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 포세는 노르웨이 극작가, 소설가로 작년 2023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다. 일단 그를 잘 몰랐다가 노벨상이라는 이벤트를 계기로 그의 작품을 몇 권 읽게 되었었다. 노르웨이 극작가인 헨리크 입센과 비교되는 작가라고 한다.
내가 읽은 그의 작품은 몇 편 되지 않지만 이번에 교원공제회 이벤트 행사의 경품으로 당첨되어 배송된 그의 책이 바로 지금 언급하고자 하는 <아침 그리고 저녁>이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은 작품으로는 <보트하우스>, <욘 포세 3부작>이 있다. 그의 3부작에는 '잠 못 드는 사람들', '올라브의 꿈', '해질 무렵'이 연작으로 실려 있다. 번역된 책이 몇 권 더 있는 것 같으니 기회가 되는 대로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처음 <보트하우스>와 <3부작>을 읽으면서 약간 이물감을 느낀 바가 있다. 그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 말하기는 어려우나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작은 감정의 기포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쉽게 단정하기는 섣부르지만 개인적으로 국내 작가 중 김훈의 작품에서 종종 느끼는 삶에 대한 비애감 혹은 비장감과 유사한 태도가 있지 않은가 언뜻 생각하게 된다. 감각적으로 촉발되는 감정의 잔물결과 같은 움직임이 매우 풍요로우면서도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검은 태양>에서 주목하고 있는 멜랑콜리아의 검은 담즙질에서 유래하는 우울감이 격한 외침이 아니라 삶의 일거수일투족에 배어들어 주어진 생에 대한 몰입과 애착을 동시에 보이는 그런 태도.
<아침 그리고 저녁>은 분량상으로는 서로 비대칭을 이루지만 한 인간의 생애를 통해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결부되어 있는 태어남과 죽음에 대해서 한 편의 긴 에세이처럼 독백조로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작품이다.
세상은 물리적으로는 아입자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표준이론에서 설명하지만 인문사회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삶은 크고 작은 규모의 서사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까 한다. 일찌기 카이사르는 <갈리아전기>에서 자신의 원정 결과를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라고 전했다고 하지만 모든 소설과 삶의 서사를 압축하면 '태어나고 자라고 죽었노라!'라고 정리할 수 있겠지.
인간의 이름에 대하여. 성명학은 인간의 이름이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준다고 믿는 경향에서 힘을 얻곤 한다. 하늘의 별자리가 길일과 흉일을 구분한다는 생각이나 징크스를 이야기하는 모든 원리도 그렇겠지만 이름에 관한 관점에서 내가 알기로는 서양과 동양의 관점이 좀 다른 게 아닌가 한다. 서양은 시니어, 주니어, 몇 세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하나의 이름을 자손들이 돌려가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문의 혈통을 드러내는 측면에서든 아니면 조상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에 기인한 감정에서든 일반화되어 있는 것 같은데 동양인들은 이름에 사용되는 한자가 좀 일상적이지 않은 것들이 상당히 많고 어른의 이름을 '휘' 즉, 꺼리고 완곡하게 돌려 드러내지 않는것이 하나의 예법처럼 내려오고 있다. 즉 대식이 아들 대식 2세 하면 뭔가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1부 아침에서 올라이는 자신의 아들이 태어나려 산통을 치르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버지 요한네스의 이름을 자신의 아들에게 상속할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중간고리로서의 자신의 삶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태어난 요한네스는 어느새 자신의 삶을 다 삶아낸 노년의 인물이 되어 임종을 맞이하는 하루의 의식의 주체로서 2부 저녁에 등장한다. 그의 자녀 중의 하나는 자신의 아버지 올라이의 이름을 받았다. 삶은 그렇게 유구하게 이름과 이름 사이에서 이어지며 유한성을 견디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약을 읽다보면 바로 이런 특징을 잘 알 수 있다. 태어나서 살다가 조상들 곁으로 가서 눕는 것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누구라는 존재는 아버지로 아버지의 아버지로 소급되어 올라갈 수 있다. 족보는 그렇게 인간의 거대한 연결고리가 된다. 하나의 존재가 살면서 먹는 아침 식사 그리고 점심, 저녁. 한 잔의 커피. 한 갑의 담배. 그리고 40여 년의 세월을 이웃으로 함께한 친구, 아내, 임종을 확인하고 장례를 치러줄 자식. 누군가가 왔다간 흔적이 파도의 경계에 있는 모래사장에 쓰인 글자처럼 이 행성에 남았다가 희미해 지겠지만 떠나가는 영혼도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이 모든 냄새와 촉감과 소리들을 안고 갈 것이다. 떠나는 그곳이 이곳의 물리적인 원리와 비록 달라질지라도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삶이라는 것은 독불장군처럼 엄청난 위세를 떨치며 요란스럽게 야단법석을 피울 것도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일상 속에 있다는 것. 생업을 위해 끊임없이 노동을 하던 요한네스가 연금을 받을 나이가 되어 생활이 펴졌을 때 그의 아내는 떠나고 그 역시 떠나는 것이다.
하루살이는 내일을 알까. 지금 창궐(?)하고 있는 러브버그는 곧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내년 또 이 무렵이 되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아침이 열리면 낮을 지나 저녁이 온다. 저녁을 맞고 잠들면 누군가는 깨어 다음날을 맞이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은 나름대로 공평하다.
그러니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선을 다해서 살라.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맞추고. 부모 자식과 잘 지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사진을 찍어 SNS도 올리면서 자랑도 하고. 짭조롬한 신안 증도의 '태평염전'의 햇살이 만든 소금의 맛에도 취하면서 타인을 적대시하지 말고 연민을 갖고 바라보면서 살라. 우리의 저녁이 머지 않아 다가 오고 있으니 태양빛이 하늘을 밝게 비추고 있는 이 시간을 풍요롭게 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