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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19 - 프랑스와 싸워 독립을 쟁취한, 카르타고의 옛 땅 튀니지!
튀니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2010년 12월 17일 튀니지 혁명 이후 폭발하여 2011년 절정을
이루었고 2022년 현재까지도 여파가 미치고 있는 아랍의 민주화 시위인 “아랍의 봄” 일 것입니다.
장기독재중인 정부의 부패, 인권유린, 빈곤등 경제적 문제를 겪고 있는게 원인이 되었으니 2010년
러시아가 흉작으로 밀 수출을 막으면서 국제 식량가격은 급격히 오르기 시작하자 민중들은
곡물가격 문제해결을 요구하기 시작하며 시위와 분신 시도가 벌어져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 원인이 있다면 정보화인데 줄리언 어산지의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튀니지 벤 알리
일가의 부패상이 "튀니리크스" 라는 사이트로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도 벤 알리가
축출된 한 원인으로 분석되었으니 아랍권 정계는 유례없는 위기를 맞이하는데, 그러나
내게는 그 보다는..... 튀니지 띵에 자리잡았던 고대 왕국인 "카르타고" 가 먼저 떠오릅니다.
튀니지에 들어선 왕조는 카르타고 - 로마 제국 - 반달왕국 - 동로마 제국 - 아랍 우마이야 왕조 - 피흐리
왕조 - 아바스왕조 - 무할라브왕조 - 아글라브왕조 - 파티마왕조 - 지리왕조 - 노르만왕조 - 무와히드
왕조 - 하프스 왕조 - 오스만 투르크 제국 - 무라드 왕조 - 후세인 왕조 - 프랑스 식민제국 - 이탈리아
- 튀니지 왕국 - 튀니지 제1공화국 - 튀니지 혁명 - 튀니지 제2 공화국이니 파란만장했던 나라 입니다.
고대 왕국인 "카르타고" 는 튀니지의 현재 수도인 튀니스에서 20km 떨어져 있는데
인구는 2만여명으로 튀니지에서도 이름난 관광지이니... 철도역 이름은 카르타고-
한니발 역이고 또 튀니지 제1의 공항 이름도 튀니스 - 카르타고 국제공항 입니다.
"옛 도시가 있었다. 튀리아 이주민들이 정착한 카르타고, 이탈랴와 티베리스 하구를 맞선 땅,
물산이 넘치고 전쟁엔 굳센 도시, 유노는 어느 땅보다 아껴 사모스를 떠났다 한다. 여신은
무기를, 여기 전차를 두었다. 이 땅이 만방의 맹주이길, 운명이 승낙한다면 그리 꾀하려
공들였건만, 여신은 트로야 혈통의 후손이 생겨나와 튀리아 성벽을 장차 파괴한다고
들었으니, 광활한 지배자 전쟁에 억척스런 백성이 리뷔아를 없이한다, 그리 운명은 짜놓았더라 "
카르타고는 기원전 750년 무렵 건국했다고 추정되는데 카르타고라는 이름은 페니키아어
'카르트 하다쉬트' 를 고대 그리스어로 음역한 단어를 라틴어로 옮긴 것이니.....
카르트 하다쉬트란 '새로운 도시' 라는 뜻인데, 카르타고를 세운 페니키아인
지배층들이 팔레스타인의 도시인 티레에서 이주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은 듯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기원전 814년 디도 여왕이 카르타고를 세웠으니, 동쪽 페니키아
(현 레바논) 티레의 공주 디도는 부왕이 죽고 왕이 된 형제가 그녀의 남편을
죽이자 위협을 느껴 티레를 떠나 서쪽 땅에서 카르타고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페니키아인들은 바다 통상에 의존했는데 장기간 원양항해가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해안
곳곳에 1천명 남짓 사람들을 남겨 보급기지 역할을 하였으니 그리스인들과 경쟁하며
지중해에 두 민족이 건설한 소규모 해안정착지들이 많이 자리잡았는데 몇 정착지들은
번영을 누리며 인구가 증가해 도시국가로 발전했으니 카르타고도 그러한 도시였습니다.
이들 페니키아 도시들은 모두 어머니 도시 티레(레반트의 레바논)에 속하였고, 상납금
을 티레에 지불해야 했는데...... 티레 본국은 페르시아와 같은 중동의 제국들과
싸우면서 쇠퇴했고, 마침내 기원전 332년 "7개월" 간에 걸친 치열했던 티레공방전
에서 800미터의 제방과 탑을 쌓아 공격해 온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결국 멸망합니다.
티레가 멸망하자 그 역할을 시돈에 이어 카르타고가 뒤를 이었으니 지중해 중간 지점
에 위치하였으므로.... 지중해 서부에 집중된 광산의 원자재와 지중해 동부의 질
좋은 문화생산물을 교환하기에 적합하였으니 카르타고는 번영을 누렸고, 페니키아
도시들의 맹주 역할을 하면서 이들로 부터 받는 상납금으로 부유한 도시로 성장합니다.
튀니지는 아프리카 북부 알제리와 리비아 사이에 위치한 국가로 수도는 튀니스이고 아랍어
정식 국호는“투니스 공화국”인데 프랑스어식 표기를 따른 '튀니지(Tunisie)' 로 알려져
있으니 수도 튀니스(Tunis) 에 지명 접사 -이(-ie)가 더해지면서 음소가 [z]로
유성음화된 형태이며 “영어로는 튜니저” 라 하며 베르베르어로는 “투너스” 라고 합니다.
