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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아담을 창조한 이래 세상이 그렇게도 잔인한 사건을 목격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이븐 알 아시르
1218년,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북중국을 평정한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에서 제일 날리던 호레즘 제국의 술탄 무함마드에게 교역을 트자는 사절을 보낸다. 그러나 이 사절은 시르다리야강 근처에 있는 오트라르의 지사 카디르 칸(Qadir Qan)에게 몽땅 살해당하고, 이를 항의하러 간 사절 역시 무시당함에 따라(아니, 살해당했나?) 칭기즈칸은 안그래도 호시탐탐 노리던 중앙아시아의 이 대국을 털어버릴 명분을 얻게 되었다.
당시 호레즘 제국은 40만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나라꼴은 영 눈뜨고 봐주기 힘든 판국이었다. 호레즘 제국의 기반이 되는 호레즘이라는 동네는 워낙 좁아터진 벽촌이었기에 투르크족 방식대로 봉토를 나눠줘 군대를 양성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동네였고, 결국에는 어중이떠중이 투르크멘인들이나 캉글리인들을 끌여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캉글리족에게 영향력을 발휘나는 술탄 무함마드의 어머니인 투르칸 카툰(Turkan Qatun)은 술탄의 아들인 잘랄 웃 딘(Jalal ad-Din)을 싫어했고, 무함마드는 자기 아들을 싫어하는 어머니를 싫어했다. 호레즘 제국의 백성들은 병사들을 싫어했고, 병사들은 백성들을 싫어했다.
한술 더떠 호레즘 제국은 이웃들과도 별로 좋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무함마드가 망상에 가득차 바그다드를 공격하겠다고 설치는 바람에 겨우겨우 권력을 얻은 바그다드의 칼리프 안 나시르(An Nasir)는 그를 지독히 싫어하게 되었으며, 칼리프 자신은 별볼일 없다 해도 그가 하는 말은 어느정도(정말이지 명목상이었지만) 약빨이 먹히던 당시에는 칼리프와 싸운다는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특히 몽골인같은 전쟁기계와 대판 붙으면서 그런다는건 더더욱 좋은 일이 아니었다.
1219년, 칭기즈칸은 대략 15만의 병력을 동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들들에게 골고루 이 병력을 나눠주었다. 큰아들 주치는 시르다리야를 따라 호레즘으로 달려들었고, 오고타이와 차가타이가 이끄는 군대는 오트라르를 향해갔다. 칭기즈칸 자신과 막내 톨루이는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 사이의 트란스옥시아나의 주요 도시들-부하라나 사마르칸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몇몇 도시에서는 호레즘 군이 눈물겨운 분투를 했음에도, 분투는 처절한 학살로 마무리되었다. 칭기즈칸은 2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부하라에 입성, 자신의 무슬림들을 밟아주러 온 신의 채찍이라고 주장했다. 필시 그것은 허풍이나 자기과시였겠지만, 몽골군이라는 무력을 가진 사람의 말을 허풍으로 받아들일 정신나간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칭기즈칸은 이븐 시나와 알 콰라즈미의 찬란한 학문을 낳은 중앙아시아의 고도 부하라를 철저히 파괴시킴으로써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님을 입증해보였다.

부하라 시민들에게 허풍치는 칭기즈칸.
1221년, 몽골군은 침략 2년여 만에 아무다리야를 넘어 호레즘 본토에 진입, 우르겐치를 박살낸다. 그 전에 무함마드는 자신이 거둔 패배에 너무나 당황하여 일단 도망가기부터 했는데, 막강한 기동력을 가진 몽골군을 따돌리는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며 카스피해의 섬 한가운데까지 도망치는데 성공한다. 그를 잡기 위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제베와 수베테이가 붙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가 잡혀 죽지 않고 도망갔다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다.
칭기즈칸은 톨루이를 이란 지역으로 보내 호레즘의 잔당들을 처리하라고 했다. 톨루이는 이를 철저하게 실행, 메르브나 발흐등이 쑥대밭이 되었으며 헤라트는 조용히 항복했다. 1년의 날짜를 계산해내고 정말이지 긴긴 사행시를 쓴 오마르 하이얌이 태어난 니샤푸르도 이때 박살이 났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니샤푸르에서 174만 7000명이 살해당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사소한 문제라면 니샤푸르에는 한번도 그정도의 사람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1220년 12월, 무함마드가 피로와 좌절 속에서 죽고, 그의 어머니가 싫어한 그의 아들 잘랄 웃 딘은 여전히 항전을 계속한다.(혹시나 궁금한 사람을 위해, 그의 어머니 투르칸 카툰은 몽골인에게 사로잡혀 노예로 살다 죽었다)그가 몽골군을 상대로 한 소규모 교전에서 승리하자, 얼간이같은(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헤라트와 메르브의 주민들은 잘랄 웃 딘의 편을 들었다가 그가 인도로 내빼자 대책없이 살해당했다. 헤라트에서는 240만이 죽었다는데, 이 역시 말도 안되는 수치다.
잘 알려진 바지만, 몽골인들은 공성전에 있어서 포로를 이용하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포로들은 화살받이, 참호 매우기(흙으로 매우던, 그들 몸으로 매우던 그건 포로들의 운과 재능에 달렸다),기타 보급과 공성 등등 매우 쓸모 있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당하는 무슬림들이야 아주 미칠 노릇이었겠지만.
