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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에 대한 묵상 - 마리노 레스트레포
HOLY SPIRIT CATHOLIC CHURCH
ROCHESTER, NEW YORK
2011년 10월 15일조
죄의식이라는 감정은 독과 같은 것으로 은총을 유지하는 것을 방해하고 결국에는 대부분 죄와 같은 것으로 드러납니다.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함으로써 은총이 멈춰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죄의식은 우리 안에 있는 나쁜 영이 끊임없이 자신을 비난하며 고발하는 어두운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사탄은 항상 형제를 고발하는 고발자로 표현되지요.
우리에게는 자신이 완전하게 콘트롤 할 수 없는 내면의 삶이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도움이 있어야만 콘트롤 할 수 있지요. 내면의 삶은 영원한 삶과 관련되는 매우 방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또한 감각과 본능, 이성과 관련된 외면의 삶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요인에 따라 보여지는 자연적인 삶을 말하지요. 외면적인 삶은 접근하기 쉽고 인지하기가 쉬우므로 자신과 매우 친밀하며,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고 소화하기 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삶은 하느님의 성령을 통해 겨우 감을 잡을 뿐이지요. 매우 방대하고 무한하기에 성령만이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의 삶 안에는 선과 악이 있습니다. 원죄로 인해 우리가 과학(시간과 공간, 선과 악 … 등등) 안으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알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저주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알지 않도록 되어 있던 과학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창세기는 그것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순수, 순결하고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하셨음을 창세기를 통해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우리는 불순결해졌고 죽을 운명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본질이 순수하고 죽지 않을 운명임을 알고 있지만, 우리의 죄와, 육체, 죽음으로 인해 순수하지 않은, 죽을 운명의 육체를 지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상반되는 것들 사이에 소위,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이것을 성 바오로는 영과 육의 전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리의 내면의 삶의 신비를 이해 할 때, 우리가 선과 악의 과학을 다루고 있으므로, (어두움의)영들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어두움의) 영들은 감각과 본능, 이성을 통해 우리와 교류하며 우리 안으로 스며드는 지적 능력이 뛰어난 존재입니다. 가끔 우리는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침범 당하고 있다고 느끼지만 그것을 떨쳐버릴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한 채, 그것에 억압당하기도 하고, 집착하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그것이 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떨쳐버리려 노력하지만 자신 보다 큰 힘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심한 경우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찾는 사람도 있지요. 충분한 믿음이 없을 경우이지요. 이 때, 우리가 어떤 힘, 이 땅을 돌아다니는 (사악한)영, 어두움의 힘을 가진 세력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이 삶의 마지막에 그들을 벗어나 이 곳을 빠져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까지 우리는 그들이 있는 영역에 그들과 함께, 이 곳에 있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해 우리가 그들을 볼 수 있는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오, 저도 당신이 체험한 것을 보고 싶어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마 보고 싶지 않으실텐데요.’ ㅎㅎㅎㅎㅎㅎ 그렇지 않을 겁니다. ㅎㅎㅎ 좋은 광경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느님과 함께 한다면 천사들과, 성인들, 성모님과 함께 하는 은총을 가지며 항상 그들과 함께 합니다. 그러나 이곳으로 쓸려 내려온 타락한 천사들과 모든 단죄 받은 영혼들의 침입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육적으로 이곳에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육적인 존재가 아닌 영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지옥으로 떨어진 영입니다. 이것을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혼란을 줄 수도 있지만, 영적으로 생각한다면 이해가 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영혼의 존재 상태입니다. 그 영들이 땅으로 휩쓸려 떨어졌습니다. 요한 묵시록 12장에 나오지요. 성 요한은 타락한 천사가 금성이나 화성에 떨어졌다고 듣지 않았습니다. 땅과 바다는 불행하다 라고 하였죠. 사탄은 휩쓸려 땅으로 떨어졌고,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매우 분노하고 있다고 성서는 말합니다. 금성과 화성, 지구는 불행하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분명이 땅, 여기에 그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왜 이곳일까요? 우리의 몸에는 심장이 있지요. 심장이 온몸을 순환하는 피를 펌프질하며 생명을 유지하지요. 그와 같은 온 우주의 심장은 지구, 이 땅입니다. 그러기에 이 곳에만 인간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오직 지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창조물을 포함하지요. 모든 창조물이 영적으로 지구 주변을 돌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행성들이 은하계를 가지고, 서로 공전하고 자전하고 … 등등의 우주 존재 방식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비한 방법으로 보여진 창조물의 현실을 영적으로 말하면, 지구가 창조의 중심부입니다. 