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세기》와 행촌 이암
해머슴 박선용(소설가·프로그라머)
“나라를 바로 세우는 길에 선비의 기세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역사를 정확히
아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무슨 까닭일까? 역사가 밝혀지지 않으면 선비의 기세가 펼쳐질 수
없고 선비의 기세가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의 뿌리가 흔들리고 다스림이 법도에 맞지 않는다. 무릇 올바른
역사학은 나쁜 것은 나쁘다 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하며 사람을 저울질하고 세상을 이야기하니, 이 모든
것이 세상에 표준이 되는 것이다.”
이 글은 행촌杏村 이암李嵒 선생이 《단군세기》의 머릿글에 쓴 글이다. 진서냐
위서냐 하는 진부한 논쟁에 시달리고 있는 《한단고기》 중에 실린 글이라 그분의 진짜 글인지부터 의심해보아야 하겠지만, 작은 의심에 얽매여 큰 교훈을 그르치기 전에 음미해보고 싶은 마음이다.
선비, 우리말로 쇤비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독자라면 굳이 그 말 대신 현대적 용어로 지성인, 혹은 지식인으로 바꾸어도 될 것이지만, 주목해보고자 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학은 나쁜 것은 나쁘다 하고
좋은 것은 좋다고 하며 사람을 저울질하고 세상을 이야기하니, 이 모든 것이 세상에 표준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신 마지막 문장이다.
과연 오늘의 역사학이 세상의 잣대가 되는지 의심스럽지만 이 글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기사가 실린 것을 보았다. 바로 자아와 주류사학자들이 13년
만에 다시 만나 고대사의 가장 첨예한 쟁점인 단군조선 등의 상고사를 주제로 지난 10월 2일 세종문화회관 콘퍼런스 홀에서 학술토론회를 열었다는 기사였다. 87년
공동토론회 때 얼굴을 붉히고 자리를 박차버린 지 13년만에 열린 행사였지만 토의 중간에 서로 고함치고
삿대질하는 모습에서 넘어야 할 벽은 아직도 쉽지 않아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한단고기》의 내용을 증명하기 위해 천문현상을 슈퍼컴퓨터로 역추적해 진서의 가능성을
높였던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표준연구원 천문대의 라대일 박사 연구 결과도 있고 보면 진위서 시비의 논의에서 벗어날 것도 같지만, 현실 앞에 놓인 기존 역사학계의 경직성은 그리 녹녹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진위서의 논의보다 《한단고기》의 한편을 이루는 《단군세기》의 저자인-혹은 저자라고 주장되는- 행촌 이암 선생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에 그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행촌 이암 선생이 《단군세기》를 저술했는지에 대한 정사측의 자료는 사실 없다.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문장가로서 이름 높았던 이암 선생은 《고려사》의 열전에 실릴 정도도로 그 충의와 문장력이
출중했으며, 아울러 민족주의자로 숭상받기도 했다. 실제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능 때 행촌 선생은 나약한 문신들을 꾸짖고 스스로 서북도원수가 되어 난에 뛰어들었으며,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전투에 참가해 셋째 아들 이음李蔭은 안주 전투에서 전사까지 하는 등 애국적 가풍을 보였다.
1361년 홍건적 10만이 침략해오자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 가는 중 행촌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의병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이에 호종 공신 1등으로
책봉되었다. 홍건적 토벌에 크게 공을 세운 정세운, 김득배, 이방실 등이 모함으로 죽을 당하자 얼마 뒤 수문하시중을 사임하고 강화도로 은퇴했다가 1364년 5월 5일 68세로 병사한다.
《한단고기》의 전파과정에 고성 이씨 가문의 역할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인다. 행촌 선생의 고손자인 이맥李陌은 <태백일사>를 지었으며 구한말 독립운동가였던 이기李沂 선생도 역시 이 집안 출신이었다. 대일항쟁기의 이상용, 해방 이후의 이유립 등 유학과 역사학에 조예가
깊은 애국지사들이 또한 이 집안에서 나왔다.
이암이란 인물을 민족주의자로만 본다면 ‘위서
저자’라는 색안경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격변의 고려 말에 주체적인 시각과 의식을 지닌 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런 성격은 정사의
기록에서도 쉽게 엿볼 수 있는데, 그는 송설체의 달인이었고, 쌍계사를
중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그가 쓴 문수사장경비의 비문은 조맹부를 능가한다는 평을 듣는 서예가이기도
했다. 또한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 모견도母犬圖에서 볼 수
있듯이 뛰어난 화가이기도 했다.

행촌 이암 선생의 모견도
그리고 17세기 문과에 급제, 찬성사·좌정승·수문하시중을 지낸 정치가이기도 했으며 원나라에서 《농상집요》農桑輯要를 구해다가 보급시켜 고려의
농업기술 발달에 공헌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업적을 남긴 고려 말의 대표적 지성인이었다.
그러나 《고려사》는 정치사적 측면만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의 행적 중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특히 《단군세기》를 중심으로 란 말년의 행적이 그러하다.

