말 잡지 <동양지광> 주간으로 있으면서 훼절해 친일의 길로 들어선다. 박 목사 아들은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의료행정직으로 일하다가 ‘변절자 후손’이라는 오명을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갔 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는 자부심은 사치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 미생씨는 김구 선생의 장남 인씨와 결혼하면서, 절친했던 두 집안은 혼맥으로 이어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슬하에 세 딸과 두 아들을 두었다. 세 딸은 어릴 때 모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맏아들 인씨도 광복을 앞둔 1945년 3월 28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둘째 아들 김신씨는 공군참모총장·교통부장관을 지냈다. 신씨는 진·양·휘 3남과 1녀 미를 두었다. 진씨는 참여정부에서 주택공사 사장을 지냈지만 협력업체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되는 비운을 맞기도 했다. 양씨는 상하이 총영사를 거쳐 보훈처장으로 일한다. 휘씨는 광고대행사 에에블리 대표로 있다. 미씨는 김호연 빙그레 회장의 부인이다.
김구 선생 집안은 사회적으로 대접받은 유일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볼 수 있다. 후손은 비교적 잘 교육받았고 정부의 배려와 기념사업회의 지원이 뒤따랐다.
그러나 일신과 가문의 안녕을 뒤로하고 항일투쟁의 길로 들어선 대다수 독립운동가는 후손이 뿔뿔이 흩어지고 집안은 몰락했다. 가산은 모두 빼앗겼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가슴속에 품은 자부심만으로 가난의 벽을 넘기는 어려웠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형편은 교육에까지 여력이 미치지 않았고 가난의 대물림은 3, 4대를 이어갔다. 하지만 어디에도 정부의 손길은 없었다. 어렵게 사는 후손에 대한 실태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는 아예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숨을 거둔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들 수범씨는 일제 때 은행에서 일했다. 하지만 광복 후에는 직업을 잃었다. 신채호 선생이 임시정부 초기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수범씨는 자유당 정권에서 신변을 위협받았다.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다고 한다. 수범씨는 넝마주이·부두 노동자 등 떠돌이로 살아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3·15 부정선거로 하야한 이후에야 은행에 다시 취업할 수 있었다.
ⓒ시사IN 강은나래 인턴기자
효창공원에 있는 차리석 선생 묘비를 어루만지는 차영조씨.
신채호 선생은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신고를 거부하고 1912년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신채호 선생의 대한민국 국적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아 아직까지 무국적자 신분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단재 선생 명의의 땅과 집은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씨는 “나라를 되찾은 지 63년이 지났어도 아직까지 아버님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가지고 나라와 싸워야 한다.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쳤던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이 땅에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치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비서장을 지낸 차리석 선생의 아들 영조씨는 친일파 후손이 떵떵거리는 사이 숨어 지냈다고 한다. 영조씨는 “백범이 암살당하자 임시정부에서 일했던 사람들의 가족은 숨어야만 했다. 영조씨의 어머니는 아들의 성 ‘차(車)’에서 획을 없애 ‘신(申)’씨로 바꾸어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라고 말했다. 영조씨는 열아홉 살 때까지 신씨로 살았다. 스리랑카 사람이 독립운동가 대 이어
차리석 선생은 1945년 9월9일 환국을 준비하다 과로로 쓰러져 해방된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숨졌다. 광복 뒤 영조씨의 인생은 고달픔과 배고픔으로 점철됐다. 어머니 김씨는 좌판을 벌이고, 생활용품 행상에 나섰다. 하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영조씨는 동냥을 해야만 했다. 영조씨는 “아침마다 한 숟가락씩 문전걸식으로 살았다. 월사금은 한 번도 못 냈고, 도시락도 싸본 적이 없다. 우물물만 실컷 먹고 살았다”라고 말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어머니 김씨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영조씨는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영조씨는 ‘아이스케키’ 장사, 여관 심부름, 국밥 배달 등 돈 되는 일은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시사IN 백승기
장병준 선생의 장손 하정씨(오른쪽)는 스리랑카 양아들 오산다 씨(왼쪽)의 도움으로 말년을 보낸다.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장관을 역임한 장병준 선생의 4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을 했다. 구한말 신안군 장산도 일대에 염전과 전답을 가지고 있던 천석꾼의 재산은 모두 독립운동 자금으로 들어갔다. 독립운동을 한다고 자식 교육은 뒷전이었다. 장병준 선생의 장남 경식씨는 제대로 배우지 못해 그럴싸한 직업도 가져본 적이 없다. 이 악순환의 고리는 손자 하정씨(65)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하정씨는 경기도 용인시 한 시골 마을에서 정부의 도움 없이 쓸쓸한 말년을 보낸다.
