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담쟁이와 동무 생각 >/구연식
사람들은 나름의 특이한 지형지물에 얽힌 사연들 때문에 그곳을 지나가거나 접하게 되면 그 옛날의 추억이 되살아난다. 어렸을 때의 경우는 세월이 훨씬 지나가도 비례하여 더 뚜렷해지고 지워지지 않는다. 아마도 세상에 태어나서, 순박한 가슴의 하얀 도화지에 그려진 수채화처럼 처음으로 느껴본 것이어서 그런가 보다.
우리 마을 부잣집 대문과 울타리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능소화가 만발하여 어렸을 때는 부잣집 꽃으로만 기억되었다. 그러나 담장만 있으면 악착같이 달라붙어 기어오르는 담쟁이는 누구네 집이든 다 있었다. 고샅길 모퉁이 담벼락에는, 유난히 푸른 담쟁이덩굴이 덮여있어, 잎사귀가 무성한 여름에는 담장을 볼 수 없고, 겨울에만 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담쟁이처럼 얽혀서 놀던 또래 남자 친구들은 고향을 떠났어도 여러 계(契)의 모임으로 얼굴도 보고 소식도 알고 있다. 그러나 여자 또래들은 결혼을 하면 멀리 떠나버려 가끔은 소식이 궁금해도 알 수가 없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마저 멀어진다고 또래 여자들은 그 옛날로만 생각되지, 세월에 변해버린 모습은 상상이 안 된다.
내가 자주 지나가는 골목길 담장은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도 높아서 집안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끔 환호작약하는 예쁜이 웃음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그 담쟁이 담 길을 걸어갈 때는 귀를 쫑긋 세우고 발걸음을 죽여 가며 걷기도 했다. 그것이 이 나이에도 몸에 배었는지 지금도 그 길을 걸어가면 습관적으로 발걸음을 멈칫거리며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더구나 담쟁이 담 옆에는 조그마한 언덕이 있었고 예쁜이네 남새밭이 있어 예쁜이가 가끔 여름 채소를 뜯으러 나올 때도 있었다. 가곡 「동무 생각」은 1922년쯤에 이은상과 박태준이 같은 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박태준이 이은상에게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은상이 그것을 시로 썼다. 이 시에 박태준이 곡을 붙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추억에 좋은 친구와 좋은 노래라고 생각된다.
박태준은 대구가 고향이어서 외국인 선교사들이 언덕에 담쟁이를 많이 가꾸어 주택들의 벽면이 푸른 담쟁이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써 ‘푸른 담쟁이덩굴’이란 뜻의 청라(靑蘿) 언덕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청라 언덕에서 어느 소녀에게 가슴앓이 하던 소년 박태준 님을 생각하면서 나도 담쟁이덩굴 언덕에 새겨진 「동무 생각」을 불러본다.
시골에서 오래 살아왔던 사람들은 담쟁이의 낭만보다는 귀찮은 것으로 싫어하기도 한다. 하절기에는 담쟁이를 타고 혐오스러운 뱀이 기어오르는 경우가 있고, 담쟁이 덩굴 속에는 작으면서 매서운 쌍살벌들이 연꽃 열매 숭어리 같은 벌집을 짓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어쩌다 있을 뿐이다.
봄에는 지난겨울까지 엎드려 잠만 자고 있던 청개구리 발가락 빨판 같은 줄기에서 뾰족하게 새싹이 나온다. 그리고 유아원의 아기들처럼 줄을 지어서 담 머리를 넘고 있다. 조금 지나면 담쟁이 새잎이 커지면서 햇김에 참기름 발라 놓은 것같이 햇빛에 반짝거린다. 이파리마다 입사각과 반사각이 서로 달라 햇빛이 있는 한 온종일 눈부실 정도로 빛 튀김은 계속된다.
여름에는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시원하게 식혀주며 통풍도 잘되는 수만 개의 녹색 파라솔을 꽂아 놓아서 눈도 마음도 몸도 시원함이 저절로 나온다.
가을에는 먼 산을 나가지 않고도 뜰 안에서 각양각색의 수채화 물감에 첨벙 적신 담쟁이 이파리들이 평면의 절벽에 색깔도, 모양도, 의미도 다른 설치미술가의 퍼포먼스의 작품을 떠올리게 한다.
겨울에는 촘촘히 엮은 그물망으로 에워싸고 추위를 막아 주며, 혹시라도 얼어서 무너질 담벼락을 요리 저리로 얽어매어 끌어안고 있어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함을 보여준다.
담쟁이가 수명을 다했다고 느꼈을 때는 큰 소나무에 기생하면서 소나무 진을 빨아먹는 송담으로 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팔뚝만 한 송담 줄기를 끊어 내려 소나무를 살리고 영약(靈藥) 성분이 가득한 송담 줄기는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담쟁이 하면 미국의 작가 O. 헨리가 발표한 단편 소설「마지막 잎새」를 떠올리게 한다. 폐렴 투병 중인 존시는 창밖 담쟁이 잎이 모두 떨어지면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알고 아래층에 사는 원로 화가인 베어먼은 평생 못 그린 걸작을 존시를 위해서 비바람에 모두 날아간 담쟁이 한 잎을 담장에 붓으로 비바람 맞으며 밤새 그리면서 병을 얻어 존시를 살리고 최후의 걸작을 남기고 죽는다.
담쟁이에서 청라(靑蘿) 언덕의 박태준의 사랑 이야기를 이은상의 작사와 박태준 작곡으로 엮어 만든 가곡 「동무 생각」은 첫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평생 걸작 하나 못 그린다고 멸시당하며 살았던 원로 화가인 베어먼은 여자 화가인 존시를 위해 마지막 명작 떨어지지 않은 담쟁이 잎을 그린 「마지막 잎새」가 오버랩 되어 다가온다.
담쟁이는 식물들이 살기에는 가장 척박한 바위나 담벼락에 틈새만 있으면 빨판 같은 뿌리를 내리고 때로는 거꾸로 매달려서 악착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최후에는 자기 때문에 희생되었던 것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간다. 환경만 탓하는 인간들의 삶의 철학을 생각하게 한다.
나에게 담쟁이 골목 언덕길은 참다운 삶을 일깨워주는 안내판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소꿉친구 예쁜이가 어른거려 더 늙기 전에 꼭 만나보고 싶다. 마지막 잎새가 되기 전 앙상한 담쟁이 줄기마다 하얀 개미알에 센티멘털한 문학 소년으로 그간 못다 한 사연을 빼곡히 적어 모두 붙여 「동무 생각」이 울려 퍼지게 하고 싶다.(2022.8.20) |