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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의 세상과 예수의 초대(2)
마 11:20-30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0-30 / [저주받은 도시; 눅10:13-15] 예수께서는 이적을 가장 많이 행한 도시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자 이렇게 꾸짖으셨다. 21) `화가 있으라. 고라신아. 화가 있으라, 벳새다야! 너희에게 베푼 이적을 악한 도시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부끄러워 겸손한 마음으로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날에는 두로와 시돈이 오히려 너희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23) ㄱ)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네게 베푼 이적을 소돔에서 베풀었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날까지 여기에 남아 있을 것이다. (ㄱ. 사14:13-15) 24)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심판날에는 소돔이 오히려 너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25) [그렇습니다, 아버지;눅10:21-22] 그때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다. `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여, 스스로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이 진리를 감추시고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27)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내게 맡기셨습니다. 아버지만이 아들을 아시고, 아들과 또 아들이 아버지를 드러내 보이려고 택한 사람들만이 아버지를 압니다. 28) [내게로 와서 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ㄴ)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ㄴ. 렘6:16)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 설 교 >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7-30 / 민경설 목사
어떤 시인이 말하길 이 세상은 너무 지치고 피곤하고 짐이 무거워 환절기에 독감 걸린 것처럼 앓고 있다고 했습니다. 인간이나 동물, 자연 환경 모든 것이 다 피곤에 지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병들고 힘들어하며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전1:3-4]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1:8]“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만물이 힘들어 하고 병든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이 지구상에 인간이 태어나 살면서 언제 어디서나 살인적인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3:17-18]“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인간이 쉼과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슬기 있고 교만한 자에게는 감추시고 어린이처럼 겸손한 자에게는 그 길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11:25]“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안식을 주고 쉴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죄를 감당하고 오늘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 주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마11:28]“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 안에서 참 안식을 누리는 길을 생각해 보면
1) 주님께 나와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우리에게 쉼을 줄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마치고 쉰다던지, 휴가를 가라던지, 돈을 준다더니, 무엇을 이루어 줘서 쉬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쉼, 즉 안식을 주시는 분은 주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분만이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길을 만드시고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쉬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어떤 것을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쉼을 얻게 하지는 않습니다.
2) 주님의 겸손과 온유를 배워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주님께 나와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마음에 영접하신 분은 이제 주님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겸손은 어떤 겸손입니까?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순종하신 겸손입니다. 주님의 겸손은 하나님이 지금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고 섭리하시며 하나님이 뜻을 이루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에 지금 여기에 주어진 일이 필요하다고 믿고 순종하는 믿음이 겸손입니다. 여기에 안식과 평강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위치와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필요한 일로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온유는 겸손보다 좀 더 나아갑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아무리 어둡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뜻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현실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왕자로 있을 때에는 자기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에게 고난 받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때려죽였습니다. 옳지만 격동적이었습니다. 그는 광야 40년 을 지나서 하나님의 섭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온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3) 주님과 멍에를 같이 매어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이 말은 참 역설적입니다. 안식과 쉼을 위하여 멍에를 진다는 것은 어떻게 봐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멍에를 지면 더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독교의 진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과 멍에를 같이 지는 것이 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연합하면 내 속에 주님이 사시고 내 삶을 그 분이 살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소가 멍에를 같이 하고 밭고랑을 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새끼 소와 어미 소가 멍에를 같이 매었다면 새끼 소는 어미 소를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어미 소를 따라가는 새끼 소는 어디를 가도 안식일 것입니다.
내가 쉬게 하리라
마 11:28-30 / 조용기 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내가 쉬게 하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현대 사회의 한 사회학자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콘크리트 사회인 것입니다. 현대 도시인들이 아파트, 빌딩 콘크리트 속에 갇혀 살다보니 마음과 생각도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돌보고 섬기기보다는 서로에게 쉽게 상처를 주는 몰인정한 사회가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스피드 시대입니다. 이어령 씨는 과거 시대가 ‘가마솥 문화’인 반면 신시대는 ‘라면세대’라고 말합니다. 가마솥은 부글부글 끓여서 오랜 시간 만에 음식을 내먹는데 라면은 그냥 뜨거운 타가지고 휘휘 젖어서 먹어 버립니다. 그래서 현대시대는 깊이가 없는 그런 시대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누구나 ‘빨리 빨리’를 추구하면서 급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도 “빨리해라. 빨리해라. 빨리 먹어라. 빨리 소제해라. 빨리 갖다 오너라.”‘빨리’가 오늘 현대입술에 발린 말입니다. 셋째는 스트레스 시대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을 원하지만 실제로 성공하는 사람은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합니다. 97%의 사람은 고생만 하고 힘들고 어렵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삶의 스트레스로 인해 두려움, 불안과 공포심, 분노와 원한이 증가합니다. 이러한 현대 사회의 비극에 대해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의 저자인 피에르 상소는 “안식의 상실”을 지적하며 잃어버린 세대라고 말했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엿새 동안 지으시고 이레째는 하나님 당신 자신이 쉬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명령하기를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는 절대로 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같이 복잡한 산업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으로 휴식 없이 칠일 계속 또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할 때가 많습니다. 기계에 기름을 치지 않으면 고장이 나는 것처럼 휴식 없이 일을 하면 결과에는 병이 들고 맙니다. 제가 서대문에서 목회할 때 설교 통역을 하다가 쓰러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제직들이 저를 업고 적십자 병원으로 가서 제가 정신을 차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또 깨어나자 새벽기도에 나와서 예배를 인도하니까 우리 장로님 한분이 상담을 하자고 왔어요. 나를 보더니 “목사님이 참 굉장히 교만하시군요?” 남 아픈 사람 보고서 격려는 안하고 교만하다니..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그러니까 “목사님이 하나님보다 위대한 체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 쉬었는데 목사님 뭐라고 하나님보다 좋습니까? 왜 안 쉬고 야단법석을 합니까? 다른 사람에게 좀 맡겨야지 교만하게 자기가 안하면 못한다고 그렇게 하면 오래 못삽니다.” 그 말이 내 생애 속에 잊어지지 않고 늘 기억납니다. 정말입니다. 하나님도 엿새 동안 일하고 하루 쉬었는데 우리가 뭐기에 이레 동안 내내 일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얼마 못가서 병들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두 손을 활짝 내밀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떠나가라 그러는데 예수님은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졌거든 다 내게로 오라. 이 세상에 육체적인 짐도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나 육체적인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이 마음의 짐인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다 죄 짐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짐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지요.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개인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자녀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간이 턱 내려앉습니다.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 값을 받는가보다. 그런 죄책이 언제나 있고 사람은 죽음의 입구에 들어가면 무서운 죄책감을 느낍니다. 마음의 무거운 죄책의 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패한 심성의 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 먹지 않고 싶은데 자꾸 술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담배를 안 피우려고 담뱃대를 끊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담배 피웁니다. 방탕을 안 하려고 하는데 방탕을 합니다. 미워 안하려고 하는데 미워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안 됩니다. 자기가 포로가 돼있다는 것을 알고 그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이 말로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들어 슬퍼하는 것입니다. 병은 여러분 육체만 아픈 것이 아닙니다. 병이 들면 마음도 굉장히 아프고 고통스럽습니다. 가족에 부담이 되고 자녀들에게 짐이 되니 마음에 부담이 되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생활에 어려움을 당할 때 마음속에 사는 것이 무언가, 인생을 사는 것이 무언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 인생이 너무 허무하구나. 마음에 허무와 무의미가 짓누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다 죽어야 하니까 죽음은 허무의 짐을 우리에게 짊어져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세상에서 잘났다 해도 죽으면 그때로부터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2006년 자료에 의하면 10만 명 당 21.5명으로 OECD 국가 중에 1위였습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총 사망 원인 중 암과 뇌혈관 질환, 심장질환에 이어 4번째가 자살인 것입니다. 경희 의료원 정신과의 백종우 교수는 “80% 이상이 우울증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마음에 우울증을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통계분석에 따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은 해마다 증가해 2007년도에는 47만 명, 2006년보다 7.2% 늘었고, 2008년 우울증 환자는 2007년에 비해 5% 이상 늘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육체적 짐도 짐이지만 더 무거운 짐은 마음의 짐이요, 마음의 우울증입니다. 마음에 우울증이 다가오면 모든 인생이 회색빛으로 드러나고 우리 마음속에 살 희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되겠는데요.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하드필드는 재미있는 실험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사람의 의지가 육체적 힘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 가를 실험했는데, 이를 위해 손으로 쥐는 ‘악력’을 측정해 분석했습니다. 우선 세 사람의 남자를 불러다 놓고 손으로 쥐어 보라고 했었습니다. 보통 상태에서 평균 악력은 45킬로그램 이었습니다. 딱 쥐는 것이 45kg이었어요. 그런데 두 번째는 의사가 그들에게 부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당신들은 약골이다. 육체의 근육을 보니까 힘을 못 쓰게 되어 있다. 영양실조다. 힘이 없다.” 그렇게 약하다고 인식을 시켜 놓고 또 다시 주먹을 쥐라고 하고 보니까 겨우 13kg의 악력 밖에는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보통 때 45kg을 쥐던 사람이 약하다고 인식을 하고 난 다음부터는 정말로 13kg밖에 쥐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또 실험하는 사람이 “당신은 굉장히 강하다. 당신은 할 수 있다. 당신 근육을 보니까 훨씬 더 무거운 것을 걸머질 수 있다. 힘 있다. 약하지 않다. 튼튼하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용기를 주고 측정을 하니까 무려 68kg을 쥐었던 것입니다. 보통 때는 45kg을 쥐고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오면 13kg를 쥐던 사람이 강하다고 용기를 줘 놓으면 68kg을 쥐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힘의 절반 이상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내가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면 완전히 연약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강하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면 굉장히 강한 힘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우리 육체 생활에 굉장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라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지만 나는 못나고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마음을 가질 때는 그 무엇이나 하나 이룰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짐도 짐이지만 더 무거운 짐은 마음의 짐인데 마음이 약해지면 육체적으로 모든 생활이 다 미약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2. 다 내게로 오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육체의 짐을 진 사람도, 마음의 짐 진 사람도 다른 데 가지 말고 내게로 오라.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용기와 힘도 희망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모시면 연약한 사람이 강하게 되고 강한 사람은 얼마든지 더 강하게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32장 2절에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했냐면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야~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광풍을 피하는 사람, 폭우를 가리우는 것 같은 사람, 마른 땅에 냇물 같은 사람,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은 사람 그분이 바로 예수라고 말한 것입니다. 광풍을 피한다는 것은 뭡니까? 광풍이라는 것은 지상에 불어 닥치는 환란의 풍파인 것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지중해에서 유라굴로의 풍랑을 만나 거의 침몰할 뻔 당한 것처럼 우리도 인생을 살면 환난과 고통의 풍파가 광풍처럼 다가오는 것입니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시련과 환란이 연이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온 세계는 경제적인 광풍을 만나서 미국을 위시해서 구라파 할 것 없이 모두 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좌왕우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1장 27절에 “너희의 두려움이 광풍 같이 임하겠고 너희의 재앙이 폭풍 같이 이르겠고 너희에게 근심과 슬픔이 임하리니”
시편 50편 15절에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렇게 광풍이 불 때도 하나님은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광풍을 피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나 총명이나 모략과 재능을 가지고 광풍을 피하려고 하면 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광풍을 피하게 해야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46편 1절로 3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왜? 하나님이 여러분의 피난처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힘이 되시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환난 날에 다른 데를 찾아가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려운 곳에도 내가 주님을 알면 주님이 눈에는 안보이고 귀에는 안 들리고 손에는 잡을 수 없어도 같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함께 계셔서 주님의 지팡이로 우리를 인도하고 막대기로 원수를 치고 우리에게 해를 받지 않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것이니 광풍을 피하게 하는 우리 주님 얼마나 놀랍고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까? 그리고 폭우를 가리우는 곳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폭우라는 것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오늘날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하나님 믿지 말고 내 주먹을 믿으라고 하는 사람도 죽음에 이르면 별 도리 없이 하나님의 엄청난 심판을 받게 되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회개할 기회를 주고 오래 기다리지만 우리의 날수가 다 차고 죽게 될 때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을 피하게 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보내셔서 예수님이 우리의 폭우를 가리우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절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심판이 쏟아질지라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난 사람만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700년대 후반, 영국의 톱레이디 목사가 어느 날 계곡을 지나다가 갑작스런 광풍과 번개, 소나기를 만나 물이 콸콸 넘쳐나므로 황급히 피할 곳을 찾다 보니까 한 바위에 틈이 있어요. 그래서 빨리 뛰어 들어가서 바위틈에 숨었습니다. 그래서 폭풍우와 그 홍수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 감사하니까 마음에 시가 하나 떠올라 왔어요. 그래서 주머니에서 종이를 내어서 그 시를 적었습니다. 그것이 찬송가 188장 “만세 반석 열리니”라는 시인데 영국의 알버트 왕자는 죽음이 임박한 침상에서 이 찬송을 불러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윌리암 글라드스톤 수상도 자신의 장례식에서 이 찬송을 불러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길을 가면서 이들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더 이상 위로와 소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돈, 명예, 권세가 죽는 길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는 것입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그들의 반석이요 위로요 안식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광풍을 만나거나 폭우를 만났을 때, 그리고 죽음이 눈앞에 다가올 때 우리의 위로와 안식은 예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 찬송 한번 불러 보십시다.
1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2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쉬임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3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 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4 살아 생전 숨 쉬고 죽어 세상 따나서
거룩하신 주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바로 여러분의 만세 반석인 것입니다. 광풍이 불어오고 폭우가 쏟아질 때 예수님은 손을 내밀고 내 반석으로 들어오라. 내 반석이 열려 있다. 살을 찢고 피를 흘려서 열려 있으니 내 안에 들어오면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생전에도 안전하고 죽어서 심판 받을 때도 안전해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성공적인 삶과 성공적인 죽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마른 땅에 냇물 같은 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땅에 물이 없으면 아무 생물이 살 수 없습니다. 벌레도 고기도 동물도 못삽니다. 그러나 그 마른 땅에 샘물이 흐리기 시작하면 당장 풀들이 돋아나고 생명들이 생겨나고 고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마른 땅에 냇물 같은 분이다.” 내 마음이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황막하고 사막같이 되었을지라도 예수님이 들어오면 샘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샘물에서 흘러나와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에는 희망을 죽음이 있는 곳에는 생명을 주는 생명수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황막한 광야같은 세상에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메말라 죽어가는 그 마음에 예수님은 샘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영원히 솟아나는 샘물이 되어서 우리가 그 예수님을 모시면 마음에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러분 가슴에 손을 한번 얹어 보십시오. 그 안에 예수님이 샘물로 영원히 거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것 찾지 말고 그 예수님을 찾으면 예수님 위해서 여러분의 생명을 주되 풍성히 주는 은혜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만이 우리의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 한분 붙들면 천국 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 했습니다. “성경을 다 알지 못해도 천국 갑니까? 구약성경에 우리가 알 수 없는 말씀이 많이 있는데 그것 몰라도 천당 갑니까?” 그래서 제가 하는 말은 “예수만 믿으면 천당간다. 낫 놓고 ‘ㄱ’자 몰라도 우리 구원은 예수님을 통해서 오지 지식을 통해서 오지 않는다. 많이 앎으로 구원받는 것 아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누구를 믿느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지식이 있는 자나, 지식이 없는 자나, 잘난 자나 못난 자나 할 것 없이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으리라.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은즉 그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주시기 때문에 믿기만 하면 여러분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은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곤비한 땅이란 뭡니까? 광야를 여행하는 사람, 땀 흘리고 지쳐 배가 고파 쓰러져서 이제는 그대로 내버려 두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햇볕은 내리쬐고 땀은 계속 나고 허기져서 숨을 쉴 수가 없는데 바로 근처에 큰 바위가 그늘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벌벌 기어가서 바위 밑에 들어가니까 당장 시원하고 바위 밑에 샘물도 나오고 거기에서 물도 마시고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인생길 험하고 마음 지쳐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삶을 재생하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님 품에 안기면 그 세상의 뜨거운 햇빛에서 피할 수 있고 광야의 메마른 땅에서 피할 수가 있고 메마른 공기에서 피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야훼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새 힘, 우리가 세상에서 얻는 힘이 아닌 것입니다. 밥 먹고 얻는 힘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의 약을 먹고 얻는 힘이 아닌 것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는 새 힘인 것입니다. 독수리 같이 날개 치며 올라가도 피곤치 아니하고 일이 바빠서 달려가도 곤비치 아니하고 일이 잘되어서 천천히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는 새로운 힘이 되는 것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3.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셋째로 말씀하기를 너희가 내게로 오면 내가 너를 쉬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일을 하고 난 다음 피곤할 때 쉰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말로 형용할 수 없어요. 6.25사변 때 우리가 살기가 힘들었지 않습니까? 저는 6.25사변 때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인데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밤에 부두에 하역작업에 나갔는데 그때는 20살 된 애들만 불렀는데, 나는 17살이었는데 키가 컸기 때문에 20살 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20살로 속여서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는데 초저녁까지는 버텨 나갈 수 있어요. 씨레이션 박스를 어깨에 걸머지고 갖다 나를 수 있는데 초저녁이 지나고 난 다음에 저녁을 먹고 아침 새벽까지 일할 때는 도저히 일할 수가 없어요. 그냥 짐을 지고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말아요. 그러면 흑인 병사가 와서 발로 차고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때리고 차도 관심이 없어요. 좌우간 맨땅에도 꿇어앉아서 잠을 자야지 안자고는 못 견디겠어요. 내가 그때 느꼈습니다. 사람이 쉬지 않고는 못산다. 아무리 힘이 있어도 그 힘이 끝까지 가지는 안 간다. 쉬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 앞에 나오면 쉬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생활이 어렵고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 교회 나와서 주님 품에 들어오면 내가 알 수 없이 마음에 휴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품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어요. 예수님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마음에 온유하고 겸손을 배워야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쉴 수 있는 것입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길들임을 잘 받은 것입니다. 가축인 소나 양이나 염소는 온유한 가축입니다. 길을 잘 들여서 사자가 호랑이나 범은 온유하지 못합니다. 길들이지 않습니다. 사나운 짐승입니다. 그러나 길 잘들인 것은 온유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길 잘들인 사람은 하나님께 아주 순종을 잘하는 온유한 사람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주 왈가닥이 되어서 자기 멋대로 사는 것입니다. 순종하고 주님을 잘 따르는 사람 온유한 사람을 주님께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11절에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사나운 사람이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하기에는 사납게 말을 하고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차고 맹렬히 달려드는 사람이 땅을 차지할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아요. 땅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고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에게 차지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온유한 사람, 온유한 민족이 땅을 차지하지 사납고 다스릴 수 없는 그러한 완악한 마음을 가진 개인이나 민족이 땅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5장 8절로 9절에 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된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시험과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훈련했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온유한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부드럽고 순종하는 그러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부드럽고 순종하고 잘 따르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나오면 주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됩니다. 자기 마음을 낮추고 주님을 높이고 주님 앞에 언제나 꿇어 엎드려서 주님을 경배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잘 살게 되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낮아져서 일할 때는 성공을 했으나 성공하고 난 다음 살만하게 되면 큰 쉼을 쉬고 그 다음에는 건방져지는 것입니다. 목에 힘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넘어집니다. 거만하면 패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되어야 주님 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장 6절로 7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겸손하게 들어가면 때가오면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아니 내가 저를 높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높임을 받기를 원하지만 먼저 낮아져야 그 다음 높아지는 것입니다. 손도 골이 깊으면 손도 높습니다. 골이 평평하면 산도 높지 않습니다. 우리가 많은 시험과 환난을 당해서 깨어지고 내 중심이 무너지고 주님께 순종하고 겸손하게 낮아지면 하나님이 높이 들어서 축복을 해주고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한 선교사님이 기차 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에 앉은 사람이 너무나 낙심을 하고 얼굴이 창백하고 지금이라도 기차에서 뛰어내릴 것 같은 기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제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고 마음에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하니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군. 당신 내 처지에 있어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디 계세요? 하나님이 계시면 이런 고통을 당하게 해요?”그래서 선교사님이 포켓트에 손을 넣어 가지고서 만년필을 꺼냈습니다. 기차가 막 흔들리는데 만년필을 두고서 “당신이 이 연필을 상에 세워 보십시오?”하니까 “당신 나를 조롱하는 거요? 이렇게 흔들리는 기차에 앞에 밥상에 만년필을 세우라니 어떻게 세운다는 말이요?” “나는 세울 수 있어요.” “어디 세워 보세요.”두 손을 잡고 “세웠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여겨 두 손으로 세우는 것 세워지겠느냐?” “못 세우더라도 두 손으로 하면 세워지는 것처럼 인생도 혼자는 못설 때 주님의 손이 붙잡으면 설수가 있다니까요.”그래서 그 사람이 크게 감동을 느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리 하려고 해도 못섭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면 우리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시편 91편에 “저가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께 의지하면 주님은 책임지고 우리를 붙들어서 세워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환난과 풍파가 몰아쳐도 하나님이 붙들어 주셔서 움직이지 않고 버림당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주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했었습니다. 예수님 멍에 밑에 들어가서 온유하게 겸손하게 삶을 배우라. 주님의 멍에는 뭡니까? ‘십자가’인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와 부패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보고 하는 말이 “네 짐을 내게 맡기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내 멍에 밑에 들어오너라. 나와 함께 가자.” 중동에서는 밭을 갈 때 언제나 어미 소 멍에 밑에 새끼소를 같이 넣어서 밭을 갑니다. 새끼소가 온유하게 순종하고 따라가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미 소 목에다 길마를 걸어 놓고 그 옆에다가 새끼소를 넣어서 ‘이랴~’ 어미 소가 잔뜩 힘을 내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멍에를 끕니다. 그런데 새끼소는 하나도 안 무겁거든. 엄마가 왜 저렇게 땀을 흘리고 야단이냐. 나는 아주 가벼운데.. 왜, 멍에가 엄마 목에 걸려 있지 자기 목에 안 걸려 있습니다. 그냥 멀리서 보니까 목에 걸렸지만 엄마 멍에 밑에 들어가서 따라가니까 자기는 쉽고 가볍게 걸어갑니다. 엄마만 땀을 흘립니다.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예수님이 걸머졌습니다. 십자가에 다 걸머졌고 우리가 예수님께 온유하게 순종하고 겸손하게 낮아져서 따라가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쉽고 가볍게 인생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주님의 십자가에 다 얹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렇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은 내게로 오라” 마음의 짐, 육체의 짐, 생활의 짐을 짊어지고 내게 와서 내게 맡겨라. 짐은 내게 맡기고 내 밑에 들어와서 순종하고 온유하게 따라가면 너는 쉽고 평안하게 인생을 살 수 있다. 이 어려운 세상에 쉽고 편안하게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에 예수님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 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람으로 오셔서 겸손하게 낮아져서 십자가에 매달려 인간의 모든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자가 되고 우리를 돕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짐을 주님께서 짊어지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께는 수고하고 무거운 멍에지만 우리에게는 쉽고 가볍습니다. 왜, 예수님 멍에 속에 들어가면 우리는 우리 죄 때문에 죽을 필요가 없어요. 이미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었으니까. 우리의 부패 때문에 우리가 쫓겨 나갈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부패를 다 청산했으니까요. 우리가 우리 병 때문에 우리가 병을 걸머지고 고생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 위해서 채찍에 맞았기 때문에 우리가 저주를 걸머지고 몸부림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저주를 받은바 되사 십자가에 매달렸던 것,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렸기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고 고생할 필요 없습니다. 주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우리는 주님의 품에 안겨서 공짜로 죽었다가 쉽게 부활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쉽습니다. 죄 용서받고 거룩하게 되고 치료받고 축복받고 쉽게 죽어 부활해서 영원한 천국을 얻는 ‘쉽고 가볍게 인생을 사는 것’은 예수님 십자가 멍에 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55편 22절에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68편 19절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옛날에만 걸머진 것이 아니라 오늘날 현재 이 자리에서 우리의 짐을 걸머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멍에를 우리에게 내 놓으면서 “자, 네 짐을 여기다 맡겨라. 너의 죄 짐을, 너의 불의와 추악의 짐을, 너희 질병의 짐을, 너희 저주의 짐을, 너희 절망의 짐을, 너희 죽음의 짐을 자! 여기 내 어깨에 맡겨라. 그리고 나와 같이 걸어가자. 사람들은 네가 십자가를 걸머진 것 같지만 너는 쉽고 가볍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얼마나 주님의 은혜가 고맙고 감사한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결론>
