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소리길 최 건 차
처서와 백로가 지나고 조석으로 시원한 바람기가 느껴지는 초가을이다. 하지만 한낮의 무더위는 여전히 뜨거운 열기를 쏟고 있다. 이런 무더위를 식게 하려는 듯한 소낙비가 열대지방의 스콜처럼 가끔 내리고는 있지만 달궈진 쇠붙이에 물을 약간 끼 얻는 것 같다. 이 같은 무더위와 혹한을 가리지 않는 우리 서수원신협 일반산악회에서는 매월 셋째 주 화요일에 정기적으로 산행을 하고 있다. 이번에는 그 산행 일자가 우리 민족의 대명절 추석이다. 부득이 한 주를 앞당겨 둘째 주 화요일인 9월 10일 산행을 하게 되었다. 그 목적지는 경남 합천에 있는 가야산국립공원으로, 해인사에 가까운 ‘남산 제1봉’이고 또 다른 코스는 ‘소리길’이라는 홍류동 계곡이다.
나는 2011년 11월 초 가야산을 등반하려고 일단 대구로 내려갔다. 당일로는 어려워 동대구역 버스터미널에서 일박하고 아침 일찍 합천 해인사행 버스에 올라 낯선 곳이라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주변과 산야를 보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승차권을 기사에게 내주려는데, 동대구에서 해인사까지의 승차권을 호주머니에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손에 잡히지 않는다. 바쁘다며 승차권이 없으면 현금을 내고 빨리 내리라는 버스 기사의 야멸찬 독촉에 정신없이 현금으로 계산을 하고 내려야 했다.
찝찝한 심정으로 해인사를 그림자처럼 비켜 가며 가야산으로 향했다. 40여 분이 지났을 때부터 안개가 자욱하게 끼기 시작해 나 홀로라 기분이 스산했다. 점점 짙어가는 안개 속을 뚫고 두 시간여를 올랐을 때 하산하는 등산객 두 분이 보여 인사를 하고 계속 올랐다. 기왕에 내킨 김이라 베트남전 때의 극한 상황을 상기하며 기어코 종주하리라는 다짐을 하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정상이 가까워지는 곳에서 신라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석종여래입상’이라는 석불 앞을 지났다. 두 곳의 철계단과 가파른 암반 너덜 지대를 오른 후에 안개에 가리어 희미하게 보이는 가야산 정상에 올랐다. 치열한 격전으로 적을 물리치고 고지를 점령한 것 같은 승리감이었다.
가야산 상왕봉(1430m)과 칠불봉(1433m)에서 먼저 와 있는 등산객들을 만났다. 그분들은 ‘성주’ 쪽에서 올라왔으니 해인사 방향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나는 10여 미터 앞이 잘 보이지 않은 하산길을 성주 방향으로 잡았다. 안개비에 젖어 미끄러운 철계단을 이리저리 오르고 내리는데 안개 속에서 휑하게 서 있는 오래된 나목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희미한 나목들의 형체가 가야산을 지키는 초병 같기도 하고, 무언가 허공을 향해 울부짖는 망령들의 허상 같아 보였다. 두어 시간을 내려가니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어느 지점까지 왔다가는지 모를 한 무리의 등산객들이 보였다.
오늘은 기억에 가물거리는 가야산을 13년 만에 다시 찾게 되었다. 아침 7시 수원을 출발하여 4시간여를 꼬박 달려 해인사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산을 하이킹하는 팀과 계곡을 트레킹 하자는 팀으로 갈리게 되었다. 나는 애초에 산을 오르려고 했지만, 근래에 들어 계곡에 매력을 느껴 물가 길이 수려하다는 홍류동 계곡의 ‘소리길’를 탐방하기로 했다. 더욱이 가야산의 징크스인지 디지털카메라에 칩이 빠져있는 상태여서 황당했지만, 나이 탓이려니 하고 계곡 트레킹에 전념하기로 했다.
여럿이 가는 뒤를 따라 숲길에 들어섰다. 굵고 높게 치솟아 시야를 압도하는 거목들이 서 있는 금강송 지대를 걷는다. 여느 계곡과 다르게 세미한 듯 우렁차게 흐르는 물소리가 홍류동 계곡을 찬양하는 오케스트라의 연주처럼 들린다. 내 나름으로는 전국의 높은 산과 계곡을 웬만큼 섭렵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곳 소리길을 트레킹 하면서 새삼 계곡의 경이로움에 빠져들고 있다.
장장 7.2km에 달하는 물가 길에는 수백 년이 아니고, 천년이 넘도록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홍류동 계곡을 지키고 있는 노송들의 자태가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수량이 많은 계곡물은 해인사 옆으로 흘러내려 크고 작은 소沼를 만들며 물소리를 내고 있어 ‘소리길’이라는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아름다운 금강소나무들을 기리자는 뜻도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올여름 산행을 잘 마감하자는 뜻으로 적당한 물가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늘 맛있는 반찬과 음료수를 준비해온 지인들과 점심을 잘 먹고 나니 잠깐이라도 물속에 빠져들고 싶다. 그런데 이곳은 상수도 보호구역이라서 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쉬움으로 우리 일행은 돌아갈 시간을 염두에 두고 자리를 잘 정리한 후 남은 시간 해인사에 가보기로 했다.
사찰寺刹에 드나드는 일반 도로가 트레킹 했던 물가 소리길과 가깝게 병행하고 있다. 한참을 더 들어가 절 주변을 둘러보며 아득히 깊숙한 곳에 세워진 천년고찰의 위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사와 문화 예술적인 면면을 살펴보고, 가야산 홍류동 물가를 걸으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경이로움을 안고 수원으로 향했다. 2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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