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기도/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김현승 시초,1957>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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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면 단풍과 낙엽이 떠오르듯 가을하면 단박에 생각나는 시가 바로 이 ‘가을의 기도’다. 기도의 분위기가 경건하고 겸허하며, 따라 기도하기에 좋게 문장의 틀과 운율이 잘 짜여있다. 기독교적 정신을 바탕으로 한 삶을 살았던 시인의 모습과 생애가 진하게 환기된다. 영적 충일을 갈망하는 동시에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라며 시인으로서의 소망도 함께 담은 이 시를 읽노라면 가을날이 절로 고즈넉해진다.
‘호올로 있게 하소서’란 대목엔 자신을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까마귀)로 머물게 해 달라는 자아의 갈망이 엄숙하고도 비장하다. ‘까마귀는 모든 빛깔을 억누르는 검은 빛깔로 저 자신을 두르고 기쁨과 슬픔을 초월한 거친 소리로 울고 가는 광야의 시인이다’ 하지만 이 시를 애송하는 많은 사람, 특히 여성들에게는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부분에 시선이 길게 머물고 심상은 촉촉이 젖어들리라.
이 투명한 기도가 의미한 사랑이 세간의 살 부딪는 사랑 아니면 어떠랴. 이 가을, 오직 한 사람만을 택하여 통속한 사랑을 골짜기에 핀 백합처럼 이루어낼 수 있다면, 인생에서 그보다 더 깨끗한 아름다움과 보배로운 열매가 어디에 있겠느냐. 눈썹 휘날리며 질주할 ‘비옥한 시간’이 언제 다시 한 번 오기나 할지. 절정으로 치닫는 이 가을.
내일모레면 시월의 마지막 밤이라고 공연히 마음을 풀썩이기도 하리라. 또 누군가는 볼그족족 얼굴을 붉히리라. 사랑하기에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사랑하기에 눈도 못 마주치다가 바보처럼 보내버린 슬픈 사랑이 그 이별이 그 편지가 생각나는 것이다. 기억하면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그런 사랑이 있거나 없거나, 오직 한 사람을 위한 기도가 필요하거나 말거나 그러는 척 맬랑꼴리해지는 것이다.
권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