이 세상 삶은 오늘도 불안, 초조, 절망 등으로 피곤하고 곤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 나아서 예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께 의지하면 마음과 생활에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와 같이 있으리라” 그냥 주님 와서 같이 있는 것 아닙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걸머지고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짐을 대신 짊어지셨고 또 지금도 짊어지기 위해서 십자가의 멍에를 걸머지고 우리에게 와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종교적으로 믿지 말고 형식적으로 믿지 말고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주님께 맡기고 의지하고 믿고 순종하고 따라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인생사는 그 자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정신적인 짐이 너무나 무거워 우울증에 걸려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많고 육체적인 짐도 너무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고 고통이 한없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이 짐을 대신 짊어질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인데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이 못 지는 짐을 주님이 짊어지고 우리와 같이 인생을 살아감을 생각할 때 감사합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주님, 주님께서 성령으로 오셔서 오늘도 십자가에 우리의 짐을 다 짊어져 주심을 감사합니다. 겸손하게 온유하게 주님을 따라 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여 우리가 겸손하고 온유하게 주를 따라가겠습니다. 주께 모든 짐을 맡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세워 주시옵시고 모두 다 쉽고 가볍게 감사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려 놓음
마 11:28-30 / 이정익 목사
한국에 와 있던 어떤 선교사가 시골교회를 방문하기 위하여 차를 타고 시골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할머니가 무거운 짐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시냐”고 물으니 선교사가 가는 같은 동네였습니다. 그래서 차에 태워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 할머니가 머리에 이고 있는 짐을 그대로 이고 있습니다. 내려놓으라고 하니까 괜찮다고 합니다. 또 내려놓으라고 하자 한사코 괜찮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 한 몸 타는 것도 미안한데 짐까지 내려놓으면 미안해서 안 된다”고 끝까지 그 짐 보따리를 이고 갔다고 합니다. 오늘 사람들은 다 이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다 내려놓으라고 하시는데도 굳이 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고달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읽은 본문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이고 축복의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예수께서 보시기에 그들이 지고 있는 짐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 짐은 전통적인 짐이었고 율법의 짐이었고 유전의 짐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에 그 전통의 짐, 유전의 짐, 율법의 짐을 지라고 강요했습니다. 거기에 백성들은 각자의 생활에서 주어지는 짐이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죄의 짐, 운명의 짐, 질병의 짐, 죽음의 짐까지 포함되었습니다. 또 당시 사람들에게는 거대한 로마의 지배아래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무소망의 짐이 가장 무거웠습니다. 그러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의 짐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내가 영적 해방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마음의 고통에서 자유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은 죄의 속박에서, 율법의 구속에서, 정신의 모든 불안에서 해방을 얻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이 말씀은 자신이 메시야임을 공개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온유와 겸손의 대명사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칭호였습니다. 그리고 “내게 배우라”는 말씀은 “내가 곧 길이고 방법이고 모든 구속에서 헤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움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메고 있던 멍에의 짐, 두려움의 짐을 다 벗어 던지고 내가 주는 멍에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주는 멍에는 “사랑의 멍에”입니다. 그 멍에는 구원과 해방과 영생을 가져오는 멍에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멍에는 “새의 깃털보다 더 가벼워 창공을 날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멍에”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모두 짐을 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멍에서부터 운명의 멍에, 삶의 멍에에까지 수다한 멍에를 메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피곤한 것입니다. 그 원인은 짐을 내려놓지 않고 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일상의 짐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나타나는 일상의 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짐을 잠자리까지 가져갑니다. 그래서 잠이 평안치 못합니다. 어떤 분들은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잠자리에 갈 때는 놓아야 합니다. 놓으면 순간 몸과 마음이 평안해지고 포근해져서 곧 잠이 옵니다. 그런데 포기를 못하고 내려놓지를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머릿속이 복잡하면 온몸이 경직되어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약을 먹어도 효과가 없습니다. 놓아야 합니다. 포기해야 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근본적인 생각은 오늘 이렇게 고민해도 별 수가 없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운명의 짐
운명의 짐, 이것도 참 무거운 짐입니다. 오늘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암”이라는 말입니다. 이 한마디 말에 모두 초죽음이 됩니다. 왜냐하면 암은 우리에게 가장 무거운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암이 무서운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내려놓고 포기하기가 어렵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때가 되면 평안히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운명할 때가 되었는데도 계속 괴로워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안타까워하는데 본인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왜 그러냐 하면 놓지를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때 놓으면 그 영혼이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름에 평안하게 응답하게 됩니다. 무거운 짐은 내려놓을 때 안식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욕망의 짐
사람의 욕망은 한이 없습니다. 사람의 욕망은 가장 큰 바다와 같습니다. 이 바다가 큰 사람일수록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지난 2009. 1. 10 SBS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700회 특집을 내 보냈습니다. 미국 일리노이대학 심리학 교수 에드 디너(E. Diener) 교수가 미국에서 400위 안에 드는 부자들의 만족도를 조사했습니다. 그들의 만족도는 아프리카 케냐의 원주민과 비슷하게 나타났습니다. 연평균 소득 일만 달러에 들어서면 그때부터는 수입이 더 늘어나도 삶의 만족도는 더 높아지지 않는다고 조사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을 조사했습니다. “10억 원 이상 돈을 준다면 당신은 가족과 친구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전체에서 53% 가 예스라고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관계의 법을 무시하면서까지 돈 버는 것만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계를 중시하는 삶입니다. 돈은 언제 사라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금통장에 예금하지 말고 인간통장에 예금해야 하는 것을 오늘 너무 소홀히 하고 살아갑니다. 이제는 은행에 투자하지 말고 더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하는 일에 투자해야 할 때입니다. 이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지 않으면 결국 부모도 형제도 배반하게 됩니다. 가족갈등이나 형제 갈등 그리고 배반 등이 거의 모두가 이 돈 때문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른들만의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어린 아이는 꼭지가 좁은 병속에 들어있는 사탕을 손에 가득 집고 손을 빼려고 하는데 빠지지 않는다고 앙앙 울고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엄마가 손을 놓으라고 했지만 아이는 손을 놓지 않고 손이 안 빠진다고 앙앙거리고 울고 있습니다. 쪼그만 것이 벌써부터 이 욕망에 빠져있으니 커서도 그 인생이 피곤한 것입니다. 손해를 보지 않고 그 손을 빼려고 골똘히 생각하니까 잠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욕망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것은 비록 이것만은 아닙니다.
입시 때가 되면 아이들과 부모가 모두 원수가 됩니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자기입장에서 뭔가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 요구가 그 아이의 수준으로는 불가능한 수준을 막무가내로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공부가 싫은 아이에게 계속 공부를 강요하면 그 아이는 때로 비행청소년이 될 수 있습니다. 대신 공부안하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공부안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개성이고. 은사이고 달란트일 수 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에게 공부하지 말라고 하면 아이는 미칩니다. 가출하고 자살합니다. 왜냐하면 그 학생에게는 공부하는 것이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꿀도 단팥죽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게가 얼마나 맛이 있고 비쌉니까. 그런데 그것이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싫은 공부 평생 안하겠다.” 이런 사람이 성공합니다. 억지로 공부하는 사람은 안하는 사람보다 낙오될 확률이 더 높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예를 들면 노래방은 노래잘하는 사람이나 좋은 곳입니다. 노래 못하는 사람은 가기 싫은 곳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노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자꾸 시키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두곡 시키는 것이 훨씬 분위기가 업 될 수 있고 노래 좋아하는 사람은 두곡 불러 좋고 노래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평안해 좋지 않습니까.
조금 깊이 생각해 보면 참 어리석은 생각들입니다. 왜 아이에게 내가 못간 길을 강요합니까. 그 아이는 그 아이가 갈 길이 따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 길을 가야 그 아이가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그 욕망을 놓지를 못합니다. 포기를 못합니다. 그 욕망을 포기하기 전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불화가 끝나지 않습니다. 빨리 내려놓아야 합니다. 조금 손해보고 내려놓으면 모두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게 와서 배우라 그리고 내 멍에를 메라“고 부르십니다.
관계의 불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은혜는 화목입니다. 욥 22:21절에서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하라”고 했습니다. 잠 21:9절에서 “다투는 여인과 큰 집에서 사는 것 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좋다”고 했고 잠 17:1절에서 “제육이 가득한 집에서 다투는 것 보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화목한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짐 중에서 또 무거운 짐은 이 관계에서 오는 갈등의 짐입니다. 부부는 참 좋은 관계입니다.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이고 이웃이고 동반자이고 평생 동행자입니다. 그런데 관계가 이렇게 좋지만 그것도 관계가 좋을 때 좋은 것입니다. 서로 관계가 악화되면 이 관계처럼 무거운 관계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혼 사유 중에 가장 많은 사유가 성격 차이입니다. 관계가 안 좋아지면 그때부터 사사건건 충돌하게 됩니다.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부부의 불화의 이유를 보면 대부분 “내 기준대도 하라“는 요구 때문입니다. 서로 상대방을 이기려 하고 길들이려 하고 내 방식대로 따라오라는 요구가 많습니다. 아주 서툰 삶의 방식입니다. 어떻게 내가 기준이 될 수 있습니까. 서로 맞추려고 해야 합니다. 조종하다가 한사람이 빨리 양보하고 포기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두 사람 중 한사람은 깨끗하고 또 한 사람은 지저분하다면 싸움과 갈등에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빨리 한쪽이 상대방에게 다가 가서 남편이 좀 깨끗해 주던지 아내가 함께 인내해 주던지 해야 해결됩니다. 부부는 서로 비슷해져야 하는 존재입니다. 서로 내 기준에 맞추라고 강요하면 파국을 맞습니다.
어떤 부흥사가 부흥회를 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찬 바다는 썰렁해 이고 가장 뜨거운 바다는 사랑해”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생각한 어느 부인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찬바다는 썰렁해 인데 가장 뜨거운 바다는 무슨 바다인줄 아느냐” 그랬더니 남편이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오늘 내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나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없느냐” 하고 묻자 남편이 “열바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평생 걸어가야 할 그 두 사람의 짐이 너무 무겁게 됩니다. 이 짐은 삶을 더 무겁게 하고 힘들게 하고 더 고달프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게로 와서 쉬라,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사랑의 멍에를 메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의 멍에는 새털처럼 가벼워서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이런 가벼운 짐도 있는데 우리는 지금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죄의 짐
짐 중에서 이 죄의 짐이 인생을 가장 고뇌스럽게 합니다. 이 죄의 짐은 보이지는 않으나 마음을 사정없이 짓누르고 생각을 억압하고 온몸을 짓누릅니다. 그리고 이 죄의 짐은 다 뺏어갑니다. 기쁨도, 즐거움도, 행복감도, 재미도, 평안도 다 뺏어갑니다. 16세기에 면죄부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어 지옥 불에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무거운 죄들이 면죄부 한 장만 사면 용서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면죄부는 처음에는 선행자에게만 주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에게도 면죄부를 주었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돈이 부족하니까 앞으로 지을 죄에 대해서도 미리 앞당겨 면죄부를 발급하였습니다. 이 면죄부만 사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면죄부를 사 갔습니다. 이 죄의 문제는 이렇게 누구에게는 심각한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숨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어디 가서 숨겠습니까. 세상에서 살인죄를 지으면 어디 가서 숨어 살겠습니까. 더구나 하나님 앞에서 어디라고 숨어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시 139편에서 시인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위로 날아가 숨어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바다 끝에 가서 숨을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고 내가 음부와 흑암에 거할지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시나이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다 약화되고 다 빼앗아가는 가장 무거운 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다 내게로 오라, 내게로 와서 쉬라,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열 번 백번이라도 찾아가야 합니다. 염치는 없지만 또 찾아가야 합니다. 그때 내 무거운 짐이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 걱정할 것을 위해서 걱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걱정할 것은 “나는 천국에 갈 것인가” 하는 걱정입니다. 이런 걱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가려면 잘 믿어야 할 텐데“ 라는 걱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야 틀림없이 천국 간다” 이런 사람이 위험한 사람입니다. 이 자만이 가장 위험한 요소입니다.
내 안에는 두 마음이 존재합니다. 한 마음은 나의 본성의 나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내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둘이 언제나 서로 싸웁니다. 본성인 내 마음은 자꾸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죄를 짓게 하고 타락하게 하고 향락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또 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고 죄와 싸우고 향락으로 달려가려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려고 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이기려면 내안에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내 마음의 결심이나 다짐이나 각오는 아주 보잘 것이 없습니다. 내 안의 본성의 나는 참으로 끈질깁니다. 예전에 있던 죄의 근성이 죽지 않고 기회만 되면 고개를 들고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옛날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예수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네게로 와서 다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나를 믿으라”는 말입니다. 타향살이에 지친 사람은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 품에 안기는 순간 모든 짐은 내려집니다. 그래서 탕자는 고향에 계시는 아버지 집에 가서 그 아버지의 품에 안길 때 모든 고민이 해결되었습니다. 인생은 모두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 짐은 주님께로 돌아갈 때만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 짐을 주님께로 가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더 내려 놓아야 합니다. 더 할 수 있으면 모든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영적 평온을 얻을 수 있고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있고 우리는 자유함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믿는 자의 스승이신 예수님
마 11:28-30 / 좋은군사블로그
우리는 모두 마음의 한 구석에 영원히 지을 수 없는 분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숱한 만남의 사람들이 있고, 인연으로 얽혀진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분들 중 하나는 아마 우리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일 것입니다. 오늘은 가르치는 분들을 한번 다시 생각하는 스승의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스승의 주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이 땅에서 그래도 사명을 가지고 자라는 후손들을 바르게 가르쳐 나라의 동량을 삶으려는 교사의 사명과 위치 및 그 역할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일깨우며 그들의 수고와 어려움을 우리 모두가 이해하고 기도로서 돕고 그들이 수고하고 애쓰는 각 부분에 있어 협력을 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적극적으로 돕자는 의미에서 이 스승의 주일을 정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반 교사의 위치와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회는 예로부터 가르치는 분을 귀하게 생각하고 존경했습니다. 스승을 사부라고 가르치는 아버지라고 했을 뿐 아니라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다고 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스승의 은혜를 깊이 깨우친 사람들이 스승의 그 고마움을 이렇게 노래로 지어 불러지고 있지 않는가 말입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 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후렴) 아- 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 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2. 태산같이 무거운 스승의 사랑 떠나면 잊기 쉬운 스승의 은혜 어디간들
언제인들 잊사오리까 마음을 길러주신 스승의 은혜
3. 바다보다 더 깊은 스승의 사랑 갚을 길은 오직 하나 살아 생전에
가르치신 그 교훈 마음에 새겨 나라 위해 겨레 위해 일하오리다
우리 사회가 지키는 스승의 날은 5월 15일입니다. 일부에서는 이 스승의 날을 2월 달로 옮겨야 된다는 주장이 제기 되기도 합니다만 오늘을 스승의 날로 제정한 것은 분명한 의미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었습니다. 5월15일은 우리 민족의 성군이셨던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의 탄신 일입니다. 세종대왕은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다방면의 재능과 취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를 펼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피고 최고의 문화와 과학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측우기 해시계 등을 발명하고 제작을 했을 뿐 아니라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고 훈민정음을 창제했습니다. 우리 민족 최고의 지도자요, 최고의 스승인 세종대왕의 탄신 일을 스승의 날로 정한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처음에는 1958년에 청소년 적십자 회라는 청소년동아리에서 사은행사를 시작했는데 1965년부터 15일을 스승의 날로 정해서 실시해오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배움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 없는 줄 압니다. 왜냐하면 배운 만큼 살아가고 배운 대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배운 사람은 좋게 살아갑니다. 나아가 얼마만큼을 배웠느냐에 따라서 그 배운 것을 활용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반면 배움에 있어서 얼마나 배웠느냐는 배움의 분량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배웠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잘못된 것을 배웠다면 그것은 아무리 많이 배웠다고 할지라도 배우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른 것을 배워야 하고 배운 것을 바르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누군가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경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배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가르침을 통해서 배우는 교수의 경험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살아가면서 스스로 터득하여 얻는 배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지식은 대다수 가르침의 배움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좋은 가르침을 원하고 좋은 스승을 원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교사들이 있습니다. 실력 있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유능한 교사들이 있습니다. 잘 가르치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오늘날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그 배운바 대로 살아가지 못하는가 말입니다. 사람들의 지식이 점점 향상되어가고 놀랍도록 지식의 활용도가 많아져 가는데 왜 이 사회는 바로 서지 못하고 점점 더 부패하여가고 온갖 범죄가 난무하고 타락하여 가는가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 가르침의 문제요 배움의 문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르치는 교사들이 바로 서서 가르치지 못했고 배움의 사람들이 바로 배우지 않고 배웠어도 그 배운 바를 바르게 활용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가르침과 배움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바르게 가르쳐야 함은 물론이요 배우는 사람들이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바른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더불어 바르고 온전하게 가르쳐 주는 바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동물은 본능적으로 살아가지만 사람은 본능적으로만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교육에 의해서 사람다워집니다. 교육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화를 발전시킵니다. 교육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키워주는 다섯 분의 선생님을 만납니다. 첫 번째는 태어나면서 만나는 부모님이고 두 번째는 교회에서 만나는 주일학교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학교에서 만나는 학교 선생님. 네 번째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회 선생님이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우리 영혼의 영원한 스승이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참된 선생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만인이 우러러 숭모하는 인류의 참 스승,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오신 최고의 스승입니다. 그분은 우리 인생에게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신 진리의 스승이시며 인생의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생명의 스승이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시며 풍성하게 하시는 영혼의 스승이 되시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배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스승을 바로 만나야 하고 잘 만나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좋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좋은 스승으로서 예수님은 우리를 좋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시기 위하여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시는가에 대하여 생각하고 깨우침을 받고자 합니다. 그분 선생님이신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아니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생들을 향하여 내게 와서 배우라 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스승이신 예수님에게 늘 와서 배워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배운 대로 산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배우되 참된 것을 배워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된 것을 배우지 않기 때문에 바른 인격자가 되지 못합니다. 참된 것 바른 것을 배우지 않게 때문에 바른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은 바른 것을 배워야 합니다. 바르게 배워야하고 온전하게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스승 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배워야 합니다
주시는 본문 마11:2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참다운 쉼과 인생의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 뒤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배고프고 소외된 백성들, 로마의 학정에 시달리는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고 뒤를 따랐습니다. 또 하나는 소수의 사람인 제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님에게서 무엇인가 배우도록 초청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간들, 기본적인 생존의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따르는 무리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에게서 진리를 배우고, 인격을 배움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들이 제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새롭게 배워야 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은 세상의 것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께로 왔다면 주님의 가르치심대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어렸을 때 부모에게서 배운 대로 성격도, 인간성도, 체질도, 기질도 다 형성되었습니다. 부모의 운명을 대물림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상 때부터 우리 사회에 물려진 습관과 문화가 오늘의 사회를 형성해 왔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배움에 따라서 운명을 결정하는데 잘 배우면 잘 배운 대로 성공하고, 행복하고, 잘못 배우면 잘못 배운 대로 인간은 불행하고 굴절된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성격도 배운 대로 됩니다. 부모로부터 상처 나고 부모로부터 받은 그대로 또 배운 대로 형성이 됩니다. 부모에게서 자기도 모르게 그대로 배운 사람은 살아가면서 자식에게, 아내에게, 사회 속에 그대로 표출하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거의 배운 대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교에서만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친구를 사귀면서도 배우고, 가정에서도 배우고, 사회에서도 배웁니다. 그러면서 배운 대로 형성해 가는 것입니다. 부모에게서 배웠든, 친구에게서 배웠든, 사회에서 배웠든 그대로 하나의 인간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시 배우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다시 배우라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주신 말씀으로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예수님께서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지식을 배우고, 기술을 배우고, 학식을 배우고, 많은 정보를 배우지만 마음을 배우라고 초청하신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배워야 할 것 가운데 최고의 배움은 바로 마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특별한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우리에게 마음을 가르치는 특별한 스승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인간의 행복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행복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고 불행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불행합니다. 마음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을 만들어가지만 마음이 불행한 사람은 결코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은 교육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배움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사회적으로 큰 해를 끼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을 먼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밀턴은 마음은 천국도 지옥으로, 지옥도 천국으로 만들 수 있고 그렇게 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삼중고의 인간 소경, 벙어리, 귀머거리였던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 답은 것은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그것은 가슴으로만 느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좋은 것은 마음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월리암 제임스는 “우리 세대에 가장 위대한 발견은 인간이 자기 마음 자세를 바꾸므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일찍이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인간의 모든 운명과, 행복과, 불행과, 삶의 모든 자유가 다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내게 와서 내 마음을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무슨 마음입니까? 예수화 되어지는 마음입니다.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온순하게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온순과 온유는 다릅니다. 온순은 자연적인 성품이요, 온유는 하나님께서 바꾸어주신 성품입니다. 온순은 겉 사람의 성품이요, 온유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준 속 사람의 성품입니다. 온순한 사람은 자기 고집대로 삽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대로 삽니다. 온순하면서도 예수를 안 믿을 수 있지만 온유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는 끝까지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고, 화평합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주님께 복종시킵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를 이룹니다.
