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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황우석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태사공의 후손
121사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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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공비에서 목사까지-金新朝의 29년 새벽 4시. 진녹색 마르샤 승용차가 어둠을 뚫고 서울 반포의 한 아파트 주차장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2월 중순. 입춘이 지나고 우수가 내일 모렌데 살짝 스치는 바람이 매섭다. 잔뜩 얼었는지 차 시동 소리가 껄끄럽다. 그러나 마음은 공해 자욱한 밤 하늘 저 멀리 반짝이는 별빛처럼 밝게 빛난다. 『김선생님, 오늘도 어김 없으시네요』 졸린 눈을 애써 뜨고 순찰 돌던 아파트 경비원이 먼 발치에서도 알아보고 익숙하게 인사를 건넨다. 오늘도 아파트를 나서는 첫 주민이 된 듯 하다. 간혹 우유나 신문 배달원들이 오갈 뿐 불켜진 집은 거의 찾아 볼수 없다. 金新朝(김신조)목사. 정확히는 서울 성락침례교회 부목사. 일년 열두달, 눈이 오나 비가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계속해온 아침 기도를 나서는 길이다. 어젯밤 기독교에 입문한 한 귀순용사 집에 심방(尋訪) 갔다 귀가한 것이 밤 11시였으니까 잠은 4시간 쯤 잔 것 같다. 지난 81년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이후 15년 이상 계속해온 아침 기도로 하루 5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그러나 몸은 항상 상쾌하다. 행선지는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역삼동의 성락교회 강남교육관. 가는 길에 여느 때처럼 교인 2명의 집을 차례로 들러 차에 태우고 4시반 목적지에 도착했다. 지난 1월22일 신길동 성락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지 3주가 막 지나서인지 아침기도에 임하는 마음은 어느 때보다 절절하다. 말과 행동을 절제하고 더욱 온유하게 하며 언행이 일치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요즘 그는 기도에 자주 담는다. 2시간 가량의 기도를 마치고 6시반경 집으로 향한다. 날은 밝았지만 러시아워에 이르기에는 약간 이른 시간이라 10분 남짓이면 집에 도착한다. 곧바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동네 둑으로 나선다. 1시간 가량 조깅을 한다. 도중 쓰레기가 눈에 보이면 주워가며 달리기를 계속한다.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낯익은 얼굴이다. 다시 집에 들어와 씻고 아침을 먹으면 출근 시간이 된다. 맑은 피부, 카랑카랑한 음성, 민첩한 몸놀림. 55세의 나이보다 5년 내지 많게는 10년쯤은 젊어보인다. 그의 사무실은 신길동 성락교회 와 맞붙은 기독인 월남용사 선교회. 그 자신이 89년 창립한 이 선교회에서 그는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가 모는 승용차는 1년전 구입한 것이다. 지방 강연과 간증 등 워낙 이동이 잦아16년 전부터 직접 차를 운전하고 다녔다. 처음 맵시나부터 타기 시작해 10년을 쓰고 쏘나타로 바꿨다가 최근 장거리 출장과 밤길 운전에 따른 피로를 조금이라도 줄여보려고 좀 무리인 줄 알면서도 큰 차로 바꿨다. 옛날 같았으면 『김신조, 먹고 살만 해졌구나』하는 듣기 거북한 소리가 금방 들려왔겠지만 시대가 많이 변한 탓인지 요즘은 그에 대해 호기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작년 천안에 간증 갔다가 바로 전방부대 강연에 맞추느라 과속 운전을 하다 고속도로에서 단속을 받았는데 교통순경이 그를 알아보고는 『조심해서 운전하라』며 부드럽게 대해준 적이 있었다. 