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계서원은 누가 세웠는가
호계서원은 조선시대 안동도호부의 대표적인 서원이었다. 호계서원이 안동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고, 강당건물을 왜 ‘공(工)’자 형태로 지었는지를 알아보겠다. 호계서원은 1575년(선조 8) 주로 안동 출신 사림들이 힘을 모아 여산촌 오로봉 아래 백련사 절터에다 여강서원(廬江書院 ; 후에 호계서원으로 사액받음)을 건립하였다. 퇴계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학을 강론하였는데, 퇴계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라는 점에서 이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
당시의 여강서원의 규모는 안동에서 가장 컸다. <<영가지>>에 의하면 존도사(尊道祠) 6칸, 신문(神門) 3칸, 신주(神廚) 5칸, 전교당(崇敎堂 ; 강당) 15칸, 동재(東齋 ; 求仁齋) 4칸, 서재(西齋 ; 明義齋), 대문 진학문(進學門) 1칸, 동몽재(東夢齋) 15칸, 유사방(有司房) 5칸, 재주(齋廚) 15칸, 보상고(寶上庫) 15칸 등이다. (중략)
이후 호계서원의 재산은 영남지방 최초의 사립 중학교인 협동학교(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천전초등학교)와 동명학술강습회(임하면 대동초등학교 : 안동호에 수몰됨) 설립의 재정 기반으로 활용되어 개화기의 신교육 운동에 이바지 하였다.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현 위치로 옮기게 되었고, 강당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1회씩 당회(堂會)를 개최하고 있지만 세 분의 위패를 모시고 있지 못하고 있어, 향사(享祀) 역시 봉행하지 못하고 있다.
2. 호계서원의 학술활동[講會]
19세기 호계서원에서의 학술활동은 영남 유림사회에서 퇴계학맥의 주류[嫡統]를 확보하기 위하여 호론(虎論)이 자파세력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19세기 후반 호계서원에서의 강회는 이상정이 주도하였다. 철종 7년(1856) 11월 호계서원에서 안동의 유림 수백명이 모여 강회와 향주례(鄕飮酒禮)를 하였다. 강회에서『대학(大學)』『심경(心經)』등을 읽으면서 토론하였는데, 주로 이황의 ‘심합이기(心合理氣)’, ‘심통성정(心統性情)’에 대한 해석이 등이 거듭 확인되고 있어 퇴계학맥을 이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호계서원 강회의 목적은 고산정사에서의 강회와 마찬가지로 병론(屛論)과 호론으로 분열된 향론을 유치명이 호론 중심으로 주도해 나가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강회 활동은 유치명 사후에도 그의 제자인 김건수 등을 중심으로 19세기 말까지 이루어지고 있었다.
3. 호계서원의 건축학적 가치
강당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강당은 도산서원의 기숙사인 농운정사의 “공(工)”자 형 건물을 본받아 지었다. 농운정사는 ‘工’자형의 도투마리 형식의 건물로서 건축승 법련과 퇴계선생의 합작품이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공부(工夫)’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공(工)자 모습으로 짓도록 하였다. 공부하던 동편의 마루를 ‘시습재(時習齋)’라 하였고, 휴식하던 서편의 마루를 ‘관란헌(觀蘭軒)’이라 하였다.(중략)
한국 서원에서 영남지역이 차지하는 위치는 서원의 숫자에서도 알 수 있다. 한국 서원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서원의 반은 안동에 있다고 한다. 안동의 서원 중에 으뜸 서원이었던 호계서원은 예안의 도산서원과 함께 퇴계를 모신 대표적인 서원이었다. 그러나 학봉을 우위로 하는 학맥이 우세하면서 조선후기의 가문화(家門化) 되어 학봉의 위패를 임천서원으로 옮기면서 호계서원은 서원의 두 기능 즉 선현봉사와 공부[강학] 중에 선현 봉사 기능이 사라지자 서원으로서의 가치를 잃게 되었으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
호계서원의 가치는 정신적으로 퇴계를 모시고 있어 안동에서 가장 으뜸 서원이었다. 그리고 건물 크기도 안동에서 가장 컸다. 특히 강당의 모습은 도산서원의 농운정사를 본받아 공(工)자형으로 만들어 학생들이 공부하는 몸가짐을 만들도록 하였으며 후대 향교건축에 영향을 주었다.
부언하면 이렇듯 조선은 선비를 중시하여 서원을 많이 만들었는데, 일본은 무사를 중시하여 도장을 많이 세웠다. 선비를 중요시하는 정책은 송나라에서 출발하였는데 이는 주변의 나라들이 끊임없이 중국을 침입하자 이를 물리치려는 전략으로 그들에게 칼 대신 붓을 주는 방책이었다. 고려는 고구려를 표방하여 상무정신이 강하여 세계에서 몽고족과 싸워서 나라를 유지한 유일한 왕국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1500연대 말기에 사림이 집권하고 서원이 많이 만들어진 후 왜침에는 힘없이 무너지기만 하였다. 즉 호계서원을 통하여 서원제도의 장점과 단점을 함께 보아야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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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문화원, <<안동의 뿌리찾기>> 2002. http://www.ugyo.net/
안동문화원, <<영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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