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10일 (고후4 희망리노베이션).hwp
2019년 2월 10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고린도 후서 4:16-18
희망 리노베이션
누구나 절망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생각하는데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절망하게 됩니다. 성실하고 바르게 사업을 이끌어 왔는데, 주변 여건이 갑작스럽게 변하면서 그만 큰 빚을 지고 파산하는 경우도 경험합니다.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니 그 절망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큰일을 당한 경우에 문제는 그 절망을 털고 다시 일어나는가 아니면 그 절망 속에 파묻혀 버리는가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그 절망에서 얼마나 빨리 벗어날 수 있는가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처음부터 절망 가운데서 태어나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9세기 영국 산업혁명 시대 도시노동자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아이들도 나가서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 없었으니까요. 일전에 스코틀랜드와 영국 종교개혁지 탐방 중에 방문했던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 전시관에 들린 적이 있습니다.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글래스고우에서 신학과 의학을 공부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일생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가 어린 시절 살던 집을 구경했는데, 여기서 어떻게 살았을까할 정도로 비참하고 가난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절망스런 가난을 벗어나, 오히려 아프리카 오지에 희망을 전해주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절망의 치료약은 희망입니다. 절망이라는 병이 닥쳐왔을 때, 얼마나 제때에 희망이라는 치료제를 투약하는가에 따라 그 사람은 빠르게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의 상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상자가 아니라 항아리라고 해야 맞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여간 열면 안 되는 상자를 호기심 때문에 열었더니 온갖 욕심, 질투, 시기, 질병 등등이 순식간에 빠져나와 세상에 퍼졌다는 것입니다. 놀라서 뚜껑을 덮는 바람에 희망은 빠져 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다가 겨우 세상에 나와서 이런 저런 불행과 절망을 겪는 이들에게 미래를 바라보며 현실에 좌절하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런 못된 감정들과 불행 사이에 이렇게 멋진 희망이 섞여있어야 했을까?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인데 말입니다. 수많은 불행과 재앙 가운데에서도 인간이 그 희망을 붙잡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대개는 답을 합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작동”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래는 지금 보다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저의 신학적, 신앙적 질문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교우여러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니 미래가 보이십니까?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문장을 직접 확인은 못했지만, 독일의 문호 괴테(1749-1832)는 희망을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파우스트>에서 표현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희망 때문에,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그 속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게 만들고, 미래만 바라보게 한다는 의미가 숨어있습니다. 그가 기대하던 미래가 현실이 되면, 그 때는 또 다시 현실의 새로운 고통에 부딪혀서 똑같이 그 다음의 미래를 바라보며 희망만 품고 사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희망은 그의 고통을 해결해주기는커녕 고통 속에 평생 머물게 만들고 만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되면,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반드시 좋기만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런 희망을 부르는 말이 있는데 바로 “헛된 희망”(false hope)입니다.
최근에 젊은이들 사이에 자주 사용하는 용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희망고문>(false hope or hope torture)이라는 말입니다. 인터넷 사전에 나온 뜻은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될 것 같다는 희망을 주어서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가 좋아하는 이성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계속 희망을 품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절망하는 일이 반복되는 상황을 젊은이들은 “희망고문”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정치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지역구에 나와서 공약을 던질 때에 이것이 장차 희망고문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정부가 발표하는 그럴싸한 정책들이 있는데, 이것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안 되면 절망하고, 그러면 또 다른 정책으로 희망을 주고, 다시 절망하는 일이 반복되면 이것도 희망고문에 해당합니다.
