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암군 호랑이 관련 지명ㆍ유래 어디일까...어흥! 호기롭게 나타나다
영암읍 역리 범바웃등
삼호읍 산호리 호등마을, 호등산
삼호읍 용양리 호동마을
신북면 이천리 호산골마을, 호산
군서면 월곡리 호동마을
서호면 화송리 송정마을
학산면 묵동리 범실(호동)마을
도갑사
김극조 묘 터
도포줄다리기
2022년 임인년(壬寅年) 호랑이의 해를 맞아 전라남도 영암군 호랑이와 관련한 지명(地名)은 몇 군데밖에 안 되지만 그 유래(由來)는 의미가 남다르다.
먼저 땅이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땅 이름은 무엇을 말하는가?
지명이란 한서지리지(漢書地理地) 서두에 나오는 말로 중국 진한, 즉 기원전 202년부터 써오는 말로 2200년이 넘었다. 그 당시는 나라 이름이나 왕(王)이 사는 곳 등 중요한 곳만 이름이 있었다. 그 후 사람의 슬기가 발달하여 활동 범위가 넓어짐에 따라 바다 밑에서부터 산꼭대기에 이르기까지 땅에 관계되는 모든 곳에 구분이 편하도록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 바로 땅이름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땅이름은 우리가 부르는 말을 글자로 쓰게 되는데 우리 글자로만 적는 것이 아니고 외국말로 또는 외국 글자로도 적게 된다. 그리고 우리말 소리 그대로 적기도 하고, 뜻으로 옮겨 다른 소리로 적기도 한다.
이러한 땅이름은 소리(표음)로 적은 이름이 있고, 뜻(표의)으로 옮겨 적은 한자 이름이 있으며, 소리와 뜻으로 옮겨 적은 이름과 뜻과 소리를 옮겨 적은 이름 등 네 가지 부류가 있다.
땅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살펴보면 ▲땅모양이나 상징에 의해 ▲역사적인 사건에 의해 ▲선현들의 선견지명에 의해 만들어졌다.
호랑이 지명 전국 389개
전남 74개, 영암군 8개 최다
호등.호덕.호산 등 전남이 호랑이 지명으로 74개로 전국에서 최다로 확인됐다. 전국 호랑이 지면 389개 중 전남이 74개로 파악됐다. 독립, 용맹 호랑이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왔다.
전라남도는 2022년 임인년 호랑이의 해를 맞아 지역 지명을 조사한 결과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이 총 74개로 전국 389개 중 가장 많은 것으로 분석됐다.
전남 다음으로 경북 71개, 전북 52개, 경남 51개 순이다.
시군별로는 영암군이 산 모양이 호랑이처럼 생겼다는 뜻인 호등산(虎嶝山)을 비롯해 8개로 가장 많고, 이어 여수 7개, 순천.나주.고흥.보성.신안 각 6개 등이다.
종류별로는 마을이 50개(68%)로 가장 많고, 섬 16개(22%), 고개 2개(4%) 등이다.
호랑이 지명이 많은 이유는 선조들이 호랑이가 마을을 지키고 잡귀를 물리치는 데 수문장(守門將)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호암(虎岩), 호동(虎洞), 호덕(虎德), 호산(虎山)’등 호랑이의 형상을 인용한 지명이 많은 것으로 추측된다.
모양 관련 지명중에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을 비유한 복(伏)자를 사용한 복호(伏虎), 호복(虎伏), 복림(伏林) 등 지명도 있다. 고흥 과역면의 복호산(伏虎山)은 달이 지고 날이 새므로 호랑이가 가지 못하고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는 유래가 있다.
호랑이는 예로부터 두려움 없이 앞 만보고 나가는‘진보성(進步性)’, 혼자서도 살아가는‘독립성(獨立性)’, 싸움에서 지지 않은‘용맹성(勇猛性)’을 상징하고, 잡귀를 물리친다는 신성한 영물로 여겨졌다.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의리 있는 동물이라는 이미지도 있다.
호랑이의 기운을 품은 영암군
영암군(靈岩郡)은 삼국시대 이전에는‘마한(馬韓)’땅에 속하였고, 삼국시대 이르러서는 백제 땅의‘월나군(月奈郡)’이라 불렀고, 통일신라시대에는‘영암군’으로 바꾸었으며, 고려 성종 4년(995)에 삼남도호부를 두어‘낭주(朗州)’로 개칭하였다가 현종 9년(1018)에 강등되어 삼남도호부는 없어지고 다시 영암군으로 개칭하여 이후로 계속 영암군으로 부르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암군 지역 호랑이 지명과 유래
영암군은 2개 읍과 9개면이 있다. 각 읍면에는 호랑이와 관련한 지명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양임읍 역리‘범바웃등’
영암읍 역리에는‘범바웃등(虎岩嶝)’이 있다. 고개에 있는 바위가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영암읍내는 월출산의 북.서면에 자리 잡고 있다. 북녘임에도 시가지로 꾸며진 것은 역리의 범바웃등(58m)으로 내려선 좌청룡이 안산 역할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런 호랑이 형상을 한 범바웃등을 간직한 영암읍은 영암군의 중심지로서의 영암군 전체를 관장하며, 외부의 침입이나 잡귀의 침해를 막아내고 액운을 물리치는 역할을 띠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에 효성이 지극하기로 소문난 효녀가 살았다. 그녀는 병에 누운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 정성껏 보살폈다. 효녀는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자 간호하다가 인근 월출산으로 올라가 약초를 깼었다. 약초를 깨는데 산짐승들이 그녀를 위협했다. 효녀는 겁을 잔뜩 먹고 몸을 움츠리며 흐느끼자 어디선가 나타난 호랑이 한 마리가 그녀를 감싸며 돌았다. 호랑이의 보살핌으로 무사히 약초를 캐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범바윗등 아래 살았던 효녀의 집에 그때 산에서 자신을 지켜주었던 호랑이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효녀는 놀라하며 숨을 죽인 채 방문을 잠그며 호랑이가 사라지기만 기다리며 가슴을 조였다. 떨리는 가슴은 식은땀이 날 정도로 온몸을 싸늘하게 했다. 호랑이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거렸다. 호랑이는 아예 문밖에 누워 아침까지 집을 떠나지 않고 지키는 듯이 있었다.
호랑이는 밤에는 문 앞에 있다가 아침이 되면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효녀는 꿈을 꾸었는데 호랑이가 입을 크게 벌리며“가시를 좀 빼주세요”사정을 했다. 효녀는 호랑이가 고통스러워하는 소리에 놀라 잠을 깼다. 그녀는“이 꿈이 문 앞에 있는 호랑이인가”하며 식은땀을 닦으며 꿈속에 나타난 호랑이에 대해 여러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효녀는 날이 밝아오자 문을 살며시 열며 혹시 또 문밖에 호랑이가 있지 않나 살펴봤다. 호랑이가 여전히 문밖에 다소곳이 누워있었다. 효녀는 망설이며 간밤의 꾸었던 꿈을 떠오르며, 혹시 저 호랑이가 꿈에 나타난 걸까 생각하고 용기를 내어 호랑이한테 다가갔다.
효녀는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가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산에서 자신을 해치지 않고 서성거리는 던 그때 장면을 떠오르며“그래 저 호랑이가 바로 산에서 봤던 호랑이일거야, 나를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닐 것이라고 봐”하면서 호랑이가 옆에서 지켜준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든든하였다. 효녀는 오싹했던 몸이 한 순간에 풀어졌다. 긴장된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친근감 있게 호랑이한테 다가갔다. 호랑이도 반가운 듯이 꼬리를 치며 효녀의 몸을 비벼 됐다. 그러면서 입을 크게 벌리며 자꾸 효녀의 눈과 마주치려고 했다. 효녀는 그런 호랑이를 보고 무서웠지만 강아지를 쓰다듬듯이 호랑이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면서 입을 벌리고 있는 호랑이를 달래며 가시를 빼줬다. 호랑이가 산에서부터 가시가 목에 걸려 효녀 곁으로 와 목에 걸린 가시를 빼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효녀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산에서 다른 산짐승들이 해치려고 할 때 어디선가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산짐승들 때문이겠지 했을 뿐, 호랑이가 어떤 일이 생겨서 그랬는가는 전혀 몰랐었다.
호랑이는 효녀의 보살핌으로 효녀 집 주변에서만 머물며 지냈다. 호랑이가 효녀를 지켜주기 위해 이곳을 떠나지 않은 것이다. 호랑이는 효녀의 아버지가 아픈 것을 알았는지 호랑이는 약초를 물어다 문 앞에 두었다.
효녀는 호랑이가 산신령이 보낸 것으로 믿었다. 그런 영험한 호랑이를 잘 보살펴줘야겠다는 생각으로 늘 호랑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신경을 썼다. 닭도 잡아주고 하면서 호랑이와 사이좋게 가족처럼 지냈다. 한집에서 함께 지내던 호랑이는 가시로 인한 후유증으로 그래서인지 아니면 노쇠해서 그랬는지 한 달 정도 지내다가 범바윗등이 있는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호랑이가 바위로 변했다고 보고 있다. 호랑이가 효녀의 극진으로 떠나지 못하고 문밖에서 지냈듯이 호랑이는 죽어서도 인근 고개에서 바위로 변해 효녀를 그리워하고 효녀와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가 바위로 변한, 호랑이 닮은 바위가 있는 고개라고 해서‘범바웃등(虎岩嶝)’으로 부르며 구전(口傳)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밖에도 여러 설(說)이 전해진다. 범이 자주 고개에 있는 바위에 올라섰다는 설과 고개에서 호랑이를 기다렸던 효녀가 바위로 변했다는 설 등이 구전으로 이어지고 있다. 구전에 따르면 범바웃등이 효녀가 호랑이 바위로 변했다고 보고 있다. 자신을 지켜준 호랑이를 반려견을 키우듯이 했는데 어느 날 그 호랑이는 효녀 곁을 떠나버린 것이다. 효녀는“잠깐 어디 가 있겠지”,“다시 돌아오겠지”하며 기다렸는데 학수고대했지만 호랑이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효녀는 호랑이의 그리움과 호랑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시름시름 앓게 되었단다. 잠결에서도“내 호랑이 어디 간 거야,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하며 잠꼬대를 할 정도로 집을 나간 호랑이에 대해 몹시 기다리고 걱정하며 애탄 가슴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효녀와 호랑이와의 인연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산신령이 나타나서 이 호랑이를 키우면 네가 바라는 모든 일들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계시를 했다. 효녀는 산신령이 말해준대로 산에 가서 호랑이를 만나 그 호랑이한테 큰 절을 하며,“호랑이님 저는 역리골에 사는 초아라는 소녀입니다”.“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산신령님께서 호랑이님을 모시라고 해서 이곳의 산에 온 것입니다”라고 말하자 호랑이는 고개를 끄덕하며“어흥!”하고 효녀의 쓰다듬을 받아들이고 효녀 몸을 비볐다. 호랑이는 효녀의 뒤를 따라 효녀 집으로 들어가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호랑이가 효녀 집으로 오게 된 것은 효녀의 집안이 여러 짐승이나 사람들의 침범이 자주 발생해, 산신령이 안타깝게 생각하여 영험한 호랑이를 소개해준 것이었다. 산신령은 효녀의 효심에 감동을 해서 호랑이를 집에 두게 한 것이다. 지극 정성으로 부모를 모시면서 청춘을 바치고 있는 효녀의 갸륵한 마음이 산신령도 감탄한 것이었다. 그런 착한 효녀인데 사나운 짐승과 심술 나쁜 마을 분들이 자꾸 괴롭혀 효녀가 힘들어 한 것을 보고 산신령은 우려하며, 영험한 호랑이를 보내 호랑이의 기운을 받으며 살아가라고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연을 담고 있는 호랑이가 어느 날 집을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되자 효녀는 걱정을 했고, 효녀는 마을 뒷산에 올라 고개에서 애타게 기다렸지만 호랑이는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매일 고개에 올라 애타게 기다렸던 효녀는 그만 그 자리에서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신도 갸륵하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효녀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서인지 바위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 바위를 두고‘범바웃등’이라는 망부석 같은 사연이 또한 심심치 않게 전해진다. 범바웃등은 마을의 안녕과 평화 그리고 번영을 위한 영원한 지킴이로 존재하고 있다.
