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루니 수도회
교회와 베네딕도 수도원 개혁의 필요성을 모두가 느낄 때,
가장 앞장선 것은 수도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평신도라고 할 수 있는 아퀴타니아의 공작이었던
굴리엘모 1세 (893 – 918)의 생각에서부터였습니다.
이 사람은 당시 수도원의 부패는 황제나 영주 등 세속의 간섭과 함께
수도자의 소유욕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중부지역 클루니에 있는 자기 사냥터 땅 위에 수도원을 세우면서
권력자들에게 받는 토지는 온전한 봉헌이어야지 절대 봉토적 의무를 가지지 말아야 하며,
수도원장을 뽑는 선거권은 오로지 수도자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을 교황 직속 하에 두어 세상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고,
노동과 필사, 그리고 공동 전례의 중요성을 담은 개혁 의지를 밝혔습니다.
이 수도원은 1대 아빠스 성 베르노부터 시작하여 성 오도, 성 마이마르,
성 마졸로 등 훌륭한 대수도원장들이 등장하면서
10세기와 11세기에 걸쳐 수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특히 2대 아빠스 성 오도는 베네딕도 수도 규칙서 안에서
침묵과 고행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기도를 위해서 전례를 강조하였고
이것은 전례 음악과 함께 다양하고 장엄한 전례의 발전도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이 장엄 전례의 중요성이 너무 강조되면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수도원 성당은 점점 커지고 화려 해져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개혁 수도원의 탄생과
클루니 수도원의 쇠퇴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클루니 수도원의 개혁은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클루니 수도회를 지나면서 수도자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좀 더 엄격한 생활이 필요하다는 것을 유럽 곳곳에서 느끼게 됩니다.
이 엄격한 생활에 대한 열망은 초기 사막 은수자들의 삶에 대한 회귀였고,
이것은 수비아코 동굴에서
베네딕도의 하느님을 찾던 삶에 대한 재조명이었습니다.
은수자적 삶을 명확히 알고 사셨던 베네딕도 성인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공동체적 삶이 너무 강조되고 수도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수도원의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이 커져버리는 불균형이 점점 커져만 갔고,
애독 (Solitudine)(1)이라는 적극적이고 선택적인 삶으로
다시 한번 수도원 운동의 치유를 가져왔던 것이
클루니 이후 또 다른 새로운 수도회의 등장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시토회와 카르 투시도회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에서는 까말 돌리회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수도회들입니다.
시토 수도회
클루니 수도회의 외적 성장과 부의 축적으로 인한
또 하나의 개혁 수도회가 발생하는데,
바로 몰렘의 로베르투스가 1098년에 설립한 시토회입니다.
로베르투스는 원래 클루니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지만
베네딕도의 규칙만으로는 수도 생활에 부족함을 느껴
더욱 엄격한 금욕주의를 찾아 시토에서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2대 수도원장으로 선출된 알베리쿠스는
검은색으로 물들인 수도복을 입던 베네딕도 수도회와는 다르게
흰색의 수도복을 입게 하여 이때부터 ‘흰옷의 수도자’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 흰색은 그 후 개혁 수도자들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애덕과 자급자족이라는 이상적인 삶을 추구하였고
파스칼리스 2세 (1099-1118) 교황 때 시토 수도원 설립을 승인받아
교황권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자급자족이라는 이상적인 삶은
초기 시토회에 경제적인 어려움을 주게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1090-1153)가 30여 명의 형제들과 이 수도회에 들어오면서
유럽과 이탈리아로 퍼져 나가며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시토회는 기부를 받지 않고 육체의 노동으로 황무지를 개간해서
자급자족의 삶을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세속의 사람들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수도원 공동체의 삶이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도시에서 떨어진 곳에 수도원을 세우면서
은수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적절하게 혼합한 생활을 실천하였습니다.
이것을 위해 베네딕도 규칙을 기본으로 하면서 공동 전례와 개인의 묵상
그리고 육체노동의 조화를 이루려고 하였습니다.
삶의 절제와 검소함을 중요시 여겼고 수도원 건물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엄격하게 단순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시토회의 고딕 양식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성당 안에 그림이나 조각상, 장식을 두지 않았고 전례도 클루니와는 다르게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그레고리안 성가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자들이 생활하는 공간도 수도원 사각 정원 (chiostro)을 중심으로
동선을 최소화시켰고 그 둘레에 필요한 장소들을 만들어
개인과 공동체라는 이중의 생활을 합리적으로 이루어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시토회 정신 중에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애덕 (Caritas)’ 이었습니다.
1119년 교황 갈리스토 2세에 의해 인준된
‘애덕의 헌장 (Charta Caritatis)’이 회헌이 될 정도로
형제들과의 애덕을 통해 수도자 서로의 도움뿐만이 아니라
모(母) 수도원의 연결고리로 한 자(子) 수도원을 만들어
서로 협력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수도회 혹은 연합회라고 현재 불리는 이름으로
발전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또한 베네딕도 규칙에 따라 수도원 밖의 사람들과도
애덕의 삶을 실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순례자들 혹은 방문자들이 먹고 잠을 잘 수 있는
포레스테리아 (foresteria)라는 장소를 수도원 밖에 만들었고
아픈 사람들의 치료를 위한 약국과 병원도 만들었습니다.
18세기에 오면 이 시토회에서 더 엄격한 삶을 살려고 하는 개혁 수도회가 나오는데
프랑스 트라 페라는 지역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트라피스트라고도 하고,
더 정확하게는 엄률의 시토 수도회라고 부릅니다.
시토 수도원 건축 일반
시토 수도원 건축 양식을 ‘지나가는 양식’이라고 부릅니다.