그리고 모든 창조물이 영적으로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 말씀에 예루살렘 도시가 내려오면 땅과 모든 창조물들이 지금의 존재 방식을 멈출 것이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하늘과 새 땅, 새로운 도시 예루살렘이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금성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내려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정확하고 진지하게 그러한 인식 안에 바로 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 건지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곳에서 귀양살이 하고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타락한 존재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이 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실 때,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데기로 데려가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줄 것이다’ 라고 한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땅과 모든 왕국은 사탄에게 주어졌습니다. 신비이지만 이 세상은 사탄에게 주어졌고, 우리는 그 곳에 귀양을 온 것입니다. 우리가 원죄로 넘어지기 이전에 사탄은 이미 떨어졌습니다.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던 뱀은 추락한 존재였지요. 왜 뱀이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나요? 그는 이미 추락하였으므로 하느님을 미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떨어뜨리려고 한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신비 안에서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 천사와 인간을 시험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천사들을 시험하셨지요. 삼분의 일이 떨어졌습니다. 그들의 무결한 지(혜)로 인해 그들은 즉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영원함안에서의 과오를 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사들 보다 낮은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오는 하느님에 의해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느님의 창조물을 증오하며 그것에 반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그러한 힘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몹시 증오하는 사탄에게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우리는 천국으로 갈 수 있지만, 그들은 영원히 돌아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낮은 존재로서 영적세상에 대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영적세상에 대해 장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얼마나 그들이 우리를 증오할지 상상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매우 부유한 집안에 아들이 있는데 그는 자신이 그 모든 재산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그 아들이 매우 잘못을 하였고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한푼도 주지 않고 모든 재산을 가장 느리고 모자란 자식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 재산을 마음대로 쓰던 그 아들은 이제 한 푼도 쓸 수가 없습니다. 그 아들이 얼마나 미움과 원망을 갖게 될 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사탄과 우리입니다. 사탄에게 있어서 우리는 한참 발달이 느린 아이와 같습니다. 보지 못하지요. 이해도 잘 못하지요. 잘 알지도 못하지요. 제대로 걷지도 못하지요. …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그곳을 그들은 결코 돌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악몽과 같은 일이지요. 게다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려 오셔서 우리에게 무기를 주셨습니다. 장님인 우리가 그 무기를 들기만 하여도 사악한 힘과 대항하여 싸워 귀양살이로부터 돌아 올 수 있게 하신 겁니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는다면 매일 하느님께 감사하며 계속 찬미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굉장한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떨어진 우리가 엄청난 방법으로 여전히 구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조, 즉 구원의 회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르는 눈 먼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방해합니다.
여러분이 고백성사를 보고 통회를 하지요. 통회의 정도에 따라 여러분은 다른 범위의 영적전쟁을 맞게 됩니다. 만일 진심으로 상등통회를 하며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그 죄의 결과와 깊이를 진심으로 깨닫게 되었다면, 깊은 통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사탄이 다가오지 못하게 되어 죄의식이 매우 작아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백성사를 보고 난 후 보속을 시작할 때, 고백성사를 보았음에도 아직 그 죄가 마음 안에 크게 남아 있습니다. 대죄를 말합니다. 용서를 받았지만 아직 그 죄가 너무 큰 것입니다. 그 죄는 고쳐야 하고, 그것을 보속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계속 고쳐 나갈 때 그 용서받은 죄에 대한 강도가 점점 더 작아지기 시작하면서 용서를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그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킵니다. 그리고 결국은 용서 받았음을 느끼고 그것을 잊어 버리지요. 그러나 분명히 자신의 그 잘못이 계속 기억에 남아 그로부터 배우지만 더 이상 자신을 거스르는 무엇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삶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경멸하며 완전히 끊어버리려 노력함으로써 더 이상 고의적으로 그 행위를 하지 않지요. 그러나 죄의식은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오며 계속 마음 안으로 들어오려 기회를 노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적전쟁 중임을 깨닫고 용서를 많이 받아들일수록 우리는 더욱 자유로워 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백한 죄에 대하여 죄의식을 갖게 되면 그 (어둠의) 영이 따라옵니다. 그것을 자신의 마음에 허락하고 받아들이면 자신이 상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러한 모든 영의 힘을 다루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건강한 영적 생활을 할 수 있으며, 내면이 더욱 투명해지고, 더욱 접근하기가 쉬워집니다.