삼호읍 산호리‘호등(범실)’마을과‘호등산’
삼호읍 산호리 호등마을(범실마을)은‘호등산’이 있는 데 옛날에 호등산에 살던 호랑이가 바다에 가로막혀 건너지 못하고 목을 들며 우두거니 바라보고 섰다가 되돌아 같다하여‘범슬(실)복(復)’이라 불렀다. 이를 한문으로 호랑이 호(虎)자와 설 입(立)자와 눈 목(目)을 딴‘호립목(虎立目)’이라 불렀던 것을‘호랑이가 올라섰던 고개’라 하여 범 호(虎)자와 고개 등(嶝)자를 따‘호등(虎嶝)’이라고 칭했다. 호등마을 인근에는 호등산이 있는 데 지형이 호랑이 같다하여 범 호(虎)자를 딴‘호등산(虎嶝山)’이라고 부르고 있다. 호등산에 살았던 호랑이가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가려했지만 바다가 가로막혀 그만 돌아가지 못하고 눌러 살았다하여 이 마을 이름을 호등이라고 부른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호랑이가 야산에 멧돼지 같은 짐승을 잡아먹기 위해 자주 이 산에 출몰했다고 한다. 호랑이는 이 야산에서 제 집처럼 즐기다가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가려했지만, 쉽게 건너왔던 길은 바다로 변해버렸고 그로 인해 건널 수가 없어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보듯이 했다고 한다. 언제 돌아가지 하며 산등성에 올라 바닷물이 빠지기를 바랐지만, 물은 더 차올랐고 하여 서성거리다가 그만 이 고개에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야산의 등성이가 그만 호랑이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가 올라갔던 고개라고 하여 이 산을‘호등산’이라고 했다는 까마득한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삼호읍 용앙리‘호동’마을
삼호읍 용앙리‘호동(虎洞, 범골)’마을은 삼호읍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북쪽은 산호리, 동쪽은 서창리, 서쪽은 용당리의 세(三) 갈림길이 있어‘세가래’마을이라고 했다. 이곳에는 샘이 마르지 않아 가뭄에 방아제(중앙촌)에서도 물을 가져다 먹었다하여‘샘건너’마을이라고도 했다.
호동마을의 호동은 범 호(虎)자와 골 동(洞)자를 써‘호동’이라고 부르고 있다. 호동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한다. 호랑이 소굴이라고 하기도 하고, 지형이 호랑이 형국을 하고 있어 호동(虎洞)으로 부르기도 한다. 옛날에는 마을 뒷산이 수림으로 울창하여 산짐승이 많이 서식하였는데 특히 여우가 많아 여쉬골로 불러오다가 1990년대 중앙촌이었던 것을 독립되면서 마을이 호동마을이라는 명칭을 얻게 됐다. 인근 방아제(중앙촌)에서는 물이 귀하고 빈곤하여 이곳 호동마을까지 와서 물을 길러 먹을 정도로 샘물이 풍부했다. 물을 얻어간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호동이라고 했다. 물을 좋아하는 짐승 중에 호랑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호동마을에 있는 우물이 호랑이의 음부(陰部)에 해당되어 마을 이름을 범 호(虎)자를 써 골 동(洞)와 함께 해 호동이라고 지었다. 마을 사람들은 전해들은 이야기로는 이 마을에 호랑이 행동을 한 아이가 있어 호동(虎童)이라고 불렀다고 보는 편이다. 천간과 지지에서의 음양오행설에서는 인(寅) 또는 호(虎)를 물(水)에 해당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호도이라고 한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호동마을에는 호동이라는 어린아이가 있는 데 이 아이가 호랑이 소리를 해되는 등의 이상한 행동을 해보여 마을 사람들은 신기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호랑이로 변신한 귀신 씌운 사람이라고 여겼다. 이 아이는 마을에 있는 가축은 닥치는 대로 잡아 먹어치우는 무서운 행동을 해보여 마을 사람들은 이 아이를 두고 경계를 했다. 마을에 안 좋은 잡귀신이 출몰했다고 보고 이 아이를 내쫒아야 한다고 원성이 자자했다. 그러자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산에다 버렸다고 한다. 산으로 버림을 받았던 아이는 밤마다 어흥 하는 소리를 내며 마을 사람들의 잠을 설치게 할 정도로 공포에 떨게 했다고 한다. 호랑이 행동을 한 아이가 있다고 해서 범 호(虎), 아이 동(童)자를 써‘호동(虎童)’이라고 했던 것을 아이를 버렸던 곳이라고 하여 동자를 골 동(洞)자로 바꾸어 호동(虎洞)이라고 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의 혼(魂)이 하늘로 올라간 뒤로부터는 호랑이가 사리지는 날로 여겨, 호랑이의 해가 되는 해에는 호랑이가 디시 출몰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한다. 한편으로는 호랑이가 수호신(守護神)으로서 마을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도 한다.
용앙리 호동마을은 예전의 호랑이 전설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현재는 이곳이 아파트촌으로 변해버렸다. 마을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아이의 호랑이 울음소리와 행동은 어쩜 마을을 지켜주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는가한다. 범 내려온다. 흥 올라간다. 범이 마을로 내려와 잡귀를 쫒아냈으며, 범은 어흥 소리를 내며 흥(興)을 돋우고 있다. 그 흥은 바로 수풀에서 빌딩 숲으로 변신하게 하는 호동이의 영혼이 서려진 호동마을이다.
호동마을은 삼호읍의 제1호 광장으로 목포, 영암, 해남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로 변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이 많은 가옥과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면서 큰 도시로 탈바꿈했다. 호동마을은 행정구역이 용앙리 2구(중앙촌)에 예속되어 있다가 1990년대에 용앙리 5구(호동마을)로 독립된 마을이 되었다. 호동마을이라는 지명을 얻게 된 것은 구전으로 내려오는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상징성으로 하여 그 의미를 새기기 위함이었다. 중앙촌이란 마을 이름으로 존재했던 것을 이 지역이 호랑이와 연관성에 의한 호동에 관련된 전설이라는 역사성을 찾아준 것이다.
신북면 아천리‘호산골’마을과‘호산’
신북면 아천리 호산골마을 인근에‘호산(虎山)’이 호랑이가 앉아 있는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산의 형국이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의 명당이라 하여 호산 아래 있는 마을 이름을‘호산골(虎山골)’이라고 지었다. 호산골이 있는 호산은 조선시대 정종(1399~1477) 때 창건한 망월사(望月寺)가 있다. 망월사가 있는 위치는 호랑이의 가슴 아래에 해당된다. 망월사가 수년전에 산불로 인해 소실될 뻔했으나 소방당국과 주민, 신도들의 산불진화작업으로 화를 면하였다. 망월사가 호랑이 가슴 아랫부분 때문에 호랑이가 앉아있는 형태로 보아 꼬리와 등 부분만 타버리고 배 부분은 땅과 밀착하여 화를 면하였다. 특히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은 호산(155.9m) 중턱에 우물이 있는데 혹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은 샘으로 이곳을 호랑이‘음부(陰部)’에 해당된다고 봐 샘은 영원히 물이 나고 절대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석간수인 샘물은 월출산 구정봉 아홉용(九龍)이 승천하려면 정북향에 있는 신북 호산의 망월사 샘물을 마셔야하나, 망월사를 지키는 호랑이 산신이 절 앞을 여러 겹 산으로 쌓아서 용(龍)의 접근을 막는 방패로 삼았다는 전설이 있다.
신북면에 있는 호산은 평지에 산이 하나 솟아난 모양새다. 호산은 봉수대가 있다. 호랑이 형국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호랑이가 서있는 형태가 아닌 호랑이가 배를 깔며 누워있는 모습이다. 망월사를 호랑이 가슴 부위에다 사찰을 세웠다.
전설에 의하면 호산에 호랑이 부부가 살았는데 호랑이 수컷이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나갔는데 왠지 모르게 돌아오지 않아 기다리던 암컷은 마냥 한곳에서 수컷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고 한다.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수컷은 보이지 않고 애타게 기다리던 암컷 호랑이는 서성거리다가 그만 지금의 망월사가 있는 곳에서 엎드린 채 기다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가 산을 벗어나지 않고 계속 한 곳에서 엎드려 있는 것을 두고 호산이 있어 안녕(安寧)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근 마을들은 호산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있다. 호산으로 인한 자자손손 번영을 이루고 있다.
호산에 있는 망월사는 조선시대 창건을 했다고 하지만, 석불좌상 양식을 봤을 때 고려시대에 이미 존재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석불좌상이 먼저 세워진 이후에 건축물을 올렸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망월사란 이름이 멀리 있는 달을 내다본다하여 바랄 망(望)자에 달 월(月)자를 써‘망월사(望月寺)’라고 했다. 망월사란 사찰 이름은 호랑이가 집을 나간 수컷을 돌아오기를‘바라는, 기대하는, 원하는, 멀리 내다보는, 향하여 보는, 기다리는, 우러러보는’뜻에서 그렇게 사찰명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호랑이가 있었던 곳에 영혼(靈魂)을 달래주기 위해서 석불좌상을 세워 절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목탁소리는 호랑이의 울음소리라고 망월사 스님은 목탁소리를‘호탁(虎鐸)소리’로 풀이한다.
