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 열기 확산, 수 주째 격렬 시위
[미국 현지보고] 부시 행정부 대외정책의 '아킬레스건'
박귀용 기자 guiyong@aol.com
"우리의 아들 딸 들을 더 이상 전쟁의 도구로 삼아 희생양으로 만들지 마라!"
"더 이상 지구촌에 폭탄을 퍼부어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지 말라!"
"No more killing, no more war, no more violence anymore."
(더 이상 살해도, 전쟁도, 폭력도 싫다)
▲ 미국 로스엔젤레스서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전쟁 반대를 외치고 있는 한 소년의 모습
ⓒ 연합뉴스
지난 6일(현지시간). 서부 로스엔젤레스의 연방청사 앞에는 수많은 군중이 집결해 있었다.
"스포츠가 아니고는 더 이상 군중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는 나라"라고 묘사되던 미국에서
다수의 군중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집회 참가자들은 각종 구호가 적힌 피켓이나 성조기 드럼 따위를 들고 "노 워(No War!)"라는 구호와 함께
다운타운으로 행진을 벌였다. 대형 성조기를 든 채 시위에 참여한 쟌 스캇필드(28)는 "시민들이 다가와
격려를 해줬고 일부는 차를 세우고 직접 시위에 동참하기도 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집회 주최측도 이날의 집회가 성공적이라며 상기된 표정이었다. 지역 노동 인권 단체등이 주축이 된
시위주최측은 이날 5천명 이상이 참가했다고 밝혔지만 경찰측은 참가인원이 수백명에 그쳤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미 LA에서 수백명이 됐건 수천명이 됐건 더 이상은 예전처럼 "별 볼일 없는"사안으로 치부할 단계는
이미 지나버렸다는 감이다. 반전열기는 이미 전국적으로 진화하기 힘든 기세로 번지고 있는 중이다.
일요일인 이날 미 전역에서는 LA를 비롯해 수도 워싱턴 뉴욕 샌프란시스코 포틀랜드 등 최소한 40개의
도시들에서 반전시위가 벌어졌다. 적게는 수백명 선에서 많게는 최대 2만명(뉴욕)의 인파가 모인 것으로
현지 언론들은 추산했다.
반전평화 시위로는 가히 월남전 이래 최대규모이다. 몇몇 지역에서는 연방청사 진입 등 격렬한 시위로 일부 시위참가자들이 경찰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반전목소리 각계각층으로 확산
이보다 한 주를 전후한 주말에도 각각 대학가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연일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일요일인 지난 29일 수도 워싱턴에서는 시위대가 딕 체이니 부통령의 관저 앞까지 진출해
"No blood for Oil(오일을 위해서 피는 안된다)"는 구호를 외쳐댔다.
미국의 반전운동 열기는 더 이상 '소수극렬분자들에 의한 몸부림' 차원으로 치부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언론에서 월남전 반전운동과 요사이의 흐름을 비교하는 논조들이 선을 보인 것도
이와 때를 같이한다.
최근의 미국내 반전운동 양상은 여실히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사회 각계각층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제시카 랭, 올리버 스톤, 제인 폰다 같은
유명 할리웃 스타들이 반전 시위장소에 나타나거나 다른 유명인사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반전 성명이 담긴 광고를 내는 등 할리우드 스타들도 반전대열에 참가했다.
지난 주에는 유명 아이스크림회사의 창시자를 대표로 하는 수백명의 실업인들이 나서 뉴욕타임스 등에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몰몬교 중앙본부 등 각종 사회 종교단체들에서도
전쟁에 반대한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하는 등 반전열기는 각계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역시 관심의 초점은 과연 이런 미국 내의 반전무드가 월남전의 운명을 결정했던 것처럼 부시행정부의
대외정책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줄 수 있을지의 여부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미 현 상황이 베트남전 당시와 닮아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베트남전 반전열풍처럼 나아갈 수 있을까?
최근에 전개되고있는 일련의 전국 규모 시위는 뉴욕에 근거지를 둔
'Not in Our Name(우리 이름으로는 안되오)'이라는 반전연대 그룹에 의해 조직되고 있다.
이 조직에는 Refuse and Resist Project(거부와 저항 계획)라는 조직 등 다수의 전국 그룹들이 참여하고 있다.