바로 이 시기에, 피르도우시와 이븐 시나, 오마르 하이얌이나 알 콰라즈미등 전 이슬람 세계중에서도 후덜덜한 성취를 이루어냈던 동부 이란의 찬란한 도시들은 대부분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다시는 옛 명성을 찾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무튼 몽골 침입 이후 이 동네의 학문적 성취가 박살난건 사실인듯 하다. 이렇게 해서 몽골 침입의 제 1타가 끝난다.
몽골인들은 종교 전쟁같은 개념에는 미숙했다. 다 때려부수기는 했지만, 그들은 도시의 이맘(신학자)이나 카디(법관)들에게 면세조치를 했으며, 예배를 계속 하는 것을 허락했다. 다만 누군가 모스크를 때려부쉈는데 어디서 예배를 하냐고 묻는다면, 몽골군은 친절하게 그를 천국에 있는 모스크로 보내주었을 것이다.
칭기즈칸이 죽고, 우구데이 칸이 대칸위에 오른 후, 인도로 도망간 잘랄 웃 딘은 끈덕지게 살아남아서(도망에는 일가견이 있던 아버지를 닮았다)다시 이란과 트란스옥시아나로 화려한 귀환, 그곳에서 자신의 새로운 제국을 건설한다. 이전에 제베와 수베테이가 밟고 간 그루지야를 다시 한번 밟아버림으로써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잘랄 웃 딘이 아버지를 닮은게 또 하나 더 있었는데, 그건 정말이지 형편없기 짝이없던 정치감각이었다. 아직 동부에는 몽골인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음에도, 그는 압바스조의 칼리프나 시리아의 아이유브조 군주들, 아나톨리아의 룸셀주크조의 술탄들과 티격태격했다. 이틈을 타 우구데이 칸은 1230년, 초르마간 노얀을 파견, 이 멋모르는 얼간이를 혼내주기로(그리고 덤으로 숨통도 끊기로)했다. 이번에는 성공해서 1231년 잘랄 웃 딘은 살해당한다. 이후 몽골의 이란에 대한 통치가 시작된다.
한편 당시 중동에는 무슬림만 바글바글했던건 아니다. 동방 정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네스토리우스 교단은 악착같이 동방으로 진출해 머나먼 몽골의 웅구트 족등을 개종시키는데 성공했다. 몽골제국 당시 몽골군 장군들에도 네스토리우스 교도가 많았다. 이란을 통치하던 초르마간 노얀의 처남들도 네스토리우스 교도였다. 그렇기에 그는 그 지역의 기독교도들에게 비교적 호의를 가지고 대했다.
그의 후임자인 바이주 노얀은 룸셀주크를 공격했다. 1243년 6월 26일, 아나톨리아의 쾨세닥(Kose Dag)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바이주 노얀은 룸셀주크 술탄 케이후스라브 2세를 격파하고 룸셀주크를 몽골의 영향권 안에 집어넣는다. 이후 룸셀주크조는 망할때까지 몽골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일칸국보다 먼저 망했으니까.
한편 몽골도 대책없이 죽이고 부수고 태우기만 해서는 통치가 안된다는걸 생각해서인지, 위구르인 출신의 행정가를 보냈다. 쾨르귀즈나 아르군 아가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몽골이 짓밟고 간 그 자리를 다시금 복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이란 지역에서는 장군들에 의한 통치(라기보다는 점령)이 이루어졌고, 아프간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이들 행정가에 의한 통치가 이루어졌다.

훌라구칸. 칭기즈칸의 손자.
1251년, 톨루이의 아들 뭉케는 대칸에 오르면서 동생 훌라구에게 '아무다리야의 유역부터 이집트의 끝까지 칭기즈칸의 법을 확립하라' 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슬림 세계에 내려쳐진 몽골군의 두번째 채찍질의 시작이었다.
훌라구의 막강한 몽골군은 재빨리 중동으로 달려들었다. 가장 먼저 이들의 먹잇감이 된 곳은 알라무트의 하사신파들의 요새였다.

진짜 하사신들은 이런 이미지하고는 마하트마 간디와 아돌프 히틀러만큼이나 서로 관계가 없다.
이들은 오랜 세월동안 시아파를 어떻게 해보려는 무슬림들에게 있어서는 골칫거리였다. 셀주크조의 명재상인 니잠 알 물크도 이 인간들에게 테러를 당했고(한술더떠 이 양반의 남아있는 유일한 초상화는 이 장면을 묘사한 초상화다) 십자군 전쟁 시기 프랑크인들과 맞서 싸우던 많은 무슬림 지도자들이 이들에게 암살당했다. 심지어는 살라딘도 이들에게 암살당할뻔 했다. 살라딘은 이들을 처부수려 했지만, 알라무트 산의 요새가 워낙 험하고, 프랑크인들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은지라 그만두었다.
몽골인들은 딱히 해결할 문제도 없었고, 살라딘보다 시간도 더 많았기에, 더 정성들여 이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공성끝에 이들의 요새는 함락당했고, 이 종파도 종말을 맞이했다.
이제 다음 목적지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 바그다드였다. 도시의 정식 명칭은 평화의 도시-메디나 알 살람(Medina Al Salam)이었다. 사실 이름과는 다르게 바그다드는 건설 이후부터 1258년까지 별로 평화롭지 못했으며, 1258년부터 현재까지도 썩 평화롭지 못했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중 하나이다.