호산의 호랑이는 마구 날뛰면서 으르렁거리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시끄럽고 어지러운 일들이 발생하여 손실과 장애가 발생했을 것이다. 집안과 직장 및 신상에 말썽과 다툼, 불상사 등 좋지 못한 풍파가 따르게 됐을 것이다. 또한 호랑이가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다면 눈앞에 찾아왔던 좋은 운도 잃게 되는 일이 발생됐을 텐데 다행히 호산의 호랑이는 배를 깔고 편안하게 누워있어 마치 호랑이가 집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모습을 하고 있어 크게 성공하거나 사람들에게 널리 이름이 알려지는 등의 명성과 명예 등이 쌓아지고 있다. 호산이 호기롭게 하고 있으며 호화로운 삶을 누리게 한다.
호랑이는 강한 기운을 발휘한다. 용맹스러운 호랑이다. 그래서 맹호(猛虎)라고 한다. 그런 호랑이를 온순하게 하려 면은 무언가 다스릴만한 것을 설치해야한다. 그래서 호랑이 형국을 한 호산을 다스리기 위해 호랑이 형태를 한 곳에 절을 세웠다, 바로‘망월사(望月寺)’다. 망월사는 풍수적으로 비보사찰이다. 전라남도 영암군 신북면이 호산에 있는 망월사로 인하여 평화로운 고장이 된 것이다.
군서면 월곡리‘호동’마을
군서면 월곡리‘호동(虎洞)’마을이 있다. 호동마을은 월출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이 마을에 호랑이도 있었으나, 마을 중앙에 전씨 종가택이 있었는데 그곳에 호랑이를 닮은 범 바위와 개 바위가 있어서 마을이름을‘범굴’이라고 하였으며, 지명을 한문으로 바꾸면서 범 호(虎)자와 고을 동(洞)자를 써‘호동’이라 하였다. 주암과 호동 사이 산골의 선암제라는 사당이 있었던 선황골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바위굴이 있는 데 이굴을‘범굴’이라고 한다. 호동에서 주암으로 넘어가는 등성이를‘범골잔등’이라고 한다. 또한 호동과 주임 사이에 샘이 있는 데 이 샘을 범굴샘터라고 한다. 범골샘은 바가지샘으로 물맞이 좋아 식수로 사용하였으며 수량도 풍부해 옛날 고을 원님이 이 샘 물맛을 보고 감탄하여 샘 밑에 있는 바위에 비석 모양을 각(刻)하고 문자를 새겼다고 한다. 지금은 문자가 마멸되어 알아보기가 어렵다. 바위에 새겨진 비석 모양은 높이가 90Cm, 넓이가 45Cm 정도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샘물을 호랑이가 마셨던 물로 보고 있으며 이 샘물을 마시면 영험한 기운이 솟는다고 믿고 있다.
설화에 의하면 잔라남도 영암군 월곡리 호동 마을에서 전해 오는 바위 이름과 지명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호랑이의 횡포를 막은 황 포수」는 황 포수 때문에 사냥을 못해 굶주린 호랑이가 개와 친해져 사람에게는 더 이상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1994년 영암 문화원에서 발간한『영암의 전설집』에 수록되어 있다.
호동 마을의 황명달 포수는 지리산 근처에서 황소만한 호랑이를 잡은 적이 있는 명포수였다. 황 포수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월출산에 들어가 오랫동안 호랑이를 찾아다녔다. 마을 사람들도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가끔 바위 등성이에 우뚝 서서 두리번거리는 황 포수를 보고는 하였다. 월출산에 살면서 개와 사람을 잡아먹던 호랑이는 황 포수 때문에 사냥을 할 수 없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허기진 호랑이는 호동 마을로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고 월출산 반대쪽으로 사냥을 하러 가야했다. 그곳에서 호랑이는 멧돼지를 한 마리 잡아서 포식을 하고 남은 고기를 가지고 호동 마을 근처를 지나다가 우연히 만난 개들에게 던져주었다. 그날 이후로 호랑이는 가끔 먹을 것을 가져와 개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황 포수는 마음이 누그러졌고, 개와 호랑이도 차츰 친해졌다. 호랑이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자 마을 사람들은 인근 논밭에서도 마음 편히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그 보답으로 한겨울에 호랑이에게 닭이나 오리를 던져 주기도 하였다. 호랑이 피해를 많이 당했던 전씨 종가는 더 이상 호랑이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자 농사를 잘 지어 천석지기가 되었다.
호랑이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때쯤, 전씨 종가에 어느 날 갑자기 호랑이 형상을 닮은 바위와 개 한 마리가 웅크린 모양의 바위가 생겼다. 그제야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가 죽은 것을 알았다. 지금도 종가 터에‘범 바위와 개 바위’가 그대로 있어 범골이라 부르고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우물은‘범골샘’이라 부른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호동마을 뒷산에 있는 호랑이가 자주 출현해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툭하면 기르던 가축을 잡아먹고 사람마저 해치니 마을 사람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매일 호랑이의 못된 심술에 산신령님께 기도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산신령이 노해서 그랬는가 싶기도 하고, 이런 저런 생각에 잠이 잘 안 왔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마을 한가운데의 전동일씨 집안에 있는 범 바위가 마을을 해친다고 믿어 그 옆에 또 하나의 바위를 두었다고 한다. 호랑이 옆에 개(狗) 형상을 한 바위를 두어 가축이나 사람을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호랑이는 옆에 있는 개 바위에게만 관심을 보여 다른 가축이나 사람을 더 이상 해치려하지를 않았다. 산에 있는 다른 호랑이도 역시 이 개 바위에만 눈독을 드리고 다른 것에는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비슷한 방법으로 서울시 관악구 신림동‘호암산(虎岩山)’이 있는데 이 산이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어 호암산의 호랑이가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을 해친다고 보아, 호암산에 개를 닮은‘석구상(石狗象)’을 만들어놓았다. 그런 후로는 한양에 호랑이가 출몰하질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전남 영암군 군서면 월곡리 호동마을도 마을 가운데다가 개 형상을 닮은 개바위를 갖다놓았다. 호랑이가 개바위에 관심을 가 더 이상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데서 착안을 한 것이다.
호랑이 바위와 함께 옆에 개 바위를 두면 호랑이들이 개 바위에 관심이 가고 마을 사람이나 가축들한테는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는 마을 사람들의 방어적(防禦的) 전략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두 바위에 치성을 들었다. 치성을 드릴수록 산에 있는 호랑이 등 사나운 짐승들은 더 이상 해치지는 일을 하질 않았다. 마을에 있는 범 바위와 개 바위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범바위와 개바위로 인한 평온을 유지한 덕분에 마을 사람들은 마음 편하게 농사를 짓는 등의 생활은 보다 더 넉넉해지고 삶은 영화롭게 됐다.
마을 사람들은 산신령이 범 바위와 개 바위로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의 피해가 심해지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바위를 찾아 치성을 들며 더 이상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는 정성을 다해 올리는 기도에 산신령은 지성에 감탄했는지 마을 사람들의 간절함을 알고서, 마을에 있는 범 바위가 마을 사람과 가축을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 산신령이 마을에 있는 바위를“개 바위’로 변신시킨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더 이상 호랑이는 마을에 있는 가축이나 사람을 해치지 않아, 마을은 평온을 유지한 채 호동마을에 처음 정착해 마을을 세운 김해김씨와 이후 이거해 온 천안전씨 두 가문이 대대손손 자손번창을 하며 영화로운 삶을 살게 됐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정월 초하루가 되면 마을의 안녕을 위해 이 두 바위에 금줄을 두르고 치성을 드리고 있다.
호동이라는 지명은 위와 같은 의미에서 발생했으리라고 판단되지만, 한편으로는 임인년이라는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를 보아 호랑이가 10개의 천간 중 임(壬)은 검은색을 상징하며 음양오행설로 풀어 물(水)에 기운이고, 12개 지지 가운데 인(寅)은 호랑이와 나무(木)를 뜻함으로 호동과 주암사이에 범굴샘터라는 범골샘(바가지샘)이 있어 물맞이 좋아 식수로 사용하였으며, 수량도 풍부해 옛날 고을 원님이 이 샘 물맛을 보고 감탄하여 샘 밑에 있는 바위에 비석 모양을 각(刻)하고 문자를 새겨났을 정도로 물이 철철 넘치는 마르지 않은 샘이었다. 이 샘은‘물의 기운’이 있다고 하여 천간과 지지를 들어 인(寅)인 범 호(虎)자와 샘이 있는 마을의 골 동(洞)자를 써‘호동’이라고 지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남 영암군 월곡리 호동마을은 월출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뒤로 월출산이 병풍처럼 에워싸며 마을의 풍광을 아름답게 해주고 있고 마을은 넓은 농토는 많지 않지만 산이라는 운치가 남다르다.
호동마을의 유래를 찾아보면 호동마을은 월출산이 바로 뒷산이어서 옛날에는 이 마을에 호랑이가 자주 출현했다. 마을 중앙에 전씨 종가택(宗家宅)이 있었는데 그곳에 범 바위와 개 바위가 있어서 마을 이름을 범굴이라 하였으며, 지명을 한문으로 바꾸면서 범 호(虎)자와 고을 동(洞)자를 써서 호동(虎洞)이라 하였고, 현재는 종가택은 없으나 두 바위는 있다.
호동마을은 처음 입향(入響)은 지금으로부터 450년 전에 김해김씨 입촌(入村)과 집성촌(集成村)을 이룬 후 100여년이 지나 서호 엄길리에서 전윤(全潤)이라는 분이 호동의 김해김씨 집성촌 서당 훈장으로 입촌하여 춘추몽학(春秋蒙學, 춘추-유학 오경의 하나로 춘추시대 노나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 몽학-어린아이의 공부)에 힘써 명(名) 훈장(訓長)으로 칭송이 자자하였으나 슬하의 아들이 병에 걸려 세상을 뜨자 저 세상에서라도 잘살라고 마을 위쪽에 있는 명지로 보이는 김해김씨 묘의 아래쪽에 이장하였다.
*오경(五經)은‘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春秋)’를 말한 것으로, 이 다섯 경전은 공자시대(BC 551~BC 479)에 편찬되었다.
그곳이 김해김씨 묘와 전씨 묘 사이에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있어 그 바위를 딛고 앉아 대변을 본다는 뜻에서 일명‘부칠명당’이라 한다. 용변을 보면 배설물을 위로 쳐내는 것이 아니라 아래쪽으로 쳐내므로 아래쪽이 명당이어서 먼저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룬 김해김씨의 세(勢)는 점점 약해져 타지로 이거(移居)하고, 찬안전씨 세가 번창하여 호동마을이 전씨의 집성촌이 되었다고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지금도 매년 한식날이면 두 성씨가 시제(時祭)를 함께 지내고 있다.
