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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세상과 예수의 초대
마 11:20-30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0-30 / [저주받은 도시; 눅10:13-15] 예수께서는 이적을 가장 많이 행한 도시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자 이렇게 꾸짖으셨다. 21) `화가 있으라. 고라신아. 화가 있으라, 벳새다야! 너희에게 베푼 이적을 악한 도시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부끄러워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날에는 두로와 시돈이 오히려 너희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23) ㄱ)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네게 베푼 이적을 소돔에서 베풀었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날까지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다. (ㄱ. 사14:13-15) 24)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날에는 소돔이 오히려 너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25) [그렇습니다, 아버지;눅10:21-22] 그때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여, 스스로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이 진리를 감추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27)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맡기셨습니다. 아버지만이 아들을 아시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이려고 택한 사람들만이 아버지를 압니다. 28) [내게로 와서 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ㄴ)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ㄴ. 렘6:16)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은 권능을 많이 행하신 고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아 책망하신 후, 예수님을 따라온 사람들을 위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그 때에 책망하시되(20-24)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주 사역지인 갈릴리호수 근처의 도시들입니다. 따라서 어떤 성읍들보다도 예수님의 이적을 많이 보고, 복음도 많이 들었습니다(20).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거부했고 복음도 듣지 않아 책망을 받았습니다(21). 책망을 듣고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심판이 옵니다(24). 이 진리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는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요 3:16). 하지만 거부하면 무서운 심판을 받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7-18)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25-27) 우리 주변에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 즉 성공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유는 예수님 없어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보혈에 관심이 없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을 어리석은 일로 생각합니다.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숨겨진 진리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기에 예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 곧 겸손한 자들에게는 구원의 길을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입니다(26).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28-30) 본 단락은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평화를 주는 말씀입니다. 천천히 3번 이상 읽으면 주께서 주시는 평안이 이슬비처럼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존재임을 아시기에 내게로 와서 쉬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쉼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멍에 곧 자신의 모든 문제와 고통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평안이 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는 것은 내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 다 내려놓은 후, 주님께서 주신 멍에를 메지 않으면 잠시 쉼은 있어도 재충전이 되지 않습니다. 재충전 없는 쉼은 진정한 쉼이 아닙니다.
적용: 당신이 지금 메고 있는 멍에는 무엇인가요? 그 멍에를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쉼을 누리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을 쓰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겠다고 하면 하나님은 나를 쓰십니다. 우리는 중요한 사람만이 뭔가를 성취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을 더 많이 쓰셨습니다. 예수가 우리를 멋진 인생으로 초대하십니다. “아직 자리가 남아 있다”는 심오한 신학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심오하고 신학적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오기를 바라십니다. 그는 우리 곁으로 다가와 언제나 한결같은 그 말을 나지막이 건네십니다. “아직 자리가 남아 있다.”
< 설 교 >
실망속에서도 감사하십시오
마 11:20-26 / 문기태 목사(창원침례교회)
감사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1차원적인 감사는 조건부 감사입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거나 더 많이 갖게 되면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되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할 때에 감사할 수 있는 수준으로 비교적 감사가 희귀할 수 밖에 없습니다. (if 감사) 2차원적인 감사는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 받은 것 중에 일부를 드리는 감사입니다. (Because 감사) 삶 속에 일어난 긍정적인 변화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기뻐하는 감사입니다. 3차원의 감사는 불행을 당해도, 힘들고 어려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수준입니다. (In spite of 감사)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당장에 나빠 보여도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리라는 믿음으로 드리는 감사입니다.
어떤 청년이 더운 여름날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한참 걸어서 햄버거 가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햄버거 하나를 사서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서 땀을 식히며 먹고 있었습니다. 이때 자동차 한대가 멈추더니 한 여자가 내려서 햄버거를 사서 자동차 안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청년은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나도 저렇게 옆에서 챙겨주는 비서가 있어 차 안에서 햄버거를 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자동차 안의 청년은 벤치에 앉아있는 청년을 보며 부러워합니다. '나도 저 청년처럼 다리가 건강해서 햄버거를 사먹으러 걸어올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이처럼 남과 비교하며 자기에게 없는 것만을 생각하며 사는 인생은 불행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교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저축하여 아파트를 장만했습니다. 얼마나 행복한지 감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친구 집에 초대받아서 가보니 자기집 보다 넓고 좋은 아파트에 사는 것입니다. 그 순간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상대적 빈곤감에 사로잡혀 행복이 사라졌습니다. 감사가 메말라 버렸습니다. 1차원의 수준에 머무르며 살기 때문입니다.
2차원의 감사를 하는 사람들은 남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바라보고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건강 주신 것이 감사하고 행복한 가정을 주신 것이 감사하며 기도를 응답하신 것이 감사합니다. 일이 형통하는 것을 감사하고 사역이 순조롭게 열매를 맺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나의 삶 속에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들을 바라볼 때 행복이 밀려오고 감사가 넘칩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1차원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감사가 메마른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2차원의 수준에서 살아갑니다. 믿음의 눈으로 늘 하나님을 바라보며 은혜를 깨닫고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삽니다. 훨씬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높은 수준의 인생이 있습니다. 3차원의 수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수준입니다.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는 인생입니다. 평안할 때 뿐 아니라 시련을 만날 때도 감사하는 삶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어 문제가 풀려갈 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꼬인 문제가 풀리지 않을 때도 감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아 선물이 넘칠 때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잃고 내려갈 때도 감사하는 인생입니다.
성경은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윗의 어떤 면이 남달랐을까요? 하나님은 다윗의 어떤 면을 보고 마음에 쏙 들어서 초라한 목동에 불과한 다윗에게 온갖 귀한 것을 아끼지 않고 다 주셨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다른 사람들 보다 감사의 감각이 탁월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감사가 충만한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다윗은 형들에게 무시당하며 들판에서 양들과 어울리며 살았습니다. 그래도 다윗은 감사했습니다. 홀로 지낸다고 외로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열심히 감사했습니다. 어느 날 사무엘 선지자가 찾아와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는커녕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사울 왕에게 쫓기고 시기심에 사로잡힌 많은 신하들에게 모함을 당합니다. 찬 이슬을 맞으며 황무지에서 짐승처럼 지냅니다. 이웃나라에 피신하였다가 위기를 맞고 미친 사람 흉내까지 냅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세월을 아슬아슬하게 쫓기며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 기간 동안도 감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극심한 역경에 처하고 고난을 극복하며 하루하루를 살았지만 다윗은 불평하기는커녕 날마다 기도와 감사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계속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시편을 읽어보면 다윗이 최악의 순간에 처했을 때 조차도 하나님께 주옥 같은 감사의 시를 써서 올려 드린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57:9)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24)
다윗은 평안할 때 보다, 좋을 때보다, 환란의 때, 어렵고 힘들 때, 더욱 감사하며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3차원의 감사생활을 하였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최고의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다윗처럼 감사의 감각을 개발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본받을 3차원의 감사의 정상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3차원 감사의 대표적인 모델입니다.
예수님은 전도 여행에서 실패의 쓴 맛을 경험하셨습니다. 고라신과 벳세다에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시면서 전도를 하셨지만 이상하게도 그 고을의 주민들은 꿈쩍도 안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기대하였지만 회개하고 믿음을 갖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섭섭하셨을까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마 11:21)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에게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이 크게 실망하시는 것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섭섭하셨는지 다시 말씀하십니다. (마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치솟을 셈이냐? 지옥에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 가버나움에서 행한 기적들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도시는 멸망하지 않고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처럼 크게 실망하고 섭섭한 감정에 계속 붙잡혀 있지 않으시고 곧바로 마음을 가라 안치시고는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기도를 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주재자이신 아버지, 이 일을 지혜 있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는 드러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정말 기분이 가라 않고 화가 솟아나는 상황, 실망감이 밀려오는 섭섭한 상황에서도 감사하십니다. 감사의 이유를 찾아내십니다.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여기는 어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배척했지만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인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어 있음을 인정하고 기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얼마나 탁월한 감사입니까? 여러분 실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처럼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섭섭한 감정이 밀려올 때도 예수님처럼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왜 중요한 순간에 감사에 실패하는지 아십니까? 기분 따라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여지는 대로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보여지는 것만 보지 말고 보아야 할 것을 보아야 합니다. 느껴지는 대로만 느끼지 말고 기분을 초월하여 느껴야 할 것을 느껴야 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속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실패같이 보여지지만 실패가 아니라 성공인 경우가 있습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위기에 처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오히려 잘 되어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흔들리지 않는 사람만이 3차원의 감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수준 높은 감사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전적인 신뢰를 하지 못하면 3차원의 감사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자신을 따르는 오 천명을 먹일 일을 앞에 두고 손에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들고서도 감사를 하셨습니다. 너무 적다고 불평하시지 않고 감사를 하셨습니다. 정말 부족한 중에 실망하시지 않고 진심으로 감사를 하셨습니다. 난처한 상황에 처하셨지만 모든 이들이 보는 가운데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부터 하셨습니다. 그러자 정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 천명이 배불리 먹고 열 두 광주리나 남기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제자들과 함께 하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도 감사를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하기 15시간 전입니다. 몸서리 쳐지는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감사하십니다.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여러분, 하는 일이 잘 되고 있습니까? 맡은 사역이 잘 되고 있습니까? 물론 잘 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는 일이 형통하고 감당하는 사역에 열매가 많이 맺혀져 기쁨이 충만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일이 잘 안 풀리고 맡은 사역이 잘 안 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세미나와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을 때는 금방 큰 변화가 일어나고 열매가 주렁주렁 맺힐 것 같았는데 막상 사역의 현장에서 사역을 해보니까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리더십을 인정하지 않고 등지고 떠나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열심히 전도해 보지만 열매가 빈약하거나 아예 없습니다. 새 가족을 사랑으로 섬기고 열심히 보살피지만 한 두 번 교회 나오고는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목자 목녀로 헌신하여 목장을 잘 이끌려고 하는데 목원들이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잘 모이려고 하지도 않고 리더십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망이 절로 터져 나옵니다. 도망가고 싶고, 괜히 시작했다고 후회도 되고, 별의 별 생각이 다 들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불평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실 수 있습니까? 실망스러운데 어떻게 기뻐할 수 있습니까? 섭섭함이 밀려오는데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사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언제나 선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최선을 주신다는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기 바랍니다.
베토벤의 생애는 한마디로 말해서 불행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베토벤의 아버지는 아들의 음악적인 재능을 인정하면서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대문에 어린 베토벤은 새벽 동이 틀 때까지도 피아노 앞에 붙들려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베토벤은 이러한 고역 때문에 차츰 음악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만은 베토벤에게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베토벤의 나이 17세가 되었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일하게 위로를 주던 어머니를 잃고 베토벤은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28세가 되면서 베토벤은 청각을 잃기 시작합니다. 음악가에게 있어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그로 인해 베토벤은 완전히 정신적 혼란에 빠지고 베토벤은 비탄에 젖습니다. 그러나 베토벤은 가장 위대한 음악들을 작곡했습니다. 가장 위대한 음악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실망하고 좌절하며 다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실망을 거절하고 좌절과 포기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실망을 이기는 유일한 힘은 감사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대한 힘은 인간이 주는 그 어떠한 힘보다도 큽니다. 실망을 거절하고 좌절을 거부하며 감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새 힘을 주십니다.
여러분 우리도 감사의 수준을 높여 봅시다. 1차원에 머무는 사람은 2차원으로, 2차원에 머무는 사람은 3차원으로 수준을 높여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의 수준을 높이면 하나님께 받을 축복의 수준도 올라갑니다. 믿음의 수준도 덩달아 올라가고 임하는 은혜의 수준도 높아질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의 수준을 높이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실패로 여겨지던 사역이 성공으로 바뀌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원수도 친구로 변합니다.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모두 감사의 수준을 높여 기적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큰 은혜 받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마 11:20-24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전하시며 병든 이들을 고치시는 그의 사역 속에서 그가 부딪치신 장벽과 그로 인한 비통함의 일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 앞부분에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20-21 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하신 것은 저주하는 말이 아니라 비통해 하며 경고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섯 도시의 이름이 나옵니다. 먼저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의 북서쪽에 위치한 도시로 예수님의 "본 동네"(마9:1)라 불리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세금을 내셨습니다(마17:24), 마4:12-17은 이 도시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에 유익합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여기서 우리는 가버나움이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의 주된 활동무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외치시며 복음전파의 사역을 시작하신 곳도 이곳임을 볼 수 있습니다. 자부심이 강하고 야심이 컸던 도시였다고 합니다.
고라신은 갈릴리 호수 북단으로부터 북서쪽으로 조금 들어가 있었던 도시였고 가버나움으로부터는 북쪽으로 약 2마일(그러니까 3.2킬로 정도) 떨어진 곳, 걸어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습니다. 벳새다는 가버나움에서는 동쪽에 위치한, 갈릴리 호수 북단에 있던 고기 잡는 마을이었습니다. 요1:44에서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적어도 4분의1을 배출한 동네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에 관한 기록은 별로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본문 20-21절에서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한 것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이 두 도시에서 많은 사역을 하셨으며 그 두 도시는 가버나움과 더불어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사역의 중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역을 행하신 고라신과 벳새다였지만 그 두 도시가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노골적으로 반대했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관심했고 따라서 무반응이었습니다. 무관심은 종교를 태워 죽이지는 않으나 얼어 죽게 만듭니다. 무반응은 신앙을 탄압하지는 않으나 질식시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의 죄는 그들이 누린 특권에 따르는 책임을 망각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가장 많은 권능을 행하셨다는 것은 그곳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하심을 확실히 믿었어야 하는 것이고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스스로의 행실들을 돌아보며 회개했어야 함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개라고 하는 일차적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비통해하시며 책망하신 것입니다. 본문 21-22절을 봅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예수님께서는 고라신과 벳새다의 완악함과 죄를 드러내기 위하여 두로와 시돈을 끌어들여 언급하신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보다 북쪽에 있는 지중해 연안의 이방도시들이었습니다. 그 두 도시는 수세기에 걸쳐 크고 강한 도시들이었지만 성경은 그 두 도시를 악한 도시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사23:4) 했습니다. 사23:7-11에 따르면 두로와 시돈은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사23:7)이었습니다. "면류관을 씌우던 자요 그 상인들은 고관들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었던 두로"(사23:8)라고 한 것으로 보아 명예와 부귀와 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온갖 영화를 누리며 교만에 빠져있는 도시들이었고(사23:9) 그 성들은 견고했었습니다(사23:11). 예언자 요엘은 두로와 시돈에 관한 더욱 나쁜 기억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너희가 내 은과 금을 빼앗고 나의 진기한 보물을 너희 신전으로 가져갔으며 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그들의 영토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욜3:5-6)
그러나 그렇게 악한 두로와 시돈이었지만 만일 예수님께서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행하신 권능을 거기서 행하셨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21절)하는 것은 구약에서는 그렇게 행하는 사람이 그가 지은 죄에 대해 깊이 후회하고 슬픔하며 회개하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표하는 행위였습니다. 고라신과 벳새다는 예수님께서 그토록 많은 권능을 행하여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죄와 책임은 두로와 시돈의 죄와 책임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22절) 말씀하신 것입니다.
21-22절에서 고라신과 벳새다를 책망하신 예수님은 23절에서는 가버나움을 책망하십니다. 가버나움의 완악함과 죄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소돔을 언급하십니다. 소돔은 그 악함과 타락과 교만과 완악함의 대명사와도 같은 도시로 더 설명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셨다면 소돔은 망하지 않고 아직 존재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가버나움은 그토록 많은 권능을 보고서도 완악하고 교만하여 믿고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심판 날에 소돔보다도 더 견디기 힘든 형벌에 처해질 것이라 경고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23-24절).
