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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사람들이 산을 감상하러 오고,
프랑스 사람들이 와인 마시러 오는곳.
이탈리아 사람들이 음식을 맛보러 오고,
스페인 사람들이 춤을 보러 온다는곳. 조지아.
조지아인들의 뿌리는 역사적으로 깊으며, 그들의 문화유산 역시 유구하고 풍부하다. 중세에 강력한 조지아 왕국을 건설했으며, 최고의 번영을 누렸던 시기는 10~13세기였다. 그 후 오랫동안 터키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19세기에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몇년간 독립국을 유지했다가, 1921년 다시 소비에트 연방에 포함되었다가 1991년 4월 9일 정치적 독립을 이루었다.
러시아어로는 이 나라를 그루지야라 하는데 2005년부터 조지아 정부는 '그루지야'에 해당하는 표기를 쓰는 나라에 영어식 국호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조지아는 동유럽과 서아시아 양 대륙에 영토가 걸쳐 있으며 인종, 역사, 종교, 문화적으로 유럽에 가깝기 때문에 동유럽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지리상으로는 아시아에 속하는 영토가 대부분이라 서아시아로 분류하기도 한다.
기후적으로는 해안 저지대는 접경국인 러시아와 달리 아열대기후를 띤다. 인접한 캅카스 산맥 일대는 만년설이 쌓여있는 등 다양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아르메니아,로마 다음으로 오래된 기독교 국가인 만큼 정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하며 사회적 영향력도 꽤 높은 편. 주변이 아랍, 터키 등 이슬람 세력으로 둘러싸여 있어 이슬람 세력의 끝없는 침략을 받아오면서도 17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신앙을 지켜 왔으니 당연할 법하다.
조지아 정교회는 국교는 아니나 헌법에서도 언급이 되는 등 특수한 지위를 가지고 있고 조지아 사회에서 국민 종교로서의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장수(長壽)로 유명한 캅카스 국가들답게 조지아에도 유명한 장수촌들이 존재한다. 캅카스 산맥 여기저기에 널리 퍼져 있는 장수촌들은 파키스탄의 훈자, 에콰도르의 빌카밤바 등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압하스가 유명하다. 천혜의 자연 환경과 적당한 육체 노동, 조지아식 요구르트 등 몸에 좋은 음식들이 장수의 비결로 손꼽히고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조지아는 요구르트 회사들의 사랑을 받아 왔는데 한국야쿠르트의 메치니코프는 아예 요구르트 병 바깥에 조지아 지도를 그려놓았다.
조지아 인들은 포도주 담그는 일을 신이 부여한 일이라 생각한다
8천 년 전부터 포도 재배와 와인을 제조한 유적이 발견될 정도로 조지아는 포도주의 발상지로 보고 있다.( 와인은 조지아에서 시작해 그리스와 이집트를 거쳐 고대 로마로 전파된 뒤 세계로 퍼져 나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코카서스 산맥을 끼고 있어 낮에는 따뜻하고 밤에는 산맥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와인생산에 있어서 최적의 환경이 만들어 졌다고 한다.
와인은 코르코 통에서 숙성시키는 방식이 아닌 성인 남자가 들어갈 거대한 항아리에 포도송이채로 넣은 후 항아리를 땅속에 파묻어 숙성과정을 거치며 이런 크베브리 양조 방식은 전세계에서 조지아가 유일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1. 보드베 수도원
조지아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녀 니노의 무덤이 있는 보드베 수도원은 시그나기에서 2km 떨어진 깊은 산골짜기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성녀 니노가 마지막 숨을 거둔 곳에 세워진 조지아 정교회 수도원 단지이다.
성녀 니노의 유적과 성골함이 안치되어 있어 조지아의 주요 성지이자,조지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종교 서적보관소 중 하나이다.
2. 시그나기
시그나기는 수도인 트빌리시에서 약 110Km 떨어진 조지아 가장 동쪽에
위치한 카케티 지역(조지아 와인의 77% 생산지역)에 있는 시그나기 자치제의 행정 중심지며 가파른 언덕에 위치한 작은 도시이다.