내면의 삶에 있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의 내면은 너무 신비로워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관상기도는 내면의 삶으로 이끌어 주는 통로입니다. 그러기에 성체조배는 우리의 내면의 삶을 강화시킬 수 있는 큰 힘을 줍니다. 모든 두려움과 모든 압박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져다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과 혼란을 갖지요. 영적 현실에 대한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현실을 알지 못하고 영적전쟁중임을 깨닫지 못하면 결코 내면의 평화를 갖지 못합니다. 가끔 우리는 매우 우울하고 혼란을 겪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 사람들과 대화해 보면 많은 경우에 가장 밑바닥에 용서를 받지 못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삶이 결코 잘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잘 풀리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이 우울한 이유이지요. 사랑이 없는 느낌, 용서할 수 없는 느낌, 길을 잃은 느낌, 삶의 방향감각을 잃은 느낌, 하느님이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는 생각, 등등이 우울증의 시작이지요. 오늘날 인류에게 가장 큰 질병은 우울증입니다. 우울증은 대부분 좌절감의 결과입니다. 너무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슬프고 우울합니다. 내면에 끊임없는 외로움과 공허함을 갖습니다. 그것들이 큰 어두움으로, 영적인 것입니다. 분명히 예외도 있습니다. 화학적인 요인이나 어떤 증상 같은 것이 있지요. 여성들이 해산을 한 후 호르몬 변화로 인한 것이라든가, 여러 종류의 갱년기 증상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우울증은 영적인 힘에 의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쌓아진 것이지요.
이 지상의 삶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많은 선택을 해야 하고 많은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우리는 잘못된 것을 선택합니다. 우선 우리는 이 물질 세상을 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하니까요. 우리는 세워 놓은 목표에 따라 모든 것을 사려고 합니다. 우리 사회는 모든 사람들이 쫓아야 하는 목표가 정해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교육을 받아야 하고, 좋은 직장을 가져야 하고, 좋은 집에서 살아야 하고, 이것 저것을 가져야 하는... 그것이 상식이 되어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선택하는 대부분의 그것들은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는 거죠. 소유하기 위해서, 목표를 위해, 승자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그것을 얻어내려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어두움을 향해 가도록 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욕망과 원함에 따라 사는 것에 익숙해져셔 물질세상의 모든 것들이 일시적인 삶을 사는 동안, 단순히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만일 이 사회 안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학문을 연구하고, 학위를 따려 한다면, 그것이 생존의 수단과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이 자만심이 됩니다. 자신이 성취한 것에 대해 자만심을 갖기 시작하여 독이 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우위에 있는 인간이라고 느낍니다. 다른 사람과 다른 특권을 가진 사람으로 느끼지요.
때로 제가 어떤 본당에 가면 안좋은 것을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좀 잘 사는 나라, 소위 선진국 같은 곳에서 주로 있는 일이지요. 가끔 헌금을 걷어서 가난한 나라, 아프리카 같은 곳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강론대에 나와서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돈을 저~ 굶어가는 아이들에게 보낼 것입니다. 오~, 우리는 얼마나 잘 사는지, 정말 모든 축복을 받은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풍족함과 부유함을 가졌습니다. 저 불쌍한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하며 이 돈을 그들에게 보낼 것입니다.” 아주 끔찍하고 황당한 프레젠테이션 입니다. 자만심과 허세가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누군가의 뺨을 때리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결코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보낼 때, 그것은 여러분의 돈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것을 보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져야 할 부분, 그들의 것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그 행위가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을 먹이는 일은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지금 풍족한 것이 마치 나에게 특권이 있어서 그런 것처럼, 쓰고 남는 것을 굶어가는 비참한 사람들에게 보내 준다고 한다면, 그것은 끔찍한 말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갖고, 거기에 우리 것이 아닌 것까지 가진 것입니다. 우리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나누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자만심을 쌓고 있는지 아십니까? ‘오~우리 나라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 등등 … 다 쓰레기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빛의 자녀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 밖의 것은 다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오직 자만심만을 쌓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례 중이며 일시적인 상태로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해 있습니다. 지금 저는 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만일 정치인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다면 내일 저는 감옥에 갈지도 모르죠... ㅋㅋㅋㅋㅋ 저를 정신나간 새로 나온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ㅋㅋ 그러나 그것이 영적인 진리입니다.
