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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9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7월 설교 시리즈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3.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난하라고 하신 말씀인가요?
본문 : 누가복음 10장 30~31절(30~37절)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새번역>
중세 후기를 넘어 과학 혁명과 종교 개혁이 일어나던 근대 초기인 15~18세기에 유럽 전역에서 절정에 달했던 나쁜 사냥이 있었습니다. 흑사병 창궐,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인한 사회적 혼란, 종교 개혁기 교세 확장 등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던 지배층과 교회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발생한 사냥이었습니다. 주로 사회적 지위가 낮은 여성, 과부, 노파들이 표적이 되었으며, 마녀나 마법 행위를 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이나 집단을 광범위하게 색출하고 처벌했던 역사적 현상이었습니다. 종교적 광기, 사회적 혼란의 희생양, 그리고 기득권의 통제 수단이 결합한 집단적 폭력을 통해 약 6~10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재산 몰수와 함께 잔혹하게 화형 등의 처형을 당했습니다. 바로, ‘마녀사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녀사냥에 대한 현대적 의미는 훨씬 더 많이 확장되어 오늘날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중의 분노가 어떤 개인에게 집중되어 사실관계를 떠나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현상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익명성 뒤에 숨은 다수가 개인의 사생활을 파헤치고, 과도한 비판과 마녀 재판식의 여론몰이를 주도합니다. 그래서 방어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인권 침해와 개인의 사회적 몰락을 초래할 수 있기에 큰 사회적 문제가 된 상황입니다. 솔직히 어떤 문제에 대해서, 그것이 정말 나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책임은 생각하고 싶지 않기에 마녀 사냥을 하듯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익숙해진 문화는 안타깝게도 누구나 이제는 익숙하게 가지고 있는 마음 같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당장 문제가 생기면 문제의 원인에 대한 규명이나 문제의 해결방법이 아닌 문제를 야기한 것 같은 인물에 대해서 가장 먼저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앞장 서 있는 사람, 모두가 몰아가는 사람, 그 한 사람을 당연하다는 듯 마녀사냥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식의 ‘마녀사냥’을 하려고 하는 이들의 불순한 시도가 참 많습니다. 그리고 그 시도를 예수님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꾸며내기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누가복음 10장 30절, 새번역>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질문하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님은 비유인지 실제로 있을만한 일인지 대답을 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상 비유가 아닌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율법학자에게 들려주고 계신 것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든 실제든 간에 중요한 것은 얼마든지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은 정말 강도가 많이 있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의 배경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해발 750m의 산악 지대에서 해저 약 250m의 요단 계곡까지 약 35km를 가파르게 내려가는 험준한 여정입니다. 약 1000m의 고도차를 극복해야 하고, 주변에 촌락이 없는 황량한 광야와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있어 과거부터 강도 사건이 빈번했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나 시간을 재촉하는 일이 아니면 그 곳으로 지나다니지 않고 조금 멀더라도 다른 길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곳을 안전지역으로 만들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익히 소문을 들어 알고 있으니 얼마나 조심했겠습니까? 가능하면 그래도 큰 길로 다니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강도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그 강도들은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노해야 하는 대상은 이 강도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이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가장 나쁜 대상은 강도들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이 강도들을 비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코 강도당한 사람의 어리석은 결정 탓으로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거의 죽게 된 채로 버려진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들 모두 그랬을 것이고 우리들 역시 제사장이니 당연하게 도와주는 것을 자연스레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제사장은 그 사람을 보고 도운 것이 아니라 ‘피하여’ 지나갑니다. 여기서 피했다는 것으로 봐서 제사장은 이 사람을 시체라고 생각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지는 율법 규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누구든지, 백성의 주검을 만져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레위기 21장 1절, 새번역>
실수로 시체에 접촉하여 부정해졌을 경우, 정결례를 치르기 전까지는 제단에 접근하거나 성물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기에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가까이 가서 시체가 아니라 아직 목숨이 붙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도움을 주었으면 좋았겠다 라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고 시체라고 생각했기에 피해서 간 제사장에게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안 그래도 자신도 강도를 당할 수 있는 상황에 지체하기 싫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이 제사장 직분을 잘 수행하기 위하여 율법대로 행동한 것일뿐, 우리는 제사장의 행동에서 다른 의도를 찾아내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기에 성전 봉사 의무를 다 수행하고 나서 집으로 쉬러 가는 길일 수 있지 않냐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피해간 것으로 유추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이면서 왜 도와주지 않았을까 의문을 품을 수는 있지만 제사장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비난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에 이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레위 사람도 마찬가지 이유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여쭈어 보겠습니다. 강도 맞은 사람에게 잘못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여전히 강도들입니다. 강도 맞은 사람도, 제사장과 레위인도 아닙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 강도 맞은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할 수 있는 이유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난하라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굳이 제사장과 레위인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율법학자를 위해서입니다. 또한 율법학자와 같은 우리 중 누군가를 위해서입니다.