사실, 몽골군이 압바스조와 바그다드를 호시탐탐 노리던건 몽골군이 처음 왔을때 부터였다. 1221년, 몽골군이 이라크의 이르빌 시를 공격하자 칼리프 안 나시르는 부랴부랴 병력을 모아봤지만 모인 병력은 고작 800이었고, 이르빌은 처절하게 수난당했다. 이후 칼리프 알 무스탄시르(Al Mustansir)나 알 무스타으심(Al Musta'sim)시대에도 몽골군은 바그다드 근처를 공격했다.
이전까지는 투르크계 맘루크나 군벌들, 부예이흐 왕조(Buwayhid)나 사만조(Samanids)의 군주들에게 질질 끌러다니던 신도들의 지도자(Amir al Muminin)는 안 나시르 시절에 이르러서야 어느정도 권력을 되찾게 되었다. 망할때 다 되어서 권력을 되찾다니. 아무튼간에, 몽골의 침입이 있을 거란 사실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뻔하게 되었고, 안 나시르나 알 무스탄시르는 열심히 병력을 키워 10만정도의 병력을 구축했다.
문제는 알 무스탄시르가 1242년 죽으며 터졌다. 그가 죽자 중신 알 다와타다르는 칼리프의 아들 아흐메드를 칼리프위에 오르도록 적극적으로 힘을 썼는데, 그것은 그가 똑똑하거나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알 다와타다르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흐메드는 다른 유능한 경쟁자를 제치고 칼리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저주받은 압바스 칼리프조의 칼리프중 가장 저주받은 알 무스타으심이었다.
칼리프를 단순히 예배를 주관하고, 무슬림 세계를 총괄하는 신도들의 지도자로만 본다면 그는 꽤 쓸만한 인재였다. 독실한 순니파였으니까. 문제는 칼리프는 정치도 하고, 외교도 하고, 전쟁도 해야만 했으며, 그가 상대하는 적은 전대미문의 힘을 자랑하던 몽골군이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도 사소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가 선조들의 교훈을 되살려 몽골군에게 알아서 기었다면 적어도 그는 천수를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의 아들이나 후손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바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그것도 놓치고 말았다.
여기에 더불어, 그는 굉장히 우유부단했으며, 수전노였다. 알레포의 군주 알 무으잠이 그에게 10만 디나르를 맡기며, 잠깐 봐달라고 한 뒤 다시 찾으려 할때, 칼리프는 접대비니 수고비니 보관수수료니 별별 이상한 명목을 달아 이 불쌍한 알 무으잠에게 몇푼 던져주고 다 떼어먹고 말았다. 그는 게다가 10만의 병력도 2만으로 대폭 줄였다. 10만으로도 힘들 몽골군을 2만으로 막아낸다? 그렇다고 알 무스타으심에게 별다른 대책이 있는것도 아니었다.
바그다드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 수니파 무슬림, 시아파 무슬림, 동방 정교회 기독교 신자들, 유태인들, 기타등등. 당시 시아와 수니는 별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1247년, 바그다드 근교 시아파 거주지역인 알 카르흐에서 시아파들이 소동을 일으켰을때, 알 무스타으심은 아들 아부 바크르와 군대를 보내 '화려한 휴가' 작전을 개시한다. 시아파 출신 재상이었던 이븐 알 아까미는 이런 가시방석 같은 상황속에서 사사건건 알 다와타다르와 대립했다. 이븐 알 아까미는 몽골군과 평화를 제안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시아라는 이유로 후대 수니파 역사가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까인다.
훌라구의 바그다드 원정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다.
먼저 훌라구는 알라무트를 공격할때 칼리프의 군대를 요구했다. 알 무스타으심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훌라구는 조용히 기는게 신상에 좋을 거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알 무스타으심은 모로코부터 동쪽의 모든 무슬림이 일어날 거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훌라구는 그랬다간 남은 건 죽음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알 무스타으심은 가서 끓는 물에 머리를 처박으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훌라구는 지금 네놈 궁전으로 날아가는 저것은 나의 투석기에서 발사된 돌덩이라고 설명했다.
이 모든 설명과 대화가 끝난 후, 칼리프의 유일한 군대라고 할 수 있는 알 다와타다르가 이끄는 군대는 순식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고, 500년 역사를 자랑하던 바그다드는 꽁꽁 포위돼 파멸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칼리프는 이제와서 동전에 이름을 새겨준다는둥 예배 시간에 이름을 언급해주겠다는 따위로는 훌라구를 만족시킬수 없음이 드러났다. 물론 무슬림이 일어나는 일따위는 저승가서 알아봐야 할것이 분명했다.

바그다드를 공격하는 훌라구의 그의 군대.
1258년 2월 10일. 칼리프는 항복했다. 수비대는 모조리 도륙당했다. 1258년 2월 13일. 몽골군이 진입했다. 약탈은 17일간 계속되었으며, 9만여의 주민이 학살당했다고 전해진다. 칼리프는 말가죽 자루속에서 압사당했다. 압바스조 칼리프의 능묘가 파헤쳐졌고, 대모스크와 궁전들, 시장과 도서관, 학교와 상점들이 불타고 파괴당했다. 수많은 칼리프들이 사 모은(읽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책들은 불태워졌고, 불태워진걸로 모자라 물로 지워졌다. 흘려내린 잉크가 피와 섞여 강을 이루었다. 버려진 책들-이제는 종이더미가 되었지만-은 아무곳이나 내팽개쳐져 산을 이루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바그다드가 함락된 날 성도 메카에 폭풍이 불어닥쳐 카바의 흑석을 덮은 검은 비단이 찢겨나가 21일간 방치되었으며, 메디나에는 지진이 일어났고, 아덴의 언덕에서는 원인 모를 불이 났다고 한다.
