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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지리학자.
조선시대에 지도와 지지를 집대성했으며, 좌표(座標)를 이용한 대축척 지도첩으로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 본관은 청도. 자는 백원(伯元)·백온(伯溫)·백지(伯之), 호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皥)라고 하기도 한다. 〈대동여지도〉의 재간(再刊)과 〈대동지지 大東地志〉의 간행 연도가 모두 1864년(고종 1)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순조·헌종·철종 대에 걸쳐 살았던 사람으로 추정된다. 유재건(劉在建)은 그의 저서 〈이향견문록 里鄕見聞錄〉에서 김정호가 재예(才藝)가 있고 지리학에 밝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최한기(崔漢綺)는
〈청구도 靑邱圖〉를 설명하면서, 그가 어릴 적부터 우리나라의 지도작성에 뜻을 두어 지난날의 지도와 지리에 관계된 책을 읽고 더욱 정확한 지도를 만들기에 고심했다고 적고 있다.
1834년(순조 34) 정상기(鄭尙驥)의 〈동국전도 東國全圖〉와 〈도별분도 道別分圖〉를 보완하여 〈청구선표도 靑丘線表圖〉 2책을 만들었다. 〈청구선표도〉는 필사본으로 일명 〈청구도〉라고도 하는데, 경위선표(經緯線表)를 이용했으며 여기에 역사적인 경계를 덧붙인 것이다. 그뒤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與地勝覽〉을 참고하고, 〈청구도〉에서는 언급되지 못한 인문지리적 설명을 보충하여
〈대동지지〉를 간행했다.
1861년(철종 12)에는 혼자의 힘으로
〈대동여지도〉 22첩을 판각하여 간행했다. 〈대동여지도〉는 약 1/162,000의 축척으로, 남북을 22단으로 나누고, 각 단을 다시 6치 6푼의 간격으로 나누어, 자유롭게 떼고 붙일 수 있도록 만든 절첩식(折疊式) 지도로서 1판이 남북 120리 동서 80리이다. 이것은 서양지도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동양의 전통적인 지도제작법을 집대성한 것으로, 전체를 놓고 붙이면 우리나라의 전도가 된다. 〈대동여지도〉는 〈청구도〉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보완하는 측면도 있다. 이어 전국을 한 장의 지도에 담아 한 눈에 살피기 쉽도록 약 1/900,000 소축척 전도인 〈대동여지전도 大東與地全圖〉를 목판본으로 간행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고 있을 때 그가 〈대동여지도〉의 인본을 조정에 바치자, 나라의 기밀이 누설될 위험이 있다고 여긴 조정대신들이 그를 옥에 가두어 죽이고 판각(板刻)을 거두어 불살랐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청구도〉와 〈대동여지도〉가 온전하게 전해지고 목판의 일부 역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물론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지리학 발달에 큰 자취를 남긴 그의 업적이 당시 인정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대동여지도〉는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에게 가치를 인정받아 일본군 군수물자의 수송과 군사작전에 이용되었다.→
대동여지도
白承哲 글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