기원전 10세기경 레바논의 페니키아인들이 이베리아와 페니키아를 오가는 무역선이 들릴
중간 기점으로 북아프리카 연안에 우티카 같은 조그만 항구도시를 세우기 시작했고
항구적인 정착지로 진화해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세운 고대 “카르타고” 가 지중해의 드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강대 세력으로 떠올랐습니다.
제1차 포에니전쟁 전까지 카르타고는 서쪽으로 마우레타니아에서 동쪽으로 리비아에 이르는
아프리카 해안과 이베리아 남부, 발레아레스 제도, 시칠리아, 사르데냐 섬을 지배하며 번영
했으니 이베리아의 금, 은, 구리, 제해권을 통해 독점한 브리튼섬의 주석은 중요한 수출품
이었으니 카르타고 해상무역은 지중해와 브리튼섬 및 모로코, 카나리아 제도에 이르렀습니다.
북아프리카의 페니키아계 도시는 지중해의 무역 주도권과 제해권을 놓고 고대 그리스인
들과 불가피하게 경쟁했으니 기원전 480년에는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시칠리아 및 그리스 본토의 그리스인과 세 차례의 시칠리아 전쟁, 에페이로스 왕국과의
전쟁을 비롯 지속적인 전쟁을 벌이니 이후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는 배경이 됩니다.
해안가 페니키아계 도시국가 외에 내륙에는 베르베르인의 선조뻘이 되는 정주민인 누미디아
인과 유목민 가이툴리아인이 각각 중북부 아틀라스 산맥과 남부 사하라 지역에 거주
했는데, 누미디아인은 해안의 페니키아계 도시와 경제적으로는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카르타고를 비롯한 페니키아계 도시가 성장하기 전에는 정치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페니키아계 도시의 경제력과 인구가 성장함에 따라 자연히 역전되었고 누미디아인은 카르타고
및 페니키아계 도시에서 용병, 소작농으로 일하는 신세가 되었는데 이들 베르베르인의
선조는 카르타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내륙에서 문화적,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했으며
그리스나 로마와의 전쟁으로 카르타고가 약화되면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했습니다.
기원전 264년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시칠리아를 주 무대로 싸웠으며,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참전했는데 해군력이 강한 카르타고임에도 육전은 물론, 해전
에서도 까마귀라는 신무기를 고안해 백병전으로 해전을 바꿔버린 로마군에게
밀렸고, 아이가테스제도 해전에서 패배하여 시칠리아를 완전히 로마에게 빼앗깁니다.
우리리나라 조선은 노가 1단 한줄에 불과한데 카르타고 해군은 노가 다섯줄인 5단층 갤리선
120척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비해 로마의 동맹도시인 나폴리와 타렌토는 3단층 갤리선이
고작이었으니 3단층 갤리선이란 노잡이가 갑판 아래 3층으로 된 단 위에서 노를 젓는
것으로 100명 노잡이를 필요로 하며 승무원과 전투원을 합쳐 80명을 승선시킬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카르타고의 5단층 갤리선은 5층의 단 위에서 노를 젓는데 노잡이가 무려 300명
이요, 선원 100명에 전투원 120명등 배 한척에 520명이 승선했는데 갑판이 높아
로마 해군 3단층 배를 위에서 내려다 보며 활을 쏘니 전투시에는 매우 유리했습니다.
*** 위 그림은 노가 한줄 뿐인 1단층 갤리선인데..... 카르타고는 "5단층" 갤리선 입니다 ***
로마는 해군이 없던지라 나폴리와 타렌토의 3단층 갤리선에 의존하다가 나포한 카르타고
5단층 갤리선을 해체해 복제하여 5단층 갤리선을 급히 건조하였으니 100척의 5단층
갤리선에 200척의 3단층 갤리선을 더한 300척의 로마 함대는 집정관 스키피오
가 맡고 반면에 육군은 또다른 집정관 두일리우스가 지휘해 시칠리아로 파견됩니다.
집정관 스키피오는 시칠리아에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17척의 소함대로 밀라초 북쪽
에 있는 리파리섬을 점령 하려다가 불행히도 카르타고 해군에 포로가 되었기로
해군도 육군 지휘관 두일리우스가 맡게 되니..... 해군까지 지휘하게 된 집정관
두일리우스는 항해에 서툰 로마군이라 해운국 카르타고 를 당할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통상적 해전으로는 이길수 없다고 보고 궁리를 거듭한끝에 두일리우스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했으니
바로 뱃머리 돛대에다가 "까마귀라고 불리는 잔교" 를 설치했는데, 기원전 260년 메시나에서
서쪽 밀라초 앞바다에서 양쪽 해군이 조우하자 함선을 근거리에 접근시켜서는 잔교를 내려
적선의 뱃머리에 걸치게 한후 로마군이 적의 배로 건너가 육상에서 처럼 육박전을 벌였던 것입니다?
카르타고군이 비웃는 가운데 적선으로 돌격한 로마 함선에서 난데없이 잔교가 내려지고 로마군 장기인
육박전이 벌어지니 용병으로 구성된 카르타고군은 중무장한 로마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패하게 되니
카르타고 5단층 함대는 15척이 침몰되고 30척이 로마군에 노획되었으며 전사자 3천에 포로는 7천명
에 달했으니 그리스와 더불어 양대 해운국이었던 카르타고는 이후 해상 주도권을 로마에 내주게 됩니다!
기원전 218년 시작된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에서 칸나에 전투등에서
로마 귀족 80%를 포함해 7만명을 죽이고 남이탈리아를 장악하는등 대승리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전선을 확대해 보급 부족으로 이탈리아에 잡힌 한니발을 피해 카르타고의 아프리카 본토를 침공해
누미디아 왕국과 연합 카르타고 항복을 받으니 카르타고의 영토는 카르타고시 주변으로 축소되었습니다.