그러나 기독교도는 이러한 참상에서 어느정도는 몸을 뺄 수 있었다. 훌라구의 아내인 도쿠즈 카툰은 케레이트족 출신으로 네스토리우스 교도였기에, 그들의 교회나 회당은 무사할 수 있었다. 물론 몽골군이 처음 진입했을 때 그 앞에서 얼쩡거렸던 기독교도들의 운명은 아무도 모른다. 아무튼간에 계속 무슬림들에게 억눌려 지냈던 기독교도들은 굉장히 만족해했다.
시아파도 어느정도는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훌라구의 고문인 나시룻딘 투시(Nasiruddin Tusi)는 시아파였기에 시아파에 대한 보호를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몽골군이 처음 바그다드로 달려들었을때 그 앞에서 얼쩡거린 시아파들의 운명은 오로지 신만이 아실것이다. 시아파나 기독교도 모두, 얼굴에 "나는 수니 무슬림이 아닙니다"라고 써붙이고 다닌건 아니었으니 말이다.
몽골인들은 바람처럼 나타나 득달같이 달려들어 번개같이 때려부수고 태우고 죽이고 찢고 지나갔다. 아무도 그들 앞을 막을 수 없었다. 무슬림들은 이제 몽골인들이 메카로 달려들어 예언자의 종교를 끝장내는걸 지켜봐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그들을 구원해 낸 사람들이 있었다.
맘루크!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로 구원하심이 칼과 창이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할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사무엘상 17장 46~49절
훌라구가 대칸 뭉케로부터 명령받은 영역은 '아무다리야 유역부터 이집트의 끝' 까지였다. 이제 바그다드를 털어먹었으니 그 명령의 반은 실행한 셈이었다. 나머지 반을 실행하기 위해서 훌라구의 군대는 시리아로 향했다.
당시 시리아는 100여년전 십자군이 달려들었을 때와 거의 상황이 비슷했다. 준비는 거의 안되있었고 각 도시의 지배자들은 제각기 놀았으며, 대책없이 무너지기 바빴다. 누군가는 도대체 이마드 앗 딘 장기와 누르 앗 딘, 살라딘이 세워놓은 제국은 어디로 증발했냐고 무슬림들에게 따져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그 제국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느라 나름대로 바빴기에 몽골군과 상대할 시간이 없었다.
바그다드가 함락한 이후, 눈치빠른 몇몇 무슬림 영주들은 자신들의 약해빠진 힘으로는 훌라구에게 저항해봤자 시체만 늘릴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모술의 아타벡(대개 투르크에서 왕자들의 고문관 역할을 담당했으나, 하도 왕자나 왕족들의 권력을 빼앗는 일이 많았기에 도시나 작은 지역의 지배자를 지칭하는 용어로 바뀌게 되었다)인 바드르 앗 딘 룰루는 나이가 80이 넘었음에도 재빨리 항복, 훌라구가 그의 군대를 이용할 수 있게 했으며, 파르스의 아타벡인 아부 바크르도 항복했다.
1243년 쾨세닥의 패배로 인해 몽골의 세력권에 들어온 룸셀주크의 군주들도 훌라구에게 항복했다. 나라는 하나인데 어째서 군주'들'이라고 하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당시 룸셀주크의 술탄은 클르츠 아르슬란 4세와 케이카부스 2세가 서로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이게 다 몽골때문이다.
아무튼 케이카부스 2세는 정치적 줄타기에 능하지 않았던 관계로 훌라구의 속을 긁어놓고 말았고, 칼리프 알 무스타으심과 같은 곳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짐에 따라(즉, 죽음이 임박해왔기에) 이제는 싹싹 비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훌라구의 진영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들고 갔다. 자신의 초상화를 훌라구의 발 밑에 깔고는 엎어져서 싹싹 빌었고, 그 현명한 처사로 그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남들이 뭐라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 법이다. 이후에도 이 둘은 서로 티격태격하고 이랬다저랬다 하며 룸셀주크를 그럭저럭 다스려 나간다. 비록 그 통치가 선정이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1259년, 이제는 말 안 듣는 턱수염 달린 아이들을 혼내주러 갈 시간이란걸 안 훌라구는 군대를 나누었다. 선봉은 키트 부카가 맡았고, 우익은 바이주와 쉬크튀르, 좌익은 수쿤착이 담당했으며 중앙군은 훌라구 자신이 직접 지휘했다. 그들의 첫 먹잇감은 디야르바키르와 마이야파라킨의 지배자 알 카밀이었다.
그는 항복할 마음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아니, 처음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었다. 원래는 그도 훌라구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무슨 바람이 불었던지 그 충성을 집어치웠기에 그는 훌라구에게 패하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칼리프 알 무스타으심처럼 먹지도 못하는 돈 잡고 있다가 저승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그 돈을 들여 성벽을 보강하고, 병사를 모으고, 주민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몽골군에게 나름대로 대비를 했다.