사도 바울은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했다”(빌 2:5-8). 이것이 바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웠습니다. 그리고 섬기는 자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온유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서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은 자기를 완전히 별세시키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마음을 배울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방법을 하나 제시했습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멍에를 멘다는 말은 ‘함께 한다’는 말입니다. 유대 땅에 가면 두 마리의 짐승이 한 멍에 아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멍에라는 말을 달리 표현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함께 배우고 훈련하는 것을 멍에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고 우리는 그의 제자가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멘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배우고, 따르고, 본받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서 날마다 그 삶 속에서 예수를 드러내는 사람이 제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함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청하는 은혜가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나는데 하나는 죄사함 받으라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것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받는 사건이요, 초보적인 은혜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 높은 단계를 우리에게 요구하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본받고 예수님의 인격을 형성하고 세상을 살려내는 그런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로의 부름입니다. 이것이 함께 멍에를 메고 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멍에가 뭡니까? 십자가입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활이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배운다는 것은 예수를 배운다는 것이요, 예수를 배운다는 것은 예수 십자가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배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배우는 것인데 예수 배움은 예수와 함께 죽기 위하여 십자가 지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멍에 속에 들어가기를 배워야 합니다.
멍에라고 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닙니다 속박당하는 것입니다. 얽메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이 주는 멍에는 무겁습니다. 힘듭니다. 고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멍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멍에속에 들어가면 참된 자유와 평안과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멍에 속에 들어가면 쉽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멍에를 메고 나는 그 속에 끼어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되게 하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서로 맞지 않는다는 고통입니다. 사람이 사회에 맞지 않아서 이 사회가 고통입니다. 부부간에 맞지 않아서 사네 안 사네 고통입니다.
까다로운 성격을 누가 맞추면서 살겠습니까 안 맞아서 못살겠다는 것이 이혼입니다. 직장이 맞지 않으면 일하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갓 입사했다가도 안 맞으면 금방 나옵니다. 교회에서도 은혜가 맞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고통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와 맞지 않으면 예수 믿는 것이 고통입니다. 왜 맞지 않습니까? 멍에가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무엇입니까 가르침을 받는자와 가르치는 자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코드가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배워서 예수와 꼭 맞으면 그때부터는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맞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서 예수와 맞아진 사람은 어떤 사람과도 다 맞습니다. 어떤 까다로운 남편과도 맞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바르게 배운 사람은 평안합니다. 행복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배움도 바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배운 자답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마 11:28-30 / 최응희 목사(안디옥교회)
요즈음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스트레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영어입니다만 요즈음은 유치원생에서부터 노인네에 이르기까지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이 그야말로 ‘스트레스’라는 것을 받고 산다는 뜻일 것입니다.
1. 선악과를 먹은 인간
스트레스라는 말은 요즈음 유행하는지는 몰라도 스트레스 그 자체는 이미 아담하와가 범죄한 이후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먹은 이후에 인생의 짐, 죄의 짐과 함께 스트레스가 생겨났습니다. ‘선악과’라는 이름의 뜻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과일이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선악과는 분별의 과일입니다. 분별은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것 때문에 인생에 모든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이것과 저것의 차이점, 많은 것과 적은 것의 다른 점, 네 것과 내 것의 구별, 여기에서부터 인간의 불행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두 하나요,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요, 모두가 그 은혜로 사는 것을 포기 하고, 네 것 내 것을 구별하고, 높은 것과 낮은 것의 차이를 두고,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 차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선악과는 지식의 과일, 문명의 과일입니다. 이것을 먹음으로 인간은 문명이 발달했지만 그것이 경쟁과 싸움과 갈등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 수고와 짐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너는 네 평생에 수고 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3:17
이후로부터 인생은 육체의 무거운 짐, 정신적인 갈등의 스트레스, 영혼의 죄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2.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보시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렇게 불러주시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됩니다. 인생은 누구나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인생이 고달프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가정이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가장에게는 때로 가정도 무거운 짐이 됩니다. 때로는 직장도, 사는 것도 다 짐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인생을 부르실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하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노동자나 짐꾼을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의 짐, 생활의 수고와 삶의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요즈음 사람들을 만나보면 누구나 바쁘다고 합니다. 서로 친구들 간에도 시간을 맞추기가 참 어렵습니다. 현대인들이 왜 그렇게 바쁩니까? 이렇게도 편리해지고, 빨라지고, 넉넉해졌는데도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바쁘게 만듭니까? 아마도 세 가지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첫째, 시대 자체가 너무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에 적응하려고 하니까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무한 경쟁의 시대라는 이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고 뛰어야 하기 때문에 바쁩니다.
셋째, 더 많은 경제력을 확보하려고 바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높게, 더 넓은 영역을 갖기 위해서는 경제력을 가져야 하고 그러자니 바쁘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가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경쟁 속에서 뒤지지 않으려고 정말 수고합니다. 더 많을 것들을 소유하기 위해서 수고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려고 쉼 없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시대는 계속 더 빠르게 돌아갈 것입니다. 그럴수록 경쟁도 더 심해질 것입니다. 더 많은 경제력의 욕망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3. 다 내게로 오라!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르심에 진정으로 응답하는 맑은 영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의 말씀에 나 자신을 순종시키는 것입니다. 기도 가운데 겸손히 무릎꿇는 것입니다. 예배중에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바쁘게 살가다도 그런 시간들을 통해서 영혼이 예수님께로 다가가고, 예수님 생각하면서 겸손히 무릎을 꿇는 은혜에 자리에 앉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입니다. 특별히 예배를 잘 드리시기 바랍니다. 적어도 교회에 와 있는 시간만이라도 모든 육신적인 것들, 자기 과시적인 것들, 욕심들, 세상적인 지위들, 자랑하는 지식들을 다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나오면 정말 쉼이 있을까? 피곤하게 일주일을 살다가 하루 쉬는 주일날에 교회 와서 반나절 다 보내고 이것저것 봉사하다가 보면 하루 해가 다 가서 어떤 때는 평일보다 더 쉬지도 못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들은 저 멀리 던져버리기 바랍니다. 인간은 영혼의 존재입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에 평안을 얻을 때에 쉬는 것입니다. 비록 땀 흘려 일해도 그 영혼에 기쁨이 있을 때 그 영과 육이 쉼을 누리게 됩니다. 세상에서 그 피곤함과 수고함과 무거운 짐이 왜 생긴 것입니까? 끊임없는 경쟁과 육신과 물질에 얽매인 그 바쁜 발걸음들, 심지어 죄와 타협하고, 자기 과시적인 외형적인 것들에 휩쓸리느라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씻어내는 것이 내 영혼이 쉼을 얻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혼이 힘을 얻고 영혼이 생기가 돌 때 만사가 힘차고, 기쁘고, 살 맛나게 됩니다. 영혼에 생기가 가득 찰 때 그 무거운 짐을 벗고, 새 생명의 기운이 가득 넘치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야긴의 은혜를 주시는 주님, 저를 세우시고,
보아스의 은혜를 내리시는 주님, 저에게 힘을 부어주옵소서.
제가 세상에서 지치고, 시달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채 여기 왔습니다.
상처받고, 아픈 영혼, 찌들고 더러워진 영혼으로 제가 여기 왔습니다.
제 영혼 씻어주시고, 어루만져 주시어
다시 저 광야같은 세상을 힘차게 달려가게 하옵소서.
이렇게 진실로 영혼을 주를 향해 열게 될 때, 주님은 받아주시고, 어루만져 주시고, 치유해 주실 줄 믿습니다. 지치고 탈진한 엘리야를 만져주시던 주님, 여러분의 영혼도 만져주실 줄 믿습니다. 엘리야의 이름을 불러주시던 주님의 온유하신 음성이 여러분도 불러주실 줄 믿습니다. 물과 떡을 주시던 그 사랑의 손길이 여러분과도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4.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런데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면서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십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29
멍에는 무거운 짐인데, 명예라면 모를까 멍에를 메라고 하시니 그것이 어찌 쉬게 해주시는 일이 되겠습니까? 이 멍에는 무슨 멍에입니까? 주님을 닮는 멍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멍에는 두 마리의 소가 메는데, 한 마리 소는 유능한 소, 경험이 많은 소이고, 다른 한 마리 소는 별로 경험이 없는 소입니다. 경험이 없는 소는 옆의 경험이 많은 소와 발을 맞추기만 하면 저절로 길을 잘 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주님과 발을 맞추면서 주님을 따라가면 거기에 참 평안과 쉼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 말씀은 당시 바리새인들에 의해 무겁게 종교의 짐을 지고 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주님의 사랑의 음성이기도 합니다. 신앙이 자유하게 하는 것임에도 유대 지도자들은 금지의 덩어리로 만들어서 오히려 믿음이 무거운 짐이 되게 하고, 얽어매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항상 말씀 속에서 이 짐을 벗겨주시며 하나님의 바른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율법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다른 방향에서 이 말씀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 멍에입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따르는 멍에입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일수록, 권세가 있는 사람일수록, 위치가 있는 사람일수록, 교회에서 낮아짐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영혼이 맑아질 수 있는 곳이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어디서나 높임을 받는 사람이 교회에서도 높임을 받기를 원한다면 그는 어디서 예수님을 닮아 겸손을 배우겠습니까? 세상에서 큰 소리 치던 사람이 교회에서도 큰 소리 친다고 하면 그는 어디에서 주님의 온유를 실천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식이나, 지위나, 그리고 돈이나, 그 무엇이든지 그것이 사명으로 드려지지 못하면서, 그것들을 자랑하고자 하거나 그것들로 인하여 대접받고자 한다면, 이는 어느 곳에서도 그 수고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곳이 없는 어리석고, 불쌍한 영혼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르시는 주님 앞에 진정 겸손히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위한 것도,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닌 오직 내 영혼이 주님과 진실되고 간절하게 마주하는 영혼의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허세도, 욕심도, 거짓도 개입될 수 없습니다. 오직 간절하고 겸손한 고백만 있을 뿐입니다. 그 때 우리 영혼속에 밀려오는 주님의 평안, 주님이 주시는 참 쉼이 여러분을 새롭게 하실 줄 믿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앞으로 나오신 성도 여러분, 진실한 믿음과 예배를 통해서 주님의 위로와 영혼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혼의 참 기쁨과 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수고하게 하고, 무거운 짐 지우는 세상에서 감사와 기쁨이 충만해서 더욱 힘차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마 11:28-30 / 조용기 목사
<서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흥망성쇠를 좌우할 중차대한 문제에 부딪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잘 때까지 가정에서 일터에서 함께 연구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대화를 하고 살면서 우리는 자질구레한 문제가 수없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합니다. 큰 문제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질구레한 문제가 일어나서 마음을 어지럽히고 이 문제가 스트레스가 되어서 심령이 상하고 편치 않으며 우울하고 답답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점점 모여서 우리 삶속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치열한 경쟁 속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일에 치이며 사는지 사람들이 말하기를 “월, 화, 수, 목, 금, 토, 일”이 아니라 우리는 “월, 화, 수, 목, 금, 금, 금”을 삽니다. 그 말은 휴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휴식할 줄 모르는 데서 생겨난다.’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서 참된 휴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사람이 없는 고요한 곳에 가서 드러누워 있다고 해서 휴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마음의 휴식은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휴식이 와요. 저는 50년이 넘도록 목회하면서 내 근심, 성도들의 근심, 이웃의 근심 다 합쳐서 마음의 휴식을 얻지 못하고 마음이 억압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아무리 마음을 가만 조용하게 하려고 손주들 안다가오는 다른 방으로 옮겨가고 집 안방 문고리를 걸어 잠그고 혼자 있어도 마음의 휴식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는 꿇어앉아 엎드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성령으로 오셔서 내 마음에 거하여 주시옵소서. 계속해서 간절히 기도하면 마음에 예수님께서 고요하게 임재하시면 순식간에 휴식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휴식인 것입니다. 환경이 휴식이 아닙니다. 예수님 없이는 진실한 휴식이 마음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항상 올바르게 될 때 참된 휴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론>
1.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어떻게 가질 수 있나요? 죄와 허물진 삶을 회개하고 정하게 하여야 휴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하면 하나님은 너무 크시고 광대하시고 의로우시고 영화로우신데 우리가 감히 어느 곳에 가서 설 수 있겠느냐 생각되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원하여서 찾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으면 못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찾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마귀와 친구가 되어서 배신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피했습니다. 하나님이 동산을 거닐 때 피해서 얼굴을 안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누가 아담과 하와를 찾았습니까? 하나님이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하나님 어디 계시나이까? 그렇게 찾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랬다면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도와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하나님을 피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찾았습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다 알고 계신 하나님이 스스로 고백해서 나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하나님을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시장터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여러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에 고요한 음성으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내게로 오라. 찾으시는 것입니다. 에이 하나님 날 찾는 소리 한 번도 못 들었는데요? 그것은 여러분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음성을 모르는 사이에 들었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앉아 계신 것입니다. 아무것도 못 들었으면 이 자리에 안와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를 올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찾고 계신 것을 알고 죄와 허물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요엘서 2장 13절에 보면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야훼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재앙을 내리는 하나님께서 막 재앙을 내리시기 직전이라도 여러분께서 마음을 찢고 옷을 찢지 말고 야훼께로 돌아오며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에 대해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신 하나님이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25절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여러분의 죄를 하나님은 당신 자신 때문에 도말하겠다. 왜, 죄의 더러운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어른거리면 하나님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설 때 깨끗한 옷을 입고 기도의 향수라도 뿌리고 나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 야훼께로 돌아오라고 하는데 왜냐,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여러분 죄를 용서하고 싶어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여러분 죄지은 사람이 있으면 죄를 용서하기를 원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품을 수 있으니까. 우리가 하나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기 전에 너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면 용서해 주겠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죄를 기억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한번 용서했으면 기억을 안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면 부부간에라도 서로 누가 죄를 지으면 그때는 잊어버린 것 같으나 나중에 싸움이 붙으면 언제 이 말 했지? 옛날 일을 꼭 들춰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마음에서 폭발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옛날 일을 자꾸 들춰서 기억나게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옛날 용서해준 죄는 기억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내가 옛날에 도적질 했습니다. 언제? 그때 내가 한 달 전에 내가 도적질하고 난 다음 잘못했다고 빌었잖아요. 그런 일 없는데? 아이구 하나님 치매 걸렸습니까? 치매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서 여러분이 옛날의 죄를 기억하지 말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억도 안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해서 회개한 죄는 지금 하나님이 한번 용서했으니 다시 기억도 하지 않습니다. 죄 회개할 때 또 옛날 퀘퀘 묵은 죄를 들춰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왜 잊어버리고 모르는 일을 왜 자꾸 이야기 하느냐. 귀찮다. 그런 말은 하지 말고 새로 지은 죄를 회개하라. 지금 내가 주님을 거역한 죄를 회개하고 나오면 주님이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고백하면 사하시고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쉽게 맺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언제나 상기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의지하고 나갈 때 말씀은 우리에게 피난처가 되고 요새가 되고 의지하는 반석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못 보잖아요. 하나님이 좀 만나 주십시오. 간청하면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나타나시지 오늘날 인간의 모습 같은 이런 모습 가지고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오실 때 말씀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면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하시기 때문에 말씀이 여러분 마음속에 기억나게 되는 것입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신지라 거짓말을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말씀하면 그대로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여러분 다 같이 읽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로고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말씀 로고스가 성령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말씀으로 주어질 때는 그것을 레마라고 말합니다. 로고스는 그냥 성경말씀을 읽으면 다 하나님 로고스.. 그러나 그 말씀의 몇 구절이 내 마음을 부여잡고 나오면 그 말씀이 레마가 됩니다. 레마가 되면 마음에 믿음이 확 들어옵니다. 로고스는 지식을 증거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증거하는 것이지만 레마는 가슴에 탁 와서 부딪혀서 마음이 말씀에 부딪히고 말씀이 마음에 일어나서 믿음으로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이 레마를 통해서 오늘날도 여러분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약속한 말씀이 그대로 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천지가 없어지기.. 엄청난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없어지기 위해서는 천지가 없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왜, 말씀으로 천지를 지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은 천지보다도 더 위대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우리의 삶이 평탄하고 형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늘 읽고 하나님 말씀을 외우고 묵상하고 그렇게 하면 말씀이 평강과 형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외울 수 있는 은총을 하나님께 받으면 참 좋습니다. 성경말씀을 쉽게 잘 외우는 사람도 있고 외우는 것이 힘든 사람도 있지만 외워서 성경책 안 들고도 입으로 줄줄 나오는 하나님 말씀은 얼마나 좋은지 여러분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꼭 하나님 말씀을 외우려고 노력을 많이 하십시오. 처음부터 아주 긴 말씀을 외우려고 하지 말고 짧은 말씀 외워서 말하면 좋은데 짧은 말씀도 나는 힘든데요. 힘 안든 것 하나 가르쳐 줄께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여러분, 마음에 염려, 근심, 불안, 초저, 절망이 있을 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걱정하지 말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렇게 하면 그 말씀이 마음속에 큰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여러분 상기하는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 사람과 마음 상한 일이 있으면 화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 이웃에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화해하고 하나님께 재물을 드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마음에 서로 미워하는 원한이 있으면 좀처럼 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 사람의 마음의 평안이라는 것은 같이 있는 이웃 사람과의 화해를 가지고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면서 살아야 되지 화해가 없이 미워하고 원한이 있으면 절대로 평안이 없습니다.