기원전 149년 발발한 제3차 포에니 전쟁때 로마군이 쳐들어오자 전의를 상실한 카르타고는 화평을
위해서 성안의 무기란 무기는 죄다 버리고 투항했지만, 로마군이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쓸어
버리겠다고 선언하자 맨주먹으로 수년을 버텼으나 패배해 멸망하는데, 그럼에도 수년을 버틴
것은 공성무기가 마땅치 않아 농성하는 견고한 성을 함락시키기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무기를 로마군에 건네주고 맨주먹이 된 카르타고는 전쟁이 결정되자 공장을 다시 돌려 매일 검 300개,
창 500개, 방패 140개 투사무기류 1000개를 생산했다는 말이 있는데 전쟁준비가 안된 상태
에서 포위당한 후에 농성전을 하는데, 카르타고 항구는 입구가 요새 였으니 공성전이
시작되자 로마군은 배를 항구 입구에 가라앉혀 막음으로써 해상보급을 봉쇄하고 도시를 포위합니다.
방어전은 치열했으며 성벽이 뚫린 이후도 로마군과 카르타고 시민은 시가전을 벌였으니 카르타고군과
시민 40만이 대부분 무장한채 로마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
되었는데 기원전 146년 로마는 카르타고를 함락했지만 진저리를 치고는 살아남은 5만명을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으며 도시는 150년후 아우구스투스가 재건하기 전까지는 폐허상태로 방치되었습니다.
로마는 북방 켈트족과의 전쟁, 이탈리아 통일전쟁, 에피로스 피로스의 이탈리아 침공 등 숱한 전쟁에서
단련된 베테랑 장교들이 많았던 반면, 카르타고는 하밀카르나 한니발 등 몇몇 특출난 인물 외 전쟁
경험이 없는 페니키아인 상류층이 전쟁을 지휘했으며 전투에서 패한 장수를 사형에 처하는 제도로
패전시 처벌을 두려워한 지휘관들이 소극적으로 전투에 임해 결정적 승기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로마는 거의 해마다 전쟁을 수행하던 나라답게 귀족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온 시민이 전사였기
에 상대적으로 죽음에 대해 훨씬 익숙했으며..... 인구가 많아 전쟁에서 많이 죽어도 재동원이
가능했고 칸나이 전투등에서 귀족인 원로원 의원들이 다수 전사했으니 평민들 입장에서는
'우리만 생고생하는게 아니고 귀족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키는구나.' 하고 느낀게 컸습니다.
로마군은 3차례 오랜 전쟁을 통해 특히 2차전쟁때 한니발이 칸나에전투등 대승으로 로마 귀족 80%가
전사했으니, 중국이 고구려와 70년 전쟁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후환을 없애기 위해 평양을 파괴
하고 고구려인들을 모두 중국으로 잡아갔듯(일부만 신라로 탈출) 카르타고 시민을 거의 다 죽이고
노예로 팔아서 민족 자체를 소멸시켰으며 성을 파괴하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소금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제3차 포에니 전쟁 후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는 안나바에서 수사에 이르는 튀니지 북부 및 동부만을
포함했고 카르타고의 나머지 영토는 로마의 동맹국이었던 누미디아에 넘어갔는데 누미디아는
원래 동부와 서부의 두 왕국으로 나뉘어 있다가 제2차 포에니 전쟁 후반에 하나로 통일되었고
제3차 포에니 전쟁 무렵 튀니지 내륙 지역은 물론 동쪽으로 트리폴리타니아까지 영토를 확장합니다.
로마는 한동안 누미디아(알제리)를 동맹국으로 삼아 마우레타니아(모로코), 가이툴리아
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에 영향력을 유지하고자 했는데 그러나 로마의 내전에서
누미디아는 폼페이우스와 동맹했다가 탑수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패배하여
멸망했으며 오늘날의 튀니지 대부분은 로마 제국의 아프리카 속주에 병합되었습니다.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는 튀니지의 북쪽 절반과 알제리 동부, 트리폴리타니아 해안 지방을 포함
하는 행정구역이었는데 물론 아프리카 속주에 인접한 지역에서는 페잔 일대의 가라만테스
왕국등 여전히 독립적인 베르베르인이 거주하였으니 처음에는 우티카를 수도로 했으나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카르타고시가 재건된 이후에는 신 카르타고가 수도가 됩니다.
로마시대 아프리카 속주는 수백년간 팍스 로마나 아래서 다시금 제국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서
번영했으니 로마식 도시로 재건된 신 카르타고는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등과 함께
로마 최대 도시중 하나였으며 화려하고 정교한 모자이크와 도기공업으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퇴역군인들을 포함한 이주민이 카르타고시에 유입되면서 카르타고와 아프리카 속주의 로마화가 진행
되었으며 국제적 분위기를 띠는 도시가 되었으니 아프리카 속주에서 행정 언어이자 제국 공용어인
라틴어 외에도 페니키아어, 베르베르어가 계속 사용되어 언어적으로도 다채로운 양상을 보였습니다.
관개시설의 발달 덕분에 로마 제국의 곡창이 되었으니 밀은 올리브와 함께 아프리카 속주의 주요
수출품이었으며 튀니지 북부를 흐르는 바그라다스강 유역은 비옥하기로 유명했으니 이런
농업은 라티푼디움 이라고 부르는 대농장에서 이루어졌는데 농지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베르베르인 유목민과 충돌도 발생했으나 유목민은 곧 튀니지 남서부의 반사막 지대로 밀려납니다.