홀로 지내는 하정씨를 돌보는 사람은 한국에 일하러 온 스리랑카인 오산다 씨(30). 오산다 씨는 “스리랑카도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 때문인지 한국에 와서 독립운동 자손이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하정씨는 2006년 오산다 씨를 호적에 올리고 정식 양자로 입양했다. 오산다 씨의 여권 국적은 ‘대한민국’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서는 오산다 씨에게 주민등록을 내주지 않아 그는 강제 출국될 위기에 처했다. 하정씨는 “할아버지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양아들 오산다가 주민등록을 받아 대를 이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내 생의 마지막 바람이다”라고 말했다.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사는 김덕천씨(68)는 조선의열단 선전부장, 조선의용대 정치부장, 임시정부 내무차장, 국무위원 등을 지낸 운암 김성숙 선생의 손자다. 김성숙 선생은 자유당 시절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는 정치활동을 펼쳐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유품으로 남긴 일기장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오늘 200원을 꾸어 쌀을 사왔다. … 내가 독립운동을 하고 정치를 한다고 돌아다니면서도 가족을 굶기고 살고 있구나.” (1955년 2월23일) “가끔 할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한다”
덕천씨의 아버지 정봉씨는 일제 때 징용을 나갔다가 덕천씨가 세 살 되던 해에 돌아왔는데, 한동안 정신이 이상해져서 경제생활을 거의 하지 못했다. 덕천씨는 턱뼈에서 구강암이 발견돼 보훈병원을 찾았으나 독립유공자가 광복 후에 사망했을 경우에는 2대까지만 혜택을 볼 수 있다는 조항 때문에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지난 5월 아내를 위암으로 잃었지만 형편이 어려워 변변한 치료 한번 받지 못한 채 보내야 했다. 덕천씨는 “할아버지가 이승만을 추종했더라면 잘 먹고 잘살았을 텐데 하는 원망도 든다”라고 말했다.
ⓒ시사IN 강은나래 인턴기자
김덕천씨가 조부 김성숙 선생과 조모 정씨 부인의 사진을 보이고 있다.
2008년 8월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는 223명, 유족은 6283명이다. 이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무려 60%를 넘고, 고정 수입이 있는 봉급생활자는 10%를 조금 웃돈다. 유족 가운데는 직업이 일정치 않아 수시로 바뀌고, 그나마 봉급생활자 중에도 특히 경비로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 1919년 서울 4대문 사건의 주동자로 옥고를 치렀던 이원근 열사의 손자 이승봉씨는 경비 일을 한다. 조선 총독 암살 계획을 세워 옥고를 치른 방한민 열사의 손자 방병건씨도 최근까지 경비원으로 일했다. 유족 가운데 중병을 앓는 사람이 두 집에 한 집꼴이었고, 중졸 이하 학력이 55%를 넘었다. 가난은 의료와 교육의 공백을 낳고, 다시 가난으로 대물림됐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공식은 철저히 들어맞았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대한민국에서 친일파 후손은 선대의 부와 명예를 고스란히 이어받았고, 독립유공자 자손은 선대의 가난과 피해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는 게 현실이다”라고 말했다.
“일본에 당했는데 정부에 또 당하니…”
독립유공자 유족 중 1114명이 보상금도 받지 못하고 살 길이 없는 ‘무대책 유족’이다. 정부는 국경일에만 유공자 이름을 ‘팔아먹은’ 뒤 나 몰라라 한다.
[48호] 2008년 08월 12일 (화) 14:52:28
강은나래 인턴 기자
1919년 3월1일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거행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문 낭독 장면. 정춘수 등 4명은 불참했다(기록화, 최대성 作, 독립기념관).
“우리 유족은 진흙 같은 가난 속에 산다.” 1919년 3·1 기미독립선언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천도교 대표로 참여했던 권동진 선생의 증손자 권혁방씨(78)는 유족의 삶을 진흙탕에 비유했다. 그는 “사람이 한번 진흙탕에 넘어지면 헤어나오기 힘들다. 온 힘을 다해 간신히 밖으로 나오다 곧 다시 쓰러지는 곳이 진흙탕이다”라고 말했다. 독립운동을 하고 3대만 망하면 다행이고, 진흙 같은 가난에서 빠져나오기까지는 100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한탄이었다.
현재 국가보훈처에서는 독립유공자의 유족에 대해 최대 손자녀(3대)까지만 보상 및 예우를 한다. 1945년 8월14일 이전에 사망한 독립유공자의 경우 손자녀(3대)까지, 그 이후에 사망한 독립유공자의 경우는 자녀(2대)까지만 보상금을 받는다. 이에 따라 민족대표 33인 중 8인의 유족만이 혜택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나머지 유족의 생활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천도교 장로 신분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던 홍병기의 손자 홍재웅씨(73·인천시 남구)는 최근 사정이 딱하게 되었다. 바느질로 재웅씨를 키운 노모는 치매와 중풍으로 10년간 앓다가 1996년에 사망했다. 닭튀김 장사를 하던 재웅씨는 사업에 실패하고 3년째 당뇨와 심한 치매를 앓고 있다. 딸들의 도움을 받지만, 그래도 아내 김송자씨(69)는 하루 수당 4만5000원을 받는 동사무소 공공근로를 나가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홍병기 장로는 해방 4년 후인 1949년에 사망해 아들(2대)까지만 보상금을 받는다.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 이승훈 선생의 5대 자손 이기대씨(54·서울 마포구)도 전혀 보상금 혜택을 못 받는다. 그는 지하 셋방에 살면서 포장마차를 운영해 생계를 이어가고 있으나, 보훈처에서는 실태조사조차 나온 일이 없다. 이승훈 선생은 3·1운동 당시 기독교 측 수장이었다. 의료·교육·취업 지원도 못 받아
보상금 지급 대상에서 소외된 대다수 유족은 의료·교육·취업 지원 혜택 역시 받지 못한다. 1919년 당시 의주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1937년 작고한 유여대 목사의 후손 창근씨(29)도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부친 유효창씨가 지난해 5월31일 사망하면서 가족에게 적용되던 의료지원 혜택도 한꺼번에 중단됐기 때문이다. 창근씨는 병환이 깊은 73세 노모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한다.