오늘 본문말씀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권능을 많이 행하신 곳일수록, 즉 진리의 빛을 많이 받고 은혜를 많이 입은 이들일수록 그 하나님의 은혜에 상응하는 회개의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회개의 응답이 없을 때에는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면할 수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마4:17에 보면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처음부터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회개 없이는 하나님나라를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첫 발걸음입니다. 회개는 악한 행실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단지 자기가 저지른 어떤 악행에 대하여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온 삶의 방향이 통째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죄 가운데 빠져있던 삶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고 매사에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적인 삶이며 은혜 입은 이의 도리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가버나움과 고라신과 벳새다가 주님께서 가장 많이 권능을 행하신 지방이라면 오늘날 하나님의 복음사역이 가장 힘있게 이루어졌고 그 은혜가 가장 충만한 곳은 어디겠습니까? 우리 한국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복음이 전해진지 120년이 안 되는 사이에 교회가 이렇게 많이 세워졌고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4분의1에 이르며 주일마다 3부, 4부, 5부, 6부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허다하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를 많이 하도록 성장한 나라가 어디 또 있습니까? 외국에서 상당기간 살기도 하고 여러 나라를 다녀보았지만 우리나라만큼 길거리에서건 지하철 안에서건 그렇게 전도하는 사람을 많이 만나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만큼 24시간 라디오로 TV로 인터넷으로 그것도 자국어뿐 아니라 여러 외국어로 선교방송이 이루어지는 나라도 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책이 우리나라만큼 많이 만들어지고 팔리는 나라가 없습니다. 전세계의 성경 제작 판매의 15%가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집니다. 미국에서 1년간 제작, 판매되는 성경이 400만부 정도인데 우리나라에서 제작, 판매하는 성경부수는 600만부에 달합니다. 우리나라가 지상 최대의 "하나님의 말씀 반포국"이 된 것입니다. 대한성서공회는 세계 대부분의 언어로 성경을 제작하여 전세계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은혜는 직접적인 교회의 성장과 선교활동의 확대에서만 충만한 것이 아닙니다. 일본의 강점과 탄압으로부터 독립을 주시고, 공산군의 기습남침으로 인한 전쟁의 참화와 공산화의 위기로부터 구해내시며, 한강의 기적이라는 경제부흥을 이루게 하시고, 일본을 제외하고는 동양에서 유일하게 올림픽과 월드컵경기를 모두 유치한 유일한 나라로 우뚝 서며 세계 4위의 스포츠강국으로까지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우리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권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믿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나라는 현대에 와서 하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나라라고 믿을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가 옛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처럼 회개하지 않아 주님으로부터 책망 받고 화를 당하며 잊혀진 나라 황폐화되거나 지도에서 사라지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어느 나라사람들보다도 은혜를 많이 받고 진리의 빛을 많이 받았으면 그만큼 더 분명하고 철저한 회개와 삶의 변화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진리와 권능의 은혜를 그 어느 나라보다도 많이 받은 만큼 그 책임도 더 크며,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때 받을 심판과 재앙도 더 엄중하고 견디기 힘들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기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한국사회는 지금 이대로 계속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화 있을진저 한국교회야, 화 있을진저 대한한국아"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회개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이제부터 주저앉기 시작할 것이며 한국이라는 나라는 역사 속에서 침몰하고야 말 것입니다. 이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남 아닌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진정 회개하는 주의 백성들 됩시다. 회개하는 믿음으로 교회를 변화시키고 나라를 살립시다. 이것은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가장 급한 일입니다. 피해서도 안 되고 미루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이 시대에 이 세상을 위하여 계속해서 더욱 크게 더욱 귀하게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는 한 우리나라는 번영할 수밖에 없고 안전하고 행복한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회개 속에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개인적, 교회적, 사회적 국가적 어려움을 푸는 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기뻐하시고 그 어떤 제사보다도 통회하는 마음을 받으시며 회개하는 이에게 넘치는 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불신에 대한 경고
마 11:20-24 / 박세갑 목사
오늘 본문 말씀은 누가가 예수님의 후기 유대 사역을 하시며 70인 제자를 파송하시며 하신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눅10;13~16). 그런데 마태는 이 말씀이 바로 앞에 있는 말씀과 같은 주제이기에 여기에 같이 연결시킨 것입니다. 앞의 문단에서 마태는 주님께서 비록 사람이 진리에 순응하지 아니할지라도 그것이 지혜롭고 선한 것이 입증된다면 그것은 참 진리라는 것을 소극적으로 말씀하셨고, 여기서는 진리에는 순응하지 않으며 자신을 하늘까지 높이려는 착각에 빠진 자들에게 소돔 성이 받았던 심판 보다 더 엄청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경고하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 이 세 도시를 예로 설명하십니다. 주님께서 고라신을 언제 방문하셨고 얼마나 많은 사역을 하셨는지 성경이 침묵하기에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도시를 지나셨고 그곳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그곳의 많은 것에 관하여 주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두 번째로 벳새다를 생각하면 성경에는 주님께서 그곳을 자주 방문하셨고 수제자인 베드로와 안드레, 빌립이 바로 이곳 출신으로 벳새다에서 주님을 따라 나섰음을 알게 합니다.(요1;44) 그곳에서 주님이 그들을 부르셨고 그들이 주님께 순종하여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회개하였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바라보고 그것을 증거 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또 가버나움을 생각해 봅시다. 본 마태복음의 (4;12~16)을 보면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도다. 하였느니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버나움에서 사셨습니다. 그곳에서 사심으로 자신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4;17)에는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세례요한과 같은 메시지를 선포하시며 그곳에 머무셨고 그러므로 그곳 사람들은 주님의 은혜롭고 부드러우며 말할 수 없이 달콤한 주님의 말씀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던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그 도시들을 바라보시며 책망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책망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노여워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불순종하고 배척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이유입니다. 주님께서 회개하라 하신 것은 그들이 마음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변화되어야 사고가 변하고 사고가 변화하면 행동이 변화됩니다. 사람의 신념은 그의 행동을 지배하는 영감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회개하라.” 하신 것은 마음을 바꾸라고 하신 단순한 말씀이지만 그 속에는 깊은 통찰력이 들어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성품이 변하고 행동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이고 주님은 바로 그 점을 사람들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올바른 순서입니다. 사람은 생각이 바뀌고 그에 따라 행동이 변하고 마침내 성품까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회개하라.” 하신 말씀에는 이렇게 올바른 방향으로 성품까지 변화해야 한다는 깊은 뜻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하신 말씀은 마음과 함께 성품까지 하나님의 나라에 복종하는 방향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당시 뿐 아니라, 오늘 날에도 사람들의 삶이 잘못되는 근본 요인은 바로 하나님을 자신의 모든 일에서 제외시키는 ‘불경건’입니다. 고라신이나 벳새다, 가버나움뿐 아니라 그 당시의 모든 도시들이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주님은 주님이 오심으로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천국을 보여주고, 천국으로 인도하고, 천국에서 너희들의 왕이 되기 위하여 여기에 있다. 너희는 마음을 이 나라를 향하여 돌이키라.’ 주님은 이것을 위하여 그들의 온갖 질병을 치료하셨고 그들 가운데 가셔서 사셨고 그 속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에서 권능을 많이 행하심으로 그들에게 천국의 실존을 보여주시며 그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천국을 향한 걸음을 시작조차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책망하셨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꾸짖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꾸짖을 때, 때로 정말 분노하여 호통을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꾸짖으심은 사랑의 꾸짖음입니다. 주님은 지금 그 도시가 제 멋대로 행동하므로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를 예고하시며 통곡의 호소를 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이 예언의 경고는 실제로 역사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고라신은 자취를 모르고 벳새다의 위치도 어디인지 학자들의 견해가 많이 다릅니다. 2000년 전에 그렇게 번성하고 부유했던 고라신과 벳새다는 회개 하지 아니하므로 오늘날에는 그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앙은 법에서 벗어남으로 임하게 됩니다. 사람이나 도시가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나 도시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주님은 24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오늘 본문에서 두로와 시돈을 고라신과 벳새다에 비교하시고 소돔 땅을 가버나움에 비교하십니다. 구약 역사는 소돔이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멸망되었음을 우리에게 알게 합니다. 그러나 소돔보다 더 나뿐 경우를 가버나움에서 보게 될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가버나움이 소돔보다 더 타락하였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소돔이 나의 한 일을 보았고 나의 빛을 받아들였다면 나의 말을 들었다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책임은 언제나 알려준 계시의 양만큼 생긴다.’ 고 가르쳐 주십니다. 가버나움은 소돔보다 더 추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소돔은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어도 멸망했는데 주님을 알고 오신 주님의 계시를 받은 가버나움은 훨씬 더 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평가하실 때 그 개인이나 도시가 받은 계시의 양에 따라 측량하십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 계시의 말씀을 받았고, 그 권능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거절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말씀도 능력도 경험하지 못하여 아주 저속한 수준으로 타락한 사람이나 도시보다 더 무서운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평가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현재와 주님이 비교하신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을 비교해 봅시다. 우리는 그 도시들이 주님을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사셨던 당시의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주님은 그들에게 한 사람의 무한히 뛰어난 교사였습니다. 순결한 삶과 영광스러운 아름다움, 그리고 완벽한 온유함으로 자신의 말씀을 실천하여 보이셨고 모든 사람들 위에 뛰어나신 인격과 신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졌던 모든 지식과 지혜보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의 문화와 기기들이 우리 가운데 말씀이 넘치게 만들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2000년 교회의 역사 속에 수많은 증인들의 증언을 가지고 있고 주님의 부활로부터 계시된 의인의 부활까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당시의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일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요14;11~12)에서 잡히시기 전에 주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세우신 교회에 영적으로 임재하심으로 인하여 풍성한 생명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교회를 통하여 주님 당시에 행하셨던 것보다 더 경이롭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 가장 분명한 예가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나와 여러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고라신과 벳새다와 가버나움의 사람들은 주님의 함께하시며 가르치신 많은 기적과 은혜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지만, 우리 안에 주님의 임재로 인하여 내적 삶이 새롭게 변화되고 그 새롭게 하는 능력을 따라 그 외적인 삶을 새롭게하는 변화가 이루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상의 기적입니다. 최상의 기적은 짐승처럼 사회의 밑바닥에서 썩어져 죽어가던 한 인간이 주님의 영과 만나고 그가 가는 곳마다 세상을 복되게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이 지금도 우리의 곁에서 일어나고 있고 또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들 개개인이 주님이 가르치신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라 하신 말씀에 복종하면 그것은 우리들 개인적으로 또 전 사회와 국가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준비가 된 것이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가 사는 도시와 마을과 국가가 하늘나라의 축복이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증거와 사역과 가르치심을 외면하면 우리는 우리의 살고 있는 이 사회와 국가에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우리의 가정과 사회에서 슬픔이 기쁨을 내쫒고 한숨이 노래를 그치게 하며 죄가 우리의 곁으로 다시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의 의무인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의 살고 있는 마을과 도시와 사회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개인의 뜻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것이 언제나 우선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법이 이루어지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삶의 영역인 가정과 마을과 사회를 주님의 법과 일치하게 이끌고 그의 은혜로우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온사랑교회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회 개
마 11:20-24 / 최종천 목사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씻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회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알고 인정하며, 고백하여 씻기 원하고 그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눈물로 소원하는 것입니다.
각오와 결단으로 새로운 방향을 결정하고 삶에서 그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개념으로 회개란 회심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주님을 모르고 인정하지 않았던 인생이 주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또 회심하여 주님 앞에 돌아온 백성이 이전의 죄악의 습성을 끊지 못하여 회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되는 죄악과 욕심의 누추한 상황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그 삶을 돌이키는 생활의 회개도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항상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영적으로 부흥하고 그 삶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였던 시기는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회개의 운동과 역사가 활발히 임하였던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자신의 죄의 인정과 고백, 그리고 방향의 전환과 실천이라는 회개를 통해서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회개를 통해 하나님은 그 백성을 축복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그 이후에 축복하셔서 사용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만드시고 만들어진 상태에서 축복하셔서 그를 통해서 주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선택된 이후에 훈련과 고난을 받았고 그리고 성령충만의 역사를 체험한 후에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회개를 통한 돌이킴과 자격을 갖추기 위한 연단, 그리고 성령충만한 은혜의 모습이 이루어진 후에 축복하셔서 사용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시고 말씀을 선포하셨던 곳들이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욕심과 소욕대로 가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 그들을 준엄히 책망하시며 인생들에 대하여 회개를 촉구하시는 장면입니다.
그 당시에는 부유하고 여건이 나으며 상대적으로 유족했던 뱃새다와 고라신과 예수님의 기적을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이 목격했던 가버나움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볼 때 예수님은 그들이 심판의 날에 두로와 시돈, 그리고 하나님 앞에 멸망을 받았던 대표 격인 소돔 땅보다 더러운 고통을 겪을 것을 준엄히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눈에는 이미 진노의 불길이 그들에게 놓여진 것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은 이 회개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초신자로서의 삶을 벗어나 헌신자가 되기 위하여 또 예수그리스도를 처음 내 마음에 모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나의 새로운 변화된 삶을 위하여 우리들에게 있어서 회개라는 것은 너무나 큰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성경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봅니다.
첫 번째 회개란 무엇이며, 우리는 왜 회개함이 필요할까요?
회개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말미암아 내 죄와 그 죄로 인한 멸망이 보이고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내 마음에 느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고 주의 은혜의 세계로 전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즉, 회개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어찌하여 내 자신의 죄를 볼 수 있으며 내 자신의 부족한 점을 볼 수 있겠습니까? 어찌 내 죄악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여 씻기 원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원하여야 나의 죄악이 보입니다. 나의 죄악이 보이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요, 감사입니다. 따라서 나의 죄의 문제를 청산해야 합니다. 죄에서 벗어나기 위한 축복의 기회를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죄와 그 죄로 인한 멸망이 눈에 보이며 죄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내 가슴을 채울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더 이상 죄의 더러운 고통 속에 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세계로 편입하고 싶어 하는 은혜와 열망이 있을 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도 괜찮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세계로 옮겨가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없고 내가 두려워서 그 생활 속에 더 이상 발 담글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너무 기쁘고 감사하고 가야만 하기 때문에 달려가고자 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죄가 지낼만한 것이 아니라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상태요, 하나님의 은혜가 없어도 살 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도무지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이와 같은 은혜의 백성이 이루게 되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다시는 죄를 쳐다보고 싶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야 진정한 회개입니다.
더욱이 내 죄에 대한 더러움을 깨달아서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면 우리는 진정한 회개를 이룰 수 있습니다. 회개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내가 그렇게 좋아하고 어느 날 자부하고 있던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난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면 그것을 버려야만 된다는 마음의 반응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이제까지 자랑스러워하던 것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문벌, 학벌, 가문에 관한 자랑거리,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제까지의 삶속에서 있었던 열심과 열정, 그와 같은 모든 것들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데 방해거리로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고상한 지식 앞에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가치 없이 버리고 그는 주님의 은혜로 회개하는 대역사의 전환을 이루게 됩니다.
회개란 방향의 전환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돼’라는 것을 마음속에 깨닫고 내 삶의 방향의 전환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 때 내 자신의 누추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큰 은혜를 보았을 때 내 자신의 누추함을 깨달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비로소 내가 이와 같은 상태를 벗어나야 된다고 마음속에 간곡하게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회개의 국면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추구하고 자부하고 휘둘렀던 그 모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격, 우리의 지성, 자부심, 소유, 권한과 권력, 그 모든 것들이 봄날 바람에 흩날리고 떨어지는 꽃잎과 같은 사실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느끼게 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 없이는 나는 가장 헐벗은 영혼일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자비에 무릎 꿇고 구걸이라도 하여 주님의 자비를 반드시 체험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게 되고 그 때 우리는 회개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한 사모함이 결국 우리를 회개의 자리로 인도하고 그 회개함을 통해서 우리는 은혜와 축복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함이 축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우리가 회개했을 때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탐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충신이었던 장군 우리아를 계교를 통하여 죽게 만듭니다.
우리아를 취하려고 마음에 계교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 때 이 다윗왕은 선지자 나단의 준엄하고 통렬한 책망을 받습니다.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선지자의 이와 같은 책망을 그는 과감히 받아들입니다. 뼈가 녹는 고통 속에서 그는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는 우슬초로 자신의 죄를 정결케 하기를 소원하며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며 그 구원의 은총을 누리는 자들이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하였을 때 뼈가 녹는 고통에서 절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구원의 즐거움을 사모하였던 그였기에 구원의 은총이 사라진 삶은 이 세상에서 죽음을 능가하는 고통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함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셔서 그에게 주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애와 자비를 입게 된 것이죠.
회개라는 것은 우리의 죄를 깨닫고 죄악을 보며 그 죄가 가져 올 너무나도 두렵고 무서운 죄의 결과를 마음속에 보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두 번째 우리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되는가? 회개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비추어 본 내 자신의 더러운 죄악과 부끄럽고 무지한 고집과 악행입니다.
내 고집, 내 무지함, 내 악행, 하나님의 은혜에 비추어볼 때 너무나 더럽고 주님 앞에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를 우리는 비교해봅니다.
세리는 너무나 두려워 하나님 앞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하나님 나는 부족한 자요, 불쌍한 자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간구해야 될 자입니다.”라고 그는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 너무나 처참한 심정으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는 의를 행했고, 선을 행하며, 나는 십일조를 꼬박꼬박내고, 나는 금식을 하며 나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아름다운 일을 한다.”고 사람에게 소리가 들리도록, 그리고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 앞에 자랑하며 자신의 의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작 하나님 앞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세리의 기도를 더욱 더 긍휼히 여기심을 우리는 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애써 살면서 회개하며 눈물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어그러진 사람들은 오히려 회개할 것이 없어 하나님 앞에 고백조차 하지 않는 이와 같은 어리석음을 겪게 됩니다.
맑은 거울로 보면 우리의 더러운 티끌이 보여 우리의 티끌을 씻기 원합니다. 그러나 흐린 거울로 보면 오히려 우리의 티끌이 보이지 않아서 우리는 마치 자신 있는 자처럼 내 마음에 스스로를 자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잘못을 아는 것과 잘못조차 모를 정도로 무지함과 내 고집가운데 빠져있음의 차이를 봅니다. 우리는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죄악으로 인한 이중성과 나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대한 회개를 이루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은 보되 내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탓하고 나 자신의 죄악에 대해서는 관대한 우리 인생의 본성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어느 날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것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질 때 진정한 회개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다른 이들의 허물이 보이지 않고 내 허물이 보일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송하고 감사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시기 원하는 이와 같이 애틋한 하나님께 대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억울한 것이 있으면 회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감사하며 나의 부족함을 깨달아 고칠 수 있음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본질을 외면하고 다만 표피적이고 감상적인 면에 돌이킴만으로 모든 징계를 면제받으려는 악함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감정의 토설뿐 아니라 구체적인 방향전환과 삶의 변화입니다. 너무나 많은 경우 회개의 실패하는 경우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입니다.
우리 가끔가다 보면 정말 하나님 앞에 내가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내가 부족하고 하나님 앞에 내가 잘못 살아왔다는 이와 같은 마음의 깨달음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내 마음이 하나님 앞에 너무너무 가련해지며 하나님 앞에 너무너무 죄송해서 하나님 앞에 정말 죄를 씻고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해주시고 나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시며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나를 덧입혀 주시옵소서.”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요.
눈물이 흐르고 우리가슴이 찢어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통회와 통곡의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 되면 우리 마음속이 하나님의 은혜로 숙연해져요.
‘내가 정말 이와 같은 죄를 가지고 살았구나! 그리고 내 죄가 씻어지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내가 이렇게 후련해지는구나! 정말 죄를 토설하고 씻어졌구나!’ 라고 생각하는 후련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좋은 거죠. 그러나 거기까지면 안돼요. 그것으로 회개가 종결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서는 일어나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삶을 지속하고 유지해야 됩니다. 우리가 회개해서 실패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정서적이고 표피적이며 감정적인 돌이킴만으로 내가 회개하고 모든 징계가 멈춰 섰다고 생각하는 착각 때문입니다.
실컷 울고 나서 후련하다고 회개가 종결됐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요즘 보니까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체중조절을 하시려는 분이 꽤 계시는 것 같아요.
자매님들에게는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릴 수가 없고 우리 형제님들에게 가끔가다 이런 말씀드릴 때가 있습니다. 형제님들 보면 운동도 하고 식사조절도 하고 절제하고 애를 써서 체중조절에 성공하신 분이 계신 것 같아요. 그래서 악수하면서 “아휴, 체중이 많이 빠지신 것 같아요.” 그러면 굉장히 기뻐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도 내가 의지력을 가지고 성공했다, 목사님도 알아주시니 감사하다.’ 이런 마음으로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과연 오래 갈까요? 시간이 지나면 또 옛날로 돌아온단 말이에요.
오래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자, 따라서 합시다.
“꾸준히, 끝까지”
다시 돌아와도 꾸준히 끝까지란 말입니다.
우리 회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마음속에 어떤 것을 느끼고 잘못됐다고 인정하고 고백하면 내가 그것을 내 삶의 실천으로 살아야 되는데 꾸준히 그리고 끝까지여야 합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내 삶의 습관과 내 삶의 모든 형태와 구조자체가 그와 같이 이루어질 수 있어야 되죠. 그래서 삶에는 끊임없는 쟁투가 필요합니다.
가다보면 또 엎어지기야 하겠죠. 또 일어나는 거죠.
우리는 이와 같이 회개라는 것은 일시적인 순간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시작되어 완결될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청년의 회심의 실패를 봅니다.
이 청년은 부자였어요. 아주 바르게 살았습니다.
“예수님, 내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십계명을 지켜라.”
“예, 어릴 때부터 잘 지켰어요.”
“그러면 네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오라.”
이 청년을 가진 게 너무 많아요. 재물이 이 청년을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주님이 이걸 번연히 알고 계셨던 거죠. 이 청년은 재물에 대해서-더 정확히 말하면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포기하고 근심하며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를 믿는데 근심하며 예수를 믿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아름답고 표표하게 우리의 삶을 정돈해가며 하나님 앞에 귀한 은혜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근심하며 돌아가는 청년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질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결국 우리 인생을 망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반대로 삭개오의 회개를 봅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사람이었어요. 세리 장이었습니다. 권력도 있고 권한도 있고 많은 돈도 모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고, 그리고 민족을 팔아서 돈을 벌었다고 삭개오에 대해 비난합니다. 앞에서는 권력 앞에 복종하지만 뒤에서는 경원하는 이와 같은 것이었지요. 그런데 삭개오가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키가 작아 볼 수 없고, 사람들이 가득하여서 볼 수 없어서 뽕나무에 올라갔어요.
예수님이 그 삭개오를 보고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너희 집에 거하겠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요. 사람들은 삭개오를 비난합니다.
“저런 주제에-다른 사람들에게 해 끼치고 저 혼자 살려고 한 주제에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에 대하여 뭘 하려고 하는 것인가?” 심지어는 예수님까지 비난합니다.
“예수님이 뭐냐? 저런 삭개오같은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느냐?”
그러나 삭개오는 개의치 않고 예수님이 내려오라고 하는 그 말씀을 듣고 기뻐서 내려왔어요. 삭개오는 그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느껴 회개한 겁니다.
삭개오의 회개내용이 무엇입니까?
“주님, 내가 내 재산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이제까지의 삶과 다른 겁니다. 어떻게든 모으기를 원했고 이제까지 어떻게 해서든 남의 것 빼앗아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기 원했던 삶이 이제는 방향이 달라진 겁니다. 내가 절반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내가 남에게 빼앗은 것-토색한 것이 있으면 내가 그것의 네 배를 갚겠습니다.”
자기 삶의 완전한 변화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삭개오의 회개가 의미 있는 것은 마음속에서 뜨겁게 느낀 것뿐 아니라 그것을 생활로 실천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의 삶 가운데 분명한 것은 우리 삶의 실천과 그것을 끝까지 꾸준히 유지하는 이와 같은 삶의 진정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 삶에 보다 더 구체적으로 회개해야 될 몇 가지를 잠시 살펴보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생각과 정서에 대해서 회개해야 돼요.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내가 어떤 감정과 정서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대해서 회개해야 됩니다.
완악한 마음과 부끄럽고 어리석은 자부심과 고집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집이 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반대되는 이와 같은 자부심이 있습니다. 지식과 논리를 자랑하고 휘두르며 하나님과 사람들을 무시한 것에 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 지식의 근원이 누구이고 우리에게 논리를 주신 분이 누구이고 우리에게 모든 여건을 주신 분이 누구입니까? 공부하셨으면 공부할 수 있는 모든 여건과 열심과 열정과 의지력을 주신 분이 누구이며, 또 삶의 어떤 것을 소유하였다면 그것을 근본적으로 허락하시도록 생명과 우리에게 모든 건강과 은혜를 주신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경험과 의지력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방자히 행했던 것, 나 자신의 유치함으로 인하여 내 노력과 능력이 우수하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 백성을 무시하며 살아왔던 삶의 누추함과 부끄러움을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물질과 삶의 소유에 대한 비뚤어진 관념을 회개해야 합니다.
내 모든 삶의 소유와 물질에 관한 소유관계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이것이 누구 것입니까?
우리가 일하고 수고해서 얻은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이것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를 사랑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리석은 부자의 한계를 봅니다.
밭에 곡식이 가득했습니다. 그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한계는 무엇이냐 하면 ‘내가 이제는 창고를 더 많이 지어서 거기다 가득 채우고 평생 동안 먹고 마시고 즐기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모든 생각의 한계였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생각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내게 주신 물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살아갈 이와 같은 은혜를 이루시고 있습니까?