그는 결코 부자는 아니다. 그러나 가난한 것은 아니다. 오전에는 귀순용사들의 선교업무와 관련한 몇가지 사무를 처리했다. 점심 시간, 별다른 약속이 없는 날이라 직원 둘과 함께 바로 옆 교회 구내 식당에서 가볍게 점심을 때운 김목사는 의자에서 15분 쯤 샛잠을 잤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벽에는 요한복음의 한구절이 대형 액자에 담겨있고 책상 모서리에는 그의 가족 사진이 환하게 웃고 있다. 오후 6시까지 간증 스케줄를 검토하는 한편 귀순자들의 방문을 받고 각자의 신상에 관한 이런저런 상의도 하면서 사무실에서 일상적인 업무를 챙겼다. 그의 사무실 은 종교생활은 물론 귀순자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은 한다. 일요일에도 개방돼있고 따라서 그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일요일에도 사무실을 지킨다. 사무실 운영자금은 성락교회에서 지원해준다. 오후 6시. 오늘은 더 이상 일이 없다. 아주 한가한 날에 속한다. 집으로 부인에게 일찍 들어간다는 전화를 하고 7시에 귀가했다. 한시간 가량 성경공부를 하고 부인과 단 둘이 저녁을 먹었다. 이렇게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에 속한다. 부인 역시 전도사로서 바깥일에 바쁜 데다 그 자신이 되도록 저녁은 간단히 바깥에서 때우거나 거르기 때문이다. 대신 점심을 많이 먹는다. 육류는 피하고 채소 위주의 식단을 좋아한다. 50대를 넘어서면서 생긴 습관이다. 회계학 공부하러 미국에 가 있는 아들에 대한 얘기, 출가해 7개월 된 첫손주를 안겨준 딸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 11시쯤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다음 날은 지방으로 신앙간증을 하러 가야 하므로 집에 들어올 수가 없다. 이런 일로 집을 비우는 날이 한달에 3,4일은 된다. 그 밖에 열흘 정도는 이런 저런 모임으로 밤 11시나 12시쯤에 들어온다. 그나마 지금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이 확보된 편이다. 한달 중 절반 이상을 지방에서 보내던 시절이 불과 몇년 전이다. 70년대 후반까 지만 해도 반공 강연이 끊이지 않아 스스로에게 투자할 시간은 엄두를 내기 힘들었다. 신앙을 가진 뒤 82년부터는 간증 일로 10여년 가까이 무척 바빴다. 91년과 94년 서울 침례신학교와 신학원을 차례로 졸업하고 지난 1월 목사시험에 합격한 것은 이제 세상이 그를 「덜 필요로 한」데 따른 대가였다 .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그의 몸은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청와대로 침투한 무장 공비」 「생포 후 자유 대한의 품에 귀화한 반공 연사」였을 뿐 「인간 김신조」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월 22일 목사 안수식은 68년 그가 남파돼 청와대 인접 자하문 부근에서 투항한 「1·21 사태」를 염두에 두고 날을 잡은 것이다. 그 운명의 날로부터 만 29년, 『청와대 까러 왔수다』라고 기자회견에서 일성을 터뜨렸던 당시 26세의 열혈 청년은 이제 55세의 목사로 변모했다. 그가 남한에서 정착해 낳은 장녀의 나이가 지금 26세. 그리고 그는 이제 어엿한 할아버지다. 탈북자의 행렬이 밀물을 이루는 지금 그는 자신의 이름이 뜻하듯 「새아침」을 두번이나 맞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한 땅에서 살아 남게 된 것, 그리고 종교인으로 변신한 것. 그러나 그 사이의 어둠은 얼마나 깊고 길었던가. 지난날의 자신을 되돌아보면 피눈물이 난다. 그러나 6백여명에 달하는 탈북자들의 생활, 그리고 앞으로 얼마로 늘어날지 감히 예측하기도 힘든 얼굴 모를 새 탈북자들의 행로를 생각하면 눈앞이 아득해져 온다.