훌라구는 바쁜 사람이었기에, 도시 하나하나 붙어있을 시간은 없었다. 아들 요쉬무트와 장군 순타이 노얀이 달라붙어 공성을 했고, 알 카밀의 준비는 반쯤 맞아떨어져 공격은 무려 2년이나 끌었다. 물론 그동안의 외부의 도움은 없었다. 외부에서 그나마 강력한 세력이던 아이유브조의 군주 안 나시르 유수프는 어떻게 하면 호레즘의 술탄 무함마드처럼 도망을 잘 쳐볼수 있을까를 연구하는데 정력을 바치고 있었고, 다른 도시의 군주들은 먼 지중해만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이 되자 마이야파라킨은 항복한다.
당연히도, 마이야파라킨의 주민은 대학살을 당했고, 알 카밀은 끌려나가 온몸이 칼로 천천히 잘려나가는 형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겠지만, 문제는 잘라낸 살을 알 카밀에게 억지로 먹였다는 것이다. 결국 알 카밀은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의 목은 경고의 표시로 다마스쿠스의 문에 걸리게 되었다.(물론 몽골군이 다마스쿠스를 정복한 다음의 이야기다)
몽골이 슬슬 무슬림 세계를 나락으로 떨어트릴 준비를 하고 있는 13세기 중반, 아직까지 십자군이 남아있었다. 예루살렘도 빼앗긴 주제 거기서 뭘 더 볼게 있다고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쯤되면 자존심 문제였다. 아무튼간에 맨날 무슬림 세력에게 밀려나기만 하던 아르메니아와 트리폴리와 안티오크는 이때가 바로 기회라고 생각했다. 아르메니아의 왕 헤툼 1세와 그의 처남이자 트리폴리, 안티오크의 지배자 보에몽 6세는 몽골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군대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훌라구는 이들에게 예루살렘을 탈환해 돌려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마이야파라킨을 떨어트린 훌라구는 북부 유프라테스를 정복하기 시작한다. 에데사와 하란을 무너뜨리고 본격적으로 시리아에 들어와 분탕질을 시작한다. 알 무이잠 투란 샤가 지키던 시리아의 큰 도시인 알레포에 맞딱뜨린 그들은 그러나 11세기 후반 안티오크나 예루살렘의 성벽을 공성이랍시고 맨몸으로 달려든 1차 십자군과는 급이 달랐다. 투석기 20대를 동원, 7일만에 성벽을 함락시키고 30일만에 성채도 함락시킨 그들은 실컷 약탈을 하고, 알레포의 대모스크와 다른 작은 모스크와 예배당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이때다 싶은 기독교도들도 실컷 난동을 부리고 약탈을 한다. 뭐, 설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안타깝게도 몽골군은 곧 물러가버리고, 기독교도들은 톡톡히 복수당하지만.
안 나시르 유수프는 드디어 결론을 냈다. 결론은 '몽골군이 오기 전에 잽싸게 도망가자' 였다. 알레포가 함락당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다마스쿠스에서 도망나와 이집트로 향한다. 문제는, 이집트는 카스피해와는 달리 아무도 살지 않는 동네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이미 아이유브 왕조와 거기에 관련된 사람이라면 매우 싫어하는 맘루크들이 살고 있었다. 그는 이집트의 입구 가자에서 들어가서 죽을것인지 여기있다 죽을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명색이 시리아의 지배자라는 인간이 이따위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지배받는 사람들이 뭔가 열정적 조치를 취할리 없다. 하마는 싸워보지도 않고 함락되고, 고도(古都) 다마스쿠스 역시 조용히 항복한다. 키트 부카는 이후 열렬하게 뛰어다니며 시리아를 점령한다. 안 나시르 유수프는 햄릿마냥 고민하다가 사로잡힌다.
안 나시르는 얼굴이 하얘져 벌벌 떨었으나, 키트 부카와 훌라구는 그가 항복하지 않은 도시의 성문을 열게 하는 가치가 있음을 발견하고 목숨을 살려준다. 다만 그러한 이용가치가 사라졌을때는 어떠한 최후를 맞게 되는지 독자제헌들은 모두 잘 아시리라 믿는다.
뭐, 무슬림들이 기독교도를 어느정도 인정해줬고, 살아가는데 파트너로 봤다는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도는 무슬림들이 오기 전에는 시리아의 지배자였다. 무슬림 통치 시기에는 잘해봐야 이등국민이었다. 그런 상황을 몽골인이 타개해주었다.(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보였다) 게다가 키트 부카나 훌라구는 네스토리우스 교도거나 기독교에 관심이 많았다. 유럽의 독실한 로마 카톨릭 신자라면 일단 로마 카톨릭이 아니면 다 이단이기 때문에 상당히 불쾌할지도 모르겠지만, 동방의 기독교도들은 그것보다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저정도 문제는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훌라구가 다마스쿠스를 함락하자, 그들은 십자가를 앞에 내세우고 찬송을 부르며 거리를 순회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 없는데, 이들은 무슬림을 강제동원했고, 고무신 한짝도 주지 않았다. 문제가 조금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모스크를 파괴하고 교회를 짓기도 했고,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대모스크에서도 기독교 의식을 행했다. 무슬림들은 이에 항의했지만, 훌라구는 가뿐히 무시했다.