누군가를 돕는 것을 율법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랑보다 율법을 중요하게 여기던, 결국 율법도 뛰어넘어 자기의에 빠져 있는 율법학자에게 진짜 영생과 이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을 열어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만약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율법학자가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에 대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자연스럽고 잘한 행동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정말 이 율법학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은 정확하게 발견하신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보다 율법이 위에 있고, 율법보다 자신이 위에 있는 그 율법학자의 현재를 명확하게 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스스로를 스스로가 발견할 수 있도록 말씀으로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이에도 이 율법학자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여기까지 말씀을 듣고 무엇이 문제인지 발견하지 못하는 이들이 오늘날에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이 해야 할 직무를 위해서 충분히 할 만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여기까지 이야기하신 다음에 제사장과 레위인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말씀하셨다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이 율법학자로 하여금, 오늘날 율법학자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이들의 복음을 향한 출발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왜 저래? 교회다닌다면서 왜 저러는거야?
그리스도인이라면서 그렇게 행동해도 되는거야?
교회에 다니는 사람치고 정말 사랑이 없으시군요.
교회에 다니면서 사랑을 못 배우셨나 봅니다.
그렇게 율법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율법보다 더 중요한 사랑은 못 들어보셨나요?
너는 아직 멀었어! 정말! 사랑을 받은 만큼 베풀 수는 없는거냐?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이런 비난과 비아냥에 너무도 쉽게 마주 앉습니다. 그런데 저런 말들은, 저런 비난들은 사실상 조금의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아직 미완성 그리스도인이고, 미성숙하여 배워가야 할 것이 많기에, 어떠한 말씀을 통해 묵상하고 생각함으로 적용하며 변화되어야 하는대 무차별적인 비난은 오히려 화만 나게 만들고, 반발하게 하고, 더 큰 비난을 만들기만 하고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합니다. 우린 이 중요한 포인트를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사랑에 대한 것을, 내가 받은 사랑을 어떻게 흘려 보내야 하는지를 비난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도와 준 이의 모습을 통해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절하게 그 설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답답한 것으로 치자면 가장 답답한 건 예수님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학자를, 제사장을, 레위인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랑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높은 확률로 제사장과 레위인을 비판하는 이들은 결국 스스로가 제사장과 레위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보니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많이 비난하는 이들은 같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서로 이해해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자신 밑에 두려고 깎아 내리는 이들을 너무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자신들도 하지 못하면서, 하지 못하기에 괜시리 화를 내며 비난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공격당한 것 같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사장과 레위인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싶은 것입니다.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주변에 제대로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향해 비난을 하며 자신을 향한 화살을 최대한 피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 드리지만 우리는 강도를 비난해야 합니다. 왜 하필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냐고 그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보고 피하여 갔다고 해서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비난을 받아야 할 존재들은 강도들입니다. 그런 강도들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까 고민을 하려면 머리를 맞대고 그것을 고민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동역자 여러분! 예배자 여러분! 우리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도 물론이요, 회사에서도, 교회에서도 ‘마녀사냥’과 같은 비난을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마녀사냥이 펼쳐지고 있다면 동참하지 않으셔야 하고, 가능하다면 그 마녀사냥을 멈추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말씀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하고, 권면할 수 있어야 하고, 함께 배워 나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비난하는 나 역시 아직 한참 모자란 존재입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온전하지 않습니다. 저럴 땐 저렇게 하고, 이럴 땐 이렇게 하고, 이렇게 저렇게 해야지 왜 못하는 거냐고 예수님이 물어 오신다면 아무 할 말도 없는 나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오늘 이런 말씀을 나누는 이유가 있습니다. 의외로 교회 안에 율법학자와 제사장과 레위인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경우도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피해서 갔다면 아직 그들은 피해서 갈 정도의 신앙인 것입니다. 율법적이라는 말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아는 만큼 행동하는 것입니다. 율법학자가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했다면 그 역시 지금 아는 만큼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에 율법학자가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야기를 듣고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라고 스스로 생각했다면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드디어 한 단계 달라질 기회가 생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묵상할 기회가 생겼고, 변화가 찾아올 순간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율법학자를 제사장과 레위인에 빗댈 생각이었다면, 그래서 율법적인 태도, 사랑 없는 삶, 말씀과 반대되는 삶을 비난할 의도였다면 율법학자는 이 뒷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화를 내며 그 자리를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지 어떠한 비난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진짜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그 다음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에 머물러 있는 모든 이들이 배워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들려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 예수님은 말씀해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 방법은 비난이 아니라 말씀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누가복음 10장 33절, 새번역>
다음 이야기는 이 극적인 단어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다. 그러니 제사장과 레위인을 향한 비난을 거두고, 공동체에서 그런 사람들을 향한 분노를 거두고, 아무 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무차별적 비난을 멈추고, 계속해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말씀 앞에 갈 것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함께 로마서 14장을 오늘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만 먹습니다. 먹는 사람은 먹지 않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사람은 먹는 사람을 비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중략)...그런데 어찌하여 그대는 형제나 자매를 비판합니까?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중략)...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하지 마십시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돌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중략)...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을 씁시다. <로마서 14장 1~19절, 새번역>
결단 찬양 - 우리 하나 되어 + 함께 지어져 가네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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