偶像의 형이상학 / 윤형돈
인간은 본능적으로 누군가를 떠받들고 싶어 한다. 불안한 시대일수록 더욱 그렇다.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대신 길을 정해줄 존재를 찾는다. 그래서 우상은 돌이나 금속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말 잘하는 지도자, 이름난 시인, 권위를 가진 강사, 심지어 작은 문학 모임의 중심인물도 어느새 우상이 된다.
본래 문학은 자유로운 영혼의 언어다. 시는 한 인간이 자기 고독과 싸우며 길어 올린 내면의 목소리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학 교실이 창조의 공간이 아니라 권위의 제단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작품보다 사람을 숭배하고, 시의 깊이보다 줄 서기를 배우며, 언어의 자유보다 눈치의 기술이 우선되는 순간이 있다. 시교실 운영 주체들조차 균형을 잃고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질서를 세우기 시작하면, 공동체는 문학이 아니라 권력의 궤도를 돌게 된다.
우상숭배의 가장 큰 문제는 판단의 마비다. 사람들은 우상 앞에서 비판을 죄악처럼 여긴다. 잘못된 말에도 박수를 치고, 편향된 행동에도 침묵한다. 집단은 점점 폐쇄되고, 다른 목소리는 배척된다. 그 안에서 문학은 살아 있는 사유가 아니라 충성의 장식품이 된다. 시를 배우러 왔던 사람들은 어느새 한 사람의 표정과 기분을 읽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생각해보면 우상은 숭배받는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숭배하는 사람들의 결핍이 만들어낸 그림자이기도 하다. 자기 안의 빈자리와 열등감,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강할수록 사람은 거대한 이름 뒤에 숨고 싶어 한다. 그러나 문학은 원래 홀로 걷는 길이다. 진짜 시인은 누군가의 그림자가 되는 순간 자기 언어를 잃는다.
성경에서 금송아지 사건은 상징적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보다 눈앞의 형상을 더 쉽게 믿는다. 보이지 않는 성찰보다 보이는 권위를 더 의지한다. 그러나 우상은 결국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오히려 두려움과 맹종 속에 가둔다. 우상이 커질수록 개인의 영혼은 작아진다.
진정한 스승은 자신을 숭배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제자가 자기 목소리를 찾도록 물러선다. 훌륭한 지도자는 사람을 자기 주변에 묶어두지 않고 스스로 서게 만든다. 문학 또한 마찬가지다. 좋은 시는 독자를 특정 인물에게 예속시키지 않고, 자기 내면을 향해 걸어가게 한다.
우상의 형이상학은 결국 인간 욕망의 문제다. 누군가는 군림하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기대고 싶어 한다. 그 욕망이 결탁할 때 공동체는 병든다. 문학이 살아남으려면 먼저 우상의 제단을 허물어야 한다. 시는 권력의 언어가 아니라 자유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인간은
크든 작든
욕망이라는 뼈대로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