로마서 12장 17절로 19절에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종종 제가 이 말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님, 왜 원수를 좀 빨리 안 갚아 줍니까? 하나님 저에 대해서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너무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내 원수 좀 빨리 갚아주소. 기다리다가 사람 목메여 죽겠습니다. 우리가 다 그런 것을 느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재칵재칵 원수를 갚아주면 정의가 서고 하는데 경험에 의하면 하나님은 좀처럼 원수를 갚지 않습니다. 오래 참아 기다려 그때 하나님이 선악 간에 원수를 갚아주실지 몰라도 대개는 안 갚아 줍니다. 왜냐하면 원수는 내가 갚을테니 갚으리라. 언제 갚을까? 천당에 올라갈 때 그때 갚아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화목시키려고 왔지 원수 갚아주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하나님은 우리를 원수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화목시켜 주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 나에게 부담스럽게 원수 갚아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축복을 해 주십시오. 이웃이 잘되게 축복을 하면 그 축복이 내게로 돌아와서 내가 똑같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기를 원합니다. 그 사람에게도 축복이 갈뿐 아니라 그 말이 내 귀에 들은 대로 나에게도 축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화의 대다수를 축복을 하고 자랑할 수 있는 대화를 하고 긍정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 마음의 평안을 가져오는 중요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지키지 못한 십계명을 외워가면서 우리가 용서를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이 좋습니다. 일반적인 막연한 죄가 아니라 십계명은 꼬집어서 말하니까 꼬집어서 말하는 것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 마음속에 부담이 되므로 죄를 용서하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죄를 그렇게 많이 회개하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손을 많이 씻는 것은 균이 대게 손을 통해서 우리 입에 들어가기 때문에 손을 많이 씻어야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가 계명을 보고서 거울같이 계명에 비치는 잘못을 하루에도 수십 번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물로 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회개라는 물로 씻어서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 앞에 화평할 마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5장 32절로 33에 “그런즉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여기 보십시오. 하나님은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가 죽을 것이라고 말 안했습니다. 살리는 것을 원합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다음 또 말하기를 복이 네게 있을 것이며, 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하지 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복 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장수하기를 원하지 빨리빨리 죽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을 뭐라고 표시하겠습니까? 따라 말씀하세요. 이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들어오면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되 풍성히 주시고 복을 받게 하시고 장수하게 하시는 좋은 하나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도 주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여러분의 생애를 심히 좋게 만들어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분은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십시오. 하나님과 화평했으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좋은 일을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좋은 일을 기대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 다음에는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아 주는 것을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100편 3절로 5절에 “야훼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이것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이 지으신 분이고 하나님 소유물이고 하나님 백성이고 하나님 기르시는 양이니 이 얼마나 하나님이 여러분을 강하게 소유하고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야훼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하면 그 궁전에 들어간다.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 대궐 문에 들어가서 주님 대궐 문 앞에 나갈 수 있는 길이 바로 감사와 찬양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극한 상황에서도 감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냥 좋을 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감사할 처지가 못 되고 감사가 입에서 안 나올 그때에 감사를 하면 하나님이 크게 영화를 얻고 은총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바국 3장 17절로 18절입니다. 저는 옛날에 이 성경을 안 좋아했어요. 왜냐하면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렀는데 무슨 감사를 하느냐. 그래서 하박국이라고 안하고 호박국이라고 했습니다. 아이구 또 호박국을 읽어야 되느냐. 그런데 요사이는 이 구절이 얼마나 좋은지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아무것도 없어도 내가 감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계시므로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정말 진짜 아닌 것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없는 것이 있게 되는데 없는 것만 자꾸 들춰내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를 안 드리고 하나님 무시와 멸시를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따라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야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대단하십니다. 대단하십니다. 오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고백했으므로 이제부터 감사하는 것이 우리 생활의 주 목적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없을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있을 때 감사는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없는데 감사하는 것은 특별히 감사하려고 하는 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없을 때 우리가 감사하면 하나님이 성경에 말씀하기를 있는 자에게는 더 주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조차 빼앗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하면은 여러분 마음속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고 하나님 보좌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누가 삶의 주인인가?
둘째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는 길은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군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 스스로 사는 것 같지만 주인이 있습니다. 어떠한 사람은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입니다. 아무도 간섭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의 주인이고 자기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면 자유롭고 좋지 싶어도 실상은 그의 생활에 보면 자기 삶의 짐을 책임지고 자기에게 속한 모든 일을 돌봐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내 길의 주인인데... 내가 우리 집 주인이면 집에 전세로 살면 전세값을 내가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가 주인이고 내가 아버지 집에 붙어 살면 전세값을 아버지가 물지 내가 안 물잖아요. 오늘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면 내 인생을 살아가는데 모든 필요를 내가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살꼬? 다 내가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가 내 힘으로 이룩한다고 한 것 성공하는 것 있습니까? 성공하는 것 없습니다.
시편 127편 1절로 2절에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모든 것이 헛되고 말아요. 그러므로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사람보다 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없습니다. 내 모든 짐을 대신 져줄 자는 하나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삼으면 내가 속한 모든 짐과 일 등을 하나님이 책임지고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일절의 일을 내 주인에게 내 자신과 맡기고 주인을 믿고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맡겨놓고 난 다음에 그 다음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하나님 이 일 좀 할까요? 하지 말아라. 왜요? 할 것 없지 않느냐. 내가 다 해버렸는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문제도 내가 좀 걱정할까요? 하지마라. 안하면 어떻게 합니까? 네가 내게 맡길 때 내가 다 해버렸다. 너는 할 일이 없다. 할 일이 없는 생활이란 그 다음은 맡기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여러분 주님께 다 내어 맡기고 난 다음에 이 교회당에서 예배를 끝마치고 나가실 때 하나님께 뭐라고 말씀 드리겠습니까? 하나님 내 일을 다 맡겼으니 나 할 일 없지요? 맞았어. 내가 집에 가서 좀 일을 할까요? 아니야. 할 일 없다. 내가 다 했다. 그럼 뭐 할까요? 쉬어라.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 휴식을 가지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마음에 염려와 근심을 가지고 살라고 지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쉬어라. 마음을 평안히 가져라. 일은 내가 다 맡아서 한다. 이해하기 곤란하지만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도 주인노릇 많이 해서 일을 다 내가 책임을 졌기 때문에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수 믿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 일을 다 맡기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다 맡아서 일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겼으니까 여러분은 걱정,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에 그것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게 나오면 부담을 주고 고통을 더 주겠다는 말 아닙니다. 내가 너로 쉬게 하겠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쉬게 하는 것이 당신의 즐거움인 것입니다.
시편 68편 19절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 주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할 일은 뭡니까? 날마다 짐을 맡기는 기도를 해야 되겠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일터로 가면서 하나님 이 일터를 통해서 하나님이 도와주십시오. 다 맡깁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할 일이 없어요. 내가 일터에 가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감사하면 몸은 움직이지만 그것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노는 것입니다. 마음에 무거운 짐이 있어야 일하는 것이지 마음이 평안하면 몸으로 움직이는 것은 노는 것이지요. 몸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만 앉아 있으라는 것 아닙니다. 마음에 무거운 짐을 다 맡겨 버리는 것이지 몸은 또 하나님이 주시는 한도 내에서 재미가 있지 일이 전혀 없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나이 먹어서 은퇴하고 난 다음에 제일 재미없는 것이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내 친구들 보니까 할 일이 없는 친구들 참 불쌍하기 짝이 없어요. 여기가도 환영하는 사람 없고 저기가도 환영하는 사람 없고 돈 못 버니 부인에게 사랑도 못 받고 손주들 찾아오지 아니하고 참 괴롭습니다. 육신으로는 여러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있어야 좋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하나님 사업을 할 수 있도록 주님이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박수는 내가 쳐야 될 것인데 여러분이 박수를 쳐 주십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기면 얼마나 짐을 멋지게 지겠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책임 한계만 분명히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서 33장 2절로 3절에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서 말씀하기를 먼저 네 직분하고 내 직분을 분명히 하자. 일은 행하시는 야훼, 그 일을 지어 성취하는 야훼 나는 일의 주인이다. 여러분의 모든 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것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도 주님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요. 이방인은 자기가 자기 주인이니까 자기 의식주 생활에 주의할 것이요 믿는 자 나의 자녀들은 이런 모든 것이 있을 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맡겨라. 그리하면 이 모든 일은 내가 더하여 준다. 일은 하나님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일을 뺏기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개인적인 일도 다 아뢰면 맡아서 축복을 해주시고 그 일을 성취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너는 알아라. 너는 기도하는 것이 너의 책임이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라.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르짖는 기도, 기도는 네가 할 일이다. 일은 하나님이 할 일이다. 일을 행하는 야훼, 그 일을 지어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자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너희에게 일하라고는 안한다. 너희는 내게 부르지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나가 기다리면 하나님이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3. 4차원의 영성 안에 서라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늘 말했지만 우리 순복음이란 뭐냐 하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과 사차원의 영성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오중복음은 죄사함의 복음, 거룩함의 복음, 병 고치는 복음, 저주에서 해방되는 복음, 영원한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받는 복음 오중복음, 삼중축복은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는 것이고 사차원의 영성은 생각을 바라잡고 소망찬 꿈을 꾸고 믿음을 활용하고 입술의 고백을 분명히 하면 그대로 된다고 했지요? 우리가 마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살려면 사차원의 영성 안에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일반 생활에 생각을 내가 잘 다스리고 언제나 희망찬 꿈을 가지고 그리고 믿습니다를 말하며 살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말을 하고 살고 이런 분위기를 늘 가지고 있으면 그런 분위기가 좋은 것을 끌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생각을 갈보리 십자가 밑으로 가지고 와서 항상 매일같이 십자가를 쳐다보고 묵상하고 십자가의 구원이 여러분의 마음을 점령하도록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여러분 위해서 주님이 매달려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괴로움을 십자가에 가지고 나와서 주님을 쳐다보면 주님이 고통하지 마라. 내가 다 이루었다. 내가 다 이루었다. 내가 얼마나 몸 찢고 피 흘리며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서 매달렸으니 내가 다 이루었다.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주님? 내가 너 일생의 죄를 다 청산했다. 너의 모든 허물을 청산해서 거룩하게 만들었다. 네 병? 내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다 나음을 얻게 만들어 놓았다. 너의 저주? 내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모든 저주를 다 청산했다. 죽음? 네 안에 이미 천당을 준비해 놓았다. 그러므로 나를 의지하고 살아라. 이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바탕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의 바탕이 마음속에 이루어지면 여러분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이 피 흘려서 이루어 놓으신 일이 여러분에게 확 박혀야 되는 것입니다. 그 은총을 마음에 늘 생각하고 그 은총을 감사하면 여러분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 생각이 여러분에게 내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있어야 내일의 소망을 가지지요. 소망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는 것입니다. 나는 며칠 전에 예배에 참석했다가 경기도지사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데 그 지사님이 하는 말이 나는 조용기 목사 집회에 갔다가 희망을 얻었다고... 가장 우리 한국의 문제는 오늘날 희망을 잃어버린데 있다고.. 살기가 어려워지고 경제가 괴로워지니까 많은 사람이 사업이 안 되고 직장을 잃고 가정이 불화하고 희망을 잃었기 때문에 자살을 한다. 희망을 잃고 자살하는 사람을 살릴 수가 없다. 하루는 목사님 집회하는데 늦게 내가 참석을 했는데 설교 내내 희망에 대해서 말을 하는데 내가 길을 얻었습니다. 아무리 지사가 정책들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고해도 못주는데 조용기 목사 데리고 부흥회하면 희망이 있겠구나! 그래서 내가 할 일도 많은데 지사님 부탁받아서 끌려다니면서 희망에 대한 설교를 하라구요? 그런 말을 했습니다만 올바르게 깨달았습니다. 정말입니다. 희망을 가져야 됩니다. 자기가 하는 말이 목사님, 희망을 가지되 우리 경기도내에 젊은 처녀들 좀 시집가게 만들어 주십시오. 시집을 안 갑니다. 그것 왜 안갑니까 그러니까 집이 한 채 생기고 생활이 좀 편안해지면 시집을 도무지 안 갑니다. 편안하게 살지 뭐 시집가서 고생하느냐. 그것 나중에 알아보니까 지사님 딸이 시집을 안 간다는 것입니다. 옛날하고 많이 달라졌어요. 희망만 있으면 남의 도움을 안 받고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희망은 예수 믿는 사람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십자가가 주는 희망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냥 아멘하지 말고 진짜로 받아들이십시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여러분이 마음속에서 생명의 기원이 나와요. 여러분 오래 생각하던 그것이 생명의 근원이 되어서 밖으로 나와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예수님을 바라보고 희망을 얻으면 여러분 참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므로 매일같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희망으로 마음을 채우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이뤄진 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은 꿈을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을 많이 하면 생각은 꿈을 꾸게 하는데 꿈은 희망찬 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꿈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바라보십시오.
로마서 4장 17절로 18절에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없는데 하나님이 있다고 부르십니다. 그것이 바로 희망인 것입니다. 내가 건강이 없는데 너는 건강하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물질적인 축복이 없는데 너는 잘산다고 말합니다. 아직 좋은 일이 없는데 너는 좋은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면 없는 것이 있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본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아브라함은 자손이 없는데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네 자손이 저 별들처럼 많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고 아주 의로운 행동이라고 칭찬을 해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마음속에 바라보고 기도하십시오. 그냥 허공을 바라보고 기도하지 말고 내 마음속에 그림을 그리십시오. 약한 사람은 강하게 된 모습을 그리고 병든 사람은 건강하게 된 자기 모습을 그리고 이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사람 평안을 가질 것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바라봄의 법칙입니다. 먼저 바라보고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바라보고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바라보고 기도하자. 그러면 믿음이 생겨나고 믿음은 긍정적인 신앙자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써 고백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입술의 고백이 여러분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마음에 믿는 것을 입으로 말하면 그것은 큰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과 꿈이 같이 가게 되고 그 다음에 믿음과 말이 같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간단히 여러분 생활 속에 마음을 정돈하고 운명을 정돈하고 환경을 정돈하려고 하면 내 가르친 대로 하십시오. 한번 따라 하십시오. 생각하기, 꿈과 같이 한다. 생각하고 꿈꾸자. 그 다음에는 믿음은 말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믿고 말하자.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여러분 생활 속에 생각하고 꿈을 꿀 수 있는 것입니다. 바쁘게 일하면서도 생각하거든. 내가 이렇게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생각하고 그것이 이루어진 모습을 꿈꾸고 감사하면 희한하게 그것이 이루어져요. 그리고 또 믿고 할 수 있다. 된다. 그렇게 믿고 말하면 그것이 이루어져요. 생각은 반드시 꿈으로 손을 잡고 나가야 되고 믿음은 반드시 말로써 함께 손을 잡고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과 꿈, 믿음과 말, 이것은 지극히 형제간으로써 그것이 합쳐지면 큰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것 다 없어도 생각이 있어 아름다운 꿈을 꾸고 믿음이 있어 그것을 말하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땅이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시는데 주님이 있으라고 하니까 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여러분은 누구든지 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 나가서 창조적이고 축복된 생각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면 아름다운 꿈이 되는 것입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나아진 꿈을 그릴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과 꿈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은 안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믿음이 생기면 입술로 자꾸 말을 해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 그렇게 믿음으로 말하면 기적이 일어나요.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써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이것 다 입술로 말할 수 있는 짧은 성경구절입니다. 이것을 믿고서 말하면 그 능력이 여러분 생활 속에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큰 문제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종교는 가지고 있으나 생활에 실제로 안 이루어지기 때문에 힘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믿음대로 이루어져야 돼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예수 믿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한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한다. 그러면 살다가 보면 그 일이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살다가 내 주변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아~ 전에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이 이루어졌구나. 전에 내가 꿈을 꾸었더니 오늘 이것이 이루어졌구나. 전에 내가 믿었더니 이것이 이루어졌구나. 전에 늘 말하던 것이 이루어졌구나. 여러분이 시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체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결론>
티끌 모아 태산 눈물 모아 한강이란 말이 있듯이 작은 염려와 근심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 근심과 걱정이 광풍이 되어 불어오고 폭우가 되어서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휴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제가 말한 대로 여러분 시행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내어 맡기고 마음에 휴식을 갖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안이 있고 기쁨이 있고 소망 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다 영혼이 잘되며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원하시지 여러분이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패배하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어떠한 자리에 있든지 기도하고 주님께 맡기고 평안을 가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 하나님 말씀 농담이 아닙니다. 여러분께서 실천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기도하고 응답이 안 되어도 미쳤다고는 말 안합니다. 나보고는 미쳤다고 말할 사람 있을지 몰라도... 여러분 괜찮을테니까 내가 보증해 줄테니까 두려워말고 담대하게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내게로 오라
마 11:28-30 / 김영준 목사(기쁜소식교회)
어떤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하나만 바꾸면 김태희처럼 될 수 있다.’ 그래서 아내가 ‘그게 뭐냐. 말해 달라. 내가 바꾸겠다.’ 그랬더니 이름을 바꾸면 된대요. 그 얘기를 듣고 다른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도 하나만 바꾸면 김태희처럼 될 수 있다.’ ‘그게 뭔데?’ ‘얼굴!’ 병 주고 약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약을 주고 병을 주는 것입니까. 성경을 공부하는 데에도 병 주고 약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공부함으로 마음이 더 편해지는 게 아니고 불편해 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편해진 다음에야 편안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있지 않았습니까. 진실은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가 외면하는 진리를 직면하게 만드는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도 이와 같은 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납니다. 예수님이 그냥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신다고만 말씀하셨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예수님은 어려운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다마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 말씀대로 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누가 너희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주라’,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힌다’ 예수님이 요구하신 말씀은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시도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는 예수님의 요구사항을 다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목사들이 더 이 문제가 심합니다. 목사들은 두 가지 실수를 저지릅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예수님을 편안한 수준으로 낮춥니다. 아마 여러분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이 어려우면 따르기가 불편하니까 편안한 수준으로 예수님을 낮추고 그리고 두 번째 실수는 교인들에게 어필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쉽고 단순한 패키지로 축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면을 부각시키고 불편해할만한 것을 축소시키고 마케팅 전략 세우는 것처럼 잘 팔릴 물건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대중화될수록 그것이 심합니다. 대형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가르침으로 대형교회가 된 것이 아니고 한 부분 잘 팔리는 면만을 강조하고 안 팔릴 것은 창고에 쌓아두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창고에 재고가 넘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쉽게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수년전 유니온 신학교 서점에 갔을 때 예수님의 산상수훈에 대한 책을 한권 샀는데 수십 명의 내로라하는 신학자들이 저마다 산상수훈을 해석하고 그 의미를 정리한 글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불트만 · 볼트만 · 칼 바르트 · 슈바이처 수많은 내로라하는 신학자들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의미와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쓴 글을 모아놓았는데 저마다 견해가 달라요.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미래에 이루어질 천국의 윤리를 말하는 것이다 라고 해석하지를 않나, 어떤 이들은 산상수훈이 우리가 이것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예수님을 더 의지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지를 않나, 어떤 이들은 아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산상수훈을 실천해야 된다, 이렇게 고수하지 않나, 어떤 이들은 우리가 그대로 다 살수는 없더라도 목표로 삼아 근처라도 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지를 않나…. 저는 그 책을 읽고 당황했습니다. 어떻게 하라는 얘기냐. 그러면 내가 성도들에게 뭐라고 가르쳐야 되느냐.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켜야 된다고 가르치느냐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느냐, 지킬 수 없다고 가르치느냐 지킬 수 있다고 가르치느냐, 난감한 것입니다. 아마 여기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는 설교가들을 여러분은 많이 접하지 못하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병 주고 약주는 것이 된다 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싫은 사람은 성경을 공부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우리에게 해답을 주는 만큼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깊어지고 성경을 이해하는 깊이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질문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질문이 생기는 게 아니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질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 누가 그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누가 나를 너희 재산 나누는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그리고 제자들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가 적으니이까, 주께서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이때니이까, 어느 계명이 제일 크니이까, 하나님 나라에서 누가 제일 크니이까.’ 제자들도 예수님께 질문을 하면서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질문을 싫어하지 않으십니다. 경외하는 마음만 있다면 얼마든지 질문을 할 수 있고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 질문에 답을 주십니다.