자신을 해방시키고 모든 사슬을 끊고 싶다면 한계와 벽이 없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된 사랑과 용서, 그리고 참된 자유를 이루기 위해 모든 장벽과 한계로부터 마음을 자유롭게 하고 싶다면 자신을 영원함의 길에 놓아야 합니다. 모든 시간과 공간 안에 갇혀있는 것들을 무너뜨리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주신 불멸의 것을 받아들여 우리가 죽지 않을 운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특권이 주어졌다고 느낄 때마다 여러분은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자신이 다른 사람들 보다 나은 존재라고 느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죽었을 때 자만심을 잔뜩 쌓아놓은 것을 보고 얼마나 놀라게 될 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한번은 우간다에 있는 고아원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첫 아프리카 선교 활동이었습니다. 두 명의 신부님이 저를 굶주리는 아이들이 있는 고아원에 초대한 것입니다. 아이들은 하루에 한끼만 먹고, 팔백명의 아이들이 두개의 화장실을 사용하며, 두 집에 여자아이들, 남자아이들이 각각 살고 있었습니다. 그 비참함을 설명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모두 커다란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아주 놀랍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모두 바닥에 앉자 저는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제 안에서 아주 큰 갈등이 있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주님 왜 저를 이곳에 오도록 하셨습니까? 이 아이들은 음식이 필요합니다. 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좀 더 나은 삶인데 저는 그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고 성서를 읽었지만 제 내면은 아주 힘들었습니다. ‘이 아이들이야말로 백프로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는데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를 해? 이 아이들이야말로 진짜 그리스도인이고, 믿음을 살고 있는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저 아이들이 저렇게 미소 짓고 있는 걸 봐 …”
저는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제가 한 마디 할 때마다 아이들이 아주 특별한, 아름다운 언어로 반응하였습니다. 약간 춤을 추는 듯 하면서 무언가 몇 마디 하고서는 특이한 박자에 맞춰 손뼉 치며 미소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 다음 대목으로 넘어 갔습니다. 아이들은 제 이야기 내내 그렇게 했습니다. 아주 놀랍고도 아름다운 콘서트 같았습니다. 아주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주님께서 저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물질적인 것은 없었지만, 제가 생각하는 필요한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 없었지만, 그들 역시 하느님에 대해 듣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기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에 대해 이야기하여라. 내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말해 주어라. 그리고 네가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네가 그들을 돌보고자 하며, 그들을 보기 위해, 이야기 해주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이야기해 주어라. 단지 빵만이 아니라 성령을 이곳에 가져다 주어야 한다.” 그리고 저는 내내 매우 힘든 여정이었지만 조금씩 제가 해야 할 일을 이해했습니다. 그 후 저는 매 년마다 우간다에 갑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고 저의 선교활동도 많이 바뀌었습니다만 당시에는 그 순간을 극복하기가 매우 어려웠었습니다. 우리는 이 서구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어디서나 돈과 관련을 짓습니다. 이 사람들이 아주 가난한데 나는 가진 것이 거의 없으니 … 오, 저런… 죄의식을 느끼지요. 죄의식이 따라 옵니다.
죄의식은 사탄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만이 아니라 자만심인 경우가 있습니다. 왜 죄의식을 느끼는지 아십니까? 자만심이 강해서 자신이 용서가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자신에 대해 화가 나지요. 그것이 자만심입니다. 정말 겸손하다면 죄의식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셨는데 어떻게 여전히 죄의식을 갖는다는 말입니까? 자만심에 차 있어서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자신을 매우 미워하며 몹시 상하게 하였습니다. 그 사람에게 용서한다고 말했을 때, 그 사람이 영적이지 못한 사람이라면 열 배는 더 자신을 미워합니다. 같이 미워해야 하는데 용서하는 것을 결코 용서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사탄이 그 사람의 마음에 아주 심한 독을 퍼뜨려서 상대를 몹시 상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이 누군가를 상하게 했다면 그 사람도 당연히 자신을 영원히 미워하기를 원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용서한다고 말하니 견딜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영적전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탄이 일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 이기는 방법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사랑할 때 핍박을 준비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받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구요? 독 때문입니다. 용서하지 않는 독이지요. 그러므로 누군가가 용서를 말하면 미워합니다. 독기 어린 눈으로 바라볼 겁니다. 사랑을 전한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죽임을 당한 것이 그것이지요.
