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로가 재화한 <빨간 모자>이야기에는 가부장의 가치관과 남성 우월주의가 들어 있답니다.정말 그렇습니다. 이야기 끝에 달아놓은 교훈을 보면 페로가 이야기를 재화한 내면의 심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싸워야할 공공의 적은 저 두 가지, 가부장의 가치관과 남성우월주의란 생각이 듭니다. 저 두 가지 그림자 의식을 나도 몸에 배고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진땀이 납니다. 아직도 물론 내 몸에서는 저 두 가지 그림자 관념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뜻 일상을 살다가도 저 두 가지 공공의 적이 내 몸에서 불쑥 튀어나와 나를 사로잡고 있는 걸 볼 때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가부장의 가치관이나 남성 우월주의가 아마 가장 심하게 나타나는 현장이 바로 가족구조와 종교 집단입니다. 나는 교회에 나가니까, 교회란 장소가 바로 저 가부장의 가치관과 남성우월주의를 전파하는 중심지가 되고 있단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쓰는 언어를 잘 보면 그 밑바닥에는 가부장과 남성우월주의를 심어주는 상징어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저 두 가지 그림자 관념에 젖어 있는 사람들은 마음과 몸이 늘 분리된 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는 친구하고 산에 갔다가 내려오는데, 아주 거북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남자들 서넛이 같이 등산을 갔다가 내러가는 길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에 가고, 남자들 서너 명은 뒤에서 내려오면서 큰 소리로 떠들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어찌나 거북하든지 차마 계속 듣기가 너무 거북했습니다. 목소리도 아주 느끼했지만, 서로 나누는 이야기들이 정말 가관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입니다. 야, 니네 산악회에 여자 있나. 젊은 여자들 있어. 서른 몇 살 먹은 여자 있는데. 아이고 그래, 그럼 벌써 폐경기네. 뭐 그런 여자들이야 많으니까. 그래도 한번 그냥 만나봐. 싫으면 관두면 되는 거고....
아이고, 정말 너무나 듣기가 거북해서 같이 가던 친구가 저 사람들 먼저 내려가라고 길을 비켜준 뒤에 천천히 가자고 내 손을 잡았습니다. 저런 사람들이 뭐 있긴 하겠지만, 극히 일부지 하겠지만 아직도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니까 이제 한 사십대 초반 정도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냥 농담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그렇지, 그런 이야기를 마치 중계방송 하듯이 어찌나 큰 소리로 떠들며 내려가는지 앞에 가는 사람들이 꼬박 그 소리를 들으면서 걸어야 했던 거지요. 산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걷는 기분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하나의 예가 되겠지만, 가만히 보면 도대체 마음 공부라는 게 뭐냐. 문학 공부라는 게 뭐냐, 옛이야기 공부라는 게 뭐냐 하는 생각을 하면 일단 남자의 몸으로 태어난 사람에게는 특히 저 가부장의 가치관과 남성 우월주의를 어떻게 내 몸에서 몰아내느냐. 근대 제도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 잘못된 종교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저 가부장의 가치관과 남성우월주의가 너무 깊이 박혀 있습니다. 저기에서 어떻게든지 벗어나려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페로가 재화한 빨간 모자 이야기에서 늑대는 바로 저 가부장의 권위와 남성 우월주의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페로가 이야기를 재화할 당시의 귀족 남자들이 바로 이야기속 늑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페로 자신이 바로 저 이야기속 늑대의 분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페로가 바로 가부장의 권위와 남성우월주의를 갖고 있던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이야기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 들려주는 사람, 작가의 내면을 어떤 식으로든 드러냅니다. 그렇기때문에 한 작가가 작품을 쓰고 남에게 보일 때 마음 조리고 흥분이 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내면을 감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글쓴이는 자신의 내면을 거기에 숨겨놓든지 드러내놓든지 하는 것이니까요. 그것이 잘 읽혀주기를, 혹은 그 것만은 들키지 않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있는 거지요.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그 사람의 내면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비평이란 무엇인가. 비평의 본질은 한 작가가 어떤 작품을 썼다면 역시 그 작품을 통해서 작가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일일 겁니다. 마치 꿈을 해석하는 것처럼요. 아주 유능한 비평가는 작가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낼 수 있겠지요. 언어는 쓰는 사람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을 반영하고 있으니까요.
첫댓글 그렇군요. 늑대인간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있지요. 늑대인간을 검색해보니까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야니 야니 말을 들으니 늑대인간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군요. 하나의 동물이 저렇게 괴물의 형상을 띠어가는 데에는 분명히 지배이데올로기 문제가 개입되어 있겠지요. 어떤 시대 상황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동물에 투사하여 그러한 상징의 대상을 만들어내나 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정말 무섭습니다. 사람들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해요. 말문학과 글문학의 힘 모두가 대단합니다.
전 항상 이런 것이 좀 혼란스럽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남성과 여성, 그리고 남성성과 여성성을 혼동해서 사용하며 그 개념을 오용하는 문제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러니까 실제 <빨간모자>에서도 늑대를 실제 늑대로 보는 것과 상징적인 동물성으로 보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데 말이죠. 그 둘을 분리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또 늑대와 늑대인간과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 거 같아요. <할머니이야기>에서는 늑대인간이라고 하는데 반해 단턴의 <할머니이야기>와 페로의 <빨간 모자>에서는 늑대로 나오잖아요. 왜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를 추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아요.
