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2세 카트린 드 메디시스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앙리 2세는 세 딸을 두었다. 엘리자베스, 클로드, 마르그리트가 그들인데, 메리 스튜어트도 어릴 때부터 양육했으므로 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카트린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훗날 그들이 쓴 편지에서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많이 묻어난다. 막내인 마르그리트는 어릴 때 가장 말썽을 많이 피워서 카트린에게 매까지 맞기도 했지만 그녀도 언니들 못지 않게 어머니를 존경했다.
엘리자베스 (1545)
맏딸인 엘리자베스 드 발루아는 카트린이 가장 사랑했던 딸로 1545년에 태어나 14살에 에스파냐 왕 펠리페 2세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펠리페 2세는 1558년 부인이었던 영국 여왕 메리 1세가 죽음으로 해서 혼자가 되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엘리자베스는 펠리페 2세의 아들인 카를로스 왕자에게 시집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에 얽힌 이야기는 실러의 희곡『돈 카를로스』나 베르디의 오페라『돈 카를로스』의 소재가 되었다.(그러나 실제로는 둘 사이에 별다른 일은 없었다) 이야기 속의 돈 카를로스는 계모가 된 엘리자베스를 사랑하는 매력적인 인물이나 실제로는 몸이 성하지 않고 대식가이며 정신착란증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부왕이나 측근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못된 행실은 끊일 사이가 없었다고 한다.
1568년 부왕 펠리페 2세의 암살을 꾀하다가 체포 ·투옥되어 그 해 7월에 감옥에서 죽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도 오래 살지는 못해서 1568년 10월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클로드(1547)
둘째딸인 클로드는 1547년에 태어났다. 그녀는 로렌 공작 앙리 드 로렌과 결혼했다. 그들 사이에 난 딸이 크리스틴 드 로렌이다. 클로드가 일찍 죽어 크리스틴은 할머니 카트린에게 양육되어 그녀에게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손녀가 되었다. 카트린은 그녀를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1세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나 종교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고 카트린의 임종이 가까워 올 때라 크리스틴의 피렌체 행은 늦어졌다. 카트린이 죽고 난 뒤 그녀는 피렌체로 가서 페르디난도 1세와 결혼했다. 그 후 50년간(페르디난도 1세, 코시모 2세, 페르디단도 2세) 토스카나 대공국의 실세로 활약했다. 그러나 가정적·사회적으로는 훌륭했지만 사치스럽고 정치에는 무능해 국가의 재산을 탕진했다.
토스카나 대공 페르디난도 1세는 스페인과 가톨릭 동맹의 반대에도 아랑곳 않고 나바르 왕 앙리를 지원했다. 이때 토스카나 대공국의 수입은 프랑스 전체 수입과 거의 맞먹었으므로 그의 재정지원은 앙리 4세를 왕위에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앙리 4세가 귀족들을 매수하는 데 사용한 돈의 출처가 바로 이 곳이었다. 또한 페르디난도는 앙리에게 개종을 권유하고 직접 교황과 협상하기도 하여 앙리 4세에게 큰 공헌을 했다.
크리스틴 드 로렌의 결혼으로 시작된 토스카나와 프랑스의 이런 친분 관계는 페르디난도의 조카이자 그의 형 프란체스코 1세의 딸인 마리아가 앙리 4세에게 시집감으로써 열매를 맺었다. 쉴리에 의하면 프랑스로 시집 온 역대 왕비들 중 마리아만큼 거액의 지참금을 가져온 왕비는 없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마리 드 메디시스로 알려진 그녀는 나중에 루이 13세의 어머니가 되었고 섭정 모후로 권력을 휘둘렀다. 남편과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해 매일 싸움으로 일관했지만 전 왕비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앙리 4세 만큼 심각한 결별을 낳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
마르그리트(1553∼1615)
앙리 2세와 카트린의 막내딸인 마르그리트는 『여왕 마고』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어렸을 때부터 말썽을 많이 피웠다고 하는데, 이런 성격이 성인이 되어서의 앙리 4세와의 불화와 관련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1572년 나바르 왕 앙리 드 부르봉과 결혼했는데,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최악이었다.
성격도 맞지 않았고, 바람기가 심각한 앙리 4세를 마르그리트가 용납하지 못했던 듯 싶다. 카트린이 앙리에게 보낸 책망의 편지도 남아있다. 또한 마르그리트 자신도 품행이 방정하지 못했고, 둘 사이에는 자식도 없었으며 장기간 별거상태였다. 그 사이에 앙리 4세는 '아름다운' 가브리엘 데스트레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찾아낸 것만 56명이고 역사의 여신 클리오도 전부를 안다고는 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많았던 앙리 4세의 애인 중에서 유일하게 결혼하려고 마음먹었던 여자였다.
앙리 4세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마르그리트와의 결혼을 무효로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결혼을 앞두고, 가브리엘은 별안간 사망했다. 항간에서는 이것이 마르그리트에 의한 독살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왕과의 결혼을 무효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 않았으되 눈에 가시 같은 가브리엘이 왕비가 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밝혀진 바는 없다.
어찌됐든 결국 1599년 마르그리트와 헤어진 앙리 4세는 토스카나 대공으로부터의 채무를 상쇄하기 위해 1600년 마리 드 메디시스와 결혼을 했다. 그러나 폐후된 마르그리트는 새 왕비와 매우 친하게 지냈고 왕과도 오히려 헤어지기 전보다 나은 관계를 유지했다. 자식이 없었던 그녀는 앙리 4세의 자식들을 적서 구분 없이 모두 사랑했다.(왕비 마리의 5왕자,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자식인 방돔 가의 3자녀, 앙리에트 드 발자크 당트라그의 자식인 베르누이 가의 3자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