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 달성군 옥포면의 옥연지 상류, 비슬산 북쪽 기슭에 있는 용연사(龍淵寺)는 유서 깊은 신라 고찰이다.
대구 도심에서 1시간 남짓한 가까운 거리에 있고, 1천년 넘는 역사에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과 석조계단 등 귀한 문화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구시민에게 잊혀가는, 조용한 절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찰'하면 팔공산 동화사나 파계사 등 대대적인 불사로 새 단장하고, 불자들이 북적대는 큰 절들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라시대부터 1천92년간 도량 곳곳에 스며온 역사의 중량감에 눌려 중생들이 가까이 할 엄두를 못내서일까. 어쨌든 용연사는 수려한 계곡과 울창한 산림 속에 고색창연하면서도 조용한 산사의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이다.
용연사는 가는 길부터 운치가 있다. 화원읍에서 국도로 현풍쪽으로 가다가 옥포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용연사까지 약 6㎞의 좁은 포장도로가 이어진다. 오래된 벚나무 가로수가 우거진 사이로 '봄에는 벚꽃 터널이 참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금방 오른쪽에 커다란 못이 나온다. 옥포의 옥(玉)과 용연사의 연(淵)자를 딴 옥연지이다. 옥연지 주변의 쏘가리, 잉어, 메기 등 민물고기 전문 음식점들을 지나쳐 도라지와 상추 등 남새들이 먹음직스러운 들판길을 따라 비슬산쪽으로 오르다, 옥포농협 앞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계곡을 끼고 잠시 올라가면 한 눈에 긴 세월의 풍파가 엿보이는 일주문이 나온다.
현판에 '비슬산 용연사 자운문(琵瑟山 龍淵寺 慈雲門)'이라고 유려한 필체로 쓰여 있는 이 일주문은 아름드리 굵은 나무기둥이 휘어져 다른 나무기둥의 도움을 받고 있다. 단청과 나무는 비록 퇴색하고 낡았지만 웅장한 모습은 과거 용연사가 200칸이 넘는 건물에 승려 수십명이 북적댄 큰 가람이었음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다.
용연사는 신라 신덕왕 1년(912) 보양국사가 창건했고, 조선 세종 원년(1419) 천일대사가 중건한 절로 기록에 나온다. 용연사 입구의 높이 15m 용추폭포에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용연사의 명칭과 관계 있다. 임진왜란 때 완전 소실돼 선조 36년(1603) 사명대사가 인잠, 탄옥, 경천 등에게 명하여 재건했다.
이때 대웅전 등 다섯 전각을 재건했는데 20여명의 승려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효종 때 화재로 종각만 남기고 전체 건물이 소실돼 다시 지었다. 당시 식당과 천왕문·조계문·향적전·관음전·명부전·부도전·명월당 등 200여칸의 대중창을 이뤘다고 한다. 중창 후 한동안 용연사에는 오백 대중이 살았으며, 강연하는 명적암 은적암과, 참선하는 보제암·법장암이 있었고, 절 앞 시내를 따라 용문·천태·무릉·방은·홍류 등 다섯 개의 돌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승려가 5명뿐이고, 암자도 명적암만 절 입구 오른편 산 위에 남아 있지만 사찰 곳곳에 과거 수백 대중이 살며 번창했던 흔적들이 남아 있다.
276년 전 영조 4년(1728)에 5번째로 중건한 극락전과 1992년 중건된 적멸보궁, 1673년 지어진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석조계단, 고승들의 무덤인 부도군 등 귀중한 문화재를 비롯해 범종이 있는 안양루, 명부세계의 시왕(十王)을 모신 명부전, 명적암 등 17동의 부속 건물로 이뤄져 있다. 수령이 몇 백년된 느티나무와 상수리나무 등 고목들도 많다.
이런 용연사를 사찰측이나 달성군 등 각계에서 수백년 전 번성했던 불도량으로 재건하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본절 입구에서 왼쪽으로 계곡을 건너 2분여 거리에 있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 주변 정비 사업이 그것이다. 용연사 적멸보궁은 선산 도리사 보궁과 함께 국내 8대 적멸보궁에 속한다.