우리의 능력과 지성과 물질과 소유가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앞에 살아가는 것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은 재앙입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많은 재물이 재앙이었습니다.
물질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물질로 얻을 수 있는 것 때문에 놓치는 것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순기능과 역기능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래요. 있으면 감사하고 없으면 도무지 견딜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자유함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시간의 바르지 못한 소모와 탕진을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될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까지 내게 많은 시간을 주시고 많은 기회를 주시고 삶의 생명의 호흡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내가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내가 드린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이룬 것은 무엇입니까?
내 삶을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원하신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살아온 삶만큼 헌신하지 못하고, 살아온 삶만큼 내가 하나님 앞에 드려야 될 것을 이루지 못했다면 나는 나의 삶을 소모하고 탕진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여건이 다르지만 여건을 탓할 수는 없어요.
우리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얼굴이 달라요.
얼굴이 다른 만큼 마음도 다를 것입니다. 다르지만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건이 달라도 우리는 그 가운데 각각 하나님께서 적응할 은혜를 주시고 합당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건 때문에 핑계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호흡을 주셨다는 것은 기회를 주신 것이고 우리는 그 가운데 하나님 앞에 시간과 삶을 소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렸어야 합니다. 더욱이 주님의 복음대로 살고 그것을 전하며 사는 삶의 즐거움과 축복을 외면하며 사는 삶을 회개해야합니다.
아직까지도 우리가 입장정리가 되지 못하였습니까?
여호수아는 가나안에 입성하기 전에 백성들을 다 모아놓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결단을 촉구합니다.
“만약에 하나님만이 너희의 진정한 신이면 하나님만을 섬겨라. 그리고 만약에 이방신이 너희의 진정한 신이면 이방 신을 섬겨라. 둘 중의 하나 결정하자. 머뭇거리지 말고 이제는 결정하자. 그런데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이와 같은 여호수아의 결단과 선포로 말미암아 모든 백성들이 마음이 움직여서 “우리도 여호와만을 섬기겠습니다. 여호와하나님이 우리의 진정한 신입니다.”라고 백성들은 모두다 간곡스럽게 결정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와 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분명히 내가 결정하고 다른 사람의 결정을 유발할 수 있는 이와 같은 복음의 전파와 즐거움과 축복을 누리고 나누며 베풀고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복음을 전하며 살고 있습니까, 복음이 전하는 능력을 전하며 살고 있습니까?
복음이 전하는 사랑과 힘과 기쁨을 전하며 살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삶은 하나님 앞에 회개되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은총의 백성이 돼야 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회개는 잘못에 대한 깨달음과 그리고 그것을 인정함과 고백함과 삶의 실천과 지속적 유지와 완성입니다.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우리 삶의 부족함을 회개하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은혜와 영광을 입는 주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들의 소원
마 11:20-30 / 박지온 목사
오늘 제목을 "아들의 소원"이라 이렇게 제목을 삼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문제 해결자다! 이건 우리가 들었고, 또 너무 늘 입으로 말하는 바가 되어져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만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 것에 반해서 사실과 실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이 상당히 많이 참석을 하고, 또 그래서 한 10여년간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 이런 메시지를 듣고, 또 참 복음, 참 복음! 귀에 따갑도록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습니다 만은, 뭘 느끼느냐 하면, 막상 딱 문제를 당할 때에 전혀 다른 반응이 나오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냥 내 자신부터 막상 죽음이라는 것이 앞에 딱 나오니까, '아, 기쁘다! 참, 천국 가는게 좋다!' 이것보다도 '큰일났구나!' 이게 먼저 앞에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참 복음을 누리고, 그 복음을 통해서 참된 소망 속에 확실히 서고, 또 서있다는 사실을 이 성경에서 누림이라 그런 거든요. 이 누림이라는 말이 보통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실제가 안 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 많이 보게 되거든요. 그래서 뭐 아픔이 먼저고, 고통이 먼저고, 그러다 보면 어떤 경우까지 가느냐 하면, 쓸 때 없는 공포가 올 수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참 복음이 안 되어 있다!' 그러면 막상 문제를 당하면 다른 반응이 나와 버립니다. 이게 참 불행스러운 이야기죠.
그러면 그것이 늘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말하고, 사실적으로 뭐 지금현재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생각으로만 있고, 실제가 안되어 있다는 그런 내용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지금 '하나님의 소원이다! 아들의 소원이다!' 하나님의 소원이 바로 아들의 소원이죠. 하나님께서 아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소원을 형상화 시켜 주신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렇게 말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이것은 여러분과 제게 소원을 두고, 그 소원을 성취해 나가시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고, 이 그리스도를 보냄과 함께 성령을 보내시고, 또 여러분과 저를 흑암과 어려운 세력에서, 죽음의 세력에서 건져 주시고, 또 지금 내가 우리가 하고 있는 일, 일어나고 있는 일, 사건 일들을 구체적으로 주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됩니다.
바로 이 사실이 보여지는 만큼 뭐냐? 누림이라는 것이 확인되죠. 지난주에 말씀했습니다만, 참 너무 감사한 것은, '어쩌다가 우리나라 말이 이렇게 참 신비롭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말 못하는 것! 그러니 일본 사람들은 "누림"이라는 말이 안되니까! 자기 나라말로 번역이 안 되니까, 우리나라 말로 그대로 옮겨 가지고 "누리무"라 그랬다, 안 그럽니까! 일본말로 "누림"이 "누리무"입니다. 표현이 안 되어요. 그게 뭐냐하면 누림이라는 속에, '좋다! 뭐 감사하다!' 이런 게 아니고, 생활과 역사가 거기에 스며들어야 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여러분과 저를 불러서 구체적으로 이 축복과 은혜를 찬송할 수 있도록, 눈을 열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 이야기입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는 구원이라! 그렇게 말할 수가 있죠.
구원이다! 왜? 여러분들이 에베소서 2장 2절에 보면,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그랬습니다. 뭐냐하면,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사단의 손에 붙잡혔다! 그런 이야기고, 또 이 세상 임금이 사단이라 그러는 것은, 사단이 이 세상을 잡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여러분과 저는 태어날 때부터 본질상 진노의 자녀, 창세기 3장 빠졌거든요. 여기에 빠져 있는 자들을, 이 창세기 3장에서부터 빼내어 주시는 것을 구원이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영적 문제 해결되었다! 그렇게 쉽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영적 문제, 영적 문제! 많이 말하지만, 이 영적 문제라는 말속에 엄청난 그런 기적이라기보다도, 우리가 상상 못할 내용과 일들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보아야 될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창세기 3장 빠졌다!' 그렇게 말했을 때에, 이것은 자기 의지와 상관이 없습니다. 혹시 예수를 믿는다 그래도 '내가 예수로 구원을 받았다!' 말하지 만은, 현장은 창세기 3장이거든요. 그러니까 많은 경우 성도들이 속게 되는 것이 뭐냐하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입으로 그러고,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부르지 만은 뭐가 되느냐 하면, 속게 되는 배경이, 내가 사는 현장 세상은 어디 있느냐? 영적 문제 속에 있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거기에 속아 들어가는 겁니다. 속아 들어가고, 거기에 빠져 헤매게 되는 겁니다. 나는 빠져 나왔다고 그러는데, 현장은 창세기 3장이니까! 나도 모르게 빠진 현장에서 나오지 못하는, 말하자면 생활이나 삶에 습관이 여전히 그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그리고 또 믿는다! 그러지 만은, 내 현장 어떤 면에서 많은 경우, '창세기 3장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기도 하고, 또 그런 면을 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 창세기 3장 그럴 때는, 내 의지와 여러분 생각과, 여러분 어떤 면에서 말의 고백과는 상관없이, 사단에 빠져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 힘으로, 우리 힘으로, 우리의 어떤 수단 방법으로, 학문으로, 어떤 것으로 절대로 나올 수 없거든요. 오직 한 분! 하나님 외에는 창세기 3장에서 나를, 여러분 건져 줄 수가 없는, 그러니까 우리가 나자마자 우리 의지와 상관 없다니까요. 그리고 우리 아버지의 명예와 직위와는 상관없습니다. 거기에 다 빠져 있습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는 원죄라 그럽니다. 원죄! 이걸 가지고 그 사단의 빠져 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3장에 빠져서 우리 현장에서 나도 모르게, 우리도 모르게 우리가 어디로 끌려가느냐? 사단의 손에 이끌려 갔습니다. 이걸 가지고 운명이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불신자들에게서는, 그리고 또 우리가 믿는다, 그러지 많은 우리도 거기에 접근하는 사이에 뭐가 보여지느냐 하면, 부지런히 일한다고 한다는 것이, 열심히 노력하고 한다는 것이 저주로 뛰어 들어가는 겁니다. 여러분 참 신기하고 이상하죠. 한가지 예로 아이들을 밖에 내어놓고, 조금만 크는 것을 보면, 마치 아이들이 막 불 속에 뛰어 들어 가는 것 같아요. 어디 가서 배워 왔는지, 어디 가서 잠깐만 나갔다 오면, 쌍 시옷 자를 입에 달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그게 뭐냐하면 사단의 손에 빠져있는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막 그냥 죽음을 향해서 달음박질하는 것처럼, 이게 지금 현재 세상에 일이요. 그리고 또 우리의 현장에 일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여기에 속아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조금만 방심해 버리면, 우리도 모르게 어디에 있느냐? 예수 믿는다 그러고,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그러면서도 저주를 향해서 막 뛰어들어가는 겁니다. 마치 불나비처럼! 그러니까, 이 사단에 속는다! 속는다는 말이 보통 일일지 모르지만, 현장에서는 엄청나게 이런 위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런 부분들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부터 해방 받는 것을 우리는 구원이라 그러고, 이걸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의 소원이다! 구원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하나님은 참여하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되는 축복과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가, 이 축복을 노래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렇게 말씀했어요. 그러니 여러분과 제가 조금만 뭔가 언약과 약속을 붙잡고 맨 정신만 가지고 있어도 망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사실적인 역사를 볼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뭐라 그랬습니까? '해방했다!' 그랬습니다. 빼 내어 버렸습니다. 빠져 나왔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은혜라 그럽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기적이다! 그럽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 그럴 때에 이때부터 뭔가 영적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럽니다. 이때부터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사실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말씀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만난다!' 그럴 때에 교회 와서 목사님 얼굴 싹 보고, '오늘도 하나님 만났다!' 그런 게 아닙니다.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귀에 들려지고, 마음에 받아지게 되는 것을, 하나님을 만났다! 그럽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는 그 말씀이, 내게 우리에게 삶에 성취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이 사실이 인정만 되고, 붙잡혀 져도 여러분은 엄청난 변화와 역사가 나오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영적 문제에 빠졌다는 것이 왜 무서우냐 하면, 이 말씀을 듣고 싶어도 들어 수가 없어요. 왜? 사단이 배경이 되어 있으니까! 이게 딱 잡고 있으니까! 그러니 여러분들이 교회 와서 말씀이 들리고,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덕 한다는 것은 제가 늘 말씀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그런 은혜를 받았습니까! 받아합시다. "이것이 기적이다!" 다른 게 기적이 아닙니다. 이게 '홍해가 갈라졌다!' 뭐 상관없는 겁니다. 홍해 백 번, 천 번 갈라지면 뭐합니까! 여러분 말씀이 내게 들려져서, 흑암에 세력이 꺾여지는 영적 역사가 이루어 졌다! 이게 기적인 겁니다.
내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내 마음대로 안 되어요. 내가 믿고 싶다고 믿어지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하나님 말씀들을 때에 저절로 믿어지는 겁니다. 말씀 읽을 때에 이게 와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들어오는 만큼, 나의 삶에 사실적으로 역사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축복과 역사를 우리는 하나님 만났다! 그래서 여러분 주일날 말씀 받기 위해서, 나와서 하나님 말씀 받는다는 사실이, 사실은 전부 아닙니까! 모든 문제해결이다! 여기서부터 나온 겁니다.
바로 '영적 문제 해결되었다!' 그 말은 사단의 세계에서부터 빠져나와서, 사단의 인도를 받던 운명에서 빠져 나와서, 사단의 인도 받는다는 것은, 그것은 운명이거든요. 빠져 나와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속으로 들어왔다!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세워서 뭐 하기 위해서? 찬송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게 되는 사실적인 역사를 성경은 말씀을 하고 있고, 이것을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소원이요.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축복과, 이 사실을 우리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게 되는데, 왜 그러면 이런 축복과 은혜를 주셨고, 또 이 축복과 은혜를 통해서 지금 뭘 우리에게 요구를 하시는가! 이런 것을 조금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사실은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 말하면, 운명에서부터 벗어나게 되고, 축복과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는 사실적인 은혜를 사람들이 누리게 되고, 받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다! 이겁니다. 하나님을 깨닫고 아는 것이 바로 누림입니다.
누린다는 것은 뭐냐? 기도 응답이라는 것이 그 속에 다 포함이 되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을 알고, 깨닫는 사실이 이루어지게 되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개인과 가정과 사회가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하나님을 아는 자들을 통해서, 그들이 가는 곳마다, 움직이는 곳마다, 축복하시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알다시피 마게도냐는 유럽 아닙니까! 유럽과 그 다음에 미국, 그 다음에 미국 지금현재, 그 받고 있는 것이 미국의 축복과 은혜의 역사를 우리가 보잖아요. 그래서 이제 이 축복과 은혜가 사실상 어디로 오느냐! 그렇게 오는 과정 속에서 여러분 조금 눈여겨보면, 뭘 보느냐 하면, 어쩌면 그렇게 흑암은, 사단의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 말하면 축복과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고, 흑암에 깨어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시대 시대마다, 또 시대가 흐르면서 죽어라고 복음 받은 사람까지고 유혹을 하면서 뭘 못하느냐? 그리스도를 혼미하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스도가 혼미하게 되는 나라마다, 또 축복의 문이 닫히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역사의 흐름입니다. 그런 중에서 우리가 잘 아는 데로, 그렇게 찬란했던 유럽의 문화가 무너지게 되고, 그리스도가 무너지면서, 또 그렇게 찬란했던 영국사회 역사 마찬가지로, 복음이 무너지면서 그 나라의 모든 문화가, 그리고 그 나라의 부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똑같이 미국으로 흘러갔던 그 축복과 은혜가 역시 그리스도로 희미하게 되고, 여기 성경을 가르치고, 요즘도 뭐 미국에는 옛날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학교마다 성경을 안 가르쳤습니까! 성경 가르치는 것을 막아 버렸거든요. 그게 언제냐 하면, 케네디 때 막았습니다.
그 다음에 그 학교마다 성경을 가르치게 되면, 지금은 시비를 거는, 이런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뭐냐? 마약이 급증하고, 경제가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사단은 조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 말하는 곳에는 자기의 설자리가 없으니까, 이걸 지속적으로 못하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바리새 그렇게 열심들 있고 여호와를 그렇게 말하고 선행과 착한 행실을 그렇게 말하고 있으면서도, 딱 한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리스도 말하지 마라!' 복음 모르게 했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저주와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몇 일 전에도 신문 보세요. 신문 볼 때마다 터져 나오는 것이 자살 테러입니다. 유대인 툭하면, '죽었다!' 유대인들 죽는 겁니다. 툭하면 죽었다! 이런 고통과 괴로움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사단은 죽어라고 예수 그리스도 말못하게 하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이 축복의 예수를 그리스도라 말하게 하는, 그 축복과 은혜의 자리에 세웠습니다. 사단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드디어 말못하게 하려고 별 짓을 다 해놓았습니다. 참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설교를 한번 가만히 들어보세요. 어느 목회자가 잘한다는 교회 목사님들 설교를 한번 들어보세요. 이제 사단, 점쟁이, 우상 이야기 안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옛날에는 이런 이야기 안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공식적으로는, 밖으로는 막 '다락방 이단이다! 절대로 못 간다!' 이렇게 해 놓고는, 개인적으로 '목사님 양심을 가지고 대답하세요. 진짜입니까? 아니다 괜찮다!' 이게 공식화 되어있어요. 참 웃긴다 아닙니까! 왜? 사단에 속지 마시고, 어쨌든 사단이 그리스도를 말못하게 만들어야, 축복 못 받게 할 것 아닙니까!
우리 친구들이 만나면 재미있는 것은, 친구들을 잘 만나지도 못합니다 만은, 어쩌다가 연락이 되면 만나서, 나는 웃으면서 '이단하고 만나면 말도 하지 마라!' 그랬는데, 이러면 '쓸 때 없는 소리 치워라!' 그리고 '진짜 솔직한 말로 이단이냐?' 그러면 '아니라!' 이겁니다. 우리 집에서 몇 일 전에도 어떤 교역자를 만나서 뭐 이단이고, 이러다가 개인적으로 진짜 솔직하게 말해서 '이단이냐?' 이단 아니랍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느냐, 이단이라고 저렇게 그냥 덮어 씌워 가지고 이러는 데도 송현 교회가 과연 살아남을까? 아니면 어떻게 될까? 굉장히 관심에 대상이 되어 있답니다.
무슨 이야기냐? 어쨌든 사단은 이것 말못하도록, 왜 말만했다 그러면 깨지니까! 지가 그리고 말만했다 그러면, 죽음과 멸망과 운명에서 해방 받으니까! 이 축복된 역사 속에 여러분 세웠다! 이게 보통 축복과 은혜가 아니거든요. 오늘 어쩌다가 여러분 이 자리에 섰습니까! 뭐 이런 일, 저런 일 이야기하다가도 진짜로 여러분 복이라는 사실을 바로 붙잡고 알게 되면 세상에 복은 여러분 혼자 다 받고 앉았습니다. 이 축복과 은혜가 얼마나 위대합니까! 우리 집사님 한 분이 뭔가 이야기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만은, 영적인 문제, 그 다음에 정신적인 문제, 제일 확실히 고치고 제일 정직한 것이 바로 그 병이랍니다. 왜? 그리스도만 바로 들어가 버리면 떨어져 버립니다. 해결되는 겁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여러분들이 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축복을 받고, 뭐 달라고 그래도 안 되고, 뭐 그런 상태도 안 된다! 제일 정직한 것이 복음이 어디 있습니까! 뭐냐? 복음만 바로 되어 버리면 다 해결되어 버리는 겁니다. 이게 죽어라고 안되어 있어요. 왜? 너무 복음 이전에 들어간 것이 다른 것이 많아요. 불 신앙이 들어가고, 욕심이 들어가 있고, 다른 것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그런 말 안 합니까! 성경에는 '심은 데로 거둔다' 고 그랬지만은, 우리가 옛말에도 '먹은 데로 싼다!' 안 그럽니까! 들어 간 데로 내어놓으니까, 일단 우리는 복음에 다른 것으로 가득 차 들어가 있으니까, 나오는데 다른 게 다 나와야지! 이래서 안 되는데, 지금 우리의 형편이에요.
그래서 이 부분이 처음 제가 그런 말씀 안 했습니까! 복음이라고 말하면서 엉뚱한 다른 것 둘러쓰고, 아니 어떤 면에서 복음을 둘러쓰고 있으나 다른 것으로 지금 몸에 가득 차 있고, 내 생각 속에 가득 차 있으니까, 이 나오는 것은 다른 것이 나올 수밖에 없죠. 그래서 보세요, 여러분 말이나 행동이나 그런 것을 쭉 보세요. 걸핏하면 죽겠다! 걸핏하면 그냥 불평이 나오고, 걸핏하면 다른 게 나오고, 걸핏하면 큰일났다! 그러고, 걸핏하면 다른 이상한 소리 나오고, 그래서 약간만 몸이 이상하다! '아이고, 죽겠구나!' 생각이 그렇게 돌아가니까, 약간 다리만 이상하면, '아이고, 다리 부러지겠구나!' 이런 식으로 걸핏하면 큰일났구나! 왜? 복음 이외에 전부 다른 것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밖으로 표현되는 것은 전부 다른 것으로 표현되니까, 복음이 아닌 것이니까, 조금만 복음이 되고, 조금만 이 축복의 역사가 붙잡혀지게 되면, 여러분 하나님이 손이 없습니까, 귀가 없습니까, 능력이 없습니까, '쏟아 부으시겠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말하는 베드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럴 때에 너무 우리 예수님께서 감격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다 받아 버려라!' 그랬습니다. 뭐냐? 신분! 반석같이 되어라!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기도하는 데로 해주마!' 응답이 이 사실을 누리는 것을 우리는 뭐냐? 제자라 그럽니다. 뭐 제자라 그럴 때에, '전도 많이 하고 뛰어다녀야 된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누리기만 하면 되게 되어 있어요. 이 역사와 축복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이런 엄청난 축복의 자리요, 은혜의 자리인 것을 우리에게 성경은 말씀을 해 주시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 특별히 우리 교회를 건축하고 있고, 또 교회 건축하고 있는 과정 속에서, 또 이 총신연구원 또 이렇게 매입을 하고, 지금 추진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왜 자꾸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복이고, 이 일을 우리가 참석하고, 이 일을 위해서 참여해야 되느냐? 그리고 또 렘넌트, 렘넌트! 그러고 자꾸 그러느냐? 다른 게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붙잡았다고 말은 많이 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붙잡기 전에 다른 게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요.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그래서 입만 열면 예수 그리스도 나오기 전에 뭐부터 먼저 나옵니까? 먼저 들어가 있던 게 자꾸 나와요. 이러니 뭐냐하면 응답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역사가 복음 속에서 나와야 되는데, 복음 속에서 나오는데, 이게 잘 안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 들어가기 전에 복음부터 먼저 들어가자 이게 훈련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 신학교요, 이걸 훈련시키는 것이 여러분 지금 훈련받는 여러 가지 훈련 프로그램들 아닙니까! 이걸 훈련시키는 것이 렘넌트 운동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렘넌트 운동이 앞으로 축복과 은혜는 물론이지만은, 세계 복음화의 중요한 배경이 되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소수만이라도, 말하자면 다 못해도 소수만 훈련 시켜서 내어 보내도 하나님이 그 소수를 통해서 전 세계를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성경 적인 방법이다! 그게 다락방 운동이에요.