1968년 1월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124군 부대. 영하 25도로 떨어진 초강추위 속에 남파 특수공작원 31명을 태운 버스가 어둠을 타고 부대를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개성 남동부에 위치한 남파공작원 초대소. 얼어붙은 표정의 20대 초중반의 청년 장교들은 24kg에 달하는 꽉찬 배낭을 저마다 하나씩 울러멨다. 모두가 하사관에서 하루 아침에 소위로 임관되는 파격적인 계급승진을 며칠 전 경험한 뒤였다. 그 중 2명은 대위와 중위로 승진했다. 배낭 내용물은 다양했다. 사단 마크가 달린 남조선 군복 일습, 일제 바바리코트에 신사복 한벌, 운동화, 손목시계, 망원경, 트랜지스터 라디오, 지도,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 비상 약품, 찹살가루를 섞은 엿, 오징어 등 비상식품, 그리고 30발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련제 기관단총, 8발이 장전되는 소련제 권총, 방어용 수류탄 8개, 대전차 수류탄 2개, 단도… 당초 대원은 76명이었으나 돌연 31명으로 축소됐다. 공격 목표가 청와대만으로 압축된데 따른 조치였다. 원래의 타깃은 청와대 외에 미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수용소 등 5개소였다. 가히 휴전 이래 최대라 할 만한 초특급 작전이었다. 전날 밤 환송회에서 대취했던 대원들은 최전성기의 체력을 과시라도 하듯, 이미 평소의 모습으로 말끔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추위 속에서 더욱 맛을 내던 소련제 보트카에 북한 인삼주, 박하술에 생강주, 생맥주…먹다 남긴 닭고기, 돼지고기가 다시 눈앞에 삼삼했다. 『남조선 해방을 위해 남조선 수괴를 처단하는 막중임무』를 강조하던 124군 부대장의 말이 청년 엘리트 전사 김신조의 폐부에 아직도 비수처럼 꽂혀있었다. 그 부대장은 불과 1년반 전 남파돼 경기도 송추에서 고정간첩과 접선하려다 군경 포위망에 걸려 도주, 복부에 총상을 입고 5일만에 임진강을 건너 귀환한 경력을 가진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다음날 새벽, 한때 개성경찰서장의 관저이기도 했던 남파공작원 초대소에 도착했다. 대원들이 남파 직전 잠시 대기하거나 귀환한 다음 하루를 자고 가는 곳이었다. 인삼차를 마시며 40분 휴식을 취한 후 바로 남으로 향했다. 북방 분계선 초소에 도착하자 초병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이 「특수전」의 사나이들을 바라보았다. 부대장의 제의로 즉석에서 혈서를 썼다. 『수령동지의 명령대로 임무수행할 것을 맹세함』 『임무를 확인한다. 1조는 청와대 본청사 2층, 2조는 1층, 3조 경호실, 4조 비서실 공격. 5조는 정문 보초 제거 및 청와대 차량 탈취 후 탈주 준비』 김신조는 2조의 조장이었다. 『돌아올 때 초소와의 문답 암호는 611이다』 살아 돌아왔을 때나 필요하게 될 것이지만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그 암호를 뇌리 깊이 각인해 두었다. 살아 금의환향할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그러나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부모 형제라도 내몫의 행복까지 누릴 수는 있겠지. 복잡한 상념이 빠르게 머리 를 스쳤다. 부대장의 한마디를 뒤로 하고 북방 분계선을 넘은 것이 밤 9시. 비무장지대 안으로 난 「안전통로」를 따라 전투대열을 갖추고 침투를 개시했다. 1조 소속 전방 척후 2명이 길을 개척하면 후방 척후는 눈위로 난 발자국을 솔가지로 지우며 뒷걸음으로 진행했다. 예상 침투로는 한국군 25사단과 미군 2사단 관할지의 경계선. 사각지대가 되기 십상인 부대간 경계지역으로 빠진다는 침투전술의 기본을 따른 것이다. 경계선을 밟되 3백m 쯤 미군 지역으로 들어선다는 전략이었다.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허술한 당시의 휴전선 방어망 이었지만 미군의 경계는 더욱 빈 곳이 많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별어려움 없이 남방 분계선에 다다랐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철조망을 헝겊으로 두르고 천천히 잘라냈다. 