죄의식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보면, 오늘날의 사회 안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탐욕적이고 지나치게 야망이 많음으로 해서 항상 이웃에게 잘못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 안에 항상 죄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얼마나 사악한 행동이 드러나는지에 상관없이, 영혼은 모두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기도 열심히 하는 좋은 신자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무슨 소용입니까? 용서하지 못하고 누군가에 대한 미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씁쓰름한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모든 사람들과 문제가 있고 삶에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기도를 정말 많이 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 그러한 사람들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체를 모시러 나오는 것을 보는 것이 끔찍합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때로는 성체 모시는 줄에서 그 사람을 밀치기까지 하지요. ㅋㅋㅋ 하느님의 사랑을 갖지 못하고 미움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미움으로 가득 차 있어서 사제든 누구든 언제나 비평하고 험담을 합니다.
험담을 많이 하는 사람은 죄의식이 많이 있습니다. 말을 나쁘게 하는 사람들은 모두 죄의식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혀는 사악해지기가 아주 쉽습니다. 혀로 모든 사람을 죽이지요. 여러분이 혀로 인한 단 한가지 변형이라도 볼 수 있다면 결코 입을 열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혀로 인한 영혼의 변형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지 않기 위해 바닥만 보고 있으라고 한다면 저는 몇 세기라도 바닥에 그대로 있겠습니다. 살아서 볼 수 없는 가장 험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아주 끔찍한 변형입니다. 우리 모두는 혀로 인한 잘못을 합니다. 그런 잘못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의 혀를 길들일 수 없기 때문이지요. 야고보서에 보면 혀에 대한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인간은 코끼리와 같은 큰 동물도 길들이면서 자기 혀를 길들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성인들이 매일 하느님 앞에서 잘못된 말을 하지 않도록 입을 열지 않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고 고백합니다. 입에서 모든 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웃 간에 끊임없이 거품 물고 휘젖는 사람은 끊임없는 심판을 향해 걸어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단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옥으로 가는데 혀보다 더 큰 수단이 없습니다. 혀로 인해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은 믿지 못할 것입니다. 제 말이 끔찍하게 들리는 줄은 압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을 수가 없다고 하고, 과장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실이고 제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를 모함하기 위해 입을 여는 것이 얼마나 사악한 행위인지 알고 있습니다. 단지 질투나 부러움으로 인해, 남을 자기 마음대로 하기 위해, 남이 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말로 다른 사람들의 갈 길을 막는다는 것이 얼마나 사악한지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혀가 얼마나 독을 가지고 있는지 보려면 다른 사람이 잘 되었을 때 기분이 어떤지 보십시오. 그것이 가장 정확한 예입니다. 그 부러움이 바로 혀에 독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로 인해 그 사람에 대해 안좋은 이야기를 할 것을 알지요. 살면서 자신의 친구라든지, 아는 사람이 어떤 부분에서 성공하였을 때 기쁘지 않고 기분이 나쁘다면 조심하십시오. 아주 아주 아주 큰 사탄이 마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많은 부분을 사탄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그것이 믿기지 않지요. 그러나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악의적인지 보려면 누군가의 성공이 기쁘지 않은 것을 보는 것입니다. 아주 나쁜 싸인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아무리 독실하다 해도 소용없습니다. 대부분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매우 열심히 기도하고 항상 성전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이 없고 영적인 것이 없다면 기도하는 삶, 종교적인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쓰레기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평생을 무릎꿇고 기도를 했다해도 사랑과 동정심이 없다면 그 모든 기도가 쓰레기일 뿐입니다. 그 기도가 자신을 거스를 것입니다. 위선자이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은 위선자를 경멸하십니다. 위선자는 정말 흉측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미워하면서 어떻게 감히 무릎꿇고 하느님께 기도합니까? 사람을 미워하고 질투하면서 거룩한 척, 성인인 척 하느님께 기도한단 말입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정말 깨어서 마음을 신실하게 해야 합니다.
죄의식은 독입니다. 자신이 자만심으로 차 있어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할 때마다 죄의식을 느낍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면 우리는 그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그 사람이 와서 용서를 청하면 더 상처를 느끼지요. 그런 사람이 겸손해졌다는 것이 더 싫은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꺼져버려!” 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겉으로는 “물론 용서하지. 그렇게 말해줘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 너는 정말 사랑스런 사람이야.” ㅋㅋㅋ. 그런데 안에서는 칼을 치켜들고 있습니다. ㅋㅋㅋ 그런 상태로 죽어서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면요. 아주 끔찍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실제로 있을 영혼의 현실에 대해 보여드리고 있는 겁니다.
