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김옥균(金玉均)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년)는 일본 지폐 1만엔권에 초상화가 들어가 있는 인물이다. 그는 메이지유신(1853~1877년) 때 조선을 정벌하자는 사무라이들의 '征韓論'에 반대했다. 일본 근대 시기 최고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이다. 1881년 말 金옥균이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 후쿠자와를 만났다. 후쿠자와는 이미 金玉均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옥균이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품은 뜻이 일신의 입신양명에 있지 않고, 조국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을 보고 감동해 자신의 집에 머물게 했다고 말했다. 김옥균은 후쿠자와의 소개로 당시 일본 정계의 유수한 인물들을 만나게 된다.
후쿠자와는 1884년 12월 자신이 존경하던 김옥균이 갑신정변에서 실패하자 조선 정부에 등을 돌렸다. 그는 1885년 3월 게이오기주쿠대학(慶應義塾大學, 오늘의 게이오 대학) <時事新報>에 '脫亞入毆論'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싣고 “일본국은 이웃 나라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여유가 없다. 청나라와 조선을 대하는 법도 이웃나라라고 해서 특별히 사이좋게 대우해 줄 것도 없다. 바로 서양인이 저들을 대하듯이 처분을 하면 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자는 더불어 오명을 피할 길이 없다”라고 조선정부에 대해 냉정하게 썼다.
후쿠자와 글의 제목인 '탈아'는 아시아를 벗어나 발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기존의 아시아적 질서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인 '入歐의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아시아적 질서'로 나아가자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결국 일본이란 국가의 틀에서 조선을 재단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대부분의 일본인은 甲辛政變에 실패한 망명자에 불과한 김옥균을 외면했지만, 후쿠자와만은 무사히 살아온 김옥균을 진심으로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가 김옥균을 오가사와라 섬으로 귀양 보내려 할 때도 후쿠자와는 정부를 성토하고 언론을 통해 김옥균의 解配를 호소하기도 했다. 일본과 청나라를 넘나드는 기나긴 망명생활 끝에 김옥균은 결국 암살당하고 만다. 후쿠자와는 김옥균의 살해 소식을 전해듣자, 자신의 집에 위패를 안치하고 김옥균을 애도했다. 또한 청일전쟁 와중에 김옥균의 처와 딸을 찾아 살 길을 도와주기도 했다.
▶1858년 미일수호조약을 체결한 에도막부는 이듬해 조약서 교환을 위해 사절을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25세의 후쿠자와는 186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약 한 달 간 미국의 문명을 몸소 체험했다. 그는 西毆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 끝에 12년 후인 1872년 계몽서 <학문의 권장>을 발표했다. “하늘은 사람 위의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알기 쉬운 표현과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담고 있어 당시 일본인들에게 널리 읽혔다. 판매량은 22만부, 당시 일본 인구(3500만명) 가운데 160명 중 한 명이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후쿠자와는 이 책을 통해 개인과 사회, 국가의 독립자존을 중시함과 함께 신분제를 인정하는 사회관념을 바꾸고 士農工商의 구별 등 인간에 대한 차별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사립(私立)'을 강조했다. 가령 막부 시대의 '관' 입장에서 베풀어 주는 '어진 정치'나 '인정을 베푸는 정치'는 기만적인 것으로, 정부가 베푸는 은혜에 국민은 단순히 복종 관계에서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책임이므로 당연히 받아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학문의 권장 제7편에서는 일본의 전통적인 主君-臣下관계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며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원수를 갚는 행위, 주군의 명령에 따라 할복자살을 하는 등의 행위는 그야말로 비문명적인 것이며 무의미하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당시 일본의 언론 등을 통해 큰 화제와 논쟁을 낳았다.
후쿠자와는 청일전쟁(1894.6∼1895.4) 이후에도 각종 강연, 언론활동 등을 왕성히 펼쳤으며, 특히 메이지 정부의 국가주의적, 군국주의적 행보에는 여전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개인주의자, 자유주의자, '사립'을 중시하며 정부와 대립하는 그의 자세는 마지막까지 일관된 것이었다. 다만 정부에 비판적이었다고 해서 제국주의 국가를 뛰어넘는 시민주의나 보편적인 이상주의 태도를 보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언젠가 한 번은 인도, 중국의 현지인 등을 다스리는 것에서 영국인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 그 영국인까지도 노예처럼 압제해 그 수족을 속박시키고 동방의 권세를 우리 한 손에 움켜쥐자고 장년 혈기가 넘치던 시절에 내밀히 마음속에 약속했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 대학의 창시자인 후쿠자와에 관한 여러 가지 연구논문과 서적들을 통해 절실히 느낀 것은 쇠잔(衰殘)한 한국이 융성하는 일본의 힘에 못이겨 기우는 모습이었다. 한일 관계의 불균형은 그때부터 시작되어 마침내 불평등한 강화조약(江華條約. 1876년) → 을사오조약 (乙巳五條約. 1905년) → 韓日合倂(1910년)이라는 비극의 역정(歷程)을 걷게 된다.
광복 후 교육을 받고 자란 대다수 한국인은 그 통한(痛恨)의 한일 관계를 과거의일들로치부하기 일쑤였다. 이 통한의 한일 관계가 단순히 지나간 역사로 서가 아니라 오늘까지도 살아 있는, 끈질긴 맥으로서 작동하고 있음을 절실히 느낀다.
/김신호 경제부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