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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구례군./지리산자락<곡전재>탐방화보.ㅡ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 소재.ㅡ
건축물 안내 및 내력
본 건축물은 1910년경부터 승주 황전면에 사는 7천석의 부호 박승림이란 분이 明堂을 찾기 위해 십여년을 많은 地官과 함께 수색 끝에 토지면 오미리 環洞(환동)이 금환락지다 확정짓고 李 敎臣(호 穀田:병주의 曾祖父)씨와 함께 건축하게 되었다
그후 박승림씨가 사업상 서울에 거주하고 집은 李敎臣씨가 위임맡고 있었는데 박승림씨가 죽음으로 그의 子婦가 李 敎臣씨에게 인도하여 현재 5代째 살고 있다
그리하여 이집을 구례문화원에서 金環洛地(금환락지)라 하고 여러대학 건축학자들이 건축이 잘되었다하여 목포대학 건축과에서 일주일 이상 조사한후 문화적 가치가 있다하여 문화재로 할 것을 신청하였다
원래는 6채 53칸 한옥으로 지어졌으나 중년에 인수당시 동행랑과 중간채를 팔아 훼손되었다가 현재 소유주 이순백께서 1998년1월 새로이 동행랑과 중간 사랑채를 복원하고 누각을 신설하여 "춘해루"라 이름 지었으며(5채 51칸 연못(洗淵:세연)을 확장하였다 구례군청에서 몇 년간 향토문화유산을 선정하다 2003년 문화재관리위원의 심의를 거쳐 구례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2003-9호)
금환락지(金環洛地)의 유래
도선(道詵:高麗名僧) 무학(無學:李朝初名僧) 남사고(南師古: 李朝明宗때 豫言家)등 유명한 地師(지사)들의 秘訣(비결)에 의하면 구례읍에서 동쪽으로 十里를 지나면 큰 明堂터가 있는데 오성(다섯 성씨 水火金木土)바지가 다 살수가 있고 萬戶(만호)가 가희 살수 있다 하였다.
이 명당터에 살면 부귀는 물론 白子千孫(백자천손:많은자손)에다 文官(문관) 千名(천명), 武官(무관)이 萬名(만명) 文千武萬(문천무만)이라 하고 王妃(왕비)가 3명이 나고 臥廳朝報(와청조보 30代라 하고 그 부근에 上垈(상대:윗 집터) 中垈(중대) 下垈(하대)가 있어 金龜沒尼(금귀몰니) 金環洛地(금환락지) 五鳳歸巢(오봉귀소)등 陽宅(양택:집터) 3곳이 있고 四大陰宅(사대음택:묘자리)이 있는데 月明峰下化爭飛(월명봉하화쟁비) 鷄鳴邱隅東嶺曉(계명구우동령효) 水廻券頭龍喜笑(수회권두용희소) 馬?三脊北岸肥(마비삼척북안비)라 하였다
이 명당은 下元甲(1984년)부터 운이 돌아온다 하였다. 또한 신혼부부들이 이명당터에서 하룻밤만 숙박을 하면 금환락지의 운을 받아 평생 부귀영화를 누린수 있다는 말이 전해 오기도 한다.
중대(中垈)와 하대(下垈)-발췌분
구만들에 동네가 생기기 시작한 내력과 이 동네 사람들의 주장을 들으면 어느 자리가 바른혈인지 어리둥절해 진다. 앞서 소개한 이용근씨 같은 분은 용두리가 '금환락지'중의 진혈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행정구역 마을이름의 하나인 금내리는 '금환락지가 그안에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듯이 동네사람들이 자기동네의 금환락지설을 믿고 있다. 오미리에 속해 있는 환동(環洞)도 금환락지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그러므로 금내리와 환동을 중심으로 마을의 성촌내력을 더듬어 보면 그 모습을 알수 있을만하다.
앞서 유씨의 <시언> 1883년 3월 21일 일기에 서 밝힌바와 같이 용두리에서 살던 허현(許泫月溪)이란 사람이 1876년 오미동 동네밑 들가운데 집을 짓고 살면서 '금환락지'의 혈이라는 뜻으로 '환동'이라 부르기 시작한데서 비롯했다. 같은 무렵 유성팔(柳成八)이란 사람도 이곳에 집을 짓고 들어왔다.
1895년 <토지면가좌책>에 따르면 이 동네는 13집이 살았다. 유인규(柳寅圭) 유선칠(庾善七) 등 한방하는 사람들도 명당이라고 이곳에 들어와 한약방을 차렸다. 1917년 12월 3일 이 명당터에도 큰불이 일어나 4채가 불탔다.