지난해 11월 부임한 순천 송광사 강주 출신 지운(智雲) 주지 스님이 직접 나서 주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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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보궁 입구 왼쪽에 있는 화강암 부도들. 고승들의 무덤으로 두 곳에 모두 12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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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 수련회와 강연을 주재하고 있는 것도 거듭 나려는 몸부림의 하나이다. 석조계단과 부도들, 고색창연한 일주문 등 다른 절에서는 보기 어려운 귀한 문화재를 알리기 위해 대구시에서는 시티 투어 코스에 용연사를 넣어 단체 관광객을 안내하고 있다. 대구시에서 파견한 문화 유산 해설사가 배치된 것도 용연사의 예사롭지 않은 현주소를 말해 주고 있다. 달성군도 절 앞 민가 이주 및 진입로 확장을 추진하는 등 용연사의 번창에 한몫 거들고 있다.
용연사는 어느 계절이든 고즈넉한 분위기속에 고찰의 향기를 느낄 수 있지만, 특히 가을이 좋다. 적멸보궁 오른쪽은 단풍나무로 빨갛게 불타고 왼쪽은 은행나무로 노랗게 장관을 이룬다. 절 주변을 둘러싼 숲과 운치있는 계곡 등 대구 인근의 좋다는 여느 산사에 못지않은 풍광을 갖췄다. 다만 매표소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서 절로 갈 때 좁은 찻길에 오르내리는 차량들로 호젓한 산행이 방해받지 않도록 찻길 옆에 따로 산책길을 만들어준다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극락전 옆 요사채앞 우물가에 하얗게 핀 불두화(佛頭花)는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면서 부침한 용연사의 이런 내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담스럽기만 하다.
<>전설과 문화재
금강계단 '불사리 모시고 수계의식 치러'
통도사 사리 2과 임란 일어나자 옮겨와
용연사에서 가장 귀한 것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寂滅寶宮)과 이를 모신 석조계단(石造戒壇·보물 제539호)이다. 적멸은 줄여서 멸(滅)이라고도 하는데 미혹(迷惑)의 세계를 영원히 벗어나 무한한 안락의 경지에 도달한 즐거운 상태를 말한다. 열반과 비슷한 뜻이다. 계단은 불사리를 모시고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곳이다. 금강계단이라고도 한다.
적멸궁은 불전안에서 유리창을 통해 뒤편 종 모양의 석조계단을 볼 수 있도록 돼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대표적인 적멸보궁은 양산 통도사를 비롯해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모악산 금산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선산 도리사 등이다. 사리 1과(顆)를 모신 용연사는 5대 보궁에는 들진 않지만 국내 8대 보궁에 든다.
용연사에 부처님 사리가 오게 된 기록은 이렇다. 신라 선덕여왕 때 고승 자장 법사가 중국 당나라에 다녀오면서 사리 2과(顆)를 가져와 통도사에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때 사리탑이 파괴돼 사리를 도난당했다. 승병 대장이던 서산대사의 명을 받은 사명대사가 두 함의 사리를 되찾았고, 한 함은 태백산 보현사에 안치하고 다른 한 함은 본래대로 양산 통도사에 봉안하려고 했다.
그러나 왜란이 재발해 일이 어렵게 된데다, 서산대사(1520~1604)가 돌아가시자 1673년(조선 현종 14년) 청진 스님 등이 힘을 모아 용연사에 석조계단과 탑을 세워 사리를 모시게 됐다고 용연사 비석에 기록돼 있다. 보물 지정은 1971년 7월에 이뤄졌다. 194평의 네모진 터 가운데 2중 화강암으로 받침을 만들고 석종형의 탑신을 놓았다. 사리를 보호하도록 사천왕상 조각들이 지키고 있다.
주 법당인 극락전은 지방 유형문화재 41호이다. 석가여래 삼존좌상으로, 문수·보현 양대 보살을 좌우 협시로 거느렸다. 후불탱화가 미타탱이 아닌 영산탱이어서 본래 대웅전이던 것을 극락전으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기에도 대웅전 기록만 있다. 극락전 앞 3층석탑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대구시 문화재 자료 28호이다.
적멸보궁 입구 왼쪽에 있는 고승들의 무덤 부도비도 용연사의 트레이드 마크다. 모두 12기로, 송파·낙파·동운·인악·원계 대사 등 7기가 모여 있고, 300m쯤 떨어진 숲속에 또 5기가 있다. 이중 2기는 탑신이나 비석에 이름이 없어 누구의 무덤인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