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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객들을 향한 장난끼
스릴러를 볼 때 우리는 영화의 미장센을 세밀하게 기억한다. 장면과 상황, 그리고 소품들까지 하나하나 기억해 가면서 스릴러가 가지고 있는 수수께끼의 단서로 활용한다. 가령 누군가가 걸어가는 장면에서, 갑작스레 그 사람의 발치로 화면이 클로즈업 되면서 그 근처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가 앵글에 유난히 튀어 보인다면, 관객들은 그 돌멩이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사건에 관계되어 있거나 무언가를 상징하는 암시라고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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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은 그렇게 영화의 미장센 여기저기서 흩어진 갈래 조각들을 끌어모으면서, 결말 부에서 수수께끼의 해설이 나오기 전까지 나름의 답들을 추측해 본다. 이것이 바로 관객들이 스릴러를 보는 방법이다. 그런데 여기서 감독이 이 미장센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면 어떻겠는가? 물론 감독은 영화 속의 단서들을 '그대로 노출하지는 않는다.' 그 안에 특별한 다른 장치를 넣어 단서들이 다른 방향으로 추측될 수 있도록 조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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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필자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미장센'으로 보여주는 '단서'자체가 아무런 의미 없는 것이라면 어떻겠느냐는 뜻이다. 살인 사건에 발견된 증거가 그 전의 장면에서 어떻게 처리 되었는지 보여주는 장면, 주요한 용의자가 '살인 도구'로 추정되는 물건을 들고 다니는 장면들이 영화에서 전혀 '쓸데없는 것'이라면 어떻겠는가? 아마 관객들은 허탈해 하거나, 과격한 경우에는 화를 내면서 '이상한 영화'라고 말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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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는 '스릴러'로써 '스릴러를 보는 방법'에 위배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로 하여 관객의 사고 과정 자체를 뒤틀어버렸고, 뒤틀린 사고 과정으로는 결코 그 영화가 나온 수수께끼의 '답'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하겠다. 그렇다면 정말 관객의 사고 과정을 뒤틀어 버린 감독은 영화를 '잘못'만든 걸까?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최근에 개봉한 '용의자 X의 헌신'이라는 영화 속의 한 대사로 대신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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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 문제인 듯 보이지만 실은 함수 문제였다." 애석하게도 관객은 여지껏 양산되어온 수많은 '스릴러 물'의 '공식'에 너무나 매몰되어 있다. 미장센을 통해 주어지는 '단서'들에 너무 의미를 둔다든지, 결말 부에는 반드시 관객이 납득할 수는 있으나 생각할 수 없었던 '반전'이 있어야 한다든지. 그리고 이러한 '단서'와 '반전'만이 스릴러에서 긴장감을 만들어 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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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 '마더’에서는 미장센에서 주는 '단서'라는 공식을 철저히 무시한다. 미장센 속에 클로즈업 되는 소품들이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면들은 마치 '단서'인양 연출되었지만, 결국 나중에 가서 보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장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관객은 속았다. 그것도 장면이 보여주는 것들이 '무언가 단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속았다. 때문에, 관객은 이런 식의 '속임수'를 납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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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결국 영화 '마더'는 '재미없는 스릴러'가 되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관객들의 저런 입장에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너무 커다란 파격은 그것을 평가하는 가치마저 붕괴하기 때문이다.'단서'들이 '단서'로써 기능하지 못하는 영화는 구성 자체가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영화 '마더'가 구성의 붕괴가 이루어질 정도로 제멋대로인 영화는 아니라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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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전개상의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단서의 무의미화'라는 연출을 너무 많이 남발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진짜 단서를 포함한 '미장센'과 적절히 뒤섞이는 바람에 더 결정적인 '속임수'로써 작용하지 않았는가? 때문에, 나는 이것이 봉준호 감독의 '장난 끼'라고 생각한다. 스릴러를 보는 공식에 매몰되어 있는 관객들에 던져주는 일명 '봉준호식 장난질'이라고 하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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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장난은 충분히 성공적이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 필자조차도 봉준호 감독이 던져주는 '가짜 단서 미장센'을 떡밥 물 듯이 덥석 물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같은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분노하는 관객들에게 이렇게 조언하고 싶다. "속았기 때문에 재미있었지 않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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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원이 다른 긴장감