사람들에게는 제가 말한 모든 것들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결코 겉에서는 볼 수 없는 면이지요. 제가 말하는 것은 내면적인 것, 죄의식이 어떻게 생기는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의식이 안에 쌓여 있는 사람은 속이 쓰려서 이렇게 말하는 저를 아주 미워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이 사람은 너무 오버하는구먼. 너무 어려운 걸 말해...’ 합니다. 저를 죽이려고 들지요. 대부분의 메신저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그것을 전하는 메신저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때로 하느님께서는 거리의 걸인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자신이 너무 괜찮고, 너무 중요한 사람이며 자신의 행위는 나무랄 데 없으므로 걸인은 쓰레기 취급을 하지요. 절대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신이 너무 깨끗하고 특권을 가졌으며 매우 선량하고, 불쌍한 걸인은 너무 비참하고 불순종하며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너무 거룩해서 하느님이 길에서 그를 통해 말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대전에 나아가면 모든 메신저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의 삶에서 여기, 여기, 여기를 고치라고 메신저를 보내 주었다. 그런데 너는 그들에게 돌을 던지고 그들 모두를 죽였지.”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오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의 조상들은 모든 예언자를 죽였고, 이제 나를 죽이려는 것이냐?’ 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주님께 그리스도교에 대한 기도를 하며 언제쯤 그리스도교의 모든 종파가 일치를 이루게 될지를 여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결코 하나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미래에 하나가 될 종파는 오직 정교회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은 전례 등,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고 오직 교황에 대한 것만 이견을 가지고 있지요. 언젠가 그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도 종파는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더욱 물질적으로 되고, 세계화되고, 산업화 되어서 국제화된 국가들의 협력하에 굶주림과 주거조차도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없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 때 성사가 없는 그리스도교는 살아남을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들 중 아주 거룩한 사람들이 성체로 돌아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성공회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지요. 독실한 신자들이 더 이상 현재의 교회의 상태를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동성애 사제가 나오고 여성 주교며 많은 일들이 교회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 교회로 옮기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성사적이지 않은 그리스도교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마지막에 가까이 갈수록 다른 종파의 그리스도교들이 대화를 통해 합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교세가 기울어짐으로 해서 성체에로 돌아 올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향해 갈수록 점차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지막 보게 될 싸인은 많은 유대인들이 대거 개종하는 것입니다. 성 바오로도 로마서를 통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마지막에는 이스라엘도 개종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나무에 접붙여 지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장막을 벗어 그들의 마음 안에 놓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육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면 또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유대인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우리의 맏형제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하느님의 육화와 재림을 위해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이 마지막 때에 큰 배교로부터 교회를 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매우 마지막 때에 있습니다. 유대인의 개종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제가 성모님께 유대인의 회개에 대한 싸인에 대해 여쭈어 보았습니다. 성모님의 답은 이렇습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유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루 아침에 일어났지요. 사회주의자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장벽이 무너졌고 아무도 그것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동독 서독이 벽이 없이 함께 하게 되고, 서로를 이렇게 바라본 것이지요. ㅋㅋ 그들도 어찌해야 되는지 몰라 서로 한켠으로 길을 걸어갔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장벽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지요. 동독의 정부 조차도 큰 대화 없이 그냥 서독의 정부에 굴복하였습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역사도 정확하게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성모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몇 년 후에 있었던 일이 영적 역사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공산정부는 원치 않았지만 교황님을 초대하려는 폴랜드에서 한동안 예리고 성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왔다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예리고 성이 함락되듯이 공산주의 벽이 무너졌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성모님께서는 그와 같은 일이 유대인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갑자기 이스라엘과 세계 모든 곳의 유대인들에게 놀라운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다수가 가톨릭시즘으로 개종할 것입니다. 보수 유대교파로 인해 그것은 그들에게 매우 큰 위기가 될 것입니다. 처음엔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없는 보수파들이 개종한 사람들을 죽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두가 개종하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그것이 예수님 재림의 때가 왔다는 싸인이 될 것입니다. 그 후엔 의심할 여지 없이 언제라도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된 것이지요. 