이것을 저는 우리가 새로 만든 말인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가수가 유행시켰고, 심지어는 이런 제목의 유행가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19세기 어떤 프랑스 소설가가 “희망이라는 이름의 고문”이라고 이름붙인 책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말을 가장 충격적으로 사용한 사람이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라는 철학자입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한 말로 대표되듯이 당대의 혹독한 기독교 비판가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속에 자신이 절망에 빠져 예수 그리스도께 부르짖었을 때, 그는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에게 다가 오지 않았다고 말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희망을 “인간의 고통을 연장시키는 나쁜 것”이라고 말합니다. 괴테의 말과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번 설교에서 <희망 만들기>라는 제목으로 옥중에서 순교한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의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희망공작소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희망을 강조했고, 동시에 <값싼 희망>을 반드시 경계하자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속으로 값싼 희망에 대한 설교를 곧 해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바로 오늘 그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한 <헛된 희망>, <희망고문> 등등이 바로 제가 말씀드리는 <값싼 희망>의 정체입니다. 괴테와 니체가 그리고 여러 문학자들과 신학자들이 희망을 비판한 것은 <값싼 희망>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값싼 희망을 오용하거나 남용하지 않도록 가장 경계해야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희망을 가지되, 이것이 절대로 값싼 희망, 헛된 희망으로 변질되지 않도록 경계해야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고린도 후서 4장 17절 말씀은 개역성경이 훨씬 더 실감나게 번역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의미는 표준새번역이 더 잘 전달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어 줍니다.” 여기에는 바울 스스로의 판단이 포함되었습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이 가볍다”는 평가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크기”에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못 이해하면, 이런 뜻이 됩니다. “나중에 아주 큰 것을 얻을 터이니, 지금은 힘들어도 조금 참아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말은 우리가 평상시에 아주 자주 쓰는 말입니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자녀에게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잘 되려면 공부하기 싫어도 참고 해야 되”라고 말입니다. 무한 경쟁 구조 속에 사는 우리는 이런 식의 말에 아주 익숙합니다. 하지만, 지금 인내하고, 절약하고, 노력하며 살아가면 미래에는 훨씬 안정되고 안락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은 결코 우리 현실에서 틀린 말이 아닙니다. 허랑방탕하게 살면서 미래가 나아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헛된 희망입니다. 성실하게 일해서 저축할 생각은 안하고, 노름판이나 기웃거리고, 복권당첨이나 꿈꾸고 산다면 그의 미래는 불 보듯 뻔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오늘의 고난을 참아내는 사람에게 미래가 환하게 열려있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성경말씀은 그런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고린도후서의 기본적인 내용은 1세기 기독교가 겪던 현실을 이해할 때에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유대교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면서 겪는 시련 속에 처한 상황입니다. 당시 기독교는 교양 있다는 로마인들에게서는 미련하다고 멸시를 받는 종교입니다. 부와 권세를 향유하는 로마인들에게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금욕과 인내 봉사와 희생을 덕목으로 제시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박해였다고 고린도후서 4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겪었던 현재의 고난의 정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영원을 바라보라는 말을 바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복음의 빛이 장차 이루어 가실 일을 기대하고 소망한다면, 지금 당하는 이 멸시와 천대 그리고 박해의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저는 <큰 소망>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참된 희망입니다. 값싼 희망이 아닙니다.
그런데, 본문의 내용은 당장의 어려운 현실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지, 다시 말하면 값싼 희망고문을 당하고 살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서는 침묵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당할 때, 멸시를 당할 때, 먹을 것이 없어서 굶을 때, 목숨의 위협을 받을 때,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게 될 때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 구체성을 찾아내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숙제입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읽는 고린도후서는 고난에 처한 사람들에게 언제나 위로와 희망을 주었던 메시지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잘 참고 잘 견디며 살아 왔습니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 힘들고 절망스런 세월을 견디어 내지 못한 사람이라면, 역시 신앙의 길에 남아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절망 앞에서 참된 희망이 아니라, 값싼 희망을 바라던 사람들은 신앙의 길을 따라 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보이는 것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눈에 부족한 것을 바라고 사는 것 그 자체는 비난 받을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의 절망적인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싶고, 내가 소망하는 미래의 것을 움켜쥐려는 갈망 속에서 산다면, 그에게는 현실도 미래도 모두 가상공간이 될 뿐입니다. 현존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갈망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우리가 겪는 현재의 고난을 통해서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고난과 동행하는 희망을 볼 줄 알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고난이 너무 싫어서 그냥 내다 버릴 고난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잘 참아서 희망하는 일이 반드시 빨리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말씀은, 현재 받는 고난 속에서 고난의 의미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절망스러운 그 순간이 바로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순간이 됩니다. 찰 참고 노력하면 그 절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언젠가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그 절망과 고난의 순간 속에서조차도 고난이 내게 가져다주는 의미를 볼 줄 아는 그리스도인은 참된 희망을 간직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교우여러분, 우리 교우들의 나이가 다 다른 것처럼, 살아온 세월의 역사가 다 다릅니다. 오래 산만큼 우리의 겉사람은 낡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4:16) 우리의 살아가는 날들이 하루 더 늘어날수록, 우리의 속사람은 새로워진다고 합니다. 라틴어 표현을 보니 새로워진다는 말이 리노베이션(renovation)한다는 뜻입니다. 절망과 고난 속에서 신음하며 거기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질로 세월을 소모하기보다, 그 절망과 고난 속에도 함께 동행 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보인다면, 그 사람은 진정 리노베이션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비록 우리가 절망과 고난 속에서 살아왔고, 또 다른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절망 속에서 희망을 리노베이션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