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말이 옳은 것인가?
죽은 사람은 있으나 죽인 사람은 누구?
서로의 진술이 엇갈리는 중에 과연 심판은 누구의 몫인가를 묻고 있는 영화이다.
재판정에서 피살자의 딸은 말한다. " 이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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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인정한 피의자는 자꾸 진술을 번복하며 변호사를 혼란에 빠트린댜.
돈을 훔치기 위해, 해고에 앙심을 품어서, 그러다가 피살자 부인이 청부살인을 의뢰했기에
그랬다고 했다가 결국 자기는 살인 현장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살인을 인정하면 사형만을 면하게 해주겠다는 검사와 변호사의 권유를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하는데
재판이 진행되고 변호사는 의뢰인의 주위를 탐문하는데 그 과정에서
하나둘 새롭게 드러나는 사실이 더욱 혼선을 가중시킨다.
피살자와 딸과의 관계와 그 사이에 끼인 부인이자 엄마의 역할
피살자의 딸과 살인피의자와의 새롭게 드러난 관계
피의자와 딸과의 관계가 서로 연관성을 보이는데
피살자의 딸은 피의자의 구형량을 줄이기 위해 법정 증언을 하겠다고 하는데
결국 자신의 혐의를 모두 부정하는 피의자에 진술번복으로 증언은 무산되고
결국 피의자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렇지만 가중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피의자는 왜 진술을 번복했는가?
진정 그가 범인이 아니란 말인가?
살인자는 따로 있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는 왜 진술을 번복했는가?
피의자의 딸이 간직한 비밀을 보호하기 위해서
선고가 난 이후 교도소를 다시 찾은 변호사화 살인자와의 대화는 점점 더 사건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을 더할 뿐 아무 것도 해소시키지는 못한다.
이 때의 장면 교도소 면회실 유리벽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얼굴은 서로 겹쳐 보이는데
진실이 무엇인지 미궁에 빠진 상황을 절묘하게 드러내는 명장면이다.
오보래핑되는 장면은
누가 교도소안에 있는 사람인가? 어디가 교도소 안이고 밖인지를 불분명하게 한다.
두 번의 살인은 있었지만 세 번째 살인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법정에서 내린 사형선고는 분명 살인이다.
이것이 세 번째 살인인가?
아니면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 사회가 세 번째 살인자인가?
변호사는 마지막 장면에서 하늘을 바라본다.
하늘은 청정하나 하늘을 가르는 어지러운 전깃줄은 난마처럼 얽혀 청정한 하늘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그가 서 있는 자리는 네거리의 한 중앙
십자가 처럼 보이는 교차로의 중앙에 서 있는 변호사
갈피를 잡지 못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기도 하고
순간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는 현대인을 상징하기도 한다.
아 불에 타 죽은 피살자가 남긴 흔적 또한 십자가.
심판은 누구의 몫인가를 묻는 영화의 엔딩장면 답다.
장면 전환이 거의 없는 아주 느린 영화.
추위에 떤 몸이 따스한 극장에서 아주 느린 영화를 보면 자연스런 반응처럼
눈꺼풀이 내리누른다. '
천근만근의 무게로 떨어지는 눈꺼플
내려오면 내려오는대로 즐기면서 보면 되는 영화.
첫댓글 십자가 중앙에 서 있는 변호사, 그를 내려다 보는 관객의 눈. 영화는 우리게 답을 묻고 있군요.
"당신은 알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