*부칠은‘붙이다’의 방언이다. 접붙이다의 뜻으로 틈을 하고 있는 바위가 나란히 있어 대변을 보면 바위에 똥이 묻어 갈라진 바위가 다시 붙어진다고 하여‘부칠’이라고 했다. 이곳을 두고 두 기운이 합쳐져 좋은 기운이 솟는 장생발복(長生發福)할 것으로 보고 명당(明堂)으로 여겨,‘부칠명당’으로 부르고 있다. 부칠바위가 있는 곳에는 묘들이 들어섰다. 하나는 김해김씨의 묘가 바위 바로 위쪽에 있고, 하나는 천안전씨 묘가 바위 아래쪽에 조성되어 있다. 이 두 가문의 묘를 두고 바위와 연관된 사연이 있는데 부칠명당이라고 본 틈 바위에서 마을 사람들이 대변을 봤다. 그 대변은 위쪽이 아닌 아래쪽으로 흘렀다. 그래서 대변은 일종의 거름역할을 하듯이 어떠한 생명이 탄생되는 데 있어서 도움을 주기 때문에 변기 모양과 똥이 있는 곳을 풍수적으로 생기의 기운이 있는 걸로 본다.
대변(똥) 꿈은 복(福)을 암시하는 '예지몽(叡智夢)' 이라고 본다. 밭에 똥이 깔려 있는 꿈은 땅에 투자를 하면 큰돈으로 부자가 되는 것을 암시한 꿈이다. 똥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꿈은 재물과 돈이 들어와서 부자가 되는 꿈이다. 산에서 똥물이 흘러내려오는 것을 보는 꿈은 타인의 도움으로 사업이 크게 성공하여 떼돈을 버는 꿈이다. 똥을 내 손으로 만지거나 똥이 내 손에 묻는 꿈은 재물이 급상승하는 꿈이다. 똥이 방안에 가득 차 있는 꿈은 집안에 경사가 생기고 재물과 돈이 들어오는 퍼펙트한 아주 좋은 길몽이다. 똥 꿈은 기본적으로 운기 상승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똥을 잡는 꿈은 강운, 행운을 잡는 것을 의미한다. 잡은 똥이 클수록 얻어지는 행운이 커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특히 재운 등 경제적인 운기가 높아지고 있어 큰 부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본다.
똥을 싸고 있는 꿈 등은 운기가 상승함을 의미하며, 똥을 흘리는 꿈은 운기가 매우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특히 재운이 올라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똥이 옷에 붙는 꿈, 똥이 몸의 어딘가에 붙는 꿈은 좋은 운기를 얻을 것임을 암시하는 길몽으로 재운과 더불어 큰 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똥이 떨어지는 꿈은 예상치 않게 큰 행운이 날아들어 올 가능성이 높다. 바위에서 똥을 쌌다. 똥이 바위에 묻었다. 이런 것들은 위와 같은 똥 꿈과 유사하다.
그래서 호동마을 한가운데 있는 김해김씨 묘와 천안전씨 묘 사이에 두 개의 바위가 마치 대변을 볼‘변기’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일명‘똥 싸는 바위’로 봤다. 똥은 더러운 물질로 취급하지만 음식을 먹고 배설하는 데서 생기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똥이 있는 곳은 지저분하고 불쾌하지만 똥은 거름이 되거나 다른 동물한테 먹이가 되고 하여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똥은 식물이 잘 자라게 하는데 있어서 아주 요긴한 물질이다. 변기 형상을 한 바위, 그 바위에서 본 대변은‘섭취, 소화, 배출, 재생’이라는 순환과정에서 발생한 생산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호동마을에 있는 변기 형상을 한 틈 바위는 좋은 기운을 낳은 바위로서의 풍수적으로 바위는 양(陽)과 남성, 똥은 음(陰)과 여성으로 한 음양의 조화가 있는, 운이 티어서 복이 닥치는 장생발복(長生發福), 즉 영원히 살아있는 오래된 삶을 영위하게 한 장생발복을 기원하는 두 개의 바위로 인하여 땅의 생기가 넘쳐나 사람이 접해 복(福)을 얻는 명당(明堂)이라고 본 것이다.
호동마을의 부칠명당 자리는 사람의 혈관(血管)처럼 수많은 땅의 기운이 흐르며, 그 영향을 받아 산사람은 산사람대로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대로 땅의 기운을 받고 사는 것이다. 즉, 죽은 사람은 땅 속에서 직접 생기를 받아들이기에 산사람보다 죽은 망자(亡者)가 얻는 생가 더 크고 확실하다고 보고 죽은 망자가 얻는 생기가 후손에게 그대로 이어진다고 여기고 있으며, 이를 '동기감응(同氣感應)' 또는 '천지감응(天地感應)' 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생기 있는 땅에 조상을 모시면 생기감응(生氣感應)이요, 생기 없는 흉지(凶地)에 조상을 모시면 흉기감응(凶氣感應)이 된다. 생기감응은 조상을 모신 조상묘의 땅의 기운을 그대로 후손들이 감응(感應)하여 받는다는 뜻이다. 즉, 땅에 조상을 모실 때 조상의 관(棺) 하관시 칠성판이 땅에 닿은 순간부터 후손들에게 생기감응을 이때부터 주기 시작한다.
호동마을의 김해김씨와 천안전씨 두 가문의 묘지는 두 바위를 사이에 두고 조성되어 있다. 이곳을 부칠명당이라고 본다. 특히 바위 아래쪽에 있는 천안전씨 묘가 더 명당이라고 보고 있다.
조상 묘의 터가 좋고 나쁜 기운이 후손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발음(發蔭)' , '발복(發福)' 또는 '동기감응(同氣感應)' 이라고 한다. 조상과 후손은 같은 혈통관계로 같은 유전인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감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유골이 좋은 환경에 있으면, 좋은 기(氣)를 발산하여 자손이 좋은 기를 받게 된다. 나쁜 환경에 있으면 나쁜 기를 발산하여 자손이 나쁜 기를 받는다.
호동마을의 묘 자리 명당 터는 묘지가 있는 부분에 똥을 싸는 바위가 있어 풍수적으로 좋은 명당이라고 봤다. 자손들은 생기의 기운이 상승할 것이라는 풍수가(지관)의 말을 듣고, 장생을 기원하고 발복을 바라는 마음에서 부모를 이곳에 모시게 된 것이며, 이로 인한 후손들이 자손번창(子孫繁昌)과 부(富)와 권세(權勢)를 누리고 있다. 마을에는 호랑이와 관련된 바위가 있으니 호랑이의 영험(靈驗)한 기운으로 마을은 안녕(安寧) 속에 번영(繁榮)을 이루리라 본다.
호동마을의 전씨고택(全氏古宅)은 지방민속자료 제3호로 1844년(현종 10년)에 당시 현감 박정택이 신축하였고, 그 증손자가 천안전씨에게 매도하여 현재까지 전씨가 살고 있다.
호동마을에는 호동 내의 전동일씨 집에 범 바위라 하는 지석묘 2기, 호동마을 앞 논에 8기, 호동주유소 우측 야산에 14기 등 마을 내 총 22기의 지석묘가 조사되었다.
호동마을이 호랑이와 관련된 유래는 주암과 호동 사이의 선암제(禪庵祭)라는 사당(祠堂)이 있어서 부른‘선황골’에 호랑이가 살았다는 바위굴(범굴)이 있어서다. 호도에서 인근 마을 주암으로 넘어가는 등성에 옛날에 주막이 있었는데 이 등성이를 범골잔등이라고 부르고 있다. 호동과 주암 사이에 범굴샘으로 식수로 사용하였다. 바가지샘으로 물맛이 좋고 수량도 풍부해 옛날 고을 원님이 이 샘 물맛을 보고 감탄하여 샘 밑에 있는 바위를 비석 모양으로 만들어 문자를 새겼다고 할 정도로 범굴샘(바가지샘)은 오늘 날에도 마을 사람들에게 목마름을 해소해주고 있다.
호동과 주임사이에 있는 높은 산의 시루봉(380m)이 있다. 시루봉은 시루를 엎어 놓은 것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군서면 도갑리‘도갑사와 호랑이’
월출산은‘도갑사(道岬寺)’라는 유서 깊은 절을 품고 있다. 승려라는 지위보다는 풍수지리학의 대가로 더 알려진 도선국사가 통일 신라 때 창건했다.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상의 월출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어 한눈에 봐도 명당임을 알 수 있다. 도갑사 대응보전은 국내 대응보존 중에서는 흔치 않은 2층을 한 건물이다. 뒤로는 월출산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건물의 위용이 주변을 압도하고도 남음이다. 호랑이의 무서운 기운을 잠재우기 위해 호랑이의 앞발 자리에다 도갑사를 세웠다. 그동안 6·25 등 숱한 전화(戰火)를 겪을 때마다 피해를 입었으나 도선국사 재조명 작업에 힘입어 남도의 불교성지로 발돋움하고 있다.
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다워 예부터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 호랑이가‘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상’이라는 산자락 아래 위치한 도갑사는 해탈문(국보 제50호)과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89호), 문수 보현보살 사자코끼리상(보물 제1134호), 5층 석탑(보물 제1433호), 대형석조, 그리고 도선수미비 등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라고 하였다.도갑사는 신라 말 헌강왕 6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도선국사의 탄생전래는 흥미로웠다. 한 처녀가 통샘에서 빨래를 하다가 오이 하나가 관음천을 따라 떠내려 오자 그것을 건져 먹었다. 그 후에 처녀가 아이를 배어서 낳게 되자 부모가 부끄럽게 여기고는 아이를 구림의 국사방위 위에 버렸다.처녀가 가서 보니 비둘기가 내려와 아이에게 날쌔게 깔아주고 먹이를 갖다 주면서 기르고 있었다. 그 부모들도 신기하게 여겨서 아이를 데려다 기르니 아주 영특하였다. 비둘기숲, 즉 구림(鳩林)이라는 마을 이름의 유래도 여기에서 연유되었다고 한다.
풍수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자신이 태어난 고장이기도하여 월출산 자락인 도갑사가 있는 위치가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모습임을 감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를 한다는 것은 강인함과 명예로움을 의미하며, 천하를 제압한다는 뜻이다. 강렬한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며 정면승부로 돌파하는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의 기개와 패기가 넘친다. 한반도를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반도 형상이 맹호가 발을 들고 동아 대륙을 향하여 나는 듯 뛰는 듯 생기 있게 할퀴며 달려드는 모양새다.
육당 최남선은 중국이 용, 인도가 코끼리, 이집트가 사자, 이탈리아가 늑대의 나라인 것처럼 조선은 호랑이 나라라고 했다.