그런데 제가 재미있는 글을 봤습니다. 데드몬드 모리스라는 원숭이 생태를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교수이고요. 그런데 이분이 일년에 그 소수의 몇 마리 원숭이들을 잡아 가지고 고도의 규칙적인 훈련을 시켰데요. 원숭이는 훈련이 조금 되는 모양이죠. 그래가지고 이 원숭이들을 목에다가 빨간 리본을 달아 가지고 야생하는 한때의 큰 무리의 원숭이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많은 큰 무리의 원숭이들이 이 몇 마리가 들어가서, 아주 고도로 훈련받은, 규칙적으로 훈련받은 이 원숭이들을 따라 가지고 변화가 시작되는 겁니다. 바꾸어지기 시작하더라 이겁니다.
여러분 왜 제가 이런 말씀을 하느냐? 제자 훈련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소수의 정예 복음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을, 이 불신 세계에 내어 보내어서, 그리고 세상의 무리에 내어 보냈을 때에, 그 불신 속에 들어가서... 원숭이들이 막 이렇게 전도해 가지고, '너 나처럼 따라해라!' 그래서 아닙니다. 자기가 훈련받은 데로, 그냥 자기 생활하는데 그것을 보고 따라 합니다. 다른 원숭이들이! 무슨 말이냐 하면, 여러분 전도라 하는 것은 내가 누리는 것만 되면 다른 사람은 내 무리 속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전도의 역사입니다. 이게 제자라는 이야기거든요.
그래서 소수의 신학생들은 정의 부대를 만들어 가지고 내어보냈다! 세계를 바꾸는 겁니다. 그리고 소수의 렘넌트들이 훈련받아 가지고 나가게 되면, 자연적으로 훈련받은 참 복음의 역사가 증거 되게 되어 있으니까, 그 증거보고 다 따라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는 세계복음화에 전도방법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복음 붙잡기 전에, 이 언약의 축복을 붙잡기 전에, 다른 것으로 너무 종교적으로도 들어가 있고 다른 어떤 것을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를 당하면 복음이 나가기 전에 나도 모르게 뭐냐? 다른 것부터 먼저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 그러면서도 그래서 맹탕 현장에 부딪히면 헛일 치고, 있는 것이 지금 기존교인들의 문제 아닙니까! 그래서 잘 믿고, 열심히 믿는다 그래도 실제로 문제 당해 버리면 엉뚱한 짓 해 버리는데, 그래서 이렇게 나가기 전에, '우리가 아직까지 다른 것이 경험되기 전에 먼저 복음을 확실하게 붙잡도록 만들자!' 이게 렘넌트 운동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아마 금년도 렘넌트 운동하면, 작년보다도 훨씬 아이들이 많이 모였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질적으로 향상이 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제가 조금 말씀드렸습니다 만은, 우리 교회 같다온 담당 목사님이 지난 해 보다 훨씬 아이들이 수준이 올라가 버렸어요. 지난 우리교회 아들이 빌빌 돌아다니고, 덥거든요. 못 들어앉아 있어서 뛰어나가고, 돌아다니고 이런 아이들이 많았는데, 금년도는 하나도 없어졌어요. 전체적으로 그런 아이들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제가 미국에 한번 같더니만 렘넌트 아이들이 한 1,000여명 전도 모였어요. 1,000여명까지는 조금 못 모였었는데, 얼마나 덥든지 여름에 안 덥습니까! 더워놓으니까, 첫날부터 안 들어오고 빌빌 돌아다녀요. 여러 부지기수예요. 그래도 그 아이들이 지난해 금년도 계속하면서 뭐냐하면, 그런 것이 싹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니 금년도부터는 이야기 들어보니까, 5시부터 앞자리에 앉으려고, 어른들 보다 훨씬더 뜨겁게 말씀을 사모하는 것을 봤다고 그러더라 구요. 어쨌든 다른 것이 들어가기 전에 복음으로 확실하게 훈련받았다! 이것은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문제만 부닥쳤다! 능력이 나옵니다. 사건이 생겼다! 힘이 나오는데,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받았다고 막 큰소리 칠 때는, 사건이 없을 때는, 막 큰소리 치고 그러다가 문제가 부닥쳤다! 힘이 쑥 빠지고 다른 게 나옵니다. 이것을 바꾸어 놓는 것이 훈련이다! 그랬습니다. 훈련!
그 훈련에서 오늘도 보니까! 합숙훈련 나가고 팀 합숙 나가는데, 여러분 훈련받아 보세요. 그 다음에 또 신학원도 나오고, 다른 게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축복 받는 사실을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전도는 나부터 나가야 되죠. 나부터 전도가 되어야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이 전도할 수 있습니다. 나부터 누려져야, 사실이 되어야, 나부터 능력의 사실이 있어야 이게 저절로 나가게 됩니다. 전도는 여기에서부터 나갑니다. 다른 것으로부터 오는 게 아닙니다. 뭐 열심히 해서 노력으로 통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 일이 사실적으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또 이 일을 우리가 후손만대에 지속해서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후손들 렘넌트 그런 문제!
그래서 오늘 정말 여러분과 제가 참 살아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좀 말씀을 맺어 보려고 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제가 오늘 말씀을 이렇게 준비를 하면서 이 1부 예배를 제가 사실 그때에 일어나서 나가기가 좀 힘들어서 지금까지 못나갔습니다. 못 나갔는데 막상 지금 1부 예배를 나가려고 하니까 여러 가지로 몸이 컨디션이 잘 안 맞아요. 그래서 준비를 하면서 어제 저녁에도 준비를 하면서 마음에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네가 이때를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한 게 아닌가! 안 그러면 벌서 갔을 네가 이때를 위해서 살아있는 게 아니냐! 저는 그런걸 많이 보거든요.
어쨌든 아프던지, 슬프던지, 어렵든지, 힘들던지 살아 있다는 데는 하나님 이유가 있습니다. 안 그러면 가야 되는데, 혹시 우리 교인들 지금까지 뭐 어쨌든 살아있습니까! 다 죽어 가는데도 살아 있습니까!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를 빨리 발견하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표를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버리면 축복이 되는 겁니다. 살아있어도 왜 살아 있는지 모른다! 그건 진짜 고민입니다. 그때는 아프면 진짜 감당할 수 없어요. 벌써 하나님 앞에 가야 되는데, 여러분 오고 가는 것 하나님의 손에 있지 절대 인간이 뭐 잠깐 실수해서 뭐 때문에 그 말이 아닙니다. 혹시 뭐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보면, 사고가 나면, 막 누구 때문에 그러고 뭐 때문에 그렇고 이유가 많습니다. 폐 일언하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다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물론 이럽니다, 죽었다 먼저 번에 그 약을 썼더라면, 뭐 이렇게 했더라면, 저는 이 심장이 이래가지고 먼저 갔을 때에, 그때 갔을 때에 심장에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이 막힌 것 금방 발견했을 건데, 그만 괜찮을 건데, 이런 생각 들 때가 조금 있어요. 폐 일언하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참 죽고 사는 문제 하나님의 절대적인 손안에 있는 것이지, 인간이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내가 언제쯤 죽을는지, 또 죽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건 하나님이 다 계획해 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아무리 죽고 싶어도 안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유! 왜 살아 있느냐? 그리고 굿이 이사장을 내어놓으려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했는데도, 굿이 안 되는 이유는 또 뭐냐?
나는 미안합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지난주에 당회를 잠깐하면서 총회 신학교 매입하는데 헌금을 해야 되는데, 우리 교회 적으로 얼마나 할 것이냐? 목표를 세우고, 당장 8월 중순까지 돈을, 현금을 주어야 한데요.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그럴 때에 우리 장로님들이 참 감사하게도, 후대 키우는 일에는 그저 이의 없이 3억을 결정했습니다. 결정해서 헌금을 내어 가지고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뒤에 뉘앙스가 목사님이 이사장으로 계시니까, 이 관계도 상당히 작용을 했다는 것을 내가 느끼게 되었어요. 내 마음에, '안 죽게 된 이유도 여기 있구나!' 이것은 극히 작은 문제, 내 생각입니다.
제가 왜 이말 하느냐 하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짓게 하실 이유도, 간단한 이유가 아닙니다. 왜? 다윗이 그렇게 애를 쓰던 성전을 기어코 못 짓고 솔로몬에 넘겼습니다. 그 축복된 교회를 아무나 짓는 게 아닌데, 여러분과 제가 있을 때에 지어야 합니까? 하나님 계획입니다. 에스더가 이스라엘이 다 죽게 될 때에, '네가 왕궁에 왕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인 줄 알라!' 여기에 눈을 떴을 때에 에스더가 그 가문은 물론, 이스라엘이 엄청난 축복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결단이 필요했더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미국 침례교회가 지금도 미국에서는 제일 큽니다. 제일 보수적입니다. 침례교회가 시작할 때에 신학교를 건축하고, 신학교 학생들에게 거의 많은 돈을 투자했습니다. 낭비인 것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은 미국에 있는 모든 교단보다도 제일 크고 확실한 신학에 교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단이, 교단이기보다도 정말 이 신학교를, 그리고 이 젊은 청년들을 키워내면서 이제는 남은 게 딱 하나뿐입니다. 확실하게 전도에 훈련받은 사람이 안 되어 나오면, 이것다 못 건집니다. 이런 자녀들을 확실 키워내는 것,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여기에 여러분과 제가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기도만 해도 하나님이 역사 하실 겁니다. 여기다가 우리가 정말 뜻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조금만 투자를 하고, 투자보다도 이것은 우리 하나님 앞에 헌신 조금만 해도, 이것을 가지고 진짜 헌신이라 그러죠. 하나님의 큰 영광을 받으실 겁니다.
저는 그 서울에 임마누엘 교회가 그 10억을 했더라 구요. 우리는 서울만큼 돈은 없지만, 금방 생긴 교회가 얼마 되지 않지만 10억을 헌금했는데, 사실은 45억인데, 20억이 은행융자가 되어 있고, 그리고 지금 5억이 계약금이 되어 있고, 20억을 당장 중순 안으로 만들어 줘야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10억하고, 벌써 우리 3억하고, 아직까지 헌금을 안한 몇몇 교회하고, 별로 어려운 문제는 없이, 헌금이 다 해결이 될 것으로 지금 보여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과 제가 막 이단이라 그러고, 예수 그리스도 말못하게 하고, 겉으로는 절대로 말못하게 하면서, 속으로 '아니다!' 그러면서 있는 이런 시대에 드러내어놓고, 조직적으로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그리고 이런 말을 전문적으로 할 수 있는 참 일꾼들을 키워낸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소원 중에 소원입니다. 이 일을 여러분들이 결단하고 계획하고 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정도가 아닙니다. 후손만대에 축복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 일에 조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 모입니다 만은, 교회가 이제 시작을 해야 될 단계까지 왔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여러분과 제가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일에 이런 시점에서 정말 우리가, 전체교회가 하나님의 사실적인 인도를 확실히 받아보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새로이 모이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도 여러분들이 함께 기도하시고,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뭘 못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하다 못해도 후손들에게 물려줘도 떳떳한 겁니다. 만약 내 욕심이나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는 골치 아픈 일이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라면, 우리가 하다 못하면 후손들에게 물려줘도, 이것은 축복과 은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때에 내가 뭘 할 것인가? 이때에 우리가 뭘 할 것인가? 성령의 확실한 인도를 받고, 영한의 눈이 떠져서, 자손만대에 축복 받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 확실하게 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된 쉬임을 얻으려면
마 11:20-30 / 최영기 목사
다른 종교에서는 인생을 고해라고 말합니다. 고난의 바다라는 뜻입니다. 맞는 말 인 것 같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처음에 서울 침례교회에 부임하여서 무슨 설교를 해야 할지 당혹감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잘 안정이 되어있습니다. 부부 관계도 원만해 보입니다. 자녀들도 잘 들 자라고 있습니다. 이처럼 문제없는 교회에서 무슨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얼마 지나고 난 후의 결론은 사람 사는 것은 똑같다는 것입니다. 돈이 있 냐 없냐, 교육을 많이 받았느냐 적게 받았느냐, 사회적인 지위가 있느냐 없느냐에 상관없이 다들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문제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쉬운 인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돈을 벌면 사는 것이 쉬워질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모아놓은 것이 사라지면 어쩌냐 는 두려움, 또한 살림을 늘려 놓았기 때문에 유지하기 위하여 더 벌어야 하는 강 박감 때문에 인생이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독신으로 사는 사람은 결혼한 사 람을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결혼한 사람은 독신으로 살 것을 괜히 결혼했다고 후회 할 때가 많습니다. 직장 생활하는 사람은 조그마한 것이라도 내 사업이 있으면 좋 겠다고 사업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사업에 허덕이는 사람은 영어만 하고 써주 는 회사만 있으면 휴가 딱딱 타먹는 직장 생활을 했으면 하고 소원을 합니다. 한 마디로 인생을 살기가 힘이 듭니다.
힘이 드니까 도피를 합니다. 술이나 마약이나 노름을 통하여 삶의 짐을 잊어보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스포츠나 비디오에 몰두하든지, 나쁜 경우에는 불륜의 관 계에 빠져서 인생의 짐을 잊어보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피는 인생의 짐으로 부터 휴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손실, 배우자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인생 을 더 힘들게 만듭니다.
힘든 인생에서 쉬임을 얻으려면 쉬임을 앗아가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 다. 즉석 해결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은 도피가 되고 맙니다. 어떻게 하면 참된 쉬 임을 맛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당신에게 오라고 초청하십 니다.
저희 교회를 방문하시는 분들은 우리 교인 표정이 편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쉬임을 맛보며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쉬임을 맛보기 위하여서는 단계가 필요합니다.
I. 회개한다
1. 죄 때문에 인생이 짐이 되었다
참된 쉬임을 맛보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왜 인생이 즐거움이 아니고 짐이 되었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땅을 정복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땅을 가는 것이 전연 노고로서 묘 사되어있지 않습니다(창 1:28). 그러나 아담이 뱀의 유혹에 넘어가서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저주를 받습니다(창 3:17). 이제는 수고하여 야만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일이 즐거움과 보람이었으나 죄를 지은 후에는 고역과 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인생은 즐겁고 재미나야 합니다. 인생이 짐 이 되고 수고가 된 것은 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쉬임을 맛보려면 회개하여야 합 니다.
20-24절 본문에서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세 도시를 꾸짖으시고 안타까워하셨습 니다.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은 갈릴리 바다 연안에 있는 도시입니다. 예수 님은 이곳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기적을 통하여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한 것을 믿고 회개하 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 마을의 주민들은 여러 가지 기적을 보면서 놀라고 감탄하면서 회개할 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꾸중을 듣고 한탄하 시게 만드는 것입니다.
2.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에게도 돌아온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회개란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걷고 있던 길을 되 돌이 키는 것이 회개입니다. 인생이 고뇌가 된 것이 하나님을 떠나서 자신의 힘으로 살 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을 알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 므로 회개란 감정보다는 의지적인 결단입니다. 눈물을 아무리 많이 흘려도 자신의 힘으로 산 것을 뉘우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결심이 없으면 그것은 후회 일지언정 회개는 아닙니다. 반대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지만 지난 삶의 잘못 됨을 인정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면 그것이 회개입니다.
3. 많은 은혜를 받고 회개 않으면 심판도 더 크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심판에 등급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라신과 벳세다는 두로와 시돈보다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고 가버나움은 소돔과 고모 라 보다 더 심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이방인 항구 도시이고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 시대에 불벼락을 맞아서 멸망한 도시입니다. 왜 더 심한 심판을 받습니까? 더 많은 은혜를 체험하고도 회 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떡 다섯 덩어리도 5000명을 먹이신 사건은 누가 복음 9장에 보면 벳새다 근처에서 일어났습니다. 또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 본거지 이니까 성경에 기록된 외에 많은 기적을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큰 심판이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큰 은혜를 체험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에 더 큰 심판이 따 릅니다. 그러므로 소위 모태 신앙을 가졌다는 분들은 더 각성하여야 합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목회자들을 보아도 당대에 예수 믿고 목회 하는 분과 믿는 가정에서 태어나 헌신하여 목사가 된 분하고는 차이가 납니 다 당대에 예수 믿고 목회자가 된 분들은 예수 믿기 전에 자신을 지배하던 죄와 싸우느라고 계속 에너지를 낭비하여야 합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쉽습니다 . 그러나 뿌리 깊은 신앙을 가진 집에서 태어난 목회자는 안정된 목회를 하는 것 을 봅니다. 그래서 당대에 목회자가 된 분들이 제일 아쉬워하는 것이 당신을 위하 여 기도해주는 부모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은혜 가운데에 태어나서 은혜 가운데에 자라는 사 람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위 모태 신앙을 가졌다는 분들이 새로 믿는 분 들보다 더 비판적이거나 부정적이고 더 미적지근한 경우가 많습니다. 안 믿는 사 람들에게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모태 신앙을 가졌다는 분들 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더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 다. 여러분들 가운데에 그런 분이 있다면 주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셔서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모태 신앙을 자 랑하지 말고 처음 믿는 것처럼 시작하여서 새로 믿는 분보다 더 열심히 섬기고 더 겸손하고 더 경건하시기 바랍니다.
II. 하나님을 만난다
1. 예수님을 통하여 만난다
과거의 삶이 잘못된 것을 인정한 후에는 참된 쉬임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을 찾아 야 합니다. 참된 하나님은 예수님만을 통하여 만날 수가 있습니다(27절). 다른 종 교를 비하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종교를 창시하신 분들은 다 인간에 지나 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위대한 삶을 산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우 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죽음 앞에서 무력하여서 죽어서 결국은 무덤에 묻혔다는 사실이 그들도 일개 인간에 지나지 않 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추측할 뿐이지 하나님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죽은 지 사흘 후에 부활하셔서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임으로 하나님을 확실히 압니다 . 그러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을 통해서만 만날 수가 있습니다.
2.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만나는데 방해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지혜와 똑똑함입니다. 하 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계시에 의존하여야 합니다(27절). 계시라는 것은 인간의 사 고와 이해의 한계를 벗어나서 인간의 자연적인 지혜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을 하나 님이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는 이해하려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
지난 주에 회원 영입을 하신 형제님은 과학도입니다. 어렵게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였는데 결정적으로 영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계시의 의미를 깨 달은 것입니다. 수학에도 공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기본 가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공리 위에 공식이 세워집니다. 공리 는 증명될 수 없지만 사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근본 진리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일반 수학에서 1+1=2입니다. 이것은 공리입니다. 왜 하나 더하기 하나 가 둘이냐고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 공리에 기초 하여 1+3=4, 2x3=6, 6/3=2 등의 공식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분은 신앙에도 공리가 있다는 것을 발 견하였습니다. 이것은 증명될 것이 아니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믿기 로 결단을 하였습니다. 이분이 공리라고 부르는 것을 성경은 게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공리나 계시가 옳은지 틀린지를 어떻게 압니까? 수학의 경우에는 이 공리 위에 이론을 공식을 만들어서 일관성이 있고 서로 상치되지 않음을 보아서 공리 가 맞다 는 것을 압니다. 계시도 계시를 믿고 살아갈 때에 삶에 일관성이 생기고 조화가 생길 때에 계시가 올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 믿 기를 주저하는 분들에게 믿을 만한 근거가 60-70% 있을 때에 믿기로 결정하면 하 나님이 나머지는 체험을 통하여 우리가 믿는 믿음이 사실인 것을 보여주신다고 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 있고 똑똑하다는 분들은 게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공리와 다름없는 계시가 증명되어야 믿겠다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혜 있고 똑 똑한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과 지혜의 한계를 인정해야 합니다. 특정한 분야의 지 식과 지혜가 모든 분야에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머리 좋은 물리학 자라고 반드시 훌륭한 경영인이 되지 않고 훌륭한 의사가 반드시 뛰어나 상담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관하여서는 자신이 문외한이라는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비판하기보다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반박하려기 전에 배우려 해야 합니다. 신앙에 관하여서는 자신이 어린아이와 같다는 자각과 겸손함이 있을 때 에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III. 예수님과 더불어 산다
쉬임을 누리려면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쉬임에로 초청하시고 멍에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팔레스 틴 지방에서 소가 밭을 갈 때에는 두 마리를 나란히 세워 밭을 간다고 합니다. 두 마리를 같이 엮는 한 개로 된 멍에를 메는데 밭을 갈기 시작하면 둘 중의 하나가 누가 보스인지를 직감적으로 결정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마리는 리드하는 소를 쫓아간다고 합니다.