또 한편에서는 모든 종류의 사탄과 관련된 것들이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고 저기고 온통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또한 성모님께서 저에게 설명해주신 것은, ... 우리는 너무도 많은 영적 언어의 혼란을 가지고 있습니다. 뉴에이지가 들끓고 있는 것도 그것이지요. 우리는 모든 것이 혼합된 삶을 살고 있으므로 마치 큰 솥에 국을 끓이듯이 가톨릭 교회의 한 곳이 마치 혼합 교회처럼 힌두교도 있고 불교도 있고 온갖 종류의 정신조절 기법이라든지 이상한 정신과학이 교회 내로 들어와서 더이상 가톨릭 교회가 아닌 듯이 혼란스럽게 느껴집니다. 교회 벽보에 보면 별 이상한 포스터도 있고, 온갖 것들을 공고합니다. 여러분은 그에 대해 소리를 내어 말해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애지중지하는 애완견이 마당에 나가 죽은 쥐를 물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달려나가 입에 물고 있는 쥐를 뺏으려 하겠지요. 그럼 애완견이 어떻게 합니까? 물려고 덤비겠지요. 애완견은 왜 고기를 뺏으려 하는지 이해를 못하지만 여러분은 그게 독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이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동양사상이며, 뉴에이지 관련된 것들을 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은 입에 독이든 쥐를 물고 있다가 여러분이 그것을 빼앗으려 하면 여러분을 물으려 할 겁니다. 저는 동양에서 온 사상들을 행하는 여성에게 권고를 했다가 아주 핍박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교님께 쫓아가고, 저를 없애버리려고 끝까지 따라 다녔습니다. 그들 중에는 그것으로 돈을 버는 사람도 있었고 본당에서 아주 인기를 얻고 있었지요. 그들 중에는 복잡한 트레이닝을 받은 사람도 있었고 몇 몇은 육체적인 유익이나 치유를 얻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신부님이 하시고 수녀님이 하시니 좋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식으로 오늘날 우리는 너무도 길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는 뒤에 그림자가 따라 다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그림자는 죄의식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입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남에게 상처주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살아 가면서 우리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을 선택하여 결국에는 남에게 상처를 줍니다. 그것이 죄의식의 상태를 가져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고 있으므로 죄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지요. 고백성사를 하고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거슬러 행한 행위의 결과에 대한 죄의식을 가집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성장하고 나면 항상 더 잘 했어야 했다고 생각하며 부모로서 죄의식을 가지고 삽니다. 특히 제 경우에는 저희 아이들이 영세는 받았지만, 믿음을 갖도록 키우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교도나 다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구하시고 신앙으로 돌아왔을 때, 제 아이들에게 저의 체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는 받아들였지만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교회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제 탓이었기 때문에 몹시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노력하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 그 죄의식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저에게 여러가지로 보여주셨습니다. “자만심이다. 자만심이다. 자만심이다. 너는 죄의식을 가진 자만심을 버려야 한다. 너의 잘못을 받아들여 죄의식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 너는 잘못된 선택을 하는 불완전하고 비참한 인간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 너의 삶을 바꾸어 올바르게 하여라. 더 이상 죄의식을 느끼지 말아라. 지나간 시간을 다시 살 수 없고, 과거는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나간 일을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잘못을 했고 누군가를 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이 변화되어야 할 때입니다. 더 잘하도록 바로 지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우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보속의 길을 걷고 있는 한, 계속 선한 일을 하고, 자신이 잘못한 일을 경멸할 때, 시간이 가면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기 시작하십니다. 어느 순간부터 주님께서 우리의 과거를 다시 쓰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하십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약속이고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긍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의 평화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히 변화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죄의식은 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죄의식을 없애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죄의식은 자만심입니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용서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수줍음도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화를 내지만 수줍음도 자만심입니다. 사람들은 수줍음이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제 대답은 자만심, 허세입니다.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거나, 학대의 경험이 있어 감정적인 문제가 있지 않는 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왜 수줍어합니까? 우리의 삶에서 우리는 많은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아주 괜찮은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보통 그 사람이 천국에 간 것처럼 말하지요. “오, 우리 고모님은 아주 좋은 사람이어서 사람들과 문제가 전혀 없었어요.” 그 때 저는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위선자 한명을 묻겠군’ ㅎㅎㅎ 어떻게 누구와도 문제가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가장 위대한 성인도 많은 적이 있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도 세상의 반이 적이었습니다. 비오 성인도 많은 적이 있었습니다. 비오 성인이 바른 말을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미워하며 중상모략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 돌아가신 분들에게 ‘곧바로 천국에 가셨다’ 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왜냐구요? 기도를 안하게 되니까요. ‘우리 엄마는 암으로 고통을 받으셨으니까 천국으로 곧바로 가셨다.’ 고 이제 촛불을 켜고 엄마에게 중재기도를 청합니다. 