도갑사의 호랑이는 월출산에서 내려오다가 마을에 다다르자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입을 크게 벌린 채 큰 소리를 내는 표정을 한 곳이다. 호랑이는 놀라운 표정으로 잔뜩 성을 내며 경계를 한 표정이어서 또는 금방 덥석 물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어 도선국사는 도갑사가 있는 지형이라는 것을 알고 이곳에 절을 지으면 호랑이가 사나운 기운을 누그러뜨리는 것으로 판단했다. 자칫 호환(虎患)으로 주민들이 걱정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절을 세운 것이다. 도선국사의 판단에 따라 도갑사를 세운 이후부터는 호랑이의 기운이 좋게 미쳐 평온상태로 유지해가게 되었다.
월출산의 기(氣)가 센데다가 호랑이의 기운까지 더하면 영암은 음(陰)의 기운과 양(陽)의 기운이 조화가 잘 안 돼서 화(禍)를 입게 되고 불상사가 생기는 등의 재앙(災殃)이 따르고 평화롭지 못한 온전치 않는 세상이 될 것임을 우려했던 도선국사였다. 도선국사는“이걸 어쩜 담, 월출산의 기운도 세거늘, 호랑이의 포효도 놀랍도다. 이걸 어찌하노, 어서 이 세찬 기운을 막아야해”하며 호랑이 앞발 부위에 절을 새우기로 마음먹었다. 월출산의 기와 호랑이 기와 충돌도 피하고 너무 기운이 민간으로 미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풍수의 대가인 도선국사가 자신의 고향인 군서면 도갑리에 위치한 도갑사는 월출산 남쪽 도갑사를 등지고 주지봉을 바라보며 넓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도량으로 신라 말 헌강왕 5년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됐다.
도갑사는 산세가 빼어나고 풍광이 아름다워 예부터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월출산의 골짜기의 하나인 도갑리 골짜기에 있다. 도갑사는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형상이라는 산자락 아래 자리하고 있다. 신라의 4대 고승 가운데 한 분인 도선국사가 창건해서 대가람으로 하여 그 뒤를 이은 수미왕사와 연담선사, 허주선사, 초의선사 등 역대 고승들이 수행했던 곳이다.
넓은 경내에 들어서면 고목 옆으로 오층석탑과 화려하고 아름다운 단청으로 수놓은 거대한 대응보전의 웅장한 모습은 분위기를 압도한다. 제법 규모가 큰 2층 구조의 대응보전은 여러 색깔의 단청을 입혔음에도 전체적으로 푸른빛이 감돌아 신비감을 더한다.
도갑사는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해탈문, 마애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문수보현보살 사자코끼리상, 대형석조, 도선수미비 등 많은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도갑사가 있는 곳은 월출산에서 큰골(녹암) 작은골(회의촌) 다음으로 긴 골짜기의 하나인 도갑리 골짜기다. 이 골짜기는 협곡처럼 양 옆으로 높은 산이 솟아 있어 으슥한 골짜기였다. 지금은 저수지가 생겨 예전의 골짜기는 찾아볼 수 없다.
도선국사가 이 깊숙한 곳에 사찰을 세운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현재 도갑사가 있는 곳이‘호랑이’형국으로 봤다. 풍수적으로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모습을 하고 있는 지형이라고 풀었다. 월출산의 호랑이가 이곳을 중심으로 기운을 뻗치게 하고 있다고 본 도선국사다. 그런데 호랑이가 누운 것도 아닌 앞발을 들고서 으르렁거리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경계를 한 표정이고, 무언가 잡아먹겠다는 행동이기도 하는 무서운 호랑이의 표정이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기운이 들었다. 월출산 기도 센데 호랑이의 기운까지 더하니 충격적이었다. 포효하는 호랑이의 기세를 껔어놓지 않으면 큰 일 나겠구나며 매우 우려했다. 그래서 호랑이의 강한 기운을 억제하려 했다.
도선국사가 월출산에 사찰을 세울 생각을 했다. 장소를 알아보기 위해 월출산 곳곳을 찾아다녔다. 그는 풍수사상에 조예가 깊어 절터로서는 어디 좋을지 바로 떠오르고 정확한 혈(穴) 자리를 짚는 능력이 뛰어났다. 도선국사는 풍수지리학에 의거해 좋은 터인지 나쁜 터인지 이 터가 어떤 기운이 솟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예지능력이 있었다.
도선국사가 도갑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월출산 천황봉과 구정봉에서 이어 내려오는 산맥의 기운이 자신을 압도했다. 산의 풍광도 일품이었는데 다가 가장 인상을 받은 것은 산의 기운이었다. 충격적일 정도로 기운이 남달랐다. 온몸을 오싹하게 할 정도로 산의 기운이 강했다. 풍수가인 도선국사는 이 강한 기운이 어디서 솟는지 어떤 영향으로 그런지를 금방 알아차렸다. 바로 도갑사가 있는 곳이 호랑이 형국임을 알았고, 그것도 호랑이가 날카로운 발톱을 한 앞발을 들고 상대를 위협하며 으르렁거리는 표정을 한 산세임을 그는 읽어봤다.
월출산이 바위가 많아 기가 센 건데 원인이 또 다른 데도 있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도선국사는 절을 짓기 위해 터를 알아보려 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호랑이의 형국, 그는 이 형국을 보고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도선국사는 큰 우려를 하며 절을 짓기를 서둘렀다. 이곳에 절을 짓겠다고 알린 후 그는 본당인 대웅전 자리를 정확히 잡아서 구상을 한데로 지시를 했다.
도선국사는 월출산 도갑계곡 상류에 아주 강한 기운이 넘쳐나 그 기운이 너무 세서 기로 인한 해가 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이 기(氣)를 억누른 데는 절(寺)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다. 이 기를 억제하지 못하면 민간은 물론 나라 전체가 위태로울 것이라는 판단을 한 도선국사는 사찰을 짓데 그것도 대가람을 지어야한다고 절을 지을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그려내 내용을 조정이나 작업자들한테 알렸다.
도량은 대부분 좋은 기가 느껴지는 곳을, 곳에 들어선다. 도향은 기도하는 곳이다. 사람의 기만으로는 모자라니 산천의 기운을 더하려는 것이다. 기가 너무 강하면 탑으로 억누르기도 하고, 부족하면 나무나 숲을 조성해 보(補)한다.
그래서 도선국사는 호랑이 형국의 기세를 다스리고자 호랑이 앞발에 해당되는 부위에‘비보(裨補)’사찰을 세운 것이다. 이로 인해 호랑이는 진정을 하며 온순하게 행동을 하여 민간의 피해나 나라에 해가 되지 않았다. 호랑이 앞발에 대응보전을 세워 부처를 모시고 하여 스님의 염불소리에 호랑이는 젊잖게 태도를 보인 것이다.
한 예로 서울시 관악구 시흥동 호암산 기슭에는 호압사(虎壓寺)가 있다. 조선 태종(1407) 때 왕명으로 창건된 호압사는 관악산 주산이기도 한 호암산(虎岩山)은 산의 형세가 범(虎)이 걸어가는 형국을 하고 있어서 풍수적으로 과천과 안양에 호랑이로 인해 근심걱정이 많은 등의 호환(虎患)이 끊이지 않게 한다하여 그 산세를 누르기 위해 비보사찰로 호압사를 창건하였다. 사찰의 창건과 관련해서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모두 호랑이 형상을 한 산봉우리의 꼬리 부분에 절을 지어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해 절을 지었다는 풍수지리설과 비보사찰(裨補寺刹)의 내용이 들어있다.
또한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에‘사자암(獅子岩)’이 있다. 호랑이 산의 기세를 다스리고자 가까운 곳에 사자암을 세웠다. 조선 태조 5년(1396) 무학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사자암은 풍수지리적으로 사자가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 사자암 남쪽에 달리는 호랑이를 닮아 이름 붙여진 호암산의 형세를 누르기 위해 사찰 이름을 사자암으로 지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호랑이를 맞설 동물이 사자인 것처럼 호랑이 형상의 산을 다스릴 수 있는 사찰의 이름으로 사자암이 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자암은 삼성산의 지봉인 국사봉 자락에 터를 잡고 있다. 호암산은 범 모양과 같은 바위가 있으므로 이름이 붙여졌다. 윤자(尹慈)의 설(說)에 의하면 금천 동쪽에 있는 산의 우뚝한 형세가 범이 가는 것 같다. 또 험하고 위태한 바위가 있는데 호암(虎岩)이라 부른다. 술사(術士)가 보고 바위 북쪽 모퉁이에 절을 세워서 호갑(虎岬)이라 하였다. 또 북쪽 10리 지점에 사자암(獅子岩)이 있다. 모두 범이 가는 듯한 산세를 누르려는 것이었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해 났다.
산의 형세가 범이 걸어가는 듯이 하므로 산의 북쪽에 절을 세워 호갑(虎岬)이라 하고, 다리도 궁교(弓橋)로 하고, 암자도 사자암(獅子庵)이라 하여, 산을 억누르려 했던 것이다. 아치형 다리의 궁교는 활로 호랑이를 쏘려는 것이고, 사자암은 사자의 기세로 호랑이가 설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흔한 비보풍수적인 전설이다.
*비보풍수(裨補風水)는 약하거나 모자란 것을 도와서 보태거나 채운 것으로, 어떤 지역의 풍수적 결함이 있는 경우에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것을 의미를 말한다.
*고려국사도선전(高麗國師道詵傳)에서는 사람이 병이 들어 위급할 경우에 혈맥을 찾아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면 곧 병이 낫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천의 병도 절을 짓거나 불상, 탑, 부도 등을 세우면 이는 침을 놓거나 뜸을 뜨는 것과 같고, 이를 비보(裨補)라고 설명한다.
*우리나라의 비보풍수는 신라 말기 도선국사의 비보사탑설(裨補師塔說)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다. 신라 말기의 사회는 혼란과 분열이 극심하고 기근과 자연재해로 백성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도선국사는 그 원인이 국토가 병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지방 각지의 적절한 지점에 사탑(寺塔)을 설치하여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에서도 여러 비보적인 방책을 설치하였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한양의 조선에 해당하는 관악산을 화산(火山)이라 여겼고, 따라서 그 당시 목조건물이었던 궁궐에 화재 발생을 예방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관악산 화기를 누르기 위해 시행한 풍수 비보로 관악산 정상에 연못을 파게 하였다. 또한 광화문 앞에 해태(해치)를 설치하였는데 해태가 불을 보면 물을 뿜어 화재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도선국사는 영암 월출산 도갑사가 있는 곳이 호랑이가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곳이라고 호랑이의 형국을 한 호기(虎氣)가 가장 센 곳이라고 봤다. 도선국사는 행어 맹호가 마을을 해칠까봐 호랑이 앞발 부분의 위치에 대웅보전 터로 잡고 절을 세워 호랑의 기운이 적절하게 미치기를 바랐다. 도갑사 대웅보전을 두고‘호웅보전(虎雄寶殿)’이라고도 한다. 도갑사는 나쁜 것을 막아주는 비보사찰이다. 호랑이는 두려움과 친숙함의 대상으로 여기며 가난과 역병을 몰아낸다고 봤을 정도로 예부터 호랑이는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영험한 존재로 여기는 등의 영험한 기운을 가진 동물로서 상징성을 띠었다.