새벽기도 시간에 제 기도를 엿듣는 분이 계시다면 제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식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저는 기도할 때 끊임없이 하나님께 질문을 합니다. 아마 그걸 듣는 분이 계시면 경악할지 모릅니다. 하나님에게 못마땅한 사연을 많이 아룁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물어볼 수 없는 질문, 사람에게 할 수 없는 하소연을 하나님에게 합니다. 못마땅한 내용 · 불만 · 의문 · 제 인생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신앙생활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남이 말해줄 수 없는 이런 것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하나님이 거기에 대한 답변을 얻게 하십니다. 제가 기도할 때 소리를 내서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제 음성을 통해서 기도를 인도하시고 때로는 말씀하신다고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묵상기도를 더 많이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마는 성경말씀에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한 것처럼 사람이 입을 열어서 소리를 내서 말할 때 성령이 기도하게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시간이 많이 도움이 됩니다. 또 하나님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제 영혼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다만 기도할 때 남이 듣지 못하도록 손으로 입을 막고 기도합니다. 그렇잖아요. 사람이 들으면 얼마나 당황스럽습니까. 이건 신앙생활의 단순한 지혜입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 똑같은 본문으로 설교했지요.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은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려고 하지 않느냐. 이런 주제를 가지고 설교했는데 그래서 지난주일 이후에 고민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이제부터 성도들에게 강해를 해야 되느냐. 그러다가 그게 병 주고 약주는 것이 될 수 있는데….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내게 배우라’라고 말씀하시기 이전에 먼저 ‘나에게 오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께서 사람들을 당신에게 초청하셨습니다. 이것이 타종교 지도자들과 구별되는 아주 중요한 면입니다. 다른 종교 지도자들도 내게 배워라, 내 말을 배워라, 이렇게 말했지만 예수님은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시기 이전에 먼저 내게 오라, 다 내게로 오라 – come to me 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으로의 초청이요, 예배로의 초청이요, 믿음으로의 부르심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내게 배우라고만 말씀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유교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무미건조한 윤리와 철학을 말하는 종교가 되었을 것인데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여기에 영성이 가능하고 영적인 예배와 인격적인 만남과 예수님과의 동행과 예수님을 알고 경험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들은 많지만 예수님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할 것은 많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에요. 부모가 자기 자식에 대하여 아는 게 아니고 자기 자식을 압니다. 그 자녀의 생각 · 느낌 · 소원 · 상처 · 인격 이것을 압니다. 알지 못한다면 부모가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하나님의 속성 · 사랑 · 의지 · 능력 이것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내게 오라고 초청하신 것은 주님과의 인격적인 사귐으로의 부르심이에요. 이것이 신앙생활의 영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를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두 가지가 겸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령만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만을 강조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샤머니즘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진리가 골격을 제공해서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지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진리만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영성이 있고 감동이 있고 거기에 기쁨이 있고 거기에 감정적인, 영적인, 인격적인 요소가 추가돼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예수님께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이 ‘말씀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으리라’라고 하신 게 아니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아직 다 알지 못하고 그것을 다 소화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럼에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고 예수님과의 사귐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를 오라고 초청하셨고 우리가 그 부르심에 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만 이런 말씀을 하신 게 아니고 요한복음에서도 표현은 다르지만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성경이 정말로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임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하여 다른 시대에 다른 곳에서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머리를 맞댄 것처럼 일치된 말씀을 증거하는 것을 보면 이건 성령의 영감이 아니면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똑같은 원리에요. ‘내게로 오라 내게 배우라’ 마찬가지로 요한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 ’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세상 일이 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일은 뻔합니다. 사람들 보면 거기가 거깁니다. 다 똑같은 문제를 놓고 고민합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그 고민이 그 고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만을 쳐다보면 갑갑합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인본주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위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사람을 쳐다보면 위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가도 사라집니다. 저는 인간을 사랑한다는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도 여전히 사랑스러워 보이느냐.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아는데 여전히 사랑할 수 있느냐. 물어보고 싶어요. 사람을 알면 사람이 그렇게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그것이 도피가 아닌 이유는 예수님께 나아감으로 그런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사실이에요. 예수님께 나아가는 것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상의 짐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고 세상에서 우리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세상에서 우리가 맡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인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갈 때 예수님의 말씀을 배울 수도 있고 지킬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임의로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심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이요 선택이요 예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선택하는 게 아니고 예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너는 내게로 오라’ 우리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우리를 믿음으로 부르십니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자기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을 다 이루실 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
마 11:28-30 / 조용기 목사
<서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날 교육을 받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생을 정의하여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즉, 인생은 절망적인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구주 예수님은 인간을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든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본론>
1. 인간은 왜 절망적인 존재인가?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라고 철학자들이 말을 합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심판을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치고 절망에 이르지 않는 병에 들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 아버지의 혈통을 통해서 태어났고 그 아버지는 바로 아담인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6절로 17절에 “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영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육체야 반드시 죽지요. 영원히 살 육체를 가진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영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어 있는데 예수 없이 세상 가운데 헤매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9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야말로 좌절감과 절망을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말인 것입니다. 여기는 희망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가 저주를 받아서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고 가는 곳마다 가시와 엉겅퀴가 앞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얼굴에 땀이 마를 날이 없고 고생을 하고 괴로운 가운데서 먹을 것을 먹고 그리고도 오래 사느냐 하면 흙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절망을 상속으로 받고 태어난 것입니다. 부모를 잘 만나서 많은 재산을 상속으로 받아서 사는 사람은 기쁘겠지요. 그러나 우리 인생들은 우리 첫 부모인 아담을 통하여 죄와 죽음의 상속을 받았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인 아담의 죄 때문에 상속을 죽음으로 받아들였거니와 우리 자신도 모두 다 죄를 지어서 우리 후손에게 죄의 상속을 넘겨주고 있습니다.
시편 51편 5절에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고 성경에 말했는데 죄의 값은 사망으로 모두 다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작정한 것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구주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의 모양으로 태어나게 하시고 사람의 죄를 다 대신 짊어지고 청산하도록 놀라운 계획을 주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2. 예수님의 고난과 대속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람들을 보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죄와 허물로 짓눌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인 것입니다. 죄가 없는 사람들이 없지요. 허물이 없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그 다음 심신에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병이 들어서 고난을 당하고 병에서 놓여날 날이 없는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주와 가난으로 말미암아 피땀 흘려도 먹고 살기가 힘들고 그 다음에는 죽음과 음부에 끌려 들어가서 영원히 영혼을 불꽃 가운데서 고생하게 만드는 이러한 인생을 예수님은 바라보고 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우리 목에다 감아 놓은 마귀와 대결해서 싸운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의 목에 매단 죽음에 이르는 짐을 예수님은 다 대신으로 받아서 청산해 버리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 10:10)
도둑이 우리에게 이익을 갖다 준 사람이 있겠습니까? 마귀는 도둑이기 때문에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주이기 때문에 양에게 생명을 주시되 풍성히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기 때문에 항상 마귀가 우리에게 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포도주를 십자가에서 받으시고 난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요 19:30)
(테텔레스타이)다 이루었다. 무엇을 다 이루셨습니까? 우리를 죽이려는 마귀의 모든 모사와 모든 궤계를 주님께서 다 청산해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놀라운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는 제자들에게 밭을 가는 농부의 예를 들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다 자기의 멍에 밑에 던지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농부가 밭을 갈 때 망아지들이 올바르게 밭을 가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어미 소 멍에 밑에 넣어 놓습니다. 멍에가 이렇게 있으면 어미 소가 그 멍에를 걸머지면 그 뒤에 줄로 수레가 묶여 있어서 ‘이랴.’ 하면 수레를 끌고 가기도 하고 수레를... 그러니 논을 갈든지 짐을 짊어지고 가든지 어미 소는 굉장히 괴롭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목이 다 벗겨지고 괴로움을 당하는데 새끼소는 그 멍에 밑에 넣어주고 새끼는 짐은 어미 수레에 묶어 놓습니다. 그래서 이랴~ 이랴~ 하면 어미 소는 온 몸에 힘을 잔뜩 넣어가지고서 애를 쓰면서 당기는데 새끼는 보니까 아무 짐도 없고 무겁지도 않고 편안하거든. 그래서 가면서 에이~ 엄마, 괜히 과장하지 마라. 보니까 짐 가벼운데 무슨 땀을 뻘뻘 흘리느냐. 야 이 새끼야~ 너 새끼니까 아직 모르지만 네가 자라서 나처럼 되면 이 멍에 봐라. 내 목에 있는 멍에! 멍에가 내 목에 걸리니까 무거워지지. 지금은 네 멍에 목에 안 건다. 내가 다 대신 짊어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우리가 짊어질 모든 짐을 다 짊어진 것입니다. 하나도 남지 않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모든 것을 다 청산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내 멍에는 쉽고 내가 걸머진 짐은 가볍다. 너희들에게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다. 오직 믿음으로 나오면 그 믿음으로 주님께서 짐을 대신 짊어져 주십니다. 대신 짊어져 주는 것 얼마나 가난과 고통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주님이 대신 짊어져 주시는 것을 체험하고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3.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
성경에는 십자가에서 주님이 값없이 선물로 은혜를 주실 때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를 십자가를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다. 새사람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얼마나 위대한 선물입니까? 여러분과 내가 옛사람, 허물에 묶인 사람, 병에 끌려가는 사람, 저주와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 죽음과 절망에 이른 사람, 이것 옛사람인 것입니다. 이 옛사람에서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해방을 주셔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시고 다시는 죄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을 이 은혜가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인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의롭다 하심을 선물로 받았다. 이 의롭다는 것은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의의 옷을 입으면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음력설을 쇘으니까 어른을 공경하고 세배를 갈 때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지 않습니까? 노동자 냄새가 나는 그러한 의복을 입고 세배를 가지 못합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의 의로운 행동이란 썩은 냄새가 나서 그것을 입고는 못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씻어서 죄가 한 번도 지음이 없는 그 행동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구주로 모시면 아멘 하십시다.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에게 의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 의라는 것은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평생에 죄를 짓지 않은 의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용서와 의의 은혜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의롭다 함을 얻을 뿐 아니라 우리 삶이 거룩하게 되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거룩하게 되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듭니다. 여러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담배를 떼는데 죽을 고생을 합디다. 우리 어릴 때 보니까 일하는 머슴들, 또 서민 백성들 먹고사는데 유일한 취미가 담배 피우는 것이 그 취미입니다. 그런데 그때 보리밥 한 그릇도 못 먹고 한 3분의 2쯤 채워 놓은 것을 먹고 난 다음 하루 종일 중한 노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릴 때 5살, 6살 때 뭣도 모르고 노동하는 사람들 곁에서 보았는데 담배가 떨어지면 꼭 미친 사람같이 되어요. 손발을 벌벌 떨고, 그리고 난 다음에 담배 있느냐고 이웃 밭을 향해서 고함을 치면 있다고 하면 십리도 멀지 않다고 그 담배 요것만 한 것 하나 피려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것만 한 담배를 피우고 난 다음에 얼마나 만족해하는지 저는 일찌감치 담배 안 피우는 부모 밑에서 배웠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몰래 담배 피웠을지 몰라요. 나는 그런데 그 시아버님이 자기 맏며느리 데리고 왔는데 며느리에게 잘해주는 것 지금도 눈에 환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산 밑으로 내려가서 물을 퍼 올려 오는데 옛날에는 며느리가 그 물을 다 떠서 머리에 이고서 올라오거든요. 물이 자꾸 흐르니까. 그런데 그 시아버지가 논농사, 밭농사를 힘들게 하고 난 다음에 며느리 물 길어 올 때면 당연히 집으로 와서 그 물을 길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 길어 주고 난 다음에 저녁에 반드시 부부간에 말다툼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시어머니가 며느리는 얼마나 좋기에 물 길어 주는데 나는 왜 안 해 주노? 그래서 그때는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그 시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난 다음에 제단을 만들어 놓고 며느리가 매일같이 담뱃대에 불을 붙여서 시아버지 영정 앞에 놓았는데 하루는 온 집안이 떠나갈 듯이 통곡을 하고 울고 굉장합니다. 동리 사람들이 다 와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참 효성스러운 며느리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담뱃대에 담뱃불을 붙여서 시아버지 영전에 갖다 놓았다가 어디 갔다 오니까 담뱃대가 떨어졌어요. 아버님이 오셔서 한 대 피우고 가셨다. 내가 아버님 오신 것을 기다려서 만나지 못했으니 큰 불효를 했다고. 그렇게 슬피 울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죽으면 담배 피우러 오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 것이 다 허물인 것입니다. 아버지를 우상화하고 죽은 영이 들어올 것이라고 해서 담뱃불을 피우고 그렇게 하는 것은 우상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 것입니다. 이런 것도 주님께서 다 씻어서 거룩하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앞에서 더러워진 것을 다 씻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므로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치료와 건강의 은혜를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한번 같이 읽으십시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가 병들어 있을 때 하나님께 병 고침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병 고침을 주시는데 어떻게 주시느냐. 대개 입술로 고백할 때 고백을 통해서 병 고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받고 내가 나았다고 믿었으면 시시각각으로 그것을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는 나음을 입었다. 자기 이름을 자기가 부르면서 "용기야, 너 나음을 입었다. 걱정하지 말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 그러면 그 말 자체가 치료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잖습니까?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았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말씀 속에 들어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자꾸 증거하고 증거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강력하게 되어서 병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도 또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우리에게 주시고 형통하게 해주신다. 형통이란 것 굉장히 좋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일이 잘 풀려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를 믿고 의지하고 섬기면 주님이 우리의 삶을 형통하게 하겠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기 떄문에 우리가 큰소리하고 살 수 있는 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이 아시아의 어느 나라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충성스럽게 믿고 잘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희생을 자원하고 나온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형통하게 해주실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형통하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통하심이 여러분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속에 나는 못산다. 안 된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는 형통한 사람이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셔서 저주를 다 청산하셨으므로 나는 형통한 사람이다. 그렇게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3~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주고 복주며 장성케 하며 장성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그 아브라함의 복을 예수를 통해서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므로 어느 곳에 가든지 형통하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다는 것이 형통으로 나타나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여러분이 되십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고 그러한 삶을 통해서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에 축복을 나눠주기를 원합니다. 어제 내가 텔레비를 보다가 교회 채널에 어떤 목사님이 나와서 나에게 한 펀치 먹이는 것을 들었습니다. 뭐냐면 요사이 목사들이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고 성도들을 꾀어서 성도들을 게으르게 만들고 잘못된 믿음으로 들어가게 하는데 그 사람이 영향력이 너무 심해서 젊은 목사들이 다 따라가고 있는데 이를 중지시켜야 한다고... 그래서 제가 앉아서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중지 못 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하나님이 말씀하기를 예수께서 저주를 다 짊어져서 아브라함의 축복을 대신 주셨다고 하셨으니 우리는 예수 믿고 다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은 자라 하나님이 주신 것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예수 믿는 우리 대한민국 백성들은 점점 더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더 많이 전도하고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낼 수가 있습니다. 박수를 치니 좋은데 나도 한번 치겠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과 영생천국의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육체는 땅에 파묻어 버리지만, 영혼은 천국 아니면 음부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당히 예비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고 부자와 나사로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부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 쾌락을 누리다가 음부로 내려간 것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입니다. 음부에 들어가서 영원히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죽어도 산다. 육체는 죽어도 영혼은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고 또 죽는 것은 육체가 죽고 영혼도 죽으면 정말로 불쌍한 처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와 허물을 사함 받는 복을 얻었고 병과 고통에서 치료받는 축복을 얻었고 그 다음 축복과 은혜를 받아서 꾸어줄지라도 꾸지 않는 은혜를 받았고 영생복락을 얻은 것입니다. 오중복음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한 가지 복만 준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죽으셔서 고난당하시므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셔서 천국만 데려가는 그런 간단한 고난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여러분 우리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동안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이 함께 다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인구원을 받자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은 말할 필요 없거니와 범사에도 잘되고 강건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시편 103편 3절로 5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한두 가지가 죄가 아닙니다. 모든 죄악을 다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독수리같이 새롭게 해주시니 예수 믿고 얼마나 생기를 얻어 좋은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꼭 알아야 될 것은 예수님 십자가를 통해서 죄와 허물에서 놓여남을 받았다. 죄와 허물에서 청산을 받았다. 병 고침 받았다. 저주에서 해방되었다.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았다. 영원한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 그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 용서함 받았으면 되었지 다른 것은 무슨 소리 하느냐. 그런 소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우리가 남김없이 우리가 받아 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 누리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교회 와서 말씀을 듣기도 하고 성경을 읽기도 해서 마음속에 굉장한 은혜를 받을 소원을 가지고 있으나 방법을 모릅니다.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고 병 고침을 받고 건강하게 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넘치게 복을 얻게 되고 죽게 되고 부활영생을 얻는 그 긍정적인 은총을 어떻게 받는지 알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고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리게 하는 것이 4차원의 영성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육신으로 사는 이 삶은 전부 3차원의 세계인 것입니다. 직선이나 평면이나 서로 연결해서 이렇게 세워서 4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3차원인 것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은 3차원을 뛰어넘어서 그 다음에 뭐가 있느냐. 바람과 같이 성령이 있으되 눈에 안 보입니다. 4차원은 보혜사 성령께서 4차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역사를 해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는 것인데 어떻게 역사하느냐. 보혜사 성령은 영이시고 우리 3차원으로 사는 물질적은 것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입니다. 물질과 영이 어떻게 합쳐지느냐. 그것은 성령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을 가질 때 생각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령은 여러분의 생각을 통해서 여러분 가운데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꿈을 통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재 갖고 있지 않아도 마음속에 꿈을 그리고 그 꿈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를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에 대해 대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자기는 조금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 한번 봅시다. 조그마한 것... 어디에 있습니까? 몰라요. 어디에 있는지.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합니다. 아니 믿음이 조그맣게 있고 믿음이 크고 그것을 모르고 어떻게 믿습니까? 그리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말은 하면서도 속에 ‘안 믿는다. 안 믿는다.’ 그러고 있으니 죽을 지경이지요. 아주 여러분 절대적인 믿음으로 믿을 수 있는 비밀이 있는데 좀 뜸을 떠서 드릴까요 그대로 오늘 드릴까요? 믿는다는 것은 여러분 속에 믿음이 홀로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것은 누구를 믿느냐. 누구가 앞에 딱 와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아버님을 믿는다. 어머님을 믿는다. 선생님을 믿는다. 나는 목사님을 믿는다. 우리 남편을 믿는다. 우리 아내를 믿는다. 누구를 믿는 것이지 그냥 믿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이 믿습니다. 믿습니다. 너 뭘 믿노? 몰라요. 그렇게 되면 안 되거든요. 아브라함도 하늘의 별들을 헤아려보고 네 자손이 저 별들처럼 많을 것이라.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고 의롭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것은 하나님이 그 일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먼저 알아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셔서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다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그 일을 해주실 것이냐 그것을 따져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일을 할 수도 있고 나를 사랑하셔서 그 일을 해주기를 원하시면 그러면 여러분 이 두 가지를 알았은즉 이제 믿든지 안 믿든지 여러분에게 달려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 하나님이 능치 못하심이 없이 능력이 있고 그 하나님이 날 위해서 은혜를 베풀기 원하시니 믿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그러면 주여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주여 감사합니다. 끝까지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지요. 그런데 구원하기를 원하시는지 안 원하시는지 알아야 될 것인데 십자가에 매달려 못 박아 죽기까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당하신 것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힘도 있고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그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자나 깨나 믿을 수 있어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는 것. 그냥 믿으면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병을 하나님이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우리가 깨달아 알면 그 다음 하나님이 내 병을 고치기를 원하는지 안 원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 기도하고 묵상하고 보면 하나님이 병자들을 다 고친 것을 보고 내 병을 고치기를 기뻐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 다음엔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치료할 권세도 있고 치료하기를 원하시고 그것을 알면 감사하고 믿는 것입니다. 아주 믿음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돼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니까 너무 복잡해서 꼭 수학공식 푸는 것 같아서 어떻게 믿느냐 탄식을 하는데 여러분 쉽게 믿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상대방이 있어야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 아무것도 없이 허공을 바라보고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뭘 믿느냐. 몰라요. 그래도 믿습니다. 그것은 미친놈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은 실상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부자가 될 것을 믿으면 그냥 믿어서 부자가 됩니까. 부자가 될 수 있는 사업을 하든지 상속을 주는 분이 있는 것을 알고 그분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도와주기를 원하신다면 따라다니면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오냐 믿어라. 믿어라. 믿음이 실제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은혜를 우리가 얻기 위해서는 4차원의 영성을 사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입으로 시인하면 그것이 창조적인 역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보십시다.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을 지키는 것, 생각을 지켜서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 그렇게 하면 응답을 받을 수 있어요. 하나님은 마음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절대적으로 은혜와 축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것을 우리 기도생활에 실천으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되고 그 다음에는 내가 확실히 매일같이 바라봄의 법칙으로 꿈을 가져야 되고 그 다음 믿음, 반드시 나를 사랑하므로 내 축복을 주신다는 믿는 믿음, 제일 쉽습니다. 그 믿음을 마음속에 가지는 것 세상에 하나님처럼 능력 많으신 분이 어디에 계십니까? 그 하나님보다 나를 사랑해주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데 누가 못 믿으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따라 붙으면 믿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지요? 늘 믿으십시오. 하나님 오래 농사가 잘될 줄 믿습니다. 장사가 잘될 줄 믿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할 줄 믿습니다. 착한 사람이 될 줄 믿습니다. 전부 믿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실 수가 있고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믿으면 주님께서는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게 정말 아버지와 아들과 세상에 살면서 이런 재미있는 삶을 살 수가 있을는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를 의지하는 사람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바라보고 그 다음 믿음을 통해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우리 생애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1장 6절 우리 다 같이 읽으십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게 바로 비결인 것입니다. 반드시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시고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 그러면 믿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난 다음에는 창조적인 선포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루어진다고 믿었으면 잠언 18장 21절의 말씀처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하나님께서 고치실 것을 알았으면 우리는 혀로써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혈루병으로 고생하는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난 다음에 그가 혈루병에서 나음을 입을 수 있다고 마음에 믿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열두 해를 혈루병 앓은 여인이 자기가 나을 줄 알고 이제는 마음에 믿음을 가졌을 때 그는 끊임없이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이 뭐냐.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 나는 그의 옷자락에 손만 대면 낫는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할 것 없이 나는 그의 옷자락에 손만 대면 낫는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집 앞을 지나갈 때 뛰어 나가서 옷자락에 손을 대니까 나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결론>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이와 같은 상태가 국가, 사회, 가정, 개인의 심령에 있을 때 새롭게 되는 희망을 주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여러분 우리 스스로가 위대한 기적을 창조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내 영혼에 말 걸기를 게을리하지 말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에게 말걸기」(Self Talk, Soul Talk)라는 책을 쓴 제니퍼 로스차일드는 망막염으로 15살 이후로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성경 연구 교재를 만들어 성경을 가르치는 강사이며 CCM가수이자 온라인잡지의 창설자로서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데, 그 비결은 바로 “자신과의 대화”덕분이라고 말합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불행 앞에서, 그 동안 자신의 “생각”이라는 “벽장”속에 있던 부정적인 말들을 다 정리하고 긍정적인 말로 가득 채움으로써 다시 희망을 찾게 된 것입니다. 자기 마음의 벽장 속에 부정적인 말은 다 드러내고 긍정적인 생각을 집어 넣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과 대화를 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내 주제에 무슨 좋은 일이 생기겠노!” “모두 다 날 싫어해!” “난 너무 멍청해!” 그렇게 자신을 비난하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내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심코 내뱉은 말이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 말을 합니까? 안 합니까? 한번 따라 해 보세요. 원하지 않으면 안 따라 해도 좋습니다. 내 주제에 무슨! 아이고 따라 하면 안 되는데. 여러분 주제에 좋은 것이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는데. 왜 따라 합니까? 모두 날 싫어해! 옳지! 잘합니다. 나는 너무 멍청해! 안 멍청하지요? 성공했습니다.