이곳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경계가 일렬로 펼쳐지는 철책선을 통과한다면 앞으로 듬성듬성 펼쳐질 초소와 검문소를 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다. 중요한 것은 대원들이 감기나 복통에 걸리는 일 없이 계획된 시간에 계획된 장소에 정확히 들어서는 일이다. 날이 밝기 전, 늦어도 새벽 5시 이전에 철책을 2km 정도 벗어나 숙영지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낮 시간은 숨어 휴식을 취하고 야간 이동에 대비하는 것이다. 대원 중 하나라도 기침이나 설사를 할 정도로 몸상태가 나빠지면 작전은 연기된다. 임진강이 바라다 보이는 야트막한 산중턱에 자리를 잡는데 성공했다. 보초 2명을 교대로 세우며 휴식을 취했다. 잠들면 얼어죽기 십상이다. 서로를 규칙적으로 흔들며 잠깐씩 눈을 붙였다. 밤에 건널 임진강의 동태를 쌍안경으로 살폈다. 맞은편 석포리의 강언덕, 도하 예정지점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사위가 충분이 어두워진 틈을 타 강변까지 난 조그만 내를 따라 내려선 뒤 얼어붙어 눈이 쌓인 강을 건넜다. 머리에는 위장용 흰 붕대를 감고 몸에는 흰 천을 둘러썼다. 앉은 걸음으로 키를 한껏 낮추며 강을 건넜다. 충분히 결빙됐다고 본 얼음은 순간순간 무게를 받아 쩍쩍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어려운 관문은 거의 통과했다. 대원들은 5m 간격을 유지하며 인적 없는 밤 들판을 냅다 달렸다. 마을 하나를 우회하면서 밤 발자국에 놀란 동네 개들이 한차례 짖어댔을 뿐 별다른 소란 없이 파평산을 바라보는 들판까지 진출했다. 파평산을 거쳐 법원리 뒤 삼봉산에 올라 2차 숙영을 했다. 이들이 산악 구릉지를 이동하는 모습은 「행군」이 아니라 「질주」였다. 생각보다 루트가 수월하게 뚫려 방심한 탓일까. 다음날 오전 우연찮게 문제가 발생했다. 오전 10시경 야간 루트를 미리 살피러 나갔던 정찰조가 민간인 나무꾼과 맞닥뜨린 것이다. 우씨 성을 가진, 대원들보다 나이가 어린 형제 나무꾼이었다. 이미 한국군 군복으로 위장해 한국군 행세를 했지만 상대는 사태를 대충 짐작하는 눈치였다. 얼르기도 하고 협박도 했지만 처리가 모호했다. 당초 훈련받은 방침대로라면 이런 경우는 즉시 처단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철칙이었다. 그러나 대원들 사이에는 돌려보내자는 의견이 만만찮게 제기됐다. 번거롭고 불필요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이유였다. 간단히 말해 사체를 묻기 위해 꽁꽁 얼어붙은 흙구덩이를 파내는 작업을 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조장과 대위 계급장을 단 지휘관은 있었지만 전체를 통할하는 일사분란한 피라미드 조직이 아니라 각기 훈련 수칙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수평적 편제가 치명적 결함을 노출한 것이다. 대위와 중위 하나씩을 제외하고는 계급도 모두 똑 같아 지휘계통이 일사분란하지 못했다. 예상했던 상황에는 일기당천의 힘을 발휘하는 용사들이었으나 돌발상황 대처 능력에는 문제가 있는 조직이었음이 차차 드러났다. 야간 이동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풀어주자는 방침이 최종 결정됐다. 나무꾼 형제들은 간발의 차이로 사지를 벗어났지만 대원들은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다. 이는 곧 그들의 생과 사를 가르는 계기가 됐다. 전 일정을 통해 세차례 빚어진 작전 미스 중 첫 과오였다. 처리방침을 무선으로 북에다 조회했으나 공교롭게도 암호가 해독되지 않았다. 무선 교신에 뒤이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통해 아리따운 목소리의 여자 방송원의 목소리가 또박또박 숫자를 토해냈지만 어찌된 일인지 소지하고 있던 암호문으로는 도저히 풀어지지 않았다. 나중에 수사기관에서 해독해준 바에 따르면 암호전문은 「원대복귀」였다. 북으로 되돌아가야 했을 31명의 대원들은 계속 남으로 전속질주했다. 