민화에서는 나쁜 기운을 막아준다는 의미로 호랑이를 그리고 있다. 호랑이는 까치보다 훨씬 힘이 세지만 무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희화해 돼있다. 각종 재난을 막기 위한 무속신앙의 대상으로서도 호랑이는 즐겨 찾는 대상이다. 호랑이는 사나운 동물이기도하지만 액운 등을 막아주고 안녕을 위해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봤다. 호랑이는 영물로 신성시하는 등의 추앙을 받는 존재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뭔가 부족하고 못 된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에 있는‘도갑사’는 호랑이가 앞발 들고 포효하는, 날카로운 발톱을 보인 앞발에 대응보전을 두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호랑이의 강한 기세, 즉 호랑이의 성냄을 달래면서 기세를 억누르기 위함이며, 또 한편으로는 호랑이의 영험한 기운을 받기 위함이다. 도갑사는‘국태만안(國泰民安)’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세웠다. 또한 월출산의 기운이 너무 세, 그 기운을 조절하기 위해서였다.
도선국사는 도갑사 호랑이의 표정은 사나운 표정으로 봤다. 호랑이가 크게 포효하는 것을 보는 꿈은 관직(官職)에 나아가거나 승진(昇進) 등을 하거나 크게 출세하(出世)게 될 꿈이라고 해몽을 한다.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호랑이지만 꿈에서는 길몽이라고 하니 어쩜 상서로운 징조가 아닌가한다.
도선(道詵)는 법력이 깊어 국사(國師)로 추앙받는 스님이다. 세수 15세에 불문에 들어 화엄(華嚴)을 통달하고 선종으로 개종하여 선승으로 이름을 높였다. 무엇보다 음양풍수(陰陽風水)에 밝아 여러 사찰을 창건하고 중건했으며, 나라와 사람의 앞날을 예견하기도 했다.
월출산 자락 도갑계곡 상류에 대가람을 지은 도선국사는 전국을 돌며 그는 사찰을 세웠다. 사찰마다 사연이 있고, 특히 백성과 나라를 위한 절로서의 역할을 띠게 했다. 국태민안에 신경을 많이 썼던 도선국사의 백성과 나라 사랑은 지금의 절이 말해주고 있다.
절집을 찾으며 위안을 얻는다. 때로 과하게 화려한 가람은 마음을 허탈하게 하고, 왕실과 귀족에 지나치게 기대는 승려들을 보면 열리던 마음의 문이 도로 닫히기도 한다. 그러나 세속에 비할 바는 아니니 굳이 담아두려 하지 않는다. 방편이라고 모두가 이루지 못하는 욕망에 헐떡이니 위로가 되어주고, 더 많은 중생을 껴안기 위함이다. 석가의 말씀은 고뇌의 행로만큼 난해하지만 깨우친 진리이기에 마음은 맑아지고 고개는 숙여진다. 여러 의미에서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의 정신, 전하는 사람이야 어떠하든 불가(佛家)의 참 정신을 깊이 알고 싶은 도갑사다.
산허리에 지은 절인‘도갑사(道岬辭)’, 그 이름만 들어도 도갑사가 어떤 사찰인지 짐작이 간다. 절로 향하는 산길로 들어서니 나이테가 수십 개월 훨씬 넘을 법한 소나무와 각종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지어 절이라도 하듯 허리를 굽힌 채 늘어서있다. 이른 봄 실바람의 찬 기운이 정신을 맑게 하는데 은은한 솔향까지 더해지니 마음도 산뜻하다. 간혹 새들이 반가운 소리를 내면 긴 계곡 길도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내 마음의 곡을 보고 새들이 노래하는 것 같아 기분은 싱글벙글이다.
오랜 벗이었던 주지 스님을 찾아서
발걸음 한 영암의 천년사찰 도갑사
법력 깊어 칭송받는 도선국사 혼기
미래 내다보는 신통에 대해 묻거늘
천지자연 사람 하나 되는 것이라네
음양풍수의 본질일 뿐 대답 하도다
풍류도 되살리려 한다는 신통 말에
장차 기둥이 되라는 간절한 부탁은
백성 희망의 나라 앞날에 환희로다
어디를 가든 서로 소식을 전해 듣게 되고 지나는 길이 있으면 들려 차담(茶啖)을 나누고, 때로는 짓궂은 장난도 마다하지 않는다. 구르듯 달려오는 발소리에 눈길을 보내니 주지 스님이다.“주지 스님이 아니십니까”,“절집 스님이 무슨 달음박질이신가요”.“예끼! 반겨줘도 탓하네!!”덥석 서로의 두 손을 맞잡고“허허!”너털웃음을 나누다 주지 스님은 목소리를 낮춘다. 주지 스님은 도갑사를 찾은 나에게“인연일세, 귀한 분이 와계시네”,“누구”물음에 주지 스님은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도선국사님일세”,“며칠 전에 문득 오셔서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하듯이 머물고 계시네”하며 주지 스님은 달음박질하며 맞이한 나를 도선국사에게 인사를 시킬 것 같은 도갑사의 따스한 기운이다.
도갑사 대응보전 앞에는 탑과 느티나무 고목이 서있다. 이 탑과 느티나무는 음양풍수에 의해 세워졌고 심어졌다. 기를 조절하기 위한 인의적인 작업이다. 도량은 대부분 좋은 기가 느껴지는 곳을, 곳에 들어선다는 것을 극히 잘 안 도선국사는 사람의 기만으로는 모자라니 산천의 기운을 더하려는 것이었다. 기가 너무 강하면 탑으로 억누르기도 하고, 부족하면 나무나 숲을 조성해 보(補)하려고 탑과 나무를 조성했다, 특히 호랑이의 기세가 너무 세니 이 기운을 다스리기 위해 탑을 세웠고, 혹시 기운이 쇠약해 질까봐 나무를 심어뒀다. 사찰마다 당산나무 같은 고목들이 있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런 깊은 뜻을 보인 풍수(風水)의 대가 도선국사의 풍수사상에 입각한 선견지명을 이 시대에도 본받을 일이다. 의미 있는 일로 타당성이 있어 내 집 앞에 나무 한 구를 심어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마을 앞에 당산나무는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서 심기도 했지만 마을의 기를 더 보(補)하기 위해 심었다.
월출산 도갑계곡 상류 산허리에 호랑이의 기세를 막지 못하면 백성과 나라가 위험해진다는 도선국사의 근심걱정,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도갑사라는 절을 세운 것은 오로지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진정한 마음이었다. 도갑사가 있는 곳을 찾았을 때 기운이 너무 세 놀라운 표정을 한 그때의 도선국사의 모습이 상상이 되어 진다.
서호면 화소리 화소마을‘김극조 묘 터, 김완 장군과 호랑이’
9세손 김완(시호는 양무공)은 정유재란 때 남원 등에서 큰 공을 세웠고, 이괄의 난을 평정한 선봉장으로‘학성군’에 봉해졌다. 인조는 그를 황해도병마절도사를 제수하고 영정(보물 제1305호)을 하사했다. 부친 묘 터에 관련 호랑이 설화를 비롯해 말 무덤, 복수다리, 피바위(血岩) 등 스토리가 전해진다.
영암의 전설 김완 장군과 몽해(서호면 몽해리)영암에서 구림을 지나 학산 쪽으로 4km를 더 가면 서호면 화송리 화소가 나온다. 이 마을서 1.5km 거리로 바라보이는 곳에 몽해라는 마을이 있다. 옛날 이곳은‘九音坪’또는‘꿈바다’,‘굼바대’등으로 불렀다. 지금은 들이 되었지만 얼마 전까지도 영암만 바닷물이 이곳까지 넘실거렸다. 이곳을‘꿈바다’라 부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백 년 전 김완(金完) 장군(1577∼1635)이 태어난 전설 때문이다.
김완 장군은 김극조(1534∼1591)와 천안 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천안 전씨는 김완을 임신할 때 영암만 바닷물이 그의 치마폭으로 몰려드는 꿈을 꾸었다. 이 때문에 꿈바다가 된 것이다.
화소는 지형 전설에 알맞게 마치 학이 알을 품고 있듯이 높이 3m, 넓이 10평가량의 알섬 일곱 개가 마을 앞에 5백m 간격으로 있었으나 1973년 경지정리 때 다 없어지고 한 개만 남아 있다. 김완은 그의 나이 15살 때 아버지가 억울하게 옥사하는 일을 당했다. 그의 아버지 극조는 무과에 급제해 만호(萬戶)를 거쳐 광양 현감을 지낼 때 왜구의 침노가 있을 것을 예견하고 군인을 모병해 훈련을 시키다가 1590년 이성 현감으로 옮겨가 있었다. 그의 후임으로 광양 현감이 되어간 한덕수는 정여림 모반사건으로 동인의 이발 일당이 숙청당하자 서인에 아부하기 위해 김극조는 이발형제와 더불어 난을 일으키기 위해 광양에 군대를 모아 조련한 사실이 있다고 거짓 모함을 했다.
김완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김극조는 광양(光陽) 현감으로 있다가 이성(利城) 현감으로 옮겼는데, 후임으로 광양 현감이 된 한덕수의 모함을 받았다. 조정에서는 즉시 김극조를 감옥에 가두고 모진 고문을 가했으나 사실과 다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출옥 전인 1591년 3월 12일 옥사하고 말았다. 15세의 김완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몽해에서 10리[약 3.93㎞]쯤 떨어진 서호면 엄길리에 이르렀다.
이때 호랑이가 김완의 앞을 가로막고 비키지 않았다. 호랑이가 무언가를 부탁하는 듯 하는 표정을 지으므로 호통을 쳐서 길을 비키라 했으나 듣지 않는지라 자세히 살핀즉 호랑이 목에 사람의 뼈가 걸려 있었다. 김완이 입을 벌리고 뼈를 꺼내주었다. 호랑이는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고개를 인사를 하듯이 숙이더니 김완의 옷자락을 물고 이끌었다. 인도하듯이 끌고 가는지라 이상히 생각하면서 따라가 보았다. 20리(7.86Km) 쯤 북행해 매월리에 이르러 주룡진을 내려다보는 산에 올라 앞발로 땅을 후비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그곳은‘갈용음수(渴龍飮水)’터라 하는 명당이었다. 김완은 그 명당에 아버지를 모셨다. 후에 김완은 1615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다.
오늘날 이 묘 터를 갈용음수(渴龍飮水)터라고 부른다. 이 묘 앞에 대리석 비석을 세웠는데, 근래에 비석에 까맣게 끼어 있던 바위 옷이 저절로 벗겨져 흰 빛을 내는지라 사람들이 金門에 길조가 비칠 징조라고들 한다.