아프리카 속주 영내에 로마화가 진행되면서 도시 지역에는 아풀레이우스와 같이 완전히 로마화한
베르베르인도 있었지만 내륙에는 로마 문명의 영향을 제한적으로 받은 베르베르인 집단이 점
처럼 흩어져 분포했으니 로마가 이민족의 문화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2~3세기에는 아프리카 속주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초기 로마제국 기독교의 중심지중 하나
가 되었으며 테르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훌륭한 신학자도 배출되었는데
아프리카 속주는 특이하게도 도나투스파 기독교가 널리 전파된 지역이니 3세기말
마지막 기독교 탄압에서 발생한 형식적 배교자를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다시 받아
들일지의 문제에서 일부 기독교도가 이를 반대하면서 도나투스 파로 갈라져 나왔습니다.
내륙의 덜 로마화되고 가난한 베르베르인 중에서 도나투스파가 많았고 카르타고는
카톨릭 교회가 세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도나투스파와 카톨릭 간의 충돌을
내륙의 베르베르계 토착 원주민과 해안의 다민족 코스모폴리탄 간의 갈등으로
해석하는데 도나투스파는 아프리카 속주가 반달족에게 넘어갈 때까지도 존재했습니다.
4세기 말에 피르무스가 로마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형제인 길도에 의해 진압당했고 길도도
곧 반란을 일으켰으나 또다른 형제인 마스케젤과 서로마 군대에게 패배했는데 이 사건에서 반란
또는 진압에 가담한 사람들이 베르베르인 유력자이자 동시에 로마 장군이나 귀족이었다는 점입니다.
서로마가 쇠퇴하던 무렵, 라인강과 남프랑스, 피레네 산맥을 거쳐 이베리아반도 남부까지 들어온
반달족은 수에비족과 서고트족, 서로마의 군사적 압력을 받고 있었으니 429년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는 반달족과 알란족을 데리고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아프리카를 침공했으며
10년만에 카르타고를 공략해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 전역을 손에 넣고 반달 왕국을 세웁니다.
이때 도나투스파 기독교도 반달족을 도왔으며 도시 로마인들과 카톨릭 사제는 지중해를 건너
피난을 가야 했는데, 동로마는 해적이 되어 지중해 일대를 바이킹처럼 휘젓고 로마
까지 침공하는 반달족을 쫓아내고 아프리카를 되찾기 위해 실패를 거듭하다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파견해 한세기 만인 534년에 멸망시킵니다.
동로마 제국은 반달왕국 영토에 카르타고를 수도로 하는 아프리카 총독령을 세웠지만 해안도시에
그쳤고 내륙은 독립적인 베르베르인 정치 집단의 영역이 되었으니 610년, 아프리카 총독
이었던 헤라클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해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위기에 놓여있던 제국을
구원하고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공격하는등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을 크게 약화시킵니다.
이 전쟁으로 페르시아가 약화되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이 발흥하여 시리아, 이집트를 점령한
이슬람 군대는 670년경에 아프리카 총독령 및 북아프리카에 침공해 동로마제국 및 현지 베르베르인
왕국과 부족세력을 정복했으며 698년에는 카르타고를 함락하고 북아프리카 정복을 마무리지었습니다.
중세 이슬람 시대에는 튀니지를 비롯한 로마시절 아프리카 속주 지역을 이프리키야라고 불렀는데 중심
도시는 670년경 이슬람 군대가 침공할때 세워진 카이라완이었고 군사적 거점을 만들기 위해 세워진
도시라 이름도 아랍어로 '요새' 라는 뜻이며 오늘날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는 작은 어촌이었으나
군항이 세워졌으며 반면 카르타고, 우티카 같이 로마시대에 번영했던 도시는 파괴되어 폐허가 됩니다.
다마스크스의 우마이야조 북아프리카 지배도 8세기 중반 모로코에서 이슬람의 한 분파인 하리지파
를 믿는 베르베르인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큰 위기를 맞으니, 이후 바그다드에 아바스조가
성립되고 나서도 북아프리카에 대한 중앙 정부의 영향력은 약해서 800년경 형식적
으로만 아바스조의 신하이고 사실상 독립 왕조인 아글라브 조가 성립되었습니다.
백여년간 튀니지를 중심으로 한 마그레브 지역에 정치적, 군사적 안정이 되돌아오면서 농업과 무역,
문화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으며 이슬람 법률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고, 아글라브 조는 한때
시칠리아를 정복하기도 했으며 시칠리아는 12세기에 노르만인에게 정복당할 때까지 이슬람
의 지배를 받았으니 십자군우너정때에 시칠리아는 “이슬람이 시작되는 땅” 이라는 묘가 보입니다.
알제리 내륙에서 리비아에 이르는 건조 지대에는 하리지파의 베르베르족이 아글라브조와
공존했으나, 900년대 시아파 베르베르인이 반란을 일으켜 909년 카이라완을 점령하고
파티마 왕조를 세우니 두 나라를 멸망시킨 파티마조는 마그레브 전역을 정복해
배후의 위험이 없어지자 969년 이집트를 침공하고 카이로를 세워 수도로 삼았습니다.
튀니지인 이프리키야는 파티마조의 섭정인 지리조가 독립적으로 통치했는데 사하라 사막을 통한
무역이 쇠퇴하고 해상 무역도 이탈리아 도시와의 경쟁으로 쉽지않아 경제가 기울기 시작했고,
1048년 지리조가 수니파로 전향하며 파티마조로 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파티마 조는 1058년
베두인족을 보내 지리조 나라를 파괴했는데 그후 지리조는 노르만족의 공격을 받아 멸망합니다.