발길을 재촉해 노고산을 넘으니 송추골짜기에는 벌써 군인들이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설마했던 신고가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진관사 쪽 계곡을 따라 북한산 자락을 타고 비봉에 도착한 것이 20일 새벽 5시. 영하 20도의 강추위였다. 체력소모가 예상보다 훨씬 심했다. 20일 낮에는 숨어있다가 마지막 코스를 향한 행군을 밤 8시부터 다시 개시했다. 계획대로라면 새벽까지 청와대 뒤 북악산에 도착하게 된다. 그날 밤이 거사 날이다. 지금의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 부근이 최종 숙영장소로 잡혀 있었다. 신고가 이미 들어갔건, 군경이 방어망을 구축했건 간에 최종 숙영지까지만 정한 시간에 확보하면 그날 밤 북악산을 통해 청와대 뒤통수를 치고 내려가는 루트는 별저항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다음 날은 일요일. 대통령은 이날 밤만은 예외없이 숙소에 있다는 첩보에 따라 거사일을 잡은 터였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또 한번 일어났다. 밤새 눈덮인 바위를 타고 넘는 악전고투 끝에 새벽녘 희뿌옇게 시야에 들어온 자리는 북악산이 아니라 승가사를 바라보는 지점의 북한산 자락이었다. 체력이 소모된 상태에서 눈길에 수도 없이 미끄러져 내리면서 밤길에 방향착오를 일으켜 다람쥐 쳇바퀴 돌기에 그쳐버린 것이었다.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북악산은 아직 멀었는데 날은 잔인하게 밝아왔다. 헬기가 산 주위를 분주히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그 소음이 마치 간을 도려내는 듯했다. 이 상태로는 일요일 밤 안에 도저히 청와대에 닿을 수 없다. 루트를 변경했다. 산행을 포기하고 어두워지자 8시경 산을 내려섰다. 배낭은 산에 묻고 사복으로 일제히 갈아입었다. 기관단총과 권총에 탄환 3백50발 수류탄 단도를 몸에 차고 바바리를 덧입었다. 바로 세검정 길에 닿았다. 버스 정류장에는 종점인지 버스 3대가 한가롭게 서있고 운전사와 차장 아가씨들이 잡담을 나누는 게 보였다. 원 계획대로라면 밤 10시 30분까지 청와대를 습격한 뒤 청와대 차량으로 북으로 전속질주, 자유의 다리나 남파루트를 통해 야음을 타고 귀환하는 것이었다.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 정문으로 바로 돌진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도보로 걸어가자는 안이 최종적으로 채택됐다. 예정 프로그램이 허물어진 상태에서 일으킨 세번째 판단착 오였다. 어둑한 야간 도로 양편에 종대로 갈라서서 행진했다. 상명여대 입구 삼거리 검문소를 별다른 제지없이 통과, 터널이 생기기 전의 자하문고개를 향해 비포장 자갈길을 걸어 올라갔다. 고개를 넘어설 무렵 순경 2명이 처음으로 검문을 했다. 『누구냐』 『방첩대다』 『신분증을 보여라』 『부대에 두고 나와 없다』 옥신각신하며 계속 걸음을 재촉하는 대원들 뒤를 순경 하나가 뒤따라가는 형국이 됐다. 곧 청운중학교 조금 못미처 내리막에서 지프 하나가 길을 막아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종로경찰서장』이라며 대원들의 신분을 추궁했다. 『귀대중인 방첩대』라고 하자 『나를 모르는 방첩대원이 어디있느냐』고 심문하듯 말했다. 누군가가 서장에게 총을 발사했고 대원들은 길 양쪽으로 흩어졌다. 김신조는 언덕바지 숲 사이로 뛰어내려갔다. 경복고 후문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인왕산으로 튀어올랐다. 가는 데까지 북으로 튀자는 생각이었다 . 다행히 아직 총은 한 발도 쏘지 않았다. 붙잡히더라도 살인누명은 쓰지 않는다. 만약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모두 산에다 버리고 위협용 수류탄 하나만 남겨 간편한 몸으로 뛰었다. 인왕산 능선에서 바라보니 시내전역이 수경사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으로 환했다. 당시 청와대 경비를 맡았던 수경사 예하 30대대의 지휘관은 67년부터 全斗煥(전두환)대대장이었다. 그를 따라 도주하던 대원 2명이 홍제동 길에서 처참하게 사살되는 광경을 코 앞에서 목격한 뒤였다. 그보다 나이가 어린 그 두 대원은 노련한 군경력을 갖고 있는 그를 본능적으로 의지하려 했던 것이다. 