김완은 정유재란 때 참전, 남원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1604년 검모포 만호로 있다가 31세 되던 당해 고향에 돌아와 3년을 시묘했다. 그는 시묘가 끝나자 다시 아버지 원수를 갚기로 작정하고 조정에 붙어 벼슬을 살던 한덕수를 찾아가 궁에서 말을 타고 나오는 것을 화살로 쏘았으나 실패하였다. 기록으로는 4일 만에 서울에 당도했다고 되어있으나 전설로는 당시 영암 군수 조찬한과 저녁에 바둑을 두고 나가 축지법으로 몇 시간 만에 서울에 당도해 암살에 실패하고 그 날 밤 영암으로 되돌아와 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 영암 군수를 만났기 때문에 죄가 없는 것이 판명되어 출옥했다고 전해 온다.
또 그는 어렸을 때 월출산 용암사에서 공부를 했는데 누님인 서희효의 처와 석벽에 맨 손으로 그림 그리기 시합을 한 것이 1972년 국보 제144호로 지정된 구정봉 7백m 밑에 있는 마애여래좌상이라고 전해 온다. 그러나 이 조각품은 김완의 작품이 아니라 신라통일 시기나 고려 초 작품으로 잘못 전해진 이야기다. 물론 구림 뒷산의 성도 김완장군과 관련지어 말하기도 하나 백제 때 산성이다.
김완은 뒤에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학성군에 봉해졌다. 전라우수사를 지냈으며 인조대왕이 생존영을 내려 보냈고 죽은 뒤 신도비를 해남 계곡면 선진에 세웠으나 역적 날 자리에 세웠다는 말이 전해져 시종면 만수리로 옮겼다. 만수리는 신도비가 서고부터 악역이 침노하지 않는다는 말이 전해 온다. 이곳에 말 무덤도 있다.
서호면 화송리 송정마을‘소나무를 지킨 호랑이와 처녀’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 송정마을에 전해 오는 소나무와 우물에 올리는 당산제의 유래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소나무를 지킨 호랑이와 처녀」는 마을이 여자가 누워 있는 형상인 이유와 마을에서 소나무와 우물에 대한 당제를 오랫동안 올리게 된 유래를 뒷받침하는 이야기이다. 당제는 1589년(선조 34)경부터 매년 정월 대보름을 기하여 지낸다. 1994년 영암 문화원에서 발행한『영암의 전설집』에 수록되어 있다. 서호면 화송리 송정 마을은 예부터 큰 소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가끔 월출산에서 소나무 밭까지 호랑이가 내려와 마을 사람들은 호환(虎患)을 막기 위해 큰 소나무에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지낸 뒤로도 호랑이가 나타나기는 했으나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제사를 준비하는 한 달 동안 마을에서는 부녀자의 문밖출입을 금하였고 소나무 근처에도 금줄을 쳐 놓았다. 호랑이는 제사를 준비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이 금기를 잘 지키는지 감시하였다.
또 마을에 사는 순녀라는 처녀를 오랫동안 연모하였기에 순녀 역시 잘 지내는지 지켜보았다. 어느 날 순녀의 집에 외할아버지가 찾아왔는데, 외할아버지가 집에 돌아가면서 순녀의 집에 모자를 두고 갔다. 순녀는 추운 바람 속을 걸어갈 외할아버지가 걱정되어 그만 금기를 깨고 집 밖으로 달려 나가 모자를 할아버지께 건네주었다. 누군가가 금기를 깼다는 것을 눈치챈 호랑이는 크게 격노하였다.
순녀는 자신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자책하며 순순히 호랑이의 희생양이 되었다. 순녀가 죽은 후에야 호랑이는 희생양으로 바쳐진 제물이 순녀라는 것을 알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얼마나 울었는지 그때 흘린 호랑이의 눈물이 모여 우물이 되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순녀의 넋을 위로하고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소나무와 우물에 당제를 올리고 있다.
학산면 묵동리 호동마을‘범죽개’
학산면 묵동리 호동마을에는‘범죽개’가 있다. 묵동마을 연소태 남쪽 골짜기에는 호랑이를 잡아 이곳에서 죽였다고 한다. 그래서 범을 죽게 했다고 해서‘범죽개(虎死嶝)’라고 부른다.
전설에 의하면 호동마을 뒷산에는 호랑이들이 우글거렸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사람과 짐승을 해치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산에 나가 호랑이 사냥을 했다고 한다. 호랑이한테 물려 사망을 하기도 했고, 그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마을의 안녕을 위해 마을 사람들은 협동심으로 호랑이 퇴치를 위해 함께 나섰다. 올가미 등을 설치해 호랑이를 산채로 잡아 마을 남쪽 골짜기에서 잡은 호랑이를 죽이는 의식이 있었다. 호랑이를 잡아 죽게 했다고 해서 방언으로 범을 죽게 했다고 하여 골짜기를 범죽개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도포면 도포리‘도포줄다리기와 호랑이’
도포 줄다리기에 얽힌 전설을 보면 도포 해창만 바닷물이 때맞추어 드나들던 시절이었다. 인근에는 아직 정착해 생활하는 사람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위는 산림이 우거져 소나무가 푸른 평야를 이루었다. 맹수를 잡아 생계를 꾸려 가는 포수들이 북쪽을 떠나 이곳을 거쳐 월출산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강 포수와 김 포수는 설악산과 내장산을 두루 다니며 호랑이와 멧돼지 등을 잡았다. 암벽이 많은 월출산에 사는 호랑이의 호피는 다른 호랑이 가죽보다 비싸다는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월출산으로 왔다. 두 사람은 월출산에서 모래톱에 찍힌 멍석만큼 큰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호랑이는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였다. 두 사람은 그 호랑이들만 잡으면 이제 사냥을 그만두기로 하고, 우선 호랑이의 은신처를 탐색하고 유인하기 좋은 장소도 물색하여 두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십 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노려보고 있는 호랑이 두 마리를 발견하였다. 그 호랑이들은 가운데에 있는 멧돼지 떼를 사이에 두고 서로 차지하기 위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강 포수와 김 포수가 숨어서 호랑이들을 살펴 보니, 매번 멧돼지를 놓치고 호랑이들끼리만 싸울 뿐이었다.강 포수와 김 포수는 멧돼지를 잡아 호랑이를 유인하기로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멧돼지를 잡아서 묶어 두자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나 으르렁거렸다. 강 포수와 김 포수는 등을 맞대고 서서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바로 그때였다. 한낮인데도 해가 구름에 가려 칠흑같이 어두워지더니 바람이 불고 천둥과 번개가 쳤다.그때 호랑이들이 멧돼지가 있는 쪽이 아니라 강 포수와 김 포수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깜짝 놀란 강 포수와 김 포수는 온몸이 얼어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호랑이들은 두 사람이 아니라 서로를 향해 맹공격을 퍼부었다. 간신히 숨을 돌린 강 포수와 김 포수는 무릎을 꿇고 신령님께 두 마리 대호를 잡게 해 달라고 간곡하게 빌었다. 그리고 시위를 힘껏 당겼다.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더니 호랑이들이 굳어서 그대로 산이 되고 말았다.강 포수와 김 포수가 떠난 자리 양쪽 끝에는 화살촉이 매인 큰 밧줄만이 남아 있었다. 그 후로 산 아래 사람들은 밧줄 모양과 산 모양을 보고 정월 5일과 11월 칠석날에 줄다리기 시합을 하였다.
2022년 임인년을 맞아 영암군에 호랑이에 관한 지명을 고찰해봤다. 지명은 주로 입으로 입으로서 전해지는 구전(口傳)되어진 것을 기록하지 않아서 자칫 잊혀 지거나, 사라지거나, 왜곡되는 현상을 빚는다. 지명유래는 주로 나이 드신 분들에 의해 파악이 되어 지고 있으며, 이 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지명유래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더 이상 들을 수도 알 수도 없다.
영암군에 호랑이와 관련한 지명이 많이 있을 것으로 보고 고찰해봤지만 생각한 만큼은 적었다. 혹시 있는 데도 파악을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 글에 대해 마침표가 아닌 쉼표와 물음표를 남겨두고자 한다.
예로부터 호랑이는 산중의 왕이며, 날쌔고 용맹스런 동물로 여겨왔다. 호랑이를 우리 조상들은 공포와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영험한 산의 신묘한 기운을 가진 호랑이를 영물이라고 봤다.
좌청룡, 우백호
호랑이는 풍수지리에서도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상징적 동물 중 하나다. 좌청룡.우백호.전주작.후현무, 즉 백호(白虎)가 서쪽을 청룡(靑龍)이 동쪽, 주작(朱雀)이 남쪽, 현무(玄武)가 북쪽을 담당한다.
서울이 조선시대부터 수도가 된 것도 풍수지리가 작용했다. 경복궁이 서쪽에 있는 인왕산이 백호에 해당한다. 북악산이 주산(主山), 남산이 안산(案山), 낙산(동대문 근처)은 청룡에 해당된다.
맹호출림형(猛虎出林形)
관상에서는 호랑이 얼굴 또는 맹호출림형이 존재한다. 호랑이 얼굴은 이마가 모나고 귀가 작고 입이 크다. 특히 사람을 쏘아보는 눈빛이 좌중을 압도한다. 호랑이상은 일반적으로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외로울 수밖에 없다.
민족과 함께한 호랑이
호랑이는 우리 민족과 오랜 기간 함께해 왔다. 이에 민담, 속담, 민화 등에 자주 등장한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에는 범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고 기록됐다. 호랑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풍속은 원시부족국가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유사는 호랑이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우리나라 문헌이다. 주로 영웅들의 보호자이자 양육자, 국가 시조의 조력자로 나타난다. 잘 알려진 단군신화를 비롯해 후백제를 창건한 견훤이 어렸을 때 범이 와서 젖을 먹여 키웠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호랑이를 산군(山君)이라 하여 무당이 진산(鎭山)에도 도당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는 민가의 벽에 닭이나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 재앙과 역병을 물리치고자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호랑이삼재부적은 이런 민간신앙을 잘 드러낸다. 삼제는 풍(風), 수(水), 화(火)에 의한 재난을 의미한다. 정초의 세화(歲畵)나 부적에 호랑이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호랑이의 용맹성을 바탕으로 벽사(辟邪) 행위와 완성을 꾀하려는 의도다.
민화에서는 호랑이가 까치와 함께 자주 등장한다. 호랑이 민화는 좋은 기운을 가져온다는 길상적(吉祥的) 의미를 담고 있다. 민간에서는 호랑이 그림을 걸어두면 관직이 높은 귀한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나무 숲에 있는 호랑이 그림은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을 통해 병귀(病鬼)를 쫒고자했다.