1. 예수님을 영접한다
그러므로 참된 쉬임을 맛보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때에 쉬임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방문하시는 분들이 우리 교인들은 얼굴 표정이 편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 힘에 의지하여서 인생을 산다는 것은 고된 일입니다. 능력이나 지혜나 체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실 때에 우리는 쉬임을 맛봅니다. 그분이 멍에를 같이 지어주시기 때 문입니다. 참된 쉬임을 맛보기 원하시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는데도 그러한 쉬임을 맛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어떻 게 된 것일까요?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 인으로 모셨다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쥐고 예수님은 자신의 삶에서 비서나 머슴으로 취급합니다. 이런 분은 깨닫고 회개하여 삶의 방향을 바 꾸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는 오래 다녔고 모태 신앙이라고 자랑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적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는지 안 했는 지는 어떻게 압니까? 자신의 삶에 예수님에 대한 순종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아 압 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로써 영접했으면 그 삶에는 순종이 있게 마련입니다. 순종이 있는지 없는지는 어떻게 아는가? 자신의 삶에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 아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3년, 5년이 되어서 삶과 성격과 사고에 변화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2. 예수님에게 배운다
다음에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29절). 무엇을 배울까요? 배우는 것 중 의 하나는 문제 가운데에 쉬임을 얻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로 아뢰라 고 말씀하십니다(빌 4:6-7). 사도 바울이 이 구절에서 염려를 심어주는 문제의 해 결에 관해서는 전연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을 주의해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마 음의 평화와 쉬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문제 가운데에 쉬임을 얻기 위하여 배워야 할 것이 하루하루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일 염려 내일 하라. 오늘 고생 족하다고 표현을 하십니다(마 6:34). 또 제가 요즈음 거의 매주일 말씀 드리 지만 죽기를 각오하고 사는 것입니다. 죽기를 결심하면 삽니다(마 10:39). 예수님 께서는 문제 가운데에서 쉬임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이러한 지혜에 따라 삶을 살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3.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은 재미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 순종하고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구속일 것 같고 힘들 것 같습니다. 주 일마다 쉬지 못하고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 너무 힘들 것처럼 느껴질지 모릅니다. 새벽마다 일어나서 30분, 1시간 기도한다는 것이 힘들게 보일 것입니다. 금요일마 다 모여서 자정이 지나야 끝나는 목장 모임에 참석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사는 우리 교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오 히려 그것이 힘을 주고 쉬임을 준다고 말할 것입니다. 주일날 아무 것도 안 하고 집에서 TV를 보며 소일해도 다음날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일터에 나가게 됩니까? 아닐 때가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일 예배를 은혜롭게 드리고 나면 새로운 힘을 얻어서 월요일 맞게 됩니다. 아침에 몇 십분 잠을 더 자면 몸이 개운하고 덜 피곤합니까? 아닙니다. 잠을 줄이고 기도 시간을 가질 때에 기분도 가벼울 뿐더 러 하루의 일과를 더 잘 마칠 수 있는 것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목장 모임도 마 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쉬임을 주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참된 쉬임이 있습니다. 인생의 짐을 자신이 지려 하지 말고 예수님에게 맡기고 문제를 피하려 하지 말고 문제 가 운데 머물며 예수님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워서 참된 쉬임을 맛보며 인생을 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게로 오라(Come to me)
마 11:25-30 / 이기복 목사
오늘은 하늘문교회가 새성전을 건축하고 처음으로 새생명초청 총동원 전도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사람이 어떤 모임에 참석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길이 좌우되며 심지어는 그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잘못된 모임에 발을 잘못 들여 놓았다가 신세를 망치고 평생을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초청 새생명축제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좋은 모임에 참석하신 자리가 되길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한 번 나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택이고 축복의 출발입니다. 머지않아 여러분들이 하늘문교회 나온 것을 정말 잘했다고 감사할 날이 곧 올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 보아도 기독교 복음을 믿는 나라가 선진국이고 세계를 움직이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1. 예수님의 초청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Come to me)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청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을이 되면 각종 축제가 많습니다. 전국이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저도 어제 세 쌍의 젊은이가 부부가 되는 결혼식 주례를 하였습니다. 지금도 제 책상위에는 각종 초청장이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음악회 미술전시회 특별한 발표회 등 초청하는 모임이 다양합니다. 특히 오는 30일 화요일과 31일 수요일은 우리 감리교회의 가장 큰 회의요 축제인 감리교회 30회 총회가 우리교회에서 열립니다. 감리교회 120년 역사상 서울 인천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지방인 우리교회에서 열립니다. 그런데아주 중요하고 유명한 축제에는 아무나 참석하지 못합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이 참석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청한 분은 다른 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초청장의 내용인 즉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초청입니까? 그리고 이어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I will give rest). 이것이 오늘 여러분을 초청한 초청장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을 이 자리에 오시라고 초청한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을 이곳까지 나오시도록 초청장을 전달해 주고 수고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심부름꾼들입니다. 이 세상에 청첩장이 수없이 많습니다만 누가 초청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약 한 나라의 대통령이 오시라고 초청을 하였다면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초청을 하셨다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여
2. 초청의 대상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All youth of labor and are heavy laden)
예수님이 초청하신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입니다. 할 일없고 대단한 명사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른 말씀에서도 보면 “누구든지 목마른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을 하셨습니다(요 7:37절).
첫째 수고한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여기 수고한 자들이란 스스로 자기 일을 하면서 심히 지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은 태어나 죽는 날까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하는 운명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얻는 소득은 불로소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놀고먹는 사람이 아니고 수고하는 인생을 오라고 초청을 하십니다.
둘째는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여기 무거운 짐 진 자란 말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하여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은 자기의 자의에 의해 수고를 해야 하지만 타의나 운명적으로 짐을 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의 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가장 무거운 짐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죄의 짐”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이 죄 짐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짐 중에 가장 무거운 짐이 죄 짐입니다.
②“가난과 저주의 짐”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물질의 짐은 피할 수 없습니다. 특히 가난의 짐이라고 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짐입니다. 지금 수 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가난의 짐에 시달립니다.
③“질병이라는 짐“입니다. 육신과 마음과 정신과 영적으로 모든 질병을 망라합니다. 누구도 병을 앓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는 질병에 시달립니다.
④인간이 가장 무서워하고 피할 수 없는 짐이 “죽음이라는 짐”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가장 무겁고 힘든 짐입니다. 그런데 이 가장 무거운 짐을 해결해 주실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3. 쉬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쉬게 하리라, will rest you)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자의든 타의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주님께로 나아오라는 초청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도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고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면 다 내게로 나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간난과 물질의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도록 축복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가난한 자와 궁핍한 배고픈 자들을 초청하시면서 내게 와서 양식을 먹되 값없이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와 민족은 가난에서 부한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무겁고 피할 수 없고 어려운 짐인 죽음의 짐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시어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를 믿으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4. 수고와 짐을 해결하는 비결입니다.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of me)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해결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멍에를 메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지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라”는 말씀입니다. sk 혼자 메는 멍에는 무겁고 힘들지만 주님과 함께 메는 멍에는 가볍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을 모방하라”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살면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에서 쉼을 얻는 비결을 터득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살기를 힘쓰면 최고의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오늘은 하늘문교회가 새성전을 건축하고 처음으로 새생명초청 총동원 전도주일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신 성도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사람이 어떤 모임에 참석하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길이 좌우되며 심지어는 그의 운명이 결정되기도 합니다. 잘못된 모임에 발을 잘못 들여 놓았다가 신세를 망치고 평생을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초청 새생명축제에 참석하신 여러분은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좋은 모임에 참석하신 자리가 되길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한 번 나온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선택이고 축복의 출발입니다. 머지않아 여러분들이 하늘문교회 나온 것을 정말 잘했다고 감사할 날이 곧 올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 보아도 기독교 복음을 믿는 나라가 선진국이고 세계를 움직이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1. 예수님의 초청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Come to me)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청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을이 되면 각종 축제가 많습니다. 전국이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저도 어제 세 쌍의 젊은이가 부부가 되는 결혼식 주례를 하였습니다. 지금도 제 책상위에는 각종 초청장이 수북이 쌓여 있습니다. 음악회 미술전시회 특별한 발표회 등 초청하는 모임이 다양합니다. 특히 오는 30일 화요일과 31일 수요일은 우리 감리교회의 가장 큰 회의요 축제인 감리교회 30회 총회가 우리교회에서 열립니다. 감리교회 120년 역사상 서울 인천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지방인 우리교회에서 열립니다. 그런데아주 중요하고 유명한 축제에는 아무나 참석하지 못합니다. 초청을 받은 사람이 참석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이 자리에 초청한 분은 다른 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초청장의 내용인 즉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입니다. 얼마나 멋있는 초청입니까? 그리고 이어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I will give rest). 이것이 오늘 여러분을 초청한 초청장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을 이 자리에 오시라고 초청한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을 이곳까지 나오시도록 초청장을 전달해 주고 수고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심부름꾼들입니다. 이 세상에 청첩장이 수없이 많습니다만 누가 초청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만약 한 나라의 대통령이 오시라고 초청을 하였다면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들은 예수님이 초청을 하셨다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여
2. 초청의 대상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All youth of labor and are heavy laden)
예수님이 초청하신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입니다. 할 일없고 대단한 명사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른 말씀에서도 보면 “누구든지 목마른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초청을 하셨습니다(요 7:37절).
첫째 수고한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여기 수고한 자들이란 스스로 자기 일을 하면서 심히 지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은 태어나 죽는 날까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하는 운명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얻는 소득은 불로소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놀고먹는 사람이 아니고 수고하는 인생을 오라고 초청을 하십니다.
둘째는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여기 무거운 짐 진 자란 말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하여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은 자기의 자의에 의해 수고를 해야 하지만 타의나 운명적으로 짐을 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의 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가장 무거운 짐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죄의 짐”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는 날까지 이 죄 짐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고 고통을 당합니다. 짐 중에 가장 무거운 짐이 죄 짐입니다.
②“가난과 저주의 짐”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물질의 짐은 피할 수 없습니다. 특히 가난의 짐이라고 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짐입니다. 지금 수 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가난의 짐에 시달립니다.
③“질병이라는 짐“입니다. 육신과 마음과 정신과 영적으로 모든 질병을 망라합니다. 누구도 병을 앓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는 질병에 시달립니다.
④인간이 가장 무서워하고 피할 수 없는 짐이 “죽음이라는 짐”입니다.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가장 무겁고 힘든 짐입니다. 그런데 이 가장 무거운 짐을 해결해 주실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3. 쉬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너희를 쉬게 하리라, will rest you)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자의든 타의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은 다 주님께로 나아오라는 초청입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해결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도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병자를 고쳐 주셨고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으면 다 내게로 나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간난과 물질의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살도록 축복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친히 가난한 자와 궁핍한 배고픈 자들을 초청하시면서 내게 와서 양식을 먹되 값없이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사회와 민족은 가난에서 부한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무겁고 피할 수 없고 어려운 짐인 죽음의 짐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시어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외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를 믿으면 죽음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4. 수고와 짐을 해결하는 비결입니다.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of me)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해결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멍에를 메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지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라”는 말씀입니다. sk 혼자 메는 멍에는 무겁고 힘들지만 주님과 함께 메는 멍에는 가볍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을 모방하라” “예수님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살면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에서 쉼을 얻는 비결을 터득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살기를 힘쓰면 최고의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어린 아이같은 사람에게 나타내신 복음
마 11:25-27 / 김충식 목사(서울연합감리교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지만 특별히 이스라엘을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소망은 먼저 유대인들이 모두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5장을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청했을 때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고 말씀하시며 첫 번째 요청을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는 그만큼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이스라엘이 먼저 예수님을 영접하여 구원받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혼의 깊은 사랑으로 이스라엘이 변화되어 회개하기를 원하셨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컫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거부하며 배척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의 소식을 듣고 헤롯왕은 현재의 왕의 자리를 빼앗길까봐 오히려 어린 아기들을 죽였습니다. 마태복음 21장에서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상속자를 죽이고 주인의 유산을 차지하고자 하는 농부들을 이야기하시며 자신이 백성들에게 거절당하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 이유는 그들의 기득권, 완악함, 의인의식, 영적 무감각으로 더 세속적이고 현세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지도자로 자처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완악함과 회개하지 못한 악한 세대를 책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서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마 11:17)고 말씀하시며 영적 무감각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기뻐할 줄 모르며, 하나님이 오셨음에도 영접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또한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 11:18,19) 하시며 그들의 의인 의식을 지적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면서 도무지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기는커녕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존 율법과 전통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멸시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기의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며 주님의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게 주시는 구원의 복음의 특성’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첫째로,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슬기롭다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숨겨져 보이지 않습니다.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는 본문 말씀처럼 복음은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셔야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 지혜와 슬기는 세상적인 학문과 지식을 습득함으로 인간을 교만하고 거만하게 만들어 영적인 안목을 어둡게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교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많은 이적과 권능을 행하신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지역 사람들의 완악함과 거만함을 질책하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많은 권능을 행하셨음에도 회개하지 않음으로 책망을 받은 도시입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가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마 11:21,23)라고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벳새다와 고라신은 에수님께서 기적과 이적을 많이 행하셨던 곳이고, 가버나움은 다른 성읍들보다 번영했던 도시로 예수님이 갈릴리 사역의 중심부로 삼으시고 활동하신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메시야를 메시야로 알지 못하고 예전의 교만을 고수하였으며, 다른 성읍이 가질 수 없었던 갖은 혜택과 특전을 누렸지만 주님의 말씀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계속 교만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때론 세상에서 얻은 기득권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갈 때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어느 날 알렉산더 대왕이 평상복 차림으로 시찰을 나갔습니다. 길거리를 가다가 오만하고 거만하게 행동하는 사람 한 명을 만났는데 군인처럼 보였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군인 같으신데 혹시 중령쯤 되시나요?’하며 그의 계급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맞아. 내가 군인인데 중령보다 조금 더 높아’라고 했습니다. 대왕은 ‘그러세요? 그러면 대령이신가요?’ 했더니 그는 ‘좀 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대왕은 ‘장군님이시네요. 그럼 준장이신가요?’라고 묻자 ‘좀 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소장을 거쳐 중장에 이르게 되자 그는 ‘맞아, 내가 중장이야.’라고 으스대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때 중장도 젊은 알렉산더 왕을 보면서 ‘가만히 보니 자네도 군인 같은데, 소위인가?’라고 묻자, 대왕은 ‘예, 저도 군인인데 소위보다는 좀 더 높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대왕과 중장 사이의 계급에 대한 대화는 중위, 대위를 지나 자신과 같은 계급인 중장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대왕은 ‘좀더’라고 대답하였고, 중장의 ‘그러면 대장님이신가요?’라는 질문에 ‘좀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서야 중장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며 ‘폐하시군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며 자신의 교만에 대한 용서를 빌었습니다.
구원의 복음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 라는 고백을 통해 자신이 가졌던 사회적, 학문적, 혈연적 배경을 모두 내려놓고 복음의 위대성을 강조했습니다. 잠언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심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위대하고 고귀한 복음이라 할지라도 인간적인 지식과 지혜로 가득 찬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교만으로 인하여 받아들일 수 없고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열려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학식만으로는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구원의 복음을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를 대표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어린 아이는 어떤 진리도 스스로 이해할 수 없음과 자신의 연약함과 무지로 인하여 아무 일도 스스로 처리할 수 없음을 겸손히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 같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지하고 무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과 지도를 받아야한다는 것을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지식이 많건 적건 간에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구원의 복음을 볼 수조차 없으나,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으로 이르는 복음의 길이 열려져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어린 아이(childlike)라고 표현한 것은 어린 아이의 천진하고 솔직하며 단순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어린 아이(childish)의 유치하고 어리석으며 철없음과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그 마음속에 세상 어떤 것에도 때 묻지 않은 순진하고 순전하며 솔직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겸손함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어린 아이와 같은 영적 순전함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심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와 같은 순전하고 깨끗하며 겸손한 신앙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 됨으로 주님이 주시는 복음의 축복을 누려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문 25절에서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칭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을 감추시고, 아린 아이와 같은 이들에게는 나타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하시며 감사와 찬양을 드리셨습니다. 더불어 하나님의 이같은 구원의 뜻에 대하여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라며 하나님을 적극 인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의 간디라고 불리는 조만식 선생님과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은 서로 인연이 깊은 관계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평양 산정현교회를 담임하셨던 때의 일입니다. 그 교회에 고당 조만식 장로님이 출석하셨는데, 장로님이 오산학교 교장으로 계실 때 주기철 목사님은 그 학교 학생이었습니다. 이후 주기철 목사님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님으로 오시게 된 것입니다. 어느 주일 조만식 장로님이 귀한 손님과 이야기 하다가 예배 시간을 10분 정도 늦었습니다. 장로님이 문을 조용히 열고 예배당에 들어갔을 때, 예배를 인도하던 주기철 목사님이 ‘조장로님, 오늘은 늦게 오셨으니 거기 서서 예배를 드리십시오’ 라고 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도, 예배를 드리던 모든 사람들도 깜짝 놀랐지만, 조 장로님은 조용히 뒤에 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주 목사님이 ‘조 장로님께서 대표기도를 하십시오’라고 하자, 조 장로님은 ‘주님, 용서해주십시오.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을 더 중히 여긴 이 못난 죄인을 용서해주십시오. 또한 이 일로 인하여 주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사오니 어찌 큰 죄가 아니겠습니까?’ 하면서 흐느껴 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복음을 열어 주십니다. 성경은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막 10:14,15)고 하시며 어린 아이 같은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더욱 어린 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셋째로, 주님은 어린 아이 같이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에게 절대적 안식을 주십니다.
인간에게 주어지는 모든 안식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육체적인 것이거나 영적인 것이나, 일시적인 것이나 영원한 것이나 모든 안식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고, 온 우주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무거운 멍에, 즉 죄와 율법의 짐을 벗어 버리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같이 마음을 열고 주님께로 나오는 이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참된 행복은 세상의 재물과 권세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들이고 그 분이 주시는 안식을 누릴 때에 비로소 보장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안식은 인간적인 노력과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겸손하고 순수한 심령으로 주님께 순종하고 의지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복음을 가진 이들에게 주님의 참 안식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중동에서 소가 멍에를 메고 밭을 가는 광경을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곳에서는 실제 멍에는 어미 소의 목에다 걸고 새끼소는 그 멍에 속에 목만 집어넣고 끌고 간다고 합니다. 어미 소는 혼자 멍에를 매기 때문에 힘들게 밭을 갈지만, 새끼소는 힘들이지 않고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아마 새끼소는 ‘아, 멍에를 메는 것이 이렇게 쉽고 가벼운데, 엄마는 괜히 땀만 흘리고 있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도 새끼소와 어미 소가 함께 무거운 멍에를 메고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멍에를 메고 끌고 가는 소는 어미 소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얼마나 큰 멍에를 지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지치고, 피곤하고, 상처받고, 아프고, 질병, 무기력, 무력감, 무의미, 끝없는 경쟁, 인간관계, 경제 문제, 환경 문제 등의 문제를 안고 있고, 신앙적으로는 율법, 종교, 의무, 수고의 짐 등 많은 것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멍에를 예수님께서 대신 져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멍에를 같이 메고 가는 짝이 되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지쳐 힘들어하는 자녀들의 슬픔과 질고를 친히 감당하시고, 이제는 새끼 송아지가 메는 쉽고 가벼운 멍에를 메고 따라오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예수님께 맡기고 우리는 순종하고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혹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간적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어미 소가 메는 수고의 멍에를 지고 가며 힘들어 하는 것은 아닌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주님은 구원의 복음을 받은 이들에게 참 안식과 평안을 주시고 우리의 멍에를 대신 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금년 성탄절에는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을 어린 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심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신다
마 11:25-30 / 정영도 목사
▣ 도 입 / <형식주의는 본질을 왜곡시킨다>
지난 29일에 있었던 일, 지난 4.24국회의원 보선에서 당선된 3명의 의원이 국회에 출석하여 첫인사를 하는 의원선서 하는 순서가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에게 복장이 불량해서 신고를 못했다는 것이다. 문제의원은 개혁당 유시민씨 인데, 이분의 그날 복장은 감색 양복 상의에 안에는 티샤스를 입었고, 아래는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나왔다는 것이다. 이 유의원이 단장에서자 여야 의원들이 "국회가 나이트 클럽이냐?" "탁구 치러왔냐?" 고 고함치는가 하면, 일부 의원들은 아예 퇴장해버렸다는 것이다.
