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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최씨화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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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자료실 스크랩 고양시 덕양동 탐진최씨
최윤영(대전) 추천 0 조회 249 14.07.01 17: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라지는 씨족마을에 대한 기록 ⑮ - 탐진 최씨 집성촌 덕이동

최씨는 고집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양에서는 덕이동에 탐진 최씨가 긴 세월 집성촌을 이루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고집보다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을 갖고 묵묵히 농사를 지어온 순박한 사람들이다. 고양신문은 고양시씨족협의회와 함께 집성촌들을 찾아 그들의 삶의 모습과 조상들의 모습을 엿보고자 한다. 고양신문과 고양시씨족협의회의 조사가 완료되는 순서에 따라 10월 23일 순흥 안씨를 찾았다. <편집자>

취재·조사 | 박기범 기자, 고양시 씨족협의회
도움말|탐진 최씨 덕이동 종중회

 

시조 최사전 11세손 최결 덕이동 입향

탐진 최씨는 전라도 강진이 본향이다. 탐진은 강진의 옛 이름이며 장경공 최사전을 원시조로 한다. 최사전은 1126년(인종4년)에 이자겸이 궁궐을 범하고 권세를 부리자 인종과 협의해 이자겸의 심복 척준경을 설득, 그로 하여금 이자겸을 제거하게 한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병부상서에 추충위사공신이 되고 이듬해 이부상서지도성서로서 수사공좌복사가 더해졌으며 삼한후벽상공신으로 참지정사판상서형부사를 거친 뒤에 수태위문하시랑평장사에 이르고 탐진백에 봉해졌고 후일 인종묘정에 배향 되었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이 탐진을 본관으로 하며 번창했다.
덕이동 탐진 최씨는 최사전의 11세손인 최옥의 동생 최결이 지금의 덕이동으로 오면서 정착했다. 최결의 묘소는 실전돼 찾을 수 없어 지금은 설단을 쌓아 시제 등을 지내고 있다. 고려조의 충신인 최결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벼슬을 거부하고 양주 불암산에 칩거했고 후손들에게도 조선조에서 벼슬을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덕이동의 총 가구수가 100여 가구이던 1950년 경 이 마을의 70%가 탐진 최씨였다. 현재는 25가구 정도가 모여 살고 있다.

   
 
▲ 덕이동 탐진 최씨의 입향조인 최결의 설단. 묘소가 실전돼 종중에서 설단을 쌓아 시제를 올리고 있다.
 

장터서 ‘덕이쌀’하면 모두 알아줘

“덕이동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으나 주변에 일산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종중회의 최형호씨는 이렇게 말하며 덕이동 탐진 최씨에 대한 소개를 이어갔다. 그는 “이 곳의 토질이 좋아서 농사가 정말 잘 됐다. 서울 시장에 나가면 ‘덕이쌀’이라고 별도의 이름표를 붙여놓고 판매했다. 그 만큼 여기서 재배하는 쌀의 품질이 좋았다”고 설명한다.
덕이동 탐진 최씨는 이 일대에서 일명 ‘최박사네 집’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성균관 박사를 지낸 최상규 공 때문이다. 최상규 공은 학문이 뛰어나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과거에 고양군수로 발령을 받은 사람들은 덕이동 탐진 최씨를 찾아와 인사를 하고 갈 정도였다.
또 일산에서 한약방을 하던 종중의 한 어르신은 한약방을 정리하고 덕이동에서 무료 진료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어르신의 집 앞에는 언제나 병을 고치고 싶은 사람들로 붐볐다.
탐진 최씨는 이처럼 지역 내에서 존경받는 성품과 행동으로 이웃들과 함께 화합하며 살아왔다.
탐진 최씨가 살고 있는 덕이동 일원은 과거 나무가 많기로 유명했다. 특히 밤나무가 많아서 서울에서 온 사람들도 밤을 따갈 정도였다. 최형호 씨는 “이 일대는 산과 밤나무가 많았다.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많이 놀러가기도 했다. 또 마을 앞에 흐르는 장월평천에 옛날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살았다. 지금은 이 산들이 다 없어지고 상가와 도로가 놓였다”고 말했다.
최충호 씨는 현재 상가와 주택이 들어서 있는 이 일대가 골짜기까지 농사를 짓던 농토라고 설명한다. 그 당시 탐진 최씨는 덕이동에서 주로 벼농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으며 간간이 채소와 콩 등의 작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종중회 한 관계자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으나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개발 여파가 이 곳까지 몰려왔다”며 안타까워했다.

가문과 마을 지키는 젊은 농부의 힘

또한 덕이동 탐진 최씨 종친회와 덕이동 마을 사람들에게는 자랑거리가 하나 있다. 바로 유리 농원 ‘백송 에그리텍 영농조합’이다. 이 곳은 장손인 최명호 씨의 아들인 최승국(51세)씨가 1994년부터 설치, 운영하고 있는 곳으로 최승국 씨는 대학에서 원예과를 전공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시작했다. 수경 재배 방식으로 토마토를 재배해 일본으로 수출하는 등 큰 성과를 낸 이 유리 농원은 1만6859㎡(5100여평) 규모로 지역 내 농민들은 물론 타지에서도 견학이 줄을 이을 정도다.
아버지 최명호 씨는 “농사를 이어간다고 하니 기특하긴 하다. 그러나 부모로서는 자식이 그 힘든 농사를 계속하겠다고 하니 속상한 점도 있다”고 솔직한 심내를 내보였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최승국 씨가 종손인 아버지와 종중회의 영향을 받아 농사를 지키고, 고향을 지키는 심성을 갖게 된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영찬 고양시씨족협의회 수석부회장은 “젊은 사람들이 모두 서울로 나가려고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고향을 지키고 농사를 짓는 모습이 참 대견스럽다. 이런 모습이 바로 집성촌, 씨족마을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평했다.