“누에”가 입에서 실을 뽑아 자기를 둘러싸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입술의 말로써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만들어갑니다. 긍정적인 말은 긍정적인 환경을 만들고,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환경을 만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향해서나 남을 향해서도 늘 축복의 말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저번에는 여러분에게 말씀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말을 하고 이웃과 교제하기 위해서 말을 하고 그 다음에는 내 운명과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내 자신에게 늘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자기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무의식중에 말을 하는 것이 많지만, 굉장히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토요일이 되면 무의식적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용기야, 내일 성령님이 충만하게 되겠지? 그렇지? 기도 좀 더 해야 되겠다. 기도가 좀 모자란 것 같다. 너 말씀을 좀 더 읽어야 돼. 너무 잠 만자면 안 돼. 아침에 더 일찍 일어나. 너무 밥 많이 먹으면 안 돼. 적당히 먹어." 온갖 말을 자기보고 말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부정적인 말을 할 때가 굉장히 많아요. 요사이는 그 부정적인 말을 다 씻어내고 내 마음의 창고에 긍정적인 말만 충만하게 합니다. 여러분도 긍정적인 말을 충만하게 채워 놓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죄 사함도 주셨고 거룩함도 주셨고 성령도 주셨고 치료도 주셨고 축복도 주셨고 천당도 주셨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함도 주셨고 기쁨도 주셨고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도 주셨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도 주셨고 뭐 굉장히 많이 주셔서 여기 내 마음의 창고에 가득 채워 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자꾸 말씀하시라고요. 그러면 그것이 여러분의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여러분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하게 생각하고 말을 귀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주신 이 은혜를 여러분 계속해서 마음속에 말씀해서 붙잡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이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도록 4차원의 영성을 따라 삽니다.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고 꿈을 꾸고 믿음은 내가 힘차게 믿고 내가 많이 믿을 수도 있고 적게 믿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많이 믿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더 크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크게 받아들이면 더 많이 믿을 수 있잖아요. 적게 믿든 많이 믿든 늘 믿음을 가지고서 살며 믿음이 있으면 믿음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살았다. 나는 복을 받았다. 좋은 일이 일어난다. 건강해진다. 생명이 넘쳐난다. 말로써 여러분 환경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굉장히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여러분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성찬을 받아들이는 날인데 이것이 전부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는 은총인 것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주님이 깨어진 몸을 상징적으로 떡으로 흘리신 피를 포도주로 상징적으로 주면서 이 살을 먹으면 나를 먹는 것이고 이 잔을 마시면 나의 피를 마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으니 여러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을 다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은즉 그러므로 다시 믿음에 굳게 서서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오늘 여러분에게 큰 영광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성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난 다음에 믿으면 돼요. 하나님이 이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축복을 하는 것을 전에는 못 믿고 벌벌 떨었는데 이제는 믿어야 돼요. 못 믿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은 내 아버지고 하나님이 내게 복주시기를 원하시니까 믿으면 다 소유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고개 숙여 한번 기도드리겠습니다.
주님의 초청
마 11:28-30 / 이정익 목사
성경은 참으로 방대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하나하나가 모두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마음에 더 와 닿고 가까이 대하게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이 본문은 신약의 대표적인 성구로 주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을 초청하시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사람들은 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어린이부터 장년까지 예외가 없습니다. 오늘 청소년들에게는 입시가 가장 무거운 짐입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마음껏 뛰어 놀지도 못하고 공부에 매달린 모습을 보면 안쓰럽습니다. 초등학교 중급반만 되어도 학교가 끝나면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바쁘게 돌아다닙니다. 벌써부터 입시라는 무거운 짐을 질 준비를 합니다. 안쓰러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무거운 짐이 대학에 갔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대학생들은 졸업 후의 직장문제로 고민합니다. 그리고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가장 무거운 짐입니다. 또한 중년층은 현실의 두려움의 멍에를 메고 살아갑니다. 너무 일찍 일터를 떠나게 되면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이 생깁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용기가 없습니다. 본의 아니게 무능한 남편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자녀들 앞에서 아내 앞에서 무한히 작아집니다. 노년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노년의 가장 무거운 짐은 각종 질병입니다. 노년이 되면 각종 무서운 질병들이 그들을 노립니다. 오늘은 암이라는 병이 무섭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건강하게 살아왔지만 언제 암이 우리에게 찾아올지 모릅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병은 치매입니다. 이 치매는 몸은 건강한데 기억장치가 고장 나는 병입니다. 병원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갔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누구십니까?” 하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찔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치매는 근래 것은 모르지만 옛날 일을 잘 기억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근래 매일같이 싸우던 부부가 어느 날부터인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다닙니다. 그것은 남편이 치매에 걸린 것입니다. 아내가 옛날 애인인줄 알고 말입니다. 상황은 웃기지만 이것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무거운 짐은 항상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우리들은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짐들보다 더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정적 사고” 입니다. 이 부정적 사고를 가지고 일평생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 부정적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삶이 늘 어둡습니다. 현실이 더 고되고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다 거스르게 보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런 분은 본인도 큰 짐을 지고 있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큰 부담을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안에 들어와 받은 복은 소망스럽게 세상을 살아가는 복입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 살면서 긍정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 복은 생각이 긍정적으로 변하고 소망적으로 전향적으로 미래적으로 변하게 되는 복입니다. 그래서 현실의 상황과 상관없이 천국의 소망과 부활의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인 내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내 생각과 의식이 긍정적으로 바뀌어서 그 가운데 천국의 소망과 부활의 믿음을 갖게 되니 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이 긍정의 생각은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들어가게 되면 이와 같은 긍정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다 긍정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안에 들어와 살면서도 여전히 부정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공동체를 불화하게 만듭니다. 회의를 하면 여러 사람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믿음의 생각은 간데없고 자꾸만 안 된다고 실패율만 생각하며 염려만 합니다. 이렇게 예수 안에 들어와 산다고 다 긍정적 믿음과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참 무거운 짐입니다. 정작 본인도 그것을 알고 이 짐을 벗으려고 하지만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무거운 멍에인 것입니다. 우산장수와 소금장수를 아들로 둔 어머니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날마다 걱정입니다. 비가 오면 소금장수 아들 걱정이고 날이 맑으면 우산장수 아들 걱정입니다. 이것이 오늘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 유형입니다. 예수 안에 살면서도 이렇게 매일 걱정의 끈을 놓지 못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매일 감사 할 수 있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장수 아들이 우산을 많이 팔 것을 생각하고 날이 맑으면 소금장수 아들이 소금을 많이 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가 오는 날도 날이 맑은 날도 모두 행복한 날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조금만 바꾸면 일 년 내내 행복할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을 바꾼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왜 어렵습니까? 그것은 변화를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것은 말처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전히 이 무거운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다 내게로 오라, 내 멍에를 메라, 내 멍에는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내가 예수 안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내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으로 바뀌게 되어 예수님처럼 긍정의 생각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둡게만 보이던 세상과 현실과 미래가 환하고 밝게 보이게 되고 무거운 멍에들이 순간적으로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예수 안에 깊이 들어가는 삶이 복되고 은혜를 받는 삶입니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만나면 그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만나고 예수 안에 깊이 들어간다고 어려운 오늘의 현실이 순식간에 다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현실과 상황은 그냥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르게 내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무겁게 생각되던 환경과 상황이 소망적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무겁던 멍에들이 어느 날 갑자기 가볍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주시는 가벼운 멍에로 갈아 메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게로 오라, 내가 주는 멍에는 가볍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내 인생에서 예수를 만난 것이 가장 큰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수를 만나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내가 예수님의 생각을 품고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생각이 바로 긍정의 생각, 긍정의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내 삶이 언제나 밝고 희망적이고 긍정적이 되었고 미래를 늘 소망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내 운명까지도 주관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철두철미한 보험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렇기에 밤에 잠이 달고 미래는 밝고 내일은 소망스럽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예수를 알고 난 후에 주어진 복이고 은혜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옛사람의 부정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몸은 신앙생활 속에 있으면서도 정신은 여전히 구태 속에 살아갑니다. 이 사람들이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멍에를 거부하고 부정적인 멍에를 메고 허덕거리는 것입니다. 바울 시대 유대교에서 개종한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이미 구속받은 주의 자녀가 되었지만 내심 율법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할례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습니다. 그 가운데 할례주의자들은 그들을 자꾸 이간질하여 옛날을 회상시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나 마음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삶이 무거운 멍에를 진 삶입니다. 바울이 이 모습에 참 속상해했습니다. 그래서 할례주의자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내가 예수 안에 들어가게 되면 거듭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내안에 새로운 자화상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긍정의 생각을 품는 신앙입니다. “나의 삶은 주님이 주관하신다”는 이 믿음이 내 삶의 중심에 흐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매사가 감사하고 기쁨이 있고 즐거움과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몇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 방식대로 생각
예수를 믿으면 어느 날 갑자기 생활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도 현재 내가 처한 환경과 처지는 그대로 있습니다. 달라지는 것이 있다면 내가 예수를 알면서 생각의 기준이 바뀌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환경에 따라 근심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경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직업이 변변치 못하고 보잘 것 없는 어리석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늘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늘 실패합니다. 의심합니다. 후퇴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그 성령이 채워지자 그들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패배의식이 사라지고 용기와 담대함이 채워졌습니다. 그래서 용기 있게 나아가 복음을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환경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 사고가 하나님의 방법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즉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내가 하나님 자녀라는 자화상 갖게 되고 그 자화상이 그때부터 내 인생과 미래를 디자인하여 나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긍정의 믿음
똑같은 환경이라도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려운 현실을 긍정적으로 환경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나는 건강하다, 잘 할 수 있다, 나는 행복하다” 이런 그 긍정의 생각과 믿음에 따라 나의 처한 환경이 긍정의 환경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정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10명의 사건이 이런 경우입니다.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보았지만 그들의 시야, 생각, 기준은 서로 달랐습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른 생각과 기준은 서로 다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은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나머지 10명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내 안에 부정적인 사고에 기준을 삼으면 나타나는 현실이나 미래가 다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 무거운 멍에를 벗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긍정적인 믿음의 눈으로 기준을 삼으면 지극히 소망적인 환경이 내 앞에 펼쳐지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지고 있는 현실의 멍에들이 가볍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가나안과 같은 천국은 이 눈이 뜨이지 않으면 절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보고 믿지도 못한 사람이 어떻게 갈수가 있겠습니까?
신발 만드는 회사에서 두 직원을 시장 개척을 위해 아프리카로 파견을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아프리카를 살피고 돌아와서 보고서 냈는데 그 보고의 내용이 정반대였습니다. 한 사람은 “신발수출 불가능, 가능성 0%, 아프리카 사람들 전원 맨발임”이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사람은 “아프리카는 황금시장임, 가능성 100%, 아프리카 사람 전원 맨발임”이라고 보고했습니다. 둘 다 맞습니다. 누구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생각과 관점이 다른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고의 차이는 당장은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10년이 지난 다음에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리들이 예수를 깊이 알게 되면 이 믿음의 눈이 뜨이고 암담한 현실 속에서 가능성을 보게 되고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 확신이 믿음의 자산입니다. 이렇게 확신을 하는 사람은 기쁨과 행복이 넘치고 현실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무거웠던 멍에들이 가볍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함이 늘 자신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막연함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니 그 멍에가 얼마나 무겁게 느껴지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주는 멍에를 메라, 내가 주는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시며 강권하여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부정적 생각을 대적
자꾸만 긍정적인 생각과 믿음을 가지라는 이유는 그 결과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긍정의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내가 오늘부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해도 그것이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내안에 부정의 쓴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쓴 뿌리들이 오늘 현실을 더 어둡고 실망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적이 되고 결국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악합니다. 그래서 배우지 않아도 거짓말을 하고 욕망과 시기와 질투가 솟아나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천진하고 깨끗합니까. 천사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동생이 생기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질투심에 사로잡힙니다. 몸살을 앓습니다. 엄마는 네 동생이니 예뻐하라고 말하지만 아이도 그렇게 하려해도 잘 안 됩니다. 그래서 동생을 할퀴고 때리고 심하게 투정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다 안 되면 아이가 몸살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자신도 하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이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쓴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에 더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때 내 안에 긍정의 믿음이 싹이 트고 그때 내 안에서 긍정의 믿음이 뿜어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꾸준히 내 안에 정착시켜 내 안을 채워야 합니다. 그 때 내 안에서 순종과 믿음의 자질이 채워져 가는 것입니다.
이런 긍정의 믿음과 생각은 내 신체에도 지대하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것을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라고 합니다. 에밀 쿠에라라는 약사에게 밤 늦게 손님이 찾아와서 병원에 갈 수 없으니 약을 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거절을 했으니 그 손님은 계속 졸라대는 바람에 인체에 아무 영향도 없는 포도당류의 알약을 주어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사람이 찾아와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 약을 먹고 금방 나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병에 대한 아무런 영향이 없는 약임에도 불구하고 약사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약이 되어 효과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그런데 이것과는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생각이 불길할 때가 있습니다. 기분이 영 좋지 않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진짜로 안 좋은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내 이럴 줄 알았어하고 말합니다. 즉 안 좋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옛 선조들은 꿈을 반대로 해석하곤 했습니다. 나쁜 꿈을 꾸면 좋은 일이 있으려나하고 말입니다. 이것을 플라시보 효과에 반대되는 개념인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를 도우신다, 나는 승리한다” 하고 믿는 믿음이 전제되면 그 길이 힘이 있고 좋은 결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예수를 만났다고 해서 그 다음날부터 내 환경과 처지가 바뀌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병든 몸이 갑자기 나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지는 것입니까? 내 생각과 마음과 판단 기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안에 예수님을 향한 자화상이 마련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하나님 방법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여 그곳에 마침내 소망스런 결과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현실의 내 삶에 긍정적 효과가 미쳐서 새 길과 새 방법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참 쉼을 얻으려면
마 11:25-30 / 김필곤 목사(열린교회)
어제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던 박집사님이 천국에 가셨습니다. 참 재능도 많고 신실했던 집사님이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으로 바쁜 중에서도 수요일 예배에 나와 반주를 하고, 주일이면 찬양인도를 하시고, 오후 예배 때도 반주를 하며 하나님께 늘 함께 예배들 드렸던 집사님이셨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매년 음악회를 열며 제자들을 끔찍이 사랑했던 집사님이셨습니다. 홀로 되신 어머님께 잘 해 드리려고 함께 극장에도 가시고, 병이 들었을 때도 아픔 모습을 어머님에게 보여드리지 않으려고 끝까지 무척이나 애를 쓰셨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며 자식들을 잘 양육하려고 애를 썼던 집사님이셨습니다. “성령의 열매” 연속 설교를 몇 편 들으시고 아이들 양육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면서 계속 연속설교를 하시느냐고 물어보시며 좋아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이 땅에서는 뵐 수 없는 집사님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되시는 권사님이 늘 눈물로 기도를 했습니다. 저도 생명을 연장시켜 달라고, 다시 삶의 기회를 달라고 금식기도도 하고, 매일 매일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합심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어제 천국으로 데려갔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아프고, 이유를 잘 모르나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압니다. 집사님의 영혼은 지금 인생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죽음도, 질병도, 죄고, 고통도, 슬픔도 없는 영원한 천국에서 안식할 줄 믿습니다. 어떤 인생을 살든 천로역경에 나오는 기독도처럼 누구나 크고 작은 짐을 짊어지고 삽니다. 그 짐은 살면 살수록 점점 더 무거워 짐을 느낍니다. 부모로서 책임이 신혼 초에는 그렇게 무거운 줄 몰랐는데 가면 갈수록 짐이 무겁습니다. 자식들 대학만 가르쳐 놓으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취업이 안 됩니다. 석사한다고 박사한다고 합니다. 결혼할 때 무거운 혼수의 짐을 짊어져야 합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손자 손주 양육의 무거운 짐을 또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도 결혼이나 하면 다행인데 40이 되어도 결혼도 하지 않는 자식을 모시고 사는 것은 또 얼마나 큰 짐입니까? 결혼했다고 자식의 짐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해서 잘 만 살면 그래도 손자 손녀 보는 재미나 있지만 사소한 일로 싸우고 결국 이혼하면 얼마나 또 무거운 짐입니까?
자식으로 부모를 섬겨야 하는 짐도 점점 무겁습니다. 병들고 늙어가는 부모를 섬기는 효도, 봉양의 짐이 무겁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매일, 일 년, 이년, 십년 이십년, 아이 기르는 것보다 더 힘든 부모 섬김을 감당하려면 얼마나 그 짐이 무겁습니까? 우리 권사님 중에 한 분은 참 기쁘게 직장일을 하면서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을 보면 참 좋으신 권사님이다고 존경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질병의 짐이 무겁습니다. 자신의 질병도 질병이지만 가족의 질병을 짊어져야 하는 짐이 무겁습니다. 인간관계의 짐이 무겁습니다. 살면 살수록 미워하는 사람이, 미움 받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 용서 못하는 사람이,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집니다. 직장의 짐은 얼마나 또 무겁습니까? 매일 스트레스를 받아야 합니다. 일에 쫓겨야 합니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죄의 짐은 또 얼마나 무겁습니까? 살면 살수록 바르게 산 것보다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이 더 많아지고, 삶은 깨끗해지기보다 더 더러워지고, 양심의 가책은 더 심해집니다. 경제의 짐이 무겁습니다. 늙어 가면 더 여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힘들어지고, 애경사 찾아다니기도 버겁습니다.
이 짐은 제거시킨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짐이 너무 무거워 장애 자식을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능한 자식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살해해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의 짐이 너무 무거워 병든 부모를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질병의 짐이 너무 무거워, 가난의 짐이 너무 무거워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인생의 짐이 너무 무거워 병든 몸으로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동반 자살하는 노인들도 있습니다.
이 짐 대체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무거운 짐을 잊어버리고 떨쳐버리기 위해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바람도 피우고, 여행을 하고, 각종 방법으로 풀려고 하지만 그 짐이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헛되고 헛되다고 고백합니다. 인생을 탐구해 보기도 하고, 즐겨보기도 하고, 성공도 해보았지만 무거운 짐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예전에 유행했던 송창식의 고래사냥이라는 노래처럼 말입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이 짐을 외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른 체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런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우리가 참 안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죽으면 모든 짐도 내려놓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자들은 영생에 들어가지만 불신자는 영벌에 들어가는 심판이 있습니다(마25:46). 이 짐은 이 땅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 살면서 죽음의 짐, 죄의 짐, 걱정 과 근심의 짐, 두려움과 고통의 짐을 내려 놓고 참 안식을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28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명쾌한 답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 참 쉼을 얻으려면 무거운 짐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28).
무거운 인생의 죄 짐을 짊어지고 술집으로 간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산에가서 도를 닦는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애써 외면한다고 쾌락으로 대체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종교적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종교적 신앙생활은 그것 자체가 또 다른 짐이 됩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왜 교회에서 일을 많이 시키느냐고 불평하며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왜 주일에 놀러가고 싶은데 무거운 짐을 메달아 놓고 주일에 꼭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라고 하고, 헌금하라고 하고, 교사로 성가대로 봉사하라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힘겹게 삶의 현장에서 살다가 주일 하루만이라도 편안히 쉬고 싶은데 교회 다니니까 더 큰 짐을 짊어져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아직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신앙생활도 또 다른 짐으로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 온다"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를 나의 종교로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종교에의 예속이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는 것 같은 신비의 연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늘 내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보십시오. 그 남자와 그 여자와 만나는 것이 짐이 됩니까? 같이 식사하며 돈을 내는 것이 짐이 됩니까? 하루 종일 여행하는 것이 지겹고 지루합니까? 사랑하는 애인의 집의 어려움을 위해 봉사해주는 것이 짜증이 납니까? 왜 나만 부려먹느냐고 불평분만이 가득하게 됩니까? 만약 그렇게 무거운 짐으로 느껴진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랑으로 인격적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배가 안식이 되고, 성경 공부가 즐거움이 됩니다.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참된 보람이 됩니다. 우리가 예수께 나오는 것을 한갓 종교로 받아들인다면 그 종교가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신의 삶의 방해거리, 무거운 짐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큐어 축제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유명한 작가 톨스토이도 기독교를 인류를 억압하는 하나의 종교 시스템으로 오해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짐으로서의 신앙을 떠나가 있었던 긴 시기가 있었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55세 되던 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서 그가 얻은 참 마음의 안식에 대하여 그의 책 '신앙론'에서 이런 고백을 남깁니다. "나는 55년 나의 인생동안 최초의 15년의 소년기를 제외하고는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 내 나이 18세 되던 해 나의 친구가 내게 찾아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든 것이라고 한 말에 설득되어 나는 어릴 적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떠났다. 나는 종교를 포기하는 것이 자유를 얻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있어서 종교는 속박 그 이상이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내 나이 55세 나는 내가 스스로 버린 어머니 같은 신앙의 품으로 돌아왔다. 나는 단순히 종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의 구주인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참된 안식을 발견한 것이다."