이 일로 박관용 국회의장은 30일로 의원선서를 연기하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왜 유시민 의원이 이런 파격적인 행동을 했을까? 나대로의 해석, 국회의원들이 금뺏지를 양복에 달고 외양과 형식을 갖추는 것이 국회의원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의 본연의 사명은 국회의원인양 외양을 갖추는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국회의원들이 말은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운운하시지만, 사리사욕과, 당리당략 만을 일삼는 의원들이 얼마나 많은가?
유시민의 이러한 파격적인 행동은 국회에서 문제가 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그런 행위를 통해서 무엇인가 멧세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런 것이 국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한국교회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교회가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당, 최신장비를 갖추었다. 성도들이 깔끔한 정장의 옷을 차려입었으며, 목사는 화려한 까운을 입고, 찬양대의 관현악에 맞춘 웅장한 노래 소리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하고는 전혀 거리가 먼 형식이 될 수 있다.
형식은 아무렇게 돼도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 형식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우리를 영적으로 잠들게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형식이라는 틀 속에서 타성에 젖어 잠들기가 쉽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향한 영적 준비가 없는 예배, 하나님을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비함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예배의 본질인데, 이러한 것을 무시하면 하나님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예배가 될 수 있고, 인간적인 모임으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소임-주의 백성들을 천국으로,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올해의 우리 교회 표어-"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자"
1.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된다.
1)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의 표적
① 하나님께서는 주를 믿는 자들에게 숨겨진 천국을 비밀을 드러내신다.
② 마음의 불안에서 평안으로,
③ 슬픔과 근심으로부터 해방되어 기쁨을,
④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만족, 메인 것으로부터 자유
2) 그리스도의 안식으로의 초대(28-29절)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3)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2. 누가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비유-어린이를 통해서 천국의 비밀을 드러내셨다.
(마 18:2)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마 18: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1)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나타내시는 사람은?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신다.
① 어린아이들의 특성 어린아이는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배울 점은
# 가식이 없다. 꾸밈이 없다. 외식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진솔하게 된다. 형식주의자-겉과 속이 다른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다. 형식주의자들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다.
# 단순함, 천진난만하다. - 근심과 염려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단순해야 한다.
주님을 믿으면 믿을수록 주님을 의뢰하고 단순해져 간다.
# 타산하지 않는다. 꾀를 부리지 않는다.
-따지고 꾀를 부리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② 어린아이들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주님은 그 나라를 경험하게 하신다.
2)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지 않고 숨기시는 사람
①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 / 마음이 교만한 사람, 스스로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숨기신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마 13: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아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영적 생명이 없다.
② 이 세상에 교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 예수님 한 분 외에 겸손한 자는 없다.
나는 교만한 인생입니다. 이것을 알고, 자신을 주 앞에서 낯추면 하나님께서 겸손한자로 여기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진정 겸손한 자로 보이게 될 것이다.
3) 내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겸비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 있을까?
①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날마다 스스로를 낮추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겸손한 자로 보시고, 사람 또한 그를 겸손한 자로 여길 것이다.
② 주님의 낮아지심
예수님처럼 그렇게 해야 한다. 주님은 본시 겸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스스로를 낮추신 것이다.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3. <적 용>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천국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그리스도의 학교에서"(In the school of Christ)
마 11:25-30 / 이종윤 목사
인간에게 계속해서 전달되고 전수되어 온 지식은 개인, 가정, 사회 그리고 특히 학교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라고 언급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입각해 볼 때 예수님의 학교는 세상에서 계속 전달되어 온 지식의 전수와는 달리 인간의 영혼에 쉼을 주는 학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영혼의 쉼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학교에 들어와야 하고 다음과 같이 그 분의 부르심에 응답하여야 합니다.
Ⅰ. 내게로 오라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초청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큰 복음의 소식입니다. 국적, 종족, 학문, 혈통, 배경, 성품 그 어떤 것도 주님의 부르심에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수고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곤고하고 연약하여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죄 짐을 해결 할 수 없어 구원의 주를 소원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주님은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학교에 들어오는 사람은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이 복음은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Ⅱ. 내게 배우라
구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영적 배움을 요청하십니다. 내게 배우라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 중 “learn of me”는 예수님에 관하여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 분을 배우는 것입니다. 즉 인격적인 교재를 통해 그 분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그가 하신 그대로 우리도 행하는 것입니다. 또 “learn from me”는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들을 때에 성령께서 해석해 주시고 또한 해석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어 진리의 지식을 더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온유는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유익을 주는데 초점을 맞추는 마음으로서 이를 위하여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Ⅲ. 내 멍에를 메어라
소에게 멍에를 메우는 이유는 주인의 말에 복종케하고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가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모시는 사람들은 생각, 말, 행동 등 모든 면에서 주님께 완전히 복종 하고, 그의 멍에를 매고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반드시 행위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행위가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매지 않았다는 것이며 이들에게는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Ⅳ.더불어 일하라
"그리스도의 멍에를 함께 메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멘 사람마다 같은 발걸음을 걷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많은 동역자들과 함께 주님의 일을 했듯이 우리도 함께 같은 멍에를 메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결론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와같이 주님께 나아오고, 주님께 배우고, 주님의 멍에를 메고, 더불어 일하는 사람들은 항상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을 배우게 되며, 주님의 멍에가 쉽고 가벼운 것처럼 그의 마음에 쉼을 얻게 됩니다. 세상의 선생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당신을 구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을 배우고 바르게 따라가는 그리스도 학교의 특등생이 다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라!
마 11:25-30 / 전순기 목사
성경에는 인생들을 부르는 여러 가지 별칭들이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습니다(약4:14). 또 이사야서는 말씀하기를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라고 했습니다(사40:6,7). 오늘 말씀에서는 우리 인생들을“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와 같은 별칭들은 인생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안개 같고 풀 같은 인생이라는 별칭은 인생이 얼마나 짧고 덧없는 존재인지를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는 별칭은 인생들이 그 짧고 덧없는 인생을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야 하는 존재인지를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세상에 수고하지 않고 무거운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사람들은 흔히 남들은 다들 편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고 푸념을 잘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볼 때에 부자들은 수고와 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또 배우지 못해서 한이 맺힌 사람들 생각에는 많이 배운 자들은 수고와 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병든 자가 볼 때는 건강한 자들에게는 수고와 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화) 어떤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아홉 살 때였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은 형도 없고 누나도 없어서 공부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답니다. 숙제를 해야 하는데, 숙제를 하다보니까, 하기 싫고 꾀가 나더랍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할머니가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할머니는 참 좋겠다.”“뭐가 좋아. 이놈아!”“할머니는 숙제 안 해도 되잖아!”그랬더니 할머니 하시는 말씀이 “야! 이놈아. 인생은 다 제 짐이 한 짐이란다. 너희 애비는 너희들 먹여 살리려고 일하고 돈 버느라고 한 짐. 네 어미는 밥하고, 빨래하느라고 한 짐. 넌 이놈아 학생이니깐 공부하고 숙제 하는 거 한 짐이야!”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래서“그래도 할머니는 짐이 없잖아요. 할머니는 거기에 해당이 안돼요!”“아빠는 돈 버느라 한 짐, 엄마는 빨래하고 밥 하느라고 한 짐, 어린 손자는 공부하고 숙제하느라고 한 짐인데 할머니는 짐이 없잖아”그랬더니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이“야! 이놈아 나는 살 것 다 살아서 어떻게 잘 죽을까 그게 한 짐이란다.”하시더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인생 중에 수고하지 않고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다 죽는 게 인생입니다. 이런 불쌍한 인생들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인생의 멍에와 짐을 지고 가는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가지는 자기 혼자서 인생의 멍에와 짐을 지고 가는 세상의 방식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인생의 멍에와 짐을 주님과 함께 지고 가는 방식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어떤 방식으로 인생의 멍에와 짐을 지고 살아오셨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점검해 보시고, 인생의 멍에와 짐을 올바르게 다루는 삶의 방식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혼자서 지고 가는 인생의 멍에와 짐
먼저 자기 혼자 힘으로 인생의 멍에와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들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이 씌워주는 멍에를 쓰고, 또 세상이 지워주는 짐을 지고 사는 인생살이가 너무 수고스럽고 힘들다는 겁니다.
세상이 씌워주는 멍에가 무엇이며, 세상이 지워주는 짐은 무엇입니까? 세상에 태어나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여러 가지 의무와 책임이 멍에고 짐입니다. 가정에서 부모 노릇, 자식 노릇, 남편 노릇, 아내 노릇 하는 것, 시부모 노릇, 며느리 노릇 하는 것, 이런 것들이 다 멍에요 짐입니다. 이 멍에와 짐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또 직장생활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직책을 감당하는 것도 다 세상이 내게 씌워주는 멍에요 짐입니다. 그 직책이 크든 작든 제대로 감당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세상이 씌워주는 멍에와 짐이 이렇게 힘들고 무거운 것입니까? 그건 죄 때문이라고 성경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 여자들의 수고와 짐이 무엇인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자들의 수고와 짐은 대부분 자식 낳아 기르는 데서 오는 것이며, 또한 남편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남자들의 수고와 짐은 17절 이하에서 말해 줍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남자들은 일을 해서 처자식을 부양해야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고 수고스럽고 짐스러운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남의 돈 벌어먹기가 쉽지 않아서 직장생활에서, 사업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게 남자들의 인생이라는 말씀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수고하고’라는 동사는 능동태로 되어 있고, 무거운‘짐을 진’이라는 동사는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능동태라는 말은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 행위를 하는 것이고, 수동태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주인공이 되어 내가 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인생들의 수고는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말이 되고, 짐을 지는 일은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사실 인생들이 겪는 대부분의 고통과 수고는 스스로의 욕심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좇아 온 것들입니다. 세상은 우리 인생들의 욕망을 끝없이 자극해서 우리를 종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욕심에 사로잡힌 인생들은 끊임없이 성취하려고 하고, 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쉴틈없이 휘몰아쳐 수고롭게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짐을 지워 힘들게 합니다.
예화) 우리 목회자들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교회 비전이라는 말로 세워진 목표가 있는데, 대부분의 교회들이 세운 비전이 평생이 가도 이뤄지기 힘든 것들이 많습니다. 비전을 세우는 일이 잘못되었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비전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교회들에 세워 놓은 교회 비전이라는 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냐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겁니다.
교회들이 세운 교회비전이라는 게 그 목사님의 능력이나 교회의 형편과 처지로 보아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목표입니다. 그런 가당치 않은 목표를 비전이라고 외치고 자신을 몰아간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런 것은 주님이 주신 비전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나 교인들의 형편과 수준을 알지 못하고, 부리는 과한 욕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런 목표를 누가 강요한 게 아닙니다. 그 교회 목사 자신이 자신에게 지운 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자신도 수고스럽게 되고, 교인들에게도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면, 젊은 부모들이 자기 자녀 교육의 목표를 너무 높이 잡는 경향이 많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자꾸 비교하며, 소위 선행학습을 시키려고 합니다. 선행학습이 가능한 아이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아이들이 다 가능한 게 아닙니다. 부모들이 자기 아이의 수준이 어떤지를 모르고 너무 욕심을 부린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원하는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도 수고롭고 아이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짐을 지워준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살면 부모나 아이는 한 순간도 행복하게 살 수가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되고, 사업을 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됩니다. 욕심이 삶을 힘들게 만듭니다.
사람이 욕심에 붙잡혀 살아가면, 어떤 인생의 결말에 이르게 되겠습니까? 전도서에서 솔로몬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전도서 1장 2절 이하에 “전도자(傳道者)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2장 22절에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23)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의 경우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에 최고로 성공한 인생이 되고, 인간의 모든 욕망을 마음껏 채워 본 행복한 경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허무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생들에게 솔로몬과 같은 삶은 그림의 떡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절된 꿈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늙어 죽고 마는 게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평범한 인생들은 얼마나 더 허무하고 씁쓸한 열매를 거두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이 주는 멍에와 짐을 나 홀로 지고 산 인생의 결말입니다. 참 인생이 불쌍하고, 너무 허무하지 않습니까? 혹시 이게 우리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정말 이렇게 살다가 인생을 끝내실 겁니까? 그래선 안됩니다.
주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오늘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인생의 멍에와 짐을 당신과 함께 지고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지는 인생의 멍에와 짐
주님은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고 주님이 지워주시는 짐을 지라고 하십니다. 그게 마음에 쉼을 얻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믿으면 모든 인생들이 공통적으로 지고 가야 하는 인생의 멍에나 짐이 없어진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생이 지고 가야 하는 멍에와 짐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공통적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혼자 지고 가느냐 아니면 주님과 함께 지고 가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제 인생의 멍에와 짐을 주님과 함께 지고 가기로 결정하면, 인생의 멍에와 짐으로 여겨지던 그 일들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소가 멍에를 멘다는 말은 주인이 쓸 수 있도록 굴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멍에를 맨 소는 길들인 소를 의미합니다. 소가 처음부터 고분고분 주인의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밭을 갈지 않습니다. 소가 주인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듣게 되려면 훈련을 받아서 소의 고집이 꺾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말은 주님이 쓰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주님께 굴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뜻, 내 의지! 내 소원! 내 주장!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멍에를 멘다는 건, 주님께 내 인생의 모든 주권을 이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 나의 권리를 이양하면,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요? 이제부터 주님은 나를 당신의 일군이 되게 하십니다. 이제 우리의 삶은 사명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에베소 2장 8-10절을 보면, 우리는 착한 일을 해서 구원받은 게 아니고,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선한 일을 열심히 하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착하게 살아야 할 사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이하에서는 선한 삶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사명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일군으로서 살아가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직업을 바꾼다든가, 환경을 바꾸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멍에를 멘다는 말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대로 하되, 그 일을 하는 동기와 목적을 바꾸라는 말입니다. 지금 있는 그 자리, 지금 하고 있는 그 일, 지금 만나고 있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라는 겁니다.
예컨대, 주님의 멍에를 메지 않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직장은 돈 벌이의 수단이고, 자기 성취의 수단으로 봅니다. 그래서 윗사람 눈에 들기 위해서 윗사람의 눈치를 보고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멍에를 멘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섬겨야 할 주인은 주님이신 것을 알기에, 사람을 의식하기보다는 주님을 더 의식하고 행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합니다.
주님의 멍에를 멤으로 사명을 발견한 사람은 지금 있는 그 직장,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그러면 직장생활이 달라집니다. 비록 원하는 만큼 수입이 들어오지 않아도 기쁘게 살 수 있고, 직장생활에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사명자가 되고 일군이 되라는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들은“내 일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내가 언제 주의 일을 한단 말인가? 내일 하나 잘하기도 힘든데, 주님 일을 한다는 건 얼마나 힘들까? 나는 못해!”라는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아셔야 할 건 주님께서“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일군이 되고 사명을 감당한다는 게, 그냥 앉아서 생각만 하면, 너무 어려운 일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사명을 감당하기로 마음을 먹고 뛰어들면,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멍에가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주님은 주님의 멍에가 쉽고, 주님이 지워주시는 짐이 가볍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의 의미를 알려면, 중동 지방에서 소에게 멍에를 메우는 방식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소에게 멍에를 씌울 때에 한 마리에게만 씌워서 밭을 갈게 합니다. 그러나 중동지방에서는 두 마리의 소에다가 멍에를 같이 씌워서 밭을 갑니다.
두 마리의 소가 같이 멍에를 메고 밭을 갈려면, 서로 보조가 맞아야 하는데, 소 두 마리가 보조 맞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두 마리를 서로 싸움을 시켜서 힘이 센 소에게 주도권을 갖게 한다고 합니다. 이제 한 마리가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면 나머지 한 마리는 보조를 맞추어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또는 새끼소를 훈련시키기 위해서 어미 소와 새끼소를 같이 멍에를 씌워 밭을 갈기도 하는데, 어미 소와 새끼소가 함께 멍에를 쓰고 갈면, 새끼는 어미가 하는 대로 따라하면서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함께 멍에를 쓸 때에 어미소에게 힘이 다 가기 때문에 새끼소에게는 힘이 가지를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기로 하면, 주님이 나와 함께 멍에를 메시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멜 때는 어미소와 새끼소가 함께 멍에를 맨 것과 같은 상황이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이 주시는 짐을 지기로 하면, 주님이 나와 함께 멍에를 메시는 데, 어미소와 새끼소가 멍에를 맨 것처럼 주님께서 다 져 주시고, 나는 내가 감당할 만큼 조금만 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면, 이제 우리는 나와 함께 멍에를 메고 계시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주의 일군이 되고 사명자가 된다는 말을 했는데, 사실은 내가 주의 일을 한다기 보다는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겁니다.
예화) 언젠가 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아빠가 어린 딸과 함께 정원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아빠 옆에서 신이 나서 잡초를 뽑기도 하고 이러 저리 뛰며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큰 돌을 옮기려고 했습니다. 그 때에 딸아이가 와서 “아빠 나도 할 거야! 내가 이 돌을 옮길 거야!”라고 합니다. 아빠는 “딸아, 이 돌은 너무 무거워 너는 들 수가 없어!”그래도 딸은 자기도 하겠다고 우깁니다.
그 때에 아빠는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하고 딸과 함께 그 돌을 들어서 옮겼습니다. 어린 딸아이가 한 일은 아빠가 돌을 옮길 때에 옆에서 손만 댄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어린 딸은 아주 흐뭇해하면서 “아빠, 우리가 이 돌을 옮겼어요!”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 때에 아빠도 흐뭇한 미소를 만면에 지으면서 “그래, 딸아 우리가 함께 이 돌을 옮겼구나!”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굴복하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메고 가야할 무거운 멍에와 지고가야 할 무거운 짐을 함께 져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능히 모든 일을 감당케 하시고 승리케 해 주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아빠와 함께 큰 돌을 옮긴 딸아이가 느꼈던 기쁨과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을 배우라!
주님과 함께 인생의 멍에를 메고 짐을 지기로 한 사람은 이제 날마다 주님께로부터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온유와 겸손은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항상 마음에 쉼을 누리며 살고자 한다면, 삶의 자세를 바꿔야 합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건, 어떤 마음이며, 어떤 자세를 말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모습을 주목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빌2:5-8).
온유와 겸손은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당연히 주장할 수 있는 자기 권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대접받고자 하는 마음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명예를 지키려고 하는 자존심도 내려놓는 겁니다. 쉬운 말로 해서 “나 잘났다!”하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는 겁니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냐?”는 섭섭해 하는 마음도 버리는 겁니다. 그냥 주님의 처분에 맡기는 겁니다.
온유와 겸손은 나의 삶의 모든 환경이나 사람들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님의 말씀에 겸손하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심으로 모든 권위에 복종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또 서로 복종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자기보다 윗사람에게 순종하고 복종합니다.
육신의 본능을 따라 사는 삶은 언제나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높이고, 자기만족과 영광을 드러내는 쪽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서로 첨예하게 부딪치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왕이 되거나 주인이 되기 어렵고, 두 사람이 동시에 자존심을 세우기란 쉽지 않은 법입니다. 세상에는 아무도 스스로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항상 힘에 밀려서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속이 상하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왕으로 삼지 않고, 주인으로 내세우지 않기에, 자기 영광과 만족을 스스로 구하지 않습니다. 선생과 주님이 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너희도 이와 같이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하셨기에, 주님을 본받아 사람들을 섬기려고 합니다. 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하기를 기뻐합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운 사람들은 힘에 밀려서 낮은 자리에 내려간 게 아니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낮은 자리에 내려가 앉았기 때문에 결코 자존심이 상할 일이 없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주님이 알아주시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 상할 일도 없습니다.