프란체스코 성인 이야기에 보면 늑대가 사람을 잡아먹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고 숲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때 프란체스코 성인이 마을에 찾아와 혼자 숲으로 늑대를 만나러 갑니다. 늑대는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프란체스코 성인을 향해 달려들지요. 그때 프란체스코 성인이 손을 들자 늑대는 급 온순해지며 성인의 발아래 엎드립니다. 그때부터 늑대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사람들도 늑대에게 먹이를 주며 돌보지요. 그때부터 수사들의 친구가 되었던 걸까나? 하여튼 현실도 하나의 상징체계이니까 말이지요.^^
늑대인간은 유럽쪽 전설에 많이 나온다고 브리태니커 사전에 설명되어 있던데요. 늑대인간이 늑대로 변하는 과정은 잘 모르겠습니다. 늑대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로도 많이 나오고 많이 알려진 것 같습니다. 이쪽으로 조사는 어렵지 않은 것 같아요. 누가 시간이 되는 분 한번 정리해서 올려주면 좋겠군요. 그런데 몽골 신화인가요. 이쪽 사람들은 자기들 조상을 사슴신과 늑대신이 결혼해서 나온 걸로 보지요. 늑대나 승양이나 이리나 비슷한 과인 것 같은데요. 우리 민담에도 승냥이가 구원자로 나오는 이야기도 있어요. 그러니 늑대를 저렇게 보는 것, 요즘 우리들도 남성의 그림자 모습을 말할 때 늑대같은 놈이라 하는데, 그럼 저런 서
양의 이야기에서 영향을 받은 건가요. 언어라는 게 참 재미있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합니다. 사람의 무의식을 정말 지배하는 그 무언가가 있어요. 어떻게 우리가 쓰는 말들이 생겨나게 되고, 자주 쓰이게 되었는지를 알다보면요. 거기에는 시대의 상황, 그 시대 사람들의 내면 의식이 반영되어 있는 거지요. 문학이라는 것이 언어를 다루는 거니까요. 이게 참 미묘합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 하나 하나가요. 무언가 기원이 있고 그야말로 역사성이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에서 호랑이가 이중적 속성을 지닌 동물로 옛이야기에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서양에서는 늑대가 그런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실제 생활에서도 산에서 마주치는 가장 무서운 동물이 호랑이잖아요. 숲에서는 늑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실제 늑대의 성향을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상징적으로 그러한 성향을 늑대라는 동물을 빌려 표현하는 것일 뿐인 거지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상징적이 아니라 사실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한다면 늑대를 잘못 이해하고 이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거 같구요. 늑대의 긍정적일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측면은 저도 잘 알고 있답니다.^^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도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지요. 그래서 로마에서는 늑대가 신성한 동물이었다고 하더라구요. 북유럽신화에서도 오딘 옆에는 늑대들이 자리잡고 있죠. 신화에서는 주로 늑대가 신성한 동물이었던 거 같은데 옛이야기로 넘어오면서 그렇게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거기서 어떤 사고의 대전환이 일어났던 거 같은데요. 실제로 동양에서도 예전에 구미호는 신성한 동물이었는데 옛이야기로 넘어오면서 악의 화신이 되고 말았다고 보았거든요. 신화에서 옛이야기로 넘어오는 지점도 좀 탐구해보아야 할 거 같습니다. 옛이야기에서 동화로 넘어오는 지점도 보아야 하지만요.
김진경선생의 동북아신화강의를 들으며 환타지를 재해석하게 되었고 선배가 언제나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문학,정말 읽히는 문학,위안을주는 문학을 하라는 이야기가 이야기가 이해가 되었고요. 루이스세커의 웨스트싸이트학교의 별난아이들과 구덩이를 읽으며 문학의 힘을 다시한번 느낍니다. 저렇게 말하며 다니는 남성들에겐 이젠 연민이 느껴져요. 전 사람을 무서워해서 가까이 가지 않거든요. 특히 고등학교시절 바바리맨에 기억이 강해 남성하면 힘,빼앗음이라는 생각이 많아서 그냥 싫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남성주의가 많이 보여 진경선배랑도 이야기나누었는데 선배는 여성상위가 되어가고 있지않냐고 해서 전혀 아니라고 했어요.
남성;여성이 5;5가 될때 서로 행복하다 생각해요. 사랑도 ,역할도 모든 이야기를 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사람들과 사이에서요. 남성에 의해 내 언어가,노래가,행동이 제어되길 원치않은데 가부장적인 제도가 곳곳에 살아있고 특히 교회를 한곳 정하여 다니지않고 그냥 근처 교회가든가 아님 성당가든가 하는건 내가 절대자를 인정하면 되는거지 제도의 억압 즉 남성들의 억압과 물질의 억압에 눌리고 싶지않아요. 모두 날 사이비 종교인이라 불러도 좋아요 .주님은 아시거든요. 머리카락수까지 센다고 하잖아요. 내가 날 사랑하는 게 가장 소중하지 대상을 놓고 사랑을 구걸하고 싶지않다는 건 여전합니다. 그냥 전 자유롭고싶습니다. 스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