경남 고성군에 위치한 갈천 서원, 이암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1713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암, 어득강, 노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경남 문화재자료 제36호
연보에는 1363년(공민왕 12년) 10월
3일 <단군세기>를
완설했다고 한다. 연보를 보면 이암 선생이 병사하기 1년
전의 일인데, 강화도로 은퇴를 하고 그가 죽을 때까지의 기록은 정사에는 없지만 그 몇 년간의 행적이
‘<단군세기>’의 저술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에 《한단고기》에 실린 내용이 그의 인생 과정과 비교해서 과연 납득할만한 내용인지를
살피는 동시에 그의 기록되지 않은 말년 기록을 추론해나가 보도록 하자.
그가 ‘연보’에 실린 것처럼 공직을 사퇴하고 집필을 시작했는가 아니면 집필을 위해 사퇴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한단고기》에는 이암 선생이 당시 시중 벼슬을 하고 있으면서 천보산 태소암에서 어떤
인물과의 만남을 통해 시중벼슬을 접고 《단군세기》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하는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행촌
선생께서 일찍이 천보산에 노닐 때 밤에 태소암에 묵었던 바 한 거사가 있어 말하기를 소전素佺은……’
여기서 행촌은 스스로를 ‘소전’이라 칭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고, 그의 사상체계를 접하면서 매우 큰
흥미를 느끼는 이야기가 계속된다.
‘소전은
기이한 옛날 책을 가지고 있다. 이에…… 이런 신서를 얻으니
모두 옛 한단의 진결이라. 그 통달박고한 학문은 타견하고 칭찬할만한 바가 있었다. 게다가 그 참전수계의 법은……’
그리고 마침내 그가 어떠한 심경변화를 겪게 되는 장면이 묘사된다.
‘내
일찍이 이런 것을 알고도 가르침을 높이 받들지 못해서 어느덧 백발에 이르렀으나 한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소전’이란 어떤 사람이었을까? 소전의 ‘佺’은 과거 발음으로 ‘쇤’이였으며, 이는 선비를 의미하는 ‘士’였고
‘仙’, ‘禪’과도
그 의미가 통한 뜻이다. 그리고 ‘素’를 쓴 것을 보아 아무 관직을 가지지 않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즉
이암 선생이 만났던 소전은 ‘관직이 없이 전통적 사상을 추구한 사람’으로
그 성격을 추측할 수 있다.
아무튼 이암 선생은 이 ‘소전’과의 만남을 통해 시중 벼슬을 그만 두고 흥행촌으로 은거한 후, 《단군세기》를
집필하게 된다.
한 평생 충의로 살아오고 일찍이 유학과 더불어 그 시대에 전해오던 전통적 사상도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로 박문강기하던 이암은 말년에 고려의 정치적 격동과 더불어 홍건적 토벌에 공을 크게 세운 정세운, 김득배, 이방실 등이 모함으로 죽음을 당하자 심신이 매우 지쳤을
것이고 또한 고려왕실에 대한 충의와 정치에 대해서도 일말의 회의가 일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남양주인 천보산까지 유람을 한 것은 당시의 정세를 보나 이암 선생의 심정을
보나 단순한 휴가가 아니었을 것이다. 인생의 회의와 더불어 자시니 굳게 숭상하던 왕실에 대해서도 질적인
변화가 일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사상적으로나 자신의 질적 변화를 위한 돌파구를 찾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우연히 ‘전통수련자이자
사상가’ 한 명을 만나게 되고, 이미 어느 정도 지식이 있던
전통사상의 실체와 조우하면서 강한 인상을 받게 되는데, 아마 이암 선생의 처지가 좀 더 희망적이었다면
그렇게 강렬한 영향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전’이란 사람의 사상과 이암 선생 스스로의 현실적 처지가 상승작용을 일으켜 벼슬을 사퇴하고 《단군세기》를 집필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한단고기》의 내용은 그 후 실학 때라든가 구한말을 거치면서 새로운 자주적 문화운동과
민족운동의 시기마다 다시 세상에 돌출되는데 그 때 기존의 母本母本필서 당시의 언어나 문체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이것이
후에 첨필, 가필되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동시에 역사서로서의 신빙성을 크게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하지만 고기에 실린 여러 지명이나 고유명사들은 결코 단순하게 창작될만한 언어가
아니라 고만주, 고몽고, 고일본어 등 동아시아 전반에 걸친
고언어학의 지식이 있어야만 구사나 해석이 가능한 것이므로 깊은 언어학적 고찰을 거친다면 쉽게 진실에 도달하게 되리라 확신한다.

회암사 터에 있는 한 부도. 행촌 이암 선생은 이곳에서 어느 소전을 만나 공부를 나눴다
진실로 슈퍼컴퓨터를 능가하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법론이 절실한 오늘의 역사학계이다. 그러나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시도의 용기와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 모울도뷔 제2호(2000.10월)
첫댓글 chahlley 님 안녕하세요. 저는 행촌학술문화진흥원 간사 이영순이라고 합니다.
먼저 행촌 선생에 대해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올려주신 행촌 기사 중 오기가 있어 바로 잡고자 댓글 남깁니다.
'모견도'는 고려말의 행촌 이암 선생의 작품이 아니라 조선 중기의 화가 이암 선생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확인 해 보시고 그 부분만 정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