훌라구는 시리아를 거의 완전정복했다. 기독교도들에게는 안타깝게도, 훌라구는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이집트에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맘루크들이 살라딘의 후예들인 아이유브 왕조를 완전히 밀어낸 뒤 장악하고 있었다. 살라딘의 후예들은 살라딘에게서 정치감각이나 신앙심 뭣 하나 제대로 물려받은게 없이 서로 투닥거리고 싸우기만 하다가 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맘루크들은 그런 얼간이들보다는 좀 나은 축이었으나, 살라딘보다는 조금 못했다. 특히 이들은 관용이나, 자비나 그런 단어를 들으면 사전을 찾아보는 족속들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기가 막히게 잘했으니, 몽골군을 상대하는데에는 별 문제 없었다.

맘루크 기병훈련
람 세계의 특수한 노예병 제도는 정말이지 웃기는 제도다. 쌩돈들여 노예를 사서 모은뒤 쌔빠지게 훈련을 시켜서 나중에는 그들에게 권력과 돈, 목숨마저도 빼앗기고 만다. 전투에서 쓸만하다는 이점은 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잘만 다루면 통치자 자신에게만 절대 충성한다는 이들 맘루크는 전투력 하나만은 발군이었다. 밥먹고 쌈질만 하니 당연히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1400년 이슬람 역사상, 이들이 자신들을 돈주고 산 통치자들을 학대하지 않거나 존중해준 경우는 거의 없다. 노예상인들은 그런 상황에 대한 A/S는 모른체했다.
아무튼간에, 이집트의 맘루크들은 지금까지 몽골이 상대한 어중이떠중이와는 수준이 달랐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들은 밥먹고 싸움만 하는 인간들이었다. 자존심은 정말 강했고, 잔혹하기 짝이 없었고, 오로지 힘만 중시했다. 지들끼리도 서로 싸워대고 죽여대기가 다반사였으니까. 남들에게는 오죽하겠는가.
이런 거친놈들을 다스리던 술탄 쿠투즈(Qutuz)는 스스로도 거친 놈이었다. 게다가 그는 몽골에 대해 안좋은 추억이 있었다.
쿠투즈의 본명은 마흐무드 이븐 맘무드. 호레즘 술탄 무함마드의 아들 잘랄 웃 딘 망구베르티의 조카였다. 즉, 평화로운 시기라면 그는 편안히 잘먹고 잘살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몽골군이 처들어와서 다 죽이고 때려부셨고, 그는 사이프 알 딘 쿠투즈라는 이름으로 팔려나오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른 거지같은 인간들을 대상으로 음모를 꾸미고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는 팔자가 되어버렸다. 몽골군을 좋아할래야 좋아할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도 훌라구가 사절을 보내 항복할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묻자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몽골군의 칼이 자신의 목 위로 떨어질 때에는 자신이 아무리 몽골을 싫어하든 말든간에 더럽게 아플것이고, 또 죽어버릴것이 분명했다. 그는 싸울것인지, 항복할 것인지, 아니면 뒷일은 아무에게나 맡겨버리고 북아프리카로 도망갈 것인지를 고민했다.
1259년 8월 11일. 대칸 뭉케가 남송 원정중 이질로 사망한다. 머나먼 중국에서는 후계자로 누가 될것인지 문제가 붙었고,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가 서로 하겠다고 설쳐댔다. 훌라구도 머나먼 시리아에 박혀 이런 문제에서 멀어질 수는 없었다. 대칸에 오를 마음은 없었지만, 그는 쿠빌라이를 지지했고, 아릭 부케가 대칸이 되면 일어날 재수없는 사태를 우려했다. 쿠빌라이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이란으로 가야했다.
게다가 북방의 동족 킵차크 칸국과의 사이도 나빠져 있었다. 그가 기독교도를 좋아한것과 마찬가지로, 킵차크의 칸 베르케는 이슬람교도를 좋아했다. 그건 물론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수만의 대군을 이끄는 두 인간이 서로 다른 종교를 믿고 있고, 그나마도 서로 좋아하지도 않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베르케는 훌라구의 땅인 카프카스 지역을 침공한다. 이후 일칸국과 킵차크 칸국은 서로 망할때까지 싸워대고, 아무도 왜 처음 싸웠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훌라구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프카스로 돌아갔다.
훌라구 홀로 맨몸으로 가서 무엇하겠는가? 그는 9클래스 소드마스터도 아니었고, 투명드래곤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도 화살 맞으면 죽고 칼 맞으면 죽는 인간의 몸이었다. 시리아는 키트 부카에게 2만 5천 가량의 병력만 맡기고 베르케를 막기 위해 가버렸다.
동방 기독교와 십자군들이 몽골군을 비교적 좋아했다는건 사실이다. 그러나 십자군이 트리폴리와 안티오크에만 있는건 아니었다. 남부 시리아 시돈에 있는 십자군은 몽골인을 야만인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무슬림도, 유태인도, 그리스인도, 동방 기독교도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그들 스스로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제외하고는 모두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어찌보면 굉장히 편리한 사고관이라 할 수 있겠다. 아무튼간에, 그들은 이런 신념에 의거하여 키트 부카의 몽골군을 공격했다. 키트 부카는 이를 십자군과 몽골의 동맹 파기로 받아들이고, 시돈의 얼간이들을 응징했다.