그러나 불쌍한 그 영혼은 ‘나를 위해 기도해 줘!!!” ㅎㅎㅎ 그 영혼은 기도를 청하는데 자식은 엄마에게 기적을 청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가길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가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선량하게 산 사람이 지옥에는 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곧바로 천국에 갔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우리는 항상 돌아가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거룩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인으로 시성하였다면 다르지요. 교회가 성인으로 시성하면 천국에 갔음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그 성인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하면 하느님의 대전 앞에서 자신을 위한 중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죽을 때까지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그 누구도 자신이 한 일로 천국에 곧바로 가지 않습니다. 천국을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고통이나 시련으로 천국을 살 수 있다거나, 너무 너그럽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라서 천국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국은 오직 은총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좋은 사람이었고, 믿음이 좋은 순종적인 사람이었다면 구원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구원과 곧바로 천국으로 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신비입니다. 사람안에 있는 마음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니 돌아가신 사람들을 위해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그 기도를 하느님께서 자신의 가계에 속한 사람들을 위해 쓰십니다. (돌아가신) 가족 중에 가장 기도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 써집니다. 결코 기도는 낭비되지 않습니다. 사탄은 아주 영악해서 돌아가신 분이 천국에 갔다고 믿게 하고 그 분에게 기도를 청하라고 말하지요. “사탄이 연옥영혼을 고통을 줄 수 있나요?” 라고 사람들이 묻습니다. 답은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합니다.’ 연옥영혼은 육체가 없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영원히 주님으로 받아들이며 영원히 사탄과 관계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하느님의 영광 안에 있지는 않지만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며 완전한 거룩함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지상의 삶을 떠나지 못했으므로 사탄은 그들에게 영향을 줄 방법을 찾습니다. 그들이 지상의 삶의 범위 안에 머물고 있는 한 사탄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 화살을 쏠 방법을 가지고 그들의 영역을 훔치려고 합니다. 어떻게? 지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을 통해서 영옥영혼을 향해 쏘아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나쁜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누구였던, 살아생전 얼마나 못됐었건, 절대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 안좋은 이야기를 하지 마십시오. 사탄은 우리의 혀로 그들을 칩니다. 우리의 혀를 총처럼 사용하는 것이지요. 연옥영혼을 향해 총을 쏘아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연옥영혼은 즉시 그것을 듣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떄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성모님께 기도하면 성모님은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은 시간과 공간 안에 있지 않으므로 우리가 있는 곳, 성모님이 계신 곳에서 우리의 기도를 듣습니다. 우리가 성인들에게 기도하면 우리는 즉시 성인들의 영역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과 순종에 의해서입니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장막을 거두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가 빛의 현존 안에 있게 되는 것이며 자신의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두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계속 자신의 빛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빛과 성령 안에 있게 되면 사탄이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사탄은 빛을 증오하며 빛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기도의 삶을 산다는 것은 계속 빛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탄은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화살을 던지지요. 성 바오로가 표현한 것처럼 사탄의 불타는 화살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방패로 막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사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삶은 어두움이 사라지게 하는 빛의 삶입니다.
- 역: wisdom
- 출처 :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http://blog.daum.net/sophiay/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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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전히 큰 감동입니다..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었는데 아이들보고 할아버지는 천국에 가셨으니 할아버지에게 우리가족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하자 했었는데 그게 큰 잘못이었네요..존귀한 말씀 올려주신 코스모스자매님과 번역해주신 자매님께 깊이깊이 감사드립니다.오늘도 수시로 읽고 다시 깨달아야겠어요..여러번 읽을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주니..신기합니다
저도 같은 잘못을 했어요. 오직 하느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아는데 천국에 갔겠다고 생각하고 기도도 게을리하고, 때론 유족을 위로한다면서 천국에 갔을거라는 말을 덕담처럼 하기도 하는 아주 큰 잘못을 했네요. 정말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하면 안되겠어요. 혀의 죄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연옥영혼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군요. 혀를 조심.. 침묵하라는 성인들의 권고가 이해가 갑니다.
기도하는 삶은 어두움이 사라지는 빛의 삶, 끊임없이 기도해야 어둠에 홀로 있지 않고 빛속에 있게되는 것. 짧은 기도 하느님 뜻, 하느님 아버지, 예수님,성모님의 이름을 수시로 끊임없이 부르는 호칭기도로 빛이 꺼지지 않게 빛유지를 잘 해야겠어요.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기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