1928년 순천에서 조만식(趙萬植)이 이사왔으며 이듬해 4월 박승림(朴勝林1878∼1943)과 경남 합천사람 정태규(鄭泰圭)가 이사왔다.
박씨는 순천군(지금의 승주) 황전면 대치리 307번지에서 태어나 7천섬지기 지주로 처음에 구례읍내 봉북리 72번지로 들어왔다. 환동이 금환락지에 틀림없다는 풍수의 권유를 받고 이 환동에 들어와 오미리 476번지에 집을 지었다. 대지만도 1천평이 넘었으며 돌담장도 금가락지처럼 둥굴게 쌓았다. 그는 부자였지만 덕을 베풀어야 복을 받는다면서 동네사람들이 어려울 때마다 몇십섬씩 쌀을 구호미로 내놓아 당시 신문에 날정도로 이름이 있었다. 그에게는 호서(虎緖1903∼1959) 채기(彩琪1908∼1964) 등 본처 이씨 소생 2남2녀가 있었으며 첩인 오태엽(吳太葉)에게도 세아들이 있었다. 첩은 구례읍에 두고 살았다. 박씨는 7천섬을 가지고 금환락지라는 환동에 들어와 살았으나 축첩해 두집 살림을 하는 동안 본처 소생들이 창고업 등 무리한 사업을 벌이다 실패를 거듭했고 박승림은 결국 1943년 73살의 나이로 서울에서 죽었다.작은아들 채기는 농지개혁 등으로 가세가 기울자 아편을 손대 고향을 떠나 방황하다가 64년에 죽었으며, 큰아들도 죽어 1964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산곡리로 호적을 옮겨간 며느리가 이집 관리인 이순백씨 조부에게 논 7두락값에 집을 팔아 이씨는 행랑 두채를 뜯어 집값에 보탰다. 환동에는 성주이씨 일촌 일곱집이 아직도 살고 있다.
금환락지 곡전재 이 병 주
ㅡ원형대로 잘 보존된 조선의 전통<한옥집> 대문앞에서.ㅡ곡전재.ㅡ
ㅡ현재까지 원형대로 보존되여 사람이 살고있는 <곡전재> 안채모습.ㅡ
ㅡ전통한옥의 안채와 아담한 정원이 잘 꾸며진 사랑채앞에서.ㅡ
ㅡ<곡전재>의 전체 한옥의 모습을 담은 사진.ㅡ
ㅡ구례읍/지리산자락<운조루>탐방 화보.ㅡ
요약설명
조선시대 양반가옥이다. 조선 영조 52년(1776)때 유이주(柳爾?)가 낙안군수로 재직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대문과 행랑채 남쪽마당 건너에 연당이 있는데, 이는 맞은편에 보이는 오봉산과 삼태봉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된 55칸짜리 목조기와집이다.
이 곳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금가락지가 떨어진 터인 ‘금환락지’의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운조루’란 일종의 택호에 해당하는데, 원래는 큰 사랑채 이름으로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이 있으며,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라는 칠언율시에서 따온 것이다.
“금가락지가 떨어진 곳”
‘금환락지’는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와 목욕을 한 뒤 다시 하늘로 오르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곳을 뜻한다. 풍수지리에서 금거북이가 진흙 속에 묻힌 터인 ‘금귀몰니’와 금, 은, 진주, 호박, 산호 등 다섯 가지 보물이 쌓인 터인 ‘오보교취’와 더불어 3대 명당으로 꼽힌다.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는 높은 지리산의 기운이 섬진강줄기와 만나면서 충적평야를 형성하는데, 이곳은 기름진 천하대지, 속칭 ‘구만들’이라 불렸다. 이곳의 지명도 본래는 금가락지를 토해냈다는 토지면이었는데, ‘금환락지’라는 풍수형국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풍요와 부귀영화가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땅이라는 뜻이다.
상세설명
조선 중기의 집으로 영조 52년(1776)에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가 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은 산과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어 ‘금환락지(金環落地)’라 하는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집의 구성은 총 55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T자형으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채에는 큰 부엌이 없는데 이곳에는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사랑채와 직각을 이룬 누마루가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있어 특이하다. 안채는 사랑채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사랑채에 비해 규모가 매우 크며 평면이 트인 'ㅁ'자형이다. 중심부분은 대청이며, 좌우로는 큰방과 작은방이 자리잡고 있다. 행랑채는 '一'자형으로 2칸이 앞쪽으로 튀어나와 누형식을 취하고 있다. 1칸은 방이고 다른 1칸은 다락으로 되어있다. 누각아래 기둥 서쪽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층계로 하지 않고 경사진 길로 만들어 특이하다. 사당은 안채 동북쪽에 있는 건물로 따로 담장을 둘렀으며,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운조루는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예이다. 이곳에는 여러 가지 살림살이와 청주성의 지도, 그리고 상당산성의 지도 등의 유물도 상당수 보존되어 있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ㅡ영화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운조루(전통,한옥)에 도착하다.ㅡ
ㅡ<풍수지리설>에 의한 조선의 부자나 벼슬아치들의 집앞에는 꼭 이런 연못이 있다.