스릴러가 재미있으려면 긴장감이 있어야 한다. 대개 스릴러에서 긴장감을 주관하는 곳은 '사건'이다. 사건 자체가 불안함을 안고 있고, 그리고 그 속의 상황과 인물들의 행동이 불안함에 영향을 받을 때야말로 스릴러는 긴장감을 얻게 된다. 이렇게 형성된 긴장감은 영화가 끝나기 전까지 완급이 잘 조율된 채 진행되어야 한다. 아마 스릴러의 전체적 '즐거움'을 주도하는 요소는 바로 이 긴장감과 그것을 조율하는 균형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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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화 마더는 사건 자체에 긴장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긴장감이 아예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범인을 찾으려는 행동에는 물론 긴장감이 사려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건 자체가 가지는 긴장감 자체의 강도가 너무나 빈약하다는 것이다. 시골 동네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그 시골 동네의 어떤 바보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었고, 그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을 상대로 자식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조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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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면에는 어떤 다른 '거대한 음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권력자에 의한 횡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살인 사건을 촉매로 그 마을, 혹은 개인에게 숨겨져 있던 '광기'의 마각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다. 단지 시골 마을에 한 건의 살인 사건이 일어났고, 형사들의 졸속 처리로 마을의 한 바보가 용의자로 체포되었을 뿐이며, 그 어머니는 아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는 것, 그것이 '사건'의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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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구성만 바라본다면 이건 '스릴러'가 아니라 '인권 수호'를 위한 '휴머니즘 영화’ 여야 한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영화 '마더'는 '스릴러'다. 때문에 이 영화는 매우 어색해야 한다. 마치 '숀 펜' 대신 '안소니홉킨스'가 나오는 '아이 엠 샘'을 상상할 때 느끼는 어색함과 같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마더'는 '스릴러'가 될 수밖에 없다.
영화 '마더'는 '스릴러'가 가질 수 있는 충분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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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그 긴장감의 기원이 '사건'이 아닌 '관계'에 있을 뿐이다. 영화 내의 사건은 단순하다. 그러나 영화 속의 사건을 이루어 나가는 '인물'은 매우 불안하다. 주인공인 '엄마'는 매우 불안한 인물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사건을 파고들어가는 내내 주인공의 '행동'과 '방식'은 어설프다. 사건에 파고들기 위해 자행되는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사고 과정과 행동에서 오는 '외적 불안감'과, '아들'에 대한 비정상적일 정도의 집착이 불러오는 '심리적인 불안감’은 관객으로 하여금 '긴장'을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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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은 그러한 인물이 영화 속에서의 '관계'를 통해 더욱 불안을 증폭시킨다. 근거 없는 추론으로 타인을 의심하고 그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행동들'을 보며 관객들은 불안함을 떨치지 못한다. 실패할 것이 분명하거나 실패할 확률이 높은 행동을 보면서 관객은'불안'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감독은 이러한 관계들을 무 자르듯 단칼에 잘라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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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불안감으로 형성된 관계를 '끊어질 듯 끊어질 듯 계속 이어주는 연출'을 함으로인해, '사건'에서 결핍되었던 '긴장감'을 '인물'과 '관계'를 통해 보충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영화 자체는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사건의 전개를 조율하고 있다. 이러한 다른 기원의 긴장감은 여타의 스릴러와는 다른 묘한 느낌을 선사한다. 여지껏 사건 자체에만 함몰되어 있던 스릴러의 시선을 '인물'과 '관계'로 옮겨오면서, 관객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공포'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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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중심의 스릴러를 보는 관객은 긴장은 하지만, 실감하지는 않는다. 영화 속의 사건은 그야말로 별세상 이야기이고, 그러한 거대한 음모와 광기 같은 것들은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러나 영화
'마더'에서 '인물'이 가지고 있는 현실성, 그 현실성 속에 내재된 '보통 사람들이 가진 불안함',그러한 불안함을 바탕으로 맺어가는 인간관계는 충분히 관객의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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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것이 '살인 사건'이라는 약간의 환상성과 결합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불안'과 '공포'를 연상시킬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마련되는 것이다. 긴장감의 기원이 사건을 벗어나 인물과 관계에서 비롯한 영화 '마더'는 기존의 스릴러와는 다른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3. 약자들의 아귀다툼