파티마 조는 북아프리카 지방 수니파 반란에 대응해서 극단적인 이스마일파 광신도로 악명이
높았던 베두인인 바누 하이랄, 바누 수랍 부족을 반란지인 북아프리카 동부로 이주시켜서
마그레브의 거주지와 농경지를 철저하게 파괴하라고 명령하니 베두인들은 순수 유목민
으로 농업을 멸시해서, 황폐화된 도심과 농경지를 목축지로 사용하였으니사막화된 것입니다.
이후 백여년간 이프리키야는 베두인과 노르만족의 공격으로 혼돈의 도가니였는데 서쪽 모로코
서남부에서 발흥한 베르베르계의 알모하드조가 1150년대 이프리키야를 정복하였고 바누
힐랄 등 아랍계 베두인족의 침공과 이주는 이 지역의 아랍화를 가속시켰으며 이슬람화가
더뎠던 내륙의 베르베르인 거주지에서도 아랍계로 교체되거나 하여 아랍어가 널리 쓰이게 됩니다.
13세기초에 알모하드조가 쇠약해지자 그 휘하에서 이프리키야를 지배하던 베르베르계의 하프스가문
은 1229년 독립을 선언하고 하프스조를 세우니 14세기 중엽에 경제적, 군사적 위기를 맞았을 때
를 제외하고는 이프리키야가 다시금 이슬람 세계의 중심 중 하나가 될수 있었으니 사하라를 통한
육로 무역과 지중해를 통한 해상무역이 발달했으며 무역의 발달에 따른 법과 제도도 정비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교육과 시, 건축이 발달하고 이븐 할둔과 같은 학자도 배출되었으며 또 베르베르인의 아랍화
가 진행되어 아랍어가 널리 퍼지고 베르베르인과 아랍인 간의 구분이 약화되었는데.... 레콘키스타
운동을 피해 건너온 이베리아 출신 무슬림과 유대인도 이 지역 문화와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었으며
이프리키야를 중심으로 국가의 후원을 받는 해적이 활동하니 유럽 국가가 군대를 보내 침공하기도 합니다.
하프스조는 15세기 중후반 우스만 칼리프 때에 전성기를 맞았으나 16세기에는 스페인과 오스만
제국이 세력대결을 벌이는 지역이 되는데, 1534년에 오스만 제국이 튀니스를 1년간
점령하자 오스만의 위협을 피해 스페인의 속국이 되었지만 1574년 오스만이 스페인을
물리치고 튀니스를 점령하여 멸망하고 튀니지는 오스만의 튀니스 에야레트(도)가 됩니다.
오스만 제국의 북아프리카 진출은 바르바리 해적 두목 가운데 하나로 바르바로사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하이르 앗 딘과 그 형 바바 우르지가 1516년 알제를 정복하고 1518년 스스로 오스만
제국의 신하가 되어 베일레르베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으면서 시작되었는데 16세기 중엽은
바르바리 해적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여 지중해를 오가는 기독교 무역선과
해안 도시, 마을을 휩쓸고 다니던 시기로 북아프리카 해안은 이들의 주요 근거지였습니다.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정치세력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북쪽의 기독교 국가인 에스파냐에게 밀리고
있었으니 발칸 반도와 지중해에서 기독교 국가를 견제할 오스만 제국의 존재는 생존에 중요
했으며 오스만제국 덕분에 튀니지가 이슬람 문명권에 남아있다고 할수 있지만 하프스조에는
오스만 튀르크가 에스파냐 보다 왕조의 존속에 더 큰 위협이었고 1574년 울루지 알리가 튀니스
를 알제의 베일레르베이령에 포함시킴으로서 하프스조는 멸망하고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됩니다.
1587년 울루지 알리가 사망한후 베일레르베이는 폐지되었고 오스만 중앙정부에 의해 임명된 파샤
가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지역을 각각 다스리는데 파샤 아래에는 세금 징수 등을 맡은 베이,
튀르크 장군과 현지 유력자로 이루어진 협의체이자 중앙 행정기구인 디완, 예니체리부대 지휘관
인 아가, 백인대장과 같은 존재였던 데이, 그리고 정부의 주요 수입을 제공했던 해적 등이
있었으니 지배계층은 거의 튀르크인이어서 튀르크인 지배자와 튀니지인 피지배자가 존재했습니다.
1591년에 예니체리 부대가 반란을 일으켜 그들의 하급 지휘관중 한 명을 데이(Dey)로 선출하니
데이는 수도에 대한 통치와 군권을 행사하고 파샤를 형식적인 지위로 격하시키고 디완을
해산함으로써 튀니지의 실질적인 통치차가 되었는데 우스만 데이(1598-1610)와 유수프 데이
(1610-1637) 하에서 튀니지는 경제적으로 회복하고 해적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1640년에 데이가 사망하자, 당시 파샤 직을 겸하고 있던 하무다 베이는 디완이 해산으로 인해
불만을 갖고 있었던 유력자들과 지방의 부족들, 파샤라는 직위가 주는 이름값 등을 통해
데이가 되는데 성공하고 이로서 파샤와 데이에 이어 베이가 튀니지의 실질적인 통치자
가 되며 아들 무라드 2세는 디완을 복원하고 예니체리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 합니다.
그러나 1675년 무라드 가문에 내분이 일어나 인접한 알제리에서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등 혼란한
상황이 발생하고 1702년 무라드 가문의 마지막 베이가 암살됨으로서 무라드 시대는 끝나게
되었으며, 또한 해적 활동이 감소하고 대신 유럽 국가와의 지중해 무역이 증가하였는데
튀니지 정부는 이 무역을 독점하여 국가재정에 도움이 되었으나 민간 상업의 성장은 지체됩니다.
