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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단종 비 정순왕후 송 씨 이야기
이장희 추천 0 조회 103 14.05.27 12: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단종 비 정순왕후 송 씨 이야기
청령포 장릉
○ 애환의 삶을 살았던 단종 비 정순왕후 송 씨 - 여산 송 씨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1440 세종22 ~ 1521.6.4 중종16)로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현 정읍시 칠보면)에서 태어나 검소하고 공손한 성품과 효우로 14세(1453)에 한살어린 단종과 혼인했다. 하지만 불과 3년 정도 남편인 단종과 함께 했을 뿐, 17세에 단종과 생이별하여 동대문(수문동,숭인동 청룡사 부근) 밖에서 초막을 짓고 시녀들이 동냥을 해서 연명하는 비극적 정치사에 비애 넘친 인생을 살게 된다. 단종 임금을 잃은 뒤 82세인 1521(중종 16)년까지 살며 동망봉에서 오직 남편의 명복만을 빈다. 여든의 나이로 동망봉 자락에 올라 열일곱 어린 남편을 그리던 그녀의 마음에는 무엇이 피어나고 있었을까. - 세종대왕의 여덟째 왕자 영응대군의 부인 대방군부인 송 씨는 그녀의 고모였다. 단종의 비로 간택된 배경에는 그녀의 고모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남편 단종이 강등되면서 군부인으로 격하되었다가, 관비가 되었다. 정순왕후 송 씨는 상당히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1918년 김택영이 쓴 '한사경'에 의하면 정순왕후의 미모에 반했던 신숙주가 세조에게 정순 왕후를 첩으로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는데 비록 관노의 신분까지 추락했다고는 하지만 일국의 국모를.... 그것도 자신의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데 일조한 철천지원수가 자신을 첩으로 달라고 청원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정순왕후의 심정이 참으로 어떠했을까. 이후 세조는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려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으로 보냈다. - 동망봉(東望峰) : 서울 종로구 숭인동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이 1457년 10월 유배지 영월에서 17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자, 그 날 이후 60여년 동안 왕후가 이곳 봉우리에 올라 동쪽인 영월을 바라보며 남편인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는 곳이다 동망봉 동쪽 기슭 성북구 보문동 산마루엔 왕후가 동쪽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는 자리에 왕후를 모시는‘산신각’이 있다. 보문동 주민들이 매년 제를 올리는 곳이다. 동망봉 북쪽 기슭 청룡사와 정업원 옛터는 남편을 잃고 비구니 스님이 된 왕후가 지내던 곳이다. 청룡사 북쪽 원각사는 왕후가 단종의 명복을 빌며, 단종의 삼년상을 치른 곳이다. 그곳 산신각에 1970년대까지 정순왕후의 영정과 유품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행방을 알 수가 없다. - 자지동천(紫芝洞泉)또는 자주동천 세조의 도움 받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왕후가 시녀 셋과 함께 동대문 상인들로부터 받은 옷감에 자줏물을 들여 생계를 이었다는 우물이 남아 있다. 부근에 자지초(紫芝草)가 아주 많아 우물 물빛이 자줏빛이었다고 한다. 이 우물물로 옷감에 물들여 널었음직한 바위에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고 선명히 새겨져 있다. - 동망봉 남쪽 동묘 건너편 숭신초교 앞은 ‘여인시장터’다. 정조때 지은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따르면 정순왕후를 동정한 인근의 부녀자들이 끼니때마다 푸성귀를 가져다주곤 했는데, 궁에서 이를 못하게 말리자 왕비가 살고 있는 초막근처에 남자들의 출입을 금한 여인들만 드나드는 시장을 열어 왕후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했다는 채소시장 터다. 당시 사람들의 민심과 여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 정업원(淨業院) 그녀가 살았던 집을 정업원(淨業院)이라고 하는데, 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하여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정업원 옛터 비각에는 왕후의 사연을 들은 조선후기 영조임금이 정업원 옛터임을 알리는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는 글씨를 써서 비석을 세우게 했다. 영조임금은 또 동망봉 봉우리 바위벽에 친필로 동망봉‘東望峰’이라 새겨 넣기도 했으나, 이 글씨는 일제 강점기 때 동망봉 일대 바위절벽이 채석장으로 뜯기면서 사라졌다. - 영도교 청계천에도 왕후의 유적이 남아 있다. 단종과 왕비가 눈물로 이별을 고했던 청계천의 다리는 "영이별 다리"로 불리다가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새로 놓인 다리는 ‘영도교’라 이름 붙여졌다. - 1521년 82세로 사망 : 중종은 대군부인의 예로 장사 지내줌 후사가 없어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제사를 지내줌 그들이 죽은 지 200년이 더 지난 후에야 숙종24년 1698년에 단종과 정순왕후가 복위 되었지만 단종은 영월에 왕비는 남양주에 있으며 조선사 500년 역사에서 한 많은 여인을 꼽으라면 단연 정순왕후 송 씨가 아닐까 싶다. - 단종릉 : 강원도 영월 장릉 정순왕후 능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위치한 사릉(思陵)이다 2011년 현재, 서울 종로구 낙산 근처인 이곳 동망봉 남쪽에는, 동망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들어서 있다. - 조선왕실에는 정순왕후가 2명이 있는데 단종의 비 정순왕후 송 씨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 씨이다 http://cfile297.uf.daum.net/image/1178FB0C4C84483468ABC5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 이지만 . . . . . . 서울문화투데이 권대섭기자 글 인용..... <출처 : 인터넷에서 발췌> [참고] 야사(野史)와 정사(正史)는 다를수 있습니다.
청령포의 관음송
노래 : 하늘이여 땅이여/이상번 굽이 굽이 돌아 돌아 동강을 따라 나여기 청령포에 왔네 사랑도 꿈 도 세월에 묻고 나 여기 영월에 왔네 봉래산 두견새야 너는 알겠-지 애끊는 어린 단종 밤새 우는 소리를 지금도 들릴듯한데 하늘이여 땅이여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어 찌하오 어 찌하오 동강 서강 서로만나 한강으로 흐르는데- 말 없는 저 소나무 고개 숙인채 내 곁에서 울고 있구나 ((((())))) 봉래산 두견새야 너는 알겟지 애끊는 어린 단종 밤새 우는 소리를 지금도 들릴듯한데 하늘이여 땅이여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어 찌하오 어 찌하오 동강 서강 서로만나 한강으로 흐르는데- 말 없는 저 소나무 고개 숙인채 내 곁에서 울고 있구나 말 없는 저 소나무 고개숙인체 내 곁에서 울고있구나 단종이여 하늘이여~단종이여 하늘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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