이곳은 마을 전체가 18세기에 지어진 성곽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로 1975년부터 역사지구로 지정되다.
해발 800m 절벽 위 4km 정도 되는 성벽으로 둘러 쌓인 중세도시,자연환경이 아름답고 역사 유적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 시그나기는 숲 속에 갇힌듯 하지만 고립감이 전혀 없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시그나기는 하루만에 혼인신고가 가능한 도시이다.
80대 할머니가 왕진 오는 의사에게 반해 그가 왕진 오는날은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기다렸다는 스토리도 회자되어 내려오며, 피로스마니의 애달픈 사랑의 이야기가 더해져 ‘사랑의 도시’라 불린다. 그 덕에 전세계의 여행객들이 끊이지 않는 전형적인 민속마을이다.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노래 ‘백만 송이 장미’의 배경도시,주인공 니코 피로스마니의 고향이다.
조지아에 공연을 왔던 프랑스 배우이자 가수였던 마르가리타에게 반해 짝사랑으로 이어진다.
가난했던 피로스마니는 전재산을 팔아 그녀가 머물고 있는 호텔 앞에 백만 송이 장미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
부자인줄 알고 반겼다가 가난뱅이인 줄을 안 그녀의 반응은 냉담했고, 그녀가 떠난 후에도 잊지 못하며 상상 속의 드레스를 입고 부케를 든 모습을 그렸다.
살아서는 무명의 화가였지만 니코 피로스마니가 죽고 난 뒤 슬픈 사랑이야기를 러시아 대표시인이 시를 쓰고, 작곡가에 의해 백만 송이 장미 노래가 탄생되었다.
노래의 주인공도 되고 지폐의 인물도 되어 시그나기의 전설이 되었다.
조지아 사람으로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유명한 니코 피로스마니.(스탈린이 가장 유명한 조지아 사람)
피로스마니는 독학으로 그림을 배워 열심히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무척이나 가난하게 살았고, 사람들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1910년대초 러시아의 이름있는 시인, 화가등이 그의 그림이 뛰어났음을 발견해 그의 그림이 유명신문에 실리기 시작했다. 1916년에는 조지아 화가 협회에서 나서서 그의 그림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와 그의 그림이 막 대중에게 알려지려는 시점이었던 1918년 러시아를 휩쓸고 지나간 인플루엔자 유행에, 가난해서 제대로 먹지 못했던 피로스마니는 쓰러졌고 살아남지를 못했다. 겨우 55세 때의 일이었다. 그 사이 그는 그림을 그리면서 온갖 궂은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했다. 농장일, 가게 점원, 역무원, 날품팔이, 동네 페인트칠에, 간판쟁이까지 안해본 일이 없었다. 우리가 아는 백만송이 장미의 에피소드처럼, 그는 가난하면서도 혼자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백만송이 장미를 바치기 위해 있는 물건들을 모두 처분할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가난하게 살았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였다. 1969년 피로스마니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피카소가 그의 그림에 영감을 받은 그림을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그의 조국 조지아에서도 이런 흐름에 화답을 했다. 2002년에 인쇄된 조지아의 라리 화폐, 그리고 2017년에 인쇄된 라리 화폐에 피로스마니의 초상화와 그림이 인쇄되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유치 스타일(Naive Art)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피로스마니는 농장과 시골에서 사람들과 동물들을 있는 그대로 그렸다. 그는 화려한 색을 쓰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색이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무채색으로 그린 그림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그림 몇점을 올려본다.
3. 수도 트빌리시
트빌리시는 조지아의 수도로 옛 이름은 티플리스이며, 대캅카스산맥 남쪽 기슭의 해발고도 500m의 구릉과 쿠라강 계곡에 시가지가 있다.
5세기 바흐탕 고르가살리(Vakhtang Gorgasali) 왕은 사냥중 화살을 맞고 떨어진 매를 찾는 사냥개를 뒤쫓다 유황 온천을 발견했다. 이에 왕은 이곳이 영험한 기운이 가득한 곳이라 여겨 왕국의 수도를 25km 떨어진 므츠헤타(Mtskheta)에서 이곳으로 옮기면서 트빌리시 역사가 시작됐다.(트빌리시는 ‘따뜻한 물이 나오는 곳’이란 뜻, 온천지구 맞은 강건너 언덕에 세워진 메테키교회(Metekhi Cathedral)는 왕궁이 있던 곳으로 바흐탕 왕의 기마상이 늠름하게 서 있다.)