튀니지 후세인 왕조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확보하였으며 1715년 오스만 중앙 정부
에서 후세인을 대신할 파샤를 내려보냈으나 후세인 베이를 지지하는 현지 유력자들에 의해
거부당해 오스만 제국이 후세인을 암묵적으로 인정해야 했을 정도이며, 후세인조는 오스만의
간섭을 우려해 오스만과의 관계는 형식적으로만 유지했으며 예니체리에 대한 의존을 줄입니다.
오스만제국이 인정한 하나피 학파가 아니라 튀니지 중심으로 발달한 말리키 학파의 이슬람 법학자
를 관료로 임명하고 튀니지/튀르크 혼혈 및 튀니지인의 관직 진출을 확대하는등 독립적인
면모를 강화하는데 프랑스혁명 이후 나폴레옹전쟁이 끝날 때까지 튀니지는 유럽으로의 수출이
증가하여 경제적 번영을 누리게 되며 또 이 시기는 바르바리 해적의 마지막 전성기에 해당합니다.
아흐메드 베이(1837-1855)에 의해 튀니지의 근대화 노력이 시작되니 튀니지는 종주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2세, 이집트의 무하마드 알리를 본받아 개혁에 나서며 근대적인 통신, 교통, 군대,
교육기관을 도입하고 1863년에는 헌법을 제정하기도 했지만 미약한 중앙 정부와 잘 걷히지 않는
세금, 유럽의 산업혁명으로 생산된 값싼 수입 상품의 범람으로 1867년에 튀니지 정부는 파산을
선언하니 2년후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채권단을 구성해 경제를 정상화해 보려했으나 실패합니다.
19세기에 이탈리아, 주로 시칠리아에서 많은 이탈리아인 이민자가 유입되어 당시 인구가 백만명 정도에
불과하던 튀니지 사회에 큰 영향을 주게 되니 프랑스는 이를 좋지 않게 여겨서 프랑스 식민지가 된
이후 튀니지 내 이탈리아인을 탄압해 이탈리아인은 점차 줄어들게 되니 무솔리니의 불평을 사게 됩니다.
튀니지를 노리는 나라는 이웃 알제리를 점령한 프랑스와 당시 통일을 마치고 식민지 쟁탈전
에 합류한 이탈리아이니, 이탈리아는 튀니지에 정착한 수십만명의 이탈리아인을 근거로,
자국 식민지의 첫 케이스로 삼기위해 튀니지 쟁탈전에 열심이었으나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진 오스만 튀르크의 발칸반도 영토 처분에 관한 논의
에서 튀니지를 프랑스 영향권에 넣는 대신 이탈리아는 트리폴리타니아(리비아) 를 얻습니다.
프랑스는 프랑스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튀니지를 평화적으로 점령하고자 후세인조
와 협상을 시도하지만 될리 없고 침략할 구실을 찾던 와중에.... 1881년 튀니지와
알제리 변경의 한 부족이 알제리를 약탈한 것을 빌미로 군대를 튀니지로 진격
시켜 바르도 조약을 맺어 군사권과 외교권을 뺏고는 "튀니지를 보호령" 으로 만듭니다.
재정에 관한 권한도 프랑스가 갖게 되면서 후세인조는 이름만 존재할 뿐 튀니지는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식민지가 되니 경쟁국 이탈리아는 즉각 항의했으나 주요 열강들이 프랑스편을 들자
마지못해 1893년 프랑스의 튀니지 지배를 인정하였으며 1882년에 베이가 사망하자
프랑스는 알리 베이를 즉위시키면서 튀니지와 오스만제국과의 형식적인 유대도 끊어지게 됩니다.
프랑스는 알제리 경우처럼 프랑스인 이주자(콜롱)에게 많은 경제적 특권을 주어 튀니지에 최대한
많은 이주자를 유치하려 노력하였으며 1891년에는 만명에 불과하던 프랑스인 이주자는
1945년에는 14만 4천명으로 증가하니 이는 당시 튀니지 인구중 8% 에 해당하는 인구였습니다.
프랑스는 철도와 도로, 병원, 수도, 관개 시설, 교육 기관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농장과
광산을 개발해 튀니지의 경제수준, 인구와 튀니지인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는데 하지만
숙련 노동은 전부 프랑스에서 공급받았고 급격하게 프랑스인의 농지를 확대하여 프랑스
의 정책이 프랑스 본국만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며 튀니지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합니다.
1880년대 이후 아랍세계에 아프가니, 압두 등의 개혁가가 출현하면서 튀니지도 이들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슬람을 유지하되 서양의 합리주의와 과학 기술로 사회를 점진적으로 근대화하려는 운동이
발생해 튀니지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여 1920년 데스투르당의 설립으로 이어지니 프랑스의
탄압과 내부 갈등에도 불구하고 데스투르 당은 노동자 세력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이어나갑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게 점령당하면서 튀니지는 비시 프랑스에 귀속되었으니 북아프리카 전역
의 치열한 무대가 되었고 1942년 11월 튀니지에 눈독을 들인 이탈리아 왕국에게 양도되는데....
그러나 동쪽에서는 엘 알라메인 전투의 패배로 독일군이 후퇴하고 서쪽에서는 횃불 작전에서
영미 연합군이 수적으로 불리한 비시 프랑스군을 제압한데다가 연합군의 공중 폭격으로 보급이
불가능해지면서 결국 1943년 5월 13일 추축국 군대가 항복하여 튀니지는 다시 프랑스령이 됩니다.