또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주님께서 내 몫을 챙겨주실 줄로 믿기 때문에 자기 몫을 챙기는 싸움에 끼어들어 싸우며 마음 상할 일이 없습니다. 주님으로 만족하고 주님의 선하신 처분을 믿기에 설령 자기 생각에 자기 몫이 적게 돌아왔다고 해도 속상해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마음에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수고하지 않고 짐을 지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죄악 된 세상에서 인생들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멍에요 짐입니다. 인생의 멍에와 짐을 혼자서 지고 가려고 하면, 그 멍에와 짐의 무게에 눌려서 결코 마음에 쉼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인생의 모든 멍에와 짐을 혼자서 지지 말고 함께 지자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주님과 함께 지는 멍에는 쉽고, 주님과 함께 지는 짐은 가볍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당신과 함께 멍에를 멘 후에는 당신에게로부터 참 쉼을 누리는 인생의 비결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참 쉼을 누리려면 주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의 멍에를 메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주님께로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항상 마음의 쉼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로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운다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진심으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기로 작정하고 따라간다면, 점차로 우리 마음에 주님의 평안과 쉼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부디 오늘 말씀을 들으신 이후로,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로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우기로 결심하셔서 참 마음의 쉼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린이 전도사역
마 11:25-30 / 이필재목사(갈보리교회)
이번 주간부터 3주간 해마다 하는 여름성경학교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준비를 아주 철저히 하고 외국에서 원어민 교사도 모셔왔고 장비도 지난 주간에 미국에서 다 공수해서 어린이들을 위한 도구를 성의껏 준비를 잘해서 시작할 것입니다. 일 년 중 어린이 전도 사역의 비중이 제일 큰 축제적 사역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기간에는 평소에 교회 다니지 않던 어린이들도 많이 초대가 됩니다. 많은 효과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효과가 오늘 예수님의 성경말씀에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을 우리가 읽었습니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예수님의 세 가지 큰 실망기록이 나타나는 성경장입니다. 기대에 어긋난 탄식을 세 번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세례요한 때문에 예수님이 좀 실망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있는데 이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메시야라고 제일 먼저 사람들에게 소개한 사람이고 “나와 그를 비교하면 나는 굽혀 그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이런 차별화를 말해서 예수님도 세례요한을 무척 좋아하신 기록이 나오는데 감옥에 앉아 있다가 메시야관이 흔들리는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메시야라면 지금 헤롯이 하고 있는 이 불의한 일을 왜 가만히 보고만 계시나이까?” 사실 이 세례요한의 설교는 처음부터 ‘사회 복음’이라고 하는 사회 정의 설교였습니다. “군인들은 폭력을 행하지 말 것이며 세금 걷는 사람들은 부정하지 말라. 정한 세 이외에는 걷지 말라. 또 부한 자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옷과 먹을 것을 나눠주어서 구제할 것이라.” 이 사회 정의를 세례요한이 설교한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세례 요한이 불의한 임금 헤롯 때문에 죄도 없는데 감옥에 갇혀서 얼마 후에 목을 베어 죽이려고 하는 흉계에 지금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의 생각에는 “왜 메시야가 이런 사회 불의를 보고도 가만히 계시나이까? 당신 메시야 맞습니까?”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메시야는 당신 말고 우리가 또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당신이 메시야라면 이 불의한 헤롯을 당장 처분해 버려야지 이렇게 가만히 계시나이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생각이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이여! 당신도 나도 똑같이 헤롯에게 죽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혹시 당신이 지금 감옥에 있으니까 그 죽음이 두려워서 살려달라고 비겁하게 된 것입니까?” 이렇게 예수님이 반응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대해서 실망함과 똑같이 주님도 조금은 실망하신 기록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다음 실망은 예수님 전도 사역에 대한 반응 때문에 예수님이 실망을 하셨습니다. 유대 나라 북쪽 지방에 가면 갈릴리 바다 위쪽으로 고라신이라는 동네가 있고 벳새다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그 지방에 가서 전도활동을 제일 많이 하셨습니다. 특별히 그 지역에서 예수님의 활동은 기적 사건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기적 사건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이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 모였으니까 일만 명도 더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에 참여해서 배불리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제일 많이 배척했습니다. 갈릴리 바다 옆에 가버나움이라는 동네는 예수님의 선교 센터라서 거기서 선교를 제일 많이 하셨습니다.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가버나움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윗부분에 가보면 예수님의 저주 선언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두로는 B.C. 2750년경에 세워진 도시이고 시돈은 B.C. 1400년경에 건설된 도시인데 이 도시들은 대표적 우상의 도시입니다. “너희들은 그것만도 못하다.” 그렇게 예수님이 선언하신 것입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이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다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그렇게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소돔과 고모라에 가서 내가 너희들에게 행한 이 설교와 이 권능을 행하였다면 그 성 사람들이 다 나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가버나움은 소돔과 고모라보다도 못하다.” 제일 많이 설교하시고 제일 많이 전도하시고 제일 많이 기적을 베풀어준 그 지방들이 전부 예수님을 배척해서 예수님에게 실망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설교 말씀이 오늘 성경에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실망 발언입니다. 그리고 강조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기대했던 사람들의 냉담 반응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가장 영력이 있고 예수님의 이 선교 사역에 절대 도움이 될 만한 인재들이 언제든지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대감을 가지고 그렇게 많은 설교를 하시고 그들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서 실망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의 기쁨이 예수님의 마음에 위안이 되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좋아하고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어른들의 관심은 아주 똑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11장인데 18장에 가면 예수님 제자들의 관심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라고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어른들의 관심은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들도 모두 어린 시절을 경험했고 수십 년 아들딸이라는 어린이와 손자, 손녀들 다 데리고 살아가며 날마다 어린아이들과 접촉합니다. 특별히 교회는 어린이 문화 공동체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다툼을 벌이고 예수님께 그 질문의 해답을 얻고자 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물 교육을 시켰습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그러면 이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설교를 알아들었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18장에서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데 20장으로 가보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살로메가 자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요청하지 않습니까? “내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소서. 왕이 되실 거 아닙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더 실망하십니다. “내가 가는 길을 너희가 알겠느냐?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 반문하셨습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길과 정반대의 길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내가 지금 가고 있다. 무엇을 생각하고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하느냐?” 예수님의 실망입니다.
그러면 확실해진 것이 있습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를 낮추고 어린이로 돌아가면 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 길을 안갑니다. 제자들도 안 갔습니다. 어린이들을 이해해보면 어른과 아주 다릅니다. 그들의 순수성은 예수님이 바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주 어린이들과 정 반대의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까? 어른들이 왜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했는가를 우리가 철학적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경험에 의한 누구나 다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갖고 살아갑니다. 일차적 고정관념의 연령이 18세입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18세 이 이상은 사람이 더 성장하지 않는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연령이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성인 기준이 18세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공산국가에서는 18세까지는 교회 가는 것을 국법으로 금지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못 가게 하면 예수쟁이는 안 된다.” 그래서 국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자기 주관이 뚜렷해진 시간인데 2차 고정관념의 연령은 30세입니다. 그 후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절대 변하지 않는 고정관념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사람은 더 어렵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많이 배울수록 이기주의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책 좀 읽고 사회적 지위가 생기면 누구 말을 듣습니까? 절대로 설득 못합니다. 내가 제일 잘나고 똑똑한데 누구 말을 듣겠습니까? 자신의 지혜와 슬기가 돋보이게 하려는 데만 신경을 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22년 동안 대학교수들과 생활하지만 항상 내가 대화해보면 느끼는 것이 나보다 못난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제일 지혜자는 서기관들이고 슬기 있는 자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아무도 못 따라갑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과 왜 그렇게 많은 마찰을 가지고 왔는가? 그들은 고정관념이 누구의 말도 안 듣게 되어 있습니다. 슬기롭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지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더 많이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난 백성들이 성경에 뭐라고 합니까? “다 놀라 가로되 이는 그 가르치심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 같지 아니함일러라.” 그러기 때문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죽인 것입니다. “저건 누구인데 저렇게 잘난 체 하는 거야?”
사실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성경에 보면 지겨우리만치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는 게 목적이 아니고 그 반대였습니다. 예수의 설교와 행동에 허점을 잡아내려는 행동을 끝까지 했지 않습니까? 이게 지혜자요 슬기로운 자들이 행한 행동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내 마음을 고치려는, 내 마음을 양보하려는 것의 정반대란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같이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같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변했습니까? 베드로를 보십시오. 자기 목적의 성취를 미리 정해놓고 예수님의 인정이 필요하니까 자기 목숨을 담보로 해서 자신감 있게 발표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절대로 주를 버리지 아니하겠나이다.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현장에 있는 다른 제자들과도 차별화 선언을 합니다. “여기에 서있는 이 시시한 녀석들이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아닙니다. 아시죠?” 그 소리를 주님이 믿으셨습니까? “그러느냐?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도 안 믿으셨습니다. 이게 어른들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믿지 마시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다 이중성입니다. 자기 목적만을 위해서 삽니다. 교회 안에서도 문제가 거기서 나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바라본 인생이 여기 세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수고하는 존재로 보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수고하고”라는 이 단어는 헬라어의 해석이 “코피안테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피곤하고 고생한다”는 말입니다. 혹은 “불안하다”는 현재 분사로 사용되는데 계속적으로 불안하고 피곤하고 고생한 존재의 상태를 말할 때 이 “코피안테스”라고 하는 단어를 썼습니다.
옛날에 많은 사람들이 계산을 했습니다. “과학의 발달과 경제 발전이 인간에게 쉼을 줄 것이다. 이게 유토피아이다.” 지금 우리들은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옛날보다 더 힘듭니다. 첨단 과학시대가 되어서 컴퓨터 하나로 사람 100명분의 일을 지금 넉넉히 해내는데 그러면 99명은 편안하게 살아야 되는데 그런 것이 없을 때보다도 더 바쁘고 일이 더 많습니다. 경제 발전을 보십시오. GNP가 높은 나라일수록 백성은 살기 힘듭니다. GNP가 올라가면 사람이 편안하고 살기 좋아야 할 텐데 현재 우리나라는 저 출산 국가입니다. 옛날에 GNP가 1천 달라도 안 되던 시절에는 엄마들이 보통 아기를 10명까지도 낳아서 잘 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2명도 힘듭니다. 정부가 길러주지 않으면 안 낳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아마 이 “코피안테스”, “수고”라고 하는 단어를 생각할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문제에 일찍이 터득한 진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만나 인사할 때 항상 “수고하십니다.” 인사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성서적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종신토록 수고합니다. 인간 존재의 정체성이 그렇습니다. 시편 90편 10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이 지혜의 말이 옳습니다. 하와에게도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요” 수고하는 인생입니다. 대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수고를 시간적 제한을 두기를 좋아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만 다 기르면 한숨 돌리겠지.” 이렇게 계산한다든지 “자녀들이 다 결혼하면 그때 편안하게 살겠지” 이렇게 계산하기도 하고 “아이들 학교만 다 졸업시키면” “은행 빚만 다 갚으면” “다음 달에 곗돈 끝나면 괜찮겠지.” 시간적 제한을 두고 자기의 쉼의 인생을 즐기려는 계산을 늘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됩니까? “종신토록” 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항상 지금이 제일 좋은 때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제일 지혜롭습니다.
두 번째 주님이 바라본 인생은 “무거운 짐 진 자들아!”라고 했습니다. 문화적 인간은 의무적 제도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의 존재입니다. 여기 학생들도 있는데, 학생의 의무는 공부입니다. 학업을 소홀히 했다가는 퇴학당합니다. 무섭습니다. 의무가 주어집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능력이 없는 회사 사원은 감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짐을 지고 갑니다. 짐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짐이 너무 무거워서 사람은 때로 짐을 포기하는 수단으로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까? 이게 우리 현실입니다. 어떤 때는 나에게 나 자신이 짐스럽습니다. 연약한 몸 때문에, 고약한 성격 때문입니다. 저는 상담하다가 이런 상담도 많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저 같은 인간은 죽어야 됩니다.” 자신이 짐이 되어서 하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죄의 짐이 너무 양심의 가책을 압박함으로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이러다가 죽지 않을까?’ 죽음의 불안함 짐, 천재지변에 대한 공포의 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짐… 모두 짐입니다. 바울 같은 성자도 자기 성직 사명 수행에 있어서 “가시채로 뒷발질하기가 내게 고생이라.” 옛날에는 구두닦이가 소년이어서 구두닦이 소년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노인들이 그런 일을 하시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떻게 되어서 우리나라 대통령은 마지막에는 다 어려워집니다. 대통령도 짐입니다. 짐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이 찬송 얼마나 잘 지었습니까?
그러면 이런 인생들의 해결 방법은 없는가? 오늘 주님은 제시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이렇게 갈 길을 정해주셨습니다. 오라는 요청이 있을 때 사람은 살맛납니다. 갈 때가 있는 사람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오늘 아침 우리 모두는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초대의 음성을 듣고 비 오는 거리에 이 자리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초대장은 항상 우리에게 열려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대한민국에도 6만개의 교회가 종을 울리고 차임벨을 울려서 “여러분! 다 이리로 오십시오. 주님 앞으로 오십시오. 누구든지 오십시오. 제한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 교회에서 이번에 이렇게 부흥회를 합니다. 여러분 오십시오.” 저는 오늘 저녁부터 기도원에 가서 일주일동안 부흥회를 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청년들이 “청년 집회를 하니까 여러분 오십시오. 찬양 특별 집회가 있습니다.” “내일부터 여름성경학교 있습니다. 오십시오.” 교회가 항상 초청 카드를 온 세상에 주님의 음성을 가지고 보냅니다. 제가 제주도에 부흥회를 하러 갔더니 현수막을 뭐라고 붙여놨는가 하면 “왕방 드름방 전업소”입니다. 그리고 “강사 이필재 목사”라고 써놨습니다. 내가 저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제주도 사람들은 다 압니다. 오셔서 들으시고 전하시오. 그런 소리입니다. 제주도 방언으로 써놨습니다. 언제나 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많은 자도 오라.” 항상 초대장을 보내고 “인생의 문제가 있는 사람은 다 오라.” 이렇게 하지 않습니까? 잔치를 마련하고 손님을 초대하였더니 모두가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화가 나서 거리에 나가서 “초대 손님의 자격이 없는 모든 사람들을 불러오라.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초대입니다.
왜 오라고 하셨는가? 주님이 답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실제적으로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율법주의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율법주의란 뭐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이행하였을 때 구원이 성취된다고 믿는 교리입니다. 율법이 613개인데, 그것을 다 지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율법주의에 사로잡혀서 이 지킬 수 없는 613개의 율법 조항을 놓고 날마다 고민하는 것입니다. 지킬 수는 없고 지켜야 되기는 하겠고 그래서 형식주의라는 또 하나의 가면을 쓰고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가면을 벗어버려. 회칠한 무덤이야. 다 죄인이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율법을 버리고 복음 앞으로 오라. 율법으로 구원 받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다 죄인이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율법주의의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아. 내 짐은 쉽고 가벼우니 복음 앞으로 오라. 믿음으로 다 구원을 받으라. 그렇게 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을 것이다. 영혼의 고통을 당하고 짐을 지고 있는 자여! 내게로 오라. 내가 그 짐을 벗겨 주리라. 인생을 고민하는 자여, 내게로 오라. 너희 인생은 내 손에 달려있느니라. 다 내게로 오라.” 다행히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너희들이라도 내게 왔구나. 고맙다. 저렇게 슬기 있고 저렇게 지혜 있다고 말하는 저 사람들은 하나도 안 오는구나. 자기들 앞으로 내가 가기 원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나를 오라고 한다.” 어린이들이 예수님 곁으로 다가왔을 때 예수님은 그 어린아이들을 보고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칭찬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린이 사역을 이렇게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여름성경학교 준비하면서 제가 생각했습니다. ‘어른 여름성경학교를 해볼까?’ 유대인들의 어린이 교육 3대 지침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유대 사회는 튼튼한 맥락을 유지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내가 절대적으로 존경해야 될 사람이 누구인가? 셋입니다. 첫째가 부모님입니다. “너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고난을 겪은 사람은 부모님이시다. 절대 공경해야 한다. 네가 죽을 때까지 부모에 대한 의무이다.” 이것을 가르쳐서 유대인 가정이 튼튼합니다. 두 번째는 선생님입니다. “네가 세상을 사는 그 모든 지혜는 그분들 때문에 너에게 생긴 것이다.” 절대 존경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 선생님입니다. 세 번째는 랍비입니다. “네 영혼의 인도자이다. 너는 평생 동안 그 분의 축복 없이는 절대로 안 된다. 두고 보아라.” 저는 은퇴하고 책 한권 남기고 죽으려고 합니다. 내가 경험했던 것을 적나라하게 발표하려고 합니다. 저는 경험이 많습니다. 이 랍비, 영혼의 인도자와 무엇이 잘못되었을 때 겪은 성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절대 사건이 생깁니다. 이것을 모르고 함부로 까붑니다. 그래서 유대 사회는 이 세 가지를 어린이들에게 절대 교육하면 튼튼합니다. 이번 3주간 여름성경학교 이러한 선한 열매가 풍성한 천국 잔치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최고입니다
마 11:25-30 / 김삼환목사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귀한 분입니다. 가장 높으시고, 모든 일에 그는 최고이십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 사건은 가장 큰 사건입니다. 인류역사에 오늘날까지 가 장 큰 뉴스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이 한 번의 뉴스로 이 세계와 우리 모든 인류는 은혜와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참 뉴스가 없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이 세상은 그 분으로 인하여 모두가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전에, 오늘,그리고 앞으로도, 좋은 뉴스가 없을 것입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새로운 뉴스 서비스가 하나 나온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Happy News. com 이 나왔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뉴스, 텔레비전, 신문 을 통해서 우리는 너무나 나쁜 뉴스에 접촉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불쾌한 뉴스와 교통사고, 수많은 사고와 화재테러, 전쟁, 부정부패, 뇌물, 구속, 온갖 파멸에 대한 뉴스만 사람이 끊임없이 듣고 살아갑 니다. 범죄한 우리 인간이 잠깐 듣기에 보기에는 좋은 것 같아도 우리의 성품이 잘못되고 파괴되며, 삐뚤어지고 공격적이며 이기적이고 부정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부터 그런 뉴스속에서 모두 일반화하면서 모방을 하게 되고 닮아가게 되며 또한 온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만들지 못하고 점점 더 나쁜 세상이 되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뉴스 책임이 큽니다. 우리가 모두다 나쁜 것만 들으니까 우리의 심령이 파괴되고, 마음이 파괴되며, 미래에 대한 꿈이 없어집니다. ‘‘아! 세상은 이런 곳이로구나, 이 세상은 모두다 이렇게 되어가고 있구 나.’ 이렇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피 뉴스라는 서비스를 하게 되었습니다. 참 잘하는 것입 니다. 정말 해피 뉴스는 어디에 있습니까? 굿 뉴스는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좋은 뉴스는 하나님의 아 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주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주님에게로 가면 누구든지 살아납니다. 이 세상의 뉴스가 아닙니다. 세상은 죽은 사건만 다루지만, 예수님은 살아나는 사건, 죽어도 사는 뉴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경험하게 됩니다. 그에게로 가면 전쟁이 아닌 평화의 뉴스를 듣습니다. 그에게 나아가면 저주가 아닌 축복의 뉴스, 더러움이 아닌 하늘의 뉴스를 듣습니다. 교회에 왜 나옵십 니까? 뉴스를 들으려고 나옵니다. 소리 들으려고 나옵니다. 기독교는 복음의 종교입니다. 소리의 종교, 말 씀의 종교입니다. 교회는 들으려고 옵니다. 좋은 뉴스를 듣기 위해, 영적인 뉴스를 들으러 옵니다. 위 로부터 주어지는 뉴스입니다. 이 뉴스는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며, 끊 임없이 주어집니다. 이 뉴스가 가는 나라와 민족마다, 개인이나 가정은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받습니 다. 민족마다 개인이나 가정이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은 좋은 뉴스 해피뉴스, 굿뉴스, 라이프 뉴스, 영원한 생명의 뉴스를 듣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저에게 오면 은혜를 받고 생명을 얻으 며 구원을 얻고 새로운 삶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들으러 옵니다. 말씀을 들으러 옵니다. 그래서 우상종교는 보러가지만, 교회는 들으러 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에스겔 37장 말씀처 럼 골짜기의 마른 뼈들도 살아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만 살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 씀은 오늘도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삶, 축복을 가져다 주실 줄로 믿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주님은 말씀 하셨습니다. 인생은 너무 피곤합니 다. 수고합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모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가 난은 짐입니다. 부자는 부자가 짐입니다. 배운 사람은 지식이 짐입니다. 못 배운 사람은 무식이 짐입 니다. 어디든지 우리 인간은 짐입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어깨에 짊어지는 짐이 짐입니다. 사업하는 사 람은 기업이 짐입니다. 자동차 타는 사람은 자동차가 짐입니다. 모두가 짐인 것입니다. 짐을 안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이사를 많이 했었습니다. 한 열 번 정도 했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가장 큰 재산은 책입니다. 어려서부터 책 모으는데 온 정성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교회에서 돈주면 책 사 는데 돈을 다 들어갔습니다. 책, 오직 책이였습니다. 아마 만 권 이상, 이 만 권 가까운 것으로 알고 있 습니다. 저는 책이 좋았습니다. 책같이 좋은 것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사하니 몸서리가 났 습니다. 책처럼 무거운 것이 없습니다. ‘아유~ 이걸 어떻게 하나’ 책이 그렇게 무겁고 짐이 되는 줄 몰랐습니다. 여러분 집이 커 보십시오. 좋은 줄 아십니까? 청소해 보십시오. 몸서리가 납니다. 집이 큰 것도 짐입니다. 짐아닌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살아보면 모두 짐입니다. 자기 자신도 짐이고, 당신도 짐 이며, 가족도 이웃도 짐입니다. 모두가 다 짐인 것입니다. 이 짐을 벗겨줄 이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 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짐을 벗겨 주십니 다. 그의 뉴스를 듣고 그를 만나며, 나아가면 인생은 뒤뜬 송아지 같이 모든 짐이 벗겨지는 줄로 믿습 니다.