이러한 호랑이에 관한 의미적 해석을 보면 영암군 지역에 있는 호랑이와 관련된 지명은 길상적 의미로 부여하고 싶다.
호랑이 꿈
꿈에서 호랑이는 대체로 훌륭한 인물, 큰 권세, 큰 직책, 큰 업적이나 작품 따위로 상징되는 표상물이다. 관직이나 단체에 있어서는 우두머리를 의미한다.
호랑이가 자신을 따라오는 꿈은 귀인 또는 협력자로 인해 원하던 일이 풀리고, 사업자라면 사업의 성공가능성이 높아질 꿈이라고 한다.
호랑이가 달려드는 꿈은 큰 복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형국이라 직장에서 승진허거나 멋진 이성에게 고백을 받을 꿈이란다.
호랑이와 싸우는 꿈은 호랑이를 이겼다면 권력자를 굴복시키거나 사업이나 시험 등 어려운 일이 원하는 데로 성사될 것임을 예시한다.
호랑이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은 입신양명, 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크게 떨칠 꿈이다. 합격, 승진, 당선, 성공 등을 상징하는 대 길몽으로 크게는 대통령이 될 꿈이다.
호랑이가 발을 핥는 꿈은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 있는 지격이나 권력을 손에 넣게 될 꿈이다.
커다란 호랑이가 집으로 들어오는 꿈은 직장이나 관계기관 사업체 등에서 우두머리의 자리에 앉게 된다. 또는 권리나 업적을 통해 어떤 기관이나 회사에서 부귀해질 꿈이다.
호랑이가 집을 지켜주는 꿈은 최대의 길몽이다. 권세와 명예를 가진 사람이 자신을 후원해줄 일이 생기거나 최대의 권세나 명예, 재물운, 이권을 획득하게 된다. 또한 예술가라면 훌륭한 작품을 낼 수 있게 될 꿈이다.
호랑이가 달려들어 품에 안는 꿈은 태몽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가장 많다. 또는 호랑이로 표상되는 정대 권력이나 어떤 권리의 획득을 예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꿈은 마치 돼지가 품안에 달려드는 꿈과 같이 어떤 이권이나 권리를 획득하게 될 것을 예시한다.
백호가 집이나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은 지위와 명예가 높아지거나 영화로움 및 귀공자를 가지게 될 태몽이다.
호랑이게 물리는 꿈은 호랑이로 상징되는 명예나 재물, 승진 등의 큰 세력권 안에 들어가 장차 큰 이권이 주어질 꿈이다.
자신이 호랑이게 물리는 꿈은 어떤 세력이나 단체 기관 등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이권이나 권리, 재물들을 얻게 될 것을 예시한다. 학생이라면 시험에서 1등을 하게 될 꿈이다.
큰 호랑이가 꽃밭에서 자신을 업고 크고 호화로운 집으로 들어가는 꿈은 어떤 부귀한 명예로운 사람이나 단체의 힘을 얻어 높은 지위로 나아가 고위층관리가 되거나 정치가가 될 꿈이다. 여성인 경우에는 그런 신분의 남편을 얻어 부귀영화를 누릴 꿈이다.
호랑이를 삼키는 꿈은 이런 꿈을 꾸고 아기를 낳으면 장차 그 아이는 훌륭하고 권세를 잡는 인물이 될 것이다.
토끼만한 동물이 점차 커져서 호랑이가 되는 꿈은 이 꿈은 작은 일에서 시작하여 점차 번창해질 꿈이다.
호랑이를 타고 대궐이나 큰 저택 등의 대문으로 들어간 꿈은 협조자나 정당 단체 등의 추대를 받아 큰 기관이나 단체의 우두머리로 출세를 할 꿈이다.
호랑이가 자신의 집문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꿈은 크게 성공하여 사람들에게 널리 이름이 알려지며 명성과 명예 등이 쌓게 될 꿈이다.
임산부가 호랑이 새끼를 낳은 꿈은 임산부는 임신을 하여 용맹스럽고 두뇌가 뛰어난 장군을 낳을 태몽이다.
호랑이가 크게 포효하는 것을 보는 꿈은 관직에 나아가거나 승진 등을 하거나 크게 출세하게 될 꿈이다.
호랑이를 쓰다듬는 꿈은 높은 지위와 재물을 얻게 되고 크게 성공하게 될 길몽이다.
호랑이나 사자를 타고 달리는 꿈은 권력을 가진 인물이나 단체의 도움으로 출세하여 지위가 상승될 꿈이다.
호랑이를 타고 높은 산꼭대기에 오르는 꿈은 한 사람의 통치자가 되거나 정당의 대표가 될 꿈이다.
호랑이가 옆이나 뒤에서 졸졸 따라다니는 꿈은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줄 협조자를 얻거나 사업이 잘 추진되어 크게 성공할 꿈이다.
호랑이의 가죽이나 털로 된 물건을 얻는 꿈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협조자를 만나게 되고 그로 인해 재물과 권력 등을 얻게 될 꿈이다.
호랑이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꿈은 사회적으로 크게 반응을 일으킬 일이나 모든 사람에게 소문날 일이 생기게 된다. 또한 출세하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환란이 닥쳐 올수도 있는 양면성이 있는 꿈이다.
호랑이한테 물려 상처가 나는 꿈은 권력을 잡게 되거나 직장에서 진급한다. 또한 사업가라면 사업체가, 예술가라면 자신의 작품이 크게 성공하고 그래서 명예나 권세를 얻게 될 꿈이다.
검은 호랑이가 나오는 꿈은 검은 호랑이는 어려움이나 두려움, 혹은 강력한 도전자를 의미한다. 진행 중인 사업에 경쟁자가 나타나서 일에 어려움이 생길 꿈이다.
호랑이가 자신의 집과 방으로 들어오는 꿈은 기혼여성이나 임산부가 이런 꿈을 꾸며 태몽으로 장차 훌륭한 인재가 될 아이를 낳게 될 꿈이다. 일반이라면 귀인의 방문을 받게 되거나 사업적으로 많은 도움을 줄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집 문밖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호랑이를 보는 꿈은 조만간 큰 인재를 만나 도움을 받거나 예술인인 경우 훌륭한 작품을 완성하게 될 꿈이다.
새끼 호랑이를 한꺼번에 두 마리 안은 꿈은 태몽으로 형제를 두게 되고 장차 그들이 자라나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사업가가 되어 성공할 꿈이다.
상대의 얼굴이 호랑이 모습으로 변하는 꿈은 뛰어난 실력자가 나타나 내가 하는 일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게 도움을 받을 꿈이다.
산속이나 굴속, 바위틈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는 꿈은 연구기관이나 학문분야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올라서게 된다. 그것이 태몽이라면 그 아이는 학구적인 일에 관련하여 종사하게 된다.
동물원으로 소풍가서 호랑이를 보는 꿈은 관청이나 공공기관의 관리나 상응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성공하게 될 꿈이다.
초원에서 많은 호랑이가 뒹굴며 노는 것을 보는 꿈은 주위에 많은 인재들이 있어 그들의 도움을 받게 되거나 위인전 같은 책을 쓰거나 그것을 읽을 일이 생길 예지다.
바라보고 있는 산이 호랑이로 변하는 꿈은 정치가, 권력가, 사업가로서 큰 세력을 잡게 될 꿈이다.
호랑이가 화려한 금관을 물어다 놓는 꿈은 승진하여 입신양명하게 될 수 있으며 재물, 돈, 물품, 입학, 합격, 당선, 경사 등의 길몽이다.
호랑이가 내 앞에서 절하는 꿈은 호랑이는 영물이라 은혜를 잘 갚으니 시험합격이나 재물 운이 상승하여 부를 쌓게 될 꿈이다.
사나운 호랑이게 물리는 꿈은 호랑이는 용맹함과 왕좌를 의미하므로 출세가도를 달릴 상징의 꿈이다, 승진하거나 영예를 얻게 되고 지위가 올라가는 등의 좋은 일이 생긴다.
저도 2022년 임인년 호랑이의 해를 맞아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 절을 넙죽하는 것을 보면 참 좋겠습니다. 이글을 보시는 여러분도 영험한 호랑이 꿈을 꾸시고 행복한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호랑이의 상징성
2022년 임인년 호랑이는 흑호(黑虎)라니 매우 귀한 호랑이에 속한다. 민간신앙 호랑이, 풍수 속 호랑이, 설화 속 호랑이, 민화 속 호랑이, 깃발 속 호랑이, 대밭 속 호랑이, 곶감에 겁먹은 호랑이, 풍수 속 호랑이, 지명 속 호랑이 등 명칭을 가진 호랑이는 인간의 삶 속 깊이 친화되어 전한다.
목숨을 앗아가는 호환에도 호랑이는 전통적으로 영험한 동물로 대접받았다. 조상들은 액(厄)을 물리치고 복(福)을 부른다고 믿었다. 이 때문에 매년 정초 때면 궁궐을 비롯해 민가에서는 대문에 호랑이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배경이 깔렸다. 호랑이는 범바위, 호암, 범골 등 전국 곳곳의 지명으로도 남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마스코트도 호랑이다. 2022년 도코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단의 응원 문구는‘범 내려온다’였다. 검은 호랑이는 리더십과 독립성이 강하며, 열정적이고 큰 야망을 이룰 수 있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임인년 새해 대한민국이 검은 호랑이의 힘찬 기운으로 막혀있는 각종 현안과 세워놓은 계획들 모두 해결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22년은 검은 호랑이해다. 10개의 천간(天干) 중 임(壬)은 검은색을 상징하며, 음양오행으로는 물(水)의 기운이다. 12개 지지(地支) 가운데 인(寅)은 호랑이, 나무(木)를 뜻한다.
물을 머금고 피어나는 새싹처럼 무엇이든 시작하기 좋은 기운이다. 새해 아침 파종했던 씨앗은 땅의 기운을 받아 싹이 물씬하고, 아름(美)을 머금고 꽃피어 세상은 화사함이니, 맺은 그 열매는 달지 않겠는가하여라. 호랑이의 호기(虎氣)는 분명 상서로운 기운일 것이다.
춘(春)은 탄생이니 희망의 기운이다
하(夏)는 성장이니 번성의 기운이다
추(秋)는 완성이니 풍요의 기운이다
동(冬)은 여유이니 평안의 기운이다
춘하추동 기운에 호랑이의 기운으로 더해지는,
2022년 壬寅年
10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중 임(壬)은 눈비와 바다.강을 나타내고, 영리하고 재주가 많음, 정직.헌신.봉사적이며, 경우도 바름, 자신을 잘 드려내지 않는 신비주의를 의미한다. 육십간지 중 39번째로 임(壬)이 흑색, 인(寅)은 호랑이를 의미하는 검은 호랑이의 해, 2022년 새해에는 더 활기차고 좋은 기운이 가득하길 기대한다.
김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