둘의 충돌을 동맹 파기로 받아들인건 키트 부카만이 아니었다. 이집트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자신의 생존가능성을 저울질하던 쿠투즈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는 훌라구가 시리아를 떠났다는 말을 듣자, 드디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몽골군과 싸우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들의 사절을 죽이는 것이다. 마침 쿠투즈에게는 이런 사절이 있었다. 사절들은 이런 목적을 훌륭히 수행했다. 그들이 원하던 바는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이걸 통해, 이집트의 거친 맘루크들과 시리아의 잔혹한 몽골인들이 한판 대대적으로 붙게 되리라는 것은 명확해졌다. 맘루크들은 1260년, 행동을 개시했다.
쿠투즈는 맘루크들의 강인함만 믿고 몽골군에게 달려들었다가는 강인함이고 나발이고 끝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그는 몽골군과 맘루크, 전장(戰場)을 분석했다. 싸우는 곳은 시리아가 되어야 했다. 괜히 이집트에 끌어들여 싸웠다가는 자신들의 근거지가 파괴될 우려있었다. 시리아야 파괴가 되는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든 알바 아니었다. 게다가 시리아에서 싸워 이기면 시리아를 먹을 수도 있었다. 시리아가 어떻게 되든 알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먹으면 좋은 법이다.
그가 고른 전장은 아인 잘루트였다. 갈보아 강과 잘루트 강, 주위의 늪과 갈보아 산은 몽골군의 기동성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었다. 몽골의 기동성을 저지하라. 이것이 맘루크군의 제 1 철칙이었다.
1260년 7월, 바이바르스(Baibars)가 이끄는 전위부대가 바이다라의 몽골군을 공격, 분쇄시켰다. 이름 뒤에 괄호가 쳐져있고 이름의 스펠링이 써 있다는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 인물이 정말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바이바르스는 이번 이야기에서 쿠투즈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는 생긴게 건장했고, 목소리는 걸걸했으며, 눈동자에 하얀 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한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사람에게 호감을 주기보다는 '이 사람을 건드렸다간 요단강을 건널 가능성이 높겠다' 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굉장히 싼값에 팔려왔다.
바이바르스에 이어 쿠투즈의 본대가 시리아로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아크레의 십자군들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몽골을 싫어했기에, 맘루크군의 통과를 허용했다. 이때 키트 부카는 다마스쿠스에서 무슬림 반란군을 도륙하고 있었다. 맘루크군이 기어나온다는 이야기를 듣자, 이 허연둥이들을 모조리 밟아버려야겠다는 일념으로 군대를 준비했다.
1400년간의 이슬람 역사에서, 무슬림들은 숱한 전투를 치루었다. 시리아의 패권을 확립한 야르무크, 아나톨리아의 투르크화를 시작한 만지케르트나 마리오케팔론, 십자군을 격멸시키고 예루살렘을 되찾은 하틴, 이슬람 확장의 종지부를 찍은 2차 빈포위.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슬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는 이번에 벌어질 아인 잘루트 전투라고 생각한다.
1260년 9월 3일. 아인 잘루트(Ain Jalut). 이곳인 다윗이 골리앗을 쓰려뜨렸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다윗이 블레셋인들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을 구한것처럼, 쿠투즈와 맘루크들은 과연 이곳에서 몽골인들로부터 아브라함의 후손을 구할 수 있을까?
덧붙이자면, 아랍인들이 그들의 선조로 생각하는 이스마일 역시 아브라함의 아들이다. 즉 현재의 두 종교간의 대립은 얼간이 형제 둘이 시끄럽게 싸우는통에 온 동네가 정신없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인 잘루트 전투
쿠투즈의 군대는 대략 10만. 군대의 대부분이 보병이었다. 몽골군을 상대하는데 보병을 데리고 나오다니 정신이 나갔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기다려들 보시라. 기병대의 대부분은 바이바르스가 이끌었다. 중앙부와 좌익, 우익 모두 보병 중심이었고, 기병대는 예비대로 바이바르스가 지휘했다.
몽골군 2만 5천이었는데, 그루지야인이나 아르메니아인 다른 동네 인간들 다 끌어모은 수치다. 전원이 기병
운명의 날 새벽, 몽골군 궁기병대가 중앙의 보병대를 향해 화살을 날림으로써 전투가 시작된다. 보병대가 약화되자 기병대가 달려들었고, 시리아의 일반 농민들이 주축이던 보병대는 무너지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쿠투즈는 이런 점을 미리 예상했다. 그는 몽골군이 궁기병의 공격 이후 적을 분쇄하는것을 기본 전략으로 삼으며, 이것이 안될 시에는 저 저주받을 치고 빠지기를 한다는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곤란하다.
그는 중앙의 보병대를 뒤로 후퇴시켰다. 몽골군이 이를 추격하고 계속 공격하도록 유인했다. 몽골군이 수십년간 러시아인들, 폴란드인들, 독일인들, 중국인들, 페르시아인들, 아랍인들을 유린하던 전술을 이제는 몽골군이 그대로 당할 차례였다. 몽골 기병대가 계속 보병대를 추격하던 중, 그들은 포위되었음을 깨달았다.

몽골군의 맞수. 맘루크 기병대.