트빌리시는 코카서스3국의 동부와 서부를 잇는 길을 장악하고 있던 전략상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메테키 교회와 고르가살리 왕의 기마상
메테키 다리는 몽고의 침략 때 항거하여 희생된 사람들이 수만명에 이르러 일명 순교자의 다리라고도 한다.
메테키 교회는 5C경 처음 건립이 되었다가 1235년 몽골의 침입으로 파괴된 것을 1284년 준공되었다. 기마상의 주인공은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긴 고르가살리왕이다.
19C에 들어서는 러시아의 통치시 감옥으로도 사용되어 스탈린도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황금 지붕을 가진 성삼위 사메바 교회
조지아 정교회의 총본산이자 트빌리시의 상징으로 예수 탄생 2000년, 조지아 정교회 독립 1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 건축을 시작해 2004년 완공됐다. 정교회중 세계에서 세번째로 큰 규모다.(러시아 정교회에 필적할 교회를 세우기 위해 국민 헌금으로 세운 교회)
높은 계단 위에 그림처럼 서 있는 대성당은 보는 순간 완벽한 균형미에 감탄이 쏟아진다. 돔 위에 얹은 7.5m 높이 황금 십자가의 위용도 대단하다.
쿠라강 왼쪽 기슭 위로 솟아 있는 엘리야 언덕에 있으며 지하 3층에서 탑까지의 높이는 101m이고 대칭의 바실리카 양식에 황금 지붕이 특징이며 십자가는 이스라엘에서 가져 왔다고 한다.
나리칼라 요새
트빌리시의 고지대에 우뚝 솟은 나리칼라 요새는 조지아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트빌리시 시내와 코카서스 산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절벽위에 자리하고 있다.
도시의 다양한 색채와 고대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풍경, 그 중심에는 고대의 성당과 탐험할 만한 오래된 돌담길이 얽히고 있어, 역사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모습을 쉽게 내려다 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다.
조지아 어머니상
‘조지아의 어머니’ 조각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어디에서나 보일 정도로 조지아인의 정신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다.
왼손에는 와인 잔, 오른손에는 칼을 든 여인. 쿠라강이 유유히 흘러가는 대지를 지그시 내려다보는 여인의 얼굴은 온화하지만 눈매는 단호하다. 친구는 와인으로 환대하지만 적이라면 칼로 응징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듯. 높이 20m의 거대한 조각상은 숱한 외세의 침략에도 결코 굴하지 않는다는 조지아인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왜 여인마저 칼을 들어야 했을까. 끊임없이 외세 침략에 시달린 조지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쉽게 이해된다. 서쪽으로 흑해, 동쪽으로 카스피해 사이에 끼어있는 조지아는 동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다. 이 때문에 오랜 세월 주변 세력의 각축장이 됐다.
안치스카티 대성당
6C경에 지어진 건축물로 트빌리시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시오니 성당
대표적인 조지아정교 성당인 시오니 성당은 꿈에서 성모 마리아에게 계시를 받은 성녀 니노가 제단 왼쪽의 포도 나무 십자가에 머리카락을 묶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6세기에 건립된 이래 수차례의 재건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이 교회는 조지아 역사상 다양한 사건들과 함께한 성당으로, 성당 내부에는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된 예술 작품들이 눈에 띄어, 그 속에 담긴 역사의 무게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평화의 다리
트빌리시의 또다른 랜드마크로 LED 조명 3만개와 센서 240개가 설치된 현대적 보행전용 다리로 쿠라강을 건너 트빌리시의 과거와 현재(구도심과 신도심)을 연결해 주고 있다. 이탈리아 건축가와 프랑스 조명 디자이너가 설계해 2010년 완공된 다리로 밤이면 화려한 조명으로 물드는 트빌리시의 핫플레이스로서 동서 문화의 조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적인 건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