'Not in our name'이 주도한 지난 6일의 시위에서는 전국적으로 약 40여 곳에서 10만명 가량의 군중이
참가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밖에도 The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미국 우호 서비스 위원회)같은 단체들이 지방의 크고 작은
각종 단체들과 행사를 통해 연대를 실현해나가고 있다.
최근 반전운동의 특징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매우 다양한 사회계층에서 조직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반전운동 관련 단체들도 조직화의 속도에 내심 놀라는 모습들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학생운동 부문의 부활이다. 전국 각지의 대학가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조직화되고 있고
점차 활동의 전면으로 부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Not in Our Name'의 한 관계자는 "(의회의) 이라크 침공 결의안은 놀랄 일이 아니다. 폭격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전국에 걸쳐 본격적인 조직 시위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반전열기가 베트남전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단계로 발전해 나가는 데 있어서는 몇 가지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 언론들의 여전한 소극적 보도 태도이다. 워싱턴포스트 같은 한두 개 주류언론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대다수의 대중적 신문 잡지들과 전파매체들은 반전운동에 결코 개방적이지 않다.
반전열기를 전파하는 데 있어서 언론들의 보도태도는 여전히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다. 월남전의 뼈아픈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미국의 주류 언론들은 반전운동의 흐름이 적극적으로 다루어질 경우 국제사회에서 미국이
겪어야 할 위상실추와 불이익이 너무나 크다는 묵시적인 공감대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알아서 기는 언론'의 미국판인 셈이다. 그러나 최근의 분위기는
더 이상 언론들을 무조건 외면할 수만은 없는 단계로 몰아가고 있다.
적극적이진 않아도 적어도 사실보도 만큼은 피해서는 안될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행정부, "속전속결주의로 대응" 전략 맞서
국내의 반전열기가 예상외로 빨리 가속화되자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쪽은 역시 부시행정부 내의
매파 핵심세력. 반전시위가 거세진 지난 주말 직후,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전쟁을 수행하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외교노력이 실패했을 경우 "한 국가에 대한 공격에서 허를 찌르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조기에, 그리고 위험하기 전 단계에 행동에 돌입해야 한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럼스펠드 가이드라인'이라고 불리는 이 럼스펠드의 비망록은 원래 지난해 3월에 작성되었던 것인데 최근
유엔 외교가에서의 고전상황과 반전열풍이 함께 겹치는 시점에서 다시 경신되어 매파들 사이에서 회람되고
있다고 일부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물론 이라크전을 속전속결로 끝내지 않을 경우 세계의 여론과 국내 여론에 밀릴 경우를 감안한 것이다.
"미국의 지도부는 절대로 대중들과 의회 유엔이나 동맹국들로부터 벙어리가 되어 주저앉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미국의 현대전 가이드라인이기도하다. 월남전의 우를 범하지 말고 속전속결주의로 나간다는 원칙,
최소한의 인명피해로 상대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것이 그 골격이다. 전쟁이 길어질 경우 여론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전쟁도 돌입하기 전에 이 정도의 반전열기가 확산된다면 향후 월남전을 능가할 수도 있는
가능성도 짙다.
이를 의식한 매파 핵심세력은 결코 장기전을 추구하지는 않을 분위기이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집중적인
타격을 가해 상대를 궤멸시켜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것에도 한계는 있다. 걸프전에서 이미 시도해봤지만
여태껏 후세인 정권은 건재하고 미국의 대리정권을 세우는데 실패한 경험이 그것이다.
이 점에서 본다면 최근 부시행정부의 전쟁전략은 이미 일정 부분은 실기한 듯한 모습이다. 외교전에 있어서나
국내여론 전선에서나 행정부의 뜻대로 제대로 일이 풀려나가질 않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월남전 초기보다
더 거센 국내여론의 반발이라는 '돌발'변수가 당황스런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강공일변도로 나갈 경우 또 다시 국내여론의 저항에 부딪혀야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미국 내 반전운동 세력들은 오는 26일을 기해 전국적인 차원의 대규모 반전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이들은 이라크전 반전열기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같은 일련의 반전 평화시위가 앞으로
베트남전 반전운동처럼 겉잡을 수 없는 단계로 발전해 나갈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하지만 미국 내 반전 열풍은 이미 미국의 대외정책 결정권자들의 장막안에서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는
주요 변수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과연 부시행정부의 일방주의적 무력주의 노선에 대해
월남전 반전운동과 같은 궁극적인 변수가 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