그저 형식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거운 짐을 져 주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진리이시고 부활되시고 생명되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구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모든 짐을 져주시는 분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내 삶의 구세주로 모셔야 합니다. 단순한 종교 생활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무거운 짐만 더 늘어나는 것입니다(마태23:4). 예수님은 짐을 지워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유를 약속하시는 분이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한8:32,36)”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근심과 걱정,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께 나오시길 바랍니다.
1)우리 주님께서는 수고의 짐을 지고 참된 안식(쉼)을 누리지 못한 자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수고하다는 말(능동태)은 스스로 일을 만들어 고생하다는 말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이 자신들도 지키지 못할 율법을 만들어 억지로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날도 억지로 수고의 짐을 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완벽하게 통제함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고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실력과 노력으로 행복해 질 수 있고 자기 힘으로 얼마든지 평안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법 없이도 자기의 양심으로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고 참 쉼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습니까? 완벽주의자들은 참 안식이 없습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고, 자기가 심판자가 되고, 자기가 기준이 되는 사람에게는 참 안식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기준으로 남을 정죄하고 미워하면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제멋대로 사는 사람에게 안식이 없고 후회가 있을 뿐입니다. 살면 살수록 싫은 사람을 많이 만들어 냅니다. 알레르기 반응을 합니다. 과도한 면역반응을 합니다. 제거할 필요가 없는 것까지도 이물질로 인식해서 거부하고 공격하여 제거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을 보면 불쾌한 감정과 혐오로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조금만 남에게 싫은 소리만 들어도 자존심으로 속상해하고 분노합니다. 자신의 완벽주의 때문에 거부감을 품고,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장점보다는 단점을 먼저 보며 흠만 잡습니다. 타인의 성공을 자신의 불행으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최고가 되어야 하니 무엇을 하든 참 안식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참 안식을 주시기 위해 부르십니다.
2) 우리 주님은 무거운 짐을 진(페포르티스메노이) 자들을 초청하고 있습니다.(수동태)
타의(他意)로, 환경 때문에 짐을 졌다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짐을 지고 고통받으며 괴로워하는 자들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 율법의 짐입니다. 오늘날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지는 무거운 짐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죽음의 짐, 죄책감의 짐, 사업의 짐, 책임감의 짐, 질병의 짐, 가난의 짐, 미움과 시기의 짐, 고독의 짐, 과거의 짐, 죄의 짐, 자녀의 짐, 아내의 짐, 남편의 짐, 시어머니의 짐, 시아버지의 짐, 며느리의 짐 등 나의 뜻과는 상관없이 지워지는 짐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떤 짐이 있다면 그 짐으로 주님을 멀리하지 마시고 그 짐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짐을 지고 있는 우리를 주님은 초청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입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하는 자에게 우리 주님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에게 우리 주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짐을 나를 불행하게 하고 나를 괴롭히고 나를 망하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짐일지라도 그 짐을 지고 가면 다 받아 주십니다. 한나는 브닌나의 무거운 짐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에스더는 민족의 무거운 짐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라는 무거운 짐 때문에 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무거운 짐은 예수님께 나오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피겨 스케이팅으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을 제패한 스콧 해밀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이 책을 썼습니다. "스콧 해밀턴의 행복을 위한 8가지 기본기"라는 책입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생후 6개월 만에 친부모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양부모에게 입양되었지만 두 살 때부터 괴질에 걸려 병원을 전전했습니다. 1997년 고환암 3기 진단을 받았습니다. 2004년 뇌종양과 뇌하수체암에 걸렸습니다. 2010년 또 뇌종양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미국 피겨 스케이팅 선수로 1984년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남자 싱글 부문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1981년부터 1984년까지 4회 연속 전미 선수권 대회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세 번이나 암을 이겨내고 현재 암 환자를 돕는 자선단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8가지 행복의 비결 중에 "전능한 코치를 믿으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그는 전능한 코치라고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성공의 비결은 내가 얼음판 위에서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는 데에 있다. 나의 신앙심은 혼자라면 절대 이룰 수 없었던 경지까지 나를 항상 끌어주었다."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무거운 짐진자들이 그 짐 때문에 주님을 만나 참 안식과 행복을 누리며 인생을 살았습니다. 중풍병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이 그 육체의 질병에서 해방되어 참 안식을 얻었습니다. 다섯 남자와 살았던 여인이 수치감과 죄의식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는데 예수님 만나 참 자유를 얻고 진정한 안식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38년 동안이나 베데스다 연못에게 경쟁의 낙오자가 되어 무거운 질병을 지고 사는 인생이 예수님 만나 진정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도 우리 주님이 우리를 초청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멸시를 받는 자, 경멸당하는 자, 짐승만큼의 대우도 받지 못하는 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병든 자도 다 오라고 부르십니다. 마음에 병든 자, 고통 속에 사는 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걸어가는 자, 자기의 불성실로 인하여 고민하는 자, 학대받고 천대받는 자, 선을 주었으나 악으로 보상받는 자, 모략과 이기심과 시기심의 제물이 된 자, 비겁하고 비열한 자들로부터 버림받은 자,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는 자,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마음이 허전한 자, 없는 것 없이 차려놓고 살지만 왠지 모르게 텅 빈 곳이 많은 자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믿습니까? 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니까 인생의 무거운 짐으로 평생 동안 끙끙거리며 불안과 두려움, 근심과 걱정의 포로가 되어 참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나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 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내 짐이 점점 무거워질 때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내대신 짐을 져주시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내 모든 괴롬 닥치는 환난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주께서 친히 날 구해주사 넓으신 사랑 베푸시네”
2. 참 쉼을 얻으려면 주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29).
앞 구절을 보고 기뻐하다가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면 괜히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면 더 무거움 짐을 진다고 투덜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처럼 일을 많이 시키는 것을 처음 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교회에 다니면 좀 안식을 누리려고 하는데 더 힘들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교회에 다니면서도 불평과 원망을 하며 참된 쉼이 없습니까? 왜 마음의 쉼이 없습니까? 29절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멍에를 메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도 자꾸 우리의 멍에, 자신의 멍에를 메니까 그런 것입니다. “왜 나만 홀로 고난이냐고” 불평,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사나 성가대의 멍에, 구역장이나 목자의 멍에가 내 멍에가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주신 멍에, 시어머니의 멍에, 남편의 멍에, 아내의 멍에, 자식의 멍에가 내 멍에가 예수님의 멍에라고 받아들이면 그것이 결코 불평 원만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메는 멍에는 무거운 율법의 멍에가 아니라 복음의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무거운 짐을 해결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 놓은 주님의 사랑의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내안에 내가 사는 삶의 멍에가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이 사는 멍에를 매는 것입니다. 교회 다녀도 탐욕으로 가득찬 어린 아이와 같이 내가 주인이 되어 살 때는 인생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안식이 없었습니다. 내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멍에,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멍에, 명예를 얻기 위한 멍에를 메면 교회 다녀도 안식이 없습니다. 조금만 누가 싫은 소리하면 주님이 주신 짐을 다 팽개쳐버리고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멍에를 메면 참 안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짐덩어리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3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주님의 멍에는 쉬운 멍에이기 때문입니다.(30)
여기서 '쉽다(크레스토스)'는 말은 몸에 잘 맞는다는 것입니다. 알맞은, 사용하기에 적합하다는 말입니다. 내가 지금 짊어지고 있는 삶의 짐이 너무 힘들게 생각되는데 주님이 주신 멍에로 받아들이면 그것은 가장 적합한 멍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새 한 마리가 하나님께 물었답니다. “왜 저에게 무거운 날개를 두 개씩이나 양 어깨에 달아놓으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답니다. “네가 날 수 있는 것은 그 무거운 날개 때문이란다.” 우리는 하늘을 날기 원하지만 무거운 날개는 싫어합니다. 무거운 짐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무겁지만 그 날개가 있어야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짐을 지는 자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날을 수 있는 날개가 된다”고하였습니다. 자식들이 무거운 짐이 상급이 됩니다. 시어머니의 짊을 사명으로 받아들고 지고 가면 축복의 그릇이 됩니다. 시어머니 짐 때문에 인생의 가치를 알게 되고, 겸손해지고 오히려 행복해 합니다. 직장 생활이, 남편이, 아내가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꼭 맞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함께 져 주시는 짐이고 그 멍에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한 방향으로 보조를 맞추며 찬양하며 가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지는 멍에는 영광이고 상급이 됩니다. 감동과 감격이 있는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한 분이 아프리카에 선교를 갔답니다.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게 되었는데 원주민이 큰 돌을 선교사 가슴에 안겨주었답니다. 선교사는 이해할 수 없었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강물을 건너려면 힘이드는데 돌까지 가슴에 앉고 간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답니다. 원주민들은 큰 돌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고 강을 건넜답니다. 그 선교사는 그 이유를 강 중간쯤 왔을 때 알았답니다. 강 중간쯤에 급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만약 무거운 돌이 없었다면 급류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답니다. 주님이 주신 멍에는 우리를 죽이고 우리를 피곤하게하고, 우리를 괴롭게 하기 위해 주신 멍에가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성결하게하고,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고,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기 위한 가장 적합한 멍에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매고 가면 그 짐 때문에 우리 쓰러지고 망하지 않습니다. 안식을 잃지 않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무거운 인생의 짊이 있었습니다. 질병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대적이 있습니다. 가난이 있었습니다.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감옥에서도 찬송을 부릅니다. 많은 죄수들은 괴로워서 탄식하는데 그는 찬송을 부릅니다. 감옥 속에서 꼭 맞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의 멍에를 메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멍에는 자기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을 선언한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꼭 맞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2)주님이 주시는 멍에로 끌고 갈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멍에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 마리의 짐승이 함께 밭을 갈 거나 무거운 짐수레를 끌 수 있도록 만든 틀입니다. 이 멍에는 짐을 가볍게 끌기 위하여 짐승의 등이 상하지 않기 위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 멍에가 없으면 힘이 들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일의 효율성을 위해 두 마리 소에게 이 멍에를 메게 합니다. 어린 송아지에게 밭고랑을 바르게 걷고 또 주인의 명령에 순복하여 행동하는 것을 가르치기 위하여 어미 소의 멍에 아래 함께 두어서 밭을 갈게 하기도 합니다. 실상 멍에를 끄는 것은 어미 소이나 멍에 안에 어미 소와 송아지가 함께 있으므로 송아지도 멍에를 끄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송아지는 어미 소를 그냥 따라가기 만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모든 짐을 맡기고 주님의 멍에아래 들어오면 주님께서 우리 짐을 져주심으로 우리는 주님의 멍에 아래서 인생의 짐을 짊어지되 쉽고 가볍게 휴식과 즐거움이 넘친 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메 주신 멍에에 우리는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메는 것은 이제 나의 멍에가 아니라 주님의 멍에입니다. 이제까지는 나의 힘으로 하려하니 힘이 들고 쉼이 없고 안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참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봉사도, 가정일도, 회사일도, 학업도, 전도도, 가르침도, 자녀교육도, 효도도, 질병 치료도, 사업도 이제는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할 때 참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기기 못하고 내가 짊어지고 가려고 하니까 끙끙 거리고 무거운 것입니다. 내가 내 짐으로 받아들이고 내가 지고 가려고 하니까 무거운 것입니다. 책임감이 너무 강하여 당연히 내 짐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한다고 우기면서 쓰러져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5kg은 무거운 것이지만 20대 젊은이에게는 가벼운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온 초창기에 어떤 선교사기 승용차를 몰고 시골길을 가고 있었답니다. 한 아주머니가 머리에 짐을 잔뜩 이고 힘들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선교사가 안쓰러워 차에 타게 했답니다. 그런데 차를 운전하면서 거울로 뒷좌석을 보니 아직도 아주머니가 머리에 짐을 이고 있더랍니다. 그래서 어눌한 말로 “아주머니, 왜 머리에 짐을 이고 계세요? 옆에다 내려놓으세요.”라고 말했답니다. 그러자 “코큰 양반, 차를 공짜로 얻어 타는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짐까지 실을 수 있겠소!”라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나의 짐을 내가 지고 낑낑거리며 살 필요가 없습니다. 믿고 맡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16:3)” 왜 맡기기 못합니까? 믿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 하나님인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고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한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복음은 율법처럼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복음의 짐으로 무거워 쓰러져 죽지 않습니다. 가볍습니다. 죄와 탐욕에 따라가는 삶은 무겁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왕이 되어 사는 삶은 삶의 짐이 가볍습니다.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하여 내가 그만큼 커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어렵고 그 짐은 무겁다면 여전히 인생의 주인이 주님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 되는 삶을 살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앙의 연수가 쌓이는데도 속은 더 좁아지고 자기 고집만 강해지고 있다면 진정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정직하게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걱정, 두려움, 염려, 무거운 짐을 믿고 다 맡기시길 바랍니다.
3. 참 쉼을 얻으려면 우리 주님에게 나와 배워야 합니다(29).
29절을 다시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멍에를 메고 그 다음 무엇을 말씀합니까? 내게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참 행복해 지는 방법, 부자되는 방법, 안식을 누리는 방법, 출세하는 방법 등을 배우기 위해 많은 돈을 투자합니다. 자녀 한명 키우는데 무려 2억 6천만 원이나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참된 안식과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참 안식과 행복을 누리는 방법을 주님께서는 주님에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 배우는 것을 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노역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겨운 짐으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지루하고 지겹습니까? 아닙니다. 하루 종일 붙어 있어도 내일 또 보고 싶은 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입니다. 무엇이든 배우려고 합니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배우지 않고는 참 안식을 누리는 방법을 알 수가 없습니다. 쉼을 누리지 못합니다. 칼로 과일을 깍아 먹지 못하고 늘 상 손만 벱니다. 자칫 잘 못하면 그것으로 강도짓을 합니다. 칼 쓰는 잘 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서 “배우다”라는 말은 “제자가 되다”라는 말과 같은 어근을 가진 말로 "내 제자가 되어 내 가르침을 받으라."라는 말입니다. 주님께 나와 주님의 멍에를 멘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멍에를 메는 소를 길들이듯 주님으로부터 안식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배워야 합니다.
유명한 오스왈드 센더스라고 하는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의 생애에 가장 어려운 경험이 하나 있었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내가 암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는 곁에서 아내를 불쌍히 여기고 돌보는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최선을 다해서 돌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 당신이 내 곁에 있는 것이 나에게 오히려 고통을 줍니다. 소원이 하나 있는데 당신이내 곁을 떠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방해가 됩니다." 목사님은 너무 너무 당황을 했습니다. 자기는 최선을 다해서 간호를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하니까 너무 당황해서 아내한테 무슨 뜻이냐고 하니까 아내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조용히 이 고통을 통해서 예수님을 좀 배우고 싶은데 당신이 나에게 너무 친절과 사랑을 베풀기에 예수님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집니다." 그때 목사님은 조용히 그 아내를 향해서 조용히 기도하고 곁을 떠나 주었습니다. 그 아내는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배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면서도 조금만 자존심 상한 일이 생기면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씩씩 거리며 괴로워하고 밤잠을 설치고 한 달 두 달 아니 평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아니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치사하고 간사한 인간들에게 배신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모욕당하면서 십자가에서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런 부분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친구에게 배신당하면 견딜 수 없어하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지방 사람이 배신하고 속였다고 그 지방 사람들은 다 나쁜 놈이라고 정죄하고 적대시하며 평생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지고 삽니다.
참된 안식을 얻으려면 참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면 예수님에게 이 부분 한 수 배워야 합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저주 당하고 인신 매매 당하면서도 용서하고 품어 주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우리가 배워야 할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29)
온유라는 것은 단순히 성격 자체의 유순함이나 부드러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적하고 증오하고 자신에게 불이익을 주는데도 하나님의 공의를 징벌로 나타내지 않고 따뜻한 마음으로 용서해 주고 고쳐 주어 새롭게 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마음을 고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신뢰, 의탁하는 가운데 생기는 온화함과 관대함 그리고 친절함입니다. 이 온유함이 없으면 우리는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겸손을 배우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마땅히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몸을 입고 수치와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겸손이 없으면 어떤 경우에도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면 우리는 어떤 무거운 짐도 넉넉히 지면서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2)친히 멍에를 메신 분이십니다.(29) 섬김의 도를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억지가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희생하신 분이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멍에를 메지 않는 섬김은 수고가 됩니다. 짐 덩어리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섬김은 안식이 됩니다. 감사가 됩니다. 참된 인생의 의미가 됩니다.
3)우리에게 참된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28,29)
참된 마음의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참된 안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 나오십시오. 주님의 멍에를 메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배우십시오.
그러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달픈 인생 길을 걷다가 쉴 곳이 있습니다. 지치고 쓰러졌을 때 찾아가 쉴 곳이 있습니다. 패배와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 찾아갈 쉼터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예수님의 넓은 가슴입니다. 참 안식을 얻기 원하십니까? 예수님께 나와 주님의 멍에를 매고 예수님을 배우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안식의 답입니다. 28-30절 같이 읽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마 11:28-30 / 조용기 목사
아담 이후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삽니다. 나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다고 생각하는 사람 많습니다만 모두 다 각각 다른 종류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갑니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입버릇처럼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습니다. 한 어른이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주변에 있는 유치원 어린이들이 여러 명이 잔뜩 탔습니다. 그런데 그 중 유치원 어린이가 좌우의 친구를 보고 “야, 인생살이 참 피곤하다.” 그러니 그 어른이 그 말을 듣고 하도 신기해서 어린애가 인생사가 피곤하다니 어떻게 피곤한가? 그래서 “야 너 유치원 학생인데 너 인생이 그렇게 피곤하면 어떻게 되나?” 어린아이가 “부모는 몰라요. 유치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어머니가 피아노 연습하라고 독려를 합니다. 피아노 치고 난 다음에는 좀 놀려고 하면 미술학원에 가라고 밀어 내칩니다. 미술학원에서 겨우 좀 시간을 내어서 집에 돌아오면 영어학원에 가라고 또 밀쳐 냅니다. 인생이 피곤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른들은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육체의 피곤함 뿐 아니라 정신적 피로가 대단한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 중에 하난데 이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 여러 가지 질병에 우리가 걸리게도 되는 것입니다. 옛날과 달리 신경성 병이라든지 시민성 질환이라고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모두다 마음에 뿌리를 둔 병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8절에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만 피곤할 뿐 아니라 만물이 피곤하다. 모든 피조물들이 피곤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근본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짐인 것입니다.
1.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항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살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이 세상에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삽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왜 사는가?’ 그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는 탐심을 아담과 하와가 가졌다가 심판을 받아서 그 속사람이 죽고 육체의 사람만 벌거벗은 채 하나님 앞에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저주받은 땅에 피곤하고 고달픈 인생을 사는 것을 매일같이 보고 있습니다. 저주받은 땅에서 사는 고통은 성경에 뚜렷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창세기 3장 16절~19절)고 했습니다.
아담은 그 아내의 꾐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었는데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3장 16절~19절)는 준엄한 심판이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단하고 피곤한 인생을 살도록 심판을 내린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안력과 갈등을 가져와서 심지어 죽이고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 8절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 갈등이 격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그래도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행실들을 하고 삽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잘못된 인생사를 고칠 수가 있겠습니까?
