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 차게 시작한 주말농장은 이름 모를 잡풀의 점령으로 끝이 났다.
호기롭게 집 안에 들인 고무나무는 넘치는 사랑을 견디지 못하고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세상을 등졌다.
나에게 남은 것은 죄책감과 녹색 식물에 관한 트라우마뿐. 제주도의 생태 정원 베케를 걷다가 불현듯 깨달았다.
식물을 향한 내 구애가 왜 번번이 실패로 끝났는지를. 자연을 대하는 내 태도에 어떤 모순이 있었는지도.
제주도 서귀포 효돈로의 생태 정원 겸 카페, 베케(VEKE). 그때 이곳에서 느낀 내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한 번도 관심 둔 적 없는 자연의 세세한 움직임에 나는 왜 반응했을까.
서울로 돌아온 이후에도 불쑥불쑥 그 바람과, 햇빛과, 땅 위에서 유연하게 흔들리는 식물이 떠올랐다.
그로부터 한 달 후 다시 찾은 제주. 그 안온함의 정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의 분주한 발길이 닿기 전, 이른 시간의 베케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베케’는 밭의 경계에 아무렇게나 툭툭 쌓아놓은 돌무더기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내가 오랫동안 머문 건 실외 정원이었지만 사실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는 카페 내부 통창으로 바라보는 이끼 정원이
더 인기가 많다.
돌무더기 베케를 가운데 두고 이끼를 비롯한 다양한 식물이 한국적 미감으로 어우러진 곳.
사람이 아래 위치에서 정원을 올려다보는 구조 또한 인상적이다.
이끼 정원의 지면을 올려 식물과 사람의 눈높이를 맞춘 것이다.
몸을 숙여야 겨우 볼 수 있던 이끼와과 키 작은 식물도 찬찬히 관찰할 수 있다.
단순히 보는 각도를 바꿨을 뿐인데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 생태 정원 베케에는 이러한 장면 전환이 곳곳에 의도되어 있다.
식물들의 자율성이 흐르는 생태적 공간
이 모든 공간의 시퀀스를 만든 건 생태적 관점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조경가 김봉찬 대표다.
설치미술가 최정화 작가 역시 ‘치밀하면서도 엉성한’ 한국의 미감을 공간 안에 더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김봉찬 대표는 제주 핀크스 비오토피아 생태공원, 경북 봉화 백두대간 수목원 암석원,
포천 평강식물원, 경기 곤지암 화담숲 암석원, 서울의 아모레 성수, 최근 복합문화공간 피크닉의
<정원만들기> 전시까지 지속가능한 공간들을 완성해온 생태 정원의 전문가다.
생태 정원은 자연의 복원과는 엄연히 다르다.
정원이라는 개념 자체에 이미 인간의 손길과 조경 기술을 전제하기 때문. 다만 장식적인 속성 대신,
생물이 살아가는 진짜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 안에 사는 생물이 각각 행복할 방법을 고민한다.
그렇게 자생하는 구조를 갖춘 생태 정원은 인간의 삶 가까이에서 자연을 대하는 방식을 일러주는 매개 역할을 한다.
제주의 원시림을 우리 삶 안에 들이기는 어렵지만 생태 정원은 집으로, 공원으로,
보다 쉽게 일상 안에 들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이루는 균형의 일부, 인간
그날 정원에서 내가 느낀 안온함은 이러한 자각의 결과였는지 모른다.
산뜻한 표정으로 모여 있는 들꽃, 풍성한 머리를 늘어뜨린 듯 가느다란 선의 중첩을 이룬 풀더미,
자연의 탁월한 비례감을 증명하는 나무까지, 모든 감각을 동원해 자연이 건네는 이야기를 듣다가
어느 순간 나조차도 그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이윽고 찾아온 안온함. 무언가를 악착같이 할 필요 없이 그냥 흐르는 대로 두어도 된다고 그 자연이 말해주고 있었다
자신이 사는 환경을 파괴하는 유일한 생명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은 왠지 섬뜩하다.
심지어 지구의 역사를 볼 때 이럴 경우 정작 파괴되는 대상은 자연이 아닌, 인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팬데믹 상황도, 쓰나미나 지진 같은 기후 변화의 결과도 이미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인간 역시 자연이 이루는 균형의 일부라는 자각. 생태 정원은 그 자각을 일상에서 느끼게 해주는,
자연의 화법을 읽을 수 있는 터다.
‘호기롭게 집 안에 들인 고무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긴 채 세상을 등졌다.’는 앞선 문장을 수정한다.
거실 창가 끝에 방치되어 있던 그 앙상한 가지에서 조그마한 연두색 새순이 돋은 것. 하마터면
종량제봉투에 들어갈 생명이었다.
인간 중심의 관점으로는 보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들이 건네는 이야기에 온 감각을 동원할 것. 그렇게 조금씩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된다.
글/ 김선미, 사진/ 양경필
첫댓글 주말농장이면 육지에선 갔다오기 쉽지 않겠네요.
휴가 기간도 넉넉해야 하지 않을까요.
휴양을 위해 시간이 허한다면 갔다 오고 싶네요.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