   
 
▲ 과거와 달리 개발이 진행된 덕이동 거리. 상가와 주택이 있는 자리가 과거에는 모두 산이었다.
 

인근 곳곳 개발 … 고향 잃을까 걱정

“최씨가 고집이 강하다지만 덕이동 탐진 최씨는 그리 고집이 강하지 않습니다. 그저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신세지기 싫어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종중회 한 관계자는 덕이동 탐진 최씨의 성품을 이렇게 설명하며 순박한 성품을 지녔다고 강조했다.
종중회에서는 또 종중 행사에 사용하기 위해 마련된 토지인 위토를 처분하고 그 돈을 은행에 넣어두고 이자를 통해 종중을 운영하고 있다. 토지로 가지고 있으면 종인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종중회에서는 앞으로 우수 학생들에 대한 장학금을 지급하는 방안 등을 고려중이다.
덕이동 탐진 최씨는 마을 일대에 선조들의 묘소를 마련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2000년 경 도시가 개발되면서 이 자리에 기업의 물류 창고가 들어서게 된다. 탐진 최씨 문중은 크게 반발했지만 결국 산소를 모두 고봉산 일대로 이전한다.
종중의 최형호 씨는 “옛날에는 산소들이 이 곳에 모여 있으니까 외지로 나간 식구들도 40∼50명씩 모여서 집안 일도 논의하고 그랬다. 또 시제 때면 1명씩 제사상을 따로 차리며 제를 올렸으나 지금은 절차도 간소해지고 외지에 나간 식구들이 모이는 것도 예전 같지 않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최충호 씨도 “개발이 곳곳에서 진행되니까 고향을 잃을까봐 걱정이다. 개발 계획이 나올 때마다 덕이동이 포함이 되느니 안 되느니 말들이 많다. 그러나 개발이 돼서 편리해지고 보상을 받으면 뭐하나 싶다. 고향을 잃고 가족끼리 흩어져서 살게 되면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그저 고향 땅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뿐이다”라고 말했다.

가문의 긍지 송포 백송  최수원 장군 식재설 … 천연기념물 60호

   
 
▲ 탐진 최씨 덕이동 종중회 사람들이 송포 백송 앞에 모였다. 사진 왼쪽부터 최충호, 최주영, 최명호, 최형호, 최영호
 
천연기념물 60호인 송포 백송나무는 덕이동 탐진 최씨의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백송나무는 현재 덕이동 산207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백송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인 나무로 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이루어졌으며 벗겨져서는 흰빛이 되는 특성이 있어 백송 또는 백골송이라고 불린다.
현재 송포 백송과 관련해서는 2가지 설이 전해져 온다. 기존에는 조선 세종 때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할 당시 그 곳에서 근무했던 탐진 최씨의 최수원 장군이 고향에 오는 길에 심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또 다른 하나는 조선 인조∼숙종 때 중국 사신으로부터 소나무를 전달받은 유하겸이 송포에 심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송포 백송은 높이 11.5m, 가슴 높이 둘레 2.39m다. 옆에서 보면 부채살처럼 퍼져 역삼각형으로 보이며 다른 백송에 비해서는 나무껍질이 희지 않은 편이다. 송포 백송은 흔히 볼 수 없는 희귀한 나무로 중국과의 교류를 알려주는 역사,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가문 번창의 중심 최상규 공  뛰어난 학자 … 활발한 연구 기대

덕이동 탐진 최씨 문중에는 많은 고문헌이 소장돼 왔다. 그러나 6·25를 겪으면서 대부분이 유실됐다. 탐진 최씨 종가인 최명호 씨 집에는 ‘취송산방’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취송은 최상규 선생의 호로 덕이동 탐진 최씨가 최상규 선생 대에서 크게 일어났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최상규 선생은 통훈대부 성균관 사업의 벼슬에 이르렀고, 성균관 사업은 성균관의 정4품 벼슬로 사림에서 학문과 덕행으로 명망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벼슬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종가에는 최상규 선생에 대한 고신(임명장)이 유실돼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최상규 선생은 집필을 많이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1910년부터 1933년까지 거의 매년 한 권씩 탈고를 했다. 특히 ‘문묘통기’ ‘토사적김택영문’ ‘춘추론’은 석촌 윤용구 선생이 극찬한 책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 ‘권도수실기’는 권율 장군과 관련된 내용으로 추정된다.
최상규 선생의 저술 중 현재 종가에서 소장 중인 것은 모두 ‘장릉실기’ ‘동사보루’ ‘동국여사’ ‘두문동유적’등 4권이다. 종중회에서는 유실된 다른 문헌들이 다 취합돼 조선말기 고양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최상규 선생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2008년 10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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