2.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주님께로 나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께 오면 주님이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길을 잃어 버렸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길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우주의 길인데 우리 인생이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더 많은 공부를 해도, 수련을 해도 더 많이 종교를 만들어야 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 품에 안기면 길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 떠나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예수님 품에 안기면 길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길에 들어서서 살아야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 길에서 벗어나면 평안도 기쁨도 행복도 떠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을 잃어버리지 말고 그 중심에 서서 살려면 길 되신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바로 그 길인 것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 공부를 많이 해야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수양과 도덕을 많이 닦아야 잘 사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학문의 중심에 선 곳에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인데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길을 모시고 있고 그럼 내가 이 세상에 바라는 크고 작은 길은 큰 길 되신 예수님 안에서 다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주를 믿는 사람들이 머리가 되고 꼬리 되지 않고, 위에 있고 아래 내려가지 않고, 남에게 꾸어줄 지라도 꾸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은 올바른 길을 쫓아서 살기 때문에 낭패와 좌절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길을 올바르게 들어서서 가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지요. 사람이 길을 선택하다는 것,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에 좌우에 강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같이 있는데, 그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한사람이 다른 강도보고 말하기를 ‘예수님보고 욕하지 마라. 너와 나는 젊을 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우리 그 길에 대응하는 보복을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예수님은 길을 잘못 든 적이 없고 길을 잘못 들 때도 없다. 주님이시여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임할 때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 사람을 보시고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서 만날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은 한평생 길을 잘못 들었으나 마지막에 길을 잘 선택했단 말입니다. 마지막에 길을 잘 선택하니까 다른 때 실수로 선택하지 못한 것은 다 용서되고 사라져 버리고 그는 낙원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 세상에 살면서 크고 작은 일에 올바른 길을 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간구하고 기도하면 예수님이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여러분이 간 길을 밝혀줄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태복음 18장 12절~14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길 잃은 양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모두 다 길에 들어서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길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 대가로서 방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길을 잃지 않는 사람은 열매를 맺습니다. 유럽 사람들이 미주에 이민을 갈 때 많은 사람들이 남미를 택해서 갔습니다. 남미에는 금은보화가 많이 나기 때문에 금은보화를 얻기 위해서 남미로 가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또 많은 사람은 북미를 택해서 배를 탔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예수 잘 믿으려고 북미를 택했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 누가 길을 올바르게 택했느냐? 예수 잘 믿기 위해서 북미에 간 사람들은 예수도 잘 믿고 올바른 길에 들어서서 성공도 했습니다. 그러나 남미로 간 사람들은 길을 잘못 택해서 예수도 못 믿고 생활도 길을 잘못 들어서 사업이 실패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예수님께 들어가서 길을 올바르게 택한 사람은 무엇을 해도 성공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험 속에 들어가면 이 땅에 사는 삶 자체를 주님께서 천국으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실 때가 비일비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주님께로 오면 길을 찾게됩니다. 문제의 해결을 얻습니다.
또 예수님은 진리 자체입니다. 다른 데는 거짓말이 꽉 들어 차 있습니다. 이 세상에 거짓 종들이 나를 따르라고 해서 수많은 사람을 거짓의 구렁텅이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제일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정치인들인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거짓말 약속을 산더미처럼 해놓고 난 다음에, 나중에 당선되고 난 다음 “몰라요, 나 잊어버렸는데. 그런 말 내가 했던가?”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인들 따라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찾으려면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체가 진리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와서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주님과 대화를 하고 지내면 우리가 진리에 서서 거짓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마귀는 통째로 거짓말인 것입니다. 그 거짓말을 따라가면 모든 것이 거짓투성이인 곳으로 가게 되기 때문에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게로 오라”고 할 때, 예수님은 올바른 길이니까 당신에게 오라고 하고, 예수님은 진리고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속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담과 하와에 범죄로 말미암아 죄를 지은 백성은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장 19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5장 21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죽어도 생명인 예수님이 지옥 건너편에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마귀가 절망적인 세계를 만들어 놓았어도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면 생명을 모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양과 도덕을 닦고 여러 가지 종교를 가진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냥 모셔드리면 생명을 모시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심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을 줄 수 있다는 것이 그 축복인 것입니다.
3. 행위냐 믿음이냐
우리가 행위로써 사느냐, 믿음으로 사느냐 이것을 예수님이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에덴에서 쫓겨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쫓겨 나오면서 패션 스토어에서 만든 것보다 훨씬 좋은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심판을 내리실 때, 죄를 지은 그들은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들이 쫓겨나올 때 무화가 나무 잎으로 앞치마를 만들어서 입고 나왔습니다. 무화가 나무가 앞치마를 만들어 놓으면 햇빛이 비치기 때문에 그냥 말라버립니다. 인간이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도 수치스러운 것을 막을 수 없이 풀잎사귀에 옷이 되고 말라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낼 때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그 가죽을 벗겨서 옷을 만들어 입혔습니다. 거기에는 의미가 깊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쫓겨나올 지라도 하나님이 나중에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실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며 피를 흘려서 우리 죄를 다 청산하고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벗겨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쏟고 그 예수님의 가죽을 벗겨서 이 세상에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벗은 몸으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영원한 추위를 이기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은 인력으로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로 12절에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으며,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단으로써는 죄를 안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살 수 없을 것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주시기 위해서 인간으로 내보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심으로 인생들이 일생의 죄를 다 청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죄 없는 인생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심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장 21절~22절)고 했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 하나님 희한하십니다. 우리 지구에 사는 모든 인류들을 계산에 다 넣어가지고서 인류의 지은 죄악을 예수님에게 떠맡긴 것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대가가 얼마나 큰지, 예수 그리스도 안 믿는 우리들이 한평생 지은 죄의 대가가 열(10)이라고 가정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피의 대가는 영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것처럼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부르실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어서 영원한 의로움을 가지고 나옵니다. 죄를 한 번도 안 지은 것처럼 그런 자격을 가지고 가슴 펼치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이처럼 공짜로 주는 것인데, 그 공짜로 주는 은혜에 의지해서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죄가 청산되고, 성령꼐서 우리 속에 들어오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지내면서 죄의 생활은 점점 사라지고, 의와 진리를 따라 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4. 쉽고 가벼운 멍에를 메라
예수님께서 말씀하기를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중동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소에 멍에를 걸쳐서 논을 갈거나 밭을 가는데, 어미 한 마리만 있을 때는 모르는데 새끼가 있으면 목에 건 멍에가 보통보다 큽니다. 그 멍에를 어미 목에 걸어 놓고 새끼를 그 멍에 밑에 같이 불러 세우는 것입니다.
멍에는 엄마 목에 걸려있는데 밖에서 보면 새끼가 멍에를 같이 걸머지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어미 소가 걸어갑니다. 그럼 그 밑에 새끼 소는 어미 따라서 걸어가면 아무 짐도 목에는 얹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미 소가 잔뜩 몸에 힘을 넣어서 땀을 흘리고 헉헉 거리면서 가는데, 새끼는 엄마 밑에서 멍에를 맨 척만 합니다. 밭을 가는 흉내만 넵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엄마는 자기가 수고하고 무거울 지라도 새끼를 자기 멍에 밑에 불러서 같이 밭을 갊으로 새끼에게 밭가는 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끼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새끼 멍에 위에 얹어진 것이 아니라 엄마가 다 새끼의 멍에를 자기 목에 걸고 엄마는 그것을 짊어지고 가는데 새끼는 재미있게 평안하게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고 나면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의 멍에에 우리 짐을 다 받아서 짊어지고 “나와 같이 가자”라고 하면 사람들이 “와~짐을 다 짊어지고 가네?” 실상 그 짐은 자기 멍에에 얹어있지 않습니다. 예수님 멍에에 얹어있는 것입니다. 자기 멍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멍에 밑에 들어가 있으니까. 그래서 예수님과 나란히 같이 걸어갑니다. 예수님이 온유하고 겸비한 마음으로 새끼를 옆에다 세워서 같이 가면 큰 짐을 옮기는 것같이 보이지만 새끼는 수고롭지 않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앉아계시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의 멍에 밑에 들어와서 나와 함께 행해야 된다.”고 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짐이 없는 사람 없습니다만, 인생에 그 짐을 다 걸머지고 갈 사람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의 짐을 예수님의 멍에에다 얹어놓고 자기는 예수님 멍에 밑에 서서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예수님이 다 맡아서 짊어지고, 우리는 편안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끼에게는 쉽고 가벼운 멍에입니다. 새끼의 그 무거운 짐을 엄마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걸머지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걸머지고 믿음으로 순종해서 살아나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걸어가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고 같이 가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충만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7절로 28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뜨거운 사랑으로 여러분과 나의 짐을 짊어져주시고, 그 예수님 멍에 밑에 우리가 들어가면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중복음의 멍에를 매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 멍에, 질병의 멍에, 가난과 헐벗음의 멍에, 죽음의 부활의 멍에, 성령과 동행하는 멍에, 예수님은 그 모든 멍에를 걸머지고 “내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멍에 속에 들어가면 우리의 짐을 예수님이 다 걸머지고 우리는 그냥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는 여러분인데, 주님에게로 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여러분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인데 여러분의 십자가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여러분 그냥 건성 얹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예수님이 매달려 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인 줄 보이는데, 예수님이 여러분을 업고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요. 여러분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생각하지만 업혀있지 여러분이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진 것은 아닌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은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해주시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로 27절에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의의 옷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의 의를 전달받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의로움 우리의 의로움, 예수님의 치료 우리의 치료, 예수님의 부귀 우리의 부귀, 예수님의 부활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외롭게 지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당신의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내게로 오라. 너희가 그렇게 고생하고 수고하지 말고 내게로 오라. 그리고 내 멍에 밑으로 들어오너라. 네 짐은 전부 다 내 멍에에 던져버려라.”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이 짊어지고 있는 멍에의 지게에 내 짐 다 맡겨 버리고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모시고 기도로써 맡기고 나가면, 주는 겸손하고 온유한 하나님으로 여러분의 짐을 대신 걸머지고 일생을 평안하게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행복에로의 초대
마 11:28-30 / 양인순 목사
우리의 삶 속에 다양한 잔치가 있습니다. 백일잔치, 돌잔치, 결혼잔치가 있습니다. 요즘은 거의 사라졌지만 전에는 육순잔치, 칠순잔치가 있었습니다. 자기가 존경하고 신뢰하는 사람으로부터 초대장을 받고, 잔치 자리에 참여하는 것은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어린시절 동네에 잔치가 벌어지면 신이 났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는 잔치집에서 먹고 마십니다. 잔치가 벌어지면 지나가는 나그네도 환영을 받습니다. 잔치집에는 사람이 북적거립니다.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웃음이 있고, 대화가 있습니다. 만약 잔치집에 손님이 없고, 음식이 없다면 그야말로 썰렁합니다. 초대한 주인도 민망하고, 초대받은 손님도 멋쩍습니다.
종교를 표현할 때 불교는 초상집 같고, 유교는 제사집 같고, 기독교는 잔치집 같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잔치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잔치를 베풀고 모든 사람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응하지 않습니다. 그때 주님은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 명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공생애 첫 번째 이적을 가나 혼인 잔치집에서 행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애찬식(Love Feast)을 가졌습니다. 즉 예배가 잔치였습니다. 예배 후에는 서로 떡을 떼며, 풍성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잔치집과 같아야 합니다. 교회에 오면 잔치집 분위기 나야합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밝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풍성한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잔치집 같은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합니다.
오늘 성지교회 예배당의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잔치집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 않습니까? 오늘 오후에는 2달 동안 기도하며 준비한 예수생명잔치가 열립니다. 이 잔치는 세상의 어느 잔치보다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자리입니다. 세상의 잔치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 그치지만, 생명잔치는 복음을 소개하고, 교회를 알림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던 자들에게 새 생명을 소개하고, 결단해서 천국 백성으로 변화되도록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한 표어처럼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드는 잔치입니다. 이 잔치 자리에 기쁨으로 VIP(전도대상자)와 함께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들이 중요한 잔치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초대장이 필요합니다.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가서 앉아 있는 것만큼 멋쩍고 이상한 자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초대장은 어떤 제한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초청하시는 주님의 초대장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1-2)
주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오호라’로 초대장을 시작하십니다. ‘오호 통재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내용입니다. 왜 초대장을 보내시면서 그토록 안타까워하실까요? 당신의 택함을 받은 자녀들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삶이 목마름에 지쳐있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목마름의 고통을 느껴 보셨는지요?
저는 목마름이 얼마나 큰 고통이라는 것을 군대에서 공수훈련을 받을 때 깨달았습니다. 낙하산을 타기 위해서는 한 달 동안 지옥훈련이라는 것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훈련은 항상 제일 무더운 여름철에 시작합니다. 뜨거운 태양아래서 하루종일 구르다보면 목마름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오후가 되면 굵은 소금 한주먹씩을 나눠줍니다. 그러면 물도 없이 소금을 우적거리며 씹습니다. 그러면 입천장이 다 벗겨져서 쓰라립니다. 저녁 때가 되면 옷에 소금기가 베어 나와 허였게 됩니다. 훈련중에 이동을 하다가 갈증 때문에 쓰러지기도 합니다. 물을 보면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마십니다. 갈증은 정말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목마름은 육신의 갈증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 속에는 다양한 목마름이 존재합니다.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성공과 출세라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 목마름을 나름대로 해결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여러분도 다 그런 삶을 지금까지 살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양식 아닌 것을 위해서 은을 달아주며 허탄한 것을 찾습니다. 수고해도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해서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도움이 없는 인간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헛되다 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인간의 방법으로 삶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목이 마르다고 바닷물을 마시면 더 갈증이 나듯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 샘물을 마시지 않으면 우리 인생의 갈증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잘 보여주십니다.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꾼 여인, 얼마나 삶의 고통과 갈증이 심했을까요?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하려고 가장 뜨거운 정오 시간에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 여인을 대면하시며 ‘이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생명수 샘물 되시는 주님을 만나고, 그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때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전에 자주 부르던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 주 예수 오셔서 내 슬픔 아셨네 내 앞일도 내 주 아셨네
나 주를 버리고 떠나갔었네 네 주님 약속대로 날 붙드셨네
주 말씀하네 너 물가로 곧 나오라 내게 오라 너의 목마른 것을 다 채우리라
너 방황할 때에 흘리던 내 눈물 그 눈물위하여 내가 죽었노라 ♪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누구나 탐욕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정과 욕심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배에서 생수가 흐르지 않는 한 우리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밖에서 삶의 갈증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몸부림칠수록 인생의 실타래는 더욱 꼬여만 갑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목말라 지친 영혼들을 진리의 샘가로 와서 생명의 물을 마시라고 초청하십니다. 주님의 초대에 응할 때, 순종할 때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오늘도 생명수 샘가에서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복된 날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장에서 일하는 지게꾼들이 제일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고 암송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이 말씀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다시한번 28-29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의 영원한 지게꾼 되시는 예수님은 오늘도 부르십니다. 인생길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삶의 무게에 짓눌려 어깨가 늘어져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오늘 이 주님의 초대 자리에 오신 분들은 행복한 분들입니다. 서로를 축복합니다. “당신은 행복한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영광스런 예배의 자리로 부르셨다는 것이 은혜요 감사요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무리 초대장을 보내고 강권해도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기 전에 비행기로 경고문을 뿌렸습니다. 무서운 원자탄이 투하될 것이니 모두 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거짓말이다” “공갈협박이다” “그때까지 가보자”하면서 거의 그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극히 소수만이 그 경고문을 따라 피난했습니다. 드디어 8월 6일, 비행기 두 대가 날아와서 두어 번 히로시마 상공을 선회하더니 마침내 검은 물체를 떨어뜨렸습니다. 그리고 ‘꽝’ 하는 굉음과 함께 ‘번쩍’하는 순간 30만 명이 재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히로시마에 뿌려졌던 경고문 보다 더 중요하고 강력한 초청의 메시지를 듣고 있습니다. 생명의 자리로 나아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장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초청장은 무시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간절히 오라고 부르고 계시지만 분주하다는 핑계로,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주님의 초대장은 빛바랜 종이처럼 퇴색해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이사야 55장 6-7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아멘!
지금은 우리 곁에서 간절히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향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만 하면 주님은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역전시켜 주십니다. 고통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탄식이 변하여 노래가 됩니다.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죽음이 변하여 생명의 자리가 됩니다.
미국의 한 교도소에 수감된 사형수가 신문 한 장을 손에 쥐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신문의 머리기사에는 ‘미국 제22대 대통령 클리블랜드 취임’이라고 대서특필 되어 있었습니다. 이 일을 이상하게 여긴 간수가 사형수에게 슬피 우는 이유를 묻자 그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습니다.
“클리블랜드와 나는 대학교 동창입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나오다가 둘은 교회의 종소리를 들었어요. 클리블랜드는 내게 속삭였어요. ‘친구여, 교회에 가보세.’ 나는 거절했지요. 결국 클리블랜드는 교회로, 나는 술집으로 향했어요. 그것이 우리의 운명을 확연하게 갈라놓았습니다.”
클리블랜드는 그날 새 삶을 다짐했고 다른 친구는 육체의 정욕에 빠져들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두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교회의 종소리를 ‘경건한 하늘의 초청’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환락의 소리’로 여긴 사람은 사형수가 됐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결단을 하느냐에 따라서 미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의 결정이 운명을 가르는 열쇠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 생명잔치에 VIP를 초대합니다.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 것처럼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강권하여 주님의 행복에로의 잔치에 참여하도록 하십시오. 그 길이 생명의 길이요, 진리의 길이요, 축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타까운 주님의 심정으로 계속 목마른 VIP들을 초청해야 합니다. 아무리 거절하고, 이유를 대고, 핍박을 해도 계속 초대해야 합니다. 그들의 영혼이 불쌍하기 때문입니다. 내버려두면 그들의 미래와 운명이 두 번째 사망-지옥의 심판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어깨에 메여 있는 짐과 멍에를 벗겨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소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죄악의 짐을 지고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더욱 커다란 율법의 멍에를 씌웠습니다. 율법의 잣대를 가지고 신음하는 백성들을 정죄했습니다. 이런 고통가운데 신음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주님의 초청에 응답하여 주님 앞에 나오는 자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발버둥쳐도 율법을 지킴으로는 자유함이 없습니다. 더 커다란 멍에가 우리를 짓누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무거운 죄 짐을 예수님이 담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지게꾼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멍에를 메라고 우리에게 말씀시지 않습니다. 먼저 우리의 모든 죄의 멍에를 메셨습니다. 질병의 멍에를 메셨습니다. 가난과 저주의 멍에를 메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멍에를 멘다고 생각하기 싶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소에게 멍에를 메게 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소를 이용해서 밭을 갈 때 멍에 하나에 소 두 마리나 세 마리가 함께 메도록 했습니다. 크고 힘센 소가 가운데서 멍에를 메게 되면 나머지 약하고 작은 소들은 그냥 따라 가기만 하면 됩니다.
제가 군대에서 훈련 받을 때 키가 작아서 덕본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다 키가 크고, 건장한데 보다시피 저는 작았습니다. 특별히 기압을 받을 때 목봉체조를 시킵니다. 큰 기둥만한 나무를 10여명이 들었다 내렸다는 반복하는 힘든 기압입니다. 그런데 저는 키가 작으니까 가운데 끼어서 흉내만 내면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짐이 무거울 때, 우리 예수님 나와 함께 멍에를 메고 인생의 밭을 새롭게 만드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세계경제의 침체로 우리나라 역시 많은 경제적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IMF 때보다 어려움이 닥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함과 두려움 가운데 긴장하고 있습니다.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들이 진정 자유함과 평안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일까요?
우리를 초청하시는 예수님의 품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배워야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염려와 근심을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엄마 품에 평화스럽게 잠든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품에 안겨야 합니다.
아직도 내 문제를 내가 끌어안고 해결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품을 떠나 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문제는 더 꼬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전히 주님 앞에 내 문제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무거운 짐을 내 방법으로 져보겠다고 몸부림칩니다.
우리나라에 온 초창기 선교사들의 이야기입니다. 선교사 한분이 차를 타고 시골길을 가는데 한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교사는 차를 멈추고 “할머니 이 차에 타십시오.”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지만 선교사의 간청에 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시골 할머니는 차에 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머리에 짐을 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선교사가 “할머니 짐을 내려놓고 편히 가세요.” 그러자 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차를 공짜로 얻어탄 것도 미안한데 어떻게 짐까지 내려 놓겠소.” 하더랍니다.
우리 자신들이 지금 시골 할머니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 주님은 이 시간 다시한번 말씀하십니다. ‘너의 멍에를 내게 맡겨다오. 내가 너를 대신하여 져주마. 너는 단지 나를 믿고 따라오너라. 내 말을 믿고 순종하기만 하여라. 내가 너를 쉬게하리라.’ 이것이 우리 주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앞에 왔으면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겨드리십시오.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릴 때 죄의 짐이 풀어집니다. 질병의 짐이 풀어집니다. 가난의 짐이 풀어집니다. 절망의 짐이 풀어집니다. 그 안에 진정한 안식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오늘 꺼져가는 등불과 같은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에게 참 소망의 빛, 생명의 빛을 비출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셨습니다. 사탄의 모든 세력을 멸하셨습니다. 인간의 모든 절망의 문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 사망의 어둔 그늘에서 방황하던 인생들에게 새로운 소망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어둡습니다. 춥고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바로 그곳에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바로 그곳에 주님을 초청해야 합니다. 외로운 내 가슴에 소망의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에도, 일터에도, 사업장에도, 이 조국 위에도 주님이 오셔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면 모든 어둠과 절망은 물러갑니다. 새로운 소망의 태양이 떠오릅니다.
삶의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진심으로 환영하십시오. 주님이 찾아오시는 그 자리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베드로 장모의 집에 예수님이 들어가실 때 열병이 떠납니다. 불의한 삭개오의 집에 주님이 거하실 때 그는 거듭난 새사람이 됩니다. 죽은 나사로의 무덤에 주님이 가실 때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풍랑이는 바다도 잔잔케 됩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 주님이 오시면 모든 먹구름은 떠날 줄로 믿습니다.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줄 확신합니다. 환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그 어떤 위협이나 위기라도 우리 주님과 맺어진 사랑의 관계는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시는 순간 모든 것이 역전됩니다. 우리는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주님은 이 시간 우리 가운데 찾아 오셔서 행복에로의 초대를 하고 계십니다. 삶에 지치고 목마른 자들을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그 부르심에 기쁨으로 응답하십시오. 그리고 무거운 짐들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주님을 내 인생의 진정한 주인으로 영접하십시오. 그 속에 놀라운 주님의 안식과 평화가 넘쳐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