보훈처로부터 보상금을 받는 8인의 후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33인 민족대표 중 신사참배 거부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르다 1937년 사망한 신흥식 선생의 유족으로 손자 덕수씨(78·서울 마포구)가 있다. 선대의 독립운동으로 가세가 기울면서 교육을 못 받고 자란 덕수씨는 젊었을 적부터 막노동판을 전전해 허리가 성할 날이 없었다. 현재는 허리를 거의 못 쓴다. 그의 아내도 지난해 뇌수두증 수술을 한 이후, 현재까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거동조차 불편한 몸으로 서울시 광진구에 있는 지정 병원을 찾아가기 힘들어 가까이에 있는 병원에 다니면서 보상금을 병원비로 쓰는 상황이다. 박기수씨(59·전북 정읍)는 독립운동가 박준승 선생의 손자다. 기수씨는 10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혈압이 있는 높은 윤정자씨(53)는 병석에 있는 남편을 대신해 남의 논농사에 쫓아다닌다. 함께 사는 둘째 아들 박정민씨(37)는 소를 40마리 키운다. 올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여파로 소 값이 많이 떨어졌다. 엊그제는 소 한 마리를 사료값도 안 나오는 330만원에 팔아야 했다. 보훈처에서 매달 나오는 140여 만원으로는 세 식구의 생활이 빠듯하다. 그래도 아내 윤씨는 “이렇게라도 사는 것이 다행이다. 다른 유공자 후손은 더 힘들게 산다”라고 전했다.
ⓒ시사IN 백승기
홍재웅씨가 건국훈장 대통령상을 추서받은 조부 홍병기 선생의 훈장을 들어 보이고 있다.
물론 민족대표 33인의 후손 중 제 손으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들도 있다. 나일선씨(73)는 천도교 교사로 활동하면서 민족운동을 벌였던 나인협 선생의 손자다. 나인협 선생은 광복 6년 후 병사했다. 일선씨는 해방도 되기 전에 간암으로 사망한 아버지를 대신해 보따리 장사를 하던 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고등학교 졸업 후 건설회사·호텔 등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현재 일선씨의 아들 나명재씨(45)는 산부인과 의사로 평택시에 개인 의원을 운영한다. 33인 후손 중에는 나일선씨 외에 서울 성수동에서 물류회사를 경영하는 이갑성 선생의 손자 이재현씨를 포함한 7명만이 자수성가해 비교적 안정된 삶을 되찾은 것으로 조사됐다.
광복절이 오면 해마다 150여 명의 독립유공자가 새로 발굴돼 정부로부터 포상을 받는다. 그러나 그 후손은 이미 3·4대 이상 내려와 실제 보상금의 수혜자는 10~20%뿐이다. 또한 보상금을 받지 못하는 유족의 경우는 광복회에서 정식으로 활동할 수 없다. 광복회 정관에 의하면, 본회 등록은 독립유공자 본인 혹은 그 유족 중 보상금을 받은 자로 제한돼 있다. 독립유공자협회 김삼열 회장은 “광복절만 되면 가슴이 답답하다. 정부는 국경일에만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팔아먹고, 결국 종이쪽지 하나 주고 끝낸다”라고 말했다. 2008년 6월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 유족은 6283명이다. 그 중 유족등록증을 소지하고도 보상금을 받지 못한 채 생계 대책도 없는 유족이 1114명이다. 극빈층에 속하는 유족에게만 제공되는 생계지원비 월 25만원을 제외하면, 그들은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한다.
민족대표 33인의 유족은 조상의 명예를 더럽힐까 봐 “잘살고 못사는 것이 조상 탓은 아니다”라면서도 자신들이 물려받은 유산이 ‘가난’이었음을 부정하지 못한다. 매년 광복절이 오면 독립유공자의 남루한 생활이 언론을 통해 조망되곤 한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다. 이번 광복절에도 의례적인 행사를 치르고 내년 3·1절까지 잊힐 것이다. 33인 유족회 권혁방 전 회장이 “우리는 과연 일제로부터 독립했다고 보는가”라고 기자에게 묻고는 이렇게 탄식했다. “일본놈에게 당하나, 같은 한국 사람에게 설움을 받나 똑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