적진 속에서, 특히 시가지 전투에서는 여럿이 몰려다니는 것이 위험하다는 상식에도 불구하고 『흩어져 뛰라』는 그의 말도 아랑곳 않은 채 따라붙었다. 홍제동 쪽으로 접어드는 큰 길이 앞에 열렸다. 길 건너에는 수색대가 숨어있을 것 같은 느낌이 왔다. 그러나 그 길을 건너야만 진로가 열리게 돼있는 상황이었다. 좌우로 나눠 건너뛰라고 지시했다. 길로 나서는 순간 집중 사격이 쏟아졌고 대원 둘은 그 자리에서 거꾸러졌다. 인왕산 서북쪽 8부 능선을 타고 올랐다. 새벽 3시. 차가운 밤 하얀 초생달이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흥건하게 젖은 땀이 채 마를 새도 없이 연신 새로운 땀이 솟아올랐다. 일이 성사됐다면 지금쯤 임진강을 넘어섰을 시간이다. 틀린 것 같다. 자폭할까, 항복할까.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3년 넘도록 한번도 보지 못한 그리움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문득 눈앞이 아득해지며 허깨비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위 뒤편에 잠복하고 있던 군인과 마주쳤다. 수류탄을 들고 잠시 대치했다. 찰나의 시간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듯 느껴졌다. 투항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순간적인 결정이었다. 뭐라고 외치는 상대의 말을 귓전으로 스치며 맥없이 수류탄을 땅에다 떨궜다. 풀린 혁대로 손을 묶인 채 인근 홍은동 파출소로 연행됐다. 머리 속이 멍해올 뿐, 마음도 몸도 무감각했다. 파출소 안이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이 쏟아져왔다.
한참 후 수사를 받으면서 자신이 마지막 들고 있던 수류탄이 작동하지 않는 불발탄이었음을 알게 됐다. 자폭하려 했어도 죽지 못할 운명이었던 셈이다. 그동안의 신문 스크랩을 얼핏 훑어 보았다. 접전 이후 궁금했던 쌍방의 희생자는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1월 21일 밤 10시경 서울 종로구 청운동 서대문구 홍제동 등에 31명의 무장공비가 침입, 휴전 이후 북괴는 가장 큰 규모로 도발행위를 자행했다. 이들 공비들은 19일 오후 경기도 파주군 삼봉산에 나타났다가 민간인들에게 발견된 자들로 청운동 어귀까지 침입했다가 비상망에 걸렸는데 이 자리에서 공비들을 검문하던 崔圭植(최규식) 종로경찰 서장이 총격을 받고 순직했으며 마침 현장을 지나던 시내버스 한 대에 수류탄을 던져 승객들을 부상시키고 홍제동 민가쪽으로 달아난 일부 공비들은 집주인을 사살하는등 만행을 자행, 민간인 6명이 희생되었다. 이튿날인 22일 군 수뇌부는 합참에 대간첩작전지휘소를 설치하고 서부전선의 3개사단 32전투단 미2사단등을 투입, 합동수색작전을 벌이고 공군도 헬기등을 동원했다. 합참 당국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서울에 침투한 이들 무장공비는 전원이 인민군 장교로 그들의 임무는 청와대 공격이었다. 노고산 지역 작전을 진두지휘하던 15연대장 李益秀(이익수)대령을 포함, 장교 5명과 사병 19명이 전사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뚜렷했다. 기자회견과 현장검증 때까지도 남파당시 올백으로 빗어넘겼던 포마드 바른 머리칼을 가지런히 간직하고 있던 김신조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동료들의 주검을 하나씩 확인했다. 홍제동 길 눈 앞에서 사살됐던 두 후배 대원은 눈을 부릅뜬 채로 죽어있었다. 그 둘은 오랫동안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임진강까지 북상, 강 위를 흐르는 얼음을 타고 손으로 노를 저어 북으로 헤쳐나가다 사살된 대원도 있었다. 노고산에서 가장 많은 11명이 사살됐다. 쓰러지면서 수류탄 안전핀을 문 채 엎드려 수색대원을 폭사케 한 대원도 있었다. 대부분 교육받은 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 퇴로를 삼은 흔적이 역력했다. 당시 군당국은 「생포 1명, 나머지 전원 사살」로 발표했지만 실은 1명이 북으로 탈주해갔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알게 됐다. 