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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hilmoonheo 원문보기 글쓴이: 한국인성교육원
진주 강씨의 종문. | |
관향 | 경상남도 진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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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 강이식(姜以式) |
주요 중시조 | 강계용(姜啓庸), 강위용(姜渭庸), 강원용(姜遠庸), 강민첨(姜民瞻), 강궁진(姜弓珍) |
주요 집성촌 | 평안북도 정주시 함경남도 북청군 경상남도 남해군, 진주시 경상북도 안동시, 영풍군 전라북도 순창군 |
주요 인물 | 강감찬, 강맹경, 강희안, 강희맹, 강구손, 강홍립, 강항, 강세황, 강필리, 강위, 강대련, 강동희, 강영훈, 강만수, 강재섭, 강운태, 강명순, 강기갑, 강승규, 강기정 |
인구(2015년) | 1,161,326명 |
진주 강씨(晉州 姜氏)는 고구려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 강이식(姜以式) 장군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비조는 삼황오제 중 하나인 강석년(姜石年, 신농)이라고 한다.
시조는 고구려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를 역임한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다. 고구려 명장인 강이식 장군은 597년(고구려 영양왕 8년) 수 문제가 침략의 야욕을 품고 무례한 국서(國書)를 고구려에 보내오자, "칼로써 대답하자"고 주장하며, 이듬해 병마원수(兵馬元帥)로서 정병 5만 명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이듬해에는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遼西)에서 수나라 요서총관 위충(韋沖)과 교전한 뒤, 임유관(臨谕關)으로 거짓 후퇴하였다가 다시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수나라 수군총관 주나후(周羅喉)의 30만 수군을 크게 격파하고 개선하였다.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事)》에 따르면, 묘(墓)는 만주(滿洲) 심양현(瀋陽縣) 봉길선 원수림 역 앞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라는 큰 비석이 있었다고 하나, 중국 문화혁명 때 소멸되고, 돌조각과 거북좌대만 묘역에 남아 있다.[1]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서동 871-1에 강이식 장군을 모신 봉산사가 있다. 해마다 음력 3월 10일에 그를 제향한다.
6세손인 택인(擇仁)이 839년(신라 문성왕 원년) 과거에 급제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 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지낸 후 진안후(晋安侯)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진(縉)은 헌강왕(憲康王 : 신라 제49대 왕) 때 과거에 장원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와 판내의령(判內議令)을 역임한 후 진양후(晋陽侯)에 봉해졌다.
강씨가 진주에 세거한 것은 고구려 멸망 이후 당제가 안동지방 준재(俊才)를 발탁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에서 강진(姜縉)이 650년 경에 출생하여, 당제가 안동도호부를 평양으로 옮기기 전인 676년 전에 이미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태중대부 판내의령 (太中大夫判內議令)을 역임하다가 진양후(晋陽候)에 봉해진 이후이다. 이 때부터 진주강씨의 본관을 진주(晉州,진양,진산으로 불리기도 함)로 하게 되었다.[2]
이는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핵심 귀족이었던 강족(姜族)과 고구려 유민들과의 단합을 두려워하여 한반도 최남단인 경남 진양후로 봉한 것이다. 태백오현 도은공, 잠은공 형제 가문이 경북 지방에 정착하여 후대에 많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각 파를 보면 강이식을 동일 시조로 하여 강계용(姜啓庸)을 중시조로 하는 박사공파(博士公派)가 있고, 강위용(姜渭庸)을 중시조로 하는 소감공파(少監公派), 강원용(姜遠庸)을 중시조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 강민첨(姜民瞻)을 중시조로 하는 은열공파(殷烈公派), 강감찬(姜邯贊)의 아버지 강궁진(姜弓珍)을 중시조로 하는 인헌공파(仁憲公派)가 있다. 박사공파는 어사공파(御使公派)라고도 하며, 시중공파는 관서대장군파(關西大將軍派)라고도 한다. 인헌공파는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衿川)이라고 하여 금천(서울 금천구)강씨라고 한다.
박사공파의 중시조는 강계용이다. 그는 국자박사(國子博士)로 고려 원종 때 통신사서상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그의 손자 강사첨(姜師瞻)의 5세손 중 첫째 아들 강회백의 후손은 통정공파(通亭公派)를, 둘째 아들 강회중(姜淮仲)의 후손은 통계공파(通溪公派)를 형성하고 있다.
통정공파의 파조 강회백은 고려 말에 대사헌을 지내고 조선 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에 올랐다. 그의 아들 강석덕(姜碩德)은 세종의 둘째 부인 영빈강씨의 아버지가 된다. 그는 개성유수와 지돈령부지사(知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강석덕의 아들 강희안(姜希顔)·강희맹(姜希孟) 형제는 통정공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강희안은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정인지·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뒤에 단종복위에 연루되었으나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그는 시서화삼절(詩書畵三絶)이라 불릴 정도로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연산군 때 우의정을 지낸 강구손(姜龜孫)은 강희안의 아들이고,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강맹경(姜孟卿)은 강희안의 4촌형이 된다. 강희안의 동생 강희맹은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世子賓客)이 되고 병조판서·이조판서 등을 거쳐 좌찬성에 올랐다.
강회중의 후손인 통계공파에서는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과 역시 선조 때 평난공신에 오르고 이조판서·병조판서를 거쳐 중추원판사를 지낸 진흥군(眞興君) 강신(姜紳)이 있으며, 왕자사부(王子師傅)를 거쳐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진 강인(姜絪) 형제가 있다.