2차대전후 하비브 부르기바가 이끄는 신 데스투르당 및 연대한 튀니지 노동자 총연맹은 법아랍주의
계열과 내부갈등을 이기고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니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실패하고 알제리 독립
전쟁에 올인하던지라 코가 석자인 상황이라 프랑스는 1955년 튀니지의 독립을 약속하고 1956년
3월 20일, 튀니지는 베이였던 무하마드 8세 알 아민을 국왕으로 하는 튀니지 왕국으로 독립 합니다.
왕국으로 독립한 튀니지는 그 이듬해에 입헌 군주국에서 공화국으로 체제가 전환되어
초대 대통령에 하비브 부르기바가 당선되었으나 그는 헌법까지 바꿔가면서
30년간 장기집권을 했고, 결국 1987년에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에게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세속주의 정책이나 여권신장 정책,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 후원 등 대내외적
으로 괜찮은 정책도 수행해서인지 부르기바는 독재자 치고는 아직까지도 국민들의 평가가 좋은
편인데.... 튀니지혁명 이후에도 웬만한 도시의 큰 길에는 하비브 부르기바의 이름이 붙어있습니다.
2010년 12월부터 2011년 1월까지 23년간 독재를 해온 벤 알리정권에 대항해 시민들이 튀니지
혁명을 일으켰고, 혁명의 물결이 전 아랍권을 강타했으니 이른바 “아랍의 봄”인데 하지만
혁명은 살라피즘이란 극단주의를 숭배하는 자들의 난립과 이에 맞서는 세속주의자
들의 반대로 인해 국가 비상사태를 연이어 선언할 정도로 한동안은 나라가 혼란 했습니다.
아랍권 국가들이 장기 독재중인 정부의 부패, 인권 유린, 빈곤 등의 경제적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이 큰 원인이 되었으니 결정적으로는 빈곤과 식량난.
2007년~2008년 사이에 있었던 경제위기와 식량 가격폭등 현상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2010년에 러시아가 흉작으로 식량, 특히 밀 수출을 막기 시작하면서 금융위기 이후 내려
가던 국제 식량가격은 다시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고 여기에 달러화 약세까지 겹쳤으니
아랍권의 경제와 식량사정을 더욱 악화시켰고 민중들은 정부에 곡물가격 문제해결
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시위와 분신 시도 등이 벌어져서는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프랑스가 주식용 빵값을 규제하듯이, 정권이 뒤집힌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은 대부분 식량
자급률이 형편없어 자기들이 먹는 주식인 밀조차 수입하는 세계 최대의 밀 수입처이고,
밀값이 널뛰면 정권도 널뛰기 때문에 식량가격 안정을 위해 국가가 책임지고 밀가루를
저가에 공급했으니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가격 통제를 해왔는데 이것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이유로는 설명하기 힘들만큼 시위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그리고
너무도 큰 규모로 일어났다는게 문제인데 초기에 안정적으로 보였던 국가
들 조차도 어이없이 무너져내렸으며 오일 달러 분배정책도 효과를 잃었습니다.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면 정보화인데 줄리언 어산지의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튀니지 벤 알리
일가의 부패상이 "튀니리크스" 라는 사이트로 국민들에게 알려진 것도 벤 알리가 축출된
한 원인으로 분석되었으니 당시 튀니지뿐 아니라 다른 아랍권 국가들의 부패상도 위키
리크스를 통해 어느정도 폭로되었기 때문에 아랍권 정계는 유례없는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튀니지에서 국민들이 벤 알리를 축출하는데 성공하자 다른 나라 시위대에게도 '우리도 할 수 있다'
는 자신감을 불어넣은 격이 되었기 때문에 시위는 점점 격화되었으니 정치 지도층의 적나라한
부패가 아랍권 트위터 등으로 퍼지며 혁명이 시발하는데 상당부분 일조하였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시리아는 아랍권에서 강력한 유무선망 도청과 검열체계를 갖춘 나라이기도 하며, 이미 시리아
는 그 지정학의 문제로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이 시리아에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달려들었고 이 주에서도 필사적인 이란과 러시아가 아사드 정권을 비호해 밀어붙인 결과,
시리아 땅에 풀 한포기가 안남아도 아사드 정권은 유지될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혁명의 목표는 '우리에게 먹을 것을 달라' 였으니 아랍의 봄으로 정권이 넘어간
수많은 나라들의 특징은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식량자급률까지 떨어져서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에 필요한 물건들조차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달러환율 악화, 국제
원자재 가격상승 하나만으로도 일상 생활이 흔들릴 정도로 내수경제의 요동이 심했습니다.
처음에는 먹을 것을 달라는 식량가격 안정화와 공급요구였지만, 이것이 뇌관이 되어 그동안 쌓여
있었던 사회, 민생경제등 각자의 불만이 어느 순간 합쳐지더니 순식간에 정치적 요구로 연결
되고 있으며 부패한 정권의 교체나 인권보장, 민주주의 확립 등의 요구가 나왔으니 이런 목소리
가 일치한 것은 아니고.... 2011 이집트 혁명의 영상에서도 볼수 있지만 요구사항은 다양했습니다.
IT 의 발전이 혁명의 원동력이 되었으니.... 시위대는 트위터와 휴대 전화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고
이를 기반으로 조직적인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으며 또한 카타르의 알 자지라가 아랍권
방송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혁명에 대해서 상세히 보도하였기 때문에 점점 더 주가가 올랐습니다.
