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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11년(1411년) 식년시(式年試)에 장원급제 해 관계에 진출한 박연. 그 뒤 30여 년간 별 탈 없이 공무원 생활을 하던 박연이었지만, 세종 25년(1443년)을 기점으로 2년에 한번씩 사고를 치기 시작했다. 타성에 젖어서 일까? 아니면 정년퇴직이 가까워지면서 노후생활을 대비하기 위한 포석이었을까?
"30년 동안 아무 사고 없이 공직생활 하는 게 어디 쉬운 지 알아? 딴 애들 봐라. 감사원에 출석부 만들어 놓고 분기별로 출근하더라!"
부패 공무원을 기준으로 본다면, 박연은 상대적으로 괜찮은 공무원이었다. 세종 15년에 있었던 유언비어 유포죄는 일종의 '말실수'라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고, 세종 25년에 있었던 '분경(奔競) 미수죄'의 경우는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었다. 세종 27년에 있었던 박연의 아들 박자형의 마누라 퇴출 사건의 경우도 엄밀히 따지면, 박연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세종 28년에 있었던 '부험(符驗) 분실죄' 역시 처음 나간 해외 나들이에 흥분해 실수를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해외여행 가서 여권분실하고 영사관 찾은 기억들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공무원 생활 중에 있었던 '우발적 실수'라고 변명할 수 있는 '꺼리'가 분명 있었다. 그러나 세종 30년(1448년)에 있었던 사건은 박연의 공무원 인생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부윤(府尹) 박연(朴堧)이 휴가를 얻어 귀향(歸鄕)하더니, 누이가 죽으매 서울에 돌아갈 날이 급하였다고 핑계하여, 나흘만에 장사지내고 드디어 재산을 나누어 짐바리에 싣고 왔사오며, 또 악학 제조(樂學提調)로서 사사로이 악공(樂工)을 데리고 영업 행위를 하게 하였사오니, 청하옵건대 죄를 주소서.
- 조선왕조실록 세종 30년(1448년) 3월 10일의 기록 중 발췌.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을 보였다는 건 공직자의 자세보다는 인간성에 관계된 문제이기에 넘어가겠다. 그러나 악학 제조로 악공을 데리고 영업을 뛰었다는 건 공직자로서는 치명적인 오점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이번에 우리 아버지 칠순이거든? 그냥 맨숭맨숭 노래방 기계 돌리고 놀기에는 좀 그렇지 않냐? 그래도 명색이 판서인데… 어디 괜찮은 밴드 없냐?"
"밴드야 많지… 문제는 그 레벨이 얼마나 되냐는 거지. 괜히 룸빵 도는 오브리들 데려다가 환갑잔치 맡겨봐. 순식간에 분위기 묘해진다."
"그러니까, 묻는 거 아냐. 실력 좋고, 성격 좋고, 행사 경험 많은 애들로 한 팀 추천해 봐."
"옆에 쌈박한 애들 놔두고 왜 나한테 그러냐?"
"쌈박한 애들?"
"전악서(典樂署) 애들 있잖아. 걔들 실력 하나는 먹어주잖아. 그리고 임금님 앞에서 공연 하는 애들이니까 분위기 맞추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힐 테고…"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전악서 애들을 어떻게 불러내? 걔들이 딴따라라고 해도 엄밀히 국가 공무원인데… 걔들보고 알바 뛰라고?"
"응? 너 몰랐냐? 박연 대감한테 돈 좀 쥐어주면 애들 데려올 수 있어."
"!"
그랬다. 박연은 국가 공무원을 데리고 영업을 뛰었던 것이다. 좋게 말하면, 남는 시간에 알바 뛰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이건 공무원 품위유지와 근무에 있어서 명백한 불법행위였던 것이다. 결국 박연은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이른다.
"전하! 국가 지정 오브리… 아니 국가 지정 밴드를 데리고 사사로이 영업을 뛴 박연을 파직 시켜야 합니다! 하물며 사무실에 소속되어 있는 연예인도, 사무실 몰래 지방 나이트를 돌다가 걸리면 위약금을 물어내는 판에 국가 지정 밴드를 데리고 몰래 영업을 뛴다니요!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박연 이눔시키… 이제 하다하다 안되니까 몰래 알바를 뛰냐? 휴… 그래 네들 말대로 해라. 걔 잘라버려!"
그렇게 박연은 파직을 당하게 된다. 우리가 이제껏 알고 있는 박연은 궁중음악을 집대성 한 음악가로만 기억되어지고 있으나, 박연은 음악가이기 이전에 공무원이었다. 정정당당히 과거 시험을 봐 관계에 진출 승승장구 승진에 승진을 거치다. 세종의 눈에 띄어 음악 쪽으로 잠시 외도(?)를 했을 뿐이지 박연의 본업은 공무원이었다. 물론 음악에 관련 된 39편의 상소를 올릴 정도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 모습은 박연의 음악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겠지만, 실질적인 그의 직업은 '공무원'이었다.
그가 단종 원년에 예문관 대제학(大提學 : 정2품직)자리에 오른 것이 그 반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학문을 하는 자들의 마지막 소원이라 할 수 있는 직책. 바로 대제학 자리에 박연이 올랐던 것이다. 음악이 천시되는 조선시대에 명문 양반가 자제가 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각오를 요구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박연은 음악도 하면서, 공직생활도 같이 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박연은 정말 행복한 삶을 살았던 인물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도 하면서, 고위공직자로서의 삶도 동시에 누릴 수 있었다니…. 우리가 음악가로 기억하고 있는 박연이 알고 보면, 고위 공무원으로서의 삶도 같이 살았다는 사실! 역시 공무원은 지상 최고의 직업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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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는 역사 책 에서 ''박연''은
음악가로만 알고 있었던 것.
공무원도 함께 겸했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