또한 정묘호란의 주역으로 불리는 강홍립(姜弘立)도 강신의 아들이다. 특히 강인의 후손은 고종 때에 와서 강준흠(姜浚欽)·강시영(姜時永)·강문형(姜文馨)·강난형(姜蘭馨)·강우형(姜友馨)·강국형(國馨) 등 판서급 인물을 배출해서 명문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 밖에도 인조 때 화포술(火砲術)을 개발한 강홍중(姜弘重)도 통계공파의 사람이다.
박사공 강계용의 아우인 강위용은 고려 때 사도소감(司徒少監)을 지냈으며, 진주강씨 가문의 5대 파조로 소감공파의 파조이다. 그의 4대손 강태(姜泰)는 가선대부 대상(嘉善大夫 大相)으로 있으면서 오랑캐의 침입을 당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엎드려 곡하면서 한사코 자리를 뜨지 않자 오랑캐도 감탄하여 해를 입히지 않았다고 전한다.
관서대장군(關西大將軍) 강원로(姜元老)를 파조로 하고 있다. 그의 조부는 고려 중기 판문하시중(判門下侍中)을 지낸 강원용이며, 보문각직제학을 역임한 강기문(姜起文)이 친부이다. 후손들에서 많은 문하시중이 배출되었는데, 그중 전객령 문하시중을 역임한 강윤보(姜允輔)는 포은 정몽주와 도의교(道義交)를 맺기도 했다. 그는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해버렸다. 또 9세손 강행(姜行)은 세조 때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기도 했다.
은열공파는 고려 때 강감찬 장군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귀주대첩에서 거란을 물리친 은열공 강민첨을 중시조로 하는 파이다. 강민첨은 고려 광종 14년에 진주에서 태어났다. 현종 때 동여진(東女眞)이 영일과 청하로 쳐들어오자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였다. 또 1018년에는 거란군이 고려를 침입하자 강감찬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패배한 소배압의 군사가 다시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추격하여 자주(慈州)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공으로 응양상장군이 되고 일등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이듬해 지중추사 병부상서가 되었다. 시호는 은렬이다.
그의 후손으로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평론가로 유명한 강세황(姜世晃)이 있다. 그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시·서화에 열중하였고, 영조의 권유로 61세에 들어서 관직에 나가 병조참의와 한성부판윤을 지냈다. 그는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진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풍속화·인물화를 유행시켰다. 그의 제자가 바로 김홍도이다.
그의 후손으로 강이오와 강이중은 혼천시계를 제작했으며, 강이오의 아들로 한성판윤을 지낸 강윤(姜潤)과 강건 형제는 휴대용 해시계(앙부일구)를 만들었다. 또한 그들 아들들도 앙부일구를 제작했다.
인헌공파는 삼한벽상공신 여후(三韓壁上功臣呂侯) 강궁진을 파조로 하고 있다. 강궁진은 고려를 건국할 때 태조 왕건으로부터 삼한벽상공신으로 봉해졌으며 여후(呂侯)로 있었다.
강궁진의 아들이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강감찬이다. 강감찬은 임헌복시(任軒覆試) 갑과에 장원급제한 인물로 거란 10만 대군을 귀주에서 전멸시겼다. 이에 후손들이 강감찬의 출생지인 금천을 따서 인헌공파를 ‘금천강씨’로 부르기도 한다.
인헌공파의 인물로는 조선 인조 때 우의정 세자부(世子傅)를 지낸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期)가 있다. 그의 딸이 소현세자의 빈이 되는 민회빈 강씨이다. 소현세자가 독살을 당하고 그가 사약을 받게 되자 그의 아내와 친모, 4형제가 모두 사돈인 인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들들 또한 제주도로 귀양 보내져 생을 마감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진 의사 강우규도 인헌공파의 후손이다.
제주도의 입도한 진주 강씨는 각각 1418년 태종 18년 강윤희(姜允熙) 공이 양녕대군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유배를 왔으며, 1436년 세종 18년에는 은둔생활을 위해 강인덕(姜仁德) 공이 입도를 하였고, 1506년 연산군 12년에는 갑자사화를 피해 강철(姜哲) 공이 입도하였다.[3]
강윤희(姜允熙)
중시조 은렬공 강민첨의 제 13세손으로, 진주에서 출생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학관을 역임하고, 이어 형조좌랑과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대사헌으로 역임하고 있던 1418년 태종 18년, 양녕대군의 폐출에 반대하다가 제주에 유배되었다. 당시 제주목 납읍에 정착하였고, 입도 후에는 학덕을 펼쳤다. 대정 일대에 후손들이 많이 살아 대정파 혹은 창강(倉姜)이라 불린다.
강인덕(姜仁德)
중시조 은렬공 강민첨의 제 15세손으로, 1406년 태종 6년에 출생하여, 은둔생활을 위해, 1436년 세종 18년에 제주도에 입도 하였다. 제주목 북포촌에 정착을 하여 학문에 힘썼고, 염통공악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묘는 상여오름 남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염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염통뫼라고 부르던 것에서 염통악파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애월읍 어도리(1993년 봉성리로 개칭)에 집성촌이 있어서 어강(於姜)이라고도 부른다.
강철(姜哲)
중시조 박사공 강계용(姜啓庸)의 11세손으로, 성종 중엽 한양에서 출생하여 문과에 급제하여 진용교위(進勇校尉)에 올랐다. 1506년 연산군 12년에 갑자사화로 재종형(再從兄) 대사간 강형(姜詗)이 화를 입자, 전라도 완산으로 피신했다가 멸문지화를 면하기 위해 제주로 입도하였다. 제주목 오라리에 정착하여 후진 교육에 힘썼다. 애월읍 물메오름, 수산봉(水山峰)에 묘가 있는데, 이 수산봉을 따서 수산파 혹은 수강(水姜)라고 한다. 입도조인 강철의 조부인 강윤이 정랑공이어서 정랑공파라고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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