로마네스크의 풍부한 양식을 클루니 수도회가 보여주었다면,
이 수도회에서 갈라져 나온 시토회는 로마네스크에서 시작했지만
고딕으로 건축을 완성하였기 때문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서에는 수도원 건축에 대한 방법과
구조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수도원 밖에서 필요한 것을 찾지 않을 만큼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수도원에는 가능한 한 필요한 모든 것, 즉 우물, 물레 방아,
밭이나 여려가지 작업장들의 일들이
수도원 내부에서 이루어지도록 배치되어야 하며,
그래서 수도승들이 밖에 돌아다닐 필요가 없게 할 것이니,
이는 그들의 영혼에 아무 이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베네딕도 규칙서 66장
이러한 베네딕도 말씀에 기본을 두면서 시토회는
고유의 영성과 가난함을 살 수 있도록 토지의 선택, 튼튼한 건물,
통일된 양식, 균형 있는 건물, 공간의 나눔과 상호 기능성, 단순함, 엄격함,
장식이 없는 절제성 등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두고 수도원을 만들었습니다.
클루니 수도회는 마을이 있고 순례자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수도원을 세워
경제적인 이익과 수도원 생계를 유지하려고 했다면
시토회는 사람들이 없는, 오로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없는
계곡 사이의 땅, 하지만 생명과 노동의 근원이 되는 물이 풍부하여
자급자족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하였습니다.
물이 없을 경우에는 인공 수로를 만들어 가까운 곳에서 물을 끌어 사용하였고,
이 물로 양어장도 만들어 육식을 할 수 없는 시기에
수도자들이 물고기로 음식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대표적인 수도원이 바로 다음에 설명할 시토회의 포싸노바 수도원입니다.
결국 클루니 수도원 건물은 순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전례적 아름다움을 많이 표현하려 하였다면,
시토회 건물은 클루니회와는 반대로 수도자들의 영적인 마음을
흩트려 버릴 수 있는 전례적 아름다움을 포기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르나르도 성인이 설계했던 수도원이 건축의 표본이 되었고
이탈리아의 시토회 수도원도 이 모델에 맞춰 건축하게 됩니다.
아래 보시는 도면은 일반적인 시토 수도회 건물의 평면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성당 2. 제대와 소성당 3. 죽음의 문 (수도원 묘지로 나가는 문) 4. 제의실 5. 세면대 6. 성당으로 가는 계단 7. 성당 봉쇄 구역 선 8. 기도 수도자석 9. 환자석 10. 기도 수도자 회랑 입구 11. 노동 수도자석 12. 노동 수도자 성당 출입구 13. 정원 14. 고문서 보관실 15. 사각회랑 16. 규칙소 17. 침실로 가는 계단 18. 봉쇄 수도자 침실 19. 공동 화장실 20. 담화실 21. 농장으로 가는 통로 22. 필사실, 도서실 23. 지원자 실 24. 벽난로의 방 25. 봉쇄 수도자 식당 26. 독서대 27. 부엌 28. 식료품실 29. 노동 수도사 담화실 30. 노동 수도사 식당 31. 통로 32. 창고 33. 계단 34. 노동 수도사 침실 35. 공동 화장실
물이 있는 정원을 중심으로 집을 지었던 고대 로마인의 빌라처럼
수도원 건물과 장소들은 사각형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고
정원 지하에 빗물을 모아두는 저수조를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정원 안에는 식당과 가까운 곳에 저수조의 물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 혹은 세면대를 두었습니다.
제대를 동쪽으로 두고 있는 성당은 사각 정원의 북쪽 편에 세웠습니다.
그래야 북쪽에서 오는 찬 바람도 막아주고
하루 중 태양빛을 막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에는 먼저 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두 부류의 수도자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봉쇄 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공부, 성서 필사 등의
손노동을 하면서 더욱 엄격하게 사는 수도자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콘베르시로서 기도 생활보다는
노동에 더 중점을 두었던 평신도 수도자들입니다.
이들은 같은 수도원 안에 있었지만 사용하는 구역은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정원을 중심으로 동쪽 1층에는 규칙서의 방, 회합실, 필사실이 있었고
2층에는 봉쇄 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의 방이 있었습니다.
반대편 서쪽에는 1층에 농기구나 곡식들을 두는 창고와 식당,
그리고 2층에는 콘베르시들의 방이 있었습니다.
정원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봉쇄 수도자들의 식당과 부엌, 식료품실 등을 두었습니다.
건물이나 장소에는 조각, 미술, 장식
그리고 과한 구조물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시토회의 미학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절대적 가난을 추구했던 이들에게 이러한 것들은
수도자의 눈과 마음을 빼앗아 하느님께 향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도자들의 눈은 영적 독서를 통해서, 마음은 관상을 통해서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절대적 가난이 아닌 것은 그들의 수도 생활을 방해하는 부와
가까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애덕 실천이 회헌이었던 수도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넘치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루니 수도원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 세워졌기 때문에
이탈리아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음 장부터는 이탈리아에서 많이 발전한 시토회 수도원 중에 두 곳
그리고 카르투시오회와 카말돌리 수도원을 중심으로
하느님을 향한 그들의 열정적인 삶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1) ‘홀로 있어서 외롭다’라는 의미의 고독 (孤獨)이라는 말은
내가 원치 않아서 생겼다는 부정적 의미가 강하지만
수도자들이 선택하는 홀로 있음은 ‘홀로 있어서 좋다’라는
긍정적이고 자기 선택적 의미의 표현이다.
[출처] 수도원 개혁의 시작|작성자 Roma Vian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