앞서 이야기한 '인물'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다. 앞의 이야기에서 영화 '마더'는 '현실적인 공포'에 눈을 뜨게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적인 공포'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조건으로 '인물의 불안함'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고도 말했다. 영화 '마더'의 인물들이 '현실적인 공포'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그 근본에는 그들의 '신분'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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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인물들은 모두 다 서민이다.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약자이다. 어디 어디의 높으신 권력가도 아니고, 어떤 특수한 능력 가진 '비범한 존재'도 아니다. 빚더미에 얹혀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 가는 시골 약재상, 그녀의 바보 아들, 바보의 친구인 동네 양아치를 비롯해 영화 속 인물들 모두 누구 하나 별 볼 일 없는 존재이다. 약자들이 모인 곳, 그곳에서 어느 한 약자가 죽었다. 그리고 다른 한 약자에게 그 죄를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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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약자는 그 약자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날뛰게 된다. 그 과정에서 약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아비규환의 장면을 연출한다. 그것은 강자가 힘으로 눌러 빼앗는 것이 아니다. 대항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존재에게 권리를 강탈당한 채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다. 그 안에 강자는 없다. 서로가 약자이며 그러한 약자들의 세상에서 서로 물고 뜯고 할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약자들은 더 약한 자에게 자신의 부담을 떠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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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최후의 승자는 있는가? 만약 최후의 승자가 있다면 그는 결국 약자를 벗어나게 되는가? 애석하게도 승자는 없다. 그들은 결국 약자를 짓밟아 '자신의 부담'을 전가한 것에 지나지않는다. 영화 속에서 짓밟힌 약자는 몰락할 뿐이고 짓밟은 약자는 조금 더 약자로 남아 있을 시간이 연장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영화는 상영되는 내내 끊임없이 약자들의 아귀다툼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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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에 의한 구조의 불평등 따위가 아닌, 그저 약자들 스스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먹히는 모습을 말이다. 말하자면 사회의 부조리나 여타 모습들을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있는 것이다. 때문에 영화는 묘하게 현실적이다. '현실성'만을 놓고 보자면 사회 문제를 조명하고 그것을 고발하는 영화보다도 더 높은 층위에 있다. 때문에, 관객에게 다가오는 공포도 그 차원을 달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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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권력에 의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온몸이 토막이나 죽는다거나 하는 상상에서 오는 공포가 아니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 나는 모습들, 조금만 고개를 돌려보면 일어나는 일들이 '세상살이'라는 모습으로 포장되어 다가오는 공포다. 언제라도 경험할 수 있고, 이미 경험했을 수도 있는 공포가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던져 주고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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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사실적'이기만 해서는 그 영화는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다고. 그렇기에 영화 '마더'가 아무리 약자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별 의미가 없는 영화라고 말이다. 필자는 이러한 종류의 의견에 절반쯤 동의하고 절반쯤 반대한다. 왜냐하면 영화가 반드시 무언가 '고민할 만한 문제'를 던져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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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이야기를 영상화 한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우선 '즐거움'을 선사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좀 더 오래 회자 되기 위해서는 즐거움을 바탕으로 사람들에게 '생각해 볼 문제'를 남겨 놓으면 더 좋을 것이다. 우선 영화 '마더'는 충분한 즐거움을 주었다. 때문에 굳이 그 이상의 뭔가 심오한 메시지를 '필수적'으로 넣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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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 '마더'는 관객들에게 충분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는가 추측해 본다. 필자가 본 영화 '마더'는 단순히 약자들의 아귀다툼만을 그려넣은 것이 아니었다. 사진가는 어떤 한 '순간'을 포착한다. 그러나 사진가가 사진을 찍는 그 '순간'에는 사진가의 의도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반영된 의도가 명확하고 타당할수록 높은 평가를 받는 사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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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 '마더'에서 그려내는 약자들의 아귀다툼이 바로 이러한 '사진가가 찍은 사진'과 같지 않은가 생각한다. 전쟁터의 사진을 보며 우리가 '전쟁의 참혹함'을 느낄 수 있듯이, 약자들의 아귀다툼을 보면서'사회 부조리 그
이전의 문제'에 대해서 반성해 보지 않을까? 영화는 지금 관객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약자들은 지금, 자신이 약자인 이유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는 약자라는 자각조차 하고 있지 않다."
2023.7.19.wed.정리: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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