찬송하는 인생이 됩니다. 그렇게 불평불만 하던 사람도 예수님 영접하면 한 순간에 찬송과 기쁨 과 감사가 넘치는 줄로 믿습니다. 저도, 우리 교회도, 많은 가족들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청소 년들이 부모 를 거역하고 말 안 들으며 폭력 부리고 막~ 나쁜짓 하던 아이들이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기쁨이 충만하며 좋아 그러고 공부 잘하며 성품이 변한다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굿뉴 스, 생명의 뉴스, 해피뉴스는 이 세상에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생명과 구원의 뉴스는 예수 그리스도 외 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이 없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나라는 해피 뉴스의 은혜와 축복을 받고 저주 에서 벗어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앉은뱅이를,.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열명의 문둥병자를 건강하게 만드셨습니다. 세리, 죄인, 창녀, 다 주님께로 나아가면 이 해피 뉴스로 새로운 삶이 주어지고 저주에서 벗어나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예수 안에는 어두움 불의, 부정 불행은 없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심이 없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놀라운 축복의 주인공이 되고 은혜의 주인공이 되며, 세계 인류 온 역사의 복의 근원이 되고, 여러분의 가문은 귀족의 가문이 되며 명문가 의 가문이 되고, 여러분 인생은 승리의 인생이 될 것이 확실합니다. 할렐루야! 12월 16일 동아일보에 이런 것이 나왔습니다. 16일이니까 그저께입니다. 미국에는 만성 통증 환자가 천만명입니다. 아프기 는 아픈데 병명이 없습니다. 병원에 가면 모르겠다라는 것입니다. ‘김집사님, 그런게 있지요?’ 모르는 것입니다. 미국같이 발달한 현대의학도 못고칠 병이 말할 것도 없거니와 병명을 못 찾아내는 것이 많 습니다.
본인은 죽을지경이덴 병원에 가면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다. 천만 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스탠퍼드 대학의 크리스토퍼 참스박사는 놀라운 비밀 하나를 찾아냈습니 다.. 이런 환자를 어떻게 고치느냐? 말로서 자기 스스로 고치는 것입니다. 어떻게 고치느냐? ‘나는 안 아파 안아픕니다’. 이것을 30분, 1시간 반복합니다. ‘안아파. 나는 안아파. 안아프다니깐, 안아파~ ’말 합니다. 그러면 없어지고, 치료가 됩니다. 계속 사람을 치료해서 성공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여기에서 RACC라고 하는 뇌에 어떤 호르몬이 만들어집니다. ‘안아파’ 말을 그렇게 할 때 어떤 말을 하느냐 따라서 뇌속에서 활동이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을 치료합 니다. 여러분, 약이 세상에 많이 있어 병원에 가면 좋은 약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병원에 있는 약도 전 부, 하나님께서 만드신데에서 채취하였습니다. 은행나무 잎에서 나오는 것, 감나무 잎에서 나오는 것, 소나무 뿌리에서 나오는 것, 모두 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만든 것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능력은 어디 있느냐? 내 몸안에 있습니다. 우리 인체 속, 내 몸 안에 무한한 가능성 을 하나님께서 심어 놓았는데 이것 모두 개발 안하고 세상만 변하기를 바라며 세상이 나에게 잘해주 기만 바라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다 해주어도 우리 자신이 마음의 문을 열지않고, 우리의 입이 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본인 입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창조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승리하리라.’ 예수님이 늘 확인하는 것은 입을 보고 확인합니다. 내가 무슨말 하는걸 보 시고 주님은 축복을, 기적을 주셨습니다. 말을 잘못할 때 주님은 은혜를 주시는 법이 한번도 없습니 다. 주님은 어떤 중풍병자도 어떤 죄인도 말씀을 들어보고 ‘아, 이 사람은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네 말한대로 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매일 한순간 한순간을 여러분의 입을 통하여 여러분의 가정을 변화하고 인생을 새롭게 하며 미래를 창조하고 개척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 다. 2006년 좋은 해가 될 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입으로 시인하십시오. 말하십시오. 기적을 창조하십시오. 2006년은 좋아질 것입니다. ‘2006년에 나는 건강하 리라. 2006년에 나는 행복하리라. 내 기업에 하는 일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리라.’ 할렐루야! 이것은 스 탠퍼드 대학의 교수가 오늘 발견한 것이지만 성경은 이천년전에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러분! 교인 들이 왜 잘삽니까? 왜 성공합니까? 굿뉴스를 듣고, 증거하며, 좋은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교인은 믿 음의 말, 감사의 말 긍정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 교인들은 생산적인 말 축복의 말을 합니다. 할렐루 야! 여러분, 좋은 말을 하면 훌륭한 인생이 됩니다. 자녀를 보고도 좋은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잘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삐뚤어졌습니다. 왜 그렇습 니까? 제게 좋은 말을 안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저주라는 저주를 저 한테 다 퍼붇습니다. ‘어 디가서 죽을 놈아. 어이 죽을 놈아. 당장 죽일 놈아. 그 옛날 어른들은 왜 그렇게 하셨는지 모르겠습니 다. 우리나라에 아직까지 이 마귀가 다 떠나간게 아닙니다. 아직도 얼마나 욕이, 저주가 많은지 모릅 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저주들 보십시오. 하나만 나오면 막 공격하는데 저주는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가 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게 그 사람 공격하는 것 같지만은 천만에 말씀입니다. 본인이 다 뒤집어 씁 니다. 이 세상에 가장 험한 말은 우리나라에 다 있습니다. 가장 부정적인 비극의 말들이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그래서 비극이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오늘 좋은 사회와 좋은 국가를 만들려면 우리는 언어 문화를 바꾸어야 할 줄 믿습니다. 가정이나 국가도 그렇습니다. 물질이 아무리 많아도 언어문화가 떨 어지면 그 민족은 떨어집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30년 40년 전에는, 어려워도 ‘할 수 있다’라고, 믿고 나갈 때에는 이 나라가 다 나갔는데, 이만큼 올라와 가지고는 우리가 지금 언어문화를 땅으로 떨어뜨 리고 있습니다.
투쟁과 부정적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에 이 나라는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고, 나갈 수 없으며, 이렇게 혼란 가운데 있습니다. 입을 바꾸면 세상이 바꾸어 질 줄 믿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부정적인 말을 한다고 제가 착해졌느냐? 아닙니다. 더 나빠졌습니다. 화투치고 싸움 잘하며, 동생들 막 두둘겨 패고 누나도 패매 때렸습니다. 닥치는대로 부수고 싸웠습니다. 아무리 아무리 강할수록 저 는 더 강해졌습니다. 학교가도 계속 화투치고, 훔치며, 집에 것 모두 다 갖다 팔았습니다. 여러분 감옥 에 있는 사람들을 강하게 하면 그 사람들이 변화될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분은 교회는 예언자로서 책망을 해야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책망하면 교인들이 변화될 것 같 습니까? 절대로 안되게 되어져 있습니다. 구약시대때 예언자가 ‘화있을진저 망하리라’고 예언해도 구 약성경에 돌아선 사람 한명이나 나왔습니까? 다 나중에 범죄하여 바벨론으로 붙들려가고 앗수르로 붙들려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어느 누구 하나 책망 안했는데 다 변화시켰습니다. 모두 바 꾸어 주셨습니다. ‘이 복받을 사람아. 잘 될 사람아. 너는 할 수 있다. 이리 오너라’. 쓰다듬어 주시고 사랑해 주실 때에 우리 인간은 변화 될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러분 의 자녀들에게 축복을 선포하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저도 축복을 선포합니다. ‘우리 사위, 이 사람아 자네는 멋쟁이야.’ 얼마나 이 목사는 설교도 잘하고 저보다 더 잘합니다. 참 잘합니다. ‘나는 자네 때 문에 불안해. 흔들려.’ 하하... 올려줍니다. 잘한다니까. 너무너무 잘합니다. 실지로 잘합니다. ‘아들! 잘해요. 김목사 잘해. 너무너무 잘해.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 될거야.’ 저는 제가 축복을 하나님께 받 았기 때문에 이 받은 축복을 내 아들 딸 자녀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너는 훌륭한 아들이야’ ‘막내 너는 훌륭한 아들이야. 너는 요셉과 같이 우리 집 모두를 살릴 아들이야.’ 할렐루야! 축복대로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말할 때에 뇌에서 늘 변화가 일어나는 걸 알아야 됩니다. 이 분은 뇌에 변화만 일어나는 것을 발견했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움직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늘이 움직 이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높거나 낮거나 있거나 없거나 의인이나 죄인이나 모두를 다 도와주시고 사랑하시며 이끌어 주시는 능력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불평 불만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다윗의 사무엘상 읽 어보십시오. 다윗은 환란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움과 억울함으로 덮어썼지만 한번도 불신앙의 말을 안 합니다. 한 번도 ‘내가 왜 이렇게 됐냐? ‘그런 절망을 하지 않습니다. 요셉같이 억울 한 일을 덮어쓰고, 감옥에 가며, 팔려 나가고, 한번이라도 ‘이놈의 세상 내가 왜 아무 죄 없이 이렇게 됐냐?’ 증오하고 그러지 않습니다. 얼마나 잘됩니까?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 안된다고 가슴 치고, 이 세상 욕하며, 비관하고, 침 뱉으며, 책임전가하고 이러면 요셉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이 될 수 없습니 다. 아브라함이, 야곱이 될 수 없습니다. 야곱은 감사하며 기쁨으로 머슴살이하면서도 칠 년을 하루같이 행복하게 살더라고 말했습니다. 머슴 살이도 행복하게 생각하면 거기에 기적이 일어나 아내를 맞이하여 장가가서 그 집에서 잘 살고 아들 딸 12남매 낳아서 복을 받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감사하시기를 좋게 보시기를 바랍니다. 차별 하지 말고, 부정적으로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안 될 것도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그저께 책을 읽었습니다. 우리나라 적십자가 총재 하신 서영훈 총재님에 관한 것 입니다. 매우 감동 을 받았습니다. 달성 서씨 집안인데 증조모님이 혼인을 하시는데 중매를 누가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직업적인 중매인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런 기억이 납니다. 이쪽 집에 중매하러 가서 말해주고는 얻어 먹고, 또 그 다음 오후에는 저쪽 집에 가 말하고는 저녁을 얻어 먹고, 그 집에 자며, 그 다음날 아침에 또 여기 와서 말하고, 아침 먹으며 이 몇 집만 되면 일 년 내내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 괜찮은 직업이었습니다. 그 때는 그러니까 딸 집안 같은 경우에는 중매쟁이한테 잘 차려 줄 거 아니 겠습니까? 그러니까 잘 먹는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왔으니까. 그래서 이 서씨 집안에 중매쟁이 와서 그랬습니다. 참 좋은 색시가 있는데 매우 좋다라는 것입니다. 달같고 별같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약간 의 흠이 있는데 그 외에는 다 좋다는 것입니다. 뭐가 흠이냐면 조금 멀것입니다. 그것만 흠이고 다 괜 찮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쪽에서는 먼거는 친정 먼 거라면 괜찮다고 그런 건 괜찮으니까 하라구. 이래 가지고 결혼식 날 떡~ 결혼하고 보니까 세상에 장님이었습니다. 이 서영훈 그러니까 이 총재님 의 증조모가 그런 것입니다. 기가 막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매쟁이를 불러놓고 막 따졌습니다. ‘그 럴 수 있냐고. 다 그래 좋다고 그래놓고 어떻게 이런 말 할 수 있냐’고 ‘내가 좀 멀다고 말하지 않았냐’ 고 ‘다 좋은데 먼 것, 내가 다 이야기했는데 왜 이제 말하냐고 그때 말해야지. 내가 멀다고 먼건 괜찮 다고 그러지 않았냐’고 그래 가지고 그 때는 양반 그런 거 따지는 시대에는 절대로 헤어지는 법이 없 었습니다. 그래 왔는데 얼마나 총명하고, 명철한지, 여러분 장님들이 총명합니다. 강영우 박사님도 연세대학 졸업하고, 미국 가서 3년 8개월만에 석사도 2개 했습니다.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들으면 하나도 안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보는 게 많으니까 들 었다가도 잊어버립니다. 보는 거 때문에 다 잊어버립니다. 보다가 보는 게 없으니까 다 기억합니다. 또 보이는게 없으니까 공부만 합니다. 많이 본다라는 것이 보통 피곤한 것이 아닙니다. 그거 잘 알아 야 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살림 잘 하고 총명해 가지고 아이들을 너무나 잘 기릅니다. 이 가문에 이 증조모님 오셔서 기른 자녀가 과거에 급제합니다. 재상이 됩니다. 그래서 이 가정에 달성 서씨가 전국 에서 유명한 가문이 되고 서영훈 총재님같이 훌륭한 장로님이 나오게 된 것은 증조모 한 분이 오셔 가 지고 이 가문 전체를 일으켰습니다. 여러분,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아래 사람 없습니다. 사람 차별 하면 안됩니다. 아멘도 별로 안 하네. 조금 배우고 조금 못 배우고, 조금 잘 났나고 조금 못나고, 조 금... 우리나라는 내가 조금만 의로우면 얼마나 남 정죄 하고, 이런 사회를 만들면 안됩니다. 함께 예 수님처럼 모두 다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이렇게 우리 마음을 넓힐 수 없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 면 성경에 나오는 기생 라합처럼 다윗의 조상이 될 수 있습니다 룻이라고 하는 그런 불행한 여인에게 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축복하시면 우리 모두 잘될 줄 믿습니다. 마음 을 열어야 합니다. 불행한 뉴스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오해하며, 욕하고 미워하 며, 사람 차별하는 곳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면서도 낮아지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까지 씻 어 주셨습니다. 만왕의 왕이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나옵니 다. 주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시고, 가난한 집에서 자라나시며, 목수 일을 하셨습니다. 돌아가실 때에 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실 때에는 천한 자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상에서의 삶은 가 장 낮고 어려운 삶이 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미국의 대통령, 캐나다의 대통령이나 수상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호주의 수상도, 영국의 여왕도, 로마에서부터 오늘날까지 인류의 모든 황제들도 예수님 앞에 무릎꿇지만 시저한테 알렉산더에게 가서 무릎꿇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섬기는 것은 예수님이 낮은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인의 친구이자, 사 람 차별하지 아니하신 분이 예수님 이십니다. 아무리 성공하고 능력이 있어도 사람 차별하는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이웃을 사랑하며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모두를 품고 살아 가는 미래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마귀의 역사는 우리가 눈으로는 모르지만은 마귀의 역사 는 분명합니다. 자주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높아지려고 만들며, 화려한 것을 찾아가게하고, 잘났다 대단하다 자꾸 세상적인 물욕적인 이런 육적인 것으로 나아가게 하면 백발백중 그건 사탄의 전략입니다. 하나님 나 라의 축복은 겸손해지고, 낮아지며, 섬기고, 불쌍히 여기며, 십자가 지고, 좁은 길로 가는 그곳에 천국 이 있고 그곳에 해피 뉴스가 쏟아져 나오는 줄 믿습니다. 10년 20년 가 보십시요. 놀라운 일이 일어납 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주님은 온유, 겸손 하십니다. 따라하세요.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 할렐 루야! 온유한 자는 복을 받는데 어떤 복을 받느냐?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잘 삽니 다. 여러분, 부자들 보십시오. 모두 다 온유합니다. 성품이 온유합니다. 사람을 만날 때 온유한 사람 을 만나십시오. 땅을 넓게 차지하게 됩니다. 강퍅하면 하나님이 물질도 안 주십니다.
온유한 사람이 모두 다 잘 삽니다. 동리에서도 온유한 분이 잘 삽니다. 친구들 가운데도 온유한 분이 잘 삽니다. 국가 의 재벌들도 모두 온유한 분들입니다. 세계에도 온유한 분들이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습니다. 강한 민 족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절대로 안 나왔습니다. 온유해야 땅을 넓게 주시는 것입니다. 겸손하라 그랬습니다. 겸손하십시오. 겸손하면 하나님이 어떤 은혜를 주시느냐하면 높여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면 높여 주십니다. 온유는 물질과 땅에 평화의 복을 받게 합니다. 겸손하고 낮추 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이런 사람 만나고 사귀며,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며 친구 삼으면 높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십니다. 할렐루야! “너희는 나와 함께 멍에를 메고 온유 겸 손을 배우라” 우리는 온유 겸손이 잘 안됩니다. 멍에는 우리나라 멍에는 소가 밭 갈 때 한 마리에게 멍에를 메우고 뒤에서 이랴 그러고 갑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이 말한 멍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 멍에는 소를 꼭 두 마리를 이렇게 멍에를 메게 해 가지고 밭을 갑니다. 여러분, 기독 교는 주님과 멍에를 같이 메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멍에를 같이 메는 것입니다. 여러분, 멍에를 힘있 는 분하고 매 보십시오. 힘이 들겠습니까? 안 들겠습니까? 사람하고 멍에를 메니까 사람은 어떻게 하 더라도 상대방에게 짐을 지웁니다. 예수님하고 멍에를 매 보십시오. 사랑의 주님이 네게 짐을 지우시 겠습니까? 다 이끄시고 우리는 그냥 따라만 가면 됩니다. 교회생활도 힘 안 듭니다. 그냥 따라만 가 면 됩니다. 힘 주고 교만한 것 때문에 시험 들지, 따라만 가면 온갖 축복 다 받는 줄로 믿습니다. 겸손 한 주님과 같이 걸어가니 겸손을 배우고, 예수님과 멍에를 메어봐야 자기도 배웁니다. 온유한 주님과 같이 가니 온유를 배웁니다. 사랑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 사랑을 배웁니다. 주님의 섬김을 배웁니다. 거룩하신 주님과 같이 가 니 거룩한 삶이 됩니다. 의의 주님과 같이 멍에를 메니까 의로운 길이 열립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 남은 생애를 우리 주님의 온유 겸손을 본받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며 우리 주님이 주시 는 이 해피 뉴스로 길이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차별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모두 다 사랑하면서 또한 우리 마음을 넓혀서 해피 뉴스의 주인공이 되시길 바랍니다. 2006년을 우리가 아직 살지는 않았지만 믿음의 말을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간단한 논리는 분명합니다. 말, 나쁜 말하면 한 순간에 사탄이 찾아옵니다. 믿음의 말하면 한 순간에 하나님이 역사합니다. 다같이 역사하는데 하나는 어두움의 세력이 금방 찾아옵니다. ‘그까짓 놈의 세상 죽여버리겠다’ 그러면 사탄 이 ‘저 소식 나온데가 어디야? 명일동이야“ 그러고 빨리 급파합니다. ’야, 너 쫄만이 빨리 가라‘ 그럽니 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밀 까불 듯이 번개같이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번개같이 쏴악~ 믿음의 말을 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말, 이삭, 야곱, 다윗의 말을 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 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눈오고 미끌어질 때 ’에이 이까짓 놈의 눈 왜 왔냐?‘ 그러지 마 시고 ’성탄절에 눈 온 것처럼 아름다운 게 어디 있느냐?‘라며 캐롤을 부르십시오.♬ 흰 눈 사이로 썰매 를 타고 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 아 종이 울려서 땡 장단맞추니 땡 흥겨워서 소리 높여 노래 부른 다. 헤애 땡 징글벨 징글벨 징글 올드 웨이.♬ 우리 이렇게 노래 부르면서 나아가면 이 세상에서 천군 천사와 주님이 우리와 늘 동행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