ㅡ<운조루>대문앞의 인공연못에서.ㅡ
ㅡ<운조루>대문앞에 서있는 안내문.ㅡ
ㅡ관광을 마치고 뒤돌아서 잡은 지리산정기를 듬북 담은 <운조루>의 풍취.ㅡ
ㅡ구례읍,상사마을<쌍산재/장수천>탐방화보.ㅡ
ㅡ조선,전통한옥인<쌍산재>앞의 장수천(長壽泉)샘물로 목을 추기다.ㅡ
ㅡ<장수천>물을 마시면 학(鶴)처럼 천년만년을 무병장수 한답니다용.ㅡ
ㅡ돈받는것도 아니니 배가 터지도록 실컷 마셔봅시다.ㅡ<장수천>에서ㅡ
ㅡ지리산자락의 명당인 <쌍산재>를 배경으로 여기 보시고? 쏘세요.ㅡ
ㅡ조선의 전통 한옥이 잘 보존되여 있는 구례군의 <상사마을> 이정표.ㅡ
ㅡ정말 좋와요.ㅡ 따봉이야요.ㅡ 아주 쿨해용.ㅡ 하.ㅡ하.ㅡ하.ㅡ\
ㅡ저녁식사는 햇반과 라면으로 손수 끌여서 맛있게 먹다.ㅡ
구레군의 <사성암>부터 섬진강을 따라 남하하여 영호남의 경계인 <화개장터>와
지리산내부 계곡 깊숙히 자리잡은 <칠불사>.<쌍계사>. 그리고 <피맛골,작전마을>과
<연곡사>를 자전거라이딩으로 즐기면서 탐방하고 섬진강변도로를 따라 차로 이동하여
순천시 승주군의 <선암사>로 가는 도중에 있는 지리산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앉은 풍수지리상의 명당중에 명당인 전통 조선 한옥인<곡전재><운조루><쌍산재>를
방문하여 우리 조상의 슬기와 지혜로운 주거 형태와 방식을 체험하였다.
특히 이곳 주민들이 장수하기로 소문난 근원인 장수천(長壽泉)샘물을 바가지로 하나
가득 퍼 마시니 천만년을 살것같은 묵은힘이 불끈 샘솟고 쌓인 피로가 한방의부르스로
확 날라가 버린듯하다. 어느덧 해가 서산마루에 걸터앉아 땅그늘을 드리우며 쫄랑대며
따라다니던 내그림자도 키를 댓발이나 늘리더니 땅거미에 못이겨 자취를 감춘다.
어둑어둑 해져가는 섬진강옛나룻터는 지리산그늘에 가리워 쪽을 못펴고 고개를 떨굴 즈음
우리 일행도 다음 여행코스를 접어두고 화엄사입구에 있는 <프린스펜션>에서
첫날(12일)의 여장을 풀고 세벽에 일찍 기상하여 <화엄사>경내로 들어가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몰입해보기로 작정하고 준비해간 김치에 라면과
햇반으로 조촐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
ㅡ감사합니다. 다들 편히 쉬세요.ㅡ
ㅡ2014년.2월.24일.02시경에.ㅡ 오동동.ㅡ글.ㅡ촬영/편집.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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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부럽습니다
건강하신 모습 과 아름답고 역사가 살아숨쉬는 곳을 올려주신 오동동님
감사하다는 말씀뿐이 드릴수가 없내요
항상 변함없이 일편단심으로 댓글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다음은 순천시,승주의 <선암사>편인데 올려야할지 말지가 망서려집니다.
괜히 여행방회원들이 싫어하는것 같아서.....
욕먹어가며 여행소감과 사진을 소개해야할지....아무튼 좋은하루 되시고 좋은정보 자주 주십시요.ㅡ
감사합니!!
저희 고향을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가보지않은 곡전재, 쌍산재를 님의글을보고 알게되어 부끄럽네요
토지면에있는 운조루는 중학교 역사시간에 다녀온것 같네요.
고향에서 초등학교동창회를 매년 해서 관광뻐스타고 당일로 돌아오느라고 바뻐서 다른곳은
가보지 못하였습니다.
노고단,오산 사성암은 여러번 간일은 있지만, 마산면 사도리샘물은 자동차를 타고가다 잠깐 내려 먹어 본적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