그 대원은 이후 남파 특수부대의 지휘관이 되어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는 말을 한 귀순자를 통해 듣게 됐다. 김신조는 지금까지 남한 생활에서 몇가지 크게 섭섭한 점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생포」라는 당국의 발표다. 도주중 붙잡힌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교전 의사가 없었고 자폭용 수류탄을 버리고 자의로 투항했다는 사실이 감춰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그때까지 단 한번도 무기를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 이는 현장검증에서 그가 버린 탄창이 한발도 없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고 총신에서도 전혀 발사 흔적이 나타나지 않은 데서도 확인된 사실이었다. 당시의 수사기록도 분명히 그렇게 남아있지만 대국민 홍보과정에서만 「생포」로 발표된 것이라는 것. 남들에게는 별차이가 아닐지 모르지만 본인에게는 하늘과 땅만큼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 생포와 투항이다. 희생자들에 대해 그가 직접 가해 행위를 한 적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유가족들이 일말의 의혹도 갖지말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사실관계를 떠나서 살아남았다는 이유 하나로 그에게 쏟아졌던 유가족들의 원망이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비상 경계령이 이미 내려진 상황에 야간 청와대 뒷길을 시내버스가 헤트라이트를 켜고 한가롭게 운행하도록 방치한 당국의 무신경한 조치,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 신고를 일찌감치 접수하고서도 소수 경찰병력으로 청와대 뒷 길목을 차단하려 했던 일, 대로변 민가에 대한 안전 조치가 전혀 취해지지 않았던 일…휴전선 자체가 마음만 먹으면 여반장으로 뚫리던 당시의 방위망 수준으로 미루어보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치안수준이었다. 그처럼 허술한 상태에서 희생자가 더 많이 생겨났던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책임은 무장공비, 특히 살아남은 김신조에게 쏟아부어졌다. 그가 마음 속에 담아두고만 있던 몇몇 생각을 조금씩 말하기 시작한 것은 94년 자신의 짧은 자서전격인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동아출판사)를 출간하면서부터다. 관계당국의 논란을 거쳐 어렵게 결정된 이 책 출간은 문민시대 하에서 그가 얻은 가장 큰 소득 중 하나다. 어쨌거나 그는 살아남기를 선택했다. 그때부터 그의 목숨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26세, 아직 세상의 여러 가지를 채 경험하지도 못한 청춘은 이날부로 지금까지의 전생을 한칼에 끊어버린 채 덤으로 받은 새 인생을 살도록 운명지워졌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어느것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수사가 시작됐다. 가혹행위는 없었고 스스로 과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신사적인 대접을 받았다. 오히려 괴로움은 과거를 회상하는 진술을 하면서 시작됐다. 자신이 완전히 뿌리를 상실했다는 공포감, 그리고 북에 남겨진 가족들이 당할 고초가 현실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 동아닷컴에서 펌- 또한 2002년 "나의 슬픈역사를 말한다" 책을 읽음 |
첫댓글 시골에 어느 공무원인지 모르나, 지넘들 멋대로 올리는 바람에 이 모양입니다. 호적이 지넘들 멋대로입니다.
잘읽었습니다-좋은 나날들이 우리들에 다가올 희망이요 기대입니다.이제 초심으로 시작합시다
잘 읽었습니다.
태사공님 무척 궁금했는데 드디어 구치소에서 나온모양이네요. 오래간만을 올린글을 보니 무척이나 반갑네요.
가감 없이 쓰여진 내용 으로 이해 됩니다 잘보았 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