아랍권 내부에서 그동안 묻혀있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터져나오기도 했는데 여성들은 혁명에 적극적
으로 참여해 여성 지위향상,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소수민족들이나 정치적으로 약세인 종파들은
처우개선을 요구하였으니 민생경제 악화때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자들이 사회적 약자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위의 불길은 연간 밀 수입 상위국가들인 북아프리카 국가들부터 마치 다이너마이트 도화선
처럼 이어서 타들어갔고, 결국 그 폭탄이 리비아에서 터지는 바람에 도미노 처럼 시아파가
주도 세력인 이란이나 사하라 사막으로 떨어져 있는 중부 아프리카 일대는 물론
지중해를 사이에 둔 서유럽, 심지어 저 멀리 떨어진 중국에까지 시위가 번져나갔습니다.
아랍권 민주화 운동은 권역별, 국가별로 주된 이유가 달랐으나 종파, 민족, 정치 부패 등의 문제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귀결되는 문제는 삶의 질의 문제이니 생활필수품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경제구조로 인한 생활물가의 폭등, 아랍권 전역에 뿌리 깊게 퍼져있는 계급적 사회 구조와
그에 따른 부의 분배의 불평등과 참정권의 불평등이니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와 같은 비교적
부의 분배와 참정권의 평등을 진행하고있는 국가의 소요사태는 대중의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혁명후 들어선 신 정부들의 기본적 성패가 이와 동일함을 볼 때 이러한 주장은 현실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그리고 빵과 참정권이 시위의 발단이 되었을지는 몰라도 세속주의 군사정권을 무너
뜨린 혁명의 과실은 이집트처럼 이슬람 원리주의를 주창하는 권위주의 정권 수립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아랍의 특수한 사회적 현상이자 이슬람의 종파간 갈등과 역학 관계, 그리고 이집트와 같은
군부의 정권장악 역시 혁명의 진행 흐름에 큰 영향을 주었으니 이에 따라 혁명의 본래
정신과 목적이 퇴색할 우려가 있음은 그간의 중동의 현대사에서 반증되었으니 결국
시리아와 일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위는 2012년이 되면서 점차 잦아들었습니다.
2009년-2010년, 아랍의 봄이 일어나기 직전, 이란에서 이란 민주화 운동(녹색운동 또는 녹색
혁명이라고도 부른다)이 일어났는데, 비록 이란에서는 미완성, 정권퇴진 실패로
끝났지만 나중에 2010년 12월 아랍의 봄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각국의 언론들은 대부분 사실을 외면했으며 정부는 알 자지라나 CNN, BBC, NYT 와 같은 해외
언론의 취재를 저지하였으니 이집트에서 알 자지라의 등록을 취소하고 수명의 스탭을 강제
억류했던 것이 그 예이니 기자에게 대놓고 사격을 하기도 했고, 이집트는 저격수에게
사망한 기자가 나오기도 하였으며 바레인의 경우 헬기가 기자를 향해 사격하기도 했습니다.
대신에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를 통해서 현재의 상황과 관련 사진 및 영상이 전해졌으니 시위의
뇌관이 되는 영상은 거의 인터넷을 통해 전해졌고 페이스북 그룹이나 트위터를 통해 시위의 일정이
전파되기도 하였지만 튀니지, 이집트, 바레인이 그렇듯이 시위가 격화되면 정부는 SNS 의 접속을
차단하며 아예 인터넷을 차단하는 경우도 있었고, 이를 우회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이 강구되었습니다.
구글에서 이집트 인터넷 차단을 우회하기 위해 휴일임에도 개발자들이 모여 Speak2Tweet
서비스를 만들어서 정해진 전화번호로 음성 메시지를 남기면 #egypt 의 꼬리표를
달고 트위터로 글에 올라가는 서비스를 개발하기도 하였는데.... 구글은 이집트
외에도 리비아와 같은 인터넷이 차단된 국가로 Speak2Tweet 서비스를 확대하였습니다.
대규모 시위는 금요일에 많이 열렸으니 이슬람 신자는 금요일에 반드시 예배를 봐야
하며 이로 인해 금요일은 사실상의 휴일이 되기 때문으로 이는 5대 의무 중
하나인 صلاة(Salah) 의 일부분인 جمعة(Jumu'ah) 이며 꾸란에 규정되어 있기에
정부가 모스크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는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아랍권의 시위는 금요일 모스크에 모인 사람들이 시위대로 자연히 바뀌는 패턴
을 보여왔으니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역시 금요 예배 직후에 있었던 시위에 탱크와
헬기를 동원한 발포로 수천명이 사망한 '검은 금요일' 사건이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금요예배를 주관하는 성직자들의 성향에 따라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이집트
의 경우는 성직자들이 반 무바라크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시위가 더 격화되기도 했지만, 2009년
이란에서 금요 예배를 하메네이가 직접 주관하면서 반정부 시위대를 비난하여 동력을 꺾기도 했습니다.
2011년 8월 이슬람권이 라마단 기간에 들어서면서 민주화 운동은 새로운 기로에 들어섰으니 대부분
나라는 시위가 잦아들었으나 뛰어넘은 나라들은 갈등이 더욱 격화되었는데 튀니지와 이집트를
제외하면 완전한 민주화 운동이 아닌 경우도 있었지만 아랍권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혁명 3년만인 2014년 1월 26일 신헌법이 통과되었으니 광신적인 아랍 국가
들 사이에선 이례적으로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근거로 하지않고 종교의 자유와
여성의 인권 보장을 강조한 서구적인 헌법이라 국내외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후 2014년말 치러진 총선과 대선에서 세속주의 성향의 "니다 투니스" 가 승리하면서 정권
이 교체되었으며 튀니지의 민주화 이행을 주도해 온 시민단체 연합체 '국민4자 대화
기구' 는 다원적 민주주의 구축에 이바지한 점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