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3일 청주삼백리 회원들과 답사했던 정북동토성 일원을 6월 3일 오후 아내와 다시 돌아봤다.
청주의 북부지역인 이곳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네모배기샘, 큰샘으로 불리는 '돌꼬지샘'부터 들려야 한다. 샘은 기찻길 옆 시골마을인 정상동의 길가 가까이에 있다. 이 샘을 기준으로 위쪽은 '정상(井上)', 아래쪽은 '정하(井下)', 북쪽은 '정북(井北)'으로 행정구역이 나눠진 것이 돌꼬지샘의 위상을 알려준다. 돌꼬지샘에서 위쪽인 정상동이 서울(한양) 방향이고 아래쪽인 정하동이 청주 방향임을 알고 나면 예전에는 모든 것이 서울 위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청주로 나들이를 하려면 이곳을 지나야 했던 오창 사람들이 "청주에서 술 마시는 것보다 돌꼬지샘에서 물 마시는 것이 좋다"고 말했을 정도로 돌꼬지샘의 물맛이 좋았다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다.
돌꼬지샘에서 가까운 북서쪽 방향에 '청주정북동토성(사적 제415호)'이 있다. 넓은 들판 길을 걸어 토성으로 간다. 미호천 물가에 위치한 정북동토성(井北洞土城)의 축조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돌화살촉·돌창·돌칼 등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에 의해 삼국시대 초기인 2~3세기경 평지인 미호천변평야의 중심에 네모지게 축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1744년에 상당산성의 승장으로 있던 영휴가 쓴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견훤이 궁예의 상당산성을 탈취하고 작강(鵲江-까치내) 옆에 토성을 쌓고 창고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한다.
정북동토성은 남북이 약간 긴 직사각형이고, 남문자리와 북문자리의 좌우 성벽이 엇갈리게 축조된 독특한 형태로 우리나라 초기의 토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예전의 토성은 성안의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 지르는 농로가 20여 호의 민가가 있던 북쪽과 경작지가 있던 남쪽을 구분했는데 2007년부터 정비 사업이 이루어지며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2014년에는 토성 인근에 역사교육관이 세워질 계획이다.
미호천 제방에 올라서면 좌우의 정북동토성과 작천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제방을 내려서 물가로 가면 여기저기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와 마음이 포근하다. 이곳 무심천과 미호천의 합류지점에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온갖 식생들이 살림을 차린 모래톱이 있다. 4대강 사업으로 작천보가 만들어지며 수상 레저활동을 해도 될 만큼 수량이 증가했으나 낚시 등으로 주변이 오염되어 수질 개선이 시급하다.
제방을 따라 걸으면 좌우로 펼쳐지는 정상동과 정하동의 농촌 풍경, 무심천과 쓰레기장을 매립해 만든 문암생태공원, 새들이 큰 날개를 펴고 이동하는 모습이 평화롭다. 충북선 철교 위를 빠르게 달려가는 기차도 만난다.
마애는 석벽의 그림이나 불상, 비로사나(비로자나)는 불교의 진리를 신격화한 법신, 좌불은 앉아있는 불상이다. 무심천의 지류인 발산천 입구에 청주정하동마애비로자나불좌상(충북유형문화재 제113호)이 있다.
정하동마애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특징이 엿보이는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자연암반에 선각된 마애불의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있다. 또한 관모를 쓴 비로자나불이라 주목받고 하단의 돌출된 부분을 이용하여 연화대좌를 조각한 것도 특이하다.
왜 이곳의 길가에 석불이 조성되었을까? 이곳이 바로 청주읍성과 한양을 연결하는 길목이었다. 그동안 이 길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이 불상 앞에서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빌었을 것이다.
좌불 옆 수령이 오래된 참나무에 말벌이 있다. 말벌은 다른 벌들보다 크기가 커 위협적이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자연이 놀이터였다. 답사 길에 만난 말벌이 친구들과 산에서 놀다 벌에 쏘여 고생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