중앙부의 보병대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들은 버티면서 계속 몽골군을 유인했고, 어느틈에 좌익과 우익의 맘루크군이 몽골군을 감쌌다. 예비대로 있던 바이바르스와 저 유명한 맘루크 기병대가 돌진하기 시작했다. 수적인 우위에 힘입어, 몽골군을 완전히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키트 부카는 몽골의 자존심 넘치는 지휘관답게 도망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훌라구를 칭송했고, 끝까지 싸우다 결국 포로로 잡혔다. 쿠투즈는 그를 모욕했다. 키트 부카는 맘루크들이 신의없고 전투만 아니라 배신에도 능숙한 족속이라고 비난했다. 이 말이 사실이었기에, 쿠투즈는 분개했고 키트 부카는 죽음을 당했다. (사실을 말하면 죽음을 당한다는건 이상하지만 항상 사실이다) 9월 8일, 맘루크군은 환영의 인파속에 다마스쿠스에 입성한다. 다마스쿠스 성에 걸려있던 알 카밀의 목은 영묘에 안장된다.
이후 일칸군은 몇번 시리아를 침공하지만, 그때마다 맘루크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키트 부카의 예언(예언이라기보다는 저주였지만)은 맞아 떨어졌다. 아인 잘루트의 승리 이후 1년 뒤인 1260년, 전투 이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바이바르스는 쿠투즈를 암살한다.
뭐, 그건 뒷일이다. 아무튼간에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트려 이스라엘을 구했던 바로 그곳에서, 쿠투즈와 바이바르스, 그리고 맘루크들은 이슬람을 구했다. 이슬람은 이후 오스만이라는 세력과 함께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유럽인들은 동방에서 몽골인에게 당한 일을 왜 서방의 자신들에게 푸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상일이란 원래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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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신분은 알겟지만
몽고의 친입은 그당시 시계사에 아주 큰사건이죠 ..
그들이 유럽까지 처들어가서 헝가리 폴란드를 먹고 오스트리아 수도인 '빈'까지 진격한 저력이란..
몇세대 앞서가는 생각과 기동력입니다
저시절엔 보통 적군이 침략하면 그 소식이 수도까지 4~6일정도는 걸려야 정보가 입수가 됩니다 하지만
몽고군은 수도에 전령이 도착할때쯤 이미 수도앞에서 ..공성준비를 하고있습니다..
그걸 가능하게하는것은 보급이 필요없었다는게 가장 컷고 또 현지인들을 잘포섭 용병이나 병사로 받어들이고 말안듣는 현지인은
'노예병사'로써 고기방패로 병력의 소모르 줄였다는게 가장 큰 특징이지요 .
실제로 '훌라구'가 이집트에서 열심히 정복활동을 할동안 '바투'는 러시아황제를 전사시키고 러시아를 점령한다음 헝가리와 폴란드를
격퇴시키고 독일황제까지 전사시키는 업적을 남깁니다 ...(그래서 '바투'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안던 인물 1위)
첫댓글 자유가 느껴지는 글이네요. 세계사도 좋지만 이왕 정보글이니까 한글 맞춤법도 좀, 제발, 잘, 어느정도만이라도 알고 써주시면 너무 좋겠네요.
'라스카사스'가 '코르테스'에게 말싸움을 걸자 '코르테스'가~'당신의 귀가 당신입에서 하는 말을 들어봤으면 좋겟군'라고 말했다지요 ~
좋겟군->좋겠군.
맞춤법 지적하는 글도 맞춤법에 맞아야....어느정도->어느 정도
어이고, 그 정도로 날카롭게 나오신다면~ '.'은 3개 단위로 두번 사용하는 것이 정확한 용법입니다. 글의 성격 상 이렇게 오타가 많은 글에 대해서는 이 정도 얘기하는 게 그다지 트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본문은 아니니까 라고 넘길 수도 있는 문제이긴 하네요.
이거 공무원시험에 나오나여~?
그럴리가요 ㅋ
이건 왠 개뜬금없는 글인가요
개뜬금없는 글이 아니라 지난번부터 재미있는 역사이야기가 있으면 제가 올리던 겁니다~^^~
알면 좋은거니까 손해 날껀없는거지요
약간 나눠서 올렸으면 반응이 더 좋았을텐데 ..너무 길어서 첫마디 읽기가 두렵군요
담부턴 나누어서 올리겠습니다 ^^
역사는 언제나 즐겁죠 ㅋ
이거 보니깐 징기스칸 4 하고싶다..
이거 보니까 난 국어공부하고 싶다.
왜 반응이 이렇지? 뭐.. 맞춤법 드립이야.. 항상하는 찌질한분들이 있으니 그런가보다.. 하지만 글은 흥미로운데?
요새 운동하면서 사이클할때 책보는데 ㅋㅋ
내용의 실, 부실 여부를 떠나 양이 너무 많음..
캡쳐 했다가 전자책 류로 한가할때 보면 좋겠군요.
모든내용이 실입니다 허구가 전혀없고 이미 네이버카폐 역사 분들의 검증이 끝난 글입니다
거기분들이 워낙 괴수라서 원서 역사서를 번역하셔서 올리는분도 계시니 믿으시길^^
오리형님이 말하신 실, 부실 얘기는 내용이 좋은가 안좋은가 하는 걸 말한거 같네요^^; 전 재밌게 봤습니다. 역시 역사는 재밌네요..잔인하기도 하지만..ㅋ
